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4호

상주학. 상주문화 제24호.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를 위한 변명(辨明)

빛마당 2015. 3. 28. 22:12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를 위한 변명(辨明)

- 성극당은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지 않았다 -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목 차

1. 머리말172

2. 누가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했는가?175

3. 성극당 김홍미선생은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지 않았다.

183

4. 맺는말190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를 위한 변명(辨明)

- 성극당은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지 않았다 -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1. 머리말

김홍미(金弘微)선생은 본관이 상주(尙州)이고, 자는 창원(昌遠)이며, 호는 성극당(省克堂)이다.

6대조 김상직(金尙直)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과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었고, 증조 김예강(金禮康)은 건공 장군(建功將軍)이었으며, 할아버지 김윤검(金允儉)은 장사랑(將仕郞)이었고, 아버지 김범(金範)은 경학(經學)과 덕행(德行)으로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냈다.

선생은 조식(曺植)과 류성룡(柳成龍)의 문인(門人)이었고, 류성룡의 형인 류운용(柳雲龍)의 사위였다.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1585년의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발탁되고,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어, 당시 형인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과 함께 옥당(玉堂)에 재직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리고 저작(著作), 예문관 검열(檢閱) 등을 거쳐 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였다.

1589년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도사(都事)로 복직되었고, 이어서 교리(敎理) 겸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을 거쳐 이듬 해《주역》경연관(經筵官)으로 있으면서 응교(應敎)․사간(司諫)․사성(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597년 좌부승지(左副承旨)․훈련도감 제조(訓練都監 提調)를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대사간(大司諫)․이조참의(吏曹參議)․승문원부제조(承文院 副提調) 등을 역임하고는 1598년 관직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듬 해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1604년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선생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하던 해에 강릉(江陵)에는 큰 비가 내려서 백성들이 큰 재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水災)로 죽은 자를 조문(弔問)하고, 굶주린 자의 진휼(賑恤)에 진력하다가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1605년 10월에 향년 49세로 현지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문헌(文獻)의 지방에서 생장하여, 타고난 기질이 아름답고 학문을 좋아한데다가 일찍이 어진 부형(父兄)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스승과 벗의 유익함을 얻어 덕성(德性)스러운 기국(器局)이 온화 고상하여 성대하게 문질(文質)을 갖춘 군자(君子)의 기풍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을 섬길 때는 늘 임금이 칭찬하였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명성(名聲)과 의리(義理)로 일생을 살았던 분이다.

그래서 장유(張維)가 지은 김홍미 선생의 묘갈명(墓碣銘)에는,

동남(東南)의 아름다운 산물은 화살대(箭竹)뿐만이 아니라 찬란한 정령(精靈)이 모여서 이러한 영걸을 탄생했도다. 행실은 치우친 바 없었고 말씀은 거친 바가 없도다. 비하자면 저 여번(璵璠)과 같아 종묘에 올릴 것이었도다. 찬란하고도 찬란한 경연에 경전(經傳)을 좌우에 진열했도다.

공이 그 모훈(謨訓) 베풀어 드나들며 모두 꿰뚫었으므로, 임금님 마음이 부지런하여 쉴 새 없이 기쁘게 탐구했도다. 한번 밖에 펼치지 못하고 아침의 이슬처럼 떠났도다.

매호산(梅湖山) 저 언덕의 자리에 한 조각 비석이 있도다. 내가 이 시(詩)를 지어서 그 면(面)에 새기었도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에 이런 대목이 있다.

“1597년 김홍미(金弘微)가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원균(元均)을 통제사(統制使)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래서 그 뒤 좌부승지·훈련도감제조를 거쳐,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승문원 부제조 등을 역임하다가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투옥되는 과정의 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원균(元均)으로 체임(遞任)하는 과정의 일, 이순신과 원균이 사이가 나쁜 일로 조정 대신들이 걱정하는 일, 철저하게 이순신을 미워했던 선조의 모습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동부승지 김홍미가 이순신을 탄핵 파면하게 하고 원균(元均)을 통제사(統制使)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은 없다.

따라서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의 기록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어 그 오류(誤謬)된 부분을 규명하고자 한다.


2. 누가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했는가?

 누가 이순신 장군을 탄핵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기록을 조사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된 것은 1591년(선조 24) 2월 13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사간원은 ‘이순신이 현감으로써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는 것은 관작의 남용’이라고 체차를 청했으나, 선조는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였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고 했다. 이듬 해 5월 23일에 전라수사 이순신(李舜臣)은 주사(舟師)를 동원해서 타도(他道)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매우 많이 되찾았다. 이순신 장군을 파격적으로 등용시킨 선조의 예감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비변사(備邊司)는 논상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가자(加資)하라고 명했다.

이 날이 임진왜란과 관련해서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처음으로 <선조실록>에 실린 날이고, 또한 첫 번째의 승전(勝戰) 기록이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두 번째 승전은 1592년(선조 25) 6월 21이었다. 이때에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한산도에서 회합을 한 후에 전선 80척을 거느리고 옥포(玉浦) 앞바다에서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7월 6일에는 노량에서 적선 63척을 불살라 버렸고, 7월 10일에는 안골포(安骨浦)에서 적선 40척을 불살라 버리고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었다. 이러한 승전에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 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였다.

이처럼 임진왜란 초전(初戰)에 조선 수군(水軍)들은 육군과는 달리 연승(連勝)을 기록하였으나, 이미 국토의 대부분은 왜군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그래서 1593년(선조 26) 7월 20일에 있었던 전라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의 치계에는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다’라며 정예(精銳)한 군사를 보내 달라 하였고, 이 치계에서 이순신 장군에 관해서는 단지 “1592년 6월 27일 좌도 수군 절도사(左道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이 ‘부산(釜山)·김해(金海)의 적선(賊船)이 웅천(熊川)으로 옮겨 모였는데 그 수가 7∼8백 척(隻)은 족히 된다.’고 치보(馳報)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탄핵을 받아서 서울로 잡혀오는 마지막 기록은 <선조실록> 85권(선조 30) 1597년 2월 6일의 기록이었다. 여기에서 선조는 우부승지였던 성극당 김홍미 선생에게 ‘이순신을 잡아 드리라’고 하명한 것이다.

왕명을 거역한 이순신 장군의 잘못을 탓하는 이야기들과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전시(戰時)에서 최선봉의 두 장수인 원균과 이순신 장군이 불화(不和)를 일으킨 것에 대한 우려와 걱정들이 수없이 대신들과 선조 사이에 오갔다.

그러나 우부승지 김홍미 선생이 ‘이순신을 탄핵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일은 없는 사실이다.

처음으로 ‘통제사 이순신과 이하 수사(水使)를 함께 추고하여 죄를 물을 것’을 청한 것은 1593년(선조 26) 윤 11월 6일이었다.

비변사가 ‘통제사 이순신 이하 수사(水使)를 모두 추고하여 죄 줄 것’을 선조 임금에게 청하고 나섰는데, ‘적선(賊船) 네댓 척이 출몰했을 때 능히 쫓아가 무찌를 수 있는데도, 좌우도(左右道) 수사(水使)가 버려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조정(朝廷)이 ‘수군(水軍)이 바다에 오래 있어서 견디기가 어려우니 잠시 군사들을 쉬게 하여 예기(銳氣)를 기르도록 허가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고 넘어갔다.

그리고 1594년(선조 27) 9월 19일에 비변사는, 거제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선조에게 아뢰면서 이순신 장군이 일정한 계책이 없이 그럭저럭 날만 보내는 것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1594년(선조 27) 11월 12일 경연에서 선조가 <주역>을 강하고 나자, 김수(金晬)가 슬그머니 원균(元均)과 이순신(李舜臣)의 불화설(不和說)에 대해서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선조가 불화의 원인을 묻자, 김수와 김응남은 ‘군공(軍功)’ 때문이라고 하였고, 정탁(鄭琢)은 ‘원균과 이순신이 다투는 일은 매우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1594년 11월 22일에 사헌부에서는 권율과 이순신을 나국(拿鞠)하고 체찰사 윤두수를 파직(罷職)하라고 청했다. 특히 이순신에게는 ‘사후선(伺候船) 3척이 실종되었고 그 배에 실린 군졸들은 거의 다 죽었는데도 숨기고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고, 이는 조정을 안중에 두지 않고 속이는 일을 자행한 죄목이라고 했다.

이날이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는 소리가 두 번째로 나온 날이었다.

그리고 이튿 날에는 사간원(司諫院)에서도 사헌부(司憲府)와 똑 같은 주장을 하였고,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5일동안 이런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해를 넘겨서 1595년(선조 28) 1월 13일에 비변사(備邊司)가 거제를 협공할 계책을 선조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제로 나아가서 결행하지 못하고 미룬 이유가 밝혀졌다.

이순신 장군이 애초부터 선조의 명령을 무시해서 거제를 침공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이 모여서 수군과 육군으로 거제(巨濟) 등처를 협공하려고 계획은 하고 있었으나, ‘당시 수군은 형편없이 약하고 육군 또한 잔약한데다가 군량까지 떨어진 판국이기 때문에 대거 진공하려 해도 그 형편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볍게 거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596년(선조 29) 6월 26일에 선조는 <주역>을 강독하고 나서 대신들과 천재(天災)와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장군에 관해서 의논하였다.

이때 성극당 김홍미(金弘微)선생이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장군에 관해서 논의하는 자리에는 처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때 김홍미선생은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장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천문에 관해서만 발언하였다.

정작 이날 회의에서 “밖에서 이순신(李舜臣)은 어떠한 사람이라고들 하는가?” 하면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제일 먼저 불을 지핀 사람은 선조(宣祖)였다.

그리고 이어서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라고 선조는 불평했다.

1596년(선조 29) 11월 5일에는 비변사가

“한산도(閑山島)는 1만 척의 배를 감출 수 있고 출입하며 방어하기에도 편리하므로 끝내 버릴 수 없는 땅이니, 이것이 한산에서 철수하여 거제(巨濟)로 옮기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라고 했다. 조정에서 이순신의 죄목으로 이야기하던 ‘한산도에서 거제도로 옮기지 않았던 사유’를 비변사(備邊司)가 뒤늦게 스스로 밝혀준 일이었다.

해를 넘기고 1597년(선조 30) 1월 23일에는 선조가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한 자리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김응서(金應瑞)에게 가등청정(加藤淸正)을 도모할 계책을 일러주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은 점’과 ‘통제사 이순신의 안일함’을 탓하는 말을 꺼내었으며, “원균을 수군의 선봉을 삼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에도 김응남이 “지당하십니다.”라고 화답한 반면에, 윤두수는 ‘이순신을 전라․충청통제사(全羅忠淸統制使)로 삼고, 원균을 경상통제사(慶尙統制使)로 삼자’는 조정안을 이야기를 했고,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역시 원균을 좌도(左道)로 보낼 것을 건의하였으나 선조가 모두 묵살하였다.

그러고 나서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도록 우부승지 김홍미 선생에게 전교했다.

“이순신(李舜臣)을 잡아올 때에 선전관(宣傳官)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元均)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

(傳于金弘微曰: “李舜臣拿來時, 以宣傳官標信及密符給送拿來, 而元均交代後, 拿來事言送。且李舜臣若領兵臨敵, 則拿來非便, 或戰罷間隙拿來事, 亦言送。)

이상의 기록이 <선조실록> 26권, 1592년(선조 25) 5월 23일부터, 우부승지였던 성극당 김홍미에게 ‘이순신을 잡아 드리라’고 하명한 선조실록 85권(선조 30)1597년 2월 6일 까지 약 6년 동안에 일어난 이순신 장군의 탄핵에 관련된 기록의 전부이다.

거점 한산도에서 거제에 출전하지 않은 것을 두고 왕명을 거역하고 조정을 우습게 보는 죄를 뒤집어 씌웠으나,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는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의 관청인 비변사(備邊司)가 변명을 해 주었다.

또한 많은 대신들이 이순신의 잘못을 탓하는 이야기를 했으나, 정작 이순신 장군을 탄핵한 것은 선조(宣祖)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간관(諫官)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 속에 우부승지 김홍미 선생이 ‘이순신을 탄핵’하는 주장은 없었다.


3. 성극당 김홍미선생은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지 않았다

성극당 김홍미선생은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는 발언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선조실록>을 보면, 성극당 김홍미 선생은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논의하는 조정(朝廷)의 회의에 딱 한번 참가했는데 그때가 1596년(선조 29) 6월 26일이었다.

이날은 선조가 <주역(周易)>을 강독하고 나서, 대신들과 함께 천재(天災)와 이순신 그리고 원균 등에 관해서 의논을 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성극당(省克堂) 김홍미선생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김홍미선생은,

“요즈음 천문 분야를 보면 우리나라가 아닙니다. 한 문제(漢文帝) 때에 혜성과 일식의 변이 한두 번 나타난 것이 아니었으나, 문제가 능히 덕으로 변이를 사라지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 재응이 없었습니다. 일념(一念)이 선(善)하면 경성(慶星)·경운(慶雲)이 나타나고, 일념이 악(惡)하면 열풍(烈風)·진뢰(震雷)가 나타납니다. 상께서 공구 수성하며 마음으로 힘을 다하소서. 그러면 하늘에 있는 변이가 사라질 것입니다.”

(弘微曰: “近觀天文分野, 則非我國矣。漢文帝時, 彗星、日蝕之變, 不一而現, 而文帝能以德消變, 故竟無其應也。一念之善, 慶星、慶雲; 一念之惡, 烈風、震雷。請自上恐懼脩省, 致力於方寸之間, 則在天之變, 庶可消矣。” )

라고 천재(天災)에 대한 이야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듬 해인 1597년(선조 30) 2월 6일에, 선조가 우부승지(右副承旨)인 성극당(省克堂) 김홍미선생에게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전교(傳敎)하였다. 선조가 우부승지에게 ‘잡아오라’고 전교한 것은 우부승지의 직책이 그러했기 때문에 내린 하명(下命)에 불과하였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이 서울로 잡혀 와서 옥에 갇히게 된 사연을 두 곳의 기록을 통해서 읽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이순신을 살린 전형적인 충신, 정탁(鄭琢)”이란 글이다.

“1597년 겨울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순신을 모함하기 위하여 자신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짓으로 서로 싸우는 듯한 형상을 짓고, 자신의 부하인 요시라를 간첩으로 파견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왜에 갔다가 다시 조선에 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토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민다.

이를 사실로 믿은 선조의 명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의 간사한 술책임을 알고 난색을 보이자, 사헌부는 ‘출정하지 않고 머뭇거렸다.’고 탄핵하고, 박성은 ‘참수’를 주장하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결국 이순신은 1597년 2월 26일 선조의 명으로 파직되어 한산도 포박과 한양 압송으로, 3월 5일 한양 의금부 옥(獄)에 갇혀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심문을 받는다.”

또 하나는 김육(金堉)이 쓴 <이순신의 비명(碑銘)>에 있다.

“원균은 성품이 본디 급하고 질투심이 많았으며, 또 스스로 선배라 하여 공의 아래에 있기를 부끄럽게 여겨서 지휘를 따르지 않았는데, 공은 입을 다문 채 그의 장단(長短)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 체차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았다. 그러자 원균은 조정의 대신들과 사귀어 온갖 방법으로 공을 모함하였다. 이때 적장(賊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거짓으로 서로 싸우는 듯한 형상을 짓고서, 요시라(要時羅)를 간첩으로 파견하여 먼저 가등청정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그 말을 곧이 듣고 공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라고 재촉하였는데, 공은 왜적들의 간사한 술책을 알아채고는 편의대로 하려고 하면서 난색을 보이자, 간관이 ‘출정하지 않고 머뭇거렸다’고 탄핵하였다.”

이 두 가지 기록에서 공통적인 이야기는 ‘이순신 장군이 왕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아니고, 이미 거짓 정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머뭇거렸을 뿐인데 현지의 전쟁터 사정을 모르는 조정에서는 이를 공식적인 죄명(罪名)으로 삼고 탄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해 조정은 모두 이순신을 죽음으로 내 몰았으나,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과 좌의정 정탁(鄭琢)은 그러하지 않았다. 특히 정 정탁은 1597년 3월에 이순신에 대한 ‘신구차(伸救箚)’ 상소문을 통해서,

“이순신은 명장(名將)입니다.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군기(軍機)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어서 이순신이 나아가지 않은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뒷날에 다시 한번 공(功)을 세울 수 있게 하소서.”

라는 간곡한 상소를 하였다.

이러한 일로 해서 1597년 4월 1일에 이순신은 28일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났으나,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밑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공(功)을 세우라는 명(命)을 받았다.

이 무렵, 성극당 김홍미선생의 벼슬은 승정원(承政院) 소속 우부승지(右副承旨)였다. 당시 승정원(承政院)은 왕명(王命)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이고, 우부승지는 이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다.

그런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된 사헌부(司憲府)의 직무는, ‘정치(政治)의 시비에 대한 언론 활동’, ‘백관(百官)에 대한 규찰(糾察)’, ‘풍속(風俗)을 바로잡는 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펴주는 일’, ‘외람되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일’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정치적 언론과 백관을 규찰해서 탄핵하는 언론은 대사헌(大司憲)·집의(執義)·장령(掌令)·지평(持平) 등만이 참여하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백관을 규찰해서 탄핵하는 일은 대사헌(大司憲)․집의(執義)․장령(掌令)․지평(持平) 만이 할 수 있으며, 승정원(承政院)의 우부승지(右副承旨)란 벼슬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부승지인 성극당 김홍미선생이 ‘이순신을 탄핵했다’는 것은 사리에 합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순신을 잡아드려라”고 하명(下命)한지 약 한 달이 지난 1597년 3월 13일에 선조는 우부승지(右副承旨) 성극당(省克堂)에게 이순신에게 벌하는 일을 대신들과 의논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조정을 기망(欺罔)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하기까지 하며(장성한 원균(元均)의 아들을 가리켜 어린 아이가 모공(冒功)하였다고 계문(啓聞)하였다.)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기 때문에 법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以備忘記, 傳于右副承旨金弘微曰 : 李舜臣欺罔朝廷, 無君之罪也; 縱賊不討, 負國之罪也。至於奪人之功, 陷人於罪,【指以元均年長之子, 而小兒冒功爲啓聞。】無非縱恣無忌憚之罪也。有此許多罪狀, 在法罔赦, 當按律誅之, 人臣而欺罔者, 必誅不赦。令將窮刑得情, 何以處之, 問于大臣。)

이 비망기(備忘記)를 보면,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欺罔)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라고 말한 것도 선조(宣祖)이고, ‘이순신이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라고 말한 것도 선조(宣祖)이며, ‘이순신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한 죄’라고 말한 것도 선조(宣祖)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순신이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라고 지적한 사람도 다름 아닌 선조(宣祖)였고 성극당(省克堂) 김홍미선생은 아니었다.

더구나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고 주창한 사람도 선조(宣祖)이고,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고 주창한 것도 다름 아닌 선조(宣祖)였다.

그러고 성극당 김홍미선생이 ‘이순신을 탄핵하여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는 일을 도왔고 그 후에 대사간(大司諫), 형조참의(刑曹參議),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고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은 기록하여, 흡사 선조(宣祖)와 가까운 원균(元均)의 후광을 입고 벼슬길을 순탄하게 간 것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원균(元均)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고나서, 1597년(선조 30) 7월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 나아갔으나 왜군의 유인전술에 속아 대패(大敗)하고 이 해전(海戰)에서 전사(戰死)하였다.

그러나 성극당 김홍미선생이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 된 것은 원균이 죽은 뒤인 그해 11월 22일이었고,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된 것은 이듬 해인 1598년(선조 31) 9월 20일이었으며,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된 것은 1598년 9월 26일이고,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된 것은 1598년 12월 30일이었다.

그리고 1599년(선조 32) 1월 3일에는 청송부사가 되었고, 1602년(선조 35)에는 여주목사, 1604년(선조 37)에는 강릉부사가 되었다.

이런 후반기의 벼슬은 모두가 원균(元均)이 죽고 난 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성극당 김홍미 선생이 후반기에 많은 벼슬을 한 것이 원균의 도움이라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는 일이고, 오로지 선조가 성극당을 신임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에서 지적한 ‘1597년’을 중심으로 성극당(省克堂)의 행적을 쫒아 보았으며, 결과적으로 위와 같이 선생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기록도 의문이다.

<선조실록>에는 1599년(선조 32) 1월 3일에는 청송부사가 되었고, 1602년(선조 35)에는 여주목사, 1604년(선조 37)에는 강릉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 9월 19일에 임지인 강릉에서 폭우가 쏟아져서 큰 수재(水災)가 일어나서 이를 수습하는데 진력하다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성극당(省克堂)은 1598년에 모든 벼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그 보다 7년 뒤인 1605년에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4. 맺는말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우리나라의 민족․역사․자연․생활․사회 등 한민족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이다. 이를 펴내기 위해 연인원 7,000명의 전문분야 학자들이 집필하였고, 수록된 항목이 무려 6만 5천 항목이다.

또한 이 백과사전을 펴내기 위해서 전문분야별로 8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원고를 집필하였으며, 1988년부터 4년 동안 전27권을 발간하였다. 비용은 국가예산 175억 원이 투입되었고, 200자 원고지만 해도 42만 장이 쓰여 졌다.

따라서 이렇게 국가에서 만든 백과사전(百科事典)에 오류(誤謬)가 있다는 것은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신뢰성(信賴性)이 떨어지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일이다.

성극당 김홍미선생에 대한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의 기술에는 적어도 4항목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첫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전공(戰功)과 함께 ‘어명(御命)을 곧 바로 시행하지 않았던 일’과 ‘원균(元均)과의 불화(不和)’ 등을 놓고 대신들이 논의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성극당이 ‘이순신 탄핵을 주장했다’는 기록은 없다.

둘째, 조선시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사헌부(司憲府)의 직무가, ‘정치의 시비에 대한 언론 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 ‘풍속을 바로잡는 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펴주는 일’, ‘외람되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일’ 등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직무 가운데에서, 백관을 규찰해 탄핵하는 언론은 대사헌(大司憲)․집의(執義)․장령(掌令)․지평(持平) 등만이 참여했다.

따라서 승정원(承政院)의 우부승지(右副承旨)란 벼슬은 백관(百官)을 탄핵하는 업무가 아니다.

그런데 성극당 김홍미선생은 당시 승정원의 우부승지이었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직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극당이 이순신 장군을 탄핵했다’는 것은 직책상으로도 맞지 않는 이야기다.

셋째, 마지막으로, 당시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수사(水使)로 천거했던 사람이 류성룡이었고, 그 후 계속해서 이순신을 옹호하고 있었던 사람이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었다. 그리고 류성룡 대감은 김홍미선생의 스승이었고, 장인(丈人)인 류운용(柳雲龍)선생은 류성룡 대감의 형님이었다.

이런 전통적 가학연원(家學淵源)과 세의(世誼)를 버리고 김홍미선생이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였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넷째,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기록도 의문이다.

<선조실록>에는 1599년(선조 32) 1월 3일에는 청송부사가 되었고, 1602년(선조 35)에는 여주목사, 1604년(선조 37)에는 강릉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 9월 19일에 임지인 강릉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성극당(省克堂)은 1598년이 아니고 7년 뒤인 1605년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것이다.

따라서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있는 성극당 김홍미선생의 기록에 대해서는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