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시(南漢山城詩)에 담은 강박(姜樸)의 우국충정(憂國衷情)
권 태 을
강박(姜樸·1690~1742)의 자(字)는 자순(子淳)이요, 호는 국포(菊圃) 또는 혜포(惠圃)며, 관향은 진주다.
5대조 사안(士安)은 문과급제로 정랑(정5품)이요 고조 신(紳)은 문과장원으로 좌참찬(정2품)인데, 생가의 아버지 사상(士尙)은 문과급제로 우의정(정1품)에 오른 분이다. 증조 홍수(弘秀)는 현감(종6품)이요 조는 진사 익(翊)이다. 국포는 진사 석훈(碩勛)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증 이조참의(贈吏曹參議·정3품) 석번(碩蕃)의 양자가 됨으로써 진주강씨 대호군공파(晉州姜氏 大護軍公派) 종손이 되어 상주인이 되었고 묘소도 상주 이안면에 있다.
○ 학문과 시맥(詩脈)
국포는 생가나 양가가 다 전국 굴지의 대대로 문필(文筆)에 능한 문한가(文翰家)요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는 세가(世家)라, 가학(家學) 이 외에도 국포의 학문 수업은 별달랐을 것이나 연보·행장·묘갈명 등이 없어 그 자세함은 알 수 없다. 이에, 제자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증언한 국포의 시맥을 살피도록 한다.
“남인계(南人系)의 시맥(詩脈)은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
1563~1628)에서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1589~1670)와 호주(湖洲) 채유후(蔡裕後·1599~1660)로 이어지고, 다시 송파(松坡) 이서우(李瑞雨·1623~?)로, 또 다시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1669~1799)과 연초재(燕超齋) 오상렴(吳尙濂)으로 이어졌다. 이 시맥을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1689~1745)과 국포 강박(1690~1742)이 잇고 다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와 번암 채제공(1720~1799) ․ 해좌(海佐) 정범조(丁範祖·1723~1801) 등이 잇고 이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이었다.”
이로써도 남인계의 시맥상(詩脈上) 국포의 위치는 중추적임을 알 수 있고,“제공(濟恭)은 어려서부터 그 문하에 드나들어서 공(公)에게 얻은 바 다른 사람들이 얻은 것과는 다르다.” 하였고, 문장가로서 문단에 기치를 세우고 웅거했던 자로 국포를 가장 먼저 손꼽지 않은 이는 없었다는 증언으로서도 국포의 한국시사상(韓國詩史上)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하겠다.
국포의 시맥은 번암 채제공·다산 정약용 등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후손으로서 아들 필시(必詩)와 필악(必岳·양자, 동지중추부사·진은군)과 손자 세백(世白·도산시 장원·응교)과 세륜(世綸·문과 병조참판)으로 이어지고 증손 장흠(長欽·생원)과 현손 주영(冑永), 5대손 직(稷·1816~1859)으로 이어져 상주시문학사에 국포시맥(菊圃詩脈)을 형성하였다.
○ 불의(不義)에 맞선 벼슬길의 기복(起伏)
1715년(숙종 41) 3월 25일, 절일제(節日製)에 장원하여 같은 해 5월 22일,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정9품)로 벼슬길에 올랐다.
1716년 윤 3월, 선현을 근거없이 욕보였다는 무고(誣告)로 삭직 당하여 4월에는 평안남도 안주(安州)로 유배되었다. 이후, 1719년 광산(光山)으로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1722년 영양현감이 되어 영남의 인사들과 사귀었다.
1723년 홍문록(弘文錄)과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1724년 1월, 부수찬(종6품)이 되었고, 경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릉만사(懿陵挽詞)>를 지어,“의릉(경종) 만사는 천고에 뛰어난 시어(詩語)라 읽으면 눈물이 주루룩 흐름도 깨닫지 못한다.”라고 하여 경종의 만사 중에서는 제일이라고 평하였다.
1725년(영조 1) 1월, 수찬(정6품)에 임명되어, 당쟁에 왕의 편견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상소하였다.
“전하께서는 지나칠 정도로 영특하고 총명하시나 엄숙하고 조용하며 침착하고 심후(深厚)하신 의사는 적으신 것 같고, 온자하고 어지심은 넘치시나 엄숙하고 의젓하며 굳고 확고한 기상은 좀 모자라신 듯 합니다. 문란함을 제거하려 하나 문란함은 더욱 번거롭게 되고, 실질적인데 힘을 쓰지만 그 결과는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상소하기를) 영남의 수백 년 곧은 소리와 바른 기상이 이 같은 무리들의 막아 가리려 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같은 무리들이 엿보고 억측하며, 남의 마음에나 들도록 함은, 신으로서는 전하께서 내시는 다스림의 원칙에 다하지 못한 바가 있어서 부득불 그리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빠지고서야 이 나라에 국가를 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동중서가 말하기를.‘바른 마음(正心)으로써 조정을 바르게 한다(正朝廷)’라고 하였습니다. 원컨대 유의하소서.”
이 상소는, 서인에게 밀려 국정 참여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남인의 처지는, 왕이 탕평책을 표방하면서도 정심(正心)·정조정(正朝廷)의 의리에는 맑지 못하다고 직언을 올린 것이다. 1725년 8월부터 <총명쇄록(聰明瑣錄)> 99제(題)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가운데 국포의 학문관·처세관·정치관·국가관 등의 귀한 사상적 이야기가 많다.
1727년 7월 17일에는 수찬으로서 왕에게 ≪심경(心經)≫을 진강하였고, 7월 19일에는 ≪중용(中庸)≫을 진강하여 특히 본심을 굳게 지킴(存心)에는 글로써가 아니라 스스로의 충분히 체득함(體認)이 소중함을 강조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부교리로서 윤지술을 논핵하다 파직되어 함종(咸從)으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11월 정미환국(丁未換局 ․ 소론집권)에 풀려나 12월에는 교리가 되었다.
1728년(戊申年·영조 4) 2월에 필선(정4품)이 되고, 이후 통정대부 홍주목사(정3품)가 되었으나 뒤의 사적은 분명치 않다. 다만,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였음은 1731년에 쓴 <철근록(輟斤錄)>의 제20수 첫 부분에서,
世道日淪夷(세도일륜이) 세상의 도의는 날로 망해 가.
俗風隨頹傾(속풍수퇴경) 풍속도 따라 무너져 기우네.
朝爲魯連辭(조위노연사) 아침엔 노중련 같은 고담(高談)만 펴더니만,
暮作齊墦行(모작제번행) 저녁엔 제번 같은 행동을 짓네.
小人方自豪(소인방자호) 소인배가 방금 스스로 호걸인 체 하니,
志士憂且驚(지사우차경) 지사(志士)는 근심하고 놀랄 뿐이네.
라고 하였다. 말로만 충신 의사인 체 하는 소인배가 판치는 세상에 국포가 제대로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은 자명하다.
“국포 공은 일찍이 문형지망(文衡之望)이 있었으나 당화(黨禍)를 입고 위축되어 무신년(1728) 영조 초년(영조 4)에 통정대부로 승격한 뒤 15년이 지나도록 실직(實職)을 얻지 못한 채 재야의 인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라고 하였다. 또한 1737년(영조 13) 12월에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이, 버려져 지기(志氣)를 펴지 못한 지폐자(枳廢者) 명단에 강박(姜樸)과 강필신(姜必愼)의 이름을 실었고, 이듬 해 6월에도 지폐자 명단에 국포의 이름이 올라 있다. 더구나, 1636년 7월에는 딸을 잃고 11월에는 삼가례(성인식)를 치른 16세 난 아들(必詩)까지 잃음으로써 혈육을 다 잃고 말았다. 그러나 별세하기 3년 전인 1739년에는 괴질에 걸려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가운데서도 장난삼아 쓴다는, <여득괴질(余得怪疾) 불능언(不能言) 불식자(不識字) 만시희필(漫試戱筆)>에서는,
口瘖未發狂妄言(구음미발광망언) 입은 벙어리되어 광망(狂妄) 한 말도 못하고,
眼障不識憂患字(안장불식우환자) 눈은 가려서 우환(憂患) 이란 글자도 못보네.
偉哉造物如相我(위재조물여상아) 위대하구려, 조물주가 나를 도움이여,
自此一身都無事(자차일신도무사) 이로부터 내 한 몸 오로지 무사(無事) 하겠네.
라고, 읊었다. 언뜻 보면 흡사 조물주의 도움이나 받은 듯 하지만 광망언(狂妄言)·우환자(憂患字)·무사(無事)의 세 단어를 연관지어 생각하면, 국포가 만년까지 얼마나 바른 말(正言)을 하고 우국애민의 심정으로 선비의 도리를 다하려 했던가를 금새 알아볼 수도 있다.
살핀바와 같이 국포의 벼슬 기간은 1715년부터 1728년까지는 확실하나 불과 15년도 안 된다. 그나마, 선비의 도리를 다하려는 우국애민에의 충정 때문에 불의(不義) 앞에 바른 말을 멈출 줄 몰랐기에, 흡사 가로수가 전지(剪枝)를 당하듯 정적(政敵)들에 의해 키가 자랄라 하면 잘리고 자랄라 하면 잘리듯 하였으나, 그럴수록 뿌리는 더욱 깊이 내려 나무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듯, 바르게 살려고 했던 국포의 지난(至難)한 삶은 시로 승화되어 도리어 영구한 생명을 얻었다고 하겠다.
○ 남한산성시(南漢山城詩)에 살아 숨쉬는 지사(志士)의 비판과 경고
국포가 남한성에 올라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새기며 지사의 우국충분을 시로써 풍자와 비판, 고발과 경고에다 담은 것은 1732년 12월 1일이다. 이 시에 대한 평으로 임하(林下) 이경유(李敬儒)는,
“동방의 5절시(五絶詩)는 전혀 가작이 없는데, 국포의 <남한전후 8절(南漢前後八絶)>과 <주행전후잡영(舟行前後雜詠)>이 극히 아름다워 세상에 가장 이름이 났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남한전 8절> 시만 살피기로 한다.
제1수
南登南漢城(남등남한성) 남으로 남한산성에 올라,
北望三田渡(북망삼전도) 북으로 삼전도를 바라보네.
石闕誰家碑(석궐수가비) 석궐엔 뉘 비가 섰는가,
人間白日暮(인간백일모) 인간엔 백일이 저무네.
제재(題材)는 삼전도비(三田渡碑)다. 내 나라를 정복한 청태종의 공덕을 찬양한 비다. 인간 세상엔 대낮 또는 태양(白日)조차 수치심에 저물고 있다고 노래한 결구(結句)의‘저물모(暮)’에 응축된 그늘은 곧 민족적 한으로 남게 되었다.
제2수
誰言鴨江遠(수언압강원) 누가 압록강을 멀다고 했던가,
三日到郊圻(삼일도교기) 삼일이면 서울 근교에 닿는 걸.
不見我城險(불견아성험) 우리 성이 험한 건 보지 못하고,
但見胡馬飛(단견호마비) 단지 오랑캐 말 나는 듯 달리는 것만 보았네.
제재(題材)는 전의상실(戰意喪失)이다.“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라고 한 맹자(孟子)의 가르침도 몰랐던 당시 위정자들을 고발하고 비판하였다. 청의 수도 심양에서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서울 근교까지 진격한 적장 마태부가 걸린 시일은 열흘 남짓하였다. 자신의 성이 험한 건 알지도 못하고 적의 군마가 날쌘 것만 보았던 당시의 조선 방어군.‘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던 병법조차 망각한 채, 자기 옹호의 핑곗거리만 찾던 당시 위정자들을 겨냥한 지사(志士)의 준엄한 호통은 도리어 엄청난 무게로 겉으론 드러나지도 않았다.
제3수
婾情非今日(투정비금일) 안일을 꾀하기야 어제 오늘이 아녀,
昇平五十春(승평오십춘) 태평성세 오십 년을 누렸지.
無人能縛賊(무인능박적) 아무도 능히 적은 결박지 못하고,
但縛斥和臣(단박척화신) 기껏 척화신만 결박하였네.
제재(題材)는 안일무사주의(安逸無事主義)다. 임진왜란(1592)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망국적 당쟁만 일삼다가 오랑캐로 멸시하던 후금(後金·뒤의 淸)에게 형제국의 맹약을 맺고(정묘호란·1627)도 또 망각증에 빠져 군신국의 맹약을 맺은 병자호란(1636)을 겪었다. 반세기도 안 되는 사이에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이란 민족사에 가장 치욕적인 전쟁을 치른 위정자(왕 포함)들. 대책도 없는 척화(斥和)를 애국인 양 앞세우던 고관대작들은 전후에 생쥐처럼 숨고, 고작 사지(청의 수도 심양)로 결박해 보낸 선비는 홍익한·오달제·윤집의 삼학사뿐이었다. 선비 혼뿐만이 아니라 민족혼마저 판 당시 위정자를 향한 고발과 풍자는 비수처럼 날카롭다.
제4수
種蠡誠爲卑(종려성위비) 종려는 진실로 비천하게 되었지만,
今人何可及(금인하가급) 오늘의 누가 어찌 그들에 미치랴.
覆吳有定謀(복오유정모) 오나라 엎을 꾀 정해진 것은,
所以甘臣妾(소이감신첩) 신첩의 치욕을 감수한 때문일세.
제재(題材)는 감신첩(甘臣妾)이다. 이 시는 오월(吳越) 간의 흥망성쇠를 소재로 하여 패전국의 월왕이‘감신첩’의 굴욕적인 항복을 할 때, 신하였던 문종(文種)과 범려(范蠡)는 일시 왕과 더불어 비천하게 되었지만 월왕의 복수 대의를 도와 문종은 정사(政事)를 맡고 범려는 병사(兵事)를 맡아 쓸개를 맛보는(상담·嘗膽) 구천으로 하여금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게 한 고사를 국포는 인용하여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였다. 임란에는 섬 오랑캐에게 굴욕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 정묘호란(1627)에는 오랑캐로 얕보던 후금(뒤의 청국)과 형제맹약을 맺고 다시 병자호란(1636)에는 군신맹약의 치욕을 당할 때까지,‘감신첩(甘臣妾)’의 역사적 교훈을 못 살린 위정자를 향한 질타는 인유(引喩) 속에 넘치도록 담아놓았다. 복수 대의를 입으로만 왼 나머지 근 1세기가 지나도록 조선은 청의 지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도 못했음을 시인은 통탄하였던 것이다.
제5수
桐翁不愧生(동옹불괴생) 동옹은 부끄럽게 살지를 않아,
百世永爲敎(백세영위교) 백세토록 길이 교훈이 되었네.
聞道石室人(문도석실인) 도(道)를 들은 석실인은,
高步坐廊廟(고보좌랑묘) 높이 대신의 자리에 앉았네.
제재(題材)는 동계 정온(1569~1641)과 석실산인 김상헌(1570~
1652)의 절의다. 동계는 병자호란에 척화에 앞장섰다가 왕이 항복하자 통분하여 칼로 자결하였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으며, 석실산인은 척화신으로 심양에 잡혀가 청태종에게 심문을 받았으나 조선 대신의 의연한 기상을 보여 국위를 선양한 충신들이다. 백세에 산 교훈으로 남은 두 청절인을 거울로 내걸어 입으로만 충성하는 가인(假人)의 무리를 만천하에 폭로시키었다.
제6수
大野荒壇在(대야황단재) 너른 벌판에 거친 단(壇) 있어,
當時虞帳高(당시우장고) 당시엔 오랑캐 장막 높았었지.
狼藉銅盤血(낭자동반혈) 구리쟁반엔 낭자한 혈맹의 피,
東人無寸刀(동인무촌도) 동인은 자결할 촌도(寸刀)조차 지닌 이 없었네.
제재(題材)는 군신혈맹(君臣血盟)이다. 왕이 오랑캐의 왕에게 신하가 되리란 혈맹을 맺는데도, 척화(斥和)·애국(愛國)을 무기처럼 휘두르던 신하 가운데 왕의 철천지 한을 대신해 활복한 자 한 사람도 없었음을 고발 비판하였다. 시어(詩語) 밖에 무한히 펼쳐놓은 지사(志士)의 엄중한 나무람은 길이 독자의 가슴으로 전이되어 새 생명을 얻는다.
제7수
芻糧與戰具(추량여전구) 꼴과 군량과 전쟁 도구,
措置非徒爲(조치비도이) 조치함이 헛되어선 안 되리.
所司須努力(소사수노력) 맡은 부서는 모름지기 노력하여,
緩急戒前時(완급계전시) 완급을 헤아려 앞날을 경계해야 하리.
제재(題材)는 군비(軍備)다. 말먹이와 군량과 무기를 잘 갖추었더라면 한겨울의 전투에서 그리도 허무하게 항복하지는 않았으리란 비판이다. 적군은 20만인데 산성의 군사는 만 삼천 명, 비축 군량은 절약해도 50일을 넘길 수 없는 실정이었다.‘있는 것이 없는 것만도 못한’군비는, 처음부터 망국을 자초한 위정의 부재(不在)였음을 고발하고 비판하였다. 시인의 울분한 육성은 도리어 심연(深淵)의 조용한 물살같다.
제8수
落日西將臺(낙일서장대) 해는 서장대로 지는데,
沈歌意不極(침가의불극) 심한 노래로도 뜻을 다할 수 없네.
荒雲入古城(황운입고성) 황량한 구름은 옛 성으로 들고,
飢鶻登寒木(기골등한목) 주린 매는 겨울나무로 오르네.
제재(題材)는 탄가(歎歌)다. 어떤 심한 노래로도 가슴에 맺히는 울분을 다 풀 수는 없다. 옛 성으로 드는‘황량한 구름’은 곧‘영원히 흩어지지 않을 원혼(怨魂)의 그림자’요, 겨울나무에 오르는‘주린 매’는 현실에서조차 만족할 수 없는 장한가(長恨歌)의 주인공인 작자 자신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남한전 8절(南漢前八絶)> 시는, 기(起, 1·2수)·승(承, 3·4수)·전(轉, 5·6수)·결(結, 7·8수)의 구성을 취한 시로, 18세기 중엽을 살다간 지사(志士)요 시인(詩人)이었던 국포 강박이 읊은 감계시(鑑戒詩)로서 조선인의 정언(正言)으로 길이 남을 명시의 한 편이라 하겠다. 강박의 우국충정은, <남한산성시>로 승화되어 시공을 초월하여 늘 새 생명으로 살아 가리라.
* 각주는 다음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람
상주를 빛낸 사람들Ⅳ 상주의 인물 |
발행일 : 2015년 12월 일 발행처 : 상주문화원 발행인 : 원장 김철수 인 쇄 : 한 일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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