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4권. 영남 3문장(嶺南三文章)의 곡구(谷口) 정상관(鄭象觀)

빛마당 2016. 3. 29. 22:53

영남 3문장(嶺南三文章)의 곡구(谷口) 정상관(鄭象觀)

권 태 을

 

 정상관(鄭象觀 ․ 1776~1820)의 자(字)는 숙옹(叔顒)이요, 호는 곡구(谷口)며, 관향은 진양(晋陽)이다.

7대조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며, 아버지는 입재(立齋) 종로(宗魯)요 어머니는 전주이씨 민현(民顯)의 따님이니, 곡구는 상주 우산(愚山)에서 태어났다. 뒤에, 당숙부 사비헌(四非軒) 성로(成魯)의 양자가 되었고 양어머니는 광릉이씨 이조판서 원정(元禎) 현손녀다.


○ 학문

곡구는 상주의 명문 우복가(愚伏家)의 후손으로 태어나 우산학맥(愚山學脈)의 정통맥을 이었다. 어려서는 아버지 입재(立齋)의 훈도로 ≪소학≫을 실천서로 익혔고 14·5세에는 이미 ≪예기≫와 4서 5경, ≪자치통감강목≫, 제자백가서 및 선현의 제 문집을 두루 읽어 통했으며, 16세에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다 읽고 통하니 당시 사람들이‘소우복(小愚伏)’이라 하였다.

곡구의 학문은 전적으로 생부인 입재로부터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입재의 학문·문학·도덕·사회관·인생관 등을 총망라하여 일생의 행적 중 200 일화(逸話)를 엮어 입재유사(立齋遺事)를 찬술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먼저, 정신 수양에 관한 아버지(立齋)의 말씀을,


 “일찍이 배우는 이(학자)를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사람에게는 정신(精神)있다. 그것을 쓰면 더욱 개발되고 쓰지 않으면 도리어 쇠퇴해 버린다. 여닫는 문지도리는 좀 먹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또한, 이 같아서 무릇 재기(才氣)를 지녔더라도 이 정신을 헛되이 놀려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유사·호천편)


 라고 기억하였다. 이는, 항상 올바른 데 정신을 집중하여 자신의 인격을 수양해 감이 중함을 일깨운 교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교훈은 곡구가 지나칠 정도로 재기(才氣)가 뛰어나고 호방한 기상의 성품을 타고 난 것에 대한 다스림의 훈계라고도 하겠다. 게다가, 입재는 대인관계에서도 공손함(恭)을 성인의 덕이라 하여,


 “요(堯) 임금은 윤공(允恭; 진실하고 공손함), 순(舜) 임금은 온공(溫恭; 온화하고 공손함), 문왕(文王)은 의공(懿恭; 아름답고 공손함), 공자(孔子)는 온량공검(溫良恭儉; 온화·선량·엄숙·절검)이라 하셨다. 내 평생 배워도 능하지 못하니, 너희는 더욱 힘써야 한다.”(유사·호천편)


 라고, 자제들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어진 아버지와 형(賢父兄)이 있음을 가학(家學)의 제1 요건이라 하였거니와 곡구는 아버지로 입재(立齋)를 모셨고 형으로 어초재(漁樵齋) 상진(象晋)을 두었던 만큼  우천학맥 속에서 남보다 월등한 교육적 환경을 누릴 수 있었다 할 수 있다.

16세 때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수제자인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의 사위가 됨으로써 손재의 문하생이 되어, 역시 퇴계학맥(退溪學脈)에 접맥하였으니, 곡구는 가학(家學)에서나 스승을 통해서나 퇴계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손재로부터는 ≪주역≫과 사서(史書)를 익혔는데 곡구의 역사 의식도 이로부터 더욱 확고해 진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대저, 역사(史)란 경서(經)와 상대가 된다. 경서가 없으면 천하의 법도(法)됨에 부족하고, 역사가 없으면 천하의 거울(鑑)됨에 부족하다.”


 라고 하였다. 성인이 남긴 경서(經書)는 천하의 지켜야 할 법도요 도리요 준칙이라면, 역사(歷史)는 천하의 본보기·표준을 보여주는 거울이라 본 것이다. 곡구는, 집안에서는 입재(立齋)의 교훈을 받고, 밖에서는 손재(損齋)의 학문을 익혀 명실공히 퇴계학의 정통맥을 이은 학풍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곡구(谷口)는 스스로“40세 이전은 문장(文章)을 논하고 40세 이후는 학술(學術)을 논하였다.” 라고 밝힌 바와같이 40세 이후는 문장보다 학술에 마음을 쏟기 시작하였으나 불행하게도 45세로 별세하여 학문으로서는 큰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 문장가(文章家)로서의 위상(位相)

 이 항에서는 곡구의 문장가다운 위상을 살피려니와 밝혀 둘 일은 한국문학사적 위상은 문학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기로 여기서는 이미 평가된 제가의 말을 종합해 영남문학사적 위상을 소개한다.

곡구의 창작태도에 대하여 제암(制庵) 정상리(鄭象履)는,“지은 바는 다 간략하면서도 엄격(簡嚴)하며 필세가 기묘하고 강건(奇崛)하여 거의 진한(秦漢)시대의 수단과 같았다.” 라고 하였다. 이는, 곡구의 창작관이 화려한 수식보다는 유가의 도(道)를 싣는 고문파(古文派)의 문이재도관(文以載道觀)에 섰음을 알게 한다. 또한, 곡구의 창작태도와 처세관에 대하여 우평(雨坪) 황인로(黃鱗老)는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곡구(谷口)가 산중에 처한 지 40년 간, 천지의 기운과 일월의 운행, 풍우와 서리와 이슬의 변화, 강하 산악의 형상, 새와 짐승, 초목, 곤충의 무늬진 것들과 아울러 인사의 왕래와 세상 변고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여 정신을 끄집어 내고 골수를 뽑되 넘치도록 거리낌이 없는 까닭에 그의 문장됨은 크게 방일(放逸)하고 걸출하고도 괴이함이 조회(朝會)에서 악기를 연주함에 장간(長竿)과 대슬(大瑟)의 낮고 높은 소리가 서로 뒤섞이듯하고, 깊은 산 큰 못의 숲도깨비와 나무귀신이 비에 탄식하며 바람에 신음하듯 하여 가히 측량할 수가 없었다.

평생에 뜻은 원대하였으나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여, 잘 격앙하고 강개비분하여 마치 고금(古今; 세월)으로써 여관을 삼고 천지로써 초파리가 서식하는 독(甕)을 삼아 속물 보기를 기어가는 지렁이를 보듯 하였다. 그러나, 늘 말하기를, 밝은 세상에는 편안히 살 일이요 변괴 많은 주양의 세상에서는 조용히 숨을 뿐이다. 선비가 어찌 이들 사이에 살아 물귀신같은 것들과 다 이웃이 되랴? 라고 하였다.”


 탁이한 재능(卓異之才)과 호방하고 시원스런 풍격(豪爽之風)을 지닌 곡구가 일반 상식을 초월하는 감수성과 표현력, 나아가 이해를 초월하는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문장을 이뤄내기에 그 문장조차 접근이 쉽지 않았음을 증언한 말이라 하겠다. 이같은 사물관과 창작관은 구상(構想·意匠)이 형식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글을 지을 때 역사에서 유사한 사실을 가져다 쓰는 속사비사(屬辭比事)에서도 그 폭이 너무 넓고 심오하며, 사물을 인용하여 어휘를 골라쓰는 인물조어(引物造語)도 격조와 기운이 너무 웅건(雄)한 까닭에,


 “동 시대에 재지(才智)가 뛰어난 사람으로서 평와의 화려하고도 아름다움(華美), 과암의 필력이 힘차고 속기가 없는 초발(峭拔)함, 우평의 문사(文辭)가 전아하고 뜻이 풍부한 전섬(典贍)함에는 각기 장점이 있으나 군(君)과 적수가 되지 못 하였으니 군이야말로 진정 불세출의 문호(文豪)라 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곡구의 웅건함·평와(백하)의 화미함, 과암의 초발함, 우평의 전섬함이 영남 4문장의 명예를 얻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백하 황반로는,


 “영남의 선비들이 군(君·황인로)과 정숙옹(鄭叔顒·정상관)·강계호(姜啓好·강세은)을 3문장(三文章)이라 지목하였다.”


 라고도 하였다. 이 때, 백하는 스스로 자기를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요약하면, 곡구 정상관은 학술로는 대성할 수 있는 기회(45세 早卒)를 얻지 못하였으나 문장에 있어서는 영남 3문장(嶺南三文章)·영남 4문장(嶺南四文章)의 명예를 얻은 문장가라 하겠다. 한국 문학사적 위상은 앞으로 밝혀져야 할 과제이다.


○ 곡구(谷口) 시문(詩文) 감상

곡구는 시문에 다 능한 영남 4문장의 한 사람으로, 시는 74제(題)나 174운(韻)에 이르는 시를 비롯하여 한 제목 밑에 여러 수를 쓴 경우가 많다. 또한, 명(銘)·부(賦)를 비롯하여 서(序)·기(記)·잡저(雜著) 등에도 독특한 작품이 많다. 이에, 짧은 시 몇 수와 산문 한 편을 감상한다.

∙ 넓고도 깊은 활원(闊遠)한 시의(詩意)


<장의사(張義士)를 읊어 줌(吟贈張義士)>

客有洞蕭者(객유통소자) 퉁소 부는 나그네,

平壤奇男子(평양기남자) 평양의 기남자(奇男子).

慷槪吹一曲(강개취일곡) 강개하여 한 곡 부니,

滄海雲萬里(창해운만리) 창해에 구름 만 리나 이네.


 기남자의 강개한 한 곡(曲)에, 창해에 구름 만 리나 인다고 한, 곡구의 활원한 시의(詩意)는‘장의사( 張義士)’가 곧 곡구(谷)임을 바로 엿보게 하였다.


<돌아가는 구름(歸雲)>

歸雲何太急(귀운하태급) 돌아가는 구름 어찌 그리 급한가,

恐與月俱去(공여월구거) 달까지 다 쓸어갈까 두렵네.

泄處天心惡(설처천심악) 천심(天心)의 위세 발산하는 곳,

仰望黙不語(앙망묵불어) 우러러 묵묵히 말도 못하네.


 구름 한 장 떠가는 거기, 자연(天心)의 위세가 드러나는 현장. 그 위세에 눌려 말도 못하고 우러러 감탄하는 시인의 정회는 역시 고원하고도 깊다.


<비가 갬(雨晴)>

耿光樹生耀(경광수생요) 밝은 빛에 나무는 광채를 드러내는데,

灝氣鳥迷去(영기조미거) 호기에 새는 갈 길을 잃었네.

昨雨今無跡(작우금무적) 어젯 비 오늘은 흔적도 없어,

至人貴不語(지인귀불어) 지인은 말 아니함을 귀히 여기네.


 눈부시도록 밝은 비 개인 이튿날, 하늘 땅에 가득 찬 만물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나무 한 그루·새 한 마리에서도 감지하는 시인의 섬세한 감각과 동시에 자연의 대 순환에 동화된 시인의 황홀하기까지 한 심경을 독자는 느낄 수 있다.

 위의 세 수는, 활원(闊遠)한 시의(詩意)에 감동받을 뿐 아니라, 천재(天才)에게서만 느껴지는 어떤 불가해의 기운조차 느끼게 하는 시들이라 하겠다.

∙ 웅대하고도 건장(雄健)한 시의(詩意)


<조령(새재> 용추(鳥嶺龍湫)>

峽谺仍絶壑(협하잉절학) 텅 빈 골짜기 절벽 이룬 도랑에,

瀑橫忽危湫(폭횡홀위추) 폭포가 엇비슷이 홀연 위태한 용추 두었네.

噴險魚龍失(분험어룡실) 험하게 뿜어내니 고기나 용이 실색하고,

舂高主屹愁(용고주흘수) 소리높이 찧어내니 주흘산이 근심하네.

鶻倒無窮雨(골도무궁우) 매는 끝없이 쏟아지는 비에 거꾸러지고,

藤孤太古秋(등고태고추) 등나무는 천고의 가을에 외롭네.

重關鳥道大(중관조도대) 겹겹이 막은 새잿길(鳥道)은 아득한데,

金盪勢浮浮(금탕세부부) 견고한 성(城)조차 붕붕 띄울 기세네.


 문경(聞慶) 새재(鳥嶺)에 있는 용추폭포를 제재로 하여, 새재를 품은 주흘산조차 붕붕 띄울 정도의 기세를 뿜어내는 천지 자연의 웅건한 기운을 노래하였다. 여기의 금성탕지(金城盪池)는 천혜의 요새였던 주흘산성을 가리킨다.

∙ 여운으로 남은 인간의 한계


<길에서 읊은 시(道上吟)>

寡婦當秋夕(과부당추석) 과부가 추석을 맞아,

靑山盡日哭(청산진일곡) 청산에서 종일 곡하네.

下有黃稻塾(하유황도숙) 들에는 누른 벼 익었는데,

同耕不同食(동경불동식) 함께 갈고도 같이 먹진 못하네.


 인간 한계의 애한(哀恨)을 과부를 통하여 끝없이 펼쳐 보였다. 이른바, 말은 짧으나 뜻은 긴 언단의장(言短意長)의 가작이라 이를 만하다.

∙ 굽힘(屈)은 펴기(伸) 위함임을 아는 자벌레

곡구(谷口)는 시뿐 아니라 산문에도 능한데 뜻이 높고 표현이 너무 개성적이라 이해가 쉽지는 않다. 이 항에서는 자벌레(척확·尺蠖)가 굽힘(屈)과 폄(伸)의 도리를 알아서, 옛 성인도 ≪주역(周易)·계사 하(繫辭下)≫에다,“자벌레가 몸을 굽힘은 폄을 구하기 위함이다.”라고, 특기하였다. 라고 하였다. 자벌레는 미물이라 숲속에 살며 변변찮은 풀잎이나 먹고 어둡고 습한 환경에 살면서도 고관 대작의 사대부가 자벌레 만큼의 굴신(屈伸)하는 도리를 지니지 못한 이가 많기에 이를 경계하고 경각시킬 목적에서‘자벌레가 사는 채마밭’이란 <확포기(蠖圃記)>가 제작되었다고 하겠다. 이에, 그 일부를 소개하여 뜻있는 이의 참고 자료에 더 하고자 한다.

<확포기(蠖圃記)>


“뭇 사람은 다 도(道)에 이르기를 기대한다. 그가 남몰래 닦고, 각고의 노력으로 학문을 익히며, 법도에 따라 행동을 바로잡아 군자(君子)가 되기를 기대한다. 군자인즉 펼침(伸) 가운데(中)와 큼(大)의 도리를 지켜 먼 데를 내어다 보아 반드시 성인의 경지에 이르고자 기대한다. 성인인즉 폄(伸)에 그래서, 의리를 정밀히 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고(정의입신·精義入神), 씀을 이롭게 하여 몸을 편안히 함(이용안신·利用安身)을 서로 굽히고 펴는 굴신(屈伸)이 되게 하여 정미(精微)함의 지극한 도를 막대하게 한다. 도(道)가 큼에 그 몸이 도와 더불은즉 세상의 승강(升降:성쇠)은 하나의 굴신이 된다. 용사(龍蛇)는 신령한 물건이라 혹 깊디깊은 구연(九淵)의 밑에 잠겼다가 영묘한 기운을 발산하여 바람과 구름을 타면 만물이 다 보게 되니, 다 때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벌레 설(확설·蠖說)을 지은 자가 혹 미혹하여 굽힘(屈)은 말하고 폄(伸)은 말하지 않은즉 (도를) 향하여 나아가려는 자가 어찌 씀(用)을 넓게 하고 크게 할 수 있으랴. 성인은 펴기(伸)를 위함인 까닭에 굽힘(屈)에서 취함을 두어 일체(一體)와 일용(一用)에 헛되이 설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저 자벌레는 굽힐 뿐이니, 어찌 도를 안다 하리오. 그러나, 굽힘에 큰 것이 있으니 추위와 더위(한서·寒暑)를 과거에 포개어 쌓은 까닭에 장래에 한 해가 이루어지고, 해와 달(日月)은 어두운 데서 포개어 쌓은 까닭에 서로 번갈아서 밝음이 생긴 것이다.

도(道)에 굽힘(屈함)을 숭상하여 기르지 아니하고, 폄(伸)이 어찌 이르리오. 까닭에, 천지가 굽힘(屈)과 폄(伸)이 오래이고, 성인의 굽힘과 폄이 위대하니, 자벌레의 시대에 맞는 의리(時義)도 크도다. 백치자(白癡子)가 척계(尺溪)위에 채마밭(圃田)을 만들어 자벌레 밭이란 이름으로 확포(蠖圃)라 하고, 나 대흑엄(大黑广)에게 기문을 청하며,“나는 폄(伸)을 구한다.”


 라고 하였다.


"대저, 자벌레의 물건됨은 그 길이가 몇 마디(寸)도 안 되나 특히 굽히고 폄을 잘하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됨됨이는 자그마한 생물이나 재는 데(用尺)는 능하다. 재는 데 능한 까닭에 굽히고 폄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대의 채마밭이 이 척계(尺溪)에 있으니, 진실로 그대가 자벌레같이 되려 한다면 어찌 또 먼저 자(尺)를 보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자벌레의 굽힘(屈)과 폄(伸)을 통하여 사람의 물러남(退)과 나아감(進)을 바라보고, 더 나아가 추위와 더위(寒暑)의 감(往)과 옴(來)에서 한 해(歲)가 이루어지는 자연의 순환까지를 보았다. 미물을 통하여 우주의 신비까지를 엿보려 한 기문이라 하겠다. 곡구(谷口)의 사물관은 섬세함과 고원함의 양극에 다 미치었고, 작가의 지(知)·정(情)·의(意)는 여리고, 부드럽고, 억세고, 거칠고, 도도함을 자유 자재로 넘나들고 있으며, 어떤 시문에서는 천재에게서만 느껴지는 불가해의 신비성까지를 느끼게 한다. 필자는 이들의 실체를 밝히는데 힘이 모자라 뒷날의 잘 아는 이를 기다려 이같은 말을 덧보태 둔다.

끝으로, 곡구(谷口)의 시가 환생하는 순간을 엿볼 수 있는 자천대(경천대) 낙강에 달띄운 노래인 <자천대범월(自天臺泛月)>(별집 권1) 시를 글의 마무리로 둔다.


細草微風岸(세초미풍안) 여린 풀숲에 미풍이는 언덕,

危檣獨夜舟(위장독야주) 높이 돛달고 홀로 밤배를 띄우네.

星移虛壑落(성이허학락) 별자리 옮겨 빈 골짜기로 떨어지고,

月湧大江流(월용대강류) 달이 솟아 큰 강물에 흐르네.

際遇文章老(제우문장로) 꼭히 문장에 노숙한 이 만날 때요,

留連節士秋(유연절사추) 절개 있는 선비도 머뭇거릴 가을일세.

飄飄遺賞小(표표유상소) 표표히 잎 다 져 완상할 게 적은데,

天地一沙鷗(천지일사구) 천지 간에 한 갈매기 유유히 나네.


 곡구(谷口) 정상관(鄭象觀)의 시문(詩文)은 전문인의 학술 연구를 기다려 영남 문학사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도 그 위상이 정립되리라 믿는다. 곡구(谷口)는 상주가 낳은 또 한 분의 기재(奇才) 문장가였음을 특기할 만하다.


* 각주는 다음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람

상주를 빛낸 사람들Ⅳ

상주의 인물

발행일 : 2015년 12월 일

발행처 : 상주문화

발행인 : 원장 김철수

쇄 : 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