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尙州)와 견훤왕(甄萱王)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산신문 취재본부장
강 효 일
1. 들어 가면서
상산지(商山誌)와 상주지(尙州誌)에는 상주의 견훤왕(甄萱王, 867∼936)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상주역사지(尙州歷史誌)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서 신라와 상주와의 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이에, 여기서는 상주에서 태어난 견훤왕이 후백제를 세우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행적을 소개하기로 한다.
2. 출생과 설화
후백제를 세운 견훤에 대한 기록인『삼국사기』와『삼국유사』후백제 견훤조에는 역사기록이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대체적으로 상주 가은현 사람이라는 것이 공통이지만,『고기』의 기록이나 구전설화에는 지렁이의 자손이었다는 야래자(夜來者) 이야기로 전해진다.
견훤의 출생과 관련하여 구전되는 설화의 내용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첫 번째는 견훤의 출생담과 관련된 설화 즉, 야래자형을 중심으로 한 출생담이고, 두 번째는 오뉘힘내기형, 세 번째는 견훤과 관련된 증거물이나 전설, 네 번째는 지명유래, 다섯 번째는 마을 공동체신앙과 관련된 영험담, 그리고 여섯 번째는 기타 설화로 구전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견훤의 출생담에는 야래자형이 지배적이다. 야래자형은 “한 마을에 처녀가 살았는데 밤마다 남자와 동침하여 태기가 생기지만, 그 남자를 알지 못해 처녀가 괴이하게 여겨 바늘을 도포자락에 꽂아 다음 날 확인해 보니 동굴에 사는 지렁이였다. 그래서 낳은 아이가 누구이다”라는 줄거리이다.
실제로 당시 상주목 가은현(현, 문경시 가은읍 작천리)에는, 야래자형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다만, 작천리의 아차마을에는 ‘금하굴’이라는 곳이 크게 주목을 받는다. 즉, 주민들에 의하면 바늘에 꼽힌 지렁이가 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지렁이와 관련된 전설은, 전국적으로 상주를 비롯하여 옥구군, 김해군, 정읍군, 남원군 등에서도 견훤의 탄생담이 전해지고 있으며, 함평이나 안동 등지에도 견훤과 지렁이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또한,『삼국유사』에 나오는 광주 북촌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딸 하나가 용모가 단정하였다. 그의 부친에게 말하기를 매양 자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한다고 하자, 아버지는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남자의) 옷에 꿰메어 두라고 하자, 바늘을 꽂은 후 날이 밝아 실을 찾아보니 북쪽 담 아래의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었다. 그 후 딸은 임신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나이 15세에 자칭 견훤이라 하였다”고 한다.
“견훤은 상주목 가은현 사람이다. 함통(咸通) 8년(867) 정해생으로, 본래 성(姓)은 이씨(李氏)였으나 뒤에 견씨(甄氏)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친 아자개는 농사꾼이었으나 가세(家勢)를 일으켜 광계 년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자칭 장군이라 하였다. 그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중 견훤이 걸출하여 지략이 많았다.
견훤이 강보에 쌓였을 때 견훤의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그 어머니는 식사를 가져와 일을 돕느라고 견훤을 수풀 밑에 그냥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견훤에게 젖을 먹였고, 견훤은 자랄수록 체모가 특이하고 생각이 남달라서 보통 사람과 달랐다고 한다.
3. 후백제의 개창
견훤은 뜻을 세우고 종군하여 서울로 갔다가 서남해의 방비로 나가 있었는데 늘 창을 베개삼아 적을 기다리며 군무에 힘 썼고 그 용기가 항상 다른 군사들보다 앞섰다. 그래서 그 공로로 비장(裨將, 보좌관)이 되었으며, 신라 51대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의 벼슬은 ‘신라서면 도통지휘 병마제치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 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공’(新羅西面 都統指揮 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 全州刺史 兼 御使中丞 上柱國 漢南郡開國公)이었으며, 식읍(食邑) 2천 호를 받았다.
그러나 진성여왕은 사랑하는 남자들을 항상 옆에 두어 그들이 국권(國權)을 마음대로 농락하게 하였기 때문에 기강(紀綱)이 몹시 문란하여졌고, 또한 기근(饑饉)이 심해서 백성들은 사방으로 떠돌아다녔으며, 벌떼처럼 도적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럽게 되었다.
이때 견훤은 딴 마음을 먹고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서 서울의 서남주현을 쳤는데 그가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에게 호응하여 한 달사이에 오천 명의 무리가 되었다.
진성여왕의 부정부패 때문에 신라 전국의 호족들이 납세를 하지 않아서 진성여왕은 각 지역에 사신을 파견하여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지방 관리들은 책임량 달성을 위해 백성을 심하게 닥달하여 민심은 흉흉해지고 지방마다 도적들이 떼를 지어 설치고 다녔다.
이러는 와중에서 889년 사벌(沙伐)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났다. 이 농민 봉기를 주도한 인물은 원종⋅애노, 아자개 등이었다. 그들은 사벌(沙伐)의 군주 ‘우연’을 죽이고, 사벌성을 장악하였다. 그래서 진성여왕은 영기에게 농민군을 진압하게 했으나, 영기는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진군하지 못했다.
그 소식을 접한 진성여왕은 영기를 참수하고, 사벌 군주의 아들을 군주로 삼아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농민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때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성을 장악하고 군벌을 형성하자 견훤은 상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왔다. 신라 상주 관할지역 11개 군, 33개 현에서 890년에 5천의 군사가 상주성에 모여 들었다. 이때 견훤의 나이는 26세였고 후백제의 왕이 되었다.
북원의 적괴 양길이 강성하여 궁예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신하자, 이 말을 들은 견훤은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이렇게 세력을 기르며 서쪽지방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민들은 그를 맞아 위로하므로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였다. 그는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런 까닭으로 진한, 변한은 우리나라를 뒤따라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 년이나 내려왔는데 의자왕 때에 당 고종은 신라의 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으로 하여금 선병 13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 김유신은 있는 군사를 다 거느리고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러 당병과 연합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그래서 ‘지금 내 완산에 도읍을 세우고 의자왕의 원한을 풀어 주련다.’고 하며 완산주(지금의 전주⋅완주 일원)에서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모든 관서를 설치하고 관직을 분정하였는데, 이때가 신라 효공왕 4년(900) 때의 일이다.
4. 견훤왕의 행적
이렇게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사신을 오월로 파견하니, 오월왕도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겸교태보의 벼슬을 더하고 그 밖의 벼슬은 그전과 같았다.
신라 효공왕 5년(901)에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신라 효공왕 14년(910) 견훤은 금성이 궁예에게 투항하는 것을 보고 노하여, 보기 삼천 명을 거느리고 금성을 포위하고 10일 동안이나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신라 신덕왕 원년에 견훤은 궁예와 덕진포에서 싸웠다. 그런데 신라 경명왕 2년에(918) 철원의 민심이 흉변하여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죽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었다.
이에, 견훤은 이 말을 듣고 그해 8월에 일길찬 민극을 파견하여 이를 하례하고, 공작선과 지리산 죽전을 바쳤다. 또한 오월에도 양마를 바치니, 오월왕도 사신을 보내어 이에 답례하고 중대부의 벼슬을 더 주고, 그 밖의 벼슬은 그전과 같았다.
신라 경명왕 4년에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보기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으로 옮겼다. 신라 경명왕은 아찬 김율을 고려로 파견하여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므로, 태조는 곧 군사를 내어 이를 구원하게 하니, 견훤은 이 말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이에 견훤은 고려 태조와 겉으로는 서로 부드럽게 하는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상극이 되었다. 신라 경애왕 원년 7월에 견훤왕은 아들 수미강을 파견하여 대야성, 문소성의 군사를 내어 거느리고 조물성을 공격하였으나, 성병(城兵)들은 고려 태조를 위하여 결사적으로 수비하는 바람에 이기지 못하였다.
그 해 8월에 견훤은 사자를 파견하여 태조에게 총마를 받쳤다. 그 다음 해 10월에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보기 삼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으로 쳐 들어가니 태조 또한 정병을 거느리고 나와서 서로 격전을 하였는데, 서로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일시 화평을 하여 그 군사들을 피로하게 만들려고 글을 보내어 화친할 것을 청하고, 당제 왕신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이를 승낙하고 의생 진호를 교질로 보내 왔다.
그해 12월에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거창 등 20여 성을 공취하였다. 그리고 견훤은 사신을 후당으로 파견하여 번병이 될 것을 말하니, 후당 장종은 그에게 ‘검교태휘 겸 시중 판백제군사’의 벼슬을 주고, 전례에 의하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 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 병마제치등사 백제왕’으로 삼고 식읍 2천 5백호를 주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견훤이 보낸 질자 진호가 갑자기 죽었는데 견훤은 이를 고려에서 죽인 것으로 의심하고, 곧 고려의 질자 왕신을 옥에 가두고는 사자를 고려 태조에게 파견하여 전년에 보낸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태조는 웃으면서 이를 돌려보냈다.
신라 경애왕 4년 9월에 견훤은 근품성을 공취하여 이를 태워 버리고 나가서 신라의 고울부를 습격하고 신라의 서울 근방으로 진박하니,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그해 10월에 고려 태조는 군사를 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5. 신라 금성의 침략
견훤은 갑자기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금성을 침입하였다. 이때 경애왕은 부인과 궁녀들로 더불어 포석정에 나아서 잔치를 베풀고 놀며 즐기다가 갑자기 견훤이 쳐들어오므로 크게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서 경애왕은 부인과 함께 성남의 이궁으로 들어갔는데, 모든 시종, 신료들과 궁녀. 영관들은 다 난병에게 잡혔다.
그러고 견훤은 군사들은놓아 경애왕(재위 924∼927)을 죽였고, 궁중으로 들어가서는 경애왕 부인을 끌어내어 어지럽히고, 왕의 족제 김부(金傅)를 왕(경순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왕제 효렴과 재상 영경을 사로잡고, 나라의 창고에 간직한 진기한 보배와 무기와 자제들과 각종 공인들을 탈취하여 신라 금성을 떠나 그 서울로 돌아갔다.
이때 고려 태조는 신라를 돕기 위하여 스스로 정기 오천 명을 거느리고 공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견훤을 만나 크게 격전하였으나, 고려 장군 김낙과 신숭겸 등은 전사하고 태조도 겨우 몸을 빼어 죽음을 면하였다. 이에 견훤은 이긴 기회를 타서 대목군을 공취하였다.
한편, 거란사 사고, 마돌 등 35명이 내빙하므로, 견훤은 장군 최견으로 하여금 그들은 반송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북풍을 만나 당의 등주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가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신라의 군신들은 국세가 쇠약하여져서 다시 부흥하기 어려우므로, 고려 태조를 이끌어 결호를 맺고 구원을 청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견훤은 스스로 신라를 경략할 마음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이를 먼저 도모할까 염려되어 급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왕경으로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을 세우고 온갖 작폐를 하였던 것이다.
6.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
이러한 형세에 놓이자, 그해 12월에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지난 번에 신라 국상 김웅렴 등이 곧 족하를 불러 입경하게 하였는데, 이는 작은 자라가 큰 자라 소리에 응하고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은 폐허가 될 것입니다. 내 이에 먼저 시적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금호의 부월을 휘두르며 백료들에게 밝은 햇빛처럼 맹세를 받고, 6부에 유시하여 의풍으로써 타일렀는데, 뜻밖에 간신들은 도망하고 국왕은 죽는 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드디어 경명왕의 표제이고 헌강왕의 외손인 김부를 새 왕으로 받들고 권하여 즉위하게 하였는데, 위태롭게 된 나라를 다시 세우고 임금이 죽으면 임금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마땅히 있을 일이 아닙니까? 족하에게 자세한 충고는 하지 않겠으나 부질없는 유언을 듣고서 온갖 계책을 마련하여 왕위를 엿보고 많은 지방을 침략하였으나, 아직도 능히 나의 말머리를 보지 못하였고, 나의 쇠털 하나도 빼지 못했습니다. 이 겨울 초에 도두 색상은 성산진 아래에서 항복하였고, 이달 안에 좌장 김낙의 해골을 미라사 앞에 내놓게 하고, 살획함이 많고 사로잡음도 적지 않았습니다. 강하게 약함이 이와 같으니 승패도 가히 알 것이 아닙니까? 기하고자 하는 일은 활을 평양성의 다락에 걸고 내 말이 패강의 물을 먹게 할 것이나, 전년 7월에 오월국사 반상서가 이르러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말하기를,
「경은 고려와 오랫동안 화호를 통하여 왔고 서로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근래에 질자가 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는 화친하던 구호를 저버리고 서로 끊임없이 강토를 침략하며 싸움을 그치지 않으므로, 지금 사신을 파견하여 경략하며 경에게 보내고 또 글을 고려로 보내니, 마땅히 서로 친선을 도모하며 영원히 싸움이 없도록 하기를 바라오」
하였는데 나는
‘왕실을 높이는 의에 돈독하고 대국 오월국을 섬기는 일에 전념해 오던 터라 이제 조유를 받들고자 하오. 족하는 싸움을 그만두려 하면서도 그만두지 아니하고 오히려 싸움의 괴로움을 조성하려 하는 것을 염려하오. 이에 지금 조서의 뜻을 적어 보내는 것이니, 청컨대 이를 마음속에 넣고 모든 것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또한 토끼와 사냥개가 서로 싸워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면 마침내 조롱을 받을 것이오. 조개와 황새가 버티면 또한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끝내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면 흉하게 된다는 말을 경계하여 후회할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 해 정월에 고려 태조는 견훤에게 답서를 보내 말하기를,
「오월국통화사 반상서」의 전한 바의 조서 1통과 겸하여 족하의 적어 보낸 긴 사연을 받아 보았습니다. 생각컨대, 오월 사신의 조서를 이끌어 보니 모두 좋은 말이고 겸하여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받들어 읽고는 오직 감격에 넘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족하의 글을 펴보니 혐의를 없애기 어려워 지금 돌아가는 사신에게 의탁하여 문득 이 심회를 펴려하오. 나는 위로 하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 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직권을 맡아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삼한이 재액을 만나고 구토가 흉년으로 황폐하여져서 인민들은 많이 도적떼에 속하게 되었고, 전야는 적지가 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오랫동안 풍진의 소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해를 구하려고 이에 스스로 이웃나라와 친선과 화호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에 걸친 국토가 농사와 양잠으로 생업을 즐겼고, 7∼8년 동안이나 군사들이 한가롭게 안면할 수 있었는데, 을유년 10월에 이르러서 갑자기 사건이 생겨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족하는 처음에 우리를 가벼이 보고 쳐들어왔으나, 범아제비가 수렛바퀴를 막으려는 것과도 같이 군세가 미약하여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과감히 물러갔음은 모기가 산을 친 것과 같았습니다. 족하는 나에게 손을 모아 사과하였고, 하늘을 가르키며 맹세하기를 금후에는 싸움없이 영원히 화평을 즐기며 이를 어기면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혹은 맹약을 어기고 혹은 이를 멀리 저버렸던 것입니다. 내 또한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무를 숭상하고 죽이지 않는 인을 바라므로, 드디어는 중한 포위를 풀고 군사들의 피로를 쉬게 하고 질자의 교환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만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었으니, 우리는 남인들에게 대덕을 끼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피를 내어 맺은 맹약이 아직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을 다시 조작하고 벌⋅전갈같은 독으로 생민을 침해하고 이리⋅호랑이 같고 난폭으로 기전을 가로막아서 금성이 위급해지고 황옥이 놀라게 할 줄이야 의에 의지하여 주를 높였으니, 환공⋅문공의 패업과 같으며, 기회를 타서 한을 도모하였으니, 오직 왕망, 동탁의 간계를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왕의 지존을 굽혀 그대를 족하라 칭하여 존비의 차례를 잃었으니, 상하가 함께 근심하여 원보의 충순이 있지 아니하면 어찌 다시 사직이 안정할 수 있으랴? 하고 여깁니다. 나의 마음은 숨김없이 악의가 없이 존왕할 듯이 간절하나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나라를 위험에서 구하려 하는데 족하는 털끝만한 소리를 보고 천지 같은 후은을 망각하고 군왕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고 대신을 학살하고 사민을 죽이고 궁녀를 막 빼앗아 수레에 싣고 진보를 탈취하여 짐으로 실었으니, 포악함은 걸왕, 주왕보다 지나치고 불인함이 경효보다도 심하였습니다.
내 하늘이 무너지듯 원한과 해를 돌아오게 한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이 신라에 견마의 근로를 다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싸우게 되어 이미 두 해가 지났는데, 육지로 칠 때는 우레와 같이 달리며 번개와 같이 쳤고, 수로로 칠 때는 호랑이 용처럼 용맹스럽게 쳐서 움직일 때마다 성공하여 군사를 헛되게 일으킨 것이 없었습니다. 윤빈을 해안에서 축척할 때는 갑옷이 산처럼 쌓이고, 추조를 성변에서 사로잡을 때는 시체가 들판을 덮었고 연산군 부근에서는 길환을 군전에서 참형하고, 마리성 가에서는 수오를 깃발 아래서 죽였으며, 인존을 빼던 날에는 형적 등 수백의 몸을 버렸고, 청천을 파할때는 직심 등 4,5인이 목을 바쳤고, 동수에서는 기를 바라보고도 도망하였고, 경산은 구슬을 머금고 투항하였고, 강주는 남으로부터 내항하였고, 나부는 서로부터 와서 소속되었습니다. 공략한 지역이 이와 같았으니, 수복이 어찌 멀 것입니까? 반듯이 지수의 영중에서 장이의 묵은 원한을 씻어 없애고, 오강 기슭에서 한왕이 한번 싸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가라앉히고 영원히 천하를 맑게 할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는데,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항차 오늘 전하는 그 덕이 먼 지역을 포섭하고 속국을 애호해 오다가 조서를 내려 청구의 난리를 그치도록 타이르니, 가르침을 감히 받들지 않으리오? 만약 족하도 조서를 받들어 전쟁을 그친다면 다만 상국 인은에 보답할 뿐만 아니고 또한 동방의 끊어진 대를 계승할 수 있을 것이나, 만약 과오를 고치지 아니하면 뒤에 그를 뉘우친다 하더라도 가히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될것이니 어찌 하리오? 하였다. 그 다음 해 오월에 견훤은 가만히 군사를 거느리고 강주를 습격하여 3백 여 명을 죽이니, 장군 유문이 항복하였다. 8월에 견훤은 장군 관흔에게 명령하여 민중을 거느리고 양산성을 쌓았는데, 고려 태조는 지성의 장군 왕충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고 대야성으로 물러나와 보전하였다. 11월에 견훤은 강한 군사를 뽑아 거느리고 부곡성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수성병 1천 여 명을 참살하였는데, 장군 양지, 명무 등이 항복하였다. 신라 경순왕 3년 7월에 견훤이 갑병 5천 명으로써 의성부를 공격하였는데, 성주 장군 홍술이 전하였다. 이 말을 들은 태조는 통곡하여 말하기를 「나의 좌우 팔을 잃었다」하며 슬퍼하였다.
그런데 견훤은 또 군사를 일으켜 거느리고 고창군 병산 아래로 나와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8천 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다음날에 견훤은 잔병을 모아 거느리고 순주성을 습격하니, 장군 원봉은 이를 능히 막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하므로, 견훤은 백성을 사로잡아 이를 전주로 옳겼다. 이때 태조는 원봉이 먼저 전공이 있으므로 기성죄를 용서하고, 순주를 고쳐 하지현으로 부르게 하였다. 신라 경순왕 6년에 견훤의 신하인 공직은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을 잡아들여 불로 쇠를 달궈 힘줄을 끊어 죽였다. 9월에 견훤은 일길찬 상귀를 파견하여 선병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에 침입하여 삼일동안 염주, 백주, 정주의 배 1백 여 척을 불태워 버리고, 저산도의 목마 3백 여 필을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신라 경순왕 8년 정월에 견훤은 고려 태조가 운주에 주문하였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군사 5천 명을 뽑아 거느리고 이르렀는데, 장군 금필은 견훤이 아직 진을 치지 아니하였을 때 강병 수천 명으로써 돌격하여 3천 여 명을 참획하니,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그 위풍에 놀라서 스스로 항복하고 견훤의 부하로 있던 술사 종훈과 의원 훈겸과 용장 상달, 최필 등이 태조에 항복하였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취하여 아들 10여 인이 있었는데 제4자 금강은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견훤은 그를 특별히 사랑하여 장차 그 자리를 전하려는 뜻을 가졌는데, 그 형인 신검과 양검과 용검 등은 이를 알고 근심과 고민으로 지냈다.
이때 견훤은 양검을 강주도독으로 삼고, 용검을 무주도독으로 삼으므로, 신검은 홀로 부왕의 곁에 있었는데 그는 이찬 능환으로 하여금 사람을 강주, 무주로 보내어 양검 등과 함게 음모를 꾸몄다. 신라 경순왕 9년 3월에 파진찬 신덕과 영순 등은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사람을 파견하여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은 스스로 대왕이라고 칭하며, 경내의 죄수를 대사하고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여의가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나 혜제가 임금이 되었고, 건성은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즉위하였으니, 천명은 쉽게 얻을 수 없고 신기는 돌아가기는 데가 있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대왕은 신무가 뛰어나시고 영모가 으뜸이셨다. 쇠미한 세상을 만나 스스로 천하를 경영할 임무를 맡으시어 삼한을 순행하여 백제를 회복시키고 온갖 도탄을 깨끗이 없애시어 백성을 안심시키고 제황의 위험을 고무하시니, 원근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공업이 다시 일어나려 하였는데, 지혜와 생각은 갑자기 하나를 잃어서 어린 아이만을 사랑하시어 간신들이 권세를 농락하며, 대군을 진혜의 혼미로 인도하고 자부를 진나라 헌공의 미혹에 함몰하게 하여 왕위를 완동 금강에게 전하여 주려 하였다. 다행히 상제가 참된 마음을 내려 군자에게 허물을 고치게 하셔서 원가에게 일국을 다스리도록 명하시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는 제왕의 재주가 아닌데 어찌 임금 노릇을 할 지략이 있으랴? 조심스럽고 두려워서 봄 얼음을 밝고 깊은 연못에 임한 듯하다. 순서에 의하여 않은 은전을 미루어 새로운 정사를 보여야 할 것이므로 경내에 대사령을 내리니, 청태 2년 10월 17일에 새벽 이전을 한정하여 이미 발각된 것이든, 아직 발각되지 않는 것이든, 이미 판결이 난 것이든 미결된 것이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용서하여 이를 면제하도록 하니, 이 사무를 맡은 자는 곧 이를 시행하라고 하였다. 견훤은 금산에 석달동안 있다가 그해 6월에 막내 아들 능예와 딸 쇠복과 첩 고비 등과 더불어 금성으로 도망하여 사람을 고려로 파견하여 태조에게 보기를 청하니, 태조는 기뻐하며 장군 유금필과 만세 등을 파견하여 그를 맞아 수로를 거쳐 온 것을 위로하고, 서울에 이르자 후한 예로 대우하였는데, 견훤은 태조보다 10세나 나이가 많았으므로, 상부로 높이고 남궁을 주어 머무르게 하였는데, 그 벼슬은 백관의 위이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백번욕과 노비 각 40명과 내구마 10필을 주었다.
이때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는 그의 아내에게 비밀히 말하기를,「대왕께서는 40여 년 동안 근로하여 공업을 거의 이루려고 하였는데, 하루 아침에 집안 사람의 불화로 해서 나라를 잃고 고려로 투신하였다. 대저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였으니 만약 내가 임금을 버리면 반역한 아들을 섬기게 되는 것인 즉, 무슨 면목으로써 천하의 의사들과 대할 수 있으리오? 항차 고려 왕공은 인후하고 근검하여 민심을 얻는다고 듣고 있는데, 이는 하늘의 가르침으로 반듯이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곧 글을 보내어 우리 임금의 안위를 묻고, 겸하여 왕공에게 은근한 뜻을 표하여 장래의 복리를 도모함이 어떨지?」하니, 그의 아내는 말하기를「당신의 말은 곧 나의 뜻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그 다음 해(936) 2월에 영규는 사람을 파견하여 그 뜻을 전하고, 드디어는 태조에게 알리기를「만약 의기를 드는 날이면 내용을 하여 왕사를 맞겠다」하니,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그 사자를 후사하여 돌려보내고, 겸하여 영규에게 사례하여 말하기를,「만약 한데 합하는 은총을 입어 도로의 막힘이 없어지면 먼저 장군을 뵈온 연후에 당에 올라 부인에게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존경하며 반드시 후한 예로 은혜를 갚겠습니다. 천지신명도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입니다」하였다. 그해 6월에 견훤이 말하기를「노신이 전하에게 투신한 까닭은 전하의 위엄을 의지하여 반역한 자식을 죽이고자 할 따름이었습니다. 바라건대 대왕은 신병을 빌려 그 난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하니, 태조는 이 말을 들어 주어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회를 파견하여 보기 1만 명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향하게 하였다. 9월에 태조는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군사를 모아 거느리고 일선으로 진격하니,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이를 맞아 싸웠다. 갑오일에 양군이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하여 진을 쳤는데, 태조는 상부 견훤과 더불어 관병을 한 다음 대상 견권, 술회, 김산과 장군 용길, 기연 등에게 보기 3만을 거느리게 하여 좌익을 삼고, 대상 김철, 홍유, 수향과 장군 왕순, 준량 등에게 보기 3만 명을 거느리게 하여 우익을 삼고, 대광, 순식, 대상, 긍준, 왕겸, 왕예, 유금필과 장군 정순, 종회 등에게 칠기 2만과 보졸 3천과 흑수철리와 여러 도의 경기 9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여 중군을 삼고, 대장군 공훤과 장군 왕함윤에게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선봉을 삼아 북을 울리며 진격하니, 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명길 등은 군세가 크게 정제함을 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전으로 나와 항복하므로 태조는 그 노고를 위로하며 백제 장수의 소재를 물으니, 효봉 등은 말하기를,「원수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하므로 태조는 대장군 공훤 등에게 명하니 그 중군을 직접 치게하고 모든 군사가 함께 진격하여 몰아치니 백제군이 패멸되고,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 소달, 능환 등 40여 명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태조는 그 항복을 받은 다음 능환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를 위로하며 그 처자와 함께 상경할 것을 허락하고 능환에게 묻기를「처음 양검 등과 더불어 밀모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너의 계책이니, 신하된 의리로서 이와 같은 일이 마땅한 것이냐? 하니,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능히 말을 못하였다. 태조는 드디어 이를 주살하도록 명하고 신검의 참위는 사람의 위협으로 된 것이요. 그 본심이 아니었고, 또한 항복하여 죄를 비므로 특히 그 죽음을 면하고 그대로 놓아 주었다. 이렇게 되자 견훤은 우울한 번민에 싸이고, 드디어는 저질이 나서 수일 후에 황산 불사에서 죽었다. 고려 태조는 군령이 엄명하여 사졸들이 추호도 군기를 범하지 못한 까닭으로 주⋅현의 백성들이 안도감에 쌓이고, 그 지나는 곳마다 노유들까지 모두 나와 만세를 불렀다. 이때 태조는 장사들을 위문하여 그 재량에 따라 임용하고 소민들은 각각 그 직업에 따라 안심하고 살았다. 신검의 죄는 먼저 말한 바와 같으나, 태조는 곧 그에게 관위를 주고 그 두 아우는 능환의 죄와 같았으므로, 드디어는 진주로 유배하였다가 얼마 아니하여 이를 죽여 버렸다. 태조는 영규에게 말하기를「전왕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 신하로서 이를 위로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홀로 경의 부서 만은 천리위정에 그 안부를 묻고 성의를 다 하였으며, 겸하여 아름다운 마음으로 과인에게 귀부하였으니, 그 의리를 가히 잊지 못하겠다」 하고 곧 좌승 벼슬을 제수하고, 전지 1천 경을 주고 역마 35필을 주어 가족들을 맞아들이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존폐는 인륜을 저버린 권력쟁탈전의 결과가 아니던가?
결국, 견훤은 신라 진성여왕 때에 후백제를 일으켜서 고려 태조 19년(936)에 이르기까지 고려 왕건의 상부가 되었다가 서기 936년 생을 마쳤다.
6. 마무리
지금까지 견훤왕에 대한 사료기록을 중심으로 소개하였다. 견훤왕이 머문 곳에는 견훤산성 내지는 성지로 부르고 있으며, 이에는 전국적인 분포를 나타낸다.
상주에 소재한 산성으로는 화북면 장암리 산42번지에 위치한 견훤산성(경상북도 기념물 제53호, 1984. 12.29지정)과 화서면 청계마을의 견훤성(일명 성산산성⋅대궐터)이 있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견훤왕의 신주(神主, 후백제대왕 신위)를 모신 견훤사당(甄萱祠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7호, 2013.3.18지정)이 있으며, 문경지역에도 희양산성, 근품산성, 작성 등이 있다.
또한, 전국적으로는, 원주시 문막면의 견훤성, 전주시 동서학동의 남고산성, 나주시 경현동의 금산산성, 괴산군 청천면의 소실령 이성지, 청주시 경북동의 청원 정북리 토성 등 전국적으로는 12개의 성 또는 성지가 있다.
그래도 우리 상주에는 견훤사당(일명 성신각)을 지어 전국에서 유일하게 “후백제대왕 신위”라는 위패를 봉안해 놓고 매년 정월 보름과 10월 보름만 되면 화서면 하송1리 청계마을에서는 민간에서 산신제로 모셔오고 있다. 한 나라를 개국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 견훤왕을 제사함은 이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는 동제신으로 믿기에 아직까지 정성을 다 하고 있음이라 하겠다.
부록으로, 견훤산성과 견훤사당을 게재한다.
<부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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