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州 子山山城 硏究
上州文化硏究會
金 相 鎬
< 目 次 > | |||
Ⅰ. 머리말 Ⅲ. 旣存의 硏究 Ⅴ. 築城時期 및 形態 Ⅶ. 城壁 區間別 詳細 Ⅸ. 說話 等 | Ⅱ .山城의 一般現況 Ⅳ. 山城에 關한 記錄 Ⅵ. 主要施設 Ⅷ. 城 內部 施設 Ⅹ. 맺는말 |
Ⅰ. 머리말
자산산성 위치도
우리나라는 백두대간이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동서로 낮아지는 반도국가의 특성에 따라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은 지형이다. 이러한 지형에 의해 각 고을이 형성된 지역도 평야보다 산지가 많을 수밖에 없고 산지 지형에 정착하는 민족도 그 지형에 적응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전쟁 또한 이러한 지형에 의해 전술이 개발된다. 따라서 전쟁 때 산을 이용한 은폐 전술이 필수적이므로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하였다.
일반적으로 성은 내성만을 의미하고, 곽은 외성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성곽이라 함은 내. 외성을 통칭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국어 사전적 의미는 적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 따위로 높이 쌓아 만든담, 또는 그런 담으로 둘러싸인 구역으로 정의하고 있다. 성(城)의 우리말은 "잣" 혹은 "재"이다. 우리말 "잣"에서 시작된 말은 지금까지 한자(漢字)인 "성(城)"이나"책(柵)", 혹은 "곽(郭)" "보(堡)" 등의 글자로 표현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고유한 말은 있었으나 우리말을 담아 둘 글자가 만들어진 것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 때문이다.
조선초기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우리나라의 성은 759개소로 조사되어 있다. 이 성 중에서 산성은 182개로서 모두 고적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성은 견벽청야 거험적축((堅壁淸野 據險積蓄)의 방식에 의해 험한 산지 지형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약화시키고, 항전을 계속할 수 있는 좋은 입지를 선정하여 축성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청야입보(淸野立堡)전술은 유사시에 적이 침범해오면 군관민은 관(官) 또는 관이 지정하는 장수의 통제 하에 거주지를 버리고, 적이 사용할 수 있는 곡식이나 시설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정리한 후 인근의 산성에 집결하여 적의 공격을 대비 한 전술이기 때문에 지역별로 많은 산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입지 조건은 평야를 앞에 둔 높은 산에 자리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평야를 건너오는 적을 빨리 발견하여 공적의 공격에 대처를 하기 위한 것이다. 일부는 읍치와 동떨어진 깊은 산중에 산성을 쌓기도 하는데 이는 외부와 단절한 채 천험(天險)을 이용하여 지구전을 펼치려는 의도이다.
본 연구의 주제인 자산 산성의 자산은 상주의 진산인 천봉산에 붙어 있는 산으로서 상주 시가지에 가장 근접하고, 산 능선과 계곡부가 연결된 포곡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상주 읍치 방어에 직접적으로 활용될 위치에 있는 산성이나 아직까지 이 산성의 용도와 기능, 제원 등 구체적으로 연구된바가 없었다. 다만 산성이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었고 일제강점기 때의 고적조사와 사벌국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하면서 개괄적인 조사가 그 전부라고 하겠다. 이 산성의 각 기록과 현재까지의 연구 상황, 필자가 조사한 제원과 성터에서 수습된 유물을 정리하여 향후 상주 산성 연구의 바탕을 두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하겠다.
Ⅱ. 山城의 一般 現況
상주시 만산동, 연원동에 걸쳐 있는 천봉산(天鳳山)은 해발 435m이며, 천봉산에서 따라 내려온 자산(子山)은 해발 294.5m이다. 이 자산에 조성된 자산산성은 북쪽 해발 292.5m 고지부터 남서쪽 213.8m 고지를 잇는 능선에 성벽이 축조되어 있으며, 동문지 주변의 경도는 동경 128。08、45″, 위도는 북위 36。25、30″이다. 자산은 석악산(石岳山)이라고도 하며, 일부 견해는 석악산과 천봉산을 같은 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상산지 산천조(山川條) 등에서는 ‘석악산(石嶽山)은 천봉산에서 온다. 천봉산은 진산(鎭山)이고, 주(州)에서 7리의 위치에 있으며, 석악산은 주에서 6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천봉산과 석악산은 서로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에 같은 산은 아니다. 자산은 자산(紫山), 자양산(紫陽山)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러한 산 이름에 따라 성의 명칭도 자산산성(紫山山城), 자산산성(子山山城), 자양산성(紫陽山城)으로 불리고 있다.
그림2 지형 개항도
이 산성의 지형적 조건을 보면 북쪽에는 천봉산(해발 435m)과 노음산(해발 728m)이 있고, 천봉산과 노음산 사이에는 연원천, 자산과 시내 사이에는 북천이 위치하여 동, 남, 서향이 개방되어 적군의 조망이 쉽다. 또한 상주와 사벌 평야에 접하고 있어 청야입보(淸野入堡)의 군사 전술이 용이하고, 산성 내부에 우물과 저수지, 경지를 보유하고 있어 산성으로서의 적지이며, 읍치를 방어할 수 있는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Ⅲ. 旣存의 硏究
자산산성 위치도
현재까지 이 산성에 대한 정밀한 지표조사나 발굴조사 등 고고학적 조사가 실시된 바는 없다. 다만, 개괄적인 조사만 있었을 뿐이며, E마트와 임란북천전적지 사이의 매장문화재 유존지역은 구체적인 조사 없이 삭토(削土)되었고, 지금은 주차장으로 개발되었다. 산성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 조사는 다음과 같다.
◦1987년 박태우의 연구에서 자산산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687년 사벌주의 축성된 사벌주의 성으로 추정하였으며, 이 때 조사에서 와당이 출토되었다.
출토 와당
◦1996년 윤용진, 최태선의 연구에서는 치성은 약 700m, 둘레는 1,860m, 성벽 축조방식은 자연 경사면을 활용한 토축식과 토석혼합식이 혼재되었고, 흔적은 동, 남, 북쪽에서는 뚜렷하나 치성이 끝나는 부분에서 서쪽으로는 자연지형을 성벽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성벽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남쪽 계곡부는 사면을 깍아 만든 토루, 동쪽은 석축혼합식 축조방식이다. 석축 높이는 2m 내외, 폭은 상부 1.5m, 하부 6m 정도이다. 성문은 남쪽, 동쪽, 서쪽 계곡부이고 동쪽은 협축 형태의 성벽을 쌓은 문지로 추정했다. 건물지는 동문과 서문지 주변 2개소, 채집 유물은 반월형석도, ‘官’, ‘八’, ‘可上’등의 와편이 있었으며, 삼국시대의 성으로 보았다.
◦2002년 경북문화재원구원에서는 상주지역의 문화유적분포지도를 작성하면서 1996년 윤용진, 최태선의 연구와 성의 규모, 시대, 위치를 동일하게 보았고, 기타시설로서 성내에 채석장을 추정하였는데 이 정 자국은 병성동 고분군의 채석장과 유사한 점에서 성벽 축조시 성돌을 이곳에서 채석하였던 것으로 추정했다.
◦1997(2002)년 조희열은 천봉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해발 290m 고지에서 250m, 222m, 215m까지 이어지는 능선으로서 회곽로가 남아있는 성벽은 1,680m, 초축 당시에는 2,050m로 추정하였다.
Ⅳ. 山城에 關한 記錄
산성에 관한 기록은 상산지와 근대 일제강점기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상산지는 창석본(1617년)에는 기록이 없고, 청대본(1749년)부터 나타나는데 다음 내용과 같다.
◦商山誌 古蹟條, 古都, 沙伐國古城(淸臺本. 戊辰本)
「州北石嶽山麓有山傳稱子山山城」
‘주의 북쪽 석악산 기슭에 산성이 있는데 자산산성이라 전해온다’라고 하였는데, 석악산은 주의 북쪽 6리에 천봉산은 주의 북쪽 7리에 위치하고 있어 석악산, 즉 자산 기슭에 산성이 있다는 내용이다.
◦朝鮮寰輿勝覽(1910~22년)
「在郡北石岳山」
‘군의 북쪽 석악산에 있다’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1942년)
「紫山タ城ト稱ス石片ノミ殘存, 石築ニシテ周葯七, 八十間高サ二尺幅四尺アリ』
‘자산산성이라 칭하는 석편이 잔존하고 있다. 석축 둘레는 약 70~80간(127~145m), 높이 2척(0.6m), 폭 4척(1.2m)이다.
Ⅴ. 築城 時期 및 形態
성의 축성 시기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이나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 지지 않아 구체적 시기를 추정할 수는 없으나 商山誌 古蹟條, 古都, 沙伐國古城에서는 자산산성. 이부곡산성. 병풍산성을 사벌국 고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사벌국의 성립 추정시기인 삼한(마한 BC 58년)시대에서 패망시기인 248년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산지 산천조에는 천봉산을 상주의 진산(鎭山)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진산이 된 후 관리되어 오다가 진관제(鎭管制)가 폐지될 때인 1555년 을묘왜변 이후 되면서 버려진 산성으로 보인다. 우복 선생이 성산산성 수곡문에서 성산산성이 천험 요새로서 성의 수리를 한 것을 보면 이 때 자산산성의 기능은 사라졌다고 할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삼국시대로 연대 추정을 하였으나 이러한 추정하였으나 고대 사벌국 지표조사 때에 채집된 반월형 석도와 복용동 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물 등을 볼 때 이미 상주시내와 산성 내에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아 사벌면 금흔리 소재 이부곡 토성과 함께 원삼국시대로 볼 수 있는 산성이다. 따라서 필자는 자산산성은 읍치에 가장 근접한 산성으로서 원삼국시대의 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전체 형태로 볼 때 포곡식 산성으로서 축성 형태는 축조 재료별 분류는 토석 혼축 방식이고, 축조 방식에 의한 분류는 외벽만 돌로 구축하고 그 내부에는 흙이나 잡석을 쌓아 올린 석성의 편축방식 형식이다.
Ⅵ. 主要 施設
산성은 토석혼축의 성벽과 토성벽, 자연 단애를 이용하여 축조된 산성이며, 문지의 협축 성벽이나 건물지의 주요 시설은 남아 있지 않다. 성의 주요 제원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성벽(城壁)의 개황(槪況)
전체 성벽은 북에서 서쪽방향으로 292.5m 고지에서 290.1, 294.5, 254.1, 215.1, 216.8, 213.8, 223.8, 174.8, 115.0m 고지에서 292.5m 고지로 이어지는 약 3,570m로서 성내부면적은 약 440,000㎡이다.
나. 토석 혼축 성벽(土石混築城壁)
동측 이동 통신탑 포장 진입로 및 산악 자건거 주행코스(종전) 옆과 서측의 약수터 상부에 무너진 석성의 잔해물이 보인다.
외벽만 돌로 구축하고 그 내부에는 흙이나 잡석을 쌓아 올린 편축방식 형식의 석축 약 2,100m(동측 성벽은 740m , 서측 성벽은 700m, 서북 측 성벽 360m, 채석장 옆 220m, 정상부분 80m) 정도가 확인된다.
석성을 축조한 방향이 동쪽, 남쪽, 서쪽으로 축성하고 북쪽은 자연 단애를 이용하여 방어하도록 축성된 산성이다.
다. 토성벽(土城壁)
정상부근과 북쪽, 서쪽 223.8m고지의 북측 및 북서측은 회곽로와 토성의 구분이 불분명하게 서측 최하단인 135.6m 고지까지 연결되어 일부의 형태만 유지되고 있다.
라. 자연단애(自然斷崖)
정상부근과 북쪽은 115m 고지 주변에만 토석혼축의 흔적이 있고 292.5m 고지까지는 자연 단애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마. 문지(門址)
성문으로 추정되는 곳은 해발 228.1m와 해발 216m 고지 사이 산태골의 동문지, 해발 216m와 해발 213.8m 고지 사이 외서골의 남문지, 해발 223m와 해발 292.5m 고지 사이 연원동 방향의 서문지 3개소이다. 이 문지와 주변에는 성문을 축조하였을 만한 협축 시설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추정은 지형 상으로 판단하였을 때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을 뿐이다.
산성현황도
바. 건물지(建物址)
건물지로 보이는 곳은 3개소이다. 해발 228.1m와 동문지 사이의 평탄지에는 초석이 있으며, 해발 204.1m와 해발 215.1m 고지 사이 운동시설이 있는 곳과 해발 216m와 해발 223m 고지 사이에는 와편이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사. 우물지(-址)
다른 산성에 비해 이곳은 수량이 풍부한편이다. 해발 216m와 해발 223m 고지 사이에는 출수량이 많아 습지가 조성되어 있고, 근대까지 민가가 있어 우물이 남아 있으며, 서북쪽에는 소류지가 지금도 농업 용수로 이용되고 있으며, 외서골 습지 내에도 소류지가 있다.
기타 구간별 성벽은 ⓐ, ⓑ, ⓒ, ⓓ, ⓔ 구간별로 나누어 별도 상술하고 구간별의 성벽 축조 방식 및 채집 유물 등에 대하여는 별도 기술하겠다.
Ⅶ. 城壁 區間別 詳細
가. ⓐ 구간 성벽
ⓐ 구간구간성벽 배치도
성에서 제일 높은 위치 294.5m 고지(조망바위)가 있는 곳이다. 조망바위는 동쪽 사벌 평야와 시내가 조망되는 곳으로 망대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다. 292.5m 고지(묘봉 쉼터)는 안너추리(만산동)에서 연원동으로 넘어가는 안양골을 관측하는 망대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292.5m 고지의 동남쪽으로 민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민묘 아래 주변으로 토석 혼축의 흔적이 약 80m가 있다. 292.5m 고지와 290.1m 고지, 294.5m까지는 동남쪽의 자연단애와 외측으로 삭토를 한 것으로 보이며, 석축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294.5m 고지와 254.1m 고지까지는 경사가 심한 부분으로서 자연단애를 이용하였고, 254.1m 고지에서 채석장까지는 등산로 동남쪽으로 석축 2~3단의 축성 흔적이 있다. 이 석축이 채석장 옆에서는 등산로와 마주치게 되는데 석축의 연결이 단절되고 있어 개간 등으로 일부가 훼손된 것 같다.
가. ⓑ 구간 성벽
추정 지도리석 ⓑ 구간 성벽배치도
채석지에서 건물지 까지는 개간으로 인하여 흔적이 없어졌으며, 건물지 아래에는 북쪽, 동쪽, 남쪽으로 둥글게 3~4단의 석축과 동쪽에는 지름이 적은 산석을 이용하여 높이 2m 이상까지 석축흔적이 나타난다. 운동기구가 있는 건물지 까지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민묘 아래 축대는 성벽의 성돌을 이용한 것 같다. 민묘 축대 시설과 연결되는 곳은 운동기구가 설치된 동쪽이 되는데 이곳이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동통신의 통신시설 진입로 조성으로 폭 약 6m가 절단된 후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곳에 성벽 단면이 노출되어 있는데 높이 약 1.5m 정도가 토석 혼축한 단면이 나타나고 포장도로 아래쪽으로 연결되어 215.1m 고지로 연결된다. 215.1m 고지에도 포장도로로 인하여 성벽이 절단되어 있다, 단면 형상은 동문지와 같으나 석재가 동문지 보다는 다소 큰 재료를 사용하였다. 여기에도 민묘가 조성되어 있고 민묘 축대 아래로 연결되어 216m 고지로 연결된다. 216m 고지에서는 임란북천전적지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마주치게 되고 성벽의 석축 성돌이 일부 높이 약 1.5m가 노출되어 있다. 216m고지에서 174m고지인 수문지 옆까지는 다소 큰 성돌을 이용하여 1~2단 쌓여 있다. 174m고지에서는 216m 고지에서 사용한 크기의 적은 성돌을 이용하여 2m 정도 높이로 축조 하였다. 174m고지에도 민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민묘 아래를 지나 북서쪽으로 연결되어 215.1m 고지에서부터 조성된 계곡과 만나게 된다. 이 계곡과 농지 사이에는 계곡이 있고 계곡부에 수문지로 보이는 큰 돌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놓여 있는데 수문석으로 이용한 것 같다. 여기는 외서로 넘어가는 외서골인데 계곡부를 개간을 하여 농지가 조성된 부분이다. 축성 흔적은 발견할 수 없으나 지형으로 보아 농지의 단애부가 성벽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남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성문 지도리 초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있다. 외서골 우측 습지가 된 농지는 자연 암벽으로서 암벽을 성벽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이고 우측은 휴경지인데 석축이 높이 2~3m로 조성되어 있다. 개간을 하였으나 성돌을 그대로 이용한 것 같다.
다. ⓒ 구간 성벽
외서골에서 213.8m 고지로 연결되는 성벽도 대부분 민묘가 성벽 상부에 조성되어 있다. 동쪽 성벽의 성돌보다는 큰 성돌을 이용하였고, 높이도 4~5단으로 0.5m 이상 쌓았다. 213.8m고지, 223.8m 고지 남서측은 자연단애부로서 석축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223.8m고지에서 174.8m고지까지는 비교적 적은 성돌을 이용하여 2~3단 쌓았다.
ⓒ 구간 성벽배치도
라. ⓓ 구간 성벽
ⓓ 구간 성벽배치도
174.9m고지에서 115m고지까지는 높이 약 2m로 토석혼축하여 쌓았고 성벽 아래쪽으로 성돌이 많이 흘러 내려져 있다. 174.9m고지는 남서쪽을 방어하는 망대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위치이다. 115m고지 아래에는 계곡인데 단애부로서 북쪽을 관측하기 용이한 곳이다. 석축의 시설 흔적은 여기에서 끝나는 지점이다. 115m 고지 아래에는 농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지금도 논으로 경작을 하고 있다. 논의 조성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단의 높이가 높은 곳은 두 곳이다 아래쪽은 115m고지와 평행하게 있고 위쪽은 성 안쪽에 있다. 북쪽 성벽인 115m고지 아래를 살펴보면 축대가 여러 개 나타나는데 모두 성안 쪽으로 쌓여져 있다. 이 축대시설을 성벽시설로 본다면 연결되는 단은 성 안쪽 단이 성벽으로 추정된다. 단의 높이는 약 5m이다.
ⓔ 구간 성벽배치도
마. ⓔ 구간 성벽
115m고지 아래쪽에는 축대시설이 연결되어 쌓았고, 정상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주변에 나타나지 않는 산석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이 산석은 성돌이 쌓여져 있는 것을 헐고 민묘를 조성한 것 같다. 115m고지 남동쪽으로는 민가가 조성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축성의 흔적은 없으나 산의 능선이 자연단애부로서 성벽의 역할을 한 것 같다. 이 능선은 묘봉인 292.5m고지와 연결되어 있다.
Ⅷ. 城 內部 施設
가. 성문지
남문지 전경
성문지로 추정되는 곳은 3곳이 있는데 남쪽에서 진입하는 남문지는 자산교에서 연원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옆에는 휴경지가 있고 민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부근이 성문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채석장
동쪽에서 진입하는 동문지는 이동 통신탑의 포장된 진입도로 부분이 문지로 보이나 포장 도로 개설로 절단된 상태이다.
서북쪽 서문지는 농경지로 경작되고 있고, 북측 115m고지 아래가 문지로 보이는 곳이다.
성문지로 추정되는 곳 모두가 좌우의 치 지형을 유지하고 있고, 화살의 사정거리 안에 있으며, 적의 침입 발견이 용이하고, 성문시설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남문 이외는 성문은 축조하지 않은 것 같다.
다. 채석장
이동 통신탑에서 정상 쪽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바위 군이 나오는데 바위를 절단, 채취한 흔적이 있다.
라. 주거지
전체 3개소로서 남문지 옆 휴경지를 지나면 평지가 나오는데 이곳이 주거지로 보이는 곳으로서 주변에서 와편과 도자기 파편이 다수 보이며, 휴경지와 주거지가 만나는 지점에 산석으로 주위를 돌려 만든 옹달샘이 1개 있다
마. 건물지
채석장 아래와 석성 성벽 상부 사이에 와편이 다수 발견되고 있고, 일정 간격으로 있는 산석이 있는데 건물의 초석으로 추정된다. 초석의 간격 실측치는 다음과 같다.
건물지 초석 배치도
바. 고분군
대형 고분이 216.8m고지 아래 2기, 석재 채집지의 등산로 옆에 2기가 동쪽을 향하여 있으나 채석장 옆 1기는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사. 망대
서측 223.8m 고지 및 동측 215.1m 고지, 정상 아래인 292.5m 고지는 고지 주변을 둘러 성벽이 쌓여 있고, 시내 및 주요 통행로가 조망되고 있어 망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아. 수문지
외서골 좌측 216.8m고지 아래 부분인 농지와 산지가 접하는 계곡에는 좌측 능선에서 석축으로 쌓아서 아래로 내려와 개간된 농지의 계곡부와 마주치는데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있으며,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비교적 큰 규모의 돌이 산재되어 있어 수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 우물지
외서골의 정상부 경작지 아래 감나무 밑에는 석축으로 둘러쌓은 옹달샘이 있어 얼마 전까지 사용한 것 같다. 216.8m고지 아래에도 자연수가 솟아나고 있는 곳이 있는데 토출수 주변에는 적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현재는 매몰된 상태이나 자연수가 솟아나서 아래 수문지로 흐르고 있다. 이 두 곳이 우물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차. 명문 와편
고대 사벌국 관련 문화유적지표조사(상주문화연구소)에서는 “官”, “八”, “可上”등 위치나 사용처는 나타내는 와편이 발견됨에 따라 통일신라시대부터 기와를 사용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문지 입구 성벽이 훼손된 부분에서 “可中”형, “未”형의 문자형이 있는 와편과 그 위쪽 체육시설이 설치된 곳인 건물지②에서는 “耳”자형 와편이 발견되었다.
또한 외서골 위쪽 건물지 옆에서는 네모의 인장형 문양이 있는 와편과 “官“자형과 이형의 와편이 발견되었다.
명문 와편들
카. 토기편
토기의 파수 부분이 216.8m 고지 서쪽 등산로에서 발견되었는데 뿔의 형태로서 원시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자산산성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발견된 파수로 보아 만산동유물산포지와 함께 삼국 이전인 삼한시대까지 산성의 축조 연대를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파수
파. 화살촉
해발 228.1m와 해발 216m 고지 사이 산태골의 동문지 입구 계곡부에서 채집된 철제 화살촉이다. 전체적으로 부식이 심하며, 잔존 길이 7.6㎝, 폭 1.8㎝로서 화살 날개 부분 길이는 4.4㎝이다. [그림 22]는 타 지역 출토 화살촉과 비교한 그림이다.
발견된 화살촉과 비교
채집 화살촉
Ⅸ. 說話 등
가. 남근석
해발 254.1m 고지 및 채석장 아래쪽에는 남근석이 위치하고 있다. 이 남근석은 만산동과 낙상동에서는 불 바위로 불리고 있으며, 만산동에는 남근석이 있는데 낙상동에는 여근상징 바위가 있었다. 남근석은 낙상동을 향해 있고 앞에는 바위로 가려져 낙상동과 직접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이 장애물을 벗겨 내면 낙상동 마을의 아낙네가 바람이 나서 가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한때는 낙상동 마을 사람들이 낙상동의 불 바위를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만산동의 남근석도 인위적으로 훼손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남근석 끝 부분이 잘려 나가고 잘려진 부분을 인위적으로 치석한 흔적이 있다. 이 부분에서 잘려 나간 것으로 보이는 남근석이 남근석에서 동북쪽 약 30m 계곡에 있다. 남근석의 끝 부분 치수는 너비 46㎝ 높이 28㎝의 장방형으로서 둘레는 132㎝이다. 계곡에 있는 바위도 이와 같은 치수에 길이가 약 70㎝이다.
남근석
나. 성수바위
해발 216.8m 고지 남쪽 아래에 큰 바위가 갈라져 원래의 바위는 위쪽에 떨어져 나간 바위는 약 5m 아래쪽에 있고. 갈라진 바위 사이로 오솔길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원래의 바위인 216.8m 고지 쪽 바위 아래에는 홈이 파여져 있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 물이 솟아 나왔으나 누군가 바위에 부정한 행위를 하여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주민이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한가지의 소원은 들어 준다는 영험이 있는 바위이고, 성스러운 물이 솟아나와 성수바위라고 한다고 한다.
다. 매바위
매바위
남근석에서 정상 방향으로 자산산성 성벽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등산로 옆에 위치한다. 이 바위는 천봉산 서북쪽에서 동쪽인 죽전동 방향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인데 꼭 매가 먹이를 사냥하기 위하여 노려보고 있는 형상이다. 이 ‘매바위’ 꼬리부분에는 등산로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꼬리가 잘려나가는 형상이 되어 등산로 우회가 필요한 곳이다. 천봉산의 산 이름은 천년에 한 번씩 봉황새가 나타난다고 하여 천봉산(千鳳山)이라고 부른다는 설과 정상에서 주변을 보면 천개의 산봉우리가 보여 천봉산(千峰山)으로 부른다는 설이 있는데 이 산 아래에는 동쪽으로 마주보는 곳에는 죽전(竹田)이라는 마을이 있고, 봉황새는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잠을 자지 않는다는 전설의 새이다. 이런 이유에서 인지 죽전은 봉황새가 대나무 열매를 따먹을 수 있도록 대나무 밭 즉 죽전(竹田)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 ‘매바위’가 죽전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봉황새 형상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 바위 때문에 생긴 산 이름이 아닌가 한다.
라. 천봉산 반송
자산(紫山)에서 천봉산(天鳳山)으로 올라가는 능선일대의 수림 분포는 햇볕이 잘 드는 동쪽은 활엽수 계통인 참나무 수림이 형성되었고, 서쪽은 소나무 수림이 형성되어 있다. 활엽수와 침엽수의 수림 경계인 능선 주변에는 상주 다른 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반송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2개, 3개, 4개의 줄기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형상은 소나무뿐 만 아니라 참나무까지 2~3개의 줄기로 형성되어 자라고 있다. 특히 3줄기의 소나무가 자라면서 위쪽 가지 2개가 서로 붙어 연리지를 만들고 있는 등 특이한 성장 환경을 구성하고 있어 등산객의 눈길이 머무는 곳이다.
사송 일송
이송 삼송
마. 영암각
영암각 전경
영암각은 천봉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해발 435m 아래 장고개 길옆에 위치한 큰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이름으로서 영암각에는 지금도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상주에 목사가 부임하여 북쪽으로 가면 해를 입고 사고가 잦았었다. 어느 날 목사로 부임하여 북쪽을 순시를 할 계획을 하다가 초저녁에 잠시 꿈을 꾸었는데 큰 바위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면 북쪽의 악령도 없애고 고을이 평안하도록 돕는다고 하면서 사라졌다. 목사는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잠을 청하였는데 조금 전의 바위가 또 나타나서 제발 비바람이라도 피할 수 있도록 애원을 하고 사라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 목사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꿈에서 본 바위를 찾도록 하였는데 천봉산에서 그 꿈속의 바위를 찾게 되었다. 목사는 상주의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바위를 둘러싼 영암각을 지었는데 그날 밤에도 바위가 또 나타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졌는데 그 이후로 상주에는 나쁜 일이 나타나지 않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사람들은 모두 이 바위의 음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영암각은 정면과 측면 1칸은 내부를 볼 수 있도록 홍살문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면은 회벽으로 막혀 있는 특수한 구조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익공 팔작집으로 바위 면에는 불망비 2개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큰 바위 전체를 통째로 집을 지어 보호하고 신앙의 대상이 되는 곳은 천봉사 영암각이 유일한 사례라 하겠다.
바. 성황사
성황사 전경
영암각 뒤에는 성황사가 있다. 성황사는 「성황신은 경내 백신의 주이고, 태수는 경내 백성의 주이니 양자는 서로 같은 지위에 있다. 그런데 지금 묘가 없어 어찌 신이 편안 할 수 있겠는가. 큰 결전이라 하겠다. 일찍이 중국인이 성황묘라고 크게 써서 현판을 걸어 놓는 이유는 하서방인(下庶邦人)들이 공경하고 묘의 면모를 존엄하게 하여 신령이 보장되게 하여 이로써 만민이 평안하고 풍요하며 또 신의 공으로 우순풍조하여 해마다 등풍하고 적선에 응보하여 복이 오고 화가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창석 이준선생이 쓴 상산지에서 성황사를 설치하는 목적이라고 하였다. 성황사의 제사는 국가 제사로 치러졌으나 1908년 그 명맥이 끊어지고 그 이후로는 지역의 향리 주도로 제사가 이어졌다. 성황사의 제사는 상산박씨를 중심으로 양로당에서 맡아 왔으나 지금은 마을 노인회에서 이어받아 성황사와 영암각의 제사 등 관리를 맡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납도리 팔작집으로서 서향을 하고 있다. 건물 안에는 남매신상 또는 ‘부부신상’이라고 하는 신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2009년 11월 22일 도난된 후 지금은 새로운 신상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 성황사 위에는 ‘굿제당’이라고 하는 산신당이 있는데 50년 전까지는 전국의 유명한 무당이 모여서 굿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도난전의 신상 모습
옛 기록을 보면 상산지에서 성황사는 천봉산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천봉산은 주의 북쪽 7리로서 성황사는 주의 북쪽 7리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또한 상산지 무진본에는 만산동 거암 위에 있고 부노들이 계를 결성하여 매년 1회 행제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주목 읍지에서는 주의 남쪽 7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상산지 청대본에는 단(壇)만 있다고 하였다. 기록상의 위치와 형태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성황사 중수기와 상량문 중심으로 위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1990년 10월 성황사를 중수하면서 중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중수 상량문 내용 중에서 「이창석이 상산지를 쓸 때 그 묘제를 기술함이 미비하였으므로 이는 심히 한탄스럽도다.」라 하고 있다 이는 이창석이 상산지를 쓰면서 성황사를 「城隍祠, 在天鳳山有壇無廟」라고 하여 성황사가 단만 있고 묘가 없는 것으로 기록된 것을 심히 한탄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중수기를 참고한 성황사의 중수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황사는 옛날 천봉산 꼭대기에 있었다.
상주목사 柏谷 정곤수(1577~1578)가 사직단 옆에 재실을 세우고 신판을 봉안하고 매년 춘추의 정일에 문묘에 행제한 후에 바로 사직단, 성황단, 여단에 차례로 제사지냈다.
성황사는 옛날 군의 북쪽 신계리 동쪽 모서리에 있었는데 중년에 천봉산 동쪽 기슭으로 옮겨서 세웠다.
康熙 53년 甲午(1714. 숙종 40) 3월 1일 중수
乾隆 2년 丁巳(1737. 영조 13) 5월 19일 이건<負癸丁向>
乾隆 53년 戊申(1788, 정조12) 3월 10일 巳時 上梁<壬坐丙向><홍원섭 목사>
咸豊 5년 乙卯(1855, 철종6) 8월 10일 申時 上梁<홍종무 목사>
광무 4년 庚子(1900, 대한제국) 5월 박만식 중수
昭和 10년(1935) 10월
1990년 10월 중수
위의 중수기와 상량문에서 성황사의 위치 이동을 추정하여 보면 1577~1578년에는 성황단이 있었으며, 1788년 중수기에서는 성황사는 옛날에 천봉산 꼭대기에 있었고, 1714년 중수 하였으나 퇴폐되어 1737년 산 아래로 옮겨 세웠는데 負癸丁向으로서 남남서 방향으로 이건 되었다. 또한 1788년 중수하였는데 壬坐丙向로서 남남동의 방향으로 중수하였다.
1900년 중수기에는 옛날에 천봉산 북쪽 산기슭 약간 동쪽에 있었는데 1788년에 이곳으로 옮겨 건립했다고 한다.
1935년 중수기에는 옛날 군의 북쪽 신계리 동쪽 모서리에 있었는데 천봉산 동쪽 기슭으로 옮겨서 세웠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황사는 천봉산 꼭대기에 있는 것을 1714년 중수한 뒤 1737년 천봉산 동쪽 기슭으로 이건하였는데 남남서 방향으로 이건 되었다. 그 이후 1788년 중수를 하였는데 남남동 방향으로 중수 하였다. 1737년 이건한 남남서의 방향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중수된 것으로 보아 이때에는 현재의 위치인 만산동 454번지에 개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황사 건물 전면에 「城隍祠 戊申年 五月」의 편액을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성황사는 坤向에 가까운 서향으로 건립되어 있다. 1788년 개축한 丙向과는 다른 방향으로 또 한 번의 개축이 이루어 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방향으로 건립된 것이 1855년 지금의 방향으로 건립되어 1900년 연목과 번와 보수를 하고, 1935년 보수, 1990년 보수를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1935년 중수기에서 영암각의 보호각과 집터 그리고 논과 밭 880여 평을 양로당에 위촉해서 매년 4월 8일 등(燈)을 밝힌다고 한다.
지금도 만산동 454번지 종교용지 1,461㎡, 453번지 답 1,468㎡가 성황사 관리용 토지로 이용되고 있고, 매년 4월 8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Ⅹ. 探査 日誌
산성의 탐사는 구역이 넓고 산지의 천험요새에 위치하기 때문에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탐사로서는 성의 제원과 형태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특성이 있다. 이 산성도 시내에 접해 있지만 상주 읍치를 방어하고 상주의 백성을 지킨 요새이기 때문에 조사가 만만하지는 않았다. 성을 조사하면서 채집되고 채집된 유물의 발견위치와 일자 등을 남길 필요성이 있어 탐사할 때 마다 일지를 작성하였다. 실제는 기록보다 몇 배의 탐사 횟수이지만 유물 및 주요시설 발견이 있을 때에 한하여 기록하였으며, 2004년부터 탐사한 일자별 내역을 다음과 같다.
제01차 : 2004. 6. 6(천봉산 정상과 산성 경계확인)
제02차 : 2004. 7.11(성벽 석재 채집 위치 확인)
제03차 : 2004. 9. 5(성벽 위치 및 건물지 확인)
제04차 : 2004. 9.19(동측 토석혼합성벽 위치 확인)
제05차 : 2004. 9.25(서측 토석혼합성벽 위치 확인)
제06차 : 2004.10.17(명문 와편 발견)
제07차 : 2004.10.23(동측 건물지 하부 탐사)
제08차 : 2004.11. 7(수문지 발견)
제09차 : 2004.11.13(서측135.6m 고지 토성벽 확인)
제10차 : 2004.11.21(북측292.5m 고지 성벽 확인)
제11차 : 2004.12.19(파수 발견)
제12차 : 2005. 1. 9(성벽 시설물 사진 재촬영)
제13차 : 2005. 2.10(명문 와편 발견)
제14차 : 2005. 3.12(명문 와편 발견)
제15차 : 2005. 5.28(성황사 및 성석 탐사)
제16차 : 2005. 6.14(명문 와편 발견)
제17차 : 2006. 2. 5(서측 및 북측 성벽 발견)
제18차 : 2006. 6. 4(서북측 성벽 석축 발견)
제19차 : 2006. 6.18(명문 와편 발견 : 서측 건물지 아래쪽)
제20차 : 2006. 9.23(파수, 토기편 발견 : 서측 건물지 남쪽)
제21차 : 2006.10.14(파수 발견 : 서측 건물지 남쪽)
제22차 : 2012. 8. 4(철제 화살촉 발견 : 동문지 입구)
제23차 : 2015. 3.28(명문 와편 ‘耳’ 발견 : 건물지②)
Ⅺ. 맺음말
산성의 제원과 성터내외에 수습되는 유물, 자연 형상, 민속 등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물리적인 조사가 아니고 육안에 의한 조사 방법으로서 조사의 한계성으로 인해 초심의 조사 기대치에 도달하는 연구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필자는 기존의 연구와 다르게 성 내부에서 적으로부터 방어에 최 적합한 위치에서의 성벽으로 사용되었을 지형을 가정해서 성의 제원을 구성해 보았으며, 많은 유물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번의 탐사 활동을 거쳐 기존의 연구를 보완하고자 노력하였다.
산성의 규모는 약 3,570m로서 성 내부 면적은 약 440,000㎡이다. 성벽은 편축방식 형식의 석축 약 2,100m(동측 성벽 740m , 서측 성벽 700m, 서북 측 성벽 360m, 채석장 옆 220m, 정상부분 80m)이며, 나머지 1,470m는 자연 단애 지형을 이용한 것으로 보았다.
축성 시기는 일부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유물 등으로 볼 때 이 성터에서는 그 때부터 주거생활을 하였으며, 상주 지역 최초 고대국가인 사벌국 이 있을 때인 원삼국시대부터 이곳이 상주 치소 방어를 위한 성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즉 이 성은 상주 읍치에서 가장 근접하는 산성으로서 최초 상주의 역사가 시작된 원삼국시대 사벌국의 방어성이 될 수도 있다.
이 성은 상주의 역사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조사되어야 할 산성이나 아직까지 물리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성벽과 시설은 파괴되어가고 있는 실정으로서 상주의 역사가 파괴되어가는 안타까움을 품고 있는 성이다.
지금도 MTB 도로와 임도개설, 산지 개간 등으로 인해 2004년 처음 조사 때보다 지금의 지형은 많은 변화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산성이 존치될지 기대할 수 없다.
필자가 조사한 방식은 발굴 등 물리적인 조사가 아니고 육안에 의한 조사이기 때문에 향후 물리적인 발굴조사 등 연구를 통해 성의 제원과 축성 시기 등은 항상 변경될 수 있으며, 상주 역사의 근원을 밝힐 수 있는 주요한 산성으로서 조속한 시일 내 전문적 조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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