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4호

상주학. 상주문화 제 24호. 尙州 協同 및 農業組合의 設立과 變遷

빛마당 2015. 5. 21. 21:47

         尙州 協同 및 農業組合의 設立과 變遷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시청 문화체육과

金 相 鎬

목 차

Ⅰ. 머리말256

Ⅱ. 협동조합의 태동257

Ⅲ. 상주함창의 협동조합259

Ⅳ. 금융조합의 태동과 활동265

Ⅴ. 주식회사 농업은행 상주지점280

Ⅵ. 농업협동조합281

Ⅶ. 농업은행287

Ⅷ. 맺는말287

尙州 協同 및 農業組合의 設立과 變遷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시청 문화체육과

金 相 鎬

Ⅰ. 머리말

20세기 초 농촌사회는 조선시대 대지주(大地主)의 농토 집단 소유와 소작화(小作化)로 인해 농촌사회의 피폐는 최고조에 달해 있던 시기이다. 특히 함창지역은 주 소득원이 농산물이고 부 소득원은 잠업에 의한 농외소득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농촌사회의 경제는 대지주에 의한 고리대금을 사용하고 소작에 의한 도지대금(賭地代金)을 지불하면 먹고살 수 있는 경제력이 없기 때문에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농민만 늘어나고 걸인(乞人)이 마을마다 정기적으로 가가호호(家家戶戶) 다니면서 구걸(求乞)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사회였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생활고(生活苦)를 해결하고 사회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자치규약인 향약, 계, 두레 같은 공동체 조직이 이러한 사회불안을 감당해 왔다. 이러한 때에 사회적 분위기에 부응하여 일본 동경에서 한국 농촌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뜻있는 100여인이 1926년 6월 13일「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조직의 일원인 전준한이 같은 해 8월 귀국하여 농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며, 생활구조를 연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당시 성행하고 있던 계와 조합을 답사하여 연구하게 된다. 그 나름대로의 연구와 답사 결과에 따라 함창지역에 적합한 함창협동조합 창설을 시작하게 된다. 국민은 근대사회를 맞이하고, 신 경제를 접하게 되면서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경제적 이로움에 대해 처음 접하는 것이 조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기조합의 태동과 조합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함창협동조합의 태동과 농업조합, 은행 등 농업 관련 조합의 변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협동조합의 태동

우리나라에서 민간협동조합운동(民間協同組合運動)의 본격적 확산은 일제강점기 때 동경 유학생 중심의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 천도교계의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기독교계의 농촌협동조합(農村協同組合)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이러한 민간협동조합 운동은 3.1만세운동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높아지고, 대지주의 농촌사회 점거로 인한 소작농의 증대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과 일본 자본주의 사회를 목격한 젊은 신지식인들의 피폐된 농촌 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에 따라 1926년 1월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고 ‘조선경제’ 라는 기관지를 발간한다. 그 이후 간부 몇 명이 귀국하여 경북지역에서 계몽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 때 상주 함창에는 전준한이 농촌 계몽활동을 하면서 함창 오사리에 최초의 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되고 지역민의 호응을 얻어 협동조합 설립의 설립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 후 국내에서 협동조합 설립의 성공과 농촌사회의 관심이 높아지자 1928년에는 ‘협동조합운동사’의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본격적인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함창지역의 협동조합의 성공적인 사례로 인해 그 해 가을에는 충남, 경남, 경북에 22개의 조합이 설립되었으며 조합원수는 약 5천명에 달하였고, 더욱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1932년 말에는 80개 조합에 조합원 2만여명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간협동조합운동이 활발해져 경제문제와 조직력을 갖추어 나가자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하여 핵심인물을 사회주의 운동 주동자로 몰아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 때 함창협동조합 설립과 전국 확산을 시킨 전준한도 사회주의자로 몰아 지금까지도 그 당시의 기록에는 사회주의자로 분류되고 있다. 결국 협동조합 설립 주동자들은 조합의 해산, 주동자의 투옥 등 탄압으로 인해 민간협동조합은 1933년에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종교계에서도 농촌 계몽 활동을 협동조합으로 시작하였는데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활동을 시작 하였다.

천도교에서는 1925년에 ‘조선농민사’를 조직하여 교세 확장과 신도의 생활수준 향상 및 복리 증진을 목적으로 하였다. 주요 활동은 함경남도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농민에게 저렴한 생필품 구매와 농업 생산물 판매알선 등 농촌생활과 직접적인 각종 사업 전개로 농민으로부터 신뢰를 얻어 발전을 거듭하면서 1928년에는 중앙에 ‘조선농민사’, 각 군에 ‘군농민사’, 이동(里洞)에는 ‘이동농민사’를 두었다. 야간학교를 통한 계몽과 교육 활동 등 사회 환원 활동을 실시하고, ‘농민공생조합중앙회’산하에 소비조합, 생산자조합, 이용조합, 신용조합을 두었으며, 최대 조합원이 15만명에 달했으나 신도 중심의 조합원의 한계성과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중지되었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을 전후하여 경성중앙기독청년회가 서울 부근에 8개의 농촌협동조합 조직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교도 조직체계를 바탕으로 마을단위 협동조합을 조직하여 전성기에는 전국의 조합수가 7백20개에 달하였고, 1930년에는 ‘농촌협동조합과 조직법’을 발간하여 협동조합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3년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이 전개되자 기독교청년회계 지방협동조합은 ‘부락진흥회’에 흡수되었으며, 중앙기독청년회가 경영하는 협동조합도 1937년 총독부의 해산명령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3개의 민간 협동조합이 조직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조직으로 점차 확대되자 조선총독부는 정부주도형의 안정적인 협동조합을 구상하게 되는데 이 조합이 금융조합이다. 그러나 그 당시 금융조합은 운영방법을 조합원 이익 추구 목적이 아니고 조합체 운영의 안정적인 금융 목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기피하였다. 따라서 대체조합을 구성한 것이 산업조합이다. 산업조합은 협동조합의 운영방식인 조합원의 구판대와 이용 사업을 실시하여 불만을 해소하면서 협동조합의 이미지와 임직원들을 흡수, 운영함으로서 협동조합의 급격한 소멸을 가져오게 하였다.

조 합 명

설립일

설립 주체

활 동

조선농민사

1925.10.25

천도교

농민공생조합설립 1925.10.25

농촌협동조합

1923

기독교

본격 활동 1928

협동조합운동사

1926.6.13

한 빛

일본 동경 유학생 100여명 구성

Ⅲ. 상주 함창의 협동조합

Ⅲ-1. 조합의 태동

상주 함창지역에서 협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전준한은 함창 일대에 협동조합을 순회 선전을 하면서 각 동의 재력가 30여인을 발기인으로 모은 뒤 약 한 달 동안 조합 운영에 따른 물품을 마련하여 1927년 1월 14일에 발기인 총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발기인의 재력가 대부분은 실현 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 불참하고 농민 7~8명만 참석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함창지역의 재력가 협조는 단념하고 참석한 농민 7~8명과 당일 오후 10시경 함창읍 오사리 농가 사랑방에서 동지인 김재세, 김한영 등 10여명이 발기인 총회와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선출하여 다음날 오전 1시경에 마쳤다.

이때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조합장 황이정, 이사 전준한, 감사 김재세, 김영한, 평의원 김삼진외 5명(인원부족으로 4명 결원)

조합명

설립

간부

조합원(명)

비고

함창

1927.1.

황이정, 전준한

400

상주

1927.4.

김원한, 전준한

150

중모

1927.4.

조남철, 황재은

200

1928.4.해산

청리

1927.9.

김재준, 김윤종

220

1928.3.해산

※ 자료 출처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요찰사’, 1934년, 조선시대의 역사민족지

(경북상주의 식민지 경험)

Ⅲ-2. 사업개시

1927년 1월 15일부터 전 조합원이 모집 활동을 한 결과 수일동안 조합원이 60여명이 되었고 출자 1회 불입금이 11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오사리 농가에서 석유 1통, 성냥, 양잿물, 1통을 매입하여 영업을 개시하였다. 이 영업 개시로 매일 5~6원의 매출을 올리게 되고 자금 증가에 따라 거래 품목도 증가하여 사업실적이 늘어나게 된다. 정관에 따라 결산 결과 출자금 20원으로 13일 동안 순수익금 5원 42전 이었으며, 제 적립금(순수익의 11%)을 공제한 후 조합원의 이용고(利用高)에 따라 배분한 결과 최고 42전 최하 1전이 배분되었다.

Ⅲ-3. 사무소의 이전

사무소는 오사리 (약 100호)에 두고 있었으나 조합원의 신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좀 더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위해 함창시장 구석에 월세 3원으로 1927년 2월 7일(음 1월 6일) 옮기게 되었다.

Ⅲ-4. 상업구역의 확장

초기에는 사무소가 위치한 오사리를 중심으로 조합 가입 선전 활동을 하였으나 범위를 함창과 그 인근까지 확장하여 선전한 결과 조합원 113명, 불입출자금 42원으로 성장하였다. 1927년 6월 말에는 조합원이 422명, 불입출자금 149월, 총매출액 4,682원 1일 최고 매출 약 400원, 최하매출 2원, 6개월간 평균 매출 26원, 조수익 약 500원, 순수익 약 160원이 되었다. 취급 품목은 사무소 이전당시 8종 내외에서 100여종으로 확장되었다.

Ⅲ-5. 저축 실시

1927년 3월 4일(음 2월 1일)부터 다음과 같은 저축규정을 두고 곡물저축을 실시하였는데 자발적 저축이 40여원에 달하였고 조합에서는 저곡주머니를 개당 4전으로 외상 판매를 하였다.

<저축규정>

제1조 본조합의 신용부에 저축과를 둔다.

제2조 본과는 저축 장려 및 자금운용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조합원의 저축은 시가로 환산하여 日利 2毛2糸의 이자를 준다.

제4조 조합원의 저축은 출자금 전액을 납입한 뒤가 아니면 인출할 수 없다. 다만 정관 제37조(탈퇴)의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제5조 저축의 이자는 매기말 배당 시에 저곡주에게 지급한다.

제6조 조합원은 매일아침 저녁밥을 지을 때 한 수저씩 조합에서 배부한 저곡주머니에 떠 넣는다. 전항의 저곡은 매달 음력 1일과 16일의 2회로 나누어 조합에 저입한다.

제7조 저곡의 종류는 백미, 율, 정맥을 주로 하되 다른 곡물도 무방하다

Ⅲ-6. 지역 환원 활동

1927년 5월 1일부터 그 동안 경비부족으로 중단되었던 여자야학을 부활하여 경비 전액을 조합에서 부담하여 학생수가 40여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협동조합의 성공적인 사례에 따라 각지에서 협동조합 설립이 잇따랐는데 상주, 청리(상주), 풍산(안동), 예안(안동) 등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Ⅲ-7. 협동조합의 태동지 추정

전준한의 가계에 대하여는 개인정보로 인해 상세하게 기술할 수 는 없다. 다만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부(父)는 경준, 모(母)는 박성악, 동생은 진한이다. 진한은 1901년 11월 5일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상주시 함창읍 오사리 214번지이다. 본적 제도는 일제 통감부 주도로 1909년 3월 ‘민적법’(법률 제8호)이 공포되어 4월 1일부터 시행되었고, 본적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본적이 오사리 214번지 인 것은 전진한의 부(父)인 전경준이 이 주소에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곳에서 협동조합의 모임과 태동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Ⅳ. 상주의 금융조합의 태동과 활동

Ⅳ-1. 금융조합의 활동

금융조합의 태동은 1907년 8월 광주 지방금융조합 설립이 그 최초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6월에는 130개 조합으로 확대되고, 1945년에 와서는 912개의 조합으로 확장되었다.

한편, 상주에는 1947년 8월 31일에는 상주금융조합에서 상산금융조합 합병 후 함창, 화령, 모동, 낙동, 옥산금융조합은 지소로 하였다. 이때의 조합규모는 조합원 23,500명, 예수금 1,806만원, 대출 708만원이었다. 1956년 5월 1일에는 주식회사 농업은행 창립의 금융조합은 해산에 이르게 된다.

이때의 상주 지역내 금융조합을 보면 1907년 1월 조합장 정동환(鄭東晥), 이사 신궁본립(新宮本立)이 처음 설립하고 그 이후 함창에서 조합장 김관진(金觀鎭), 이사 조범석(趙範錫)이 운영하는 금융조합이 설립되어 상주, 함창, 상산, 옥산, 낙동, 화령의 6개 조합이 1928년까지 설립된다. 조합원은 상산이 2,093명으로 가장 많고 예금은 함창이 13만6천원, 대출이 24만원으로서 가장 활발하였다.

조합명

설립

조합원

(명)

예금

(만엔)

대출

(만엔)

조합장

이사

상주

1922.12

387

22

22

함창

1918.1

1,835

13.6

24

金觀鎭

趙範錫

상산

1907.1

2,093

18

13

鄭東晥

新宮本立

옥산

1925.12

1,318

12

26

宋柱河

山口壽人

낙동

1928.12

1,449

4.2

16.2

金漢祚

鄭學基

화령

1922.9

1,385

5.7

17

洪寅燮

李鍾基

※ 자료 출처 : 실상요연, 소화 11년 4월, 1192~1193쪽

조합명

조합원

기본금

적립금

차입금

예금

대부금

상주

803

-

24,000

136,900

283,471

337,144

함창

2,887

2,000

36,737

368,480

103,401

466,249

상산

3,034

10,000

11,407

231,700

138,666

328,032

옥산

1,977

5,000

14,029

218,032

65,326

277,852

낙동

2,205

5,000

12,270

264,764

48,139

315,257

화령

1,989

5,000

23,990

248,112

40,398

308,277

모동

1,876

5,000

6,167

295,828

33,662

336,960

합계

14,771

32,000

128,600

1,763,816

713,063

2,369,771

※ 자료 출처 : 군세일반, 상주군, 소화12년, 50~51쪽

Ⅳ-2. 함창 금융조합의 활동

1910년(융희 4)8월 29일 한일합방조약 이후 면체제의 관료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1930년대부터 농촌진흥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마을을 부락(部落)이라고 하였으며, 1932년부터는 갱생지도계획에 따라 매년 각읍면별로 지도 부락을 설정해 행정기관과 금융조합 등「지방유식자(地方有識者)」가 군농촌진흥위원회의 각읍면 농촌지도 진흥위원이 되어 제일선(第一線)에서 지도를 하였다. 상주는 운동 개시 때 각 읍면에 위원이 평균 50명 정도였다.

함창금융조합은 1919년 1월 20일 설립되었다. 조합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으나 1927년부터의 자료를 보면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적립금이 12,000원~15,000원의 수준이다. 이 때 이사로 재임하던 조범석은 당시 함창면 관암리(현 척동 2리)는 가장 낙후된 마을로서 마을에 ‘갱생구락부’로 지정하고 노름 등으로 농한기를 허송세월로 보내던 농민들에게 가마니 짜기 사업을 계도하여 생산된 가마니를 공판장에 내다팔아 가난을 떨치게 되었다. 이러한 가난 극복의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하여 관암진흥조합(冠岩振興組合) 명의로 1937년(昭和十二年) “함창금융조합이사조범석불망비(咸昌金融組合理事趙範錫不忘碑)”를 함창 금융조합 앞에 세웠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咸昌金融組合理事趙範錫不忘碑

(昭和)五年 1930년에

世値財荒 세상은 불경기를 만났네.

滔滔漏船 배는 새어 물이 넘치는데

安得梢工 뱃사공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韙栽賢公 훌륭하고 현명한 공이

莅我咸昌 우리 함창에 오셨네.

其蘇更生 이 조합 다시 살리니

去後敢忘 가신 후라도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昭和十)二年 三月 日 冠岩振興組合 立

비의 크기를 보면 비신은 높이 133㎝, 폭 45.5㎝, 두께 16㎝, 비수는 높이 21㎝, 폭 66.5㎝, 두께 43㎝, 대좌는 폭 65㎝, 두께 60㎝이다.

<비 사진>

조범석의 이력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정리된 연보는 없다. 다만 매일경제에 기고된 조범석의 자(子, 조운해, 고려병원원장)의 나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고문에 의해 정리해 보면 조범석의 부친은 영양의 대지주였으며, 3남 1녀를 두었고, 금융조합 이사로 지례·함창·고령 등에서 근무했으며, 대구금융조합연합회 회장직을 마지막으로 1973년에 작고하였다. 조범석의 가계에 대하여 그의 아들이 매일경제에 기고한 내용이 있는데 기고된 내용으로 가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유년시절 - 고려병원 원장 조운해

나는 1925년 8월 5일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경북 영양의 대지주셨고, 아버지 조범석씨(88세로 10년 전에 작고 하셨음) 또한 대구중학과 대구농림학교 1회 졸업생으로 금융조합(오늘날의 농협)이사로 오랫동안 재직하셨다.

오늘날의 은행장에 비교되는 농협 총재까지 지내셨으며, 지방 근무가 잦아 어린 시절 학교를 여러 곳 옮겨 다닌 기억이 있다. 경북 함창에서는 요즘의 새마을 운동과 비슷한 마을운동을 펴 함창 내에 아버님의 성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농협 모범 지점장으로서의 아버님을 모델로 한 영화까지 제작되었었다.(매일경제 1983.4.20. 9면 칼럼/논단)

상주농협 함창지점에는 금융조합 때의 영업장과 소장 사택 사진, 평면도, 직원의 이력서철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평면도에는 업무용 건물로 표시되어 있고 농업은행상주지점 함창출장소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평면도에 표시된 업무용 건물의 내용은 다음 표와 같다.

用 途

事務室

宿直室

( )倉庫

所 在 地

尙州郡 咸昌面 舊鄕里 44-4

構造

壁體

부룩크

木造

造松板

지붕

스래트

瓦葺

瓦葺

建 坪

47

8.2

9.3

經過年數

25

25

25

將來耐久

年 數

30

30

30

增築價格

備 考

영업장 전경

用 途

所長舍宅

所在地

尙州郡 咸昌面 舊鄕里 50

構造

壁體

木造白灰塗

지붕

瓦葺

建 坪

26.3

經過年數

25

將來耐久年 數

30

增築價格

소장 사택 전경

설계도면은 지적도 1매, 평면도 및 배치도 3매, 사진 자료는 영업장 및 소장 사택을 사방에서 촬영한 7장의 사진이 있다. 이력서철에는 1권 65매의 56명의 이력서가 철해져 있는데 대부분 1960년대 초의 이력서들이다.

<소장 도면류>

<사 진 류>

이 사진 자료에는 ‘농업은행상주지점 함창출장소’의 청색 고무인으로 여백에 날인되어 있고, 이력서철에는 ‘농업협동조합함창지소’의 묵서가 있다. 이 명칭으로 년대를 추정해보면 농업은행은 1922년 9월 12일 상주금융조합으로 발족하여 1947년 8월 31일 상산금융조합을 흡수하여 본소가 되고, 함창, 화령, 모동, 낙동, 옥산은 지소가 되었다. 그 이후 1961년 8월 15일 농업은행상주지점과 상주군농협이 통합하여 상주군농업협동조합으로 출범하였다. 따라서 사진자료는 농업협동조합 함창출장소 명칭을 사용한 1947년 8월 31일 이후 1961년 8월 15일 이전의 자료이며, 이력서철은 농업협동조합함창지소 명칭을 사용한 1961년 8월 15일 이후의 자료라 할 수 있겠다.

이 자료 이외에 금융조합의 자료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통계형식의 자료에 나타나는 년도별 함창, 상주, 상산, 옥산, 낙동, 화령 금융조합의 대표, 이사, 적립금, 설립일의 현황은 다음 표와 같다.

 함창금융조합

년도별

대 표

이 사

적립금(원)

설 립

본 점

1927

金履鎭

市川龜一

-

1919.1.20

함창면

1929

金履鎭

市川龜一

12,440

1919.8.20

1931

金履鎭

趙範錫

15,000

1933

金履鎭

趙範錫

17,000

1935

-

趙範錫

-

1937

-

杉町利七

-

1939

-

杉町利七

-

※ 자료 출처 :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27~1939)

- 시천구일(市川龜一)은 1929년 함창금융조합 이사, 1933~1935년까지 상주금융조합 이사, 1935년~1937년에는 안동 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조범석(趙範錫)은 함창금융조합 이사 역임전 1927년, 1929년 김천군 지레면 지례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삼정리칠(杉町利七)은 함창금융조합 이사 역임전 1927년, 1929년 김천군 아포면 대신금융조합, 1931년, 1933년 청송군 청송면 월막동 청송금융조합에서 이사를 역임하였다.

 상주금융조합

년도별

대표

이사

적립금(원)

설립

본점

1927

山田房太郞

志茂半作

57,500

1922.9.12

상주면 인봉리

1929

山田房太郞

志茂半作

55,250

1931

山田房太郞

市川龜一

55,000

1933

稻垣德三郞

市川龜一

41,000

1935

-

岩永俊一

-

1937

-

岩永俊一

-

1939

-

岡田唯惠

-

※ 자료 출처 :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27~1939)

- 산전방태랑(山田房太郞)은 일본 정강현 출생으로서 1914년 조선에 건너와 전당포(質屋業), 상공회평의원, 금융조합평의원을 거치고 상주금융조합장을 역임하였다.

- 도원덕삼랑(稻垣德三郞, 1880~?, 출생 三重縣, 본적 愛知縣)은 1907년 조선에 건너와 처음에는 경성에 거주하였고, 1910년에 상주로 이주하였다. 조선에 건너온 초기부터 약종상(藥種商)을 하여 점점 발전하였으며, 1935년에는 상주의 장로(長老)가 되었다. 일본회(日本會)를 조직하여 일본인 자제를 위한 학교를 학교조합회에서 설립하고, 시구개정의원(市區改正議員), 철로건설기성회의원(鐵路建設期成會議員)에 추천되고, 신사이전문제(神社移轉問題) 등에 매진하였으며, 상주금융조합(尙州金融組合)을 창립하여 1935년 현재 조합장을 하였고, 경북자동차회사 사장(慶北自動車會社 社長)으로 재직하였다.

- 시천구일(市川龜一)은 상주금융조합 이사 역임 전 1927년, 1929년 함창금융조합, 1935년, 1937년,1939년 안동군 안동읍 동부동 안동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암영준일(岩永俊一)은 상주금융조합 이사 역임전 1927년 안동군 예안면 예안금융조합, 1931년, 1933년 경주군 양북면 감포리 감포금융조합, 1939년 예천군 예천면 노하동 예천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강전유혜(岡田唯惠)은 상주금융조합 이사 역임전 1927년, 1929년, 1931년 영일군 장기면 장기금융조합(長鬐金融組合), 1933년, 1935년, 1937년 영천군 영천면 창구동 영천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상산금융조합

년도별

대표

이사

적립금(원)

설립

본점

1927

朴正準

河村利舍

18,160

1907.9.24

상주면 성하리

1929

朴正準

河村利舍

16,380

1931

朴正準

大村金次郞

16,000

1933

-

新宮本立

12,000

1935

-

新宮本立

-

1937

-

增原共之

-

1939

-

增原共之

-

※ 자료 출처 :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27~1939)

- 박정준은 1921년, 1923년, 1925년, 1927년 상주면 서정동 82번지, 성동리 271-1번지 소재의 상주상사(주) 감사를 역임하였다.

- 대촌금차랑(大村金次郞)은 1927년, 1927년, 화원금융조합 이사, 1933년, 1935년 영주금융조합, 1937년, 1939년 왜관금융조합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 신궁본립(新宮本立)은 상산금융조합 이사 역임전 1927년, 1929년, 1931년 군위군 군위면 군위금융조합, 상산금융조합 근무이후 1937년 대구부 남정 달성금융조합에서 이사를 역임하였다.

- 증원공지(增原共之)는 상산금융조합 근무 전 1931년, 1933년경산군 자인면 동부리 자인금융조합 1935년 의성군 안계면 용기동 안계금융조합에서 이사를 역임하였다.

금융조합 건물 우측에는 부흥저축채권(10엔권)매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부흥저축채권 제1회 발행이 1924년 9월 1일이므로 이 사진은 1924년 이후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 옥산금융조합

년도별

대표

이사

적립금(원)

설립

본점

1927

宋柱河

森謙次

5,970

1925.12.9

공성면 옥산동

1929

宋柱河

森謙次

8,060

1931

宋柱河

須田篤

9,000

1933

宋柱河

須田篤

8,000

1935

-

須田篤

-

1937

-

山口壽人

-

1939

-

山口壽人

-

※ 자료 출처 :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27~1939)

- 수전독(須田篤)은 1931년~1935년 옥산금융조합이사, 1937년, 1939년 청도금융조합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 낙동금융조합

년도별

대표

이사

적립금(원)

설립

본점

1929

柳寬植

姜疇錫

2,380

1928.12.3

낙동면 낙동리

1931

柳寬植

鄭學基

9,000

1933

金漢祚

鄭學基

13,000

1935

-

金昌勳

-

1937

-

金昌勳

-

1939

-

金昌勳

-

※ 자료 출처 :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29~1939)

- 강주석(姜疇錫)은 1905년 영일군 동해면 마산동 출생으로서 1929년 낙동금융조합 이사를 거쳐 포항운수주식회사 감사, 포항읍회 의원, 영일어업조합 의원, 포항상공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 정학기(鄭學基)는 1931년, 1933년 낙동금융조합이사, 1935년, 1937년 모동면금융조합이사를 역임하였다.

 화령금융조합

년도별

대표

이사

적립금(원)

설립

본점

1927

鄭東燮

李琬儀

9,990

1922.9.1

화서면

1929

鄭東燮

孫泰仁

10,170

1931

鄭東燮

孫泰仁

11,000

1933

李善

孫泰仁

11,000

1935

-

李鍾龜

-

1937

-

李鍾龜

-

1939

-

李鍾龜

-

※ 자료 출처 :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27~1939)

- 이완의(李琬儀)은 1927년 화령금융조합 이사 이후 1929년 1931년 안동군 풍산면 풍사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손태인(孫泰仁)은 화령금융조합 이사 역임전 1927년 안동군 풍산면 풍사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이종구(李鍾龜)는 화령금융조합이사 역임전 성주군 가천면 1929년, 1931년, 1933년 창천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고 1939년 모동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모동금융조합

년도별

대표

이사

적립금(원)

설립

본점

1931

申相鶴

李相冕

2,000

1930.12.26

모동면 용호리

1933

鄭在燁

李相冕

23,000

1935

鄭學基

-

-

1937

-

鄭學基

-

1939

-

李鍾龜

-

※ 자료 출처 :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29~1939)

- 정학기(鄭學基)는 모동금융조합 대표 역임 전 1931년, 1933년 낙동금융조합, 1937년 모동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이상면(李相冕)는 모동금융조합 이사 역임 전 1927년, 1929년 영덕군 영해면 영해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 이종구(李鍾龜)는 모동금융조합 이사 역임전 1929년, 1931년, 1933년 성주군 가천면 창천동 창천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고, 1937년, 1939년 화서면 화령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Ⅴ. 주식회사 농업은행 상주지점

1922년 9월 12일 상주시 인봉동에 상주금융조합으로 발족하여 조합원 387명 예수금 28만여원, 대출금 22만여원이었다. 1947년 8월 31일에는 상산금융조합을 흡수 합병하여 상주조합이 본소가 되고, 함창, 화령, 모동, 낙동, 옥산 각 조합이 지소가 되었다. 이 때 조합원은 23,500명, 예수금 1천8백6만원 대출금 708만원이었다. 1955년 9월 특수법에 의한 농업은행의 설립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1956년 5월 1일 주식회사 농업은행을 설립하여 금융조합의 업무를 양수 받았다.

기관별

대출고(환)

예금고(환)

농업은행상주지점

10,5077,787

9,2819,099

상주지점출장소분

40,724,554

42,402,043

초대 지점장은 백서기(白瑞基)로서 1956년 1월 1일 부임되었고, 2대 지점장은 하영조(河英祚)로서 1957년 9월 1일 부임되었다. 이 때 대리는 이동수, 김수만 2명, 행원은 김일권, 권원구, 김학열, 김인년, 권돌석, 최윤식, 임한건, 김문범, 황인택, 김상권, 이중용 11명, 순무 박만기로서 전직원은 15명이었다.

낙동출장소는 소장 정인영, 행원 한명옥, 김상욱 3명, 옥산출장소 소장 박태연, 행원 현명식, 윤상영, 박희경 4명, 모동출장소에는 소장 이석준, 행원 성갑환, 김인구, 신승기 4명, 화령출장소에는 소장 이강모, 행원 김인상, 한이석, 김상이 4명, 함창출장소에는 소장 정기선, 대리 박영석, 행원 신한봉, 박성선, 김종수, 전영해 6명이었다.

따라서 1957년 당시 농업은행상주지점의 조직은 지점장 1명, 출장소장 5명, 대리 3명, 행원 25명으로서 전체 34명이었다.

주식회사 농업은행 상주지점은 1961년 8월 15일 상주군농협과 통합하여 ‘상주군 농업협동조합’이 되었다.

Ⅵ. 농업협동조합

1957년 2월 14일에는 <농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되어 3월 1일부터 “농민의 자주적인 협동조직을 촉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진과 농민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시행되었다. 또한 시기를 같이하여 <농업은행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1958년에는 마침내 농업금융을 전담하는 특수은행인 농업은행과 경제 사업을 담당하는 농업협동조합이 외형적으로는 각각 발족되어 전국적 조직체계는 갖추었다. 그러나 농업협동조합은 경영기술의 미숙, 자금력 부족, 사업기반의 취약 등으로 운영난을 겪게 되었고, 농업은행도 농촌에 대한 효율적인 지원의 기능을 다하지 못함으로 인해 농촌에 고리채(高利債)가 만연하게 되었다. 1961년의 5·16군사정부는 농협을 재편성하여 농촌경제의 향상을 도모한다는 방침 아래 그해 7월 29일 새로운 <농업협동조합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신 농업협동조합은 농업은행과 구 농협의 업무를 인수하고, 1961년 8월 중앙회를 비롯하여 8개 도지부, 140개 시군조합, 101개 특수조합, 2만1,042개 이동조합(里洞組合) 등의 3단계 계통 조직 체제를 마침내 갖추고 발족을 보게 되었다.

특히, 1969년부터는 이동조합의 읍면단위조합으로의 합병을 추진하여 이동조합의 수는 1969년의 7,525개에서 1972년에는 1,567개로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1973년부터는 이동조합 및 읍면조합이라는 명칭을 ‘단위조합(單位組合)’으로 바꾸게 되었다.

1969년 상호금융, 1970년의 연쇄점사업, 1970년부터 군조합에서 취급하여오던 비료·농사자금·정책판매·공제 등 4대 업무를 단위조합에서 취급하게 되었다. 따라서 단위조합이 직접 모든 대농민 업무를 담당하여 농협의 근간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1974년부터 경영자립계획을 수립, 농민을 위하여 종합농협으로서의 기능을 자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경영능력을 갖추도록 하였다. 또한 1977년부터는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각종 소득사업을 한데 묶어 새마을 소득종합 개발 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한편, 1980년 말의 법 개정으로 1981년 초에는 시군조합이 중앙회의 지사무소로 흡수됨에 따라 농협계통조직은 회원조합과 중앙회의 2단계로 개편되었으며, 축산지원 업무를 새로 설립된 축협중앙회에 이관하였다.

농협은 1987년의 6·29선언 이후 정치·경제·사회전반의 민주화와 더불어 민주화의 전기를 맞이하는데 즉, 1988년 말 <농업협동조합법> 개정으로 조합장과 중앙회장이 종전 임명제에서 각각 조합원과 조합장이 직접 선출하는 선출제로 전환됨으로써 민주농협의 기틀이 다져졌다. 이에 따라 1990년 4월 회원조합장의 직접투표로 초대 직선 중앙회장이 선출됨으로써 제1기 민주농협이 출범하였다.

2014년 5월 31일 현재 회원조합은 모두 1,158개로 지역농협 961개, 지역축협 117개, 품목농협 45개, 품목축협 24개, 인삼협 11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합원 수는 모두 2,437,671명이다. 또한, 중앙회는 중앙본부와 16개 지역본부로 구성되어 있다. 경북지역본부는 농협 142개, 축협 21개, 품목 4개로서 167개의 지역 농축협이 있으며, 영업부 1개, 시지부 10개, 군지부 13개, 지점 22개, 기업금융지점 3개, 출장소 35개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농협중앙회 상주시지부는 농업은행 상주지점과 구 상주농협이 통합하여 1961년 8월 15일 상주군농업협동조합으로 발족하였으며, 이때에는 함창, 화령, 옥산, 낙동, 모동지소를 두었다. 1964년부터 시작된 이동조합의 합병과 같이 군농협의 지소업무는 단위조합으로 이관됨에 따라 1971년~1973년까지 낙동, 모동, 옥산지소가 차례로 폐쇄되고, 1976년 화령지소를 폐쇄후 상주북예금취급소로 하였다. 1980년 12월 30일 농협법 개정에 따라 1981년 1월 1일 농협 조직이 2단계로 개편되었다. 상주군농협은 탈법인화되어 중앙회의 지사무소인 농협중앙회 상주군지부로 변경되었다. 농협중앙회 상주군지부는 1965년 1월 1일 상주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농협중앙회 상주시지부로 변경되고 함창지점, 상주북지점의 2개 지점과 상주시청출장소, 지역농협 12개, 축산농협 1개, 품목농협 1개를 관할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상주시지부의 연혁을 보면 1961년 8월 15일 상주군농업협동조합으로 발족하여 인봉동 57-1번지에서 농업은행 상주지점으로 업무를 개시하였다.

1974년 9월 9일에는 사무실 노후로 상주시 서성동 147-6번지에 지하1층 지상 3층 연면적 1,513㎡의 사무실로 이전하였고, 1996년 3월 25일 상주시 남성동 85-1번지에 지하1층 지상 3층 연면적 3,131㎡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함창지점은 1961년 8월 15일 함창지소로 발족하여 1985년 5월 9일 농협중앙회 함창지점으로 승격되고, 사무실이 노후되어 1977년 8월 27일 구향리 44-4번지에 지하1층 지상 2층 연면적 480㎡의 건물로 개축하였다.

상주북지점은 1976년 11월 29일 상주군농협 화령지소를 상주시 무양동으로 이전하여 상주군농협 북부출장소로 개점하였다. 1981년 1월 1일 상주북예금취급소, 1985년 4월 30일 농협중앙회 상주북지점으로 승격되었으며, 1988년 사무실을 신축하여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982㎡이다.

상주시출장소는 1991년 6월 15일 상주시청 민원실 25㎡를 임차하여 개점하였고, 상주무양출장소는 1993년 10월 25일 상주군청 청사 별관 134㎡를 임차하여 개점하였다.

2012년 3월 2일 NH농협과 NH농협은행으로 분리되면서 NH농협은 32개 농․축협으로서 지점은 다음과 같다.

지 점 명

주 소

공검농협

공검면 비재로 1301

공성농협

공성면 옥산5길 5

낙동농협

낙동면 상촌1길 44

낙동농협 낙동지점

낙동면 영남제일로 128

남상주농협

청리면 청리중앙로 121

남상주농협 외남지점

외남면 신상송지길 12

대구경북능금농협 상주지점

왕산로 46

모서농협

모서면 백화로 1388

사벌농협

사벌면 덕담1길 60

상주농협

왕산로 64

상주농협 낙서지점

내서면 낙서리 213

상주농협 남원지점

경상대로 2941

상주농협 상산지점

상산로 351-1

상주농협 서부지점

상산로 283

상주농협 신촌지점

내서면 신촌2길 23

상주농협 중동지점

중동면 오상1길 16

상주원예농협

중앙로 310

상주원예농협 무양지점

삼백로 82

상주원예농협 중앙지점

왕산로 168

상주축산농협

상산로 313

상주축산농협 남성지소

남성로 73-5

상주축산농협 상남지소

왕산로 185

상주축산농협 함창<취>

함창읍 가야로 26

서상주농협

모동면 용호1길 20

서상주농협 화동지점

화동면 이소3길 59

외서농협

외서면 우산로 579

외서농협 세천지소

남적로 5

은척농협

은척면 성주로 754

중화농협

화서면 화령로 41

중화농협 화북지점

화북면 용유1길 10

함창농협

함창읍 함창시장1길 10

함창농협 이안지점

이안면 양범안룡길 2-1

Ⅶ. 농업은행

1907년 금융조합으로 출범하여 2012년 3월 2일 NH농협과 NH농협은행으로 분리됨과 동시에 NH농협은행이 출범하였다. 중앙본부에 21개 농업은행지점 및 출장소와 지역본부에 1,151개 농업은행 지점 및 출장소, 4,473개의 지역 농․축협(지역농협, 품목농협, 지역축협, 품목축협, 인삼협)지점 및 지소의 조직을 가지고 있다. 상주에는 5개로서 농협은행상주시지부, 상주북지점, 상주무양출장소, 상주시청출장소, 함창지점이 있다.

2013년 4월 12일 상주시청이 남성청사와 무양청사가 통합 운영되면서 상주시청출장소는 상주시청 별관건물을 사용하다가 민원봉사과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지 점 명

주 소

상주시지부

상산로 260

상주북지점

상산로 329

상주시청출장소

상산로 223

함창지점

함창읍 함창중앙로 143

Ⅷ. 맺는말

상주의 농업과 관련된 협동 및 금융조합은 1927년 함창, 상주, 중모, 청리 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1907년부터 1928년까지는 상산, 함창, 화령, 상주, 모동, 옥산, 낙동의 금융조합설립, 1947년 상주와 상산금융조합을 합병하고, 함창, 화령, 모동, 낙동, 옥산에 지소를 둔 상주금융조합으로 발전하다가 1956년 주식회사농업은행이 설립되면서 금융조합의 업무를 인수하였다. 1961년에는 상주군농협이 설립되면서 농업은행상주지점의 업무를 인수 받아 낙동, 모동, 옥산, 화령, 함창지소를 두었다. 1981년에는 농협법 개정으로 농협중앙회상주군지부로 개칭하고 함창지소, 북부출장소, 상주남지점, 시청출장소, 무양출장소를 두게 되었다. 1995년에는 상주시군 통합으로 인해 함창과 상주북지점을 두고, 시청과 무양 출장소를 두었으며, 2012년에는 NH농협과 NH농업은행으로 분리하여 NH농협에는 32개 농․축협, NH농업은행에는 함창과 상주북지점, 시청과 무양 출장소를 두고 운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농업과 관련된 협동조합과 금융조합은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협동조합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선인 전준한이 1927년 1월 함창에서 설립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하고 약 2년간 1928년까지 활발하게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1933년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함창지역에는 1907년 이미 함창금융조합이 설립되어 있었던 상황이었으며, 점차 협동조합에 출자자가 증가하고 조합원수가 늘어나던 조합이 단기간에 없어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시대로서 일본인들이 금융조합을 운영하면서 협동조합으로 조합원이 빠져 나가자 협동조합을 사회주의자로 몰아 폐쇄에 이르기까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은 아직까지 일본인의 자료에는 전준한이 사회주의자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최초 성공을 이룬 곳이 상주군 함창지역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일본인들이 사회주의자로 몰아 폐쇄시킨 협동조합을 이제는 함창농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일제강점기에 핍박에 의해 없어진 함창지역의 협동정신을 올바른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