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지학으로 일관한 선비 정와(靜窩) 조석철(趙錫喆)
금 중 현
정와(靜窩) 조석철(趙錫哲, 1724⋅경종 4 ~ 1799⋅정조 23, 향년 76세)은, 상주 장천골 출신으로 평생을 올곧게 산 선비였다. 이분의 학문은 평생토록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중한다는 성리학(性理學)의 핵심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경(敬)”을 이루고자 많은 공부를 하였다. 이를 위하여는 먼저 고요하게 침잠하는 정(靜)을 필수로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주정(主靜)이라는 두 글자를 취하여 조그마한 초옥(草屋)에 주정와(主靜窩)라는 편액을 달고 그곳에서 예전 성현들의 도학을 공부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특별히 ‘정와(靜窩)’라고 하는 의미에 대한 정와기(靜窩記)를 남겼는데 이 기문의 일부를 옮겨보면,
나는 사천(思泉) 마을 옛집 뒤 우당(友堂) 곁에 3칸 집을 지어 서식(捿息)하는 곳으로 하고 그 처마 밑에 정와라는, 편액 이름을 달았다. 그 이름은 마을에서도 아주 조용하고 궁벽한 정벽처(靜僻處)로서 내 성품 또한 조용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중략..... 고요하게 마음을 가다듬어 공경스런 마음으로 글 공부를 한다 ......중략...... 마음에 부족하나마 굴와(窩)자로 편액한 것은 늘상 눈으로 보면서 성찰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내 스스로 기록하였다.
라고 하여, 평생토록 주정와(主靜窩)로 심오한 경(敬)의 학문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자경(自警)으로 삼고 그 정와(靜窩)를 자호(自號)로 하였다. 생각컨대 고요한 정(靜)은 마음을 비우는 정허(靜虛)로 이어져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오로지 성찰하고 성정(性情)을 온전하게 수양하고자 하는 깊은 의지의 일면이었으리라. 이와 아울러 정와공이 평생토록 주경(主敬)공부로 일관한 정와사상의 총체적 산물이라 할 수 있는 “主敬詩(주경시)”에 이르기를,
嘗見先儒說(상견선유설) 일찍이 예전 선비의 말씀을 들었는데
爲學有綱領(위학유강령) 학문에도 강령이 있다 하셨네
綱領果何謂(강령과하위) 대강의 요령이란 과연 무었인가
不出一個敬(불출일개경) 한낱 공경을 벗어남 아닐세
敬是心主宰(경시심주제) 경은 곧 마음이 주제하여
通貫動與靜(통관동여정) 움직임과 조용함이 다 통하네
人能存得此(인능존덕차) 사람이 능히 이 경을 지나면
一心明如鏡(일심명여경) 한 마음의 밝기가 거울 같아서
湛然天理昭(담연천리소) 맑고 깨끗하게 천리는 밝고
百邪自退聽(백사자퇴청) 온갖 사악함이 저절로 물러나리
......중략......
若用敬字工(약용경자공) 만약에 경 공부를 하려면
嚴肅與齊整(엄숙여제정) 엄숙히 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일이요
...... 하략......
라고, 하였으니 정와공의 주경 공부는 곧 선비의 도를 실천하는 기본 덕목으로서 자기 스스로의 내성
공부(內省工夫)가 어느 경지였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공은 임진왜란에 의병을 창도하고 당대 상주 향내의 사론(士論)을 주도하였던 검간 조정(趙靖)의 6세손이고 통덕랑을 지낸 소헌(疎軒) 조혜(趙瀣)가 공의 조부이다. 아버지는 선경(善經)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인데 아버지는 정와가 4세일 때 여의고 말았다. 정와공의 어머니는 자녀들이 과부집 아들로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자애로움에 빠질까 하여, 작은 잘못이 있어도 용납하지 않고, 혹 시키는 일이 늦으면 조반(朝飯)을 주지 않았을 만큼 엄격하게 가르쳤다. 이와같이 엄격한 가르침으로 모든 일에 잘못이 없도록 유념하였고 어머니의 엄격하면서도 순하고 착한 깨우침으로 거역하거나 시키는 일에 거스르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無或違忤事) 감히 교만하거나 태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은 자라면서 공의 백부 중애(中厓) 시경(時經) 공으로부터 아버지와 같은 훈도를 받아 이미 5, 6세에 글 배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약관이후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담아 경전을 심오하게 탐색하면서 공의 4촌 형 존성재(存省齋) 석우(錫愚) 공과 함께 별도로 마련된 공부방 유예재(游藝齋)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더욱 힘써 매진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日夜講誦於游藝齋中有征邁資益之樂) 이때 중애공의 명으로 당대 영남의 문형(文衡)으로 이름하던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문하(門下)에 들어 뜻하는바 오로지 깊은 학문의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29세에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成均館)에 진학하여 한결같이 단정하고 진중하게 처신하니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그러나 “학교는 예의도덕이 먼저 앞서야 하는데도 이 질서가 무너져 오히려 진학할 까닭이 아니라” 라고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건대, 정와공이 성균관에 진학할 때는 더 큰 학문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포부를 가졌으나 성균관에 들어온 학생 중에는 일부 세도가문 출신자들의 전횡이 있을 수도 있고 시변(市邊)과 접하여서 일부 난잡한 분위기였을 수도 있었거니와 무엇보다도 고요한 정(靜)을 위주로 하여 경(敬)의 도를 지켜 나가겠다는 평소의 신념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짐작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뒤 독학으로 거의 침식을 거를 정도로 절의진취(絶意進取)하여 유석지변(儒釋之辨), 기몽(記夢)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공은 평소 고을에 강학(講學)이 피폐하므로 하여 선비의 풍속이 부진(不振)한 것을 아쉬워 하면서 동지들을 일으켜 매월 초하룻날 면내 자제들을 모아 소학(小學)을 가르쳤으며 도남⋅속수서원에서 때때로 사서(四書)를 강론(講論)하여 후학(後學)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에따라 인륜도덕의 진작과 조상을 섬기는 추원(追遠)의 정성을 돈독하게 하는 등 고을에 미풍양속이 일신되었다고 한다. 고전에 이르기를 “성어중(誠於中)이면 형어외(形於外)라” 고, 하듯이 이와같은 교화(敎化)는 모두 정와 공의 참된 선비적 내면이 행의에 나타나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본보기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정와 공은 권상일, 이상정, 류심춘, 이승연, 정종로, 남한조, 조목수, 금영택 등 당대에 영남을 선도하는 여러 선비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와같은 현사들과의 유유상종으로 폭넓은 교류는 공의 덕망과 행의가 어떠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와공이 세상을 떠나고도 수많은 현사들이 애석해 하는 만사(輓詞)를 남겼는데 그 중에 한분으로 필자의 7대조 만우재(晩偶齋) 부군(府君)의 만사를 여기에 옮겨 글쓰는 뜻으로 삼고자 한다.
輓 趙靜窩丈(만 조정와장) 晩偶齋 琴英澤(만우재 금영택)
商山應鳳洛應龜(상산응봉낙응귀) 상산 고을엔 봉황을 품고 낙동강에 신귀(神龜) 있어
文理成章瑞世奇(문리성장서세기) 문리와 글 짖는 실력은 세상을 상서롭게 하였네
聲価已高登頖日(성가이고등반일) 명성(名聲)은 이미 높아 頖宮에 올랐지만
工夫不待列科時(공부불대열과시) 공부는 벼슬하는 과거공부가 아니었다
長川十里烟霞主(장천십리연하주) 장천 십리 고을에 煙霞의 주인이었고
大嶺千年禮法師(대령천년예법사) 조령이남땅 오랜역사에 예법의 스승이셨도다
嗟爾後生安仰慟(차이후생안앙통) 아 우리 후생들은 어디를 바라보고 슬프할고
讀其書又訟其詩(독기서우송기시) 정와 선생의 글을 읽고 또 그 시를 외우노라
입재 정종로(鄭宗魯)는 정와공의 묘지명에 이르기를 “청대 권선생이 영남 우도에 바른 학문을 일으켜 이 지방의 종사(宗師)로 삼아 교유하였으니 그 문도가 많았으나 정와 조공은 그 심법의 전함을 얻어서 복응(服膺)하였다. 나 또한 청대의 뜻을 이어가는 조공을 여러 번 보았다.” 라고 하여, 정와공의 인물됨을 칭송하였다.
어느 시대나 그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있었기에 그 사회가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지도자가 먼저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학문을 닦고 덕행을 길러 남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이 진리일진데 정와 조석철 공이야 말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하고 사회의 지랫대로 봉사한 참 선비로서 상주가 배출한 인격자라 할 만하다.
참고문헌
1. <靜窩文集>, 7세 冑孫 趙誠虎씨 소장.
2. 權泰乙 저, <尙州의 漢文學>, 2001년, 상주문화원 간행.
3. <尙州市史>, 인물편, 2010. 상주시 간행.
4. <雄州典故>, 1998년, 博約會 상주지회 간행.
5. 김자상 해역, <商山誌>, 1984년.
* 각주는 다음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람
상주를 빛낸 사람들Ⅳ 상주의 인물 |
발행일 : 2015년 12월 일 발행처 : 상주문화원 발행인 : 원장 김철수 인 쇄 : 한 일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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