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및 연구 자료/상주(上州)9호

상주학. 상주9호.상주 전통혼례 엿보기

빛마당 2016. 2. 2. 22:39

상주 전통혼례 엿보기

上州文化硏究會

趙 蓮 男

< 目 次 >

Ⅰ. 일생의례의 의미와 관련 문화 이해하기

Ⅱ. 일생의례의 현황과 전승 양상

Ⅲ. 상주의 전통혼례 들여다보기

Ⅳ. 전통혼례에 담긴 상징성 알아보기


1. 일생의례의 의미와 관련 문화 이해하기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를 ‘일생’ 또는 ‘일평생’이라 한다. 일생을 확대하여 해석하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부모의 기자로부터 출생․성년․혼인․회갑․죽음과 제사까지를 포함한다. 유사한 개념으로 서구적 용어인 ‘통과의례(通過儀禮)’라는 말이 있다. 태어나기 전의 기자의례로부터 죽은 후 제례까지 사람이 일생동안 거치는 모든 의례를 묶어 ‘일생의례(一生儀禮)’라 한다.

 의례는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습관을 통해 만들어진 약속된 방식이므로, 언어와 생활방식이 다르면 의례도 달라질 수 있다. 일생의례 역시 다른 민속 문화와 마찬가지로 지역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맞게 다양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출생, 성년, 회갑의례들은 의미는 그대로이되, 지금 시대에 맞게 지속과 변화를 반복하고 있다. 상례와 제례는 다른 의례들에 비해 다소 늦지만, 요즘 변화속도가 빨라지는 추세이다.

 여기서는 우선,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생의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본다. 일생의례 가운데 혼례는 예로부터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일컬어질 만큼 일생에 걸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혼례에 대해서 화동면 양지리 이원규, 김숙자 부부의 사례를 통해 상주 전통혼례의 일부분을 엿보고, 혼례에 담긴 여러 상징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일생의례의 현황과 전승 양상


(1) 출생의례

 출생의례는 임신을 위한 기자의례(기자치성)을 비롯하여 태몽, 임신 중의 금기와 태교, 순산을 위한 방법, 그리고 출산 후의 각종 의례가 두루 포함된다. 지금은 아이 낳기는 꺼려하는 것은 물론, 모든 것이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출생의례의 단면은 마을 할머니들의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예전 자식이 귀한 집안에서는 아이를 갖기 위해서부터 아이를 낳고 난 후의 각종 의례에 정성을 담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 가운데 삼칠, 백일, 돌 그 넘어서까지 아이들의 생일에는 항상 미역국, 밥, 물을 놓은 삼신상을 정성껏 차리는 경우가 있다.

 

  1) 기자의례

기자(祈子)란 자손을 비는 행위, 곧 자식일 생기길 원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주술 및 정성 등으로 점지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보통 신성한 자연물(우물, 큰 돌이나 바위, 산골짜기, 장독대 등)에 치성을 드리거나 아기의 출산과 육아를 돕는 신인 삼신을 섬기는 등 자연의 신성물에 끝없는 정성과 인내로 공을 들이는 것을 말한다. 임신한 임산부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데 이것이 바로 ‘태몽’과 ‘태교’이다.

태몽은 아이의 성별이라든가 미래의 운명 등에 대하여 어떤 계시를 준다고 믿는 꿈이다. 태몽은 본인이 직접 또는 남편, 친척 등이 꾸어주기도 한다. 태몽에 등장하는 각종 동물이나 식물 등에 따라 아이의 성별을 알아보기도 한다. 태교는 임산부가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하여 말과 행동, 마음가짐, 음식 등을 조심하는 일을 말한다. 보통 음식 금기와 행위 금기로 나누어지며, 임부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이를 지킨다.

○ 만신집에 가서 빌기도 하고, 밤 조용할 때 정한수를 떠 놓고 장독대에서 칠성님께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빈다.

○ 생년월일을 써 붙이고 절, 산에 가서 미륵돌의 코나 귀를 긁어다 먹는다. 상주 남장사 석장승의 경우, 아이를 낳기 위해 코를 긁어다 먹은 까닭에 지금의 납작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경기도에서는 낙태를 위하여 긁어먹기도 했다고 한다.

○ 마을 제사에 사용된 종지불을 꺼트리지 않고 집까지 가져오면 아들을 낳는다는 풍속도 있다.


2) 출산의례

 산실에서 태아를 낳고 태를 가르면 밖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남자)가 바로 왼새끼로 꼬아 대문에 금줄을 단다. 보통 금줄은 삼칠일(세일)까지 걸며, 상을 당한 사람부정한 사람은 그 집의 출입을 삼간다. 아기를 낳기 전에 짚을 깔고 아기를 점지해 주는 신인 삼신에게 삼신상을 차려놓고 순산을 빈다. 삼신상에는 깨끗한 물과 쌀, 미역을 올려놓았다가 아기를 낳은 후 첫국밥을 끓인다. 아기가 태어나면 첫국밥은 삼신상에 올렸다가, 산모가 먹는다. 잘라낸 태는 함부로 하지 않고,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기도 하고 물에 띄워 보내기도 한다.


이안면 흑암리 삼신바가지 및 단지 모습

당대나 그 아랫대 자손이 귀하면, 지금도 삼신을 위하는 경우가 많다. 40~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안방 시렁 위에 위의 사진에서처럼 삼신바가지나 단지에 쌀을 넣어놓고 삼신을 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를 점지해주는 것은 물론 태어난 아이도 잘 크게 해 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안면 흑암리의 경우, 며느리가 태기가 없어 할머니가 다니는 절에 물어 보았더니, 삼신을 위해야 된다 하여 삼신을 우하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삼신을 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손자를 얻게 되어 지금도 위하고 있다. 비록, 10월 상달에 밥, 국 떠 놓고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다. 지금은 쌀 대신 지폐를 넣어 보관하고 있다. 헌신동에서도 역시 아랫대에 자손이 귀해 삼신을 새로 모신 경우가 있다.


다) 육아의례

 아기가 태어나서 맞는 첫 경축일이 바로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백일이다. 백설기 또는 자손이 번성하고 수명이 길으라는 마음에서 수수떡을 해 먹는다.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수수떡을 해 먹어야 건강하다 하여 매년 해 먹는 사람들이 있다. 태어나서 일 년이 되는 날이 바로 돌이다. 돌잡이는 돌상에 음식뿐만 아니라 돈, 책, 붓, 실 등을 함께 놓아 아기가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아이의 장래를 점치는 풍속이다.

요즘 돌잔치에서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으며, 돌상에는 마이크, 청진기, 골프공 등 다양한 물건이 올라온다. 아이를 하나, 둘 밖에 낳지 않는 까닭에 집에서 간단히 돌상을 차렸다가 식당이나 뷔페에서 가족, 친지들을 모셔 돌잔치를 하는 경우가 많다.


(2) 관례

 소년소녀가 성장한 어른으로 진입하는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통과의례로 남자는 관례, 여자는 계례로 일컫는다. 관례는 남자에게 상투를 틀고 관을 씌우며, 계례는 여자에게 비녀를 찌르게 하는 의례이다. 조선시대에는 관례를 하지 않은 자제에게는 입학, 혼인, 벼슬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니, 중요한 의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개화기 이후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다가 해방 이후 전승이 중단되었다.

마을에서는 마을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힘을 쓸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하기 시험해보는 ‘들돌’이 있었다고 한다. ‘들돌’은 마을 입구에 두었는데, 이를 ‘들돌들기’라 하였다. ‘들돌’을 들어 올리면 성인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


(3) 혼례

 혼례는 ‘혼인’ 또는 ‘결혼’이라 일컫는다. 『사례편람(四禮便覽』이나 『백호통(白虎通』과 같은 예서에는 지금의 ‘혼(婚)’자를 쓰지 않고, ‘혼(昏)’자를 쓰고 있다. 『백호통』에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예를 올리므로 혼례라 한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해가 진 다음에 혼례를 올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마을 사람들은 ‘혼례’라는 말보다 주로 ‘행례’라 일컫는다.

혼례는 남녀가 하나로 결합하는 의례로, 일생의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에 ‘대례(大禮)’ 또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여겼다. 전통 방식으로 혼인하는 것을 흔히 ‘육례(六禮)를 갖춘다’고 한다. 전통 관습에 따른 혼례 절차가 의혼(議婚)-납채(納采)-납기(納期)-납폐(納幣)-대례(大禮,전안례․교배례․합근례)-우귀(于歸)의 육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예식장에서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결혼 역시 ‘육례’의 절차가 나누어지거나 추가되어 나타난다. 크게 맞선․교제․사주․택일․약혼․함보내기․예식․폐백․신혼여행․우귀의 아홉 단계로 나눈다. 혼례는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례이므로, 절차 및 행위, 음식 등에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육례 가운데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 ‘함보내기’는 주목된다.


(4) 상례(喪禮)

 상(喪)이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은 겪게 된다. 상․장례는 사람이 죽어서 3년 복상이 끝나는 기간 동안 행해지는 모든 의례를 일컫는다. 즉 숨이 끊어져서 죽는 순간부터 시체를 매장해 묘지를 조성하고 근친들이 복을 입는 기간 동안에 치르는 각종 의례를 말하는 것이다. 예서를 기반으로 하는 상례는 보통 초종(初終)․습(襲)과 염(殮)․성복(成服)․치장(治葬)․우예(虞禮)․졸곡(卒哭)과 부제(祔祭)․소상(小祥)․대상(大祥)으로 진행된다.


3. 상주의 전통혼례(婚禮) 들여다보기

 혼례의 절차는 지방에 따라 또는 가문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특히 예전에는 마을 또는 문중 단위로 혼례복, 가마 등 혼례를 치르기 위한 모든 물품이 준비되어 있었던 까닭에 시대에 따른 마을풍속의 변화는 혼례 자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집에서 치르는 혼례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72년 행례를 한 화동면 양지리 이원규(남, 70세), 김숙자(여, 61세) 부부의 아래 사례를 통해 전통혼례에 한 발짝 다가가보고자 한다.


(1) 의혼

 양지리 다라골의 이원규씨는 10남매의 장남으로, 29살이 되던 해 하사관으로 제대를 했다. 외서면 대전 2리에 아는 사람이 있어,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았다. 당시 나이 20살이었다. 아내인 김숙자씨는 3남 2녀 중 둘째로 새마을운동이 한창 이던 시절, 그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 자랐다. 여자들은 보통 그 나이에 시집을 갔으며, 이원규씨는 나이가 조금 많은 편에 속했다. ‘양지리’를 지나 ‘평산리’를 넘으면 바로 충북에 닿는데, 주변에서는 충북이나 영천 쪽으로 시집장가를 오갔다.

음력 2월 그믐께 화령 시장에 있는 식당에서 처음 소개를 받았다. 그 뒤로 처갓집에서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결혼을 승낙 받았다. 사실 당시 마른 체구의 이원규씨는 건강을 최고로 쳤던 장모님 눈에는 들지 않았다. 하지만, 건강만은 자신 있다는 그의 말과 김숙자씨가 시집을 가기로 결심을 했던 까닭에 지금처럼 잘 살고 있다. 청혼서나 허혼서는 따로 주고받지 않았다.


 (2) 납채

 남자 측에서 신랑 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단자를 여자 측에 보낸다. 혼사의 성립은 바로 사주를 보내고 받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원규씨는 한문을 조금 알고 있었던 까닭에 직접 사주를 적어 그 해 10월에 사주단자와 친구 대표로 사돈에게 귀한 딸을 키워 보내주어서 고맙다는 뜻의 인사가 담긴 편지를 신부 집으로 가지고 갔다. 김숙자씨는 그때 받은 사주단자와 편지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특히 사주단자의 경우 장롱 속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었다. 장록 속 깊은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세상을 작별하는 날 함께 묻힌다. 각자의 사주로 양가에서 궁합을 보았는데, 좋았다고 한다. 지금도 혼례 할 때 사주를 반드시는 보는 사람들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주가 좋아야 혼례가 원활히 진행된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궁합이 맞지 않으면 혼인을 못 했다.



         사주단자                      친구가 사돈댁에 보낸 편지


 (3) 납기

 여자 측에서 혼인 날짜를 정하여 남자 측에 알리는 절차를 ‘납기’라 한다. 이원규씨 내외의 혼인 날짜는 신랑 쪽에서 정했다고 한다. 중신애비였던 외서면 대전리의 할머니를 통해 서로 날짜를 주고받았다. 이원규씨는 자전거를 타고 화동면 양지리에서 ‘삼령시고개’를 넘어 김순자씨를 만나러 다녔다. 자전거를 타고 세 고개를 넘어가야 했는데, 지금처럼 길이 좋지 못한 시절, 타고 가는 곳보다는 끌고 가는 곳이 더 많았다고 한다.

 1970년대 이루어진 혼례인 까닭에 신부를 만나러 오가는 일이 자유로웠지만, 그 전에는 신랑신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대례청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다니기 자유로웠던 까닭에 몰래 신부집에 가서 신부의 얼굴을 보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신부는 진짜 신랑의 얼굴을 모르고 시집 장가들던 시절도 있었다.

 1972년 음력 2월 그믐에 만나 혼담이 오고 간 후, 음력 11월 10일 즉 12월 15일 혼례를 올린 것이다. 그날은 제4공화국시대 1972년과 1978년에 두 차례 실시되었던 대의원선거가 있었던 까닭에 절대 잊어먹지 않는다.


(4) 납폐

 혼인이 성립된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예물을 보내는 것이 납폐이다. 납폐 때 예물과 혼서지를 함에 넣어서 보냈기 때문에 요즘도 “함 보낸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김숙자씨는 사주단지와 함께 혼서지를 장롱 깊이 보관하고 있으며, 그때 한복 다섯 벌과 손목시계 등을 받았다고 한다. 한복 다섯 벌 중 네 벌은 너무 낡아 없애 버렸으며, 지금은 기념으로 한 벌만 보관하고 있다.

특히, 행례 당일 날 입었던 한복은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었는데, 너무 낡아 얼마 전에 없애버린 모양이다. 한참을 장롱에서 찾더니, 결국은 못 찾았다. 행례 때 입은 옷은 장롱 깊숙이 보관하고 있다가 “그전에는 왜 웃치매 저고리 놔뒀다가 죽으면 그거 가이(가져) 가면 좋다 캐가주고.” 지금까지 보관하였던 것이다. 손목시계는 오랜 세월이 흐른 까닭에 고장이 나서 버렸다.



           혼서지와                           예물한복


(5) 대례

 혼인 예식인 대례는 크게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로 구성된다. 보통 마을에서는 이를 합하여 “꼬꼬재배”, “행례”라고 일컫는다. 이원규 ․ 김숙자 내외 역시 ‘행례’라 하였다.


(가) 초행

 혼례를 하기 위해 신랑이 신부 집으로 오는데, 이를 ‘초행’이라고 한다. 혼인식을 대게 신부 집에서 하였기 때문에 ‘장가간다’고 하였다. 이원규씨는 대구에 살던 작은 아버님과 짐꾼을 한 명을 데리고 초행을 갔다. 초행인 혼례식 당일 날 아침에 택시를 타고 갔으며 함께 갔던 작은 아버지는 ‘상객’이라 불렀다. 마을에 가마를 다른 사람이 빌려갔던 까닭에 택시를 타고 마을 앞 골목에서 내려 신부 집까지 걸어갔다.

집안에 들어가기 전에 대문 양쪽에 세모 모양의 짚 풀을 해 놓고, 가운데 박 바가지를 깨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는 액운을 깨서 없애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신랑이 들어오는 것을 신부가 보지 못하게 한다. 신부 집에는 방이 두 개가 있었는데, 신랑과 상객이 머물렀으며, 신랑상과 상객상은 각각 독상으로 하여 진수성찬을 차려주었다. 신부는 간단히 크림을 바른 얼굴에 분만 칠했으며, 연지곤지는 하지 않았다.

외서면 대전 2리 한밭에는 혼례에 필요한 혼례복, 사모관대, 족두리, 원삼, 가마, 병풍, 상 등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신랑은 마을에서 사모관대를 빌려 입었으며, 신부는 신랑이 보내 준 한복 위에 절수건을 두르고, 족두리를 썼다. 원삼은 일 년에 두 번 입지 않는다는 풍속에 따라 신랑이 장만해준 한복을 입고 혼례 준비를 마쳤다.

신랑 신부가 방안에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으면, 마당에서는 대례청 차리기에 분주하다. 다리가 접히는 상을 펴고, 그 뒤에 병풍을 두른다. 상 위 양쪽에 암탉수탉 각각 한 마리, 밤, 대추, 대나무를 꽂은 물병 두 개, 청실홍실, 목기러기, 손 씻는 물 등이 놓인다. 그날 집례는 한문을 좀 아는 신부 종가 집 친척 오빠가 맡았다.


(나) 전안례

 신랑이 신부 집에 기러기를 드리는 얘가 바로 ‘전안례’이다. 이원규씨 경우 마을에서는 보통 ‘전안례’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며, 신랑이 기러기를 들고 와서 신부에게 안겨주었다. 그런 다음 중신애비가 기러기를 받아서 대례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 교배례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는 절차이다. 신랑 신부가 마주 하여 백년해로를 맹세하는 중요한 예식이다. 교배상 앞으로 나온 신랑신부는 집례의 말에 따라 교배상의 동서로 마주 서서 각각 준비된 대야의 물에 손을 씻은 다음, 신부가 재배하면 신랑이 답으로 한 번 절하는 것을 두 번 한다. 교배상 동쪽에는 신랑이, 서쪽에는 신부와 신부를 부축하는 시자(신랑, 신부를 옆에서 돕는 사람)가 선다. 당시, 시자는 집안의 올케들이 나이가 많거나 임신을 한 상태였기에 친척 아저씨와 6촌 오빠가 맡았다.


 


(라) 합근례

 교배례를 마친 신랑 신부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신랑 신부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각각 교배상의 술잔을 작은 상으로 내려놓고 다음 술잔에 술을 채운다. 신랑 신부는 이 잔을 빈 그릇에 세 번 나누어 따르고 안주를 집어 상 위에 놓는다. 다시 빈 잔을 채우면 신랑 신부는 그 잔을 각각 다른 시자에게 준다. 마지막 잔은 보통 표주박을 사용하는데, 이원규씨의 경우 그냥 잔을 서로 위 아래로 나누어 마셨다.



(6) 우귀

 신부 집에서 대례를 마치면 신랑은 신부 집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신부가 신랑을 따라 시댁으로 가서 며느리로서 치르는 절차를 ‘우귀’라 한다. 신부 집의 형편이나 신랑신부의 사정에 따라 머물지 않고 당일 날 시댁으로 가는 것을 ‘당일 우귀’라 일컫는다. 이원규씨의 경우 오전 10시 정도에 혼례를 하고, 점심을 먹은 후 당일 우귀를 했다. 신부와 함께 우인 대표로 백부(둘째)님이 상객으로 따라 왔다. 그날 잔치 음식으로는 배추전, 무시전(무전), 불떡국시, 잔치 국수 등이 준비되었다.

아래와 같이, 신부는 혼례를 마치고 시댁으로 가기 전 앞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가마솥 뚜껑의 제일 위 꼭대기를 원삼으로 한 번 두르고 뒷문으로 나온다.

행례하고 올 때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주방, 옛날에는 정지라 캤지요. 정지에 들어 갈 때는 앞문으로 들어가가주고 거 소두벙(솥뚜껑) 있잖아? 시커먼 밥솥. 시커먼 까만 밥솥 있었어. 근데 그거 인제 꼬다리(꼬리) 그거를 이렇게 한 번 두르고, 뒷문으로 나오라 그래. 그래서 그래, 그래 나왔어. 원삼으로 이렇게 두르고 그래 나가더라고. 이거 이만큼 내려오는 거, 한복 겉은 거 이래 하잖아. 속에 원삼을 끼웠다니께, 초등학교 무용할 때 손에 그 원삼을 끼고 하잖아. 그걸 끼워가주고, 그래 원삼으로 이렇게 두르고 그렇게 나왔어.

웃어른들이 시켜서 한 일이라 거기에 담긴 뜻은 모른다. 김숙자씨는 시댁에 가서 화장실 때문에 3일 정도 굶었으며,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떠난다는 마음에 택시에서 시댁으로 가는 내내 울었다고 한다. 파란색 사기로 된 요강과 찹쌀(요강에 넣어 옴), 엿, 부침개 같은 폐백 음식을 함께 준비했다. 가져간 찹쌀로 그날 저녁 찰밥을 해 먹는다.


(7) 현구고례


신행때 가져온 이불

 신부가 시댁에 도착하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대문 양 옆에 세모 모양의 짚불을 놓고, 가운데 바가지를 깨고 들어온다. 신부는 방으로 안내되어 신부상을, 함께 온 상객인 백부는 상객상을 받았다. 김숙자씨의 경우, 국수, 부침개, 김치, 물김치, 김 같은 것들이 상에 올라왔는데, 시댁 대표로 어떤 아주머니가 “명 길라”는 의미로 바가지에 담긴 국수 세 젓가락을 먹여 준 기억이 생생하다. 현구고례는 새며느리로서 처음 시부모님을 뵙는 것을 일컫는다.

신부는 준비해 간 예물인 폐백을 드린다. 지금은 현구고례 자체를 폐백이라고 하는데, 할머니 역시 그 다음날 아침에 폐백을 드렸다. 그때 신랑 친구들이 벽시계, 앨범, 액자 같은 선물을 주었다. 할머니는 신행 올 때 신랑이 해준 이불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8) 신방엿보기

혼례식 날 저녁 신랑 신부가 한 방에 들어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데 이를 ‘첫날밤’이라고 한다. 당일 우귀를 하지 않으면, 신방은 신부 집에 차려진다. 당일 우귀를 한 이원규씨의 경우 신랑 집에 신방이 차려 졌으며, 첫날밤 어김없이 친척들이 문구멍을 통해 신방을 엿봤다.


(9) 사관드리기

 이튿날이면 신부는 아침 일찍 시부모에게 문안인사를 하는데, 이를 ‘사관드린다’고한다. 이때 친정에서 준비해 온 엿 등 간단한 음식을 신부가 차려 들고 문안인사를 드린다. 할머니 역시 다음날 시부모에게 인사를 드렸으며, 준비해간 엿을 올렸다. 엿은 “시어머니 입 붙이려고 들고 간다”는 말이 있다. 당시 시댁에는 시부모님, 큰아버지 내외를 비롯한 친척들이 자리했다. 다음날 아침은 부엌에서 상차림을 도왔으며, 3일째부터 직접 밥을 해 먹었다.


(10) 재행

 혼인 후 신랑이 처음으로 처가에 가는 것을 ‘재행’이라고 한다. 이때 신부 역시 혼인하고 처음 친정에 가는 데, 이를 ‘근친’이라고 한다. 김숙자씨는 3일째 되는 날 첫 아침밥을 차려 드리고 처음 친정나들이 즉 ‘재인질’을 갔다. 재행을 마을에서는 ‘재인질’이라고 일컬었다 한다. 재인질을 가면 마을에 신랑을 소개한다. 또한 저녁이 되면 ‘신랑매달기’를 하는데, “달아야 잘산다고.”고 하여 큰 집 올케들이 신랑을 매달았다.

김숙자씨는 이듬해 10월 20일에 첫 아들을 낳았다. 혼례하고 얼마 안 되어 시동생 하나만 두고 부모님과 시동생들은 충북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에는 누에를 먹였고, 얼마 안 되어 담배 농사를 20년 정도 하다가 지금은 포도 농사를 짓는다.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으며, 막내아들이 군대에 들어가고부터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 매일 아침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자녀들의 건강을 위해 빌고 있다. 포도 농사로 항상 바쁘지만, 두 내외 얼굴에는 오늘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4. 전통혼례에 담긴 상징성 알아보기

 전통혼례의 여러 절차나 사용되는 물건에는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이 담긴 다양한 상징들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중요한 몇 가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1) 혼서지

 혼수함 안에 고운 종이를 깔고 먼저 혼서지를 넣는다. 이 혼서지는 죽을 때 관속에 넣어 저승에 가지고 간다. 이러한 행위 역시 일부종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연지곤지

 새색시가 바르는 연지곤지의 빨간색은 젊음을 상징한다. 여성은 젊음이 충만할 때에는 뺨이 홍조를 띤다. 또 기운이 왕성한 남자는 입술이 붉다. 정열이 달아오르면 불두덩이 뜨거워지는 데서 그 부위를 단전이라 한다. 그러므로 연지곤지 등 붉은색은 젊음을 표상한다. 재혼시 연지곤지를 찍지 않는 풍습을 고려하면, 빨간색은 숫처녀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새색시가 주로 입는 다홍치마는 젊음과 정열을 상징하는 길색으로 간주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은 다홍치마는 신부의 의상이므로 아름다운 처녀를 택하겠다는 뜻이다.


(3) 가마

 가마는 세속적인 의미를 넘어, 이질적인 두 세계를 교통할 수 있는 초월적이고 상징적인 매체로서, 신화적으로 활동되는 원리는 통과의례에서도 확인된다. 김수로왕 신하의 허황옥이나 제주도 삼성혈 신화의 세 여인이 이동매체인 배에 각종 씨앗을 싣도 왔듯이, 신행길에 오르는 신부의 가마 속에는 여러 가지 씨앗을 함께 싣고 간다. 시집살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 줄 씨앗을 전하는 매체로 가마가 등장한다. 이 가마는 이동매체의 단계를 넘어서 통과의례의 한 상징이 된다.

신부가 신랑집으로 가는 신행길에 가마를 이용했던 것은, 가마가 처음으로 가정을 이루는 새 출발이나 남녀의 결합을 상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행길에 맞은 편에서 낯선 가마가 오면 비키지 않고 서로 실랑이를 벌여, 종종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 기세에 밀리거나 싸움에 지면, 그 가마의 신부는 앞날의 운수가 사나운 것으로 믿었다. 새 출발의 방해자를 이기지 못함에서 오는 불안감이 가져다 준 속신이다.


(4) 함

 함을 받아서 신부 아버지가 세 번 발로 가볍게 차는 곳도 있다. 이렇게 세 번 차는 것은 신부가 칠거지악을 면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함을 상 위에 놓고 함 속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채 손으로 더듬어서 첫 손에 잡히는 물건의 빛깔로 첫 딸인가 아들인가를 점친다. 전남지역에서는 흔히 안방에서 살며시 열어 손을 넣어 먼저 잡히는 옷감이 홍색이면 금실이 좋고 잘 산다고 한다.


(5) 대례상

 대례상에 암탉과 수탉, 송죽, 동백꽃, 촛불, 밤, 쌀, 대추, 청실과 홍실 등을 놓는데, 닭은 김알지나 알영 등의 신화에서 보듯 예부터 영물시 된 동물로 암탉은 다산을, 수탉은 보처자를 상징한다. 게다가 수탉은 처자의 보호는 물론, 가족의 명예와 생활권을 지키는데 진력함을 상징하는 동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대례상 위에 있는 밤이나 대추는 하객들이 신랑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한다. 이것을 저녁에 신방에서 먹으라고 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먹게도 한다. 밤은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뜻이고, 대추는 늙지 말라는 뜻이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송죽 같은 사랑을 하라는 뜻으로, 송죽에는 변함없는 사랑의 상징성이 들어있다. 이 밖에 녹색으로 오래도록 생기를 간직하라는 뜻이 있다고도 한다.

또한 동백은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에 다자다남을 상징한다고 한다. 한편 명태를 놓기도 하는데, 명태는 깊고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고 한다. 그래서 명태를 깊고 깨끗한 사랑의 상징성으로 보았다.


(6) 기러기

 전안례시에 기러기의 상징성에 대해서는『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개 폐백으로는 산 기러기의 머리가 왼쪽이 되게 해서 오색의 비단으로 엇갈리게 묶어서 사용한다. 없으면 나무로 새겨서 사용한다. 그것은 음양을 따라 가고 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목안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역마다 다르다. 전북에서는 기러기가 가장 신을 천성으로 지키는 새이기 때문에 이를 본받기 위해서라고 하고, 경남에서는 겨울철에는 남으로 여름철에는 북으로 철을 따라 다니는 새로, 한번 교미하면 한 쌍이 내내 같이 살아 깨끗한 정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기러기를 치마폭에 싸가는 것은 기러기가 명이 길기 때문에 장수를 상징한다고도 하며, 날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기러기가 알을 잘 낳는다는 것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상주시 전통의례관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