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尙州) <무신(戊申) 창의록(倡義錄)>소고(小考)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1. 들어가며
조선시대 국가 변란에 대처하는 상주인들의 의병활동은 임진왜란 때 창의군(倡義軍), 상의군(尙義軍), 충보군(忠報軍) 등 외침(外侵)에 대한 실전(實戰)사실 기록이 전하고, 국내 반란에 대하여는 인조 년간(인조 2, 1624)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창석 이준(李埈)을 중심으로 하는 상주사림(士林)들의 창의록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영조 년간의 무신난은 정치적으로 왕권을 정복하고자 하는 전국 규모의 반란 사건으로 영 · 정조 이후 조선 말기에까지 정치적 파장을 크게 일으킨 정변으로서 상주 사림들이 이에 대처하는 창의 기록이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이다. 이와 같은 창의 사실기록(史實記錄)은 국난극복(國難克服)을 위한 상주인들의 의지(意志)요, 충성심의 발로(發露)라는 점에서 지역의 중요한 사료(史料)라고 할 수 있다.
영조시대 무신 창의 사실은 임진왜란 때 왜병과의 처절했던 전투 사실에 비하여는 그 규모나 실제성이 부족하다 하겠으나 이 또한 상주지역 주요 인물들이 모두 규합하였고 당시에 경상도를 통할하는 소모사(召慕使)가 상주 출신인 황익재(黃翼再)였으므로 하여 그 활동의 내용이 더 돈독하고 활발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본고는 보전(保全)하고 있는 기록에 따라 당시에 참여한 인물과 조직 그리고 활동한 일기(日記)와 소모절목(召募節目) 및 군령(軍令)과 사후 기록 등에 대한 내용을 살펴 국난에 대처 하였던 선인들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2. 상주 무신 창의록의 보전경위
영조시대 상주 무신 창의록은 “영묘무신창의록(英廟戊申倡義錄)”이라는 제목으로 “만력 임진 5월 일 창의록(萬歷 壬辰 五月 日 倡義錄)”과 “천계 4년 갑자 창의록(天啓 四年 甲子 倡義錄) 등 3편의 창의록 중에 한편으로서 시대 순서에 따라 제일 끝 편에 수록되었다. 3편의 책 편 모두는 99페이지로 한문 해서(楷書)체로 정갈한 같은 글씨로 작성한 책 본이나 책 이름이 없다.
첫 번째 만력 임진 5월 일 창의록은 “의병대장 진사 김각(義兵大將 進士 金覺)”을 필두(筆頭)로 하여 임진왜란시 의병장 석천(石川) 김각(金覺) 휘하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월간(月澗) 이전(李㙉), 창석(蒼石) 이준(李埈), 우곡(愚谷) 송량(宋亮) 등 소모관(召募官)을 위시하여 장서(掌書), 영병(領兵), 좌막(佐幕)의 좌목(座目: 명단)을 수록하고, 이어서 임진 12월 19일 보은 마래진(馬來陣)에 좌위대장(左衛大將)으로 상의장(尙儀將) 김각(金覺) 휘하로 상주목사 김해(金澥), 충보의장(忠報義將) 김홍민(金弘敏), 선산부사(善山府使) 정경달(丁景達), 조전장(助戰將), 선의문(宣義問) 상주판관 정기룡(鄭起龍), 보은현감 구유근(具惟謹), 창의장(倡義將) 이봉(李逢), 충의장 이명백(李命百), 숭의장(崇義將) 노경임(盧敬任) 등의 좌목과 우위대장(右衛大將)으로 영의장(永義將) 영동현감 한명윤(韓明允) 휘하에 황의장(黃義將) 박이룡(朴以龍), 회의장(懷義將) 강절(姜節), 청의장(靑義將) 남충원(南忠元), 진잠현감(鎭岑縣監) 남경성(南景誠), 황간현감 박몽열(朴夢說)의 좌목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사천진(泗川陣)에는 진주판관 김시민(金時敏), 전병사(前兵使) 조대곤(曺大坤), 사천현감 정득열(鄭得悅) 의병대장 김각(金覺) 등 모두 58원(員)으로 구성되었다. 좌목의 말미에는,
“屢經兵燹 錄本無傳故 謹依上疏 中所載及 諸集中 在見者 略略 備錄覽者詳之(루경병선 록본무전고 근의상소 중소재급 제집중 재견자 약약 비록람자상지)
여러 번 임진왜란의 병화를 겪으면서 의병의 창의록을 엮은 기본된 기록을 전하는 것이 없으므로 조심스럽게 상소문에 수록된 내용(석천 김각의 상소문을 지칭함)과 기타 여러 문집에 실려 있는 것을 간략하게 갖추어 기록한 것이니 보는 이들은 상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면 그 기록들을 보라”
라고 하는, 설명을 부기하였다. 이어서 석천(石川) 김각(金覺)의 상소문과 격도내제진문(檄道內諸陣文), 순찰사계목(巡察使啓目), 하경상도내사민교서(下慶尙道內士民敎書) 등 임진왜란과 관련된 중요 기록을 싣고 이어서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임진왜란 일기 중에 의병창의에 관한 기록을 발췌하여 수록하였으며 ‘부 우복선생모량격(附 愚伏先生募粮檄)’이라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임진왜란 당시 소모관(召募官)으로서 군량미를 모으기 위한 격문을 수록하였다.
천계 4년 갑자 창의록은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의승대장 전 사인 이준(義勝大將前舍人李埈)을 비롯한 고인계(高仁繼), 남진휘(南振輝), 김지복(金知復), 조광벽(趙光壁) 등 상주 사림(士林) 189원(員)의 좌목과 이괄의 난 의병 창의에 관한 주요 기록들을 수록하였다. 이어서 본고의 주제인 영조 무신 창의록에 대한 제기록(諸記錄)을 수록하였다. 전체적으로 3편은 모두 상주 향민들이 국가 변란이 일어났을 때 분연히 일어나 대처한 ‘창의사실(倡義史實)’ 기록이라는 점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앞의 임진왜란 창의 기록 말미에 부기(附記)한 바와 같이 3편의 내용은 관련된 문집에 실린 것 중에 중요한 기록을 발췌하여 필사하여 엮은 것으로 언제 누가 작성 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밝힌 바 없다.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외남면 흔평리에 거주하는 김홍준(金泓俊)씨로 책본의 끝장에 소유자임을 자필로 적어 놓았는데 소장하고 있는 경위를 잘 모르고, 다만 윗대로부터 내려온 장서(藏書)라고 할 뿐이다. 필자가 알기에 소장자 김홍준씨는 외남의 석천(石川) 김각(金覺) 선생의 자손으로서 대대로 문필(文筆)이 이어진 가문으로 알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기록들을 작성한 사람은 석천 가문(家門)의 누구인가로 짐작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석천 선생은 임진왜란에 상주지역에 창의를 주도한 인물로서 이에 관한 공적(功績)의 기록이『석천문집』과 기타 관련된 사림들의 문집에 많이 남아있고, 석천 가문으로서는 조상의 충성스런 행적에 대한 정신을 이어 가고자 하는 사명으로 알고 그 정신이 이어져서 이괄의 난이나 영조 무신난 창의 좌목에 석천의 자손들이 참여 하였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짐작하기 때문이다.
영묘 무신 창의록(英廟 戊申 倡義錄)에 대한 사실(史實)은 당시 의승대장이었던 남암(南巖) 손경석(孫景錫)의 문집에 비교적 상세하게 수록되었다. 손경석(1669, 헌종 10~1732, 영조 8)의 자는 중만백(仲萬百)이요, 남암(南巖)은 그의 호이다. 남암공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광해군 년간의 진사(進士) 손당(孫糖)이 공의 조부인데, 당대 상주 남촌(南村: 청리, 공성, 외남 일원의 별칭)에서 문명(文名)을 얻은 복재(復齋) 정국성(鄭國成)의 사위가 되어 상주 율리(栗里)로 이주하여 터를 잡아 이른바 들마 경주손씨의 문호를 열게되었다. 남암의 아버지는 사헌부 장령과 나주목사와 경주부윤을 역임한 야촌(野村) 손만웅(孫萬雄)이다.
남암공은 병자년(丙子, 1696)에 문과에 올라 통훈대부 종부관시(宗簿館寺) 춘추편수관(春秋編修官)을 역임하다가 무신란 창의 유공(有功)으로 능주(綾州)목사를 역임하였다. 남암공의 문집으로는 자손들이 엮은「상주창의록(尙州倡義錄)」,「무신창의임원록(戊申倡義任員錄)」,「의승대장사적(義勝大將事蹟)」,「모집내역(募集內譯)」,「무신일기(戊申日記)」등 무신난과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들이 수록되었다. 따라서 김홍준씨가 소장하고 있는 3편의 창의록 중에 본고에서 거론하는 영조 시대 상주 무신 창의록의 출전(出典)은 남암 손경석의 유사(遺事) 문집 중에 몇 가지 중요사항을 발췌한 것으로 밝혀졌다.
3. 영조시대 무신난 개략(槪略)
무신란은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전란(戰亂)으로 일명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한다. 1565년(명종 20) 사림파의 집권 이후 정계를 주도했던 영남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을 계기로 하여 점차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기호지방의 서인(西人)이 주축이 된 인조 반정은 60여 년 동안 중앙 정계를 지배했던 영남의 정치세력을 재야로 몰아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후 전개되는 조선시대 정치사와 관련하여 엄청난 파장을 몰고온 정치적 사건이었다.
영남 세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남인(南人) 정치권은 17세기 중. 후반 내내 전개되는 서인과 남인의 격렬한 정치적 사상적 대립과 잦은 환국(換局)과정에서 근기(近畿) 남인과의 제휴를 통해서만 가까스로 그들의 정치적 색깔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정치적, 학문적 쇠퇴 양상이 크게 두드려 졌다. 영남과 근기 남인을 모두 아우르는 범 남인계 정치 세력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을 계기로 하여 철퇴를 맞았다. 이 정변은 영남의 남인뿐만 아니라 근기 남인도 정치적 주변부 세력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전 왕대에 이와같은 정치적 환경에 이어서 경종(景宗)이 즉위하였으나 노론세력은 즉위 초부터 경종의 건강을 구실로 삼아 연잉군(영조의 즉위 전 군호)을 왕세자로 삼고, 경종 이후의 정치 체제를 구상하였다. 이후 경종은 4년만에 급사(急死)하게 되어 영조 임금이 즉위하였으니 그 후원 세력은 노론 정파가 주도 하였다. 영조는 본래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의 아들로 혈통으로는 왕위에 오르기 어려운 위치였지만 거대한 노론 벽파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집권을 하고도 자기의 신분에 대한 자괴감(自塊感)은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무신란의 직접적 동기는 경종의 사인(死因) 문제였다. 무신란을 일으킨 중심인물이었던 이인좌는 난의 명분으로 경종 독살설을 내세우고, 그 배후에 영조와 그를 지원하는 노론 정파를 지목하였다. 그리고 영조의 출신 성분에 대하여도 부정적 시각으로 축출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반란 세력의 기저에 깔려있었다. 무엇보다도 전(前) 왕대에 있었던 당쟁으로 일련의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하여 집권한 노론 세력들에 대한 피해 의식이 팽배하므로 하여 영조 집권 초기에(영조 4년) 정변으로 권력을 잡고자 한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반란의 주도 세력은 충청도 청주를 중심으로 하는 이인좌 일파였지만 경기권 소론의 중요 인물들을 포섭하고, 오랫동안 정치적 진출이 막혀 있어 울분을 품고 있었던 영남을 포함한 남인 세력들과도 내통하였다. 또 이들은 노론 중심의 중앙 정치권력에 불만을 품고있던 지방 양반들이나 토호들과도 결탁하였고, 지방 부호들의 지원을 받던 토적들과도 연결을 지었다.
무신란은 난을 일으킨 1년 전(1927) 겨울부터 전국 각처에 괘서(대자보)를 통한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그것은 주로 경종 임금이 영조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과 노론 세력의 집권으로 소론은 전멸될 것이라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소문은 남도 전역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일부지역은 그것이 사실로 고착되기도 하였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 일당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삽시간에 청주 관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한편 경상도의 정희량은 이인좌의 동생이었던 이웅좌와 함께 그의 세력 근거지였던 안음에서 같은 해 3월 20일 거병(擧兵)하여 당일에 안음과 거창을 함락하고, 몇일 동안 합천, 삼가를 점령하였다. 호남지역에는 유언비어가 가장 무성하였고 모의 참가자도 많아 분위기가 성숙되었으나 거사는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일부 가담자가 동참을 거부하므로 규합하였던 군사들이 흩어지고, 가담자들이 도주하였기 때문이다.
이인좌 중심 반란군은 용인까지 진격하였고, 안성과 죽산으로 향하기에 이르렀다. 경상도 반란군은 3월 28일, 함양으로 들어가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길이 봉쇄되어 실패하기에 이른다.
조정에서는 개성 등 북쪽의 백성들을 동원한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하고, 오명항(吳命恒)을 4도(道) 도순무사(都巡撫使)로 하여 토벌군을 출정시켰다. 이때 경상도에는 박사수(朴師洙)를 안무사(按撫使)로 임명하였고, 소모사(召募使)로는 상주 출신 황익재(黃翼再)를 명하였다. 조정의 진압군 출동으로 선두에 섰던 이인좌 일당은 궤멸되었고, 이인좌는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경상도 반군은 거창 등지에서 각 고을의 관군에 의하여 격파되었고, 주모자 정희량(鄭希良) 등은 부하들에게 결박되어 관군에 넘겨져 처형되었으며,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밀풍군(密豊君)은 채포되어 국문을 받고, 다음 해에 사사(賜死)되었다. 무신란은 일개 정파의 장기 집권때문에 소외된 계층이나 집단이 많았음을 뜻하고, 경종으로부터 정조로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종통으로 파생된 처사들이 전국적인 저항을 받고 이에 따른 문제점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전국적 규모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고, 그 파장은 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래 계속되었다.
무신란을 진압하는 데는 소론이 앞장섰으나 난을 일으킨 집단이 소론 일부세력이라는 것으로 하여 대접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남의 남인 또한 황익재가 소모사로 진압에 유공하고도 오히려 핍박을 당하기도 하였다가 정조때에 와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특별히 무신란으로 인하여 영남지역에는 유독 정치적 압력을 가하여 영남을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이후 영남 세력의 중앙 정계 진출을 철저히 봉쇄하였다. 영조 임금과 노론은 무신란을 진압한 뒤 경상감영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웠을 정도였으니 집권세력이 영남을 보는 시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4. 무신난과 소모사 황익재
황익재가 소모사로 임명된 사실은 영남 안무사로 명을 받은 박사수(朴師洙)의 추천에 따라 임명되었다. 이와 관련된 실록(實錄)에 의하면,
“영남 안무사 박사수가 길에서 상경하는 상주사람 종성부사(鍾城府使) 황익재를 만나 장계하기를 “황익재는 재능이 있으니 청컨대 그와 함께 가겠습니다.” 하니 소모사로 차출하여 따라 가라고 명하였다. …… (이하생략) ……”
라고, 하였고 이후 무신난 관련자 처벌 당시 주모자 이인좌에 대한 친국(親鞫)에서도 황익재 소모사가 거명되었는데 그 요지를 여기에 옮긴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임하여 친국 하였다. 이인좌를 형신하니 이인좌가 공초하기를, ……전략…… 김홍수(金弘壽)는 상주에 사는데, 군사의 숫자는 군사를 동원하기 전에는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무려 1천 여 명은 됩니다. 당초에 기일을 3월 초 10일로 기약했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중략)…… 황익재와 김홍수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여서 김홍수는 말하기를 “마땅히 함께 일을 할 듯 하다 하였는데 신은 단지 김홍수의 말만들었지 황익재의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 (이하생략) ……”
라고, 하였으니 김홍수는 난을 일으킨 이인좌를 도운 사람으로 드러났고, 황익재 소모사에 대하여는 김홍수와의 관계를 아주 모호한 말로 진술하므로 황익재가 반란군 선상에 있던 인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황익재 소모사는 난을 평정하는데 유공하고도 오랜 기간 신원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황익재 소모사에 대한 실록은 이어진다.
“영천 사람 전 참의 나학천, 전 장령 김정, 전 군수 장후상 등이 풍기 순흥 등 지방의 사인과 더불어 바야흐로 의병을 선창하여 일으키고, 호소사 조덕린도 또한 안동에서 조사(朝士) 유생 일백 여 인을 모아 의병을 선창하여 일으켜서, 전 정랑 유성현을 의병장으로 삼고 정자 권만 등이 이를 도와 이제 바야흐로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모아 앞으로 적진 근처로 가서 관군을 돕고자 하며 소모사 황익재를 다시 바야흐로 상주 등 지방으로 보내어 하도로 향하여서 사민을 초유(招諭)케 하였습니다.”.
이어서 경상도 감사 박문수가 영조 임금을 인견(引見)하였을 때 보고한 내용 중에도 황익재에 대한 사실이 있다.
“임금이 경상감사를 인견하였다. 박문수가 말하였다. “류몽서(柳夢瑞), 권덕수(權德秀)는 분명하지 않는 가운데에 있으므로 안동 사람들이 다 보러 가지않고 황익재(黃翼再)․권만(權萬)은 이제까지도 대죄(待罪)하여 방황한다하니 의심스러우면 죽이고, 의심스럽지 않으면 의심하지 않는 뜻을 시원히 보여야 하겠습니다. 연좌된 사람들은 다 연변(沿邊)에 두었는데 이것은 가장 염려스러우니, 점차 평민으로 만들어 신실(信實)한 고을로 옮겨두고, 수령(守令)이 검찰(檢察)하게 해야겠습니다.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치하시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다 좋으니 내가 깊이 생각하여 처치하겠다.”
라고, 하였다.
박문수(朴文秀) 감사가 영조임금에게 보고한 이 날은 난이 일어나고 황익재가 소모사로 임명된지 불과 4개월 여의 일인데, 보고한 내용은 참으로 추상같은 형벌을 주문(奏問)한 것이다.
난을 평정하는 소모사에 임명되었으면서도 관청으로부터는 오히려 난을 일으킨 세력과 영합한 것으로 상당한 의혹을 받고 있다는 것이고, 의심스러운 정도만 있더라도 죽여 버리거나 영남지역이 아닌 집권 세력의 확고한 정치 환경의 고을로 귀양을 보내서 점차 평민(平民)으로 신분을 격하시켜 감시토록 해야 한다는 것은 황익재 소모사에게 치명적이고, 가혹한 내용이다. 그리고 당시에 상주, 안동 등 영남지역의 정치 환경은 전반적으로 집권세력에 부정하는 세력이 상당히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다.
황익재 소모사는 무신난 평정에 공식적으로는 유공이 있다 하겠으나 영조 년간 내내 이런 저런 일로 인하여 어려운 고난을 겪었고 정조 년간 후반기에 와서 비로소 누명을 벗었다. 황익재에 대한『정조실록』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상주 유학 황태희(黃泰熙)가 격쟁(擊錚)하고 원정(原情)하여 말하기를, 저의 증조 황익재는 일찍이 무신년의 난리에 피눈물을 뿌리며 의병을 일으켜 원종공훈에 기록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경술년(1730, 영조 6)에 흉적 박도창의 종 만익(萬益)의 공초에 ‘그가 처모(妻母)와 박도창을 도모할 때에, 광주 세교에서 황순천(黃順天)이 자리에 있다가 들었다’고 하였습니다만 전함(前啣)이 우연히 같은 이유로서 비록 잡혀가 심문받기에 이르렀으나, 상주에서 광주(廣州)까지는 거리가 아주 멀뿐만 아니라, 또 박도창이 독살된 날은 곧 증조가 상주에서 출발한 날입니다. 3월 20일 영외(嶺外)에서 출발한 사람이 어떻게 3월 20일 경옥(京獄)에서 독약을 넣는 음모에 가담할 수 있겠습니까. 8월 초 5일에 무죄인 것이 드러나 향리로 돌아왔습니다.
그후 대계(臺啓)가 갑자기 나와서 잘못하여 만익의 공초를 옥정(玉貞)의 공초로 여겨 마침내 찬배(竄配)되기에 이르렀는데, 병진년(1736, 영조 12)에 특명으로 사유(赦宥)되어 돌아왔고, 무오년(1738, 영조 14)에는 또 서용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경오년(1750, 영조 26)의 사령(赦令)때에는 탕척(蕩滌)하는 명부의 첫머리에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무오년에는 석방된 지 얼마 아니되어 정지가 요청되었고, 경오년에는 타인의 환수(還收) 가운데에 혼입되어 성명(成命)이 중간에서 막혔습니다. 원컨대 자급(資級)과 직명(職名)을 특별히 추복(追復)을 허락하라고 하셨습니다. 황태희가 선조(先朝)의 수교(受敎)에 의하여 석방되었다는 공사(供辭)를 청컨대 재가(裁可)하소서.
라고, 하는 황태희의 상소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근래 제방(堤防)이 비록 없어졌다고는 하나, 일이 무신년⋅경술년의 옥안(獄案)에 관련이 있으면 그 원정(原情)이 설령 충분히 믿을만 하다 하더라도 법관(法官)된 자가 예에 따라 공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은 관계된 바가 어떠한가? 여러 해동안 감히 거론치 못하던 일을 오늘에 와서 굳이 제기하려 함은 과연 무슨 까닭인가? 금번의 격쟁을 모두 시행치 말기를 청하고, 예에 따라 공초를 받아 계문한 것은 다만 이 3건 뿐이요, 이 원정은 계문한 것 가운데 있으나 말단에 역시 한 마디 말이 없으니, 형조 당상의 뜻은 외람(猥濫)된 죄가 제방보다 더하다고 인정한 것인가? 그렇다면 조금전 연석(筵席)에서 판서(判書)가 거조(擧條 : 임금께 아뢰는 조항)를 내어 신칙하라는 말과 또 어찌 너무도 상반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부분들을 혹 평범히 본다면 앞날의 폐단은 장차 무신⋅을해⋅병신⋅정유의 역안(逆案)으로 하여금 서로 부동(符同)하고 차례로 끌어들여 격쟁⋅격고하게 한다면 그 지리(支離)함을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형조의 해당 당상관에게 모두 삭출(削黜)의 법을 시행하여 조정에 조금이라도 제방이 있음을 알게하라. 본 사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조와 의금부로 하여금 앞뒤 문서를 상고하고, 이어 또 대신(大臣)에게 문의 하여 의금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라는, 어명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황익재 소모사는 무신난이 있은 다음 해부터 무고를 당하여 이후 왕대가 바뀌어 57년이 지나기까지 혐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익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본고에서는 이 정도로 마치고 상세한 내용은 뒷날의 연구과제로 남긴다.
5. 상주 무신 창의록의 내용
상주 무신 창의록은 여러 편으로 편집되었다.
첫번째로 창의에 참가한 좌목(座目)이고, 다음에 창의일기, 소모절목과 군령(召募節目과 軍令), 보본주문장(報本州文狀), 의승대장보소모사서목(義勝大將報召募使書目), 소모사장계(召募使狀啓), 연설(筵說) 순으로 하였다. 항목별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英廟戊申倡義錄坐目(영묘무신창의록좌목)
창의에 참가한 명단으로 창의대장(大將)으로부터 중군(中軍), 참모(參謀), 소모관(召募官), 유사(有司), 장서(掌書), 군관(軍官), 관량(管粮), 전병(典兵), 모속유사(募粟有司), 모병유사(募兵有司), 소모관 각 면 검찰(各面檢察) 등으로 수록되었는데 그 구성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한다.
무신란 창의 합모자(合謨者) 주요 내용
구 분 | 직 임 | 담 당 | ||
수 임 급(首任級) | ||||
이 력 | 성 명 | 기타 회원 | ||
수뇌부 | 의승대장 (義勝大將) | 전군수 | 손경석(孫景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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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 원 | 이인지(李麟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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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정자 | 황 심(黃 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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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사 | 성덕징(成德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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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학 | 강석필(姜碩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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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모관 (召募官) | 전부솔 | 성이홍(成爾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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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사 | 이증엽(李增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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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정자 | 김 집(金 潗), 강 항(姜 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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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학 | 권 한(權 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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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사 (有司) | 유 학 | 이원저(李元著) 조인경(趙寅經), 송방준(宋邦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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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서(章書) | 진 사 | 조천경(趙天經) | 류후담(柳後惔)외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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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 원 | 황용하(黃龍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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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학 | 이제성(李齊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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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 (軍官) |
| 유 학 | 강만정(姜萬禎) | 신계종 (申繼宗)외4 |
관량 (管粮) |
| 유 학 | 이우성(李遇聖) | 송광복 (宋光馥) |
| 유 사 |
| 조대경(趙大經) | 김국채(金國采)외2 |
전병 (典兵) | 도총(都摠) | 유 학 | 조자수(趙自修) | 김창흠(金昌欽) |
| 부총(副摠) | 유 학 | 강만달(康萬達) | 조시경(趙時經)외 2 |
| 유 사 | 유 학 | 김시달(金時達) | 하대경(河大經)외 13 |
모속 (募粟) | 유사 : 외남, 청남, 청동, 내남, 공동, 공서, 장천, 외동, 중동, 단남, 단동, 내북, 외북, 산남, 산동, 영순, 은척, 외서, 내서, 화동, 화서, 모동, 모서, 내동, 중북, 산북 등 26개 면에 각각 2명씩 선임 | |||
모병 (募兵) | 유사 : 위 모속 유사와 같이 26개 각 면에 각각 2명씩 선임 | |||
소모관 | 각 면 검찰 내남, 외남, 청동, 청남, 공동, 공서, 6개 면 담당 : 정자(正字), 김집(金潗) · 내북, 외북, 영순, 산양 4개 면 담당 : 유학, 권한(權澣) · 내동, 외동, 중동, 장천 담당 : 정자 강항(姜杭) · 내서, 화령, 중모 담당 : 유학 송방준(宋邦俊) · 외서, 은척 담당 : 유학 이원저(李元著) · 단밀 담당 : 유학 조인경(趙寅經) |
참가한 인원 중 일부 겸직으로 중복된 경우도 있다.
살펴 보건데 165명의 면면들은 상주지역 전통 유가(儒家) 전 문중(全門中)을 망라하여 선발된 인원으로 구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노론 정권하에서 영남 남인 정치 세력의 주요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상주 또한 정치적으로 주시(主視)받고 있다는 것과, 상주 지역에서도 옥동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모황씨 주손인 황익재(黃翼再)가 영남 소모사로 명을 받은 만큼 어느 한 지역이나 가문이 이탈한다는 것은 장래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좌목의 머리에는 먼저 의승대장에 군수를 역임하였던 손경석(孫景錫)을 추대 하였고, 그 수뇌부 보좌진으로 중군(中軍)직에 이인지(李麟至), 참모(參謀)에는 황심(黃沈)과 성덕징(成德徵), 강석필(姜碩弼)이고, 소모관(召募官)에는 성이홍(成爾鴻)이 책임을 맡았다.
손경석은 청리면 율리에 집성(集姓) 문호(門戶)였던 야촌(野村) 손만웅(孫萬雄)의 아들이고 숙종 때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남인 출신자로서 관직에 나아가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목민관을 역임한 관력(官歷)이 있는 만큼 향내에서 원로급 현사(賢士)였을 것이다.
다음 중군(中軍) 직위는 대장 바로 밑에 부대장 격으로 이인지(李麟至)가 추대 되었는데 이공(李公)은 당시 상주 향촌에서 손꼽히는 유가로 천망하는 청리면 달내 마을 흥양 이씨 월간(月澗) 이전(李㙉)의 후예로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특별히 이공은 노론계 흥암서원에 배행된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고자 할 때(영조 12, 1736) 상주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계 유림 4,000여 명이 반대하는 상소의 소두로 활동할 만큼 골수 남인계열 지도자였다.
그 다음 참모직의 황심(黃沈, 1688~1765)은 소모사 황익재와 한 집안으로 옥동서원에 배향된 축옹(畜翁) 황효헌(黃孝獻, 1490~1532) 자손으로서 문과에 올라 정자(正字) 벼슬을 지낸 관력(官歷)을 가지고 있다.
성덕징(成德徵, 1675~1744)은 청죽(聽竹) 성람(成灠, 1556~
1620)의 현손(玄孫)으로 진사(進士)이고 문장과 덕행이 있는 현사였다. 강석필(姜碩弼, 1679~1755)은 상주 봉대(鳳坮) 진주 강씨의 일파인 공성면 소리(素里)에 집성을 이루고 있는 향반(鄕班) 현사였다.
소모관 직임(職任)의 성이홍(成爾鴻, 1691~1749)은 앞의 성덕징과 한 집안으로 부솔(副率)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우암 송시열의 문인(門人)이었던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었다. 수뇌부 인적 구성내용을 살펴보면 정치적으로 남인과 노론인사들을 조합하여 국난에 공동대처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모두 6사람 중에 남인계열이 4사람이고 성덕징, 성이홍은 우암 송시열로부터 권상하에 이르는 골수 노론 정파에 소속된 현사들이다. 남인이 우세한 상주의 정치 환경에서 이들 노론계 성씨(成氏) 일족이 편성되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동 시대에 도남서원(道南書院) 원장 또는 재임(齋任)을 역임 하였다는 것으로도 드러났다.
주지하다시피, 도남서원은 상주권 남인 계열의 수서원(首書院)으로 각종 정치적 현안에 관한 도회(道會)를 개최하는 등 골수 남인의 연수(淵藪)였는데, 무신란이 있은 후 3년이 지난 임자년(1732)에는 원장이 성덕징(成德徵)이고, 재임이 같은 집안의 성이호(成爾浩)였다. 이어서 을묘년(1734)에는 성이점(成爾漸)이 재임을 역임하였고, 정사년(1737) 봄에는 성이혼(成爾混)이 재임을 지낸 후 그 해 가을에는 다시 성덕징이 원장을 지냈으며, 정조 임금이 들어선 다음 해 무오년(1738)에는 성이한(成爾漢)이 원장을 역임하면서, 성이항(成爾沆), 성이혼(成爾混), 성이심(成爾沈) 등이 재임을 지냈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상으로 보아 대단히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모관 밑에 하임(下任)으로는 진사 이증엽과 정자(正字) 벼슬을 역임한 김집, 그리고 강항과 권한 모두 청리면의 달내, 봉대, 산북, 근암 등에 집성을 이룬 사대부 가문 출신이고, 소모관 유사와 장서, 군관 그리고 군량미를 관리하는 관량과 병사를 관리하는 전병 이하 모든 인물이 향내 각처에 기반을 둔 향반 출신 인물이었다. 군량미를 모집하는 모속 유사와 병사를 징집하는 모병 유사는 외남, 청남, 청동, 내남, 공동, 공서, 장천, 외동, 중동, 단남, 단동, 내북, 외북, 산남, 산동, 영순, 은척, 외서, 내서, 화동, 화서, 모동, 모서, 내동, 중북, 산북 등에 면 별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인력과 물자를 모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만큼 몇 개 면을 권역별로 나누어 6개 권역에 본부의 수뇌부 현사들을 검찰(檢察)로 임명하여 감시 감독 기능을 갖도록 하였다. 수록된 인물들 중에 특별하다고 사료되는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장서(掌書) 조천경(趙天經, 1695~1776)은 풍양 조씨 검간의 후예로 사림의 중망을 받았고, 그의 호에 따라『이안재문집(易安齋文集)』을 남긴바 있다. 이 외에 풍양 조씨 출신으로 조인경(趙寅經), 조대경(趙大經), 조자수(趙自修), 조시경(趙時經) 등 여러 인물이 있다. 장서(掌書)의 하임(下任)으로 유학(幼學) 이제성(李齊聖)은 상주 오대 전주 이씨(全州李氏) 출신으로 정조 대에 존애원 운영에 행공하였고, 군관(軍官) 하임 여태주(呂台周)는 화동면 관제 마을에 집성을 이룬 성산 여씨(星山呂氏) 대표적 인물이다. 청동면의 모속 유사 정주원(鄭冑源, 1686~1756)은 정 우복의 현손으로 장릉참봉을 역임하였고, 청리 율리에 살던 우복 가문이 현재까지 터를 잡아 살고있는 외서면 우산리로 세거(世居)를 옮긴 분이다.
외북면 모속유사 조시(趙偲, 1622~1671)는 백담 조우신의 증손이고, 우복과 창석 문인으로서 당대에 존경을 받았다.
외서면 모속유사 염필정(廉弼貞)은 출천의 효자 염행검(廉行儉, 1628~1703)의 자손이고, 단남면(丹南面)의 모병유사 하서룡(河瑞龍)은 식산 이만부의 문인으로 문명(文名)이 있던 인물이다.
특별히 무신 창의록 좌목 수뇌부의 참모직으로 수록된 전 정자(前正字) 황심(黃沈)에 대한 기록이 왕조실록에 수록되었는데, 그 내용을 여기에 옮겨 본다.
“조세추(曺世樞)를 신문하였다. 조세추는 이인좌의 표종제(表從弟)로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충주목사 김재로가 체포하여 취조한 다음 서울로 올려 보냈다. 한차례 형신(刑身)을 가하니 조세추가 공초하기를, ‘3월 7일에 광주를 떠나 출발했고, 10일에 문경으로 들어갔는데, 이인좌가 이미 6일에 충주 양성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안동의 권구, 권덕수 부자와 류몽서도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류몽서가 권덕수 있는 곳에서 이능좌의 집에 와서 권덕수의 말을 전했는데, 이것은 신이 직접 들었습니다. 예천의 이윤사, 상주의 김홍수, 중산(中山)의 황침(黃沈), 선산의 이도 형제와 오봉만이 들어갔다는 말은 이능좌에게 들었습니다.…… (이하생략) …… ”
라고, 하였는데 중산의 황심은 오늘의 모동면 중모의 옛 이름인 중산에 사는 황침(黃沈)으로서 김홍수와 함께 난에 가담하였다는 진술이 있다는 것은 난을 타도하기 위한 창의 좌목에 수록된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더구나 황심은 황익재 소모사와 중모의 황씨 가문 한 집안 사람인데 전후의 정황이 모호하기 이를데 없다. 그리고 조세추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황심은 강력한 처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인데, 이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나.「戊申倡義 日記(무신창의 일기)」
무신창의 일기는 무신년(1728) 4월 1일부터 4월 5일까지에 불과하다.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당시의 동향을 잘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인 만큼 그 내용을 풀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무신 3월 15일, 난을 일으킨 무리들이 갑자기 청주에서 일어나 병사 영장(兵使營將)을 살해하였다는 소문이 3월 19일 처음으로 상주에 알려져 지역의 인심이 도구(淘懼)하였다. 겨우 몇 일이 지나서 또 다시 들리는 소문에 적(賊) 한 부대가 안음(安陰)에서 일어나 거창(居昌) 좌수(座首)와 호장(戶長)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반란을 일으킨 적은 어느 때나 없지 않았다고 하나 뜻하지 않게 지금 우리 영남 안에 가까운 곳에서 이와 같은 난이 일어 났으니, 어찌 예의가 바르다는 영남으로 알겠는가? 이것이 흉얼(兇孼)의 변고 때문이 아닌가? 소모사 황익재(黃翼再)의 통유문(通諭文)이 안동에서 래도(來到)하였는데 그 내용이 창의(倡義) 의병(義兵)을 대기하여 난적에 대비하라는 뜻이었다.
통보를 받은 날 곧바로 앞에 기록한 바 있는 창의록 명단과 유생(儒生)들이 옥성서원에서 모여 회의한 내용을 관가(官家)에 보고서를 제출하여 이번 사태에 대처하는 창의지(倡義地)라는 사실을 알렸다. 제사(題辭)에 이르기를 난적들이 하대무지(何代無之)리오마는 어찌 오늘과 같은 변란을 일으켰는가? 백성으로서 우분지도(憂憤之道)를 지켜야 한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동지를 규합하여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여 성의를 다하며 성의를 다하여 적에게 당당히 맞서도록 하겠다는 것을 상주관아 순영(巡營)에 보고하였다.
상주향교의 유생과 부근의 유생(儒生) 또한 향교에 모여서 옥성서원에 회의를 한 내용과 같이 결의하였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옥성서원의 회원들이 모두 모여 상주향교에 갔다. 오후경에 황익재 소모사가 본주(本州 ※ 상주)에 와서 상주 의병 창의는 옥성서원에서 먼저 시작하여 도남서원과 흥암서원에 통문을 발송하여 상의한 고을이라는 것을 알렸다.
향중(鄕中) 회의를 마치고 성주(城主 ※상주목사)와 소모사를 찾아뵙고 창의군에 대한 제반사를 품의하였다. 어제 옥성서원에서 창의 의병 의거 계획을 발송한 바에 따라 흥암서원으로부터 동의하는 답통(答通)이 왔다. 답통 서류 내용을 잡록(雜錄)에 등서(謄書)하였다. 모여 있는 사람 모두 향청(鄕廳)으로 옮겨 다시 회의를 하였는데, 창의군 관계 협의 장소를 관아에서 하던 것을 관아와 가까운 향청으로 정하였다.
식후에 회의를 열어 창의군 의승대장(義勝大將)을 천거하였다. 물망에 오른 자는 수생원(首生員)으로 이인지이고, 그 다음에 군수를 역임한 손경석이며, 끝으로 진사 성덕징이었는데, 모여 있는 참석자들의 의견에 따라 정하였다. 이하 의병을 관리하는 임원들을 차출하였는데, 오늘 참석자들을 행공토록 하고, 오늘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는 개인별로 맡게 된 임무의 천거 사실을 통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각 면에 모병모속처(募兵募粟處)와 그에 따른 운영 요령을 공문으로 하달하였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소모사가 의병소에 와서 식사를 하고, 김산(金山, 김천)으로 갔다. 문경 분의소(奮義所)에 소모사가 김산으로 떠났다는 공문을 보냈다. 각 면별로 작성한 모병 모속 관계 공문을 소모관에게 직접 검찰을 받고 발송하였다.
각 학궁(學宮, 서원 또는 서당) 별로 군량미 모집계획을 할당하였다. 오후에는 본주(本州, 상주 관아)에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제사(題辭, 지시사항)가 왔다. 지례현감으로부터 병력과 물자 등 군비 배치상황에 대한 진장서목(鎭將書目)의 보고 공문이 왔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거창의 적진에 적 괴수 이능좌(李能佐)와 차장(次長) 정진유(鄭遵儒) 지휘장(指揮將) 나가(羅哥) 등 3인과, 이들과 함께 하는 당류(黨類) 10여 인을 참(斬, 죽임)하였고, 남은 차장과 지휘장 등 무리들 모두를 옥에 가두어 적 진영이 와해되었다고 한다.
본소(本所) 순무사로부터 지령이 왔다. 적 무리들이 와해되었으므로 의병소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관아 수령에게 지시를 받아서 저녁 때 쯤에 파좌(罷坐)하였다.
살펴 보건데 위의 5일간 창의일기로 보아 상주창의 의병은 한 번도 출동하지 않은 채 난을 일으킨 무리들이 파멸되었다. 창의를 주도한 지역은 상주 남촌(南村)의 옥성서원(玉城書院)이 주축이 되어 관가에 나아가 상주목사에게 향민의 의지를 보여주고, 관아와 가까운 향청을 창의병 본소로 정하였으며, 도남서원과 흥암서원에 창의에 동참해 줄 것을 청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이 발송 통문에 따라 흥암서원은 답통이 왔으나 도남서원은 답통 기록이 없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추리할 수 밖에 없다. 무신 창의는 노론 정권을 전복하고자 하는 소론과 일부 남인 정파를 진압하여 노론 정권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만큼, 노론 정파에 소속된 흥암서원은 즉각 참여 의사를 밝히는 통문이 온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도남서원의 경우는 골수 남인 계열의 서원으로서 이에 대한 동참 의식이 다소 저조한 것으로 추리할 수 있고,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무신난이 평정된 후에 수 년동안 흥암서원의 노론계 인사들이 도남서원 원무를 장악한 것으로 추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의 창의록 좌목에 수록된 인물들은 대부분 남인계열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니, 상주 향내 전역이 대부분 남인의 연수(淵藪)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숫자상으로 절대적 우위에 있다는 것으로 불가피 하였다고 본다. 아울러 정권적 차원에서의 창의에 참여하지 않았을 경우 후환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고 짐작이 된다. 뿐만 아니라 영남 소모사에 황익재가 상주의 남인계 중진이고, 창의 대장에 추대된 손경석과 수뇌부 이인지는 이른 바 존애원과 옥성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상주 남촌의 전통적 남인계 유가(儒家) 출신자 지도급 위치의 인물들이라는 것이 창의 의병 참여 명분과 분위기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召募節目(소모절목)」
창의병 모집과 운영에 관한 규정이다. 먼저 이 절목을 제정하게 된 기준은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 때에 창석(蒼石, 이준)이 의병장이었을 때 정하였던 규율조목을 기준으로 몇 가지를 참작하여 가감하였다고 수록한 후 다음과 같이 명정하였다.
1. 위 아래 신분에 구애없이 충군사심(忠軍死心)으로 하나 하나 이에 따라야 한다.
1. 의병으로 명을 받았을 경우 부모는 살아있고 형제가 없거나, 독신 또는 나이가 55세 이상인 자와, 삼년상 상중(喪中)에 있는 자는 노복(奴僕, 종)을 대신하여도 된다.
전투에 나아가서 혹여 대신으로 온 노비가 도망을 가는 사람이 있으면, 현실적으로 상전으로는 바꾸기 어렵다 할지라도 그 자손들은 군율에 따라 영원히 폐족으로 버림을 받게한다.
1. 나이가 어리고 연고가 없다고 하여 고집스럽게 응소하지 않은 자도 위 조항에 따른다.
1. 각 면의 소모도감은 소집자 명단을 작성하고 5명씩 군관(軍官)과 같은 분대를 편성하며 모속도감 또한 정한 기한까지 군량미를 모아 운반 납부하여야 한다.
1. 각 면내 혹 사사로이 조총이나 활과 화살 창검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을 경우는 일일이 찾아 모으고 유능한 포수와 궁사, 창검자는 별도로 명단을 작성하여 명령이 내려지면 곧바로 동원에 임하도록 한다.
1. 무릇 의병에 동원되는 자는 각각 조총이나 활, 창검 등을 지참하여 응소에 따라야 한다.
1. 갑자기 출동할 것에 대비하여 군복으로 입고 갈 옷으로 3~4자(尺) 정도되는 푸른 천을 걸어두고 출동시 양 어깨에 걸쳐야 한다. 흰옷은 입지 말아야 한다.
1. 취사 도구와 밥 그릇 등은 관군의 규례에 의하여야 한다.
1. 부근의 사찰에서는 깃발과 북, 꽹과리, 창과 같은 물건을 군대 행군 시에 차용토록 해야 한다.
1. 군량미를 운반하는 인마(人馬)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크고 작은 말을 가진 자는 각자 스스로 운반해 주어야 한다. 만약 혹시라도 있던 말을 숨겨둔 것이 발견되었을 경우는 마땅히 군율에 따라 징집한다.
1. 나라가 100여 년동안 평화스럽게 지내오므로 하여 백성들이 군법의 엄중함을 잘 모르고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도 군율에 따라 처벌한다. 군율을 모른다고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는다.
1. 향교의 서재생(西齋生) 생도의 소모도 동재(東齋)의 예에 의한다.
1. 모속을 맡은 사람은 위협적으로 하지 말고, 모병은 용맹이 있는 정예한 사람이라야 하니 만큼 불실한 사람을 모집하지 말아야 한다.
◦ 군령(君令) : 三令不從決棍五度(3령불종결곤5도), 五申不從依軍律(5신부중의군율) 위 절목 중에서 3가지를 위반할 시는 곤장 5도에 형벌을 가하고, 5가지를 위반할 시는 군율에 따라 처벌한다.
위 소모절목을 살펴보면 먼저 신분에 구애하지 않고, 모든 향민들이 규합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독신자, 노약자와 부모상 중에 있는 자에 대한 배려가 있기는 하나 그 대신 종(노비)을 대신 내 보내는데 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대신으로 징집된 종이 도망을 갔을 경우는 폐족으로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은 신분 사회였던 그 당시 사회계층에 양반으로서는 너무 가혹한 규율이었다고 여겨진다.
향교의 서재 생도도 동재의 예에 따라야 한다고 명정된 바 대개 향교의 동․서재는 생도들이 숙박하는 오늘날의 학교 기숙사로서 동재에는 양반층이 기숙하고 서재에는 중인 계층이 기숙하므로 신분상 중인 계층들도 창의 의병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 報本州文狀(보본주문장)
창의 의병을 일으키면서 의승대장으로 추대된 손경석과 이하 대표자들이 상주목사에게 제출한 일종의 결의문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풀어서 여기에 옮긴다.
국가에 불행이 닥쳐 추하고 못된 미치광이 같은 무리가 있어 백성들이 근심과 결분을 당하니 어찌 하오리까? 저희들 상주 향민들은 서로 동지를 모아 마침내 창의하였습니다. 소모사 황익재 공의 통시문(通示文)을 즉견(卽見)한 즉, 안무사 박사수 공이 황익재 공을 소모사로 청하는 장계에 따라 정부에 차출되었고, 이에 따라 상주 고을도 창의에 발동하는 지역으로서 저희들은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먼저 그 연유를 보고하옵니다. 관으로부터 전보순영(轉報巡營)하는 모든 지휘 사항 의무를 다 하겠음을 보고합니다.
4월 초 1일
전 군수 손경석, 유학 서윤석, 생원 이인지, 진사 이증엽, 유학 이증무, 손훈혁, 이사중, 정도휴, 김성채, 김급, 김봉기, 김태기, 강석필, 진사 성덕징, 유학 성윤징, 강명표, 김학증, 김운기, 김인기, 김근, 김익기, 김남기, 권지정자 김집, 강항, 생원 황용하
위 문장(文狀)을 받은 상주목사는 다음과 같은 회시문(回示文)을 보내왔다.
순영(巡營, 상주목사)의 본관이 보내온 회시문에 말하기를 본주의 인사들이 나라를 위하여 앞장 서서 의로운 한 목소리로 하여 내손으로 적을 섬멸하겠다는 그 뜻을 가상히 여기도다. 곧바로 군대를 일으켜 남은 적들의 인력과 물자를 말끔히 씻어 내어 다시는 이들 적에게 협조하는 세력이 없을 것이나, 수일 동안 사건의 근본하는 뜻을 관망하고저 하니, 다시 깨우쳐서 대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초 4일
살펴 보건데, 창의 의병소에서 본주 목사에게 4월 1일 발송한 결의공문에 대하여 4월 4일 본관 성주로부터 보내온 결과 회시 공문이다. 형식상 주민들의 결의에 찬 우국충정에 대하여 지방관의 격려성 문안(文案)과 금후의 대처에 대한 뜻을 전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하겠으나 국가를 전복하고자 하는 세력을 타도해야 하는 집권 왕정으로서는 긴박한 현안인 만큼 우리 상주 향민들 또한 이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는 의지를 서면으로 관가에 알린다는 정치적인 일면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오늘날에도 있을 법한 일이다.
마. 의승대장보소모사서목(義勝大將報召募使書目)
상주창의 의병소 의승대장 손경석이 황익재 소모사에게 보낸 보고서 공문이다.
우리 상주 향민들은 이번 적들의 변란에 대처하는 창의 의거 편성을 이미 마치고 시행하고자 합니다. 소모관에는 진사 이증엽, 정자 김집, 전 부솔, 성이홍이고, 참모에는 진사 성덕징, 생원 이인지입니다. 전병(典兵), 장서(掌書), 소모유사(召募有司), 군관(軍官) 등은 첨부한 명단과 같습니다. 고례(古例)에 의하여 먼저 출사(出事) 계획서를 수립하고, 그 상황을 보고 드립니다. 초 4일
라고, 이 보고서를 받은 황익재 소모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회시하였다.
제왈(題曰) 이번 적들의 변란이 가까운 영남에서 일어난 것이 불행한 일이고, 입을 더럽힌 그 말에 마음을 아프게 생각하는 바이로다. 강좌(江左,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지역)에는 이미 창의군 발동을 마친바 있고 이에 따라서 상주에도 임원(任員)을 정하였다는 것은 나라를 위한 공분(公憤)의 뜻으로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가상히 여기는 바이로다. 우리 영남은 지난 300년동안 선배들이 우국충정을 남긴 고장인 만큼 그 유풍(遺風)에 따라 이번에 상주 향민 여러 첨군자(僉君子)들이 이에 한 목소리로 창의를 일으킨 것은 변란을 일으킨 지역이라는 오명에서 더욱 추락하지 않는 결단으로 가히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로다. 단지 협천의 적 괴수는 이미 붙잡아 죽였으니, 본도 좌․우를 방어하는 장군과 병사 도순무사 (都巡務使) 관군(官軍)은 아래 위로 진격해야 할 것이다. 거창의 향민들도 모여서 지시한 날짜에 적들을 파(破)할 것으로 본다. 첨군자들이 모두 창의에 임하는 것은 비록 나라를 위하는 위국 충정에 출동되어 적들을 토벌하고 회복하고자 하는 의리이나 적진(敵陣)을 파멸시킨 뒤가 아니고는 장차 아무 효력이 없기 때문에 맡은 자 직분을 담당하였으니 내일이라도 마땅히 전진(前進)해야 한다. 김산(金山) 등의 적소(賊所) 근처를 자세히 탐적(探賊)한다는 보고가 있으니 다시 깨우쳐 군오(軍伍, 분대)를 정돈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여 거주하는 마을 성저(城底, 마을 입구 골맥이)에 잠시 대기하면 바치는 수량을 통지할 것이다. 이에 따라 진퇴(進退)함이 마땅하고 이와 같은 일을 추진하는 데는 관계하는 부서 모두가 협력함이 마땅하니 도순무사 및 안무사가 주둔하는 곳에 보고하고 아울러서 이번 회유(回諭, 지역을 순시 하면서 지시한)를 다시 소모사에게 품의하였다는 것을 운운하였다. 이번 일은 한 하늘 아래에서 적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으로 적세를 파육(破衄)시켰다고는 하나 그 세력들에게 오래도록 그 효력이 미치지 못할 것 같아서 적의 무리들이 흩어져 추락할때까지 스스로 함께 창의소에서 일한다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이 일을 함께하는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 그 창의소로부터 각 면 곳곳을 파수(把手)하고 남은 적 무리들을 잡아서 기찰(譏察)하면 또한 분의(奮義)하는 영남 하나로 되는 도(道)라는 것을 각각 스스로 두렵게 생각하기 바라노라.
초 6일 재개령(在開寧)
살펴 보건데 소모사 황익재가 상주 창의소에 보낸 글의 내용 중 영남에서 발발한 반역 세력의 고장이라는 오명(汚名)에 안타까움이 내포되었고 창의를 일으켜 반역에 대항하는 것이 그 오명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알기 바란다는 뜻과 이에 대하여 향민 모두가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간절함은 황익재 소모사 자신이 영남의 남인 출신자이므로 하여 고향 상주 사람들에게 자기가 품고 있던 마음을 더욱 절실히 전하고 싶은 충정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당시로서는 언행에 잘못된 낙인이 찍힐 경우는 바로 귀양을 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하는 그 시대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바. 소모사장계(召募使狀啓) 초 3일 재상주(初三日在尙州)
황익재 소모사가 4월 2일 상주 창의소에 와서 하루를 묵은 뒤 그 다음 날 김산(金山)으로 떠나면서 조정에 보고한 장계(狀啓)의 내용이다. 이 장계는 승정원(承政院)에서 3월 24일에 좌부승지 권익순(權益淳)이 성첩(成帖, 접수)하였다. 본문을 풀어서 다음과 같이 옮긴다.
다만 서장 내(書狀內)에는 이번에 본도(경상도) 안무사 박사수가 올린 장계에 청한바 “[황익재] 당신은 평소에 일을 판단하고 분변하는 능력이 있어 여러 향곡(鄕曲)의 중망(重望)이 있었다.”고 하고, 특령(特令)으로 지시하는 바를 고치거나 물자를 부풀려서 거둬들이면 안된다고 함에 따라서 본도 소모사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그것은 안무사 박사수의 절제진심(節製盡心)하고 맡은 지역을 두루 구제하라는 어려운 일을 받았다 할 것입니다. 다만 서장(書狀)이 있었음은 4월 초 2일이고 제가[황익재] 상주에 있을 때 공경히 받자와 아뢰옵니다. 중책을 받게되니 황공하기 이를데없어 맡은 일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상주는 예로부터 영남의 큰 고을인 고로 제가 바야흐로 본주에 전직 관료와 사림(士林)들을 불러 모아 창의 의병을 발동시키고, 그 사실을 영남의 모든 고을에 통지하여 깨우쳤습니다. 그로 하여금 한 목소리로 분하게 여기고, 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키므로 평범한 백성들이 편안하게 농사일을 하도록 하였음을 보고합니다. 협천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괴수 무리들은 죽였으며 거창에 남았던 적 잔당은 산속으로 숨었다 합니다. 우리 군대는 사방에서 모여 그 세력이 계란을 눌러 없앨만큼의 기세이니, 적들을 소탕하는 것이 몇 일이 안될 것입니다. 영남의 여러 고을 향병은 크게 힘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위로 친히 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는 의리가 떳떳한 이륜도덕(彛倫道德)이 여기로부터 근본이 되는 바이니 국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남은 적당들은 깊은 계곡에 숨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있은 즉, 각처에 지키는 파수꾼으로 막으면서 잡은 적들은 기찰(譏察)하여 적의 세력이 더하는 바가 없으나 안무사의 지휘에 의하여 경상도 여러 고을을 깨우치겠습니다. 일을 가려서 원만하게 처리하겠사오니 좋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위 글은, 황익재 소모사가 조정(왕)에 올린 보고서 문건을 요약한 내용이다. 대체적으로 소모사로 명을 받아서 그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겠다는 것과, 그간에 있는 적세(賊勢)와 토벌 성과가 담겨있다. 이 보고서는 난이 일어난 무신년 3월 15일로부터 9일이 지난 3월 24일에 좌부승지 권익순이 접수한 본인이 소모사로 천출되었다는 사실이 수록되었다는 것을 밝혀 두었고, 이에 따라서 내려온 서장을 4월 2일 상주에 있을 때 받았다고 하였다. 내려온 서장의 내용은 구체적이지 않으나 국난 평정 임무에 철저를 기하라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사. 연설(演說) 기유 6월 30일(己酉六月三十日)
우의정 이집(李集)과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무신란 토적 유공자 중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도 공적이 있다고 하여 임금에게 처분을 청하는 내용이다.
우의정 이집(李集)과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진달(陳達)하였다. ‘작년 변란 시에 안동의 류승현(柳升鉉)과 상주의 손경석(孫景錫)이 동반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적을 선양하는 것으로 류승현은 작은 고을에 수령으로 제수하셨고, 손경석은 남쪽의 어떤 고을에 수령으로 제수하셨습니다만 공적에 비하여 다소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유공한 사람들의 행적을 멀리 밖의 사람들로부터 들으시고, 누구인가 공적의 내용을 감열(感悅)하여 종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영남은 불행히도 비록 융적이 나온 지역이 나이에 대적하여 창의한 인물도 또한 많은 고장입니다. 그 창의를 주창한 인물들 중에 두드러지게 이름을 드러내는 자들이 있지만 날자가 지나면서 차츰 그 공적 사실이 잊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뢰옵는바 이만부 또한 잊혀져가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오니 이 사람도 고루 등용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옵고, 전하의 분부를 주시기 바라나이다.
이에 따라서 영조 임금이 이태좌 좌의정의 건의를 받아들인 실록을 여기에 옮겨보면
영조실록 22권 영조 5년(1729) 6월 30일 조.
대신 비국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 (중략)…… “의병을 창도한 사인(士人)으로서 현연히 드러난 사람 가운데 전일 연신(筵臣)이 천거한 이만부(李萬敷)도 또한 조용(調用)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의병을 창도한 사람을 조용할 것을 전조(銓曹)에 신칙하라”
라고, 하였다. 식산 이만부는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 65세의 고령이었다. 따라서 앞에서 거론한 창의록 좌목에는 이름이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당시 식산의 인물됨은 나라에 이름난 문호(文豪)로 황익재 소모사로서는 받들어 모실 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모사 임무수행에 자문을 청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식산은 65세의 노구임에도 상주 소모영으로 나아가 토적책을 건의하고, 아우와 아들을 창의군에 가담시켜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의 후예로서 칠실(漆室)의 해바라기 같은 충성을 다 하였다. 이듬 해에 앞의 문안과 같은 좌 · 우의정의 건의에 따라 6품직의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6. 상산지의 무신 창의시 서중문(誓衆文)
상산지(商山誌) 문한편(文翰編)에 이인지(李麟至) 공이 무신 창의 당시 향내에 반포한 일종의 포고문(布告文)이다. 앞의 글에 거명한 바와 같이 이공은 의병 서열 2위의 중군(中軍) 직책을 가진 요인으로 그 내용이 대단히 강력하고 간절하다. 그 전문을 여기에 옮긴다.
戊申倡義時誓衆文(무신창의시 서중문) 李麟至(이인지)
수적(讎賊)을 토멸(討滅)하고 상륜(常倫)을 부지하는 것은 실로 춘추의 의리이고, 국가를 보호하고 충분(忠憤)을 탄갈(殫竭)함은 신하된 자의 심지(心志)이다. 여러분은 나의 권하는 바를 들어 달라. 우리 교남 일역은 의열을 숭상하는 풍속으로 충정을 세습하니 70주 중에 수립(樹立)의 엄함이 다른 곳과 다르고, 300년 배향의 후함이 지금까지도 실추되지 않았으니 이는 선현과 선정의 유풍이 있어 의리를 밝게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부우부(愚夫愚婦)의 천민들도 당연한 충의의 직분을 알지 못함이 없는데, 불의에 교화되지 아니한 간귀한 무리들이 감히 역내에서 사역(肆役)하여 성명(聖明)의 세에 영하(嶺下)에서 도근(跳跟)하니 이는 한 마리의 고기가 온 냇물을 흐트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웅덩이 가운데에서 미치게 날뛰는 것이 마치 우리에 갖힌 돼지가 갑자기 나오는 것과 같으니, 이는 전에 없던 일로 롱서(隴西)의 수치를 견딜 수 없다. 오늘에 이르러 이들을 주륙(誅戮)하여 희양의 사사(死肆)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온 향중의 동지와 더불어 사방에 함께 토적할 병사들을 초집할 것이다. 인심이 같은 바에 누구인들 침피식육(寢皮食肉)하여 왕사에 힘을 다하지 아니 하리오. 각자 자기 몸을 버릴 각오로 충성을 다할 것이니 무릇 노예들의 미천도 오히려 청명한 백일을 알거든, 하물며 사대부의 후손으로 감히 충효의 청전(靑氈)을 잊으랴. 내가 비록 중군의 임무를 맞고 있으나, 실은 상장 손경석 의승대장의 뜻을 받은 것이다. 앞에 있는 철월(鐵鉞)이 늠름하여 6, 7보에도 어김이 없고, 줄지어선 깃발과 북소리 당당하여 천만 인 앞에도 나는 장차 가리라. 왼쪽을 공격할 때는 왼쪽으로, 오른쪽을 칠 때는 오른쪽으로 가고, 군법을 엄히 펴서 바른 것을 바르게, 기특한 것을 기특하게 할 것이다. 진용이 이미 정연하니, 이에 임금을 위하여 적을 무찌르면 이른바 그대들과 함께 가리라. 적진이 앞에 닥쳤으니 누구인들 축답(蹴踏)할 마음이 없을 것이며, 장막이 위에 있으니 감히 시끄럽게 하는 소리가 있으랴, 만약 한 사람이라도 종군하지 아니하면 군율을 면키 어려울 것이므로 끝내는 만 번 죽어도 돌아올 것이니, 앞으로 반드시 준수할 지어다.
7. 글을 맺으며
무신 창의록은 영조 임금의 왕권 수호를 위하여 상주 향민들 모두가 의거한 실상을 보여주는 역사 기록이다. 지금까지 보전하고 있는 기록의 내용을 살펴 본 바에 따라 항목별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첫째, “영묘 무신창의록 좌목(英廟戊申倡義錄座目)”은 당시 상주 향촌의 거의 모든 성씨들이 수록되었고, 창의군의 수뇌부는 청리의 옥성서원을 중심으로 한 경주 손씨와 흥양 이씨가 주축이 되고, 내서면 능바우 창령 성씨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하여 향촌의 중심세력 이었던 남인 정파와,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 정파가 합심 대처하여 정파 간의 갈등에 구애없이 화합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둘째, “무신 창의일기(戊申倡義日記)”는 무신년(1728) 4월 1일부터 4월 5일까지 불과 5일 동안의 기록이나 당시의 동향을 상세하게 알게 하였다.
당시 상주 향촌의 여론을 주도하였던 흥암서원과 도남서원의 협조를 구하였으나 도남서원에서는 협조하겠다는 답통(答通)이 없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뒷날의 연구과제로 남긴다.
셋째, “소모절목(召募節目)”은 창의군의 인력과 물자의 모집에 대한 규정을 명정하였는데 신분 사회였던 당시였지만 국민개병(國民皆兵)적으로 모두 응소하도록 하였다.
넷째, “보본주문장(報本州文狀)”은 창의군 의승대장과 수뇌부 대표자들이 상주목사에게 제출한 일종의 결의문으로 향민들 스스로 국난에 대처하는 의지를 집권자에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다섯째, “의승대장 보소모사서목(義勝大將報召募使書目)” 손경석 의승대장이 상주 향민들의 창의군 결집상황에 대한 서류 목록을 황익재 소모사에게 보고한바 황익재 소모사가 보내온 회답신이 수록되었는데 난을 일으킨 세력이 영남 출신인 만큼 영남 땅 상주 사람들이 이 오명을 두려워하고 적극 대처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여섯째, “소모사장계(召募使狀啓)”는 황익재 소모사가 상주에서 조정에 올린 전세(戰勢)보고서 내용의 요약문이다.
일곱째, “연설(筵說)”은 무신란이 평정되고 유공자에 대한 포상으로 벼슬이 내려진바 손경석 의승대장은 남쪽 어떤 작은 고을에 수령이 제수되었는데 그 훈격이 너무 낮다는 것과 당시 상주 출신의 대현(大賢)이었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도 공적이 있는만큼 상응하는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던 글이다. 식산은 당시에 65세의 고령이었으나 창의에 협조하였고, 아우와 아들을 창의군에 가담토록 하였다.
여덟째, 무신난에 황익재 소모관은 상주가 배출한 현사(賢士)이다. 황공의 이력에 대하여는 앞에서 간략히 서술한 바 있으나 절절(切切)한 사실에 비하여는 대단히 부족하다. 따라서 공의 생애와 환력(宦歷) 등 상세한 내용은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긴다.
현재 보전되고 있는 영묘 무신창의록 전문(全文)은 당시의 사실 기록이기는 하나 정서(淨書)한 것은 60년이 지난 뒤의 것으로 보인다. 전문의 말미에는 60년이 지난 기유년(현종 15년, 1849)에 한 글씨체로 상주 사림들이 이성원(李性源) 좌의정과 채제공(蔡濟恭) 우의정에게 보낸 “본주사림정좌우상부문(本州士林呈左右相府文)”이라는 정문(呈文)이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록 또한 무신난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료(史料)이나 당시 당파간에 복잡하고 민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충분한 고증을 한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하는 만큼 후일의 연구 과제로 남긴다.
글을 맺으면서, 필자의 한문실력 부족으로 일부 해역(解譯)이 잘못된 점이 있을까 두려움에 제현(諸賢)의 질정(叱正)을 바라고, 그 원문을 첨부하여 전문적(專門的) 이해를 돕고자 한다.
【참고문헌】
1. <南嚴文集> (복사본) 청리면 율리 손재현씨 소장본.
2. <華齋集> “華齋先生 年譜”
3. <息山全書>1권 答 黃再叟 書翰 및 息山年譜.
4. <商山誌> 김자상역 “戊申倡義時誓衆文 (1728 영조4 이인좌의 반란) 李麟至”
5. <尙州市史> ⑤인물편.
6. <尙州咸昌牧民官> 1997 상주시.
7. <道南書院誌> 1996 도남서원.
8. <興巖書院誌> “동춘당 송준길의 영남인과의 접촉과 그 추이” 경북대학교 우인수 교수 논문.
9. <慶尙道先生案> 1997 상주문화원.
10. <儒學과 現代> 제14집 2013. 사)박약회 대구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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