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4호

상주학. 상주문화 제24호. 소헌(笑軒) 김익주(金益冑)의 문학고(文學考)

빛마당 2015. 3. 28. 21:45

소헌(笑軒) 김익주(金益)의 문학고(文學考)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권 태 을

목 차

I. 머리말 40

Ⅱ. 가계(家系) 및 생애 41

1. 가계 41

2. 생애 41

Ⅲ. 문학세계(文學世界) 52

1. ≪소헌유고(笑軒遺稿)≫의 내용 52

2. 소헌(笑軒) 시세계(詩世界)의 특징 52

3. 소헌(笑軒) 산문세계(散文世界)의 특징 62

Ⅳ. 맺는 말 71

소헌(笑軒) 김익주(金益)의 문학고(文學考)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권 태 을

I. 머리말

사람이 땅을 얻어야 삶을 이루듯 땅도 사람을 만나야 그 존재 가치가 더욱 귀해진다. 이같은 관계성에서도, 상주에서 태어나 조선말의 비운기를 올곧게 살다 간 소헌(笑軒) 김익주(金益冑․1806~1890)의 문학을 통하여 상주 인물사에 소개함은 후진의 한 의무라 생각한다.

소헌 김익주는, ≪소헌유고(笑軒遺稿)≫(單) 한 문집을 남긴 선비로서의 문장가나 아직껏 그의 행적이나 문학에 대하여 소개된 바가 없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유고를 현손(金演福)이 영인하여 발행함에 필자가 원고를 번역하게 되어 통독할 기회가 있었고, 소헌의 작품이 상주 문학사의 영역을 넓히는데 일조를 하리란 믿음이 서서 이 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 역시 소헌문학에 깊은 성찰이 아직 없어 우선 시와 산문의 몇 특징을 들어 상주 문학사에 소개함에 주 목적을 두었다.


Ⅱ. 가계(家系) 및 생애


1. 가계

선생의 자(字)는 노첨(魯瞻)이요 자호는 소헌(笑軒)이다. 상산김씨 보윤(甫尹) 수(需)는 시조요 11세 전공판서(典工判書․또는 호조판서) 원리(元理)는 전서공파 파조다. 전서공 밑으로 관도(觀道)는 가선대부 충청도 관찰사요, 기(淇)는 통훈대부 판종부시정, 수약(守約)은 통정대부 벽동군수, 원(源)은 조산대부 장흥고 직장, 석정(錫精)은 증 통정대부 좌승지, 하(廈)는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영길(永吉)은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 선(銑)은 봉선대부로, 8대가 문반(文班)에 오른 사대부가였으나 그 뒤 6대는 벼슬이 없었다. 고조 석겸(錫謙)․증조 시진(始振)․조 백운(伯運)은 유업(儒業)을 지킨 선비였으며, 아버지 제욱(濟勖)과 어머니 창녕성씨 이정(爾廷)의 따님 사이에서 1806년(순조 6) 6월 14일, 상주 구도곡(求道谷․서당골)에서 태어났다. 81세가 되던 1886년 9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정3품)에 오르고, 1890년 2월 26일, 향년 85세로 별세하였다.

전배(前配)는 재령강씨로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의 후예요, 후배(後配) 기계유씨는 충목공(忠穆公) 유홍(劉泓)의 후예로 두 분 다 부덕을 갖춘 현모양처였다. 아들은, 원응(元應)․행응(烆應)․정응(正應)이니 위로 두 분은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딸은 홍낙표(洪洛標)․정인규(鄭仁奎)․조남석(趙南碩)․홍용현(洪龍鉉) 등에게 출가하여 선생의 사상과 유덕은 내외손으로 전승되었다.


2. 생애

일생을 초야의 선비로 사신데다 행장이 없어 선생이 스스로 자신의 행적을 <소헌자서(笑軒自序)>로 남겨, 3단 구성의 전문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1) <소헌자서(笑軒自序)>-봄뜻(春意) 실현에 산 선비

•서사(序辭)-소헌(笑軒)으로 호를 삼은 내력

“내가 처음 금매제(今昧眱)로써 호를 삼은 것은, 세상일에 물들고 싶음에서였으나 갖은 고생에 짓눌려 끝내 뜻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또, 화석(化石)으로써 호를 고치었으나 화석(化石)이란 본디 초산도사(楚山道士)의 자취에 근본한 것이니 그렇다면 도사란 이름이 실로 나에게는 맞지 않은 까닭에 청지(聽之)로 하였다. ‘듣는다(聽)’는 말은 곧 하늘의 명(天命)을 듣는다는 뜻이나 나의 평생을 생각해 본즉 하늘(天命)을 알지 못함 아님이 없다. 육십에 이른 지금 생각하니 스스로 웃음만 나올 뿐이다. 까닭에, ‘웃음소(笑)’로써 이름(笑軒)을 삼았다.”

서사(序辭)는, 30대(20대 포함)․40대․50대까지 그 나이에 맞게 여러 호를 썼으나 끝내 60대에는 소헌(笑軒)으로 자호를 정한 사실을 밝히었다. 자립한다는 이립(而立)의 30대는, 남들같이 입신양명할 포부로 과거장을 열심히 뛰어다닌 영재였다. 친구의 아버지 조(趙)선비에게 일찍이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스승이, “나는 군의 영민하고 좋은 품성을 아는데, 더욱이 군이 늘 새로워지려 함(日新心)을 아낀다.”라고 한 말이나,

自言二十自負時(자언이십자부시) 스스로 말하노니, 자부하던 20대에

殘篇累渡漢水堮(잔편누도한수악) 모자란 글로 한강둑을 자주 건넜었지.

라고 하여, 과거 보러 한강을 자주 건넜음을 알려 주었다.

또한, 당대 종사(宗師)로 일컬어지던 계당 류주목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20대 한창 자부할 시기에 과거문(科擧文)을 아름답다 함부로 생각하고, 과거장을 봉황에 비견하여 부지런히 누렇게 괴화(槐花)가 피는 가을에 바빴고, 허둥지둥 백원(白園)의 전장(戰場)에서 열 번이나 패하였습니다.”

라고 하여, 2․30대는 문장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고, 실패를 거듭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립(而立)의 나이에 눈이 어두워 현실을 물끄러미 본다는 금매제(今昧眱)로 호를 삼은 것은 자기 겸양임도 알 수 있다. 나아가, 마음에 정한 바가 있어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의 나이에는 화석(化石)이라 호를 삼았으나 덕망높은 상산사호같은 은사들이 먹은 단약(丹藥)이란 뜻이 있어 또한 자신은 그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다. 하늘의 명령한 바를 안다는 지명(知命)의 나이에는 듣는 사람이란 뜻으로 청지(聽之)로 호를 삼았으나 또 스스로 천명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으로 그치었다고 하였다. 결국, 60대 이순(耳順)의 나이에는 허허 웃는 사람(집)이란 뜻의 소헌(笑軒)으로 자호를 삼았다고 하였다.

• 본사(本辭)-소헌(笑軒)으로 호를 삼은 이유

“어떤 이가 말하기를, ‘웃음소(笑) 자의 뜻됨을 여러 모로 살펴도 선비가 숭상할 것은 못 된다.

기쁘면 웃고,

장난치고 싶으면 웃고,

남을 업신여기면 웃고,

아름다운 체 가장하면 웃으며,

어찌할 방법이 없으면 웃으니, 어찌 족히 취하리오’하였다. (내가) 바로 답하기를, ‘나의 웃음은 이것들과는 다르니 우습고 우습도다. 나의 웃음은,

봄산을 만나면 웃고,

괴이한 돌을 만나면 웃고,

새와 이상한 풀과 이름난 꽃을 만나면 웃는다.

혹 붕우와 교제함에 성낼 일이 있으나 내가 웃으면 성범이 저절로 물러나고,

혹 처자가 성내는 빛이 있으나 내가 웃으면 도리어 화목해지고,

자손들의 놀이를 보면 웃고,

시주(詩酒)를 주고 받음에 이르면 웃는다.

또 고금에 현달한 사람이 적막한 것을 보면 다 웃으며,

흥망성쇠가 교체되는 일의 허황한 현상이나 아찔아찔 현기증이 이는 경우를 일일이 들어 말하면 족히 웃을 만하니, 그런즉 세상의 일이 어느 하나 웃을 만하지 않은 것은 없다.

글자의 뜻을 취하여 보면, 하늘천(天) 자 위에 대나무 죽(竹)자가 있음이 웃음소(笑)자가 되었은즉 대나무의 물건됨이 곧고 높으며, 바르고 위로 자라 하늘을 찌를 기상과, 서리내리는 날씨를 업신여기는 절조가 있으니, 또한 선비가 숭상함이 없으랴. 내가 이런 까닭에 취하여 집의 현액을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이는 웃음소(笑)를 부정적으로 보아 선비가 호로 삼기에는 온당치 못하다고 한 데 대하여 주인은, 아름다운 자연과의 만남,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대함, 시간의 한계를 초극하는 넉넉한 마음지님에서 나오는 웃음은 결코 경시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나아가, 소헌(笑軒)으로 호를 삼은 궁극적인 의도를 밝힌 ‘소(笑)’가 지닌 의미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같이 어떤 역경에서도 절조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자 함에 소헌(笑軒)의 참뜻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어떤 경우에서나 선비의 본분을 다하려는 작자의 강인한 의지를 부드러움으로 감싸놓은 미문(美文)이라 할 수 있다.

•결사(結辭)-소헌(笑軒)은 봄뜻(春意)을 지닌 집(사람)

“천지가 텅 비고 고요한 것과, 일월의 주야와, 인물의 흥망성쇠와, 산천의 솟고 흐름과, 사생의 왕래함과, 통하고 막히는 이치와 운수, 귀신이 시기하고 돕는 것과 같은 것들을 한 웃음에 부치어 조금도 원망하거나 탓하거나 하는 마음이 없다면 동정(動靜)하는 사이에 굽히고 펴고, 눕고 일어섬이 서로 상충되지 않아 만물과 더불어 봄뜻(春意)을 지니게 될 것이니, 또한 가상하지 않은가? 하자, 어떤 이도 웃고 말이 없었다.”

천리(天理)의 운행에 순응하는 일이나 인사(人事)의 음양 화복에 거역함이 없는 마음을 지님으로써 스스로의 절조를 일관되게 지키고, 만물과 더불어 사는 인애(仁愛) 정신으로서 봄뜻(春意․살리는 마음)을 지닐 표상으로 자호를 소헌(笑軒)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소헌(笑軒)이 비록 사회적인 높은 지위에 있지는 않았지만 본질적으로 귀천․고하, 대소․경중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선비도(道) 실현의 궁극적 목적을 살리는 마음 곧 봄뜻(春意)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조선 최후의 망국적인 난세에 태어나 기우는 국운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끝까지 선비의 도리를 다 하려 했던 상산(商山)의 한 선비를 그려낸 <소헌자서>라 하겠다. 그러기에, 소헌(笑軒)은 어떤 경우에서나 자포자기하지 않았음을,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 <자경(自警)>에서도,

“내가 어리석다 마라, 선천적으로 받음(품부 稟賦)의 처음은 똑 같았나니. 내가 부족하다 마라, 자신을 천금같이 여길지어다. 내가 사리에 어둡다 마라, 정성(精誠)이 이르는 곳에는 돌도 뚫리나니.”

라고 하여, 자기긍정(自己肯定)․지성무식(至誠無息)을 존재의 의지처로 삼았다. 나아가, 자신을 평가하는 <자평(自評)>에서는,

“소리 길게 뽑아 동해를 노래하고, 자호(自號)를 소헌(笑軒)이라 걸었도다.”

라고 하였다. 동국(조선)의 소헌임을 자존심으로 삼았기에 서학(천주교)의 범람과 열강의 외세에서도 소헌은 선비로서의 자기를 잃지 않으려 하였음을 <자찬(自讚)>에서는,

貌不中人(모불중인) 모습은 보통인이 못 되고

身廋纖芥(신수섬개) 몸은 야위어 나약하기 풀같도다

刻鴣未鵹(각고미려) 고니(白鳥) 새기려다 오리도 새기지 못하고

圖鵬止鰲(도붕지오) 붕새를 그리려다 자라에 그치었도다.

踽踽于今(우우우금) 혼자 외로이 오늘에 이르렀으나

嘐嘐曰古(교교왈고) 큰 뜻을 품고 옛것을 말하도다.

楓菊晩節(풍국만절) 풍국(楓菊)의 늦도록 변함없는 절조를

空吟白頭(공음백두) 공연히 백두(白頭․센머리)에도 읊도다.

라고 하였다. 유무명(有無名)에 관계없이, 선비도(道)를 익히고 그 길에서 인간의 가치를 발휘하려 한 조선 선비의 엄숙한 모습을 소헌(笑軒)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2) 소헌(笑軒)의 현실인식

소헌(笑軒)은 조선 국운이 끝나가던 난세의 격동기에 태어나 한일병합의 비운을 20년 앞둔 시기까지 산 선비다. 태어나기 전 해(1805)부터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홍경래의 난(1812), 진주민란(1862), 대원군의 집권(1863), 서학(천주교) 퇴치의 척사윤음(斥邪綸音․1863.8.3), 병인양요(1866), 최익현 척왜소(斥倭疏)로 유배(1876.1.27),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10.17) 등, 망국적인 내우 외환의 격동기였다. 특히, 서학(천주교) 퇴치의 양이보국론(洋夷保國論), 열강(프랑스․영국․미국․러시아 등)의 개방 압력은 물론 일제의 침략야욕은 조선 멸망의 주 요인이었다. 이같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비록 초야의 이름없는 선비였으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으니, 계당 류주목(1813~1872)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길에서 읊은 7언율시 미련(7․8구)에서는,


狂瀾倒抵回誰手(광란도저회수수) 광란의 물결 압도해 오니 누구의 손으로 돌릴까

朴儉衣巾相胤賢(박검의건상윤현) 질박하고 검소한 선비들 어진 맏아들 따르네.


 라고 읊었다. 계당은 당시 양이보국․외세차단의 일선에 선 좌의정 류후조(柳厚祚)의 맏아들이었으나 초야에 은거하여 학문하고 교육한 종사(宗師)로 추앙된 선비요, 병인양요(1866.8.12) 때는 모친상 중이었으나 국난엔 효보다 의리가 우선이라 여기어 양이척결(洋夷剔抉)의 선봉에 선 의병대장이기도 하였다. 초야의 선비들조차 계당을 따랐음을 찬양하였고, 같은 제목의 7언절구 전결구(3․4구)에서는,


重今癘鬼偏驅虛(중금려귀편구허) 거듭 금년은 여귀가 두루 허망한 데로만 내모니

風俗閻羅必不全(풍속염라필부전) 그릇된풍속은 염라대왕 이라도 온전함을 반드시 기대하진 못하리.


 라고 읊었다.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염라대왕이라도, 여귀(癘鬼․여기서는 西學)가 전통적인 유가(儒家) 사회의 풍속을 그릇되게만 하니, 바로 잡기가 어렵다고 개탄하였다. 또한, 소헌(笑軒)은 우주 형성의 근본 원리를 그림으로 설명한 송나라 주돈이의 태극도(太極圖)를 해설한 <도해(圖解)>에서도,

“슬프게도 시기가 정상적이지 못하여 사리에 어긋난 혼란이 생겨나 ≪춘추(春秋)≫의 상(賞)주고 벌(伐)주는 법도가 이미 멀어졌고, 역사가 거울로 밝게 경계함도 소용없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어찌, 삼대 이후로 태극의 이치가 온전하지 못하고 인륜의 지극한 도리가 점점 쇠퇴하여졌기 때문이 아니랴.”

라고 하였다. 표현은 완곡하나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역사를 자기성찰의 거울로 삼을 줄도 모르는 인륜(人倫)의 지극한 도리가 파괴된 현실이 되었다고 소헌은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소헌이 살았던 당대의 외우내환으로 인한 근대화 과정 속에서의 가치관의 변화나 외세의 침략에 의한 사상적 변화에서 유교를 신봉한 선비가 겪어야 했던 갈등이요 고뇌였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갈등과 고뇌는 노함(怒)을 꾸짖다는 <질노문(叱怒文)>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 글은, 주옹(主翁)을 좌우에서 모시는 정신의 신(神)과 기백(氣魄)의 기(氣)가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七情) 중에서도 노함(怒)을 다스리는 방법론을 전개한 토론문이라 할 수 있다.

토론의 발달은, 주옹(主翁)에게 무례한 어린 것을 노함(怒)이 다스리려다가 도리어 주옹에게 난처한 일이 발생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정신(神)이 노(怒)를 꾸짖기를 앞뒤 분별도 못하고 성낼 줄이나 아니, 30년이나 주옹을 모시고도 끝내 낭패만 당하게 하니 정신(神)이 사는 집에서 함께 살 수는 없다 하였다. 노(怒)가 물러나려 할 즈음에 기백(氣魄)의 기(氣)가 의기양양하게 나서서 중국 역사상에서 성낼 때 성냄으로써, 주(周)나라 무왕(武王)도 은나라 폭군 주왕(紂王)의 흉악함을 벌하고 난폭함을 벌함으로써, 의기(義氣)를 세워 인(仁)을 도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예기(禮記)≫에서도 칠정(七情)의 머리(喜․怒․哀․樂․愛․惡․欲)에 노(怒)를 안배하였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신(神)은 반론을 제기함에 먼저 망국적인 당파의 피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물며, 이백 여 년 전부터 비롯되어 오늘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어찌 이 노(怒)를 쓰고 싶지 않았으리오. 그러나 풍속이 점점 쇠퇴하여져서 간교한 꾀로 속임은 더욱 치열해지고 향기로운 풀인지 누린내 나는 풀인지도 깊이 묻지 않으며, 오직 그릇(당파)이 같으면 같이 지내면서도 닭의 털인지 봉황의 털인지도 분별하지 못한다. 그리고, 색깔(당색, 黨色)이 비슷하면 무리라 하고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자는 구리(銅)를 칼(劒)이라 하며, 벼가 생기지 않으면 가시라고 한다. 정으로 인연하여 자라고도 이익을 다투다 헤어지니, 더위와 추위에 떳떳한 도리가 없어지고 남과 사귐에서나 혼자 지냄에서도 마땅함이 없어졌다.”

특정 당파에 몸이 들면 당색은 한 색깔이 되어 지성적․이성적인 가치 판단력은 사라지고, 반대를 위한 반대에만 빠져 인륜도․백성도․나라도 안중에 없는 위인들이 되어 끝내는 남과 더불어 사는 일 뿐만이 아니라 혼자 사는 일에서도 마땅함을 잃고 만 세상이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이같은 극악한 현실의 타개책은 노함(怒)에 있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오직 하나로 모아 중정(中正)한 마음을 지님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한 신(神)의 말에 주옹(主翁)이 찬성함으로써 신(神)과 기(氣)의 토론은 승부가 났다. 그러나, 작자는 이 글의 결말부를 노(怒)의 말로 맺고 있다.

“이 놈이 간 뒤라야 곧 평소에 주옹(主翁)을 도운 공을 알 것이다. 지금부터인즉 세상의 인심이 주옹을 가리켜 어리석어 쓰일 데가 없고 산만하고 게으르며, 기개가 꺾인데다가 콩과 보리조차 분별하지 못한다 할 것이다. 가령, 새나 짐승과 더불어 무리가 되어 높이 날거나 멀리 도망치면 그만이려니와 만약 잠시라도 세상에 몸을 기탁한다면 내가 없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려니와 나를 보내는 뜻을 내가 안다라고 하였다. 이내, 홀연히 길게 휘파람을 불며 이르기를, ‘산천에 비록 옛 무릉도원이 있다지만 인간 속세에는 찾기 어려우니, 다만 다른 날의 공부를 기다려 삼가 독실하게 주옹(主翁)을 위하여 쓰임이 행하여지면, 근원을 밝게 다스리리라’, 하였다.”

이 결말의 핵심은, 주옹(主翁)의 말이 아닌 노(怒)의 말로 대신한 데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주옹(主翁)이 나(怒)를 내치는 뜻을 안다’라고 한 데에 함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옹(主翁)이, 기(氣)가 노(怒)의 편을 드는데 반대한 신(神)의 주장에 손을 들어준 것은 부득이 한 처사라고 본 것이다. 그것은 주옹(主翁)이 선비로서의 학문하고 수양함에 제일의(第一義)로 여긴 것이, ‘정성껏 중정(中正)의 도(道)를 지킴(윤집궐중, 允執厥中)이었고 ’노(怒)함을 남에게 옮기지 않음(불천노, 不遷怒)에 있었음을 노(怒)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본 망국적인 당쟁의 사회악이나 범람하는 서학(西學)의 전래와 세계 열강의 외압이 국가 존망의 문턱에 이르렀는데도 노(怒)해야 할 때 노(怒)할 줄 모르는 주옹(主翁)의 처사를 작자는 도리어 노(怒)로 하여금 비판하게 하여 놓았다. 선비의 특성인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氣槪)와 명분있는 사리 분별력을 상실한 주옹(主翁)을 촌부(村夫)요 숙맥(菽麥)으로 노(怒)는 평가하였다.

노(怒)의 주옹(主翁)에 대한 평가는 곧 작자가 스스로에게 내린 엄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무릉도원(이상향)이 이미 사라진 세속에 사는 한은 선비는 선비의 사명을 다 하여야 하는데도, 금수처럼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고, 노(怒)해야 할 때 노(怒)할 줄도 모르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존재가 곧 주옹(主翁)이라 한 것이었다. 국망(國亡)의 조짐을 발견하고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선비의 도리를 다 못하는 소헌(笑軒)의 고뇌와 갈등, 겉으로 드러낼 수조차 없는 지사(志士)의 한(恨)은 은밀하게 <질노문(叱怒文)> 전편에 우의(寓意)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위국(爲國)에 대소․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코 어떤 역경에서도 선비 본연의 자세를 견지하려 했던 조선 선비의 정신을 소헌(笑軒)에게서 확인함은 귀한 일이라 하겠다.


Ⅲ. 문학세계(文學世界)


1. ≪소헌유고(笑軒遺稿)≫의 내용

≪笑軒遺稿≫(單)는, 필사본으로 현손 김연복 시인이 보관해 왔고, 시인의 청으로 필자가 졸역(拙譯)하였다. 유고를 발간할 때 원문을 활자체로 고치어 번역한 것을 먼저 싣고 원문을 영인하여 한 책으로 만들었다.

유고의 내용은 시(詩) 38제(題)로 41수, 서(書) 1편, 서(序) 2편, 기(記) 3편, 설(說) 2편, 논(論) 2편, 잡저(雜著) 9편, 유사(遺事) 1편 등이며 부록으로 세계도(世系圖)와 묘갈명(墓碣銘)을 새로 실었다. 시문(詩文)은 총 58제(題)로, 양적 면에서는 적으나, 한문학 질적 면에서는 주요 문체를 다 갖춘데다 가작(佳作)이 많음은 본 유고의 특색이 될 수 있다.


2. 소헌(笑軒) 시세계(詩世界) 특징

소헌 시세계의 특징이란, 다른 분의 문학과 대비하여 얻으진 소헌 문학만의 특징이 아니라, 각 문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색을 띤 경우를 지칭함임을 먼저 밝혀 둔다. 소헌 문학의 문학사적 위상 적립은 좀더 고찰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본다.

1) 물아일체경(物我一體境)의 유여(有餘)한 시정(詩情)

이 항에서는 자연과의 동화로 인한 너와 나의 하나된 경지(物我一體境)에 드러난 넘치도록 넉넉함(有餘)의 시정(詩情)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기묘년(1879) 정월 14일 입춘에 읊음’이란 시부터 보도록 한다.


建寅卯正律灰開(건인묘정율회개) 기묘년 음력 정월 첫 절기 돌아와 열리니

春帖家家祝福楣(춘첩가가축복미) 입춘첩은 집집마다 문설주에서 복을 비네.

花欲繼先醅故樹(화욕계선배고수) 꽃은 앞엣것 이으려 묵은 가지에서 피고

草能報本動陽堆(초능보본동양퇴) 풀은 뿌리에 보답하려 양지둑에서 살아나네.

八旬頭雪鷗眠坐(팔순두설구면좌) 여든의 백발노인은 갈매기 같이 졸며 앉았는데

卄四韶風蝶帶來(입사소풍접대래) 24절기의 부드러운 바람은 나비가 데리고 오네.

月窟天根來往處(월굴천근래왕처) 월굴과 천근이 왕래하는곳에는

神功首立物生該(신공수립물생해) 조화신의 공이 먼저 이루어져 만물이 갖추어졌네.


 24절기의 첫 번째인 입춘일을 맞아 집집마다 한 해의 안녕을 비는 입춘 첩을 붙이는데, 꽃은 작년의 꽃 이으려고 묵은 가지에서 피고 풀은 뿌리에 보답하고자 양지에서 돋아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안녕을 비는 한결같은 마음을 꽃을 피우고 풀을 돋게 함으로써 더욱 풍성히 하였다. 이같은 가운데 한가한 갈매기같이 조는 여든의 백발노인, 나비가 첫 절기의 봄 바람을 데리고 와 노옹을 물아일체경으로 이끌고 있다. 입춘일의 자연 순환의 온갖 현상은 조화신의 공(天理․자연법칙)이 먼저 이루어져 있었기에 창조되는 현상이라 하여,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봄맞이는 바로 천리(天理)의 혜택임도 동시에 노래함으로써 자연과의 동화에서 시인이 발하는 넉넉한 시정은 저절로 독자에게 전달되어 봄의 화애(和愛)로움까지를 느끼게 하였다.

다음은 ‘우연히 읊음’이란 <우음(偶吟)> 시를 보면,


試把瑤鏡觀萬化(시파요경관만화) 시험삼아 거울잡고 만물의 변화 살펴보니

洪荒世界各多奇(홍황세계각다기) 너르고 아득한 세계 갖가지 기이함도 많도다.

松風雷壑心神肅(송풍뢰학심신숙) 솔바람 우뢰치는 골짝에선 심신 엄숙해지고

雪月鑑窓夜氣滋(설월감창야기자) 눈과 달이 창을 비추니 밤의 심경 더욱 더하네.

沙白渚淸魚得計(사백저청어득계) 모랫벌 희고 물가 맑으니 고기는 뜻을 얻고

花紅柳綠鳥逢時(화홍류록조봉시)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새가 때를 만났네.

靑杻柴土紛紛醉(청뉴시토분분취) 푸른 싸리나무 자줏빛 흙 뒤섞여 취하는데

擾擾何暇樂眞知(요요하가락진지) 요란한 풍경의 어느 겨늘에 진지를 즐기랴.


 라고 읊었다. 두련(1․2구)은, 기이한 현상으로 가득찬 세상이라고 상(想)을 일으켰다. 함련(3․4구)에서는 이들 기이한 현상은 상대적인 불거리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 옮겨와서 ‘솔바람 우뢰치는 골짝’에서는 엄숙한 심정이 되고 ‘눈과 달이 비추는 창’에서는 밤의 심경에 더욱 동화됨을 점층적으로 노래하였다. 게다가, 사람만이 자연과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경련(5․6구)에서는 상(想)이 전환되어, ‘흰 모래 맑은 물과 고기’, ‘꽃과 버들과 새’조차도 자연과 물아일체된 경지를 노래하였다. 이로써, 두련에서 경련까지 오면 세상의 기이한 현상은 곧 모든 생물체가 자연과 동화되는 매체임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미련(7․8구)은 이 시의 결말부로서 흙을 생명의 터전으로 삼은 뭇 생명체들의 하나된 모습을 ‘푸른 싸리나무’와 ‘자줏빛 흙’이 서로 취한 듯 하나되었음을 감탄하였다. 그러니, 이같은 물아일체경에서야 어찌 이치를 따져가며 만상을 즐길 수 있으랴고 반문한 것이다. 천태만상의 자연현상이 그 어느 것 하나 이치 밖의 현상은 아니지만, 오묘한 이치까지 생각하며 즐기기에는 순수와의 동화 속에서는 시인의 시정(詩情) 역시 천지심(天地心)에 일체된 감정임을 노래한 것이라 하겠다.

 다음은 ‘봄날 우연히 읊음’이란 <춘일우음(春日偶吟)> 시에서는,


盡日柴門客遇稀(진일시문객우희) 온종일 사립문 지나는 손은 드문데

桃花欲落杏花肥(도화욕락행화비) 복숭아꽃 지려하니 살구꽃이 피려하네.

滿地惟有鳴春鳥(만지유유명춘조) 온천지에 봄을 노래하는 새가 있으니

相樂嬌容卵子機(상락교용난자기) 암수즐겨 애교떠는 모습 알낳을 시기일세.


 라고 읊었다. 은거(隱居)하는 선비의 삶을 한 폭 수묵화(水墨畵)로 펼쳐 놓았다. 시상(詩想)을 일으키는 기구(起句․1구)의 공간 배경을 적막하게 설정함으로써 시상을 잇는 승구(承句․2구)의 효과를 최대한 극대화시킨 시적 묘미가 놀랍다. ‘복숭아꽃 지려하니 살구꽃 피려하는’ 거기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무궁한 묘리(妙理)까지를 발견하게 하였고, 나아가 없는 것같은데 있음이 진실로 있음임을 시인은 노래로 일깨우고 있다. 게다가, 시상을 전환시키는 전구(轉句․3구)에 오면 천지는 봄을 노래하는 새의 낙원으로 묘사되었고, 그 낙원은 곧 생성의 모태가 되는 알이 잉태되는 새 생명의 환희로 가득찬 세계임을 결구(結句․4구)로써 펼쳐 놓았다. 시정(詩情)이 넉넉하고 섬세하며 아름다워 시인이 자연과의 물아일체경에 들 때 독자도 절로 동화됨을 느끼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천지 자연의 온갖 현상을 음양(陰陽) 조화의 묘미로 보는 유자(儒者)의 심미안(審美眼)도 특이하다 하겠다. 이는 다음 항에서 살피기로 한다. 이 시는, 28자 속에 물아일체경의 봄의 서정을 유여하게 묘사해 놓은 가작(佳作)의 수묵화라 할 수 있겠다.


2) 재도시(載道詩)의 심원미(深遠味)

재도시(載道詩)란, 송나라 주돈이(周敦頣)가 “문장으로써 유도(儒道)를 표현한다."라고 한 뒤로 고문파(古文派) 시인들이 시로써 유교의 도덕적 가치를 표현하려는 시풍을 띠고 창작한 시이다.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서정적(敍情的)이기보다 도리를 설명하는 설리적(說理的)인 면이 강하여 자칫하면 문학적인 아름다움이 결여될 염려가 있음이 지적되었으나, 서정시에서 느끼지 못할 깊고도 그윽한 철학적 맛을 느낄 수 있음은 또 하나의 특징적 시풍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자연 경치를 읊음’이란 <영물(咏物)> 시를 보면,


龍猶鱗族潜居可(용유인족잠거가) 용은 비늘족이라 물에 사는 게 옳지만

鳳以禽遊避去奇(봉이금유피거기) 봉황은 새 벗인데도 피해노니 기이하도다.

衣石蒼苔藏磊落(의석창태장뢰락) 돌은 푸른 이끼 옷삼아 헌칠한 모습 감추고

對松白雪見貞姿(대송백설견정자) 솔은 백설을 만나 곧은 자태 드러내도다.

三深兎窟謀身計(삼심토굴모신계) 세 길 깊은 토끼굴은 몸을 보호할 계책이요

一室蝸頭分內知(일실와두분내지) 한 집의 달팽이 머리로는 속마음 나뉨을 보임이로다.

鵠立狐媚受氣異(곡립호미수기이) 고니는 우뚝 서고 여우가홀리게 함은 받은 기품이 다름에서요

雲從風逐類從追(운종풍축류종추)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음은 끼리끼리 놂이로다.


 라고 읊었다.

두련(1․2구)은, 하늘을 날지만 용은 비늘족이라 물에 사는 게 맞는데 봉황은 새인데도 무리와 어울리지 않으니 기이하다 하여 상(想)을 일으켰다. 불가해 한 자연의 이치는 함련(3․4구)에서도 이어지는데 헌칠한 모습을 지어놓고도 이끼로 감추고, 소나무는 눈오는 겨울이라야 더욱 곧은 자태를 드러낸다 하였다. 게다가, 시상(詩想)이 전환되는 경련(5․6구)에서는 작은 토끼가 제 몸을 보호하러 세 길 깊이의 땅굴을 파고, 몸뚱이는 하나인데도 머리에는 자유 자제로 움직이는 두 촉수가 있음을 통하여 한 마음에서 두 생각을 동시에 발하는 이치를 본다고 하였다. 미련(7․8구)은 이 시의 결말로, 지상에 존재하는 생물들이 짓는 모습은 이미 하늘(자연법칙)로부터 받아 타고난 기질과 성품을 따라 본래적인 삶의 형상을 재현하는 것이라 노래하였다. 이같은 시는, 앞에서 살핀 서정시와는 달리 만상의 모습 뒤에 존재하는 이치를 생각하게 하여 저절로 사유(思惟)의 심원한 맛을 느끼게 됨은 사실이다.

다음은, ‘이른 봄의 꽃과 버들’이란 <조춘화류(早春花柳)> 시를 보면,


山花野柳正含胚(산화야류정함배) 산꽃 들버들 바로 씨눈 머금었음은

先得陽和一氣廻(선득양화일기회) 먼저 봄기운 얻어 만물의 원기와 통함일세.

性愛深紅鵑血染(성애심홍견혈염) 본성이 다홍색 사랑해 두견이 토한 피로 물들이고

類從姸綠草堤追(류종연록초제추) 끼리끼리 고운 녹색 붙좇아 풀난 둑이 다듬었네.

能知山味岩頭發(능지산미암두발) 능히 산미 알아 바위 꼭대기에서 피고

自好水心澗畔裁(자호수심간반재) 절로 수심 좋아해 개울둑에서 자라네.

若識化工生育妙(약식화공생육묘) 만약 조물주의 생육하는 묘한 이치 안다면

繁華不獨蕩人開(번화부독탕인개) 활짝 핀 꽃들이 유독 사람을 호리려 핀 것만은 아닐세.


 라고 읊었다. 두련(1․2구)은, ‘산꽃․들버들’이 남 먼저 봄기운 얻어 만물을 생성시키는 으뜸 기운(元氣)과 통하였음을 노래하였다. 함련(3․4구)은, 두련의 시상을 점층적으로 이어, 진달래는 다홍색 사랑해 망제(望帝)의 혼이 화한 두견이가 토한 피로 물들였다 하고 버드나무는 푸름을 좇아 풀이 무성한 둑을 다듬었다 하였다. 시상이 전환되는 경련(5․6구)에서는, 진달래는 산미(山味)를 알아 바위 위에서 피고 버드나무는 수심(水心)을 좋아하여 개울 둑에서 자란다 하였다. 타고난 기질과 성품대로 산천에 자리하고 있는 진달래와 버드나무를 제재로 하여 미련(7․8구)에서는, 삼라만상의 표면적 현상은 조물주의 생육법칙 속의 각자 고유의 모습이지, 결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하였다. 꽃의 아름다움을 음미하여 즐길 수는 있으나, 꽃의 존재까지를 내 것인 양 자부함은 더 큰 자연의 이법을 모름이 된다는 깊고도 원대한 철리적(哲理的)인 맛을 보게 하였다. 자연 속의 인간 존재는, 꽃과 나무와 귀천․고하․우열이 없는 공생적 존재임을 느끼게도 한다.


3) 현실 참여시의 우의성(寓意性)

앞의 제2장 생애 중 소헌(笑軒)의 현실인식을 약술한 바 있거니와 조선의 국운이 다 해 가던 난세를 살며 적극적인 현실참여는 아니었으나, 선비 본연의 인애(仁愛)와 의리(義理) 사상에 살고 그 실천을 사명으로 안 점에 있어서는 어느 선비 못잖았음을 살핀 바 있다.

소헌(笑軒)은 당시의 시풍(詩風)에 대하여 비판하기를,

“시인의 기상(氣像)은 만 가지로 같지는 않으나 오늘날의 시집(詩集)은 단지 언어를 공교롭게 함만을 숭상하니, (이는) 실로 성정(性情)을 읊조리는 시의 본뜻(本志)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시인이 현실에서 갖는 생각과 감정 곧 성정(性情)을 진솔하게 읊음이 언지시(言志詩)의 본뜻인데도 본질을 외면한 채 지엽적인 언어의 수식에만 힘을 씀은 시인의 자세가 아니라 하였다. 시 창작 태도이면서 현실 인식의 일면을 엿보게 한 시관(詩觀)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재능을 지니고도 등용되지 못한 선비의 불운함을 소와 말을 제재로 하여 위정자의 실책을 우의적(寓意的)으로 비판한 <영우(咏牛)> 시와 <영마(咏馬)> 시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모기를 읊음’이란 <영문(咏蚊)> 시를 보도록 한다.


晝伏林梢夜入室(주복임초야입실) 낮에는 숲에 숨었다 밤에는 집으로 들어

聲雷羽檄萬兵强(성뢰우격만병강) 나래쳐 우뢰소리 내니 만군의 병사보다 강하네.

身燥畏雨烟如砒(신조외우연여비) 마른 몸은 비상을 대하듯 비와 연기 싫어하고

性惡含人血以粮(성악함인혈이량) 성질은 고약하여 사람의 피로써 양식하네.

手打扇揮能走避(수타선휘능주피) 손으로 치고 부채 휘둘러도 용케 도망치고

夏來秋去識炎凉(하래추거식염량) 여름에 왔다 가을에 가니 염량을 아네.

終宵苦鬪朝眸酸(종소고투조모산) 밤새 고생 싸움 아침엔 눈알조차 시큰거리니

安得山庄此慮忘(안득산장차려망) 어찌하면 산장을 얻어 이근심을 잊으랴.


 두련(1․2구)의 모기는, 한 마디로 정정당당한 무리가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강자로 묘사되었다. 두련의 상(想)을 점층적으로 이은 함련(3․4구)의 모기는, 극약인 비상만큼이나 두려워 하는 비와 연기는 있으나 사람의 피로써 양식을 삼는 고약한 무리다. 모기가 비상만큼 겁내는 비와 연기는, 날개를 못 움직이게 하고 앞을 못 보게 하여 불구덩이로 빠뜨리게 하는 상대의 무기를 은유한 시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날개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비나 눈을 못 뜨게 할 만큼의 강력한 무기(방어책)를 지니지 못한 자로서는 자신의 피로써 모기같은 무리의 양식으로 제공할 수 밖에 없다. 이로써 보면, 모기로 상징된 존재는 곧 내적으로는 백성을 사지로 모는 탐관오리나 백성도 나라도 안중에 없는 전횡을 일삼는 세력얻은 당파 등이거나, 외적으로는 조선인의 고혈로 저들의 양식(국익)을 삼고자 하는 세계 열강의 야욕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상(詩想)이 전환되는 경련(5․6구)의 모기는, 주인보다도 방어에 능하고 게다가 세태의 변동이나 사물의 이치에 밝은 모기로, 주인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존재임을 우의(寓意)하고 있어 이같은 존재는 곧 강압적인 통상이나 수교를 강청해 오는 열강, 그 가운데서도 교활한 술책으로 주권을 잠식해 오는 섬오랑캐 왜인을 지칭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말로서의 미련(7․8구)은, 주인의 힘으로는 퇴치할 수 없는 모기떼(침탈자)가 서식할 수 없는 산장(별천지)을 갈구하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으로 마무리 지었다. 모기의 집요한 침탈의 행태는 서학(西學)의 범람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압력보다도 더욱 피부에 닿게 저들의 야욕을 교묘히 전개해 오는 도이(島夷)에 대하여 선각의 최익현이 왜인과의 통상조약을 반대하는 척사소(斥邪疏)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1876.1.27)될 때, 소헌(疏軒)은 소극적이나마 척왜사상(斥倭思想)을 시로써 우의(寓意)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의, 현실을 외면한 시는 문자화가 바로 사멸(死滅)이란 역사적 사실을 안 소헌(笑軒)은, 현실도피적인 안일 추구로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이 안고 있는 고뇌와 고통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가지려는, 선비 본연의 자세를 지키려는 의지 표현으로서 시를 쓰되, 총체적인 국망의 조짐을 어느 한 가지로 짚어 비판할 수 없기에 우의적(寓意的)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3. 소헌(笑軒) 산문세계(散文世界)의 특징

먼저, 소헌의 선비관을 살피고 각론에 임하도록 한다. 소헌은 선비도(道)에 대하여 유훈으로서 자손들에게 남긴 20여 조의 <가약(家約)>에 분명히 일러두었다.

“군신(君臣)은 하늘과 땅과 같아서 해와 달이 비추는 바나, 비나 이슬이 내리는 바가 되어 그 혜택을 입지 않음이 없다. 만약, 과거에 급제하여 북향(임금)하거든 임금의 일(국사)에 죽을지언정 비록 변란의 위태롭고 불안한 때에라도 사사로움을 도모하여 요행히 나라의 복록을 받는 자로서 수수방관함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또한 초야의 한가한 선비가 되더라도 충성과 임금을 사모하는 정이 없다면 아니 되니, 마음으로서는 간사하고 흉악한 것을 꾸짖고 손으로는 아첨하는 소인배를 베며, 갓난아이같은 백성을 대하여서는 경영하여 구제할 것을 생각하고 굶주림과 추움에는 한가지로 걱정함이 선비의 족속으로서 크게 마음을 쓰는 법의 제일이다. 삼가 망녕되이 조정을 헐뜯거나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버릇을 버리도록 하여라.”

이 글은, 선비의 도리 실현의 요체를 밝힌 유훈이라 하겠다. 요약하면, 벼슬하여 국록을 받거나 초야에 은거하거나 나라 위한 충성과 인애하는 마음으로 백성과 더불어 공생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선비의 도리를 저버림이라 하였다. 그러기에, 자신의 행불행을 하늘탓․남탓으로 돌리는 일이 곧 공자의 가르침인 불원천(不怨天)․불우인(不尤人)을 외면하는 일이라 경계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선비정신은 앞으로 확인될 것이다.


1) 선비도(道) 실현으로서의 양선(揚善)과 유도부호(儒道扶護)

(1) 양선(揚善)-효절부인을 천양함

남의 선(善)함을 천양함이 곧 선(善) 지향의 자기다짐임을 안 소헌(笑軒)이다. 어려서 직접 본 박씨부인의 효절(孝節)을 천양하는 <효절부기(孝節婦記)>를 써서 무명의 박씨부인의 거룩한 넋을 청사에 길이 살게 하였다. 이에, 기문의 전문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 <효절부기(孝節婦記)>

“본 동리(竹洞)는 원래 고령박씨가 자리잡아 살던 곳인데, 그 선대가 후계(后溪) 선생을 따라 가르침을 받을 생각으로 와서 살았고 인하여 자손이 살게 되었다. 옛 어른들께 전해져 오는 말을 들은즉 박씨가 중엽에는 번성하였고, 또 문필로 초시(初試)에 합격한 이도 많았으나 그들의 선영을 이장한 곳은 곧 조방골(鳥方谷)의 명당을 파괴한 곳이니, 그 뒤로 점점 쇠잔하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갑술년(1814)간에 이르러 원골(院谷)에 사는 신평이씨(新坪李氏) 붕(鵬)이라 일컬어지던 자가 박씨의 사위가 되어 와서 살았는데 생활이 아주 가난하여 품팔이로 생계를 꾸렸고 자녀조차 없었으며 다만 늙은 아버지만 있었다. 때에, 붕(鵬)의 나이가 단지 마흔 안팎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병을 얻어 죽으니, 박부인이 심히 몸을 상할 정도로 슬퍼하지 않았고 남들도 심히 애처롭게 여기지 않은 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일같이 여기는 것이었다. 남들은 다 말하기를, ‘이 부인에게는 단지 다시 볼 만한 것도 없으니, 반드시 개가할 뜻이 있으리라.’고들 하였다.

그 뒤, 몇 삼년이 되도록 길쌈을 하여 효성으로써 그 시아버지를 봉양할 뿐이었다. 그 시부가 병으로 죽자 그 이튿날 선영하에 장례하고 돌아와 밤에 목을 매어 스스로 죽었으니, 과연 절개와 효성을 겸하여 이룬 사람이 아닌가. 나는 그때 여나므 살 때었으나 부인의 얼굴을 보면 순수하고 고결하여 티클 한 점 없이 맑았었다. 그 뒤 이 사실은 잊혀져 더 이상 소문이 들리지 않았고, 그의 친정이나 시가의 피붙이도 지금은 멀리서나마 호응하는 사람으로서는 붕(鵬)의 5촌 조카뿐이라고들 한다.

아, 슬프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세상에 충효의 행실이 탁월한 자라도 미천하여 볼 만한 것이 없는 경우는 반드시 묻히어 없어지고 표창되지 못함이 많을 것이다. 내가 늘 그 행실을 가엾게 여기고 그 알려지지 않고 묻힘을 애통하게 여기어 이에 기록한다.”

위 기문은, 단락을 지은대로 기(起)․승(承)․전(轉)․결(結)의 4단 구성을 취하였다. 글은, 수식없이 간결체로 박씨부인의 효절행(孝節行)을 서술함에, 고귀한 사람도 이루기 어려운 효절을 쌍으로 이룩한 사실을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전부(轉部)에서는,

“나는 그때 여나므 살 때였으나 부인의 얼굴을 보면 순수하고 고결하여 티클 한 점 없이 맑았었다.”

라고 하였다. 비록 쇠잔한 양반의 후예로 이름없는 촌부의 아내가 되었으나 그녀의 마음이 고상하니 외모조차도 고결하였다고 회억하였다. 나아가, 결부(結部)에서는 세상 어떤 부인의 효절보다도 더욱 값진 박씨부인의 지순한 선심(善心)을 미천하다고 하여 인멸되게 함은 선비의 도리도 아니라 한 데에 <효절부기> 찬술의 목적이 있고 선비도(道) 실현의 사명감이 있음을 마무리 지었다. 이 기문은, 배우지도, 귀하지도 못했던 박씨부인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은 동일하다는 사실과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행한 일이 모두에게 얼마나 유익한가에 달렸음을 일깨운 효절부 박씨의 짧막한 전기라 할 수 있겠다.


(2) 유도부호(儒道扶護)-도(道)의 생명은 실천에 있음

이 항에서는, 유교(儒敎)․무속(巫俗)․불교(佛敎)의 영향력을 대비하여 논변한 <기도변(祈禱辨)>을 통하여 소헌의 유도부호 정신을 살피기로 한다.

“어떤 이가 묻기를, ‘세상에서 복을 비는 자는 반드시 산에서 정성을 드리고 부처에게 빌지만 아직 교(郊)에서 제사하거나 성인(聖人)에게 축원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무슨 이유인가? 교(郊)의 신이 산신(山神)에 미치지 못하여서인가, 부처의 신령함이 공자보다도 나아서 인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교(郊)에서 제사하는 곳은 뭇 사람이 거처하는 땅에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러므로 익숙하게 보고 알아서 신이(神異)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은 높이 솟고, 고요하며 적막한 곳이라 황홀하여 귀신이 엄연히 있는 것 같고, 불자는 불상을 탁자에 앉히고 중들이 조석으로 정성을 다한즉 더욱 신령하고 기이함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성인의 교화는 기도를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그 혜택을 입혀, 사람이 사람답고 아비가 아비다우며, 자식이 자식다운 것은 다 그 덕이다. 가정이 가정답고, 세상이 세상답고, 지아비가 지아비답고, 지어미가 지어미다운 것이 다 성인의 도(道)인즉 어찌 다시 기도하고 청원하는 일을 더 하리오?’라고 하였다.

묻던 이도 또한, ‘그렇다.’라고 하였다.”

이 글은 변론문으로, 묻고 대답하고 동의하는 식의 3단 구성을 취하였다. 유교와 다른 종교와의 영향 관계를 대비하여 유교의 우월성을 변증하는 과정의 제재가 참신하고 주제의식이 명쾌하다.

어떤 이의 물음의 핵심은, 유교에서 신봉해 온 교사(郊社)와 공자를 제사하는 석전제(釋奠祭)가 어찌하여 무속(巫俗)의 산제(山祭)나 불교의 염불보다도 영향력이 못한 것 같은 이유가 무엇인가 였다. 이 물음에 대해 ‘나’의 대답은 명쾌하였다. 무속과 불교는 불가시적인 영적(靈的) 존재에 대하여 기도하고 청원함으로써 흡사 복을 받을 것같은 신비감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가정의 질서(父父子子․夫夫婦婦)나 사람의 질서(人人)가 바로 된 것은 가시적이지만 기도하거나 청원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라, 천지의 혜택에 감사할 줄 아는 공자의 유교 사상에 가르침을 받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교화되어 오늘의 유교국에 이른 것이라 하였다.

요약하면, 불가시적이기에 신비감은 느낄 수 있으나 기도하고 청원하여도 진실로 얻어지는 것이 없는 반면에, 유교에서는 가식적이어서 신비감은 없으나 사람다운 사람․세상다운 세상이 된 현실이 곧 성인의 혜택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현실 사회는 신앙적(信仰的) 영성(靈性)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화적(敎化的) 실천성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분명히 논변하였다. 이 같은 논변은, 본문에서 거론된 불교나 무속 뿐 만이 아니라 소헌(笑軒) 당대에 범람해 왔던 서학(西學)이나 다른 종교나 학문까지를 통털어 유교의 우위성을 논증하고 나아가 유도(儒道)를 부호(扶護)하려는 유목적적인 작가의식에서 씌어진 글이라 할 수 있다.


2) 생육(生育)을 염원한 중화설(中和說)

소헌(笑軒)은, 천지 만물의 ‘나고 자람(生育)’ 보다 더 중한 일도 없다는 생각으로 ≪중용(中庸)≫ 제1장의 중화사상(中和思想)으로서,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情)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가운데(中)’라 하고 드러나 모두 절도에 맞은 것을 ‘조화화(和)’라 이르니, ‘중(中)’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道)이다.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 라고 한 말로 ≪중화설(中和說)≫을 지어 중화사상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에, 논설의 전문을 먼저 소개한다.

“중(中)이란, 그 하나를 잡음(執一)이니, 풀어서 말하면 길고 짧은 것의 중간이 중(中)이 아니고 두 끝의 경중의 저울추가 일치하는 부분이 바로 중(中)이다. 그러므로, 저울로 물건을 달 때 저울추의 (눈금이) 많고 적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저울추가 일치하는 부분을 보는 것과 같으니, 그것이 바로 중(中)이다.

화(和)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감정이) 나오기 전을 화(和)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비록 이미 발했다 하더라도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이 바로 화(和)이다. 그러니, 화창한 봄날 날이 따뜻할 때를 화(和)라고 할 뿐만 아니라 비록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려 추울 때라도 계절의 차례가 지켜지고 있다면 또한 화(和)이고 어긋난 것이 아닌 것과 같으니, 이는 즐거울 때를 화(和)라 할 뿐만 아니라 슬플 때라 하더라도 당연한 절도를 지킨다면 화(和)를 그릇침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성인께서 이른바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 자라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논설의 주지(主旨)가 뚜렷하고 표현이 간결하며 명쾌하다. 우리 마음의 중정(中正)함을 감정의 발하기 전이나 발한 뒤를 동시에 보려 하였고, 조화(和)로움조차도 봄․겨울, 즐거움․슬픔의 경우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중화(中和)의 의미를 극명하게 논하였다. 이같은 중화사상(中和思想)은, 국운이 기울고 세계 질서가 어지러워진다고 본 당세의 혼란한 사회질서와 약육강식의 냉혹한 열강의 각축장에서 벗어나, 상생(相生)의 생육(生育)을 도와 평화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원하는 소헌(笑軒)의 염원 자체일 뿐만 아니라 당대 뜻있는 모든 이의 염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한 편의 논설에서도, 소헌(笑軒)이 얼마나 선비의 도리에 충실하려 했던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 선비의 참 삶이야말로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떳떳한 삶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하였다 하겠다.


3) 대장부(大丈夫)를 희구한 양론(量論)

소헌(笑軒)은, 도량(度量)이 넓고 좁음과 크고 작음의 예를 바다와 개천으로 비교하여 논하고 궁극적으로는 대장부(大丈夫)를 희구하는 작자의 심경을 드러낸 <양론(量論)>을 제작하였다. 이에, 그 전문을 먼저 소개한다.

“도량(量)이 크면 천지 만물을 다 나에게 담을 수 있고, 도량이 작으면 한 알의 겨지씨나 반 웅큼도 다 나에게는 넘치게 된다.

무릇, 물건으로 큰 것은 바다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고기와 용이 살고, 양자강과 한수의 조수(潮水)나 9년 홍수의 물이 바다로 돌아가도 받아서 넘침이 없고, 7년 가뭄에도 일찍이 위축되거나 준 적은 없다. 물의 작은 것으로는 개천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다 넘어지고 범람하여 제방을 파괴하고 방둑을 훼상시킨다. 한 주먹을 던지면 또한 가로막고 막혀 통하지 않고, 하루 볕에도 역시 마르고 수원이 끊어진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사람 또한 물의 대소와 같아서 걸주(桀紂)의 포악함으로도 뜻을 빼앗을 수 없고 진나라 초나라의 부강으로도 그 존귀함을 더할 수는 없다. 그 도량이 작으면 필부의 용기로 일일이 비교하여 어지러이 다투고 아주 작은 벼슬에 있는 사람도 미워하여 방해를 한다.

사람은 응당 바다로써 도량(量)을 삼아서, 개천으로써 막힘이 없게 한 뒤라야 가히 대장부의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기부(起部)에서 말하고자 하는 생각(想)을 일으켜, 도량(度量)이 크면 천하의 만물도 내가 수용할 수 있지만 작으면 겨자씨 한 알도 담을 수 없다고 전제하였다.

승부(承部)에서는, 도량의 넓음과 좁음․큼과 작음을 바다와 개천으로 대비하여 논하였다. 바다는 많아도 넘침이 없고 적어도 모자람이 없기에 늘 막힘없이 통하지만, 개천은 많으면 넘치고 적으면 메말라 늘 막히어 통함이 없다고 상(想)을 이었다.

전부(轉部)에서는 논한 바를 사람의 경우로 전환시켜 논하였다. 도량이 크고 너르면 포악무도한 걸주라도 그 뜻을 빼앗을 수가 없고 진나라․초나라의 부강으로도 그 존귀함을 더할 수 없기에 이런 사람은 이미 천하사를 다 수용한 경우이다. 그러나, 도량이 작고 좁으면 필부의 용기로 남과 일마다 다투고 시샘하며 방해하는 사람이니 그 어떤 일도 수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부(結部)에 오면, 주제의식을 분명히 드러내어 대장부론(大丈夫論)을 매듭지었다. 결부의 말은 맹자의 이른바,

“천하의 넓은 집(仁)에 살며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대도(大道․義)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道)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道)를 행하여,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이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엄과 무력이 지조를 굽힐 수 없는 것, 이것을 대장부(大丈夫)라 이른다.”

라고 한 말의 주지(主旨)를 축약하여, 소헌(笑軒)은 자신의 주장을 펴되 바다같은 도량을 지녔을 때에만 대장부(大丈夫)의 이름을 얻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소헌(笑軒)이 살았던 당대는 세계 열강의 외압에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그러나, 대아적(大我的)인 자세로 나라와 겨레의 미래를 수용할 만한 도량(度量)을 지닌 대장부(大丈夫)는 없고, 한갓 일신의 권익(權益)만을 추구하여 소낙비에 넘치고 하룻볕에 바닥을 드러내는 개천같은 소인배만 득실거리는 현실은 풍유(諷諭)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소헌(笑軒)은 또 긍정적인 쪽에 서서 현실을 타개할 대장부(大丈夫)의 탄생을 희구한 데에 이 논문의 특징이 있다 하겠다.


Ⅳ. 맺는 말

소헌(笑軒) 김익주(金益冑․1806~1890)는 상산김씨 전서공파(典書公派)의 후예로, 상주 구도곡(求道谷․서당골)에서 1806년 6월 14일 태어났다. 파조(派祖) 이래 8대조는 문반에 오른 사대부가였으나 소헌의 대까지 6대조는 벼슬없이 유업(儒業)을 지킨 사족이었다. 소헌은 평생에 가문을 흥기시키기에 있는 힘을 다하였으나 입신출세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는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선비로서의 도리를 다 함에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함 없이, 오로지 선비의 도리를 하고 못함이 자신에게 달렸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궁행한 올곧은 선비였다. 81세가 되는 해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정3품)에 올랐으며 1890년 2월 26일, 치욕적인 한일병합(1910) 20년 전에, 별세하였다.

소헌(笑軒)은 어려서부터 영민한 자질을 타고난데다 일신(日新)하는 학구열로 학문과 수신에 열성이어서 스승(趙氏, 성명 미상)으로부터 크게 기대받았다. 학문은 주로 공맹(孔孟)의 실천유학을 근본으로 삼고 성리학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문장에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가문을 중흥시킬 사명감으로 과거장에 십여 차 왕래하였으나 인재등용의 상도(常道)가 파괴된 당대에서는 한미한 집안의 출신으로서 출세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40대 이후는 과거업을 단념하고 선비 본연의 자세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이루었다. 소헌(笑軒)이 살았던 당대는 범람해 오는 서학(西學)의 영향과 세계 열강의 강압적인 수교․통상의 외압으로 주권이 흔들리고 국운이 기울던 시기였다. 외환(外患)이 국가 존망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데도 나라와 백성의 안위(安危)조차 안중에 없는 지경에 이르러, 정변과 민란은 계속되었다.

소헌(笑軒)은, 비록 벼슬하여 사회적인 지위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선비 본연의 자세를 지킨 사실은 그의 자서전적인 <소헌자서(笑軒自序)>에 잘 나타났다. 스스로의 호를, ‘웃음을 잃지 않는 집(사람)'이란 의미를 함축한 소헌(笑軒)이라 하였다. 게다가, ’소자(笑字)‘는, 하늘(天) 위에 대나무(笑)가 솟은 형상이라 언제․어디서나 대나무같은 절조를 지키되 모두가 더불어 웃는, ’살리는 마음‘(春意)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서 ’소헌(笑軒)‘이란 자호를 정하였던 것이다.

본 고는, 소헌(笑軒)의 문학세계를 살펴 그가 어떤 사상과 정신을 갖고 춘의사상(春意思想)을 실현했던가를 밝히었다.

먼저, 소헌(笑軒) 시세계(詩世界)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첫째, 소헌은 초야에 은거하여 절로 자연과의 동화에서 물아일체경의 넉넉한 시정(詩情)을 드러낸 시가 많음이 그 특징의 하나였다. 당대 사회적으로나 농촌의 삶이 비록 척박할지라도 생생불멸하는 자연과의 동화 속에서 정신적인 별천지를 구축하였던 시인의 유여한 시정은 독자에게도 넉넉함으로 다가왔다.


둘째, 재도시(載道詩)의 심원미(深遠味)를 맛보게 한 시가 많음이 그 특징의 하나였다. 서정시와는 달리, 삼라만상은 그렇게 만든 까닭(所以然)으로서 천리(天理․자연법칙)의 조화물이란 철리적(哲理的)인 사유(思惟)의 깊고 그윽한 맛을 느끼게 하는 특장이 있었다.


셋째, 현실 참여시에 우의된 현실성이 돋보임도 그 특징의 하나였다. 소헌은 평소, 백성을 갓난아기처럼 보았고 나라 위함에는 평화 시나 변란 시가 다를 수 없다고 여긴 선비였다. 국운을 기울게 하는 당대 내우외환의 원인이나 주체에 대하여 신랄한 풍자나 비판, 직설적인 고발이나 저항심을 드러낸 현실 참여시는 없다. 그러나, 은미한 우의성(寓意性)을 띤 현실 비판으로서 일본의 간교한 침략행위를 모기가 사람 괴롭히는 행동에 비유하여 ‘모기’ 없는 세상, ‘모기’가 서식 못할 별천지를 희구하는 조선인의 심정을 우의해 놓았다.


다음은, 소헌(笑軒) 산문세계(散文世界)를 살펴 보았다.


첫째, 선비의 도리를 양선(揚善)함에서 찾으려 한 특징이 있었다. 남의 지극한 선(至善)을 천양함이 곧 지선을 지향함이라 믿어, 어려서 한 동리에서 직접 본 고령박씨부인의 효절(孝節)을 <효절부기(孝節婦記)>로 천양하였다. 지선(至善)에는 인물의 귀천․고하․유무명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미천하고도 이름없는 박씨부인의 숭고한 효절을 기리어 상주 인물사에 남게 하였다.

또한, 선비의 도리가 유도(儒道)를 부호(扶護)함에 있음을 <기도변(祈禱辨)>으로 표명하였다. 유교는 불가시적인 신성성(神聖性)은 없으나, 어느 종교보다도 가시적인 실효(實效)가 있음을, 유교로 국시(國是)를 삼은 조선을 실증물로 보이었다. 이같은 유도 부호의 이면에는, 유도가 위기에 놓였음을 염려하는 선비의 원려(遠慮)는 언외(言外)에 우의되었음도 느낄 수 있었다.


둘째, 나고 자람의 생육(生育)을 귀히 여기는 특징을 들 수 있었다. <중화설(中和說)>은, ‘중화(中和)’의 지극함이야말로 천지의 만물을 생육(生育)시키는 원동력인 동시에 천지의 자연 질서를 바르게 하는 원동력임을 밝히었다. 이 논설 역시 주제의식의 이면에는 당대 국가 사회가 중화(中和)를 잃어 국권과 국기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다는 위기의식이나, 동족끼리 자리(自利) 추구에 나라도 백성의 안위도 안중에 없는데다 열강의 약육강식이 노골화되는 현실적인 위기 의식은 소헌의 원려로서 또한 언외(言外)에 우의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셋째, 대장부(大丈夫)의 출현을 희구한 특징을 들 수 있었다. 소헌(笑軒)은 대장부와 소인을, 바다와 개천에 비유하여 논한 <양론(量論)>으로서는 도량이 크고 넓으면 그 수용함이 어떤 경우에나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바다가 온갖 물을 수용하는 것 같고, 도량이 작고 좁으면 소낙비에 넘치고 하룻볕에 바닥이 드러나는 개천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통하여 막힘없는 도량으로 만물을 수용하는 대장부가 되기를 희원하였고 막히어 통함이 없어 겨자씨 한 알도 지니지 못하는 소인이 되어서는 아니됨을 논하였다. 난세를 구제할 대장부의 출현을 희구한 소헌의 심정은 동시대를 살았던 지사(志士)들의 공통된 염원이었음도 쉽게 느끼게 하였다.

요약하면, 소헌(笑軒) 김익주(金益冑․1806~1890)는, 조선의 국운이 끝나가던 역사적인 혼란기에 태어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지사(志士)적인 사명과 지조를 지킨 선비요 문장가였다.

유고로는, ≪소헌유고(笑軒遺稿)≫(單)에 시(詩) 38제(題) 41수, 서(書) 1편, 서(序) 2편, 기(記) 3편, 설(說) 2편, 논(論) 2편, 잡저(雜著) 9편, 유사(遺事) 1편 등을 수록하였는데 양적으로는 적으나 질적으로는 가작이 많고 특히 산문에 능한 것으로 보았다.

소헌(笑軒)의 문학세계는, 시의 유여한 시정(詩情)과 철리적(哲理的)인 심원미(深遠味)와 현실참여적인 우의성(寓意性)이 특징적으로 드러났고, 산문의 선비도(道) 실현으로서의 양선(揚善)과 유도부호(儒道扶護) 사상과 생육(生育)을 염원한 중화사상(中和思想)과 대장부(大丈夫)의 출현을 희구한 도량론(道量論) 등은 문학성이 높은 가작들이란 특징을 들 수 있다.

보다 전문적인 소헌문학 연구는 앞으로 대방가를 기다려 이룩될 것으로 믿으며, 본 고는 소헌의 문학을 통하여 상주문학의 영역을 넓힘에 작은 보탬이 되게 하고 나아가 상주인물사에 한 분 선비를 소개하는 데서 그친다. 첨기할 일은, ≪소헌유고(笑軒遺稿)≫를 졸역(拙譯)하고, 조선말 국난기를 올곧게 살다간 선비요 문장가인 소헌선생과의 만남의 계기를 마련해 준 소헌 현손 김연복 시인의 성심을 밝혀두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