상주문화/상주문화 24호

상주학. 상주문화 제24호. 국채보상운동과 상주인의 활동

빛마당 2015. 3. 28. 21:56

국채보상운동과 상주인의 활동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목 차

1. 머리말102

2.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배경104

3. 국채보상운동의 경위106

4. 국채보상운동의 언론 활동과 주요인사111

5. 국채보상운동의 결과와 좌절125

6. 상주의 국채보상운동126

7. 맺음말145

국채보상운동과 상주인의 활동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1. 머리말

삼가 아룁니다. 무릇 신민이 충으로 행하고 의를 숭상하면 이로써 그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편안을 누리며, 불충하고 의가 없으면 이로써 그 나라는 망하고 백성이 멸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음이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구주(歐洲)에서도 부강한 나라와 멸망한 나라들

위의 역사는 모두가 충의를 소중히 하고 숭상하는지 여하에 기인하는 바라 ……

지금 우리의 국채 1,300만원은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이를 갚으면 나라는 존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 추세이라.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려운 형편인 즉 장차 삼천리강토는 우리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되지 못할 것이라, 국토란 한번 가면 다시 돌이 킬 수 없는 것이니, 우리가 어찌 월남 등 멸망한 민족의 꼴을 면할 수 있으리오 ……

그러나 국채를 갚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다지 힘이 들지도 않고 재산을 축내지 않고서도 돈을 모으는 방도인 것이다. 2천만 동포가 석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일이라 ……

아! 2천만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사상이 있는 이가 있다면 이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들이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을 부치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원하노니, 대한의 신민과 여러 군자는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여 알려서, 모르는 이 한 사람도 없게 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성명(聖明)에 보답하고, 아래로 우리 강토를 유지하기를 천만 행심이로다.

광무(光武) 11년(1907) 2월 일

발기인

대구광문사(廣文社)

사 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

회 장 박해령(朴海齡)

부회장 김광제(金光濟)

회 원 장상철(張相轍), 강영주(姜永周), 심정섭(沈廷燮),

김우근(金遇根), 서병오(徐丙五), 윤하선(尹夏璿),

정재덕(鄭在悳), 이종정(李鐘禎), 길영수(吉永洙),

이우열(李遇烈), 강신규(姜信圭), 정규옥(鄭圭鈺),

추교정(秋敎廷)

위의 글은 대구의 서상돈(徐相敦)과 김광제(金光濟)가 중심이 되어 발표한 국채보상취지문으로 대한매일신보(1907년 2월 21일)와 대한자강회 월보 제9호에 올린 글이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정치 군사적 침략과 아울러 차관이라는 교묘한 수법으로 경제적 침략을 단행하자 이에 대항해 경제적 자주권을 회복하여 국권을 수호하자는 천둥소리같은 국민적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이다. 이 애국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어 위로는 고종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재중과 기생(妓生) 걸인에 이르기 까지 한마음 한 뜻으로 우리 민족의 저력을 발휘 하였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 큰 자취였다.

본고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의 대강을 먼저 살펴보고 이 역사적 사실에 우리 상주 사람들이 참여한 내용과 실적을 밝히므로서 국민 된 사람으로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되새김과 아울러 상주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한다.


2.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배경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여 두 차례에 330만원의 차관이 이루어 졌다.

이후 1904년부터 2년에 걸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전을 하게 되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지만 사실상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1904년 8월,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에 의해 대한제국에 일본인 제정고문이 파견되고 일제의 경제침략의 일환으로 소위 “화폐정리”라는 경제책동에 그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억지로 떠넘긴 화폐정리 자금채 300만원, 국고증권채 100만원, 금융자금채 150만원, 제1차 기업자금채 1,000만원 등 도합 금액 1,650만원 중 당시까지 실제로 도입된 차관액은 1906년까지 1,150만으로 불어났고 연 6.5%에 이르는 높은 이자율에 따른 이자액을 합한 총 외채는 1,300만원에 달하였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 규모는 1906년의 경우 세입 총계가 1,318만 9,336원이고 세출은 1,395만 523원으로 1,300만원의 외채는 정부의 1년 예산에 해당되는 거액이었으니 당시 정부 예산으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형편이었다.

나라의 재정이나 개인의 경우 빚이 있다는 것은 재정과 가계가 허약하다는 것이고 1년 수입만큼의 빚이 있다는 것은 빚쟁이에게 경제 예속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안타가운 사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한국 정부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여러 가지 내정을 간섭해 오던 일제는 만국평화회의에 우리 정부요인(이준, 이상설)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한 것을 트집 잡아 더욱 강력한 침략행위를 강구하였고 1907년에는 군대를 해산하고 관료의 임명권까지 장악한 강압적 협정인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 이라고도 함)을 체결하게 되었다. 결국 나라에 힘이 부족하여 차츰차츰 국권을 빼앗기기 까지 한국 민족은 오래도록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한번 뺏긴 국권을 다시 찾는 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국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한국민족의 국력과 실력이 부족하였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인식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구한말 애국 계몽운동은 실력을 배양하여 실력에 의해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정치, 교육, 경제, 사회, 문화, 학술, 언론, 종교, 문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일어났다. 즉 개화자강파(開化自强派)의 애국운동이 1904~1910년 사이에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일어났으며 국채보상운동은 경제, 사회, 정치부문의 애국 계몽운동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애국운동은 부문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성심에서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그 가운데 국채보상운동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그 반향이 커 짧은 기간에 나라 전역에서 분연히 일어난 민족적 문화운동이요 채무자의 의무를 다하는 떳떳한 경제도덕운동 이라는데 더욱 큰 뜻이 있다고 본다.


3. 국채보상운동의 경위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음력 병오년 12월 16일) 대구의 광문사(廣文社)부사장이었던 서상돈(徐相敦)이 처음 발의하여 시작되었다. 광문사는 1898년 황국협회의 기관지였던 시사총보(時事叢報)를 접수하여 시대에 맞도록 개화자강(開化自强) 노선에 따라 개편한 출판사로서, 면목을 일신하여 장지연(張志淵) 현채(玄采) 등의 지도하에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의 저서를 출판하였던 출판사였다.

광문사에는 산하에 광문사문회(廣文社文會)라는 단체가 있어 주로 독서와 시작(詩作) 교육 등을 통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바 있었는데 발의 당일 이날에 회 명칭을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로 개명하기 위한 특별회가 개최되어 회장에는 박해령(朴海齡) 부회장에는 김광제(金光濟)가 선임되었다.

이 자리에서 대동광문회의 회원이며 광문사의 부사장인 서상돈(徐相敦)의사가 일제의 국채 1,300만원을 갚아 버리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여 참석자 모두의 동의를 얻은 것이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발의내용 요지는 “지금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일제의 국채 1,300만원을 갚을 수 없는 형편이고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하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였으니 우리 2천만 동포가 3개월간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매월 한 사람당 20전씩 의연금으로 내면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자기가 먼저 앞장 서겠다고 하면서 800원(현재가치 2,080만원 정도)의 의연금을 내어 놓았다. 이에 따라 참석한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하였고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는 의결을 실행하는 것이 귀한 것인즉 당장에 자기의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없애버리고 3개월분의 담배 값 60전을 내어 놓았다.

이에 회원들이 회장의 결심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2,000여 원의 의연금을 모으게 되었으니 참으로 결연한 의지를 엿 볼 수 있다 하겠다. 대동광문회는 1907년 2월초 전국에 국채보상 취지서를 반포하고 이어서 1907년 2월 21일 대구의 북후정(北堠亭 ※현재의 대구 시민회관자리)에서 국채보상 대구 군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서상돈 등 수 백 명의 유지를 포함하여 수 많은 인사들이 참석하였는데 참석자들의 호응은 가히 열광적이었고 그 자리에서 당장 의연금을 낸 것이 몇 백원이었다고 한다. 의연금을 낸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술파는 주모, 기생, 영세상인 걸인 등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일체 단결된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 하였으니 가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이 대회가 개최되고 경북도내 국채보상 도(都) 총회가 결성되고 그 열기는 도내 전체로 퍼져 41개소에 이르는 국채보상 의연금 수합소가 자발적으로 설치되었으며 특별히 여성들의 참여도 활발하였는데 여성들의 분신(分身)이라 할 만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금가락지 등 패물(佩物)을 의연금으로 내어 놓자는 대구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가 결성되어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즉 대구 군민대회는 국채보상운동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기폭제가 되었고 경향 각지에서 때를 기다렸다는 듯 의연에 참여하는 단체들이 속속 조직되었다. 같은 해 2월 22일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가 출범하여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연락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서울 안에 6개소의 수전소(收錢所)를 두었다. 기성회는 조직과 함께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발표하였는데 그 요강은 다음과 같다.

1. 본 회는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원을 보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1. 보상 방법은 국민의 의연금을 모집하는 것으로 함.

1. 본 회에 의연금을 바치는 사람은 본 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고 씨명(氏名) 및 금액을 신문에 공포함.

1. 본 회와 목적을 같이하는 단회(團會)는 서로 연합하여 목적을 달성하는데 힘쓰기로 함.

1. 의연금은 수합하여 위의 액수에 달하기까지 신용 있는 본국 은행에 임치함. 단, 수합금액은 매월 말 신문을 통하여 포고함.

1. 위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 해산함.

서울에 국채보상 기성회가 조직되고 전국적 연락체계가 갖추어지자 각 지방의 반향은 폭발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함경도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8도 전국에 보상단체가 설립되었다. 그 해 3월 까지 대구국채보상회를 위시하여 서울과 서도(西道), 평양, 동래, 창원, 마산, 경남, 전북, 호서, 관서, 춘천, 제주, 전주, 재령, 단천, 옥천, 은율, 금산, 수안 등 27개 지역이 먼저 닻을 올렸다.

대구매일신보가 2월 21일 대구의 국채보상 취지서를 머리기사로 보도한데 이어 2월 23일자에 서울 배오개(현 종로3가)에 사는 박승직(朴承稷)이 70원을 모집하여 광문사에 기부하였다는 첫 의연기사가 실어지고 전국의 운동을 독려하는 기성회와 연합회의소 이외에 여러 단체가 조직적으로 의무금 모집에 앞장서게 되었으며 부인들도 이에 뒤질세라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와 부인 감찬회 여성 의성회(義誠會) 등이 조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국채보상 발기문을 게재한데 이어 황성신문, 만세보 등 여러 신문들이 의연 소식을 연일 보도하자 조정에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월 27일 대한매일신보에는 고종 황제가 담배를 끊고 이 운동에 참여하였음을 알리는 기사를 실어 국군(國君)의 의지를 만천하에 알림으로서 이 운동이 국가적 국민적 의거임을 은연중 공인하게 되었음을 뜻함에 따라 서민 대중들의 열기와는 달리 냉소적 태도를 취했던 고관 대작들도 함께 단연 동맹에 참여하여 비단옷입기, 가마타기 등 사치 생활을 절제하였다는 기사를 실어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이 운동이 확산되고 있음을 알렸다.

국내외 국채보상운동은 해외의 동포와 외국인들도 참여하였다. 일본 유학생 800여 명은 이 운동에 감동하여 유학생 총회를 개최하고 단연과 단주로 절약한 의연금을 보냈으며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잴래스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서를 작성하여 대한매일신보에 의연금을 보내왔고 서양인과 일본인 교사도 의연금을 낼 정도였다.

함경도 단천군의 경우는 “국채보상 가”라는 노래를 만들어 군민들의 호응을 결집하였는데 그 가사의 내용을 보면 애국심이 용솟음치는 간절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국채보상 가”

애국심이여 애국심이여 대구 서공 상돈일세

1천 3백만원 국채 갚자고

보상동맹 단연회 설립했네

면실하는 마음 발양하니 대한국민 분명하도다

지금 우리 국가 간난(艱難)한데 누가 이런 열성 가질 건가

대한 2천 만 민중이 서상돈만 사람인가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 한국 백성 아닐런가

외인 부채 해마다 이식 불어나니

그 많은 액수 어이 감당하리

적의 공격없이도 나라 자연 소멸되면

아아 우리 백성들 어디 가서 사나

이 나라 이 강토 없게되면 가옥 전토는 뉘 것인고

여러분 ~ 때를 잃지 말고 보상하오

국채 다 갚는 날 오면 기쁘고 즐겁지 않을 손가

힘씁시다.~

우리 단천군 여러분이여

이와 같은 열화와 같이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지방 고을마다 취지서를 결의하고 1907년 7월까지 73개소에 보상소가 설립되었다.


4. 국채보상운동의 언론활동과 주요인사

가. 언론활동

이 운동이 전국적 국민운동으로 확산된 것은 언론 기관이 그 동력의 추진체였고 주도자의 역할을 하였다. 우리의 언론은 개화와 국민의 계몽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출발하였다. 국민의 의식을 개혁하고 외국의 문물을 소개하는 한편으로 국제 정세를 보도하여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2월 21일 대구 북후정에서 대구군민대회가 열리고 같은 날에 서울의 대한매일신보가 운동의 취지서를 실었다는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신문과 긴밀한 연계를 지니고 언론의 후원을 얻어 추진할 것을 계획하였음을 입증한다.

대한매일신보는 2월 21일에 이어 27일자로 서울의 국채보상운동의 기성회 취지서를 실었고 28일자에는 1면 머리 논설란에 “국채보상에 대하야 경고동” 이라는 신문사 사원 심의철의 한글 전용 기고문을 실었으며, 3월 1일에는 “한인충애(韓人忠愛)”라는 논설을 실어 이 운동을 지원하였다.

대한매일신보 뿐 만 아니라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이 일제히 이 운동에 참여하여 열화와 같은 국민운동에 촉매제가 되었다. 2월 25일자 황성신문에는 “단연보국채(斷煙輔國債)라는 논설을 실었고, 만세보 2월 28일자에는 “국채상환의금모집”이라는 논설을 실었으며, 제국신문은 2월 28일부터 3월 4일까지 5일간 계속하여 “국채보상금모집에관한사정”이라는 연속 논설을 실었다. 이 운동의 취지를 널리 전파한 것이 신문이었을 뿐 만 아니라 신문사가 중심이 되어 의연금을 거두는 역할까지 하였다. 운동의 발단은 민간이었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기관은 언론이었다.

이 운동에 참여하여 의연금을 낸 사람들은 모두 신문에 알려 수시로 일어난 내용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신문에 실은 내용 중에 심금을 울린 감동적인 일들이 속속 알려 짐에 따라 국민적 합심의 촉매제가 되기도 하였다. 신문에 실린 감동적 의연의 사실 몇 편을 여기에 적어본다.

o 대한매일신보

· 1907. 2. 24일자 :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기 위하여 귀국해 있던 도산 안창호가 북미 상항(桑港) 공립협회(公立協會)명의로 금화 35원을 기탁하였다.

· 2월 27일 : 대 황제폐하께옵서 국체보상사로 인민이 단연하고 대금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애아적자(哀我赤子)가 국채를 보상하기 위하여 담배값을 모집하니 짐, 불가흡연이라

· 2월 28일 : 경성 창예동 순천가 상노(床奴 · 상머슴) 김봉길이 국채의연금 1원을 보성관수전소에 의연 하였다더라.

o 황성신문

· 5월 7일 :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매국적(賣國賊)이라 책망하니 이 아픔이 골수에 사무치는데 국채 보상에 즈음해서 단연 절식하는 사람도 많고 아이들이나 의지할 곳조차 없는 여자도 연조 하거늘 관인이라 칭하면서 좌시하다 무슨 면목으로 우리 동포를 대할꼬” 하고 타부는 몰라도 내부(內部)는 대신이하 모든 관인이 국채보상 전에는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중맹(重盟)하였다더라.

· 4월 11일 : 성주군 국채보상의무소 이승희(李承熙)씨는 그의 회갑연 비용 20원을 국채보상 의연금으로 냈다더라.

o 대한매일신보

· 5월 10일 : 부산항에 사는 기생 죽엽이가 그 동료 기생 이화, 금화, 죽선 등과 단연동맹하고 국채보상 단연금을 몇 년간 이라도 보상하기 전에는 신화 30전씩 수취소로 납상하기로 금년 정월부터 동맹하였다더라.

· 3월 2일 : 영아학교 일반생도가 단연동맹하고 심지어 사환까지 일치 감격하여 담뱃대를 부셔버린지라 이 학도들이 길을 가다 농상대신이 차위에서 여송연(呂宋煙 : 필리핀의 루손 섬에서 나는 잎담배 권련으로 독하고 향기가 좋음)을 흡(吸)함을 보고 규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황상폐하께옵서 연초를 불허 하시고 일반 인민이 모두 단연을 맹세하고 있거늘 저 매국 대신배가 독불 흡연이로다.

저 대관의 흡연은 즉 나라를 팔아 먹는 것>이라 하니 그 대신이 못들은 척하고 달아났다더라.

· 4월 10일 : 충주군에 사는 사람이 국채보상 의연금을 모집하여 상경하다가 중로에서 도둑떼에게 피탈한지라 도둑떼에 일러 말하기를 <이는 국채보상 성금이니 너희는 불과 몇 십리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한데 도둑떼가 놀라 말하기를 <이것이 국채보상 의연금인줄 몰랐노라>하고 돈을 돌려주며 10원을 보태었다더라.

· 4월 29일 : 해주읍 남문 밖에 사는 이소사는 과부로 의탁할 곳이 없이 5세 여아를 데리고 남의 집에 고용살이 하더니 품삯 60전을 미리 받아 해주 동정회(同情會)로 의연하였고 정소사는 바느질 삯 60전을 내었다더라.

· 5월 26일 : 평남 영유군 천주당에 주지하는 법국(法國 프랑스) 선교사 명약일(明若日)씨가 국채보상에 찬성하여 10원을 의연하였고, 본군 이화학교 교사 일본인 정유호빈씨는 비록 남의 나라 일이나 같은 동아시아의 나라라 하여 동정을 표하고 2원을 의연하였다더라.

· 3월 9일 : 평양 기생 18인이 신화 50전씩 갹출하여 기성회에 납부하였다더라.

· 6월 9일 : 국채보상에 대하여 2월 25일 석양에 원산항 걸인 절름발이 8인이 지팡이를 집고 엎어지듯 상의소에 와서 지화 4원을 건내면서 말하기를 “본인 등도 동포중에 하나이라 19인이 보름동안 부요한 집에 입을 달고 호화한 집에 동냥하여 전력 구걸한 돈이 겨우 4원이라” 하며 의연금으로 내어 놓으니 이러한 혈성은 과연 세계에서 처음이라 하였다.


나. 국채보상운동의 주요 인물

1) 서상돈(徐相敦)

국채보상운동을 맨 처음 부르짖은 사람은 대구광문사 부사장이었던 서상돈(徐相敦)선생 이었다. 선생은 1850년 10월 17일 김천에서 아버지 서철순과 어머니 김아가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고조부 서광수(1715~1786)는 용인 현감을 지낸 서명함의 장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에 의하여 박해는 물론 문중으로부터 파적을 당하고 이후 박해를 피하여 여러 곳을 떠돌다가 상주 청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묘소는 한때 숨어 살았던 곳으로 추정하는 상주 이안면 배모기 마을에 현존하고 있다.

이후 서광수의 후손들은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 되었고 1801년(순조 1) 신유사옥과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때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순교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 선생은 어릴 때 상주 청리에서 살았고 1859년 10세되던 해에 외가가 있던 대구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이사를 와서 장성하면서 당시 대구 천주교회 원로회장이던 서용서와 외사촌 형 김종학 등 주위 신자들과 보부상 두령(頭領, 우두머리) 최철학 등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보부상으로 출발하여 1886년경에는 대구에서 상당한 거상으로 부상하였다. 그는 큰 재산가였지만 근검절약하여 쌀밥을 절대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적극 도왔다고 하고, 봄․가을에는 창고문을 열어 수백 석의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와 같이 몸소 크게 실천한 구휼업적에 따라 1913년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대구의 수많은 걸인들이 상여 행열을 따라 가며 통곡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선생의 이와 같은 인품이 바탕이 되어 조정의 특명으로 경상도 시찰관(視察官)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대구교회 김보록(金保祿)신부를 통하여 더욱 신앙을 두터이 하고 그를 중심으로 천주교 발전에 힘썼다.

그리고 중국 등지로 국제무역을 하여 더 큰 부자가 되어 대구의 실업계 중진으로 대구 경제권을 좌우할 만큼 갑부가 되었다. 1896년 7월 서재필을 중심으로 창립된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재무부장으로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고,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부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 보장과 참정권 획득 운동을 전개 하다가 그해 12월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하여 해산되자 선생은 서울 생활을 마감하고 대구에 내려왔다.

선생은 대구에서 1906년 1월 김광제(金光濟)와 함께 광문사(廣文社)를 설립하고 부사장에 취임하여 외국의 신학문을 도입하고 실학자들의 저술을 번역 보급하여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고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였다. 이 무렵 일제의 강압적 차관공세로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놓였을 때인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문회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바꾸기 위한 특별회의가 열렸을때 단연(담배를 끊음)에 의한 국채 1,300만원을 보상하자는 제의를 처음한 것이 선생이었고 그 자리에서 800원이라는 큰돈을 스스로 출연하였다. 이 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 대구민의소를 설립하고 대구 군민대회를 개최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운동을 발의하고 운동의 초기 전개과정을 주도하다가 후기에는 활동실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후는 자신의 사업과 천주교인으로서 직임을 수행하는데 여생을 바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에서는 1999년에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이 운동의 높은 뜻을 후세에 영원히 남기고자 같은 해에 대구 동인동에 국채보상운동기념 공원을 조성하였다.


2) 김광제(金光濟)

선생은 1866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출생하여 23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용양위 부사용에 제수되어 통정대부 비서원등 호남시찰사, 동래경무관을 역임하였으며 1905년 12월 배일 및 내정부패 탄핵상소를 올렸으나 친일배들의 모략으로 고군산도로 유배를 당하였다. 2개월 후 특별 사면되어 법부참사에 임명되었으나 불복하고 모든 관직을 버리고 마산과 대구 및 해외에서 독립운동으로 헌신하였다.

1906년 서상돈과 함께 대구의 광문사를 설립하여 설교 흥학을 통한 애국개몽운동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발기 주도 한 중심 인물이다.

충청도 인사가 대구에 와서 광문사를 창사하게 된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서상돈과 함께 동시대에 관직을 역임 하였고 동래 경무관 재임당시 영남지역 인사들과 교류하게 된 것이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였다고 본다.

동래 경무관 재임 당시에는 대구부가 설치되지 않았고 동래부 관할이었다.

선생은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에서의 활동경력과 동래 경무관을 사퇴하고 대구에 거주 하면서 경북지역 인사들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으며 1908년 3월 교남교육회에 참여하여 각처에 다니면서 강연활동을 실천한 바 있다.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면서 대동광문회에서 설립한 대구의 사립보통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대구부에서 설립한 달명(達明)의숙(義塾) 부교장 겸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후에는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끼자 경남 마산에 은거하다가 1915년 6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압록강변 홍경원 일신(日新)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해외 한민족 구국교육활동에 헌신하였다. 이후 1920년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제2의 3 · 1운동거사 계획의 지원과 서울의 조선노동단 단장에 취임하여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개몽운동에 심혈을 쏟은 바 있다. 선생은 1920년 7월 24일 마산에서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82년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보령시에서는 웅천읍 평리 선생의 묘역에 묘비와 국채보상운동기념비를 세운 바 있다.


3) 대한매일신보의 배 설과 양기탁

앞 항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일부 언급한 바 있거니와 이 운동에 참여 단체가 거국적으로 계속 결성된 것은 민족지 신문들의 적극적인 보도지원으로 앞 다투어 날마다 일어나는 경향 각지의 정성어린 참가상황을 찬양 보도함과 아울러 참가를 권유하는 논설을 실어 국민적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대한매일신보의 날카롭고 적극적인 논조는 일제 통감부 당국을 크게 자극시켰다.

1907년 2월 12일자「이토연설」이라는 기사에서

“이등의 백언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 사람을 감동케하는 힘이 더 큰데 거기에다가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국 사람을 선동함이 연속 끊이지 않으니 이 기회를 당하여 통감이 꾸짖음을 받을 만하다”

라고 까지 한 것을 보면, 신문 보도로 인한 당시의 사정을 엿 볼 수 있다.

배 설은 영국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E·T Bethll이고 한국에 와서 영어발음 베델과 비슷하게 배 설(裵 說)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다. 그는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출생하였고 런던에 있던 런던데일리 뉴스 기자로 1904년 3월에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온 특파원 기자였다. 그해 7월에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 진영 인사와 함께 한영 합변회사(韓英合辯會社)로 국한문으로 된「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코리아 데일리뉴스(Korea. Daily. News)」를 창간하고 1907년에는 한글로만 된 대한매일신보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이 항일구국운동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문을 경영하는 사람이 외국 사람이므로 치외법권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배 설은 이 신문의 사장 겸 편집인으로 전면에 나서서 일제의 침략책동을 비판하였다. 신문에는 을사늑약 무효와 고종황제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 뿐만 아니라 영국의 런던 트리분지에 일본의 악정을 폭로하였다. 특별히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내용을 처음부터 상세히 보도하므로 하여 가히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확산시켰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게 되었는데 1907년 10월에는 일본 정부와 일왕의 왕세자에 대한 무례, 허위보도와 선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주한 영국 총영사(콕번, Cocburn)에게 제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이듬 해 5월에는 다시 경성(京城 서울)일본 이사청의 이사관 미우라의 이름으로 일본인 배척 선동과 한국에 대한 일제의 보호에 대한 적복 기도 등을 명목으로 하여 영국의 한국에 관한 추밀원령(樞密院令) 제5조에 해당하는 교사 선동의 죄를 범했다고 하여 주한영국 총 영사관에 공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생활을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배 설은 대한매일신보 사장직을 그의 비서였던 만함(Marn ham)에게 물려주게 되었고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신문사는 경영난에 시달렸다. 배 설은 자기의 분신이라 할 만큼 아끼던 신문이 어려움에 봉착하고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1909년 5월 1일 37세의 연부 역강한 나이에 서울에서 타계하였다.

배 설의 죽음에 대하여 많은 학국인들이 슬퍼하였다. 그는 짧은 일생동안 한국을 위하여 투쟁으로 일관한 한국의 벗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대한매일신보는 배설의 죽음에,

“나는 죽더라고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

라고 말하였다는 기사를 실은 바 있다.

배 설의 묘는 한강변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성금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는 묘비를 1910년 2월에 세웠고 묘비문은 위암 장지연이 지었다. 일제는 1910년 병합 후 악독하게도 그 비문을 깎아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반세기가 지난 1964년 4월에 한국신문인협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 언론인들의 성금으로 일제가 깎아버린 비문을 그대로 두고 위암이 지은 비문을 새로 새긴 비를 새웠다.

배 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던 양기탁(梁起鐸)선생의 공적 또한 지대하였다. 선생은 1871년 4월 2일 평양 소천리에서 아버지 양시영(梁時英)과 어머니 인동장씨 사이에서 출생 하였다.

어린시절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의 명망가였던 나현태(羅鉉泰)선생을 만나 시야를 넓혔다. 1895년에 부친과 미국인 선교사 게일(Gale. J. S 한국이름 奇一)과 더불어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수하고 이듬 해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국권운동과 민권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98년에는 만민공동체(萬民共同體)에서 간부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이승만 등과 함께 시위운동 주도 협의로 구속 되었다.

1900년부터 3년간 일본,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으며 1902년에는 이상재 이준, 민영환 등 개혁당 조직운동에 참가 하였다가 불온단체로 인정되어 전원이 구속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 따라 일제가 일본군을 한국에 주둔시켜 내정에 간섭하면서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保安會)에 참가하여 그 책동을 저지하였다. 1904년 7월 배 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 총무를 맡아 국한문 혼용체 신문을 간행하였다. 1905년 11월 1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 신문의 주필로 일제와 이등박문의 폭정을 폭로 공격하고 배일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때 황성신문에 위암 장지연선생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그 유명한 논설을 즉각 신문에 싣고 이를 영어로 번역해서 방계 외국어 신문이었던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게재하였다. 당시에는 일제의 신문지법에 의하여 공정한 보도를 못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는 형식상 외국인 경영 언론기관이므로 하여 그 저촉 대상에서 제외되어 통감부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 한말 애국계몽 국권회복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07년 2월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가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에 다른 신문에 앞서서 기사와 논설을 보도하여 이 운동에 촉매제가 되었다. 대한매일신보사는 사내에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를 결성하여 경향 각지에서 답지하는 의연금을 수납하였다.

일제는 이 신문사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양기탁선생을 터무니없는 국채보상금 모집금 횡령사건 주동자로 몰아 구속하였다. 그러나 배 설 사장이 공소 사실의 허위조작에 대한 증거제시로 무죄 출감하였다.

선생은 1908년 신민회 총 감독 1909년 독립전쟁 전략채택으로 만주에 독립군기지 창설과 신흥무관학교 개교, 이로 인하여 1911년에는 일제에 다시 체포, 구금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1915년에 석방 후 만주로 망명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고문 추대, 1921년 미국 의원단 방한시 독립진정서 제출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어머니 별세로 가출옥되어 다시 만주로 망명 1923년 의성단(義城團) 조직 지휘, 1925년 길림 주민회 결성, 의용군 조직 일제 공격주도, 1926년 고려혁명당 조직 무장 투쟁 지원 1930년 상해 광복운동에 임시정부 국무령 추대에 거절하고 국무위원 주석에 선임 1925년 대일전선 통일동맹 조직투쟁 등등 선생의 대일투쟁 광복운동은 일생동안 일관하였던 애국 그 자체였다. 선생은 1938년에 중국 강소성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1998년 5월에 강소성에서 유해를 봉안하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 하였다.


4) 그 밖의 주요 인물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직접 주도한 서상돈, 김광제와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중앙단위에서 의연금 모집을 집합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의 배 설, 양기탁 이외에 간접적이지만 국민적 반향을 크게 일으킨 인사로는 먼저 고종황제라고 할 수 있다. 국운은 쇠퇴하고 있었으나 전제군주 시대였던 당시의 국민적 정서는 나라가 황제의 나라요, 백성도 황제의 백성이라는 관념에서 황제 자신이 담배를 끊고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이 운동이 국가적 운동으로 확산하는 계기였다 할 수 있다. 이준열사는 김광제, 장지연, 양기탁, 안창호, 박은식 지사와 함께 서울에 국채보상 연합회의소를 결성하고 초대 소장으로 추대되어

“이 외채는 우리 민족의 빚입니다. 오늘부터는 정부가 빚을 졌다고 말하지 말고 이천 만 민족이 일치 단결하여 빚을 갚도록 노력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라고 역설했다. 또한 이 운동에 남자들의 담배를 끊는 것으로만 할게 아니라 여성들의 참여가 중요하므로 부인 이일정(李一貞)여사에게

“우리 부처가 구국의 충애심을 발하여 단연동맹을 한지 벌써 수삭이 지났으나 이는 국민된 의무를 이행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여성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라고 하여, 서울 남북촌 모․모 부인들로 하여금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게 하고 사무소를 애안동의 전 판사 김규홍의 집으로 정하여 애국부인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열사는 전 남녀들이 이 운동에 더욱 열성을 기울이도록 독려하고 1907년 4월 22일 황제폐하의 밀사로 만리 여정에 올랐다.

안중근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결성하고 스스로 지부장이 되어 항일 구국운동을 행동화하기 시작하였다. 의사는 그의 부인과 두 제수(弟嫂)에게,

“나라의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무엇을 아끼리오,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들을 내놓아 하나의 힘이라도 보태자”

고 하여 이행하였고, 평양 명륜당에서 1,000여 명의 군중대회를 개최하여 이 운동에 일장 연설을 하여 모금을 하였다. 이를 본 왜경의 냉소 조롱에 크게 노하며 “왜놈이 어찌 대한의 큰 일을 알겠느냐” 하며 쫓아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안 의사는 천주교 교인으로 사순절(四旬節)과 대임절(大臨節)에 절미운동을 하여 불우이웃 돕기를 하는데 따라 1907년 1월 29일 사순시기에 대구의 국채보상 발기모임은 천주교 차원에서 신앙적 애국운동으로 퍼져 나갔으며 안의사 또한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국채보상운동에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기 시작한 안의사는 1907년 7월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8월에는 우리 군대가 해산되자 그동안의 애국계몽운동을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침략 원흉 이등박문을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고 1910년 3월 26일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우리 상주출신 위암 장지연선생은 국채보상 당시 황성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이 운동에 적극 찬동하고 여러 신문에 논설을 실어 대한자강회 등의 애국계몽운동과 함께 의연금 모금에 적극적 활동을 하였다. 특별히 전국적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 설의 묘역에 비문을 지었다.


5. 국채보상운동의 결과와 좌절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 문회의 발기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1908년 8월 30일 국채보상조사회가 조직되기 까지 19개월 여 동안이었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는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고 그해 6월부터 8월까지 의연금이 가장 많이 모아졌다. 모아진 금액은 1908년 7월 27일자 주한일본헌병대 내사집계자료에 따르면, 총 187,787원 38전 7리였다고 하고, 1910년 국채보상처리회 조사 금액은 159,253원 99전이라고 하여 정확한 금액이 얼마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파급과 뜨거운 국민적 열망에 놀란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 자체를 반일 운동으로 단정하고 당시의 친일 매국단체였던 일진회를 조종하여 방해하는 책동을 하는 한편 을사 5적 중의 한 사람인 정부의 내부대신 이지용으로 하여금 이 운동을 즉각 금지 시킬 것을 종용 협박하였다. 무엇보다도 운동의 기세를 악화시켰던 것은 정미 7조약 늑결에 의한 신문지법으로 언론을 탄압한 것이다.

일제 통감부는 끝내 대한매일신보사의 배 설을 국외로 추방하고 양기탁을 제거하는 수난사건을 일으켜 이 운동의 활력을 단절시켰다, 배 설의 국외 추방공작은 금고 벌금형으로 그치게 되므로 하여 통감부는 다시 국채보상금비소사건(國債報償金費消事件)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하고 있던 의연금 중에 3만원을 두 사람이 횡령, 소비하였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워 양기탁을 구속하였다. 사건은 양기탁이 무죄로 석방되므로 하여 일단락되었으나 운동의 주축 인물에 대한 탄압과 일부 인사들의 비행은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조성하여 이 운동이 좌절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 운동은 암초에 부딪쳐 사실상 모금운동이 아닌 의연금을 조사하기 위한 사후 처리회 만이 존속하였을 뿐이었다. 운동이 좌절되고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도 약화되자 전국 13도 대표자로 구성된 국채보상처리회가 대한매일신보사에 대하여 모은 의연금 이관을 요구하였으나 결말이 흐지부지 되었다. 그리고 황성신문사와 국채보상기성회가 모은 의연금은 민립대학 설립 기금으로 하였으나 통감부의 설립인가 거부로 좌절되었다고 한다. 국채보상의연금에 대한 처리는 일제 조선총독부의 침략정책 및 식민통치 대변지 역할을 수행 하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사로 실린 바 있다.

그 내용은 국채보상금처리회를 교육기본금관리회로 이름을 바꾸고 1910년 12월 12일자로 의연금 9만 여 원이 경무 총감부에 납입되었고 이어서 같은 달 14일 4만 2천원이 이관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의연금의 향방은 총독부의 수중으로 들어가 일제의 통치자금이 되고 말았다.


6.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가. 개관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문회에서 발기되어 같은 해 2월 21일 대구의 북후정에서 국채보상 대구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대한매일신보를 위시한 민족지 신문에 연일 운동의 사실들이 보도되면서 전국으로 국채보상 취지서를 반포하고 국채보상소가 속속 개설되었다. 우리 상주에 이 운동에 대한 처음 기록은 1907년 3월3일 상주지역 국채보상소에 보낸 서한(편지)인데 편지 봉투에 발신처는 없고 상주 외서 이하리 국채보상소입납(尙州 外西 伊下里 國債報償所入納)이라는 수신처만 있을 뿐이다. 봉투의 발신처 면에 丁未 3월 3일 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상주에는 이미 그 이전에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어 2월 21일 북후정 대구 군민대회 이후 곧 바로 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상주의 국채보상소 외서면 이하리에 보낸 편지이니 만큼 그 당시 상주의 주 활동 거점은 외서면 이천리였던 것이다.

편지의 발송처는 아마도 대구 광문사문회로 추정한다. 그 연유는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 대구 광문사 김광제, 서상돈 씨등 공문” 이라는 각 처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기사로 실은 것이라는 점이고 상주로 보낸 날자 3월 3일은 운동의 초창기였다는 점에서 이다.

대구 광문사문회에서 각 지역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순한문을 국역함)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報償趣旨)

대구 광문사장(廣文社長) 김광제(金光濟), 서상돈(徐相敦)씨 등 공문

삼가 아룁니다. 신민이 된 자가 충의(忠義)를 숭상하면 그 나라가 흥하고 백성이 편안하며, 충의(忠義)가 없으면 그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멸하는 것은 고금의 역사상에서 분명이 증거 할 수 있는 것 만이 아닙니다. 지금 구주(歐洲) 중 부강한 나라가 멸망한 경우는 충의를 숭상하는 것이 어떠한 가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 우리 2천만 동포가 이 민국(民國)의 위난한 때에 미쳐 한 사람도 결심한 사람이 없고 한 가지 일도 계획을 세운 것이 없으며, 다만 우리 황상(皇上)이 밤낮으로 깊이 걱정하는데, 우리는 팔짱을 끼고 벼랑에 앉아서 멸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다면 되겠습니까? 지금 정신을 가다듬고 충의를 분발할 과연 그 때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국채 1,300만원은 바로 한국의 존망과 관계됩니다. 갚으면 나라가 존재하고 갚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현재 국채를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3천만 강토가 장차 우리 한국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토지를 한 번 빼앗기면 다시 회복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일반 국민들이 이 채무에 대하여 의무를 가지고 말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시세(時勢)를 가지고 말하면 또한 갚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보상할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힘들이지 않고 의연금을 내지 않고도 모으는 방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가령 2천 만 명이 3개월 동안까지 담배를 끊고서 그 대금을 한 명 당 매달 20전씩 징수하면 대강 1,300만원이 될 수 있습니다. 설사 충당되지 않은 것은 1원부터 10원, 100원, 1,000원씩 특별히 기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 우리 2천 만 동포 가운데 만약 한 털끝만큼이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생각이 있는 자는 반드시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감히 이 거사(擧事)를 발기하고 피눈물로 고합니다.

여러 군자들은 보는 즉시 말로써 서로 경고하여 한 사람이라도 알지 못하는 폐단이 없이 꼭 실시하도록 하여 위로는 성명(聖明)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강토(疆土)를 유지하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후 같은 해 4월 9일 대한매일신보에는 “국채보상 상주의무소 취지서(國債報償 尙州義務所 趣旨書)”제하로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결성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 발기인이 김재익(金在益), 박정준(朴正準) 두 사람이다.

신문에 실린 취지서를 여기에 옮긴다.

국채보상 상주의무소 취지서(國債報償尙州義務所趣旨書)

무릇 백성과 나라와의 관계는 나무가 뿌리가 있고 물이 근원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뿌리가 굳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장대하고, 나라가 부귀하면 백성이 편안합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뿌리 없는 나무가 있으며, 근원 없는 물과 나라없는 백성이 있겠습니까? 삼가 우리 3천리 강토에 2천 만 백성들이 5백년 동안 화육의 은택을 입어 길러지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대 황제폐하께서 황제가 되신지 4년 만에 어짊이 드리워지고 아래 백성을 민망히 여겨 하늘에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간란한 운세를 만나서 나라가 쇠약해지고 백성이 병듦에 지탱하기 어려운 많은 형상은 손으로 다 꼽을 수가 없고, 국고의 예산이 궁핍하고 지불할 계책이 없어서 1,300만원이라는 거금을 외국에서 차용하여 매년 정해진 공납을 들여와 나갈 것을 계산해 보면 항상 부족함을 근심하는데 어느 겨를에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몇 년이 지나 뒤바뀌어 꼬리가 커진다면 곧 바로 병폐가 되어서 나라는 나라꼴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천지가 비록 크다고 하지만 백성들은 어디로 돌아갈 것이며, 토지와 가산이 한갓 우리의 소유가 아닐 뿐 만 아니라, 자신이나 처자도 또한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니, 재산이 있은 들 어디에 쓸 것이며, 곡식이 있은 들 누구에게 먹일 것입니까? 흥분된 말이 여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다행스럽게도 대구의 사회에 김광제, 서상돈 두 사람이 의리를 내어서 선창하여 전국에 인구가 3개월 동안 금연하는 비용으로 빚보다 많은 수가 되니, 무리를 일깨워 의연금을 내어 꼭 빚을 청산할 것을 도모하니, 경도(京都)와 부군(府郡)의 소문이 서로 호응하여 향응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떳떳한 성품은 사람들이 함께 부여받은 것이요, 온 나라 안의 백성들은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아! 우리 상주 땅의 몇 만리 동포도 따로 지사를 설립하고 각자 정성을 내되, 어찌 다만 금연하는 것이 평소의 술 먹고 고기 먹으면서 허비하는 비용을 줄이고 돈을 모아서 1원 2원에서부터 천만에 이르기까지 그 힘 닿는 대로 그 돈을 본사에 부쳐서 국가의 만분의 일이라도 깊은 은혜와 두터운 은혜를 갚은 것만 같겠습니까?

사람마다 이와같이 하고 고을마다 모두 그렇게 한다면 이른 바 흙을 쌓아 산을 이루고 물을 모아 바다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불과 몇 개월 만에 충분히 빚을 청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맹자가 이르지 않았습니까? 물고기도 먹고 싶고 곰 발바닥고도 먹고 싶지만 반드시 해야 된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의리가 있는 곳에서 삶을 버리고 죽음을 취하더라도 할 만한데, 더군다나 크지 않은 비용으로 백성과 나라 둘 다 온전히 하는 도에 있어서랴? 아! 동포여, 힘쓰고 힘쓸지어다.

발기인 김재익(金在益) 박정준(朴正準)

함창에서도 이 운동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황성신문 1907. 6. 24일자에 의하면 그 구성내용이 다음과 같다.

· 발기인 : 전도사(前都事), 채규일(蔡圭一) 전참봉, 전의관(前義官), 김규환(金圭煥), 유학(幼學), 채기○(蔡基○), 정동낙(鄭東洛), 박주환(朴周煥)

· 회 장 : 유학(幼學) 신관희(申觀熙)

· 부회장 : 권용학(權容學)

· 총 무 : 전참봉 김면수(金冕洙)

· 재 무 : 전의관 김규환

· 형의장, 유학 채세환(蔡世煥), 채규일(蔡圭一)

· 사 찰 : 전주사 김사일(金思一), 유학 류해식(柳海植)

· 평의원 : 채기○, 정동낙

· 서 기 : 유학 고도림(高道林)

이와 같이 신문에 취지서가 게재되었다는 것은 국채보상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는 것이고 신문에는 우리 상주 뿐 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상소 설립과 함께 지역 단위별 취지서가 게재되었다. 취지서의 내용은 한결같이 나라위한 애국충정이 담겨져 읽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릴만한데

“천지가 비록 크다고 하지만 백성들은 어디로 돌아 갈 것이며 토지와 가산이 한갓 우리의 소유가 아닐 뿐 만 아니라 자신이나 처자도 또한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니 재산이 있은들 어디에 쓸 것이며 곡식이 있은들 누구에게 먹일 것입니까? 흥분된 말이 여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하는 대목에는 필자 자신도 목이 메입니다.

국채보상 상주의무소가 설립된 후 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그 실적이 신문에 속속 게재 되었는데 그 개별 의연금은 뒤에 상술 하고저 한다.

나.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주요 인물

앞에서 서술한 바 상주에서 맨 처음 이 운동을 발기한 사람은 박정준(朴正準)과 김재익(金在益)이다. 이들 두 사람은 상주와 함창을 관향으로 한 토착세력 출신으로 옛 부터 혼맥이 이어지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집안 출신으로 보인다.

박정준(철종 기미 1859~1931), 공의 자는 덕필(德弼)이고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를 역임하였으며 효우를 겸비하였고 처사가 공정하여 고을에서 추중받았다고 한다. 공은 양곡상을 경영하여 상공인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일본 강점기에 상주 앞들 농경지 관개조합 조직의 일원으로 상주서보(西洑)를 보수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김재익(金在益)공은 외서면 이하리(伊下里 ※현재의 이천리) 출신임이 분명하다고 본다. 그 실정으로 1907년 3월 3일자로 “상주군 외서면 이하리 국채보상소 입납 尙州郡 外西面 伊下里 國債報償所 入納)” 이라는 편지 봉투로 보아 상주의 국채보상운동의 거점이 이 편지의 수신처인 외서면 이하리이고 받을 사람은 이 마을에 김재익 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현재의 이천 마을에 김씨 성으로 역사적 성씨는 함창김씨가 대성(大姓)으로 현재까지도 가계(家系)를 이루고 있으나 정작 김재익 공에 대한 행적은 모호하다.

글머리에 대구의 서상돈과 김광제가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 취지문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강신규(姜信圭, 1875~1920)공은 상주 봉대 출신으로 이 운동에 의기투합한 상주를 대표하는 인사였다. 공은 순능참봉(順陵參奉)을 역임한 석희(奭熙)공의 아들로 천석군 부자집에서 태어나 약관 22세가 되던 해에 이 운동에 참여하여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아들 용석(龍錫, 1898)과 봉석(奉錫, 1905~1972) 형제는 1919년 기미 3․1 독립운동에 상주지역 시위 주동자로 선창(先唱)하여 왜정에 옥고(獄苦)를 겪는 동안 부친 신규(信圭)공이 작고한 상예(喪禮) 집상(執喪)도 못하였다고 한다. 신규공은 1907년 2월 21일 대구 북후정(北堠亭) 국채보상 대구 군민대회에 상주 대표로 참여하여 그 자리에서 거금 100원을 의연금으로 출연하였다고 한다. 공의 아들 형제는 아버지가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으로 참여한 사실을 보고 들으면서 대를 이어 나라위한 애국운동을 주창한 애국자 집안이었다. 용석, 봉석공 형제에게는 건국공로훈장 애족장과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고 묘는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함창의 국채보상운동에 발기인으로 선창한 채규일(蔡圭一)공은 일제 국권회복단의 일원이었던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의사 집안이다. 소몽은 국채보상운동당시 34세의 장년으로 열열한 독립운동을 하던 중이었으므로 그의 일족 또한 애국 운동에 가담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채규일(蔡圭一, 1846~1918)공의 자는 대여(大汝) 호는 농계(聾溪)로 의금부 도사를 역임한 이안면 이안리를 거점으로 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난재(懶齋) 채수(蔡壽)선생의 후손이다.

다. 의연금 출연사실

1907년 4월 9일 대한매일신보에 “상주국채보상운동 의무소”가 개설되었음을 알리는 보도에 이어 같은 신문 4월 12일자로 상주의무소에서 답지한 의연금의 내용을 처음 보도하고 1908년 1월 18일까지 모두 8회에 걸쳐 상주, 함창지역 의연금 출연 사실을 보도하였다. 신문에 보도된 상주, 함창의 출연사실을 종합한 바 모두 1,080여 명이 참여하여 1,159원 58전이 모아져 현재 추정 액수로는 3억 1백 50여 만원으로서 전국의 의연금 모금액 187,787원 대비 6.2%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신문일자별 보도 내용과 의연금 집계는 다음과 같다.

◦ 대한매일신보 1907. 4. 12

국채보상 상주의무소 광고

박정준 20원, 김재익 2원, (子)익용 · 이용 · 기용 · (손자)한수 · 한영 · 한우 각1원, - (차인 : 머슴)장덕부 · (청직)김덕수 · (마부)이용이 각 60전, 이고운 20원, (동생)기운 · 상운 각 1원, (부실)명씨 3원, 강석희 20원 (자)신길 · 신립 각 1원, 김선오 · 윤상훈 · 박인양 각 10원, 박시태 10원, (자)정석 · (종손)석용 · 순용 · 유용 각1원, (부실)조씨 2원, 장교익 · 김눈화 각 40원, 차경안 1원80전, 손택인 3원 (자)정한1원 (부실)박씨 2원, 박시유 3원 (자)정집 · 정옥 각 1원, 황덕현 2원 (자)경백 1원, 차인호 2원 (자) 상진 1원, (상민商民) 손여장 등 68인 21원 70전 안재선 등 18인 3원

(청리면 하정동) 박순열 등 13인 2원

(외서면 남상동) 김연수 등 10인 1원 60전

(내북면 신계동) 박상훈 등 27인 4원 50전

(협산동 최문중) 4원 40전 박우화(자) 동환 · 인환 각 1원, 김한영 · 이종만, 이치운문중 각3원, 강임희 · 강경선 · 이창섭 · 김상원 · 김문백 · 강중희 · 주덕듄 · 이성실 · 최관순 · 박?문 · 김원? · 이명욱 · 조문숙 · 이택문 · 이병상 · 이동하 · 김익주 · 피병한 · 이봉래 · 전치심 각1원, 신태영 · 박윤목 · 김재규 · 차재형 · 성식 · 이명하 · 손동준 · 이준승 · 박?홍 · 김동수 · 박정한 · 한성규 · 김운선 · 이인수 · 손성흠 · 김필승 · 김치경 · 박양선 · 박형서, 박래홍, 강재욱, 최기수, 황성택, 김경욱, 이병욱, 김병헌, 강삼문, 이성옥, 홍순거 · 조경삼 · 김달원 · 권경운 · 홍운조 · 김경선 · 박순조 · 이경삼 · 이상필 · 박치운 · 강태희 · 차남위 · 이경삼 · 박윤석 · 오희근 · 김익경 · 김상하 · 석창순 · 임재현 · 김성현 · 이동섭 · 김동필 · 김성순 · 김성운 · 김병준 · 서원백 각 1원, 김재희 · 박규상 · 김홍규 · 김재염 · 박영택 · 이배우 · 강봉환 · 이동순 · 김태용 · 임수봉 · 이상용 · 명충국 · 장영운 · 김성원 · 김상진 · 유명순 · 김학문, 김경만 · 차성록 · 차남철 · 차남해 · 차남섭 · 기도인 · 김종해 · 조병균 · 공만용 · 김성팔 · 하두수 · 박해옥 각 60전 · 윤치술 · 박치옥 · 김원서 · 이마공 · 박성원 · 박인계 각 50전, 지성운 · 김관서 · 김정수 · 임학서 · 황춘복 · 이원복 · 김상경 · 김진일 · 강도인 · 강봉인 · 이영근 · 이기차 · 조시재 · 조온연 · 이석우 각 40전, 지치겸 · 엄세연 · 김재인 · 차일붕 · 차남성 각 30전, 서상요 · 손국인 · 손동욱 · 김성득 · 김도준 · 이장금 · 손용이 · 윤연운 · 장선칠 · 김기진 · 강두인 · 오봉한 · 김연성 · 이기술 · 조명식 각 20원, 계 353원 30전

◦ 대한매일신보 1907. 5. 31

상주군 외서면 의연소 광고

(상우산) 김일대 등 37인 - 10원 30전 - (하우산) 김진봉 등 6인 - 1원 10전 -(관신)김봉출 등 9인 - 1원 72전 - (촌래) 이병길 등 7인 - 76전 - (대상) 김부원 등 33인 - 7원 40전 - (라하) 오인준 등 - 31인 9원 - (오가곡) 김재호 등 11인 - 3원 6전 -(곡상) 고세겸 등 27인 -10원 - (곡중) 안영법 등 11인 - 10원 - (백신안) 장세 등 12인 - 5원 10전 - (행현) 이필익 등 7인 - 1월 6전 - (봉암) 송필현 등 9인 - 3원 - (행신) 이O성 등 15인 - 4원 60전 - (정천)이윤태 등 12인 - 4원 70전 - (개곡) 6인 - 12원 - (백하리) 울산오씨 문중 - 10원 - (백하리) 김명철 등 10인 - 3원 90전 - (백상리) 김택호 등 10인 - 2원 70전 - (귀호) 김숙원 등 12인 - 5원 40전 - (중산) 유승구 등 8인 - 92전 - (고지) 채홍기 등 21인 - 4원 (남하) 정씨문중 이하 14인 - 13원 60전 - (백상)송국현 등 12인 - 2원 16전 - (백상) 3인 - 60전 - (이촌) 김상준 등 27인 - 6원 - (이상) 윤정구 등 33인 - 9원 50전 - (라상 갈동) - 7원 40전 계 142원 98전

◦ 대한매일신보 1907. 5. 12

상주의연, 상주군에서 향중 신사와 유림이 국채보상사로 향회도하며 회면(會面)도 하여 열심히 면면 권고하야 국민의무를 실천하자 하고 교제중(※향교제원 중)으로 - 200원을 연설장에서 선록(先錄)하였다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7. 6. 22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김사형, 이 O O - 각 3원 - 최상은 - 2원 25전 - 전세병 - 1원 80전 - 이재현, 박태식, 김익련, 지봉구, 엄시명, 최태길 - 각 1원 - 감기주, 박덕재, 천정호, 심명섭 -각 50전 - 김돌몽 - 45전 - 윤원식, 박완용 - 각 40전 - 이재원, 김정수, 김석근, 김지경, 김예경, 김춘학, 김달해, 김태화, 박경삼 - 각 30전 - 이종신 -27전 - 김군일, 김규환, 김동주, 심필섭, 문충근, 이재철, 서금용, 김순근, 한정호, 홍승창, 이진학 - 각 20전 - 김태경, 최현대, 김갑운, 김병호, 김치대, 최기원, 김달원, 고완, 박승철, 박복만, 박복남, 김재윤, 김 O O 최사홍, O 순용 - 각 10전 - 상유현리 - 7원 -하유현리 -6원 - 용유리 - 9원 - 장각동 -8원 10전 - 상오리 14원 - 하오리 - 10원 90전 - 용화리 - 4원 - 화산리 - 1원 - 대흥리 - 36전 - 합계 86원 28전

◦ 대한매일신보 1907. 7. 10

· 상주 국채보상의무소 제2회 모집 수납

- 415원 64전 -

· 상주군 외서면 동백중리(桐栢中里)

(만호)이성호, 김일경 - 각 2원 - 김치일 - 1원- 인 O 은, 이충석 - 각 60전 - 이수성, 이종택, 김정복, 이진원, 김봉춘, 이석준, 이종우 - 각 40전 - 김지용 -50전 - 김월성, 김달용, 김만일, 김어덕, 김삼복, 최순이, 이동촌, 김지성, 이복기, 김금석, 김신기, 김계분, 이장규, 김홍기, 김관성, 이종근, 정노섬, 김철석, 김억경 - 각 20전 - 이귀철, 이부업, 유원준, 김정환, 김사묵, 이진술, 이청천, 김일심, 임대옥 - 각 10전 - 합계 14원 20전

◦ 대한매일신보 1907. 8. 15

상주군 외서면 예의동중

이종욱 - 60전 - 백낙소 -40전 - 윤예동, 김수련, 한진교, 전영소, 전영준, 전영조, 전병은, 전병하, 전영선 - 각 20전 - 윤일동, 전영중, 강순여, 우한강, 장응구, 허군선, 전영 O , 전영희, 윤성의, 안수 O, 김배금 - 각 10전 - 윤지O, 김종택, 김덕보, 각 6전 합계 4원 8전

◦ 황성신문 1907. 8. 26

함창군 채규일 - 30원 - (제)규이 - 2원 - (제)규오 -10원 - (제)규칠 - 5원 - 김규환 - 10원 - (자)O 진 5원 (자)석진 3원 - 김도식, 채세환, 강윤희, 김윤진 - 각 10원

김수진 - 7원 - 이형우, 김봉수 - 각 6원 - 김면수, 채기덕, 박주환, 김이진, 이문영, 유해보 - 각 5원 - 안호근 4원 - 이상욱, 박주칠, 신관희, 권용학, 반운성, 고재림, 장명섭, 이 경우, 양봉환, 이유권, 김규삼, 이병근, 신기준, 이규해 -각 3원 - 채규현, 채만진, 채홍구, 채기경, 채기인, 채기학, 채기주, 채정환, 정동락, 김용진, 손계갑, 강성희, 이O 학, 조진두, 반윤희, 김달O, 임 O O, 손영규, 이약우, 임성규, 정O진, 이교영, 이중철, 이흥섭, 김현수, 황팔재 각 2원, 김사복, 이치일, 유지형, 박무한, 백낙장, 이병태, 이병영, 채기극, 채기환, 채기주, 채기선, 채직현, 채기해, 양세환, 유승인, 조좌 O, 강O 향, 채기주 - 각 1원, 합계 300원

◦ 대한매일신보 1908. 1. 18

상주군 내남면 화곡리(花谷里)

권필중, 이진학 - 각 60전 - 박필선, 박의춘 - 각 54전 - 권기원, 이시호, 유상엽, 김화일, 김유학 - 각 48전 - 권상운, 이희영, 김영식, 박용석, 박성환 - 각 42전 - 권성운, 신상동, 이원일, 김기출, 박의만, 손길영 - 각 24전 - 권정운, 권경운, 최영식, 김덕생, 박남찬, 김유갑 - 각 18전 - 박원O - 이윤생, 박득수, 이근범 - 각 14전 - 권인한, 최상 O, 김일수, 박금이 - 각 12전 - 양문하, 이용수, 이술이 - 각10전 - 합계 10원 64전

상주군 내남면 노곡리(蘆谷里)

최현수 - 4원 - 김노헌, 김정춘, 고계민 -각 60전 - 최해진, 최해구, 이종이, 김영호, 이덕문, 최만관, 고경일, 노기홍, 권윤운, 권성O , 최만수 - 각 40전 - 최영만, 김재현, 장주근, 최해형, 최현걸, 김노영, 황영환, 이호봉, 최복조, 이상기, 박정석, 허연옥, 박유갑, 박한권, 이만이, 김현탁, 이장근, 강영준, 김팔용, 고치환, 여종하, 이옥근, 김상형 - 각 20전 - 윤학선, 김세용, 김한이, 이진구, 신 O 이,

최현근 - 각 10전 - 합계 15원 40전

상주군 내남면 중명리 박문발, 박형발 - 각 1원 - 김두용, 송경화, 박윤발, 송종윤, 박영발 - 각 60전 -

박수발, 박인발, 강덕언, 송병호, 박영관, - 각 20전 - 합계 12원

상주군 내동면 대일리(大逸里)

유인식, 최규혁 - 각 80전 - 유 O 식, 유경식 - 각 60전 - 이돈영, 최재현, 이홍발 - 각 40전 - 유기수, 최현섭, 이규언, 최재수, 유기선 - 각 30전 -

최재춘, 유기범, 임 O호 - 각 20전 -

이규대, 최재하, 유기성, 최운한, 한기대, 김대종 - 각 10전 - 합계 6원 70전

상주군 외동면 순지리(筍池里)

황용석 - 1원 - 유기돈 -80전 - 남교하, 남교일, 이갑영, 김재하, 김영진 - 각 60전 - 남교만, 남교영 - 각 30전 - 남교일, 김재관, 유기현, 황치극 - 각 20전 - 조두원, 김재O - 각 10전 - 합계 8원

상주군 외동면 둔전리(屯田里)

박우동, 박진영 - 각 1원 - 문두각, 최사익 - 각 60전 - 김백용, 장기옥, 오원희 - 각 50전 - 긴진홍, 김규오 - 각 40전 - 최세원 - 30전 - 문두영, 김대근 - 각 10전 - 합계 6원


<상주의 개별의연금 집계표>

신 문 별

보도일자

출연지역

의연금 출연 실적

개 인

문 중

마 을

기 타

인원

금액

인원

금액

인원

금액

금액

금액

대한매일신보

1907. 4. 12

본주(本州)

125

222원90전

125

222원90전

청리면 하정동

13

2원

13

2원

외서면 남상동

10

1원60전

10

1원60전

내북면 신계동

27

4원50전

27

4원50전

내북면 협산동

151

122원30전

149

114원90전

2

7원40전

326

353원30전

324

345원90전

2

7원40전

1907. 5. 31

외서면 상우산 외 26동

385

142원98전

383

125원58전

1

10원

1

7원40전

1907. 5. 12

상주향교

1

200원

1

200원

1907. 6. 22

화북면 장암리 외 3동

62

86원28전

53

25원92전

9

60원36전

1907. 7. 10

외서면 동백중리

41

14원20전

41

14원20전

1907. 8. 15

외서면 예의리

25

4원8전

25

4원8전

황성신문

1907. 8. 26

함창군 일원

80

300원

80

300원

신 문 별

보도일자

출연지역

의연금 출연 실적

개 인

문 중

마 을

기 타

인원

금액

인원

금액

인원

금액

금액

금액

대한매일신보

1908. 1. 18

내남면 화곡리

37

10원64전

37

10원64전

내남면 노곡리

44

15원40전

44

15원40전

내남면 중명리

27

12원

27

12원

내동면 대일리

21

6원70전

21

6원70전

외동면 순지리

19

8원

19

8원

외동면 둔전리

12

6원

12

6원

160

58원74전

160

58원74전

1,080

1159원58전

(100%)

1066

874원42전

(75원40전)

3

17원40전

(1원50전)

10

67원76전

(5원85전)

1

200원

(17원25전)

신문보도 내용을 토대로 하여 의연금 출연사실을 살펴보면, 개인이 1,066명에 874원 42전이고 문중이 3개 문중에 17원 40전, 마을이 10개 마을에 67원 76전이며, 상주향교가 200원의 거금을 출연하였다. 개인별 최고 출연자는 장교익(長敎翊), 김문화(金文化)씨로 각각 40원을 내었고 서상요(徐相堯) 손국인(孫國仁) 손동욱(孫東욱) 김성득(金성得) 김도준(金道준) 이장금(李長금) 손용이(孫龍伊) 윤영운(尹永雲) 장선칠(張善七) 김기진(金基鎭) 강두인(姜斗寅) 오봉환(吳봉煥) 김연성(金蓮成) 이기술(李기述) 조명식(趙明植) 그리고 상주 의무소 발기인 박정준(朴正準)씨가 각각 20원을 출연하였다. 상주의무소 발기인 중 일원이었던 김재익씨는 아들, 손자, 마부 청직(廳直, 집안 일을 시중드는 사람) 차인(差人, 장사하는데 시중드는 사람) 등 식솔들 모두가 참여하였고, 이교운(李敎運)씨 3형제와 부실(副室※소실 小室) 명씨(明氏) 등이 25원을 출연하는 등 가족 단위로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는 전통 조선시대인 만큼 신분제도가 뚜렷하였던 때로서 사대부 양반 가문으로부터 시장에 상민(常民) 그리고 앞에서 거명한 경우와 같이 청직이, 소실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망라하여 참여하였다. 문중의 경우는 외서면의 울산오씨 문중과 협산동(현재의 계림동 관내 화산)에 최씨 문중 그리고 이치웅 문중만 참여하였는데 예나 지금이나 상주 관내에는 전통적으로 오래된 사대부 씨족이 많이 있었음에 비추어 그 참여 실적은 극히 저조하였다 할 수 있다. 사대부 모임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서원(書院)과 서당(書堂)의 경우는 이 운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으니 대체적으로 관내 범 유가적(儒家的) 참여 실적은 저조하였고 일반서민 대중의 참여율이 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상주시내권이었던 내북, 내남, 내동, 외동과 본주(本州) 그리고 외서면 일원의 주민 참여가 제일 많았다. 그 원인은 국채보상 상주의무소 발기인 박정준, 김재익공이 거주하는 것과 특별히 외서면은 이하리(伊下里)에 국채보상소가 설치되어 우산, 예의, 이촌 등 오지마을까지 31회에 걸쳐 출연에 참여 한 것은 김재익공의 적극적 활약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상주지역에서 최오지인 화북면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것 또한 특별하다. 그 당시 화북면은 李元宰 이용하 의사가 운강 이강년 대장 휘하에서 독립의병전쟁에 참가하여 어느 지역보다 조국의 국권 회복운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 상주지역 국채보상소에 보낸 서한의 피봉(1907. 3.3)

관내 전 지역 사대부가 참여하는 상주향교에서 200원의 거금을 의연금으로 출연하여 상주 주민 모두가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도 있으나 앞에서 서술한 상주 본주, 청리, 외서, 화북, 함창, 이외 중모(모동 모서), 장천(낙동), 중동, 공성, 공검, 은척, 화령, 화동, 내서, 사벌면에서는 참여한 실적이 없었다는 것은 어떤 연유였는지 모른다. 서상돈이 주축이 된 국채보상운동은 천주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 까닭은 서상돈선생 자신이 대대로 이어온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이고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또한 천주교의 영향이 컷을 것으로 짐작되어 앞에서 거명한 의연금 출연자와 천주교와의 관계는 연구할 과제다.

7. 맺는말

지금까지 1907년 대구광문사의 서상돈과 김광제가 중심이 되어 일제로부터 교활한 부림을 받아 나라가 짊어진 국채 1,300만원을 국민적 단연(斷煙)운동으로 절약한 돈을 의연금으로 보상하고자 하는 애국적 구국운동의 대강을 서술학고 이 구국 운동에 상주 백성들이 참여한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살펴 보았다. 의연금으로 모금한 액수가 목표로 한 1,300만원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이 운동은 전국적 구국 계몽운동으로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으며 그 운동의 중심에는 대한매일신보 등 민족지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였고 서상돈, 김광제, 배 설, 양기탁, 장지연, 안창호, 박은식, 이 준 등 애국열사와 고종황제까지 단연에 참여하여 전 국민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국민적 애국 결집은 기울어가는 나라의 국권 회복운동으로 앙양 승화되어 빛나는 애국 민족운동 유산으로 승화되어 일제의 강압으로 비록 강토는 빼앗겼으나 이 운동이 우리 민족의 국혼(國魂)과 함께 하여 1919년 3.1 독립운동의 계기라고도 할 수 있고 1920년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獎勵運動)의 효시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아울러 1998년 I.M.F 경제 위기에 금 모으기 운동은 이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신국채보상운동으로 세계의 찬사를 들었고 마침내 빠르게 경제가 회복되어 경제 선진국으로 발 돋음 하게 된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대구 경북 인들은 이 운동의 정신을 길이 잇고자 1999년 대구시 동인동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여 모든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운동에 우리 상주인들이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 또한 상주의 애국적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상주의 국채보상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박정준(朴正準) 김재익(金在益) 그리고 대구 국채보상운동 최초 발기인으로 참여한 강신규(姜信圭)공과 함창의 채규일(蔡圭一)공의 애국적 공적은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감이라고 하겠다. 글을 맺으면서 앞에서 거명한 상주 민초들의 의연금 출연 인사들의 행적과 당시의 활동 상황들에 대한 구체적 사실들이 더 밝히는 뒷사람의 연구가 있기를 간망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