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및 연구 자료/상주(上州)9호

상주학. 상주문화제9호. 상주청리 유적을 찾아

빛마당 2016. 2. 12. 09:21

상주 청리 유적을 찾아

上州文化硏究會

李 義 光

< 目 次 >

Ⅰ. 머리말

Ⅲ. 맺음말

Ⅱ . 청리 대표 유적 소개


Ⅰ. 머리말

상주시 청리면은 상주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 가운데에 병성천이 북쪽으로 흐르며, 그 양편에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면 소재지인 청하리를 비롯하여 월로리, 수상리, 율리 10개 넘는 행정리를 포함한 지역이다. 청리의 지명은 고려시대 청리현(靑里縣)의 이름에서 유래 하였다고 한다. 상주시 전체적으로 그리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곳은 아니나,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청리 유적을 비롯하여, 신잠 목사가 세운 수선서당, 월간 이전, 창석 이준 선생과 우복 정경세 선생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자 조선 최초 사설의료원인 존애원이 자리 잡은 고장이기도 하다. 청리 유적을 찾아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보자.


Ⅱ. 청리 대표 유적 소개


1. 청리의 땅이름 유래

'청리' 지명은 고려시대 청리현(靑里縣)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지리지』에 "청효현(靑驍縣)은 본래 음리화현(音里火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청리현(靑理縣)이다."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상주)와 『신증동국여지승람』(상주)에도 같은 내용의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청구도』에는 고청리(古靑利)라고 하여 다른 한자 표기도 확인된다.

본래 조선시대 상주목 청남면(靑南面)과 청동면(靑東面) 지역으로, '청남'과 '청동' 지명은 청리현의 남쪽과 동쪽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호구총수』(상주)와 『여지도서』(상주)에 청동면·청남면이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 읍치 아래쪽에 청남면과 청동면이, 『청구도』에는 청남면·동청면(東靑面)·청니면(靑泥面) 등이 표기되어 있다. 1914년 이들 두 면을 중심으로 외남면의 일부 동리를 합쳐 청리면으로 하여 현재의 12개 동리를 관할하게 하였다. 1986년 상주군에 속하였고, 1995년 상주시에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대표 유적 소개


1) 상주 청리 고분군(靑里 古墳群)

상주시 청리면 마공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마공리 공단을 조성하기 위해 1996년 8월 16일부터 1997년 1차, 1998년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1차 조사 구역은 마공리 산 3-1번지 일대에 위치하며, 상주 청리지방공단 조성 사업에 앞서, 다섯 군대로 나누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수혈유구 1기, 삼국시대에서 근대까지의 고분 706기, 기와 가마 5기, 건물지 등 총 718기가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은 토기류, 자기류, 철기류, 청동류, 기와 등 총 2,980점이 수습되었다. 각 지구별 확인된 고분을 살펴보면,

A지구 : 삼국시대 횡혈식․횡구식석실분 71기, 삼국~고려시대 석곽묘 56기

B지구 : 삼국시대 석실분 2기

C지구 : 삼국시대 토광묘 62기, 석곽묘 16기, 옹관묘 11기

D지구 : 삼국시대 석곽묘 12기, 옹관묘 7기

E지구 : 삼국시대 석곽묘 2기

2차 조사는 공단부지 내에서 조사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H, I지구로 나눠서 실시되었다. 결과, 확인된 유구는 청동기시대 지석묘 16기, 삼국시대에서 근대까지의 고분 139기, 삼국시대 주거지 1개소 등 총 156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토기류 184점, 자기류 44점, 철기류 350점, 청동류 68점, 기와 44점, 기타 112점 등 총 802점이 수습되었다.

조사가 완료된 지역은 현재, 사용 중이며, 일부 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산지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사용하고 있다. 발굴된 유물은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부 유물은 대여하여 전시에 활용하거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2) 수선서당(修善書堂)


수선서당과 신잠 유애비

상주의 남쪽 30리 지점인 수선산 아래의 청리동이며, 가정 임인년(嘉靖 壬寅年) (중종 37. 1542)에 영천자 신잠이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이곳에 유람하여 경관이 좋음에 기뻐하며, 지역의 부노(父老)들과 상의하여 이곳에 서당을 건립하고 손수 수선서당이라 큰 글자로 써서 현판을 걸었다. 뒤에 계곡의 서편으로 이건하고, 임진왜란에 소실되어 계묘년(선조36. 1603)에 철암 아래에 중건하였으며, 창석 이준(蒼石 李埈)이 기문을 지었다.

?在州南三十里修善山下靑里洞嘉靖壬寅申靈川潛來遊喜其山回水隨謀父老營建書堂且手書修善書院四大字揭額後移建於溪西壬辰亂見燒癸卯創於鐵巖下李埈有記?라고, 하였다.

이 서당은 월간 이전선생이 이곳에서 심혈을 기울여 강학하던 곳으로, 옥성서원이 산사태로 매몰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서원을 복원할 때 까지 신주를 이곳에 봉안하고 향사를 치루기도 하였으며, 서애 류성룡의 문집을 발간할 때 이곳 수선서당에서 문집의 교정을 하였다. 1987년, 청상저수지의 건설로 서당이 수몰되자 저수지 아래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 서당이 건립된 이후 네 번이나 이건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담장 앞에는 후계 김범(后溪 金範)이 찬(撰)한 신잠목사(申潛牧使)의 유애비(遺愛碑)가 있으며, 원래의 비(碑)가 낡아서 글자의 판독이 어렵게 되자 새로 비를 모각하여 바로 옆에 옛 비석과 함께 세워놓았다.



수선서당록과 심원록

수선서당에서 보관하고 있던 서당록과 심원록, 임원록 등과 같은 유물은 현재, 상주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3) 존애원(存愛院)

▪ 소 재 지: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번지

▪ 소 유 자:상산 김씨 외 12문중

▪ 문화재 지정:도지정 기념물 제89호(1993. 2. 25)

▪ 수 량:1동(714m²)

▪ 시 대:조선시대(1602년)

존애원(存愛院)은 임진왜란 뒤에 질병의 퇴치를 상주의 백성들이 자치적으로 해결하고자 설립한 조선 최초의(현재까지) 사설(私設) 의료기관(醫療機關)이다. 선조 32년(1599)에 이 지역에 대표적인 두 개의 계(稧)를 합계하여 기해 낙사계로 합사한 13개 문중 24명이 존애당에 모여 향풍쇄신과 민풍순화, 그리고 특별히 자치적으로 의료행위를 하기로 하였다. 이에 김각(金覺)・송량(宋亮)・성람(成灠)・이전(李㙉)・이준(李埈)・강응철(姜應哲)・김광두(金光斗)・정경세(鄭經世) 등의 선비들이 창설하였다. 특히, 우복 정경세의 주도 아래 청죽(聽竹) 성람(成灠)을 주치의(主治醫)로 모셔와 선조 35년(1602)에 건물을 완성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료행위를 시작하게 돠었다. 즉, 약재 보관 창고와 환자 수용 시설인 당우(堂宇)를 차례로 짓고, 향약재는 슬려 등 유수(遊手)들을 모집하여 채집하거나 당재(唐材)는 미포(米布)로 무역하여 조달하였다. 약국으로서 운영 규약인 원규(院規)도 있었다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존애원이란 이름은 중국 송나라 학자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따 왔다. 이는, 1599년에 창설되고, 1602년에 완성되었다. 그후 1811년(순조 110에 중수된 뒤 1886년(고종 23)에 재 보수하였다. 존애원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이름에 대하여 우복 정경세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그곳에 제중원이라는 명칭을 문에 걸었으면 하는 의견이 담겨 있어 주목된다. 아래 내용은 그 편지 내용이다.

 존애당 기문은 나무에 새겨서 보내리다.

시 대 조선시대

소장자 상주박물관

지난번 편지는 잘 보았겠지요? 요즘 같은 한여름에 모두들 잘 있는지 그리운 마음 끝이 없습니다. 저는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어 다른 특별한 말은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존애당 기문은 편액으로 걸어야 하기에 성혼에게 정갈하게 써서 보내오게 하면 나무에 새겨서 보내리다. 그런데 일찍이 듣자하니 자네 생각은 당을 원으로 바꾸고 싶다고 하던데 참 좋은 생각이지만 내 생각은 존애당이라는 말은 당의 명칭으로 써서 강당에 걸고 濟生院이라는 명칭은 문에 걸었으면 하는데 어떤지 모르겠소.

7월 9일 정경세

존애원은 미증유의 전화(戰禍)를 입고 질병 앞에 무방비 상태였던 상주 백성들의 고통을 스스로 덜어 주기 위해 자생적으로 탄생한 사설의료국(私設醫療局)이었다. 의료시설이 아주 적었던 당시였지만, 존애원은 많은 약재와 시설을 갖추어 주민과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해 줌으로서 다른 지방에 비해서 큰 자랑거리였으나, 1782년(정조 6)에 윤모씨(尹某氏)의 무고(誣告)로 관련 문서와 책자 등이 사헌부로 압송되어 유실되고 말았다. 이로써 의료행위는 점차 상실되었다.

그 후 정조의 하문을 받고 초계문신 이동(李埬)이 1797년(정조 21)에 낙사계의 사실 조사를 아뢰니, 이에 정조대왕도 ‘대계(大稧)’란 칭송을 하면서 자신도 가입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존애원은 의료 활동 뿐 만 아니라 지역민의 화합을 위한 각종 행사를 치루기도 하였는데, 그 중 1607년부터 1894년까지 287년 동안 백수회(白首會)라는 경로(敬老)잔치를 개최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로, 이는 1906년까지 한광(韓匡)의 아들이 이곳에서 관례(冠禮)와 함께 ‘대계백수회’를 가진 바도 있다.

한 마디로, 존애원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상주 선비들의 박애정신(博愛精神)에서 탄생한 사설 의료국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향토 사랑을 실천한 낙사계원들의 모임의 역할도 한 곳이다.

당시 존애원 창설에 동참한 13개 문중은 진양 정씨(晋陽鄭氏)・흥양 이씨(興陽李氏)・여산 송씨(礪山宋氏)・영산 김씨(永山金氏)・월성 손씨(月城孫氏)・청주 한씨(淸州韓氏)・상산 김씨(商山金氏)・재령 강씨(載寧康氏)・단양 우씨(丹陽禹氏)・회산 김씨(檜山金氏)・무송 윤씨(茂松尹氏)・창녕 성씨(昌寧成氏)・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존애원의 창설로 상주에 있던 두 계(稧)가 기해낙사계로 합사(合社)하였으며, 13개 문중의 계원은 24명이었고, 합계(合稧)한 자리가 존애당(存愛堂)이었다.


4) 체화당(棣華堂)

▪ 소 재 지:상주시 청리면 가천리 650번지

▪ 소 유 자:이병훈(李柄塤)

▪ 문화재 지정: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78-1호(1986년 12월 11일)

부속 문화재:체화당 월간사당 대문채

▪ 수 량:3동(棟)

▪ 시 대:조선시대 중기(1632년)

체화당(棣華堂)은 이전(李㙉. 1558∼1648) 선생이 노년에 도(道)를 가르치던 곳이다. ‘체화(棣華)’란 ‘형제우애(兄弟友愛)’를 뜻하는 말로, 이전・이준(李埈. 1560∼1635) 두 형제가 우애롭게 지낸 것을 상징한 당호이며, 체화당은 월간의 셋째 아들 신규(身圭) 공이 1632년에 세웠다. 관향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載), 월간(月澗)은 호이다. 이채하 어른의 이야기에 따르면 체화당 유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체화당이란 그 자체가, ‘체’라는 하나의 짐승이 있고, 새, 날아다니는 새라. 고 다음에 ‘화’라는 그 또 날라다니는 샌데, 새가 두 마리가 전현 단독으로는 생활을 못해요. 전현 단독으로 생활을 못해. 고 ‘체’라는 새와 ‘화’라는 새가 서로 합쳐야만 하나의 새로서의 구실을 하는 거라요. 그래가주고 참 형제간에 아주 더 떨어져선 못 산다는 그런 뜻에서 ‘체화당’이라는 그 ‘당호’가 그래 된 거라요. 그런데 그기 내 다 잊어먹었는데, 그게 어느 저 중국 고서에 나온 얘긴데 그거 내 다 잊어버었네요. -이채하

체와 화라는 새는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서로 합해야만 새로서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이가 들어 종가 옆에 별채를 지어 함께 의지하여 살고자 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1632년에 창건한 앞면 4칸과 옆면 2칸 규모로 조선 중기의 건축물 옛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이고, 양측에 각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있다. 건물의 대청 뒷벽에는 1941년에 작성된 체화당중건기(棣華堂重建記)와 묘안이건상량문(廟岸移建上樑文)이 걸려 있다.

체화당의 뒤에는 월간(月澗) 선생의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원형으로 다듬은 주초를 놓아 원기둥을 세웠다. 주두와 주두 아래쪽에 포개어진 촛가지는 두 개가 전면으로 돌출되었는데, 그 모양이 체화당의 주두의 부위와 흡사하다. 그리고 사당의 주두 위에 올려놓은 뒷 보의 머리 부분도 촛가지와 같은 형상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지붕은 겹처마로 양 측면의 박공면에 풍판(風板)을 달았는데 오랜 풍화로 인해 낡았다.

월간 선생은 상주 청리면 송학동에서 태어났으며, 서애(西厓) 선생의 문하생으로 사마시에 들어 현감이 되었고, 퇴계(退溪) 선생으로부터 전수한「주자절요(朱子節要)」를 받기도 하였다. 선생은 평생을 학문하고 형제애가 돈독하여 임란 중에는 아우를 구함으로써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 도 유형문화재 제217호>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세마 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임란 당시에는 의병으로 구국운동(救國運動)에 동참하였다. 인조반정 후 선생은 지례현감에 봉직하면서 민폐를 덜어주었고, 만년에는 향풍쇄신과 후진양성에 지극한 정성을 보였다.

부속 건물로 대문채는 체화당(棣華堂)의 앞쪽에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면 5칸 규모이며, 왼쪽부터 문간방・대문칸・광・방・부엌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칸은 앞면을 흙벽으로 막아 놓았고, 광은 앞면이 개방된 마루로 개조하였다.

대기를 이룰 아이 월간 이전

월간선생 연보에 16세 때 당대 석학이었던 초한(草澗) 권문해(權文海) 등이 개최한 문예 시험에 장원하니, 『이 아이는 단지 문장으로 만이 아니라 뒷날 반드시 대기(大器)를 이루리라』고 전한다.

그 형제분이 서울을 가시가주고, 지금 '남산'인가 어딘가 몰라, 여하튼 높은 곳인데,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는 그래 인제 백씨(白氏)께서,

“사람들이 많이도 산다.”

그 동생이 하신 말이,

“형님 저기 저키(저렇게) 사람이 많은데, 그 쓸 놈들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청중 웃음) 그 어른은 그래 말씀하시고, 월간께서는,

“사람이 많아야지. 그 중에서 쓸 놈도 있고, 못 쓸 놈도 있고.”

그래, 민주적인 그런 말을 하셨어. 사람 폭이, 폭이 좀 안 넓었겠느냐?

-이태하

5) 창석사당(蒼石祠堂)

▪ 소 재 지:상주시 청리면 가천리 650번지

▪ 소 유 자:이준희(李峻熙)

▪ 문화재 지정: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78-2호(1986년 12월 11일)

▪ 수 량:1동(棟)

▪ 시 대:조선시대(1656년 창건, 1717년 이건)


석사당은 당초 1656년(효종 7) 다른 곳에 창건된 것을 1717년(영조 47)에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 사당은 월간(月澗) 이전(李㙉)의 아우인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선생을 모신 불천위 사당이다. 선생의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이다. 서애 류성룡의 고제(高弟)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에 올랐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선생은 상산(商山)을 위해 한 일이 누구보다 월등하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선생과 사마시 동기생으로, 1617년 ?상산지(商山誌)?를 최초로 편찬하였고, 1606년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1599년에는 낙사계(洛社稧)의 합계를 주선하여 조선 최초로 사설의료원인 존애원(存愛院)을 창설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622. 5. 25∼5. 29일까지 4박 5일간 갑장산 아래 연악서원에서 상산 선비들의 공동시회를 주선하여 상산 최초의 공동시집인 ?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과 중국의 동파(東坡) 소식(蘇軾. 1036∼1101)이 호북성 황저우 적벽에서 1082년(임술) 7. 16∼7. 17일에 뱃놀이를 하고 지은 ?적벽부(赤壁賦)?를 연상하며, 상산 선비 30인이 90회갑이 지난 1622(임술). 7. 16∼7. 17일까지 낙동강에서 낙강범주시회를 열고 그 시를 모아놓은 ?임술범월록(일명, 낙강범월시)?을 남기는데 주도적으로 활약하였다.

선생은 또한 형을 모심이 지극하였으며, 임란시 창의하여 공을 이루었다.

창석 선생의 사당도 월간 선생의 사당과 구조가 같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중 좌측에서부터 문간방・대문칸・고방・방・부엌의 순으로 되어 있었으나, 대문칸은 전면 쪽을 토벽(土壁)으로 막고 고방(庫房)은 전면을 개방하여 마루로 개조하였다. 창석 선생 관련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월간 창석의 선견지명先見之明

아. 이야기를 갖다가 지금 내가 알기는 갖다가 갖다. 들은 이야기인데, 그 그 어른들이 그 퇴직을 해가주고 고향에 계실 때 상주 목사가 한 분이 인제 연회를 한다고 이 어른들 둘을 청했는 거라. 둘을 청했는데, 이 어른들이 종일 계셔도 음식을 안 자시어. 음식을 안 자시고, 그래 오는데 뒤에 인제 그 목사가 이상하니깐 사람을 시끼서(시켜서) 한 번 따라 가보라 그랬어. 뭐라고 하시는가 하고. 그래 그 어른들이 둘이 걸어오시면서 갖다가 쭉 거정 여 다 와가주고 그래 먼저 아우 되시는 창석이,

“형님! 오늘 어째 그 술을 한 잔도 안자시니까?”

그래 물으니깐,

“야야! 오늘 그 술이 갖다가 황주다.”

황주라 하는 기 그기 뭐라 하니깐,

“그기 묘를 쓰고 나니깐 묘터에다가 밀을 갈아가주고 그 밀을 가주고 누룩을 만든 술이다.”

라고 하더라. 그래면서 그 아우를 보시고,

“자네는 소고기가 그리 있는데 왜 안 먹었냐.”

하니깐.

“그 죽은 소고기입니다.”

(그 따라 갔던 사람이) 죽은 소고기라고. 그래서 인제 가서 인제 목사한테 고했거든. 그래 그 당시에 관청색을 잡아다가 종치니깐 맞더라. 그래서 그 어른들이 그만큼 ‘선견지명’이 있다 카는 그런 일화가 있어. 그래 그것도 인제 참 얘기를 갖다가 그래 하는 이가 있고.

-이태하

Ⅲ. 맺음말

청리면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다. 존애원의 설립목적과 배경만 봐도 그 당시 어려운 시대상황에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지역 선비들의 박애정신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런데 존애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의료기관 이라는 이름하에 초라한 건축물 앞에서 연중행사에만 치우치지 않았나 여겨진다.

 앞에서 열거한 청리면의 문화(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고 좀 더 나아가 요즘 문화 정체성이 쇠퇴되어 가는 이 시대에 상주문화의 역사를 재조명 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정신문화에 초점을 맞춰 계승 발전해 나아가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