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일제강점기 사진의 촬영시기에 대하여
上州文化硏究會
金 眞 亨
< 目 次 > | ||
Ⅰ. 머리말 Ⅱ .山城의 一般現況 Ⅲ. 旣存의 硏究 Ⅳ. 맺은말 |
Ⅰ. 머리말
최근 들어 과거에 읍성이 존재했던 지자체마다 복원사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안산, 무장(고창), 면천(당진), 광주, 하동, 김해, 밀양, 양산, 언양, 울산, 기장, 경주, 동래, 대구, 안산, 청주, 진도, 나주, 홍주읍성 등이 그것인데 복원을 완료했거나 진행 중인 지역이다. 이는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 기조에 발 맞춰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읍성(邑城)이란 단어는 고려 말 이래 등장한 새로운 성격의 성(城)을 담아낼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읍성은 행정상 중요한 읍이나 해안 가 또는 국경지역에 축성하여 외부의 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외형으로는 산 정상부에 쌓은 산성(山城)과 큰 차이점이 없어 보이나 산성은 외적의 침입 시 피신하여 성을 지키는 군사적인 면이 컸다고 한다면, 읍성은 행정 관아가 있고, 지역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어 그 지역의 행정, 국방, 경제, 교육, 문화, 사회의 총체적인 기능을 가진다.
따라서 읍성은 그 지역의 구심점이고 정체성이 묻어있던 곳이었으며, 그 지역 백성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 있는 곳이기에 읍성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상주지역 역시 조선시대 읍성이 존재했던 곳이나 지금은 성벽이나 4대문, 관아 건물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과연 이 지역에 읍성이 존재했던 지역으로 보기에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다행히 일제강점기 당시 지적도라든지 조선후기 고지도, 각종 지리지 및 역사서 등을 통해 어느 정도의 연구성과는 축적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를 통해 상주읍성의 연혁 및 범위, 내부시설, 건축구조 등 일단이 밝혀져 있다. 하지만 읍성 내의 관아시설의 위치 및 명칭이라든지 4대문의 형태, 성벽의 구조 등에 대해서는 약간의 기록자료와 고지도 상에 표현된 회화식의 자료를 중심으로 추론한 것들이어서 연구자들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상주시에서 추진하려는 읍성 복원사업이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하기 위해서는 더 확실한 기록 또는 실증자료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시점에 아주 반가운 사진자료가 상주박물관을 찾았다. 상주박물관에서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상주와 관련한 유물 구입 사업을 2012년부터 진행해 오고 있다. 이를 통해 규장각 본, 장서각 본과 함께 1리 방안에 그린 영남지도 34점을 포함하여 경상감영과 관련한 중요한 자료인『영영사례』, 우복 및 창석 집안의 여러 가지 교지 및 간찰 등 상주 지역사에서 꼭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금년에도「팔도총리교리」,「삼강행실도」 등 중요한 자료가 들어왔고, 이와 함께 이 글에서 소개할 상주읍성 4대문과 시가지 풍경의 모습이 그대로 찍힌 사진엽서 7장을 입수하였다. 이 자료들은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상주읍성 4대문의 형태와 규모를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2015년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7장의 사진에 대해 소개하고, 이 사진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몇 가지 정보를 살펴 보고자 한다.
Ⅱ. 입수 경위 및 사진현황
여기에서 소개할 7장의 사진은 전술한 바와 같이 2015년 유물구입사업 시에 입수한 것으로 매도자는 서울에서 골동품 상을 운영하는 분이다. 매도자가 밝힌 입수 경위는 2014년 도쿄에 방문했다가 동아세아 관련 근대문헌자료 및 고전적, 고문서 교환회에서 구입한 것이라 한다. 입수된 총 7장의 사진은 우편엽서의 표지에 장식된 것으로 상주읍성 4대문 사진 4장, 상주읍성 시가지 전경 1장, 수비대 전경 1장, 상주 재판소 사진 1장이다.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엽서로서 사용되지는 않았다. 크기는 7장 모두 가로 14.1cm, 세로 9.1cm이다.
전면의 각 사진 아래부분과 측면에는 사진제목과 발행처가 표시되어 있다. 우선 발행처는 7장의 사진 모두 동일하며 하단부에 가로로 “상주육군어용달강진상점발행(尙州陸軍御用達江津商店發行)”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상주에 주둔했던 일본 군인에게 물품을 팔던 강진 상점이 발행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 내용의 표기 형식은 7장의 사진 모두 같은 글자체로 전각 또는 고무인 형태의 것에 글자를 새겨 청색 계통의 잉크로 찍은 것이라 보인다.
사진 제목 표기에 있어서 7장 사진 모두 제목을 표기하였다. 우선 가로사진인 3장의 사진에는 각각 “慶尙北道尙州守備隊ノ景, 慶尙北道尙州城內市街一部ノ景, 慶尙北道尙州區 裁判所”라 우측 하단부에 표기하였다. 이것 역시 발행처의 표기 형식과 동일하게 전각 또는 고무인에 글자를 새겨 청색 계통 잉크로 찍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로사진인 상주읍성 4대문 사진의 제목 표기 방식을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하단부가 아닌 좌측 측면에 표기하고 있다. 이는 아래부분에 발행처와 함께 표기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또한 표기 방법을 보면 앞서 살펴본 발행처 및 가로사진에 표현된 제목 표기 방식과는 달리 사진 위에 종이를 덧대어 그 위에 전각 또는 고무인에 글자를 새겨 찍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진은 발행처 및 사진제목을 사진 위에 직접 찍어 표현한 반면, 4대문 사진의 제목 표기방식은 종이를 덧대어 찍어 인쇄했다는 것이다. 이는 어두운 부분을 피해서 제목이 잘 보일 수 있게 하려는 의도로 흰색 종이에 덧대어 위치를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문경 사진의 제목 표기를 보면 좌측에서 한참 떨어져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사진 속의 사람을 가리지 않게 하는 의도인 것 같다.
사진의 후면은 7장 사진 모두 같은 형식으로 가로로 봤을 때 상단중앙에 “UNION POSTALE UNIVERSELLE(만국우편연합)”와 바로 아래에 “CARTE POSTALE(우편엽서)"이라 프랑스어로 표기되어 있다. 그 우측으로 우표를 붙이는 곳을 점선으로 표시하였고, 그 아래에 ”郵便はかき“ 즉 우편 엽서라고 표기하였다.
이하에서는 각 사진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 상주읍성 동문(東門)
사진의 좌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東門景”이라 표기하였다.
이 사진은 성문 안쪽의 기와 건물과 담장을 통해 볼 때, 읍성 바깥에서 성문 정면을 보고 찍은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홍예식의 문이 아니라 평거식 월단 위에 건립된 1층 문루의 형태이다. 월단의 석축은 남문과 마찬가지로 가공된 장대석으로 전체 7단으로 바른층으로 쌓고 있다. 여장은 좌ㆍ우 많이 무너져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건축양식은 익공건물로 추정되지만 건축양식은 사진상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읍성의 해자로 보이는 것이 확인되는데, 성문 진입부에는 통행을 위해 다리의 형태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문의 형태를 보면 다른 성문에서는 보기 힘들게 성문의 상부 양쪽에 2단으로 몰딩 처리하여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밖에서 안으로 열리는 구조의 성문이다. 기와는 암수기를 사용하였고, 암수막새를 사용하였다. 용마루ㆍ 내림마루ㆍ 추녀마루에는 회로 마감되어 있고, 용마루 좌우 끝 부분에는 치미가, 내림마루 끝에는 잡상이 있으며, 용마루 중앙에도 1기의 잡상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초가가 줄지어 위치하고 초가 마루와 문루에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나. 상주읍성 서문(西門)
사진의 좌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西門景”이라 표기하였다.
서문의 사진은 동문과는 달리 정면이 아닌 약간 측면에서 촬영하였다.
서문은 동문과 비슷한 양식이다. 단지 문의 상부 모서리가 직각 혹은 홍예를 가공하지 않고 6각형으로 가공한 점이 다르다. 성문의 면석은 역시 가공한 장대석으로 전체 8단으로 바른층으로 쌓았으며, 문루 위에는 벽돌의 여장이 설치되었지만 무너진 상태이다. 문루의 건축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익공양식은 초익공양식으로 추정한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회로 마감하였 고, 잡상은 설치하지 않고 망와만으로 장식해 놓았다. 기와는 암수막새를 사용하였다. 성문 앞쪽에는 해자로 이용하다가 매몰한 것으로 보여진다. 성문 앞으로 어린 아이 2명과 그 옆 초가 쪽으로 성인 여성이 보인다.
다. 상주읍성 남문(南門)
사진의 좌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南門景”이라 표기하였다.
남문 안쪽으로 초가와 함께 왕산으로 보이는 숲이 일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남문 바깥 정면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남문은 홍예형의 월단 위에 건립된 1층 문루이다. 문루 중앙에는 현판이 있는데 남문의 이름으로 생각되는 3글자를 확인할 수 있지만 사진 상으로 판독할 수는 없다. 지붕은 상주읍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우진각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월단은 아치형의 홍예로 면석을 조성하였고, 면석은 가공한 장대석으로 전체 13단으로 바른층 쌓기로 쌓았다. 성문 위에는 벽돌로 쌓은 여장이 보인다. 사진이 명확하지 않아 공포양식은 알 수 없으나 2익공이상의 익공건물로 추정된다. 기와는 암수기와를 사용하였으며, 암수막새를 모두 사용하였다.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회로 마감하였고, 추녀마루 상부에는 여러 가지 잡상을 배치하였다.
성문 양측에 문루로 올라가는 계단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문의 상부 좌우에는 수구가 확인된다.
남문 앞쪽으로 기와집이 줄지어 위치하고 있으며, 길에는 짧은 바지를 입은 아이들과 성인 남녀가 보인다.
라. 상주읍성 북문(北門)
사진의 좌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北門景”이라 표기하였다.
성문 안쪽으로 왕산과 담장 일부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바깥에서 정면으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북문은 홍예형의 월단 위에 건립된 1층 문루이다. 월단의 형식은 남문과 유사하고, 여장에는 상주읍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길상문인 ‘수아자문(壽亞字門)’이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 문루의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고, 공포양식은 3익공형식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현무문(玄武門)’이라는 현판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는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북문의 명칭과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마. 상주성내 시가일부 전경
사진의 우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內市街一部ノ景”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사진은 남문 문루 위에서 왕산과 북문을 바라보며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남문 안쪽 시가지의 모습과 관아 시설이 한눈에 조망된다. 성내 중앙도로를 연결하는 끝부분에 합작지붕의 북문인 현무문이 보이고, 관아 시설로 진입하는 관문인 태평루의 모습도 보인다. 태평루 앞까지 초가의 상가가 밀집해 있으며, 많은 수의 사람들이 보인다. 태평루 뒤로 보이는 왕산에는 일본 신사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상주시가지 사진
바. 상주 수비대 모습
사진의 우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守備隊ノ景”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사진은 왕산 아래 관아 건물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초소 앞으로 정복 차림의 일본군 수비대가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좌측의 기와 건물 출입구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주분견소(尙州分遣所)’라는 글자가 보이고, 그 옆으로 자보대가 서있고, 옆쪽에 짧은 바지의 성인 남자가 서 있다. 건물 뒤로 보이는 왕산에는 일본 신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마. 상주구 재판소
사진의 우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區裁判所”이라 표기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앞면을 보면 유리창문이 설치되어 있어 근대적 재판소로 사용하기 위해 개조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와는 암수 막새를 사용하지 않은 간략한 형태이다. 건물 앞쪽으로 분재가 잘 된 소나무 2그루를 조경수로 가꾸고 있고, 그 옆으로 정복의 성인남성이 보인다.
Ⅲ. 일제강점기 사진의 촬영시기
이하에서는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의 촬영시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사진의 촬영시기
상주박물관으로 입수된 사진 7장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동안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었던 모습들이 담겨 있어 상주읍성 및 시가지 복원에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다. 따라서 이들 자료들의 사료적 가치를 위해서는 촬영시기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입수한 사진엽서에는 어디에도 촬영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결국 사진 속에 표현된 내용을 토대로 추정하는 수 밖에 없다. 입수한 사진 7장은 모두 사진 하단에 도장으로 찍어 표기한 사진 제목, 발행처 그리고 도장면의 글자체 가 같은 것으로 판단되므로 같은 시기에 발행한 사진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사진 속의 건물들을 통해 촬영연대를 살펴보고자 한다.
<표1> 일제강점기 이전 상주읍내에 있었던 관공서
設置施設 | 設置日 | 設置時名稱 | 備考 |
郵便局 | 1905年 6月 9日 | 釜山郵便局尙州出張所 | |
警察署 | 1906年 12月 | 尙州警務分署及顧問分遣所 | |
普通學校 | 1907年 6月 1日 | 尙州公立普通學校 | |
小學校 | 1907年 7月 11日 | 尙州公立尋常小學校 | |
金融組合 | 1907年 10月 | 尙州金融組合 | |
守備隊 | 1907年 12月 | 尙州守備隊 | |
憲兵分遣所 | 1908年 7月 | 憲兵隊大邱分隊尙州分遣所 | |
裁判所 | 1909年 1月 20日 | 大邱地方裁判所尙州郡裁判所 |
위의 표는 일제강점기 이전 상주읍내에 소재했던 관공서 현황이다.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 가운데 위 관공서가 나타나는 것은 <사진 6>의 수비대, 헌병분견소 그리고 <사진 7>의 상주구재판소이다. <사진 6>의 상주 수비대는 1907년 12월에 설치한 것으로 나오고, 헌병분견소는 1908년 7월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진 촬영 상한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 재판소 사진이다. 위의 표에 의하면 재판소의 설치 시기는 1909년 1월 20일 이라 되어있어 일단 관공서 설치 현황 자료만 봐서는 이 시기를 사진촬영의 상한연대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참고로 조선총독부제령의 ‘통감부재판소령’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건에 관한 각서’를 체결하면서, 10월 16일 일본 칙령 제236호로 ‘통감부재판소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통감부(統監府)는 10월 21일 통감부령 제28호로 재판소의 명칭과 관할구역을 정하여, 고등법원 1개, 공소원 3개, 지방재판소 8개, 구재판소 103개를 설치하고, 11월 1일 개청하였다. 따라서 상주의 재판소는 1909년 11월 1일부터 역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상주구재판소는 1909년 11월 1일부터 재판소의 모습을 갖추고 이와 함께 그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의 재판소 사진은 1909년 11월 1일 이후에 찍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부분은 추후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그러면 하한연대를 살펴봐야 할 것인데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상주읍성의 철거 기록이다. 1929년에 증보된 『商山誌』권3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임자년(壬子年, 1912년)에 이르러서 그 성을 부수고, 그 누각을 허물어, 이번에는 시가 통로를 만들었다. 호지(壕池)나 성도 아울러 폐허가 되어 덧없이 미나리꽝이나 왕골밭이던 것이 이제는 전부 흙을 돋우어 가옥을 짓고 말았다. 예전의 성이나 연못이 있던 곳을 이제 다시 기억할 수 없다.
따라서 위의 내용을 볼 때, 상주읍성의 철거 연대는 1912년 경이라 볼 수 있다. 박물관이 입수한 4대문 사진들을 살펴보면 읍성 철거 이전이라 봐도 될 것이기에 1912년을 사진 촬영 하한 연대로 봐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하한연대를 좀 더 줄여볼 수 있을 것 같다.
1912년 3월 29일에는 부령 제26호로, 공소원을 복심법원(覆審法院), 지방재판소를 지방법원(地方法院)으로 개칭하고, 구재판소 및 지방재판소 지부를 지방법원 지청(地方法院支廳)으로 개편하면서, 지방재판소와 지방재판소지부의 명칭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 내용을 통해 볼 때, 상주구재판소는 1912년 3월 29일 자로 지방법원으로 개편하면서 명칭까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내용을 통틀어 볼 때, 상주박물관에서 입수한 사진의 촬영시기는 구재판소를 개청한 1909년 11월 1일이 상한이 될 것이고, 하한은 재판소를 지방법원으로 개칭하는 1912년 3월 29일 이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금년 상주박물관에서 입수한 일제강점기 사진자료를 소개하였다. 입수 경위와 각 사진 별 현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각 사진을 통해 촬영시기를 생각해보았다.
상주구재판소 사진을 통해 입수한 사진의 촬영 연대를 1909년 경부터 1912년 3월 29일 이전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처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의 일제강점기 사진 몇 장은 앞으로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려줄 것이어서 이 사진들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지역 상주처럼 읍성과 관련한 소중한 자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이 시점에서 이번에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은 지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초사료가 될 수 있었다.
이 글에서 다룬 일제강점기 사진에 대해서는 다시 또 우리 앞에 나타날 이 시대의 사진이라든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서 명확히 밝혀질 것이고,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정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쪼록 이를 계기로 상주읍성에 대한 연구가 한층 더 진일보 발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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