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유(李敬儒)의 시세계(詩世界)와 《창해시안(滄海詩眼)》
권 태 을
이경유(李敬儒 ․ 1750~1821)의 자(字)는 덕무(德懋)요 호는 임하(林下) 또는 반속(半俗)·창해(滄海)이며 관향은 연안이다. 5대조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은 문과급제로 이조판서요, 고조 박천(博泉) 옥(沃)은 문과급제로 예조참판이며, 증조 식산(息山) 만부(萬敷)는 경학·문학·실학의 대가요, 조부는 통덕랑 지빈(之彬)이다. 아버지는 당대 시명(詩名)을 얻은 강재(剛齋) 승연(承延)이요 어머니는 함안유씨며, 임하는 상주에서 태어났다.
○ 수학(受學)
임하(林下)는, 근곡·박천·식산으로 전승되던 경학과 문학과 실학을 전수하였는데, 당대 식산가(息山家)의 가풍(家風)과 학풍(學風)은 영남 굴지의 것이었다. 임하는 학문보다는 문학 특히 시학(詩學)에 일가를 이루었고, 시 작품 또한 가작을 많이 남겨《상산지》에 9수가 전한다. 박천·식산·강재의 시문이 향토사뿐만이 아니라 전국 수준의 시선집에 다 올랐으며, 숙부인 반롱재(半聾齋) 이병연(李秉延) 역시《증보 해동시선》에 오른 문장가여서 임하가 수업은 학문 위주로 받았으나 수준 높은 문학 수업을 누구보다도 풍성히 받았다고도 하겠다.
임하(林下)가 40대 초인 1792년(정조 16)에 임오역신(壬午逆臣)을 성토한 상소의 논지가 바르고도 엄격(正嚴)하여 왕이 불러서 직접 시사(時事)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임하의 진언하는 시론(時論)이 정정당당함에 왕이 감동하여 즉석에서 참봉을 제수하니 그의 선비 기상은 조야에 널리 알려졌다. 임하의 수학(受學)은 가학(家學)이었으나 경학과 문학에서 다 수준 높은 경지에 올랐음은 위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하겠다.
○ 문학관(文學觀)
• 문학효용론
문학의 효용에 대하여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학자나 문인이나 효용에 무게가 더 실린 것은 사실이다. 이에,《창해시안》에 소개된 한 일화부터 본다. 대제학 이광덕(李匡德)이 북쪽 변방으로 유배 도중 종성(鍾城)에 이르러 전별연을 가졌을 때 북관의 기녀 가련(可憐)도 초대되었다. 가련은 전임 종성부사 모의 사랑을 받다가 이별 후 수절했던 기녀다. 이미 늙어 백발이 성성하고 이도 빠졌으나 주흥을 돋구기 위하여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송(誦)하였다. 선제(유비)가 신하를 삼고초려(三顧草廬)하였다는 대목에 이르자 이광덕이 처연히 눈물을 흘리며,
“남관(南關) 기녀의 귀밑 털은 실낱같은데,
취하자 소리높이 두 출사표 노래하네.
삼고초려 대목을 노래할 적에,
쫓겨난 신하의 눈물 만 가닥으로 흐르네.”
라고 지었다. 임하(林下)는,“이공(李公)의 시로 하여 가련(可憐)은 죽었으나 썩지는 않았다.”라고 하였다. 출사표를 노래한 것은 유배가는 이광덕을 위함만이 아니라, 비록 헤어졌으나 이별한 부사 모를 죽는 날까지 잊지 않으려는 자신의 마음도 가련(可憐)함을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송(宋) 태조가 촉(蜀)을 멸하고 촉주(蜀主) 맹창의 화예부인 비씨(費氏)를 불러 시를 읊게 하니,“군왕(君王)의 성 위엔 항복의 깃발 꽂혔는데, 심궁(深宮)에 있는 첩이야 어찌 알았으리오. 14만 병정 갑옷 버리고, 단 하나 남아(男兒)는 없었네.”라고 읊었다. 임하는, 장부로 무릎을 꿇은 자야 이 시 앞에 무슨 면목이 있으랴 하고, 고려의 장수 일화를 비교하였다. 목종 때 거란주가 흥화진(興化鎭)에 침입하여 부총관 이현운(李鉉雲)을 잡아 위협하니 그가,“두 눈은 이미 새 일월(日月)을 우르렀으니, 마음에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랴.”라고 하였다. 거란주를 새 일월로 떠받친 이현운의 매국을 임하는 개 ․ 도야지같다 벌주었다. 문장이 비록 나라 빛내는 도구(文章華國)라 하지만, 전자와 후자의 경우에 문장의 효용론은 독자도 가늠할 수 있으리라.
• 실경(實境)의 중시
시가(詩歌) 이론에서 뚜렷하게 실재하는 경지나, 풍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따위를 실경(實境)이라 한다. 임하는 고려 시인 강일용(康日用)이 해오라기시(鷺鷰詩)를 짓기 위하여 비오는 날이면 천수사(天水寺) 남쪽 개울로 나아가 해오라기를 관찰하다가 문득,“날아 청산의 색(色)을 가르네.”(飛割碧山腰)란 구절을 얻었다. 또한, 당나라 초기의 4걸(四傑)로 지칭된 양형·왕발·낙빈왕·노조린 중의 양형(楊炯)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가는 시로 <종군행(從軍行)>을 지은 가운데,“봉화는 서경을 비추는데, 심중(心中)은 절로 평안(平安)치 못하네.” (…心中自不平)란 구절을 들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임하는, 4걸의 다른 삼인은 물론 종군시를 쓴 이가 당나라 시인만도 수 많으나‘心中自不平’이란 싯구를 지은 이는 없다 하였다. 곧‘종군(從軍)’은‘충(忠)’의 표상이란 선입견(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설파하였다.‘충’의 행렬이나 그들의 심중에는 진실로 평안함만 있을 것인가라는 반문을 했다. 인간 내면의 진실성은 문학이라고 하여 왜곡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임하의 시관(詩觀)이기도 하다.
• 고원신기(高遠新奇)를 경계함.
높고 원대(高遠)하거나 남을 놀라게 할 만한 신기(新奇)함에 대하여 임하는 그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實相)은 없고 말 재주만 부리는 경우를 부정하여 경계하였다.“담장 모서리에서는 닭의 자녀(子女)들이 다투어 달리는데, 다락 가운데는 제비 부처(夫妻)가 단정히 앉았네.”라 한 싯구가 사람의 입에 많이 오르내림을 시도(詩道)의 재앙이라고까지 하였다.‘병아리’․‘한 쌍’을 식상하다고 하여 병아리를‘닭의 자녀’, 제비 한 쌍을‘제비 부처’라 하여 본질적으로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경계다. 남보다 더 고원한 체, 더 신기한 체만 추구하다가는 오늘의 문학도 주객이 전도될 염려는 얼마든지 있다.
○ 동국 시(東國詩)에 대한 자부
임하(林下)는 우리 시에 대한 자부가 남달랐다. 동양 시사(詩史)에서 당시(唐詩)의 위상이 최고위인 것은 사실이나 내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무조건 추종함을 임하는 경계하였던 것이다. 한 예를 본다.
“동방의 작자는 수천 가(家)가 넘어 음조(音調) 성율(聲律)이 비록 당(唐) 나라 시에는 미치지 못하나 송(宋)나라 시에 비하면 나은 점이 있다. 그러나, 혹 사람들이 소국(小國)의 음(音)이라 홀대하여 저 회은(晦隱) 남학명(南鶴鳴) 같은 이도, 족히 세상에 전하여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였으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문학에서도 모화(慕華) 사대(事大)가 판치던 당시를 잘 보여 주었다. 특히, 중국에서도 당(唐)·송(宋)·명(明)으로 문운이 쇠퇴해 갔다고 믿는 처지에서 보면 임하가 동국(조선)시에 갖는 자부심은 대단히 컸다고 할 수 있다.《창해시안》은 이같은 의식하에서 제작된 특장도 있다.
○ 상주시사(尙州詩史)에 남긴 임하(林下)의 공적
• 시사결성(詩社結成) - 1784(정조 8) 입추 이튿날 결성
상주시사에 시사(詩社·시동인)가 언제부터 결성되었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다만, 임하가 시동인으로‘추수사(秋水社)’를 결성하여 상주시사에 시문학 활성화에 적극 참여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시사의 동인은, 이승연(李承延)·이경유·이정유(李挺儒), 강필악(姜必岳)·강세백(姜世白)·강세륜(姜世綸)·강세진(姜世晋)·강봉흠(姜鳳欽)·강세문(姜世文) 등으로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의 시맥을 잇는 식산가(息山家)와 국포(菊圃)·모헌가(慕軒家)의 시인들이 주를 이루었음을 특기할 수 있다.
추수사(秋水社) 결성 당일의 전경을 보면,
“나와 강세백(姜世白) 청지(淸之)가 추수사를 결성하고 처음 연정(蓮亭)에서 모여 사(社)의 이름을 추수사(秋水社)라 하였다. 부형·장로(長老)가 다 모였다. 향(鄕) 자를 집어내어 시를 지었는데, 청지(淸之)의 시에,‘연잎이 홀연 추수사를 높이니, 복숭아꽃 무릉향(武陵鄕)을 손꼽지 않네.’(荷葉忽高秋水社 桃花不數武陵鄕)라 하였다. 자못 아름답다.”
라고 하였다. 상산을 대변할 두 문장가의 후예들이 결성한 이 추수사(秋水社)는 문헌상 처음 나타나는 시사(詩社) 동인회로 상주시사에 주목할 만한 모임이었다. 나아가, 이 시사가 회원들의 벼슬길로 인하여 한 동안 주춤하였다가 1804년(甲子) 재 결성된 것을 알 수 있으니,“우리 집의 건기(建基)가 가까운 이웃 마을의 두셋과 청지의 자질(子姪)과 약속하고 시사의 결성은 북곽(北郭)의 남성(南城)이 모여 하기로 하였다. 추수사의 옛일을 추억하니 저도 모르게 창연해져서 이 시를 지어 청지에게 보낸다.”라는 시에서,
一盞燈殘轉不眠(일잔등잔전불면) 한 등잔불에 뒤척이다 잠 못 이루는데,
三更數盡四更傳(삼경수진사경전) 삼경이 다 지나고 사경을 알리네.
五曺已老弦翁遠(오조이노현옹원) 우리 무리 이미 늙고 현옹은 먼뎃사람 되었는데,
秋社風流有少年(추사풍류유소년) 추수사(秋水社)의 풍류는 젊은 날의 일일세.
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 무명인(無名人) 발굴
상주목의 서리였던 무세옹(疣世翁) 박종추(朴宗樞)의 도장장인(圖章匠人)으로서의 존재성, 곤지자(困知子) 김악주(金岳柱)의 문학 소개를 비롯하여 집안의 아버지·숙부(이병연)·이지존(李之存)·이성유(李誠儒) 등과 선산의 창소(蒼巢), 종(奴) 동호초객(東湖樵客), 흥해리(興海吏) 최모(崔某) 등, 동국 시인 201명 중《창해시안》에는 당대까지 시인으로 무명인이었던 30% 이상의 시인을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이는, 한국시단의 폭을 넓힌 장한 일이었다. 이에 이지존(李之存)의 시부터 보면,
“산가의 경물은 볼 만한 게 적은데, 홍작약 세 닢이 시인의 눈에 드네. 술 있어도 읊을 바가 없어, 다시 피지도 않은 꽃가지를 보네.”
라고 읊어 결구(結句)에 표현의 묘(妙)를 다 하였다. 다음은 임하의 아우 성유(誠儒)의 쫓겨가는 부인의 원망이란 시 <거귀원(去歸怨)> 시를 본다.
出門登車去(출문등거거) 문 나서면 수레타고 잘 몸,
何言復來歸(하언복래귀) 무슨 말로 돌아오마 하랴.
不惜恩情絶(불석은정절) 은정(恩情) 끊어짐은 아깝잖으나,
但恐去後譏(단공거후기) 단지 돌아간 뒤 기롱할까 두렵네.
10여세의 작이라 하니 새삼 놀랍다. 스물 전에 요사한 아우의 시 한 수는, 이 땅에 사람이 살다 간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창해시안(滄海詩眼)》저술
《창해시안》의 저술은 임하 55세 전후(1504~1806)의 것으로 추정되며 상·중·하권으로 총 374화의 시화(詩話)와 시평(詩評)을 남기었다. 특히 이《창해시안》은 서거정의《동인시화(東人詩話)》이후 영남에서는 독특한 시화집으로 절대 다수의 시론(詩論)·시평(詩評)을 수록하고 있어 명실공한 시평집(詩評集)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상주시사(尙州詩史)에 시안(詩眼) 곧 시를 보는 안목을 높이었고 나아가 시론(詩論)을 바탕으로 한 시가 탄생하는 촉매제의 구실을《창해시안》이 하였다고도 하겠다.
○ 임하(林下) 시 감상
• 상주시(尙州詩)에 담은 향토애
임하가 상주시에 남다른 관심을 둔 것은 그만큼 향토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임하의 시로《상주지》에 올린 작품은 이향정(二香亭·현 枕泉亭) 시와 상산의 노래인 <상산고가요(商山古歌謠) 15수>가 있는데, 왕산·자천대·임석천대 등이다. 이에, 두 제목의 시 중에서 몇 수만 소개하도록 한다.
<상산고가요 제1수>
蒼茫沙伐國(창망사벌국) 창망한 사벌국(沙伐國)이,
羅代廢爲州(나대폐위주) 신라 때 폐하여 주(州)가 되었네.
設官置牧守(설관치목수) 관리는 목사를 두어 지켰고,
地大居民稠(지대거민조) 땅은 크고 사는 백성은 조밀하였네.
鄕多士君子(향다사군자) 향리엔 사군자(士君子)가 많아,
文物擅上遊(문물천상유) 문물이 (낙강) 상류에선 으뜸일세.
역사·지리·주민·인물·문화가 시인의 긍지 속에 시화(詩化)되었다. 제2수는 낙동강의 존재 의의를 노래하였다.
<상산고가요 제3수>
賢候靈川子(현후영천자) 어진 목사 신영천(申靈川·潛) 선생,
有慕文翁化(유모문옹화) 문옹(文翁)의 교화를 사모하여,
處處設庠塾(처처설상숙) 곳곳에 서당을 차려,
鉉誦無冬夏(현송무동하) 독서 소리 겨울 여름 따로 없었네.
鄕俗遂丕變(향속수비변) 고을 풍속 마침내 크게 변하여,
街頌尙藉藉(가송상자자) 거리의 송덕가 지금도 자자하네.
영천 신잠 목사(1552~1554 재임)가 불과 3년 사이에 상주를 전국 수준의 교육향으로 격상시킨 공덕을 찬양하였다. 제4수는 후계(后溪) 김범(金範) 3부자의 학덕을, 제5수는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의 학문과 문장을, 제6수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도남서원 창건의 꿈을 노래하였다.
<상산고가요 제7장>
往昔龍蛇歲(왕석용사세) 지나간 임진왜란 때에,
南蠻肆其惡(남만사기악) 남쪽 오랑캐 악행을 저질렀네.
半刺是微官(반자시미관) 반자(半刺·판관)는 곧 미관말직이나,
舍生如嗜慾(사생여기욕) 삶을 버림에 밥 먹듯 하였네.
忠哉朴戶長(충재박호장) 충성스럽구나, 박호장(朴傑)은
大節愈偉卓(대절유위탁) 대절(大節)을 더더구나 높이 세웠네.
권길(權吉) 판관과 박걸(朴傑) 호장의 사생취의(捨生取義)를 통하여 상주로 하여금 충절향으로 높이 세웠다. 제8수는 시초(蓍草)가 난 웅이산(熊耳山)의 신령한 지덕(地德)을 노래하였다.
<상주잡영·이향정(二香亭)>
南蓮與北蓮(남연여북연) 남쪽 연과 북쪽 연,
色色分紅白(색색분홍백) 색색이 홍(紅) 백(白)으로 나뉘었네.
亭在兩塘間(정재양당간) 정자가 양 연당(蓮塘) 사이에 있어,
宛如舒鳥翼(완여서조익) 완연히 새 날개 편 듯하네.
현재의 침천정(枕泉亭)이 옛 관아(왕산 앞)에 있을 때의 정경을 노래한 시다.
<상주잡영·병성(屛城)>
憑誰問往事(빙수문왕사) 누구에게 지나간 일을 물으랴,
山色數重圍(산색수중위) 산빛이 여러 겹으로 에워쌌네.
敗堞空流水(패첩공류수) 패망한 성가퀴엔 헛되이 세월만 흐르고,
荒陵只落暉(황릉지낙휘) 거친 왕릉엔 단지 석양빛만 비치네.
草生猶舊跡(초생유구적) 풀숲 생겨도 오히려 옛 자취는 남고,
花發自春枝(화발자춘지) 꽃은 절로 봄 가지에서 피네.
古木郡鴉噪(고목군아조) 고목에 뭇 갈가마귀 떼지어 우니,
興亡爾豈知(흥망이기지) 흥망이야 어찌 네들이 알랴.
사벌국 회고가다. 이는, 상주인의 가슴엔 항상 사벌국이 살아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소주(小註)에,“주(州)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사벌왕 고성이다. 북쪽에 왕릉이 있다.”하였다.
<상주잡영·임천석대(林千石臺)>
一人全節遂名臺(일인전절수명대) 한사람의 온전한 절조 대(臺) 이름 이뤄,
林壑千年不盡哀(임학천년불진애) 숲골짜기 천년에도 슬픔은 다함 없네.
祗有高山月小夜(지유고산월소야) 다만 높은 산 달 음침한 밤이면,
應隨玄鳥羽衣來(응수현조우의래) 응당 학 따라 우의(羽衣)입고 오겠지.
임하는 소주(小註)에, 임천석대는 주(州) 서쪽 60리에 있는데 고려의 악사(樂士) 임천석이 신라가 망하자 거문고를 안고 백화산(白華山) 속으로 도망하여 총석(叢石) 위에서 거문고를 탔기에 후세에 임천석대가 생겼다고 하였다. 상산탄금대(商山彈琴臺)의 충혼을 기린 시다.
• 시인의 애정(愛情)
시인의 애정은 삼라만상 어디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애정이 없으면 시(詩)도 없다는 말이 시공을 넘어 진리한 생각도 든다. 이에, 농사·농민을 노래한 <농가요(農歌謠)> 한 수를 소개한다.
倉庚鳴杏花發(창경명행화발) 꾀꼬리 울고 살구꽃 피는,
嗟我婦子春已及(차아부자춘이급) 아, 우리 부녀들 봄을 맞았네.
朝耕汙邪(조경오사) 아침 나절엔 낮은 땅 갈고,
暮耕甌窶(모경구루) 저녁 나절엔 비탈밭 갈아,
日夜勤苦不得息(일야근고부득식) 밤낮으로 애쓰는 고통 쉴 틈은 없는데,
我農旣勤我穀不蕃(아농기근아곡불번)농삿일에 애쓴 만큼 우리 곡식 붇지를 않네.
小麥枯枯(소맥고고) 밀은 바짝 마르고,
大麥不盈(대맥불영) 보리조차 알차지 않네.
束禾黍及稷(속화서급직) 벼 기장 피곡을 묶어,
輸租于公(수조우공) 관가에 세금 바치니,
我私無多(아사무다) 내게는 남은 게 없어,
不可以飮啄(불가이음탁) 마시고 씹을 곡식 없네.
농가·농민의 참상을 노래하는 시인의 가슴 속에는, 더불어 사는 이웃에게 보내는 인간적 애정이 절실함을 엿볼 수 있다. 임하는 일찍이, 역사적 현실·국적이 없는 시를 경계해 놓았다고도 하겠다.
○ 창해(滄海)의 시안(詩眼)
창해(滄海)란 임하(林下) 이경유(李敬儒)의 다른 호요, 시안(詩眼)이란 시 속의 핵심이 되는 말이나 시적인 안목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창해시안(滄海詩眼)》은 창해(이경우)가 좋은 시를 발견하고 평가한 시화(詩話) 또는 시평집(詩評集)으로, 시의 이해와 감상뿐 아니라 창작의 방향 제시 및 시도(詩道)의 옹호에 보탬을 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끝으로, 시안(詩眼) 구비의 중요성을 보인 몇 일화를 사례로 들어 이 글의 끝을 삼고자 한다.
“당나라의 시인 전기(錢起)가 어려서 상동역사(湘東驛舍)에서 우연히 어떤 이가 읊는 두 구를 들었는데,‘노래 끝나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강 위엔 몇 산봉우리만 푸르네.’(曲終人不見 江上數峰靑)라 하였다. 기이하게 여겼는데, 10년 뒤에 진사시(進士試)를 보게 되었는데 시험 제목이 상령고슬(湘靈鼓瑟)이었다. 12구의 끝 두 구를 이 싯구로 맺었더니 당시 시관 이위(李暐)가 보고 신구(神句)라 하고 전기의 시를 으뜸으로 뽑았다. 단지 신구(神句)일 뿐만 아니라, 신구(神句)를 능히 식별한 자의 신안(神眼)이 있어서가 아니랴.”
이 시화는 홍만종(洪萬宗·1643~1725)의《소화시평(小華詩評)》에도 소개되었고, 또한 고려 정지상(鄭知常)이 젊어서 산사에서 공부하다가 어떤 이의 시 두 구절을 얻어 듣고 뒷날 시원(試院)에서 이 두 구를 사용하여 으뜸으로 뽑힌 사실을 같이 실었다. 그리고 끝에서,“두 구(句)가 다 신묘(神妙)한 일로 또한 서로 비슷하니 괴이(異哉)하도다.”라고 하였다. 이는, 임하(林下)가 시안(詩眼)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예로 든 것과는 저술의 의도가 다름을 본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도은(陶隱·李崇仁)과 삼봉(三峰·鄭道傳)은 평소에 불화하였다. 하루는 삼봉
이 어렴풋 잠이 들었는데 황현(黃鉉)이란 이가 도은이 지은 호종시(扈從詩)를 외니 삼봉이 눈을 뜨고 재차 외게 하고는, 시어(詩語)와 시운(詩韻)이 맑고 원만(淸圓)하다 하였다. 그때 황현이 도은의 시라 하니 금새 어디서 이런 악시(惡詩)를 가져왔느냐고 하였다 한다. 그리고,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인용한 반산(半山) 왕안석(王安石)과 동파(東坡) 소식(蘇軾)과의 일화를 재인용하였다. 곧, 반산과 동파는 정적(政敵)이었는데, 반산이 늘 동파보다 나은 시를 지으려고 소동파의 <설후시(雪後詩)>를 읽고는 6·7편이나 차운하였으나 끝내는“미칠 수 없도다(不可及)”라고, 자신의 역량이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도리어 식자들의 믿음을 샀다는 일화다. 임하(林下)는 이 일화의 끝에,“반산(왕안석)의 기세로도 스스로 옳다고 여김(自是)을 포기하고 공론(公論)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정(삼봉)이 반산에게 미치지 못함도 멀도다.”라고 하였다. 객관적 시평관(詩評觀)은 임하의 지론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하겠다.
* 각주는 다음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람
상주를 빛낸 사람들Ⅳ 상주의 인물 |
발행일 : 2015년 12월 일 발행처 : 상주문화원 발행인 : 원장 김철수 인 쇄 : 한 일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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