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堤堰) 수축(修築)을 통한 조선(朝鮮) 태종(太宗)의 수리사업(水利事業)
상주문화원장⋅농학박사
김 철 수
1. 머리말
우리 상주는 삼한시대에 벌써 <공검지(恭儉池)>가 축조될 정도로 광활한 농경지가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농경문화(農耕文化)가 꽃피웠던 곳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비해서 크고 작은 저수지가 많이 있으나 삼한시대에서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을 보면, 전국에 설치된 제언(堤堰)은 3,527개소이고, 그 중에서 경상도는 1,339개소로서 전국 제언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수리사업이 활발했다.
그리고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를 보면, ‘상주에는 42개의 제언(堤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제언의 숫자가 많았으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상산지(商山誌)> 등에 상주지방 저수지의 위치나 규모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당시 제언(堤堰)의 축조기술(築造技術)이나 노동력 동원과 재원(財源)조달 그리고 각종 민원(民怨) 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따라서 필자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해서,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제언의 축조기술, 노동력 동원, 축조재원(築造財源), 각종 민원(各種民怨) 등을 통해서 상주지방의 제언이 어떻게 수축되었는가를 미루어 생각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의 역대 왕은 등극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매년 초에는 권농에 관한 교지(敎旨)를 반포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 교지를 읽어보면 구구절절이 심금을 울릴 정도로 권농의 중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당시는 농업이 산업의 전부였으며,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도 농업을 토대로 사회가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농의 교지는 대단한 의의를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재해(災害)가 직접 농작물에 영향을 끼친 회수를 추려보면 한해(旱害)나 수해(水害)가 각각 89회에 이르렀다. 한해(旱害)의 경우 농작물이 폐농을 하면 지금처럼 외국에서 쌀을 수입해 오는 무역도 없었으니 실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기우제가 하나의 커다란 국가적 행사였다.
5월의 모내기 때 비가 오지 않으면 왕은 스스로 목욕재계하고, 내방(內房)을 피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한편 기우제를 직접 지내면서 왕(王)의 부덕(不德)을 반성하고, 죄수를 석방시키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이럴 때 백성들이 낚시를 하거나 투망으로 고기를 사람이 발각되면 곤장 80대를 치고 전 가족과 함께 북쪽 국경지대로 추방하였다.
만약 관원이 이와같은 죄를 범했을 때는 곤장 100대를 치고 파직(罷職)후 전 가족과 함께 국경지대로 쫒아버리는 것이 당시의 율법이었다.
조선 초기에 제언수축(堤堰修築)을 특히 강조했던 임금이 태종(太宗)이었다. 그래서 제언(堤堰) 수축(修築)을 통한 조선(朝鮮) 태종(太宗)의 농본정책(農本政策)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2. 태종(太宗)의 제언수축(堤堰修築)
조선시대를 수리사업의 성쇠에 따라 구분해 보면, 제1기는 태조(太祖)에서 성종(成宗)때까지의 약 1백 년 간이다.
이때는 건국 초기여서 특히 권력의 강화와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치수와 수리사업이 국책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시기였다. 특히 태종(太宗)은 수령(守令)이 바뀔 때는 해유(解由) 내용에 몇 년 어느 계절에 낡은 제방을 몇 개 수축하였으며, 새 제방을 몇 개 축조하였는데 저수량은 얼마였고 관개는 얼마나 늘어났다는 것을 상세히 기록하여 감사에게 보고하도록 함과 동시에 감사는 이것을 수령고과(守令考課)의 자료로 삼도록 하였다.
이처럼 태종(太宗)은 26명의 조선 왕(朝鮮王) 중에서 치수(治水)사업에 가장 힘을 기울여 지금도 5월에 오는 단비를「태종우(太宗雨)」라고 부르고 있다.
태종(太宗)이 일으킨 치수(治水)사업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태종(太宗) 15년 9월에 일으킨 벽골제(碧骨堤) 수축(修築)이었다.
우선 인근 각 군(各郡)의 장정 1만여 명을 동원하여 두 달만에 복구를 완료하였다니 막대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체제와 조직력을 생각할 때 그 배후에는 강대한 권력을 발동할 수 있는 국가적 기반이 대단하였던 것 같다.
당시의 벽골제가 얼마나 그 규모가 컸는가 하는 것은 벽골제를 중심으로 호남(湖南)과 호서(湖西)란 지역 명칭이 생겨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짐작이 갈 것이다.
그리고 벽골제는 그 공법에 있어서도 물이 넘쳐흐를 때를 대비한 지금의 물넘이를 설치하였고, 그곳의 지명이 무네미(水越)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벽골제 제방 아래에 신털미산(山), 초혜산(草鞋山) 혹은 불이산(拂履山)이라고 부르는 언덕이 있는데, 태종(太宗) 임금의 복구 공사 때 동원된 1만 여 명의 인부들이 못 신게 된 짚신과 짚신에 묻어있던 흙을 털어서 형성된 산이란 전설이 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제언 수축에 관련 기사가 26편 수록되어 있다. 이들 기록을 다시 세분하면, 제언 수축(堤堰修築)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이 9건(件)으로 가장 많았고, 제언 수축에 관계하는 관료(官僚)에 대한 언급이 6건, 제언 수축에 대한 평가(評價)가 3건, 벽골제(碧骨堤) 수축에 대한 언급이 3건, 제언 조사(調査)에 대한 언급이 2건, 제언 축조로 생긴 농경지 처리(農耕地處理)에 대한 언급이 2건, 제언 수축 때의 강제 동원(强制動員)에 관한 언급이 1건이었다.
1) 제언(堤堰) 수축(修築)
태종은 주곡(主穀)인 쌀을 생산하자면, 무엇보다도 가뭄을 극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용수(農業用水)를 원활하게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국적으로 제언 수축(堤堰修築)을 장려했으며, 지방 수령(地方首領)들이 이 일에 앞장서도록 독려했다.
그래서 제언 수축에 관련한 건의(建議)는 적극 수용한 반면에, 제언 수축에 나태한 수령(首領)은 엄하게 문책하였다.
사례 1 |
태종 9년(1409) 3월 22일에 있었던 일이다. 전 판원주목사(判原州牧使) 우희열(禹希烈)이 제언(堤堰)을 쌓기를 청하였다.
“1. 만약 크게 가무는 해에 비가 오기만을 바라고, 저수(貯水)의 준비가 없이 가만히 앉아서 논밭이 말라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농사를 실패한다면,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적당한 곳을 골라 제언(堤堰)을 많이 쌓아서 관개(灌漑)에 이바지하고, 겸하여 고기를 길러서 국용(國用)에 대비하게 하소서.
1. 구경(舊京)과 승천부(昇天府) 등처의 제언(堤堰)은 중방(重房)에서 매년 춘추(春秋)로 수축(修築)하였으니, 이 예에 의하여 삼군(三軍)으로 하여금 각각 저수지(貯水池) 하나씩을 쌓게 하면, 반드시 모두 앞을 다투어 공사에 나아가서 며칠이 안 되어 이룩될 것입니다.
1. 중군(中軍)과 사재감(司宰監)에서 저수지(貯水池) 하나를 쌓아서 고기를 길러서 공상(供上)에 이바지하게 하고, 좌군(左軍)과 전농시(典農寺)에서 저수지 하나를 쌓아서 고기를 길러서 제사에 이바지하게 하고, 우군(右軍)과 예빈시(禮賓寺)에서 저수지 하나를 쌓아서 고기를 길러서 빈객(賓客)을 대접하게 하소서.
1. 저수지를 만드는 데에는 반드시 길(吉)하고 흉(凶)한 곳이 있으니,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지리(地理)를 보아 땅을 파서 둑을 쌓게 하소서.
1. 제언(堤堰)을 쌓는 것은 한재(旱災)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니, 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도감(都監)을 세워 땅을 파서 둑을 쌓게 하고, 겸하여 고기를 길러서 빈객(賓客)의 때 아닌 수요(需要)에 대비하게 하여 민폐(民弊)를 없애도록 하소서. 백성이 전지를 경작하는 시기가 이르기 전에 두세 곳을 쌓게 하여 만약 마치지 못하면, 또 추수하기를 기다려서 다시 쌓게 하소서. 그 도감(都監)은 비록 역사가 끝나더라도 혁파하지 말고, 봄·가을로 돌아다니면서 수축(修築)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태종 임금은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땅을 골라서 아뢰게 하고, 우희열(禹希烈)을 제조(提調)로 삼도록 명(命)하였다.
사례 2 |
그리고 태종 9년(1409) 1월 28일에 있었던 일이다. 전 계림부윤(鷄林府尹) 이은(李殷)이,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고 군사를 넉넉하게 하는 일은 국가의 급선무이고, 정치에서 당연히 우선해야 할 바입니다. 대저 식량의 근본은 농사에 있고, 농사의 근본은 제언(堤堰)을 쌓고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켜서 한재(旱災)를 방비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만약 환란에 대비하지 아니하다가 백성이 굶주리고 창고가 비게 되면, 장차 무엇으로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고, 군사를 넉넉하게 하겠습니까? 제언(堤堰)을 수축하는 것은 이미 명문화된 법령이 있으나, 백성들이 마음을 써서 수축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제언이 높지 못하여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수축한 것이 튼튼하지 못하여 물이 많이 터집니다. 한갓 백성만을 수고롭게 하고 농사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가히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제언(堤堰)을 쌓는 방법은 견고하고 완전하고 높고 두텁게 하는 데 힘써서, 비록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하고 큰 물에도 터지지 아니하도록 하여, 실농(失農)하는 근심이 없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언은 농사의 근본이 되고, 농사는 먹는 것을 넉넉하게 하는 근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농서(農書)》에 이르기를, ‘무릇 백성의 심정은 수고하는 것을 싫어하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므로, 간절히 농사를 권과(勸課)하는 것은 처음에는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 같으나, 마침내 백성을 먹여 살리는 일이요, 가만히 앉아서 농사를 권과하지 않는 것은 처음에는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 같으나, 마침내 백성을 해롭게 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 도(道)에 영(令)을 내려 오로지 제언(堤堰)을 쌓고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는 데 힘을 쓰게 하고, 밭과 들을 모두 개간하여 뽕나무와 삼[麻]이 들에 덮이게 하면, 백성의 생활이 풍부하여지고, 군사와 식량이 저절로 넉넉하여질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급선무는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채택하여 시행하소서.”
라고 하니,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사례 3 |
그리고 태종 8년(1408) 9월 17일에는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가 벽골제를 수축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1. 김제군(金堤郡)의 벽골제(碧骨堤)는 뚝 밑이 아득하게 넓고 비옥하며, 제언(堤堰)의 고기(古基)가 산 같이 견고하고 튼튼하니, 바라옵건대, 예전과 같이 수축(修築)하고 혁파(革罷)한 사사(寺社) 노비(奴婢)로 둔전(屯田)을 경작하게 하여 국용(國用)에 보태소서.”
사례 4 |
그리고 태종 14년(1414) 6월 11일에는, 전 인녕부윤(仁寧府尹) 이은(李殷)이 가뭄과 홍수에 대비할 수리시설 공사에 대해서 아뢰었다.
“대개 듣건대, 탕(湯)임금 때 7년간 가물어서 이윤(伊尹)이 구전(區田)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물을 져다가 곡식에게 뿌려 가뭄을 대비하는 도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지난 번 경신 연간에는 큰 가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굶주렸을 때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이 계림 부윤(雞林府尹)이 되어서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여 먹였으나, 각 고을에는 저축한 것이 없어서 끝내는 식량을 공급(供給)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에게 제언(堤堰)을 쌓아서 가뭄과 장마에 대비하도록 가르친 후로는 비록 큰 가뭄이 있어도 백성이 실농(失農)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 쌓고는 다시 수축(修築)하지 않고, 또 가을과 겨울에 열고 닫지 않고, 봄과 가을에도 물을 절용(節用)하지 않는다면, 가뭄에 대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축(修築)하는 규모와 방통(防通)하는 절목(節目)은 말로써 형용할 수 없습니다.
모화루(慕華樓)의 연못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기둥[穴柱]을 세우고, 연통(連桶)을 묻어서, 물을 그치게도 하고, 흐르게도 하니, 수령(守令)들은 이것을 보고 주현(州縣)의 경내(境內)에 새 것을 쌓거나, 옛 것을 수축(修築)한다면, 비록 크게 가물더라고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무릇 먹는다는 것은 생민(生民)의 목숨을 맡은 것입니다. 금년의 가뭄은 작년보다 심하니, 명년(明年)의 일이 또한 두렵습니다. 옛말에 ‘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다.’고 하였고, 또 ‘군자는 우환을 생각하여 그것을 예방한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재택(裁擇)하소서.”
라고 상서하니, 태종은 무릎을 치면서 좋아 하면서 호조(戶曹)에게 시험하도록 지시하였다.그리고
“내가 들으니, 경상도(慶尙道)의 백성은 여름철을 당하여 모[稻苗]를 옮겨 심는다고 하는데, 만약 가뭄을 만나면 모두 농사를 망칠 것이니, 명년부터 일절 금지하라.”
고 하였다. 이는 태종이 가뭄을 대비하는 방책의 하나로, ‘이앙(移秧)하는 방법’보다는 ‘직파(直播)하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실농(失農)을 막기 위해서는 제언(堤堰)의 축조가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사례 5 |
태종 15년 11월 15일에 경기도 관찰사(京畿都觀察使) 허지(許遲)가 올린 구황사목(救荒事目)중에 있는 이야기다.
“1. 한재가 있고 없는 것은 참으로 기필하기 어렵습니다. 금년에 실농이 더욱 심한 곳은 대개 수리(水利)를 일으키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만일 실농한 땅에 공사를 일으키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여 제언(堤堰)을 쌓지 않는다면, 한재가 있으면 다시 금년같이 될 것입니다. 실농이 심한 각 고을에 우선 제언을 쌓을 만한 곳은 대소를 물론하고 날을 정하여 양식을 주어 제언을 축조하여 수리를 일으켜서 한재를 면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이틀 후에 태종은 이를 받아드려서,
“제언을 쌓는 것은 한재에 대비하는 것인데, 각도의 감사·수령 등이 모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순행(巡行)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만일 수리하지 않고 축조하지 않은 곳이 있거든 수령과 감사를 논죄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이문(移文)하여 알리라.”
하며, 제언(堤堰)을 쌓는 명령을 거듭하였다.
사례 6 |
그리고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우희열(禹希烈)은 제언을 쌓아서 수리(水利)를 일으키는데 있어서 가장 경험이 많고 전문지식이 많은 관리였다. 그는 제언(堤堰)을 쌓아서 수리(水利)를 일으키도록 청하고 나서는, ‘이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신(臣)을 체임시키지 말아 달라’고 할 정도로 일에 집중한 신하였다.
그리고 육조(六曹)에서는,
“수리(水利)가 두루 족(足)한 곳을 골라서 적당한 데를 헤아려서 수축하고, 수원(水源)이 없고 관개(灌漑)할 것이 많지 않은 땅은 자원(自願)을 들어서 쌓게 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으며, 우희열(禹希烈)이 병(病)을 얻어 소를 타고 부(部)에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한 도(道)의 감사가 되어서도 오히려 소를 타고 다닐 것인가?”
하였다.,
2) 제언 수축에 따른 징계
사례 1 |
태종 6년(1406) 12월 20일의 일이다. 사헌부에서는 수령의 인사 고과 규정 7가지를 건의하자 이를 허락하였는데, 그 속에 농업과 관련된 사목이 있었다.
“1.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여 경내에 제언(堤堰)을 수축한 곳이 몇 곳이며, 도임 후 백성에게 뽕나무 심기를 권고하여 매 1호에 몇 주(株)씩 심었으며, 관(官)에서 심은 뽕나무를 나누어 주어서 심은 것은 매 1호에 몇 주씩인가? 백성에게 수차(水車)를 만들도록 권한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이며, 관에서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인가? 권경(勸耕)한 것은 몇이며, 온 집안이 병을 앓고 있는 자는 이웃[隣里]으로 하여금 경작해 주게 하고, 그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값을 갚아주게 한 것이 몇인가?”
그리고 실제로 제언 수축을 게을리 한 청주목사(淸州牧使) 김매경(金邁卿)ㆍ판관(判官) 윤번(尹璠)ㆍ충주판관(忠州判官) 장안지(張安之)ㆍ진천현감(鎭川縣監) 진운수(秦云壽)ㆍ죽산현감(竹山縣監) 김종서(金宗瑞)에게 각각 태(笞) 50대를 때려서 환임(還任)시켰다.,
3) 제언 수축과 강제 동원
사례 1 |
태종 14년(1414) 5월에 제언을 쌓는데 백성들을 강제 동원했다고 해서 인녕부윤(仁寧府尹) 이은(李殷)과 경기경력(京畿經歷) 이하(李賀)를 파직(罷職)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의 발단은 김훈(金訓)이 경기경력이 되어서 하윤(河崙)에게,
“통진(通津) 고양포(高陽浦) 땅은 비옥하니, 만약 제언(堤堰)을 쌓아서 조수(潮水)를 막는다면 곡식 2백 여 석은 파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고(告)하면서 일어났다. 귀가 솔깃해진 하윤(河崙)은 사위 총제(摠制) 이승간(李承幹)을 시켜서 지품(地品)을 조사하고는 이승간을 시켜 아들 도총제(都摠制) 하구(河久)ㆍ사위 참의(參議) 홍섭(洪涉)과 예조판서 설미수(偰眉壽)ㆍ전사 부령(典祀副令) 하연(河演)ㆍ직예문관(直藝文館) 박희중(朴熙中) 등이 연명(連名)하여 고장(告狀)하고 그 땅을 경작하고자 하니, 이은(李殷)이 감사가 되고 이하(李賀)가 경력이 되어서 부근 각 고을의 민정(民丁) 7백 명을 징발하여서 제방(堤防)을 쌓아 주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임금이 몰래 중관(中官)을 시켜 알아보았더니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에 7백 명의 백성들을 강제 동원한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이은과 이하의 직임을 파면하였다.
김훈(金訓)이 하윤(河崙)의 집에 드나들며 몰래 그 역사(役事)를 이루었고, 이미 그 땅을 많이 점유하였으며, 이은(李殷)은 또한 하윤(河崙)의 문객(門客)이었던 것이다.
4) 제언(堤堰) 수축(修築)과 농경지(農耕地)
사례 1 |
태종 14년(1414) 6월 9일에, 호조(戶曹)에서,
“각 도 안에 수리(水利)를 일으켜서, 양전(良田)을 만들 수 있는 땅과 옛 제언(堤堰)을 수축(修築)해서 경작(耕作)할 수 있는 곳을 자세히 찾아서 결복수(結卜數)를 일일이 아뢰고, 각 도에 이문(移文)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은 수리(水利)사업을 벌릴 수 있는 토지를 조사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제언(堤堰)을 쌓고 정리하면 생기는 농경지(農耕地)에 대해서도 소홀하게 넘기지 않았다. 즉,
“금년에 강화(江華)의 제언(堤堰)을 쌓는다면 경작할 만한 땅은 얼마인가? 1천 결에 이른다면 명년(明年)부터 시작하여 선군(船軍)으로 하여금 경종(耕種)하게 하여서 둔전(屯田)으로 삼으라. 만약 통진(通津) 지방 고양(高陽) 방축(防築)에 경작할 만한 땅이 많지 않거든 마땅히 전일에 스스로 점거한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라.”
고 호조판서 박신(朴信)에게 명(命)하였다.
사례 2 |
그리고 태종 17년(1417) 5월에 사간원 우사간(司諫院右司諫) 최순(崔洵) 등은 벽골제 축조로 생긴 경지를 우선적으로 수몰민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둔전(屯田)을 늘이는 처사에 대해서 상소하였다.
그 상소 내용은 이러했다.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백성들을 근심하는 마음으로 애민(愛民)하는 정치를 행하여, 백성들의 이해(利害)를 흥제(興除)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그것은 인사(人事)를 닦는 소이(所以)이고 천심(天心)에 보답하는 것의 지극함입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도 풍재(風災)와 한기(旱氣)가 잇따라 곡식을 해치고, 지난해 농사철의 가뭄에는 백성들이 장차 굶게 되었지만, 다행히 전하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에 이름을 힘입어 단비[甘雨]가 패연(沛然)하게 내려서 백성들에게 가을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생(民生)에 있어서는 아직 넉넉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금년에 이르러서는 바로 농사철을 당하여 우택(雨澤)이 내리지 아니하여 소간(宵旰)의 근심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자질을 가지고 언관(言官)으로 승핍(承乏)되었으니 감히 함묵(緘默)할 수 없어서, 삼가 한 두가지 관견(管見)으로써 우러러 천총(天聰)을 번독하게 합니다. <중략>
1. 제언(堤堰)의 수축은 본래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신 등이 듣건대, 근년에 쌓은 전라도(全羅道) 벽골제(碧骨堤)가 여러 고을의 경계에 침수해 들어가게 되어 일찍이 제내(堤內)에 살던 백성들은 물의 침수 때문에 그 전토를 잃은 자가 많다고 합니다. 마땅히 제하(堤下)의 가까운 땅을 그 백성들에게 먼저 준 뒤에, 나머지를 가지고 소재지의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경작하기를 권장하였다면, 수리(水利)도 이미 좋아졌고, 땅도 비옥하니 누가 부지런히 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난해 봄부터 국가에서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금년에 와서도 또 이것을 증치(增置)하게 하니, 저번에 침수로 인하여 전토를 잃은 자가 도리어 그 뒷 차례가 되었습니다. 또 그곳에 둔전을 지키는 백성이 따로 없다면, 경운(耕耘)하고 수확(收穫)할 때 역사해야 할 자는 틀림없이 모두가 남묘(南畝)의 백성들이라 둔전(屯田)의 소출이 비록 수조(收租)하는 것의 배(倍)가 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만 작은 이익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백성들이 극진히 경작함을 들어주어 민용(民用)에 여유있게 하는 이익만 하겠습니까?
만약 둔전을 설치함이 백성을 창도(唱導)하여 권농하는 소이가 되므로 폐지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미 경기(京畿)에다 적전(籍田)을 개치(開置)하여 백성을 창도하였으니, 어찌 다시 둔전을 설치함으로써 백성을 번거롭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는 이 둔전을 파(罷)하여 백성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농업(農業)을 이롭게 하고, 민생(民生)을 두터이 하소서.”
5) 벽골제(碧骨堤)의 축조(築造)
사례 1 |
태종 15년 8월. 태종 임금은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박습(朴習)의 건의에 따라 김제(金堤)땅에 벽골제(碧骨堤)를 쌓도록 하였다. 그런데 본래는 ‘먼저 성보(城堡)를 쌓아 봉수(封守)를 견고히 하고 뒤에 제언(堤堰)을 수축하여 관개(灌漑)를 갖추면, 거의 사기(事機)가 둘 다 얻어져서 실패가 없을 것’이라는 건의였으나, 태종은 ‘세 성을 수축하는 것은 정지하고, 먼저 벽골제(碧骨堤)를 쌓으라’ 고 하였다.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박습(朴習)이 아뢴 내용은,
“성곽은 봉수(封守)를 견고히 하고, 외모(外侮)를 막는 것이고, 제방(堤坊)은 수택(水澤)을 저축하고, 관개(灌漑)를 통하게 하는 것이니, 실로 환난에 대비하고 가뭄을 구제하는 좋은 계책이므로 모두 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토공(土功)을 일으키고 민력(民力)을 쓰는 것은, 먼저 사세(事勢)의 완급을 살피어 때맞게 조처한 뒤에야 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백성의 원망이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병조·호조의 청으로 인하여 김제군 벽골제와 연해(沿海) 3읍(邑)의 성을 수축할 일로 이미 교지를 내리었으니, 가을걷이를 한 뒤를 기다려서 마땅히 아울러 영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주군(州郡)에 순행하여 두루 그 땅을 살펴 보니, 장흥(長興)·고흥(高興)·광양(光陽) 3읍(邑)의 땅이 모두 바닷가에 있어 왜구가 배를 대는 곳인데, 전일에 설치한 성이 모두 좁고 나무를 세워 진흙으로 발랐으므로, 세월이 오래 되니 기울고 무너진 것이 심하고, 혹은 샘과 우물이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왜선 수십 척이 몰래 여러 섬에 의지하여 틈을 엿보고 있으니, 만일 불우의 변이 있으면, 신은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지리(地理)를 살피고 형세를 살피어 성을 쌓고 못을 파서 봉수(封守)를 견고히 하여 우리 생민(生民)을 보전하는 것이 참으로 오늘의 급무입니다.
만일 도내의 제언(堤堰)이라면 모두 이미 수축하였을 것입니다. 고부(古阜)의 눌지(訥池)는 신이 친히 살펴보니, 저수한 땅은 얕거나 깊고, 제방 아래의 밭은 지세가 높아서 물을 끌어 관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많이 저수하여도 쓸 데가 없습니다.
오직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는 신도 또한 한 번 가서 보았는데, 그 뚝을 쌓은 곳이 길이가 7천 1백 96척이고, 넓이가 50척이며, 수문이 네 군데인데, 가운데 세 곳은 모두 돌기둥을 세웠고, 뚝 위의 저수한 곳이 거의 일식(一息)이나 되고, 뚝 아래의 묵은 땅이 광활하기가 제(堤)의 3배나 됩니다.
지금 농사일이 한참이어서 두루 볼 수 없으니, 농극(農隙)을 기다렸다가 상하의 형세를 살펴보아 다시 계문(啓聞)하겠습니다.
오직 3읍의 성은 반드시 영축(營築)하여야 하고, 이 벽골제를 쌓는 일을 한꺼번에 시작하면 백성의 힘이 견디기 어렵습니다.
신은 생각컨대, 먼저 성보(城堡)를 쌓아 봉수(封守)를 견고히 하고 뒤에 제언(堤堰)을 수축하여 관개(灌漑)를 갖추면, 거의 사기(事機)가 둘 다 얻어져서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이었다. 그러나 왕명(王命)에 따라 세 성을 쌓는 일은 중단하고 벽골제 쌓는 일을 먼저 시작하였다. 이때가 8월 1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공사가 들어간 듯, 10월 14일에 전라도관찰사 박습(朴習)이 석공(石工) 3명을 보내주면 10월 20일이면 기초를 닦고 쌓기를 시작하겠다는 공사의 중간보고가 있었다.,
6) 제언(堤堰)의 축조(築造)
사례 1 |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제언을 쌓는 시기는 10월 초에 시작해서 20일 내에 공사를 마치는 것이 좋으며, 제언 수축으로 실농한 호수(戶數)는 역사를 시키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건의가 있어서, 태종이 육조에 그렇게 하도록 하명하였다.
사례 2 |
그리고 농상(農桑)과 제언(堤堰) 수축(修築)에는 별도로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태종은 1414년 11월 20일에 도안무사(都安撫使)라는 직책으로 우희열(禹希烈)을 경기(京畿)ㆍ충청도에, 이은(李殷)을 전라도ㆍ경상도에, 한옹(韓雍)을 풍해도ㆍ평안도에 보내면서,
“감사와 수령(守令)이 사무가 번잡함으로 말미암아, 그 제언(堤堰)을 쌓고 뽕나무를 심는 일에 혹은 전심(專心)하지 않는 수도 있다. 마땅히 농상(農桑)의 일에 밝은 자를 보내어 오르지 농상을 권과(勸課)하도록 하라.”
는 당부를 하였다.
사례 3 |
태종 15년(1415) 1월에는 각도(各道)에 제언(堤堰)을 쌓도록 다시 재촉하였으며, 5월에는 판상주목사(判尙州牧使) 이은(李殷)에게 부근 여러 고을의 제방[堤堰]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개성부윤 우희열(禹希烈)을 불러서 제언 쌓는 일을 의논하는 등 군신간의 신뢰가 돈독했다.
“내가 들으니, 경이 각기병[脚疾]이 있다는데 지금은 나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도 아직 낫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나으면 내가 장차 경을 외방에 임사(任使)하려 한다. 지난 번에 들으니, 경이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가 되어 힘써 제언을 쌓아 백성을 이롭게 하였다 한다.”
하니, 우희열이 제언(堤堰)과 잠상(蠶桑)의 이익을 갖추어서 자세하게 진달하였다. 우희열이 나간 뒤에 임금이 유사눌(柳思訥)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항상 농상(農桑)의 사무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다.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이 사람의 아들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 감찰(監察) 우경부(禹敬夫)가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번 도목정(都目政)에 잊지 말고 제수하고, 또 우희열을 유후사(留後司)에 돌아가게 하지 말라. 내가 장차 제언(堤堰)의 임무를 주겠다.”
고 하였다.,
사례 4 |
태종 16년(1416) 4월에는 태종 임금이 행대감찰(行臺監察)을 경기 좌우도(京畿左右道)에 보내어 인민(人民)이 마소를 놓아서 곡식 해치는가를 살피게 하고, 겸하여 수령(守令)으로서 구황(救荒)에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과 긴요치 않은 일로써 월경(越境)하여 출입하는 것과 제언(堤堰) 가운데 무익하고 해(害)가 있는 것을 고찰하게 하였다.,
7) 제언(堤堰)의 구조(構造)
태종이 제언수축에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에 제언의 수축은 활발하였고, 제언의 세부사항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도 이루어 졌다. 그 예가 부평(富平)에 있는 제언(堤堰)이었다.
사례 1 |
태종 17년(1417)에 태종은 호조 참의(戶曹參議) 이적(李迹)과 사헌 장령(司憲掌令) 전직(全直)에게 명하여,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이관(李灌)과 함께 부평(富平)에 있는 제언(堤堰)의 이해(利害)를 보고하도록 하였더니, 이적(李迹)이 복명(復命)하였다. 태종 임금이 부평(富平)의 수통(水桶)과 제언(堤堰)의 난이(難易)한 형세를 물으니, 이적(李迹)이 대답하기를,
“수통(水桶) 안의 침수전(浸水田)이 1백 50 결(結)이고, 수통 밖의 기경전(起耕田)이 3백 결, 가경지(可耕地)가 1백 결로 아울러 4백 결(結)인데, 통수(桶水)로 관개(灌漑)할 수가 있으나, 수통 아래의 대제(大梯)에 이르면, 지세(地勢)가 점점 높아져 물이 순조롭지 아니하여 관개(灌漑)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제방을 더 높이 쌓으면 통수(桶水)가 높은 곳에 이를 것이다.”
하니, 이적이 대답하기를,
“만약 더 쌓는다면, 통 위[桶上]의 수전(水田)은 반드시 더 침몰되어 백성의 원망도 깊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우희열(禹希烈)이 이 방면을 맡아 지켰는데, 국가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불리한데도 어찌 이 일을 하였겠느냐? 생각컨대, 반드시 향원(鄕愿)이 통 안의 수전(水田)을 이롭게 하고, 제방 쌓는 노고를 싫어하여 이 말을 내었을 것이다.”
또한 대언(代言) 목진공(睦進恭)이 통수가 높고, 먼 곳에 미치지 못하는 형세를 극언(極言)하므로, 우희열을 불러 이를 물으니,
“부평의 수통은 소인(小人)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옛터[古基]가 상존(尙存)해 있었습니다. 신(臣)이 그곳을 순심(巡審)하니, 경작할 만한 땅이 1천여 결(結)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옛터[舊基]를 수축한 것뿐입니다. 그 향원들이 공역(工役)을 싫어하고, 통 안의 전지를 이롭게 여겨, 국가의 대체(大體)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천총(天聰)을 기만[欺侮]하였습니다. 또한 부국(富國)의 방법은 제언에 있을 뿐입니다.”
라고 우희열이 답하자, 임금은,
“나도 향원(鄕愿)이 한 소위(所爲)라 여겨지니, 먼저 불리하다고 말하여 백성을 부추겨 정장(呈狀)하게 한 자를 헌부(憲府)로 하여금 추핵(推劾)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부평 사람 1백여 명이 제언(堤堰)이 불리하다 하여 사헌부에 호소하니 사헌부는 임금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태종은 즉시 이렇게 명령한 것이다.
8) 제언(堤堰) 수축(修築)에 앞장 선 사람
사례 1 |
당시 태종의 뜻을 쫒아서 제언 수축에 열심이었던 사람은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 우희열(禹希烈), 전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 이은(李殷),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이관(李灌), 관찰사 박습(朴習) 등이 있었으나, 이 중에서 제언 수축으로 태종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 우희열(禹希烈)이었다.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 우희열(禹希烈)은,
“신이 듣건대, 요(堯)임금과 탕(湯) 임금의 세대에도 큰 물과 가뭄의 재앙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았던 것은 재앙에 대비하여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정(鄭)나라에서 경수(涇水)를 파서 백성들이 그 이익을 얻었고, 문옹(文翁)이 물 내려가는 구멍을 파서 사람들이 그 은혜를 생각하였으니, 역대에 수리(水利)를 일으켜 민생(民生)을 후하게 한 것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 지금 모두 고증할 수 있습니다.
신이 어둡고 어리석은데도 성은(聖恩)을 잘못 입어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니 실로 분수에 넘칩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늙고 또 질병(疾病)에 걸려 비록 규곽(葵藿)의 정성이 있으나, 돌아보면 조그마한 도움도 없었습니다.
삼가 관견(管見)을 조목별로 뒤에 열거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상재(上裁)하여 시행하소서.
1. 신(臣)이 근래 전라도 김제군(金堤郡) 벽골제(碧骨堤)를 보니, 사방 둘레가 2식(息)이 넘는데 수문(水門)이 다섯이 있어 큰 내[大川]와 같아서 1만여 경(頃)을 관개(灌漑)할 수 있었습니다. 옛사람이 처음으로 제언(堤堰)을 쌓아서 수리(水利)를 일으켜, 그 공(功)이 심히 컸습니다.
그리고 갑오년(甲午年)에 수축(修築)한 이후 둑[堤] 아래 넓은 들에는 화곡(禾穀)이 무르익어 이를 바라보면 구름과 같습니다.
그러나 몇 군데는 통(筒)을 잇대어 견실(堅實)하지 못하여, 전지 70여 경(頃)이 아직도 다 개간(開墾)되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한스럽습니다.
원컨대, 일찍이 축조(築造)에 경험이 있는 사람인 전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을 파견하여 그 고을 수령(守令)과 함께 통(筒)을 잇댄 곳과 수구(水口)가 무너진 곳을 단단하게 쌓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 신이 고부(古阜)의 땅 눌제(訥堤)를 보니, 옛날에는 3대 수문(水門)을 설치하였는데, 그 동쪽 수문(水門)은 부령현(扶寧縣) 동쪽 방면으로 1식(息)여 리 흘러 들어가고, 가운데 수문은 부령현 서쪽 방면으로 흘러 들어가고, 서쪽 수문은 보안현(保安縣) 남쪽 방면으로 흘러 들어가서, 관개(灌漑)의 이익이 1만여 경(頃)이었습니다. 이로 본다면 이익은 많고 손해는 적은 것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또 도랑[溝洫]의 옛 터를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혹자(或者)가 이에 말하기를, ‘둑 안에 있는 전지는 수침(水浸)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또 둑 언덕은 낮은데 전야(田野)는 높아서 비록 개간(開墾)하고자 하더라도 장차 쓸모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나, 비 온 뒤에 수침(水浸)의 해는 며칠에 지나지 않았고 즉시 아래로 흘러내려 가서 곡식에 손해된 것은 없었습니다.
이제 부안 병마사(扶安兵馬使) 한계흥(韓繼興)과 그 현(縣)에 사는 전 호군(護軍) 김당(金堂)과 이민(吏民) 등이 개축(改築)하기를 매우 바라니, 전 현감(縣監) 곽휴(郭休)를 보내어 고쳐 수축하여 권농(勸農)하도록 명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1. 벽골제(碧骨堤) 아래 진지(陳地)가 거의 6천여 결(結)이고, 눌제(訥堤) 아래 진지(陳地)가 1만여 결(結)인데, 다만 그곳의 거민(居民)을 가지고서는 능히 다 경작할 수 없습니다. 경상도는 인구가 조밀하고 땅이 협착하여 경작할 땅이 없으니, 혁거(革去)한 사사 노자(寺社奴子) 7,8백 명을 뽑아서 옮겨 살게 하고, 각 고을의 묵은 곡식과 소[牛隻] 2백여 마리를 무역하여 주어서 국농소(國農所)를 더 설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 눈이 녹은 물[雪水]은 오곡(五穀)의 정기(精氣)이니, 매년 9월에 얼음이 얼기 전에 보(洑)나 제언(堤堰)을 더 쌓아서 얼음이나 눈의 물을 저장하였다가, 다음해 이른 봄에 흡족하게 관개(灌漑)하소서.
민생(民生)을 후(厚)하게 하는 양책(良策)은 칠사(七事)의 조획(條畫)인데, 그 안에, 다만 ‘권과농상(勸課農桑)’ 이라고만 일컫기 때문에 수령(守令)들이 농사(農事)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가을․겨울철이 바뀌는 때에 마음을 써서 축조(築造)를 더하지 않다가 혹은 죄(罪)를 얻는 자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수령(守令)이 체대(遞代)할 때 해유 문자(解由文字)안에 ‘어느 수령은 어느 해 어느 철에 옛 터에 축조를 더 한 것이 몇 군데이고, 새로운 터에 축조한 것이 몇 군데이고, 물을 저장한 것이 몇 척(尺)이고, 관개(灌漑)한 땅이 몇 결(結)이라.’는 것을 일일이 갖추어 써서 시행하여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척간(擲奸)하여서 출척(黜陟)에 빙고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 상서(上書)를 읽어 보고 박습(朴習)에게 물었다.
“벽골제(碧骨堤)는 경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쌓은 것인데, 그 이익이 얼마쯤 되던가?”
박습이 대답하기를,
“둑 위에 있는 땅은 침몰된 것이 비록 많지만, 둑 아래에서는 이익이 거의 3배나 되었습니다. 근처의 백성들이 모두 금을 그어서 푯말을 세웠으나 아직도 다 개간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탄복하고,
“이처럼 넓은 땅을 여러 해동안 개간하지 않다가, 지금에야 개간할 수 있었던 것도 백성들의 운(運)이었다.”
하였다. 박습이,
“신은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을 차견(差遣)하여 그 역사를 감독시킨다면,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그 일을 능히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쓸 만한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내가 듣건대, 윤전(尹琠)의 아들 윤흥의(尹興義)도 가히 쓸 만한 사람이라 한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가 뒤에 서용(敍用)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이어서 이명덕 등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이은(李殷)은 노인(老人)이지만 공사(公事)를 꺼리지 않으니, 경상도에 이문(移文)하여 노인으로 하여금 올라오지 말게 하고, 도내의 제언(堤堰)을 순찰(巡察)하게 하라. 또 경기에 이문(移文)하여 우희열(禹希烈)로 하여금 경기의 제언(堤堰)을 순찰(巡察)하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시 각 고을의 수령들은 제언 수축에 앞장 서 있는 우희열을 무척 싫어해서 기회만 있으면 비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우희열의 일은 자기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국가를 위한 것이니, 그 마음이 충성스럽다. 비록 말이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히 허물할 것은 없다. 각 고을의 수령(守令)과 대소 원인(大小員人)이 모두 이를 싫어하여 비방하는데, 만약 그 이해(利害)를 살피지 아니하고 이를 비방한다면 엄하게 징계하여 뒷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가하다. 이것은 삼성(三省)의 임무이다.”
라고 적극 비호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제언은 제방 높이가 높지 않았고, 갈수기에는 물이 마르기 때문에 제방을 일부 잘라서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태종은 이런 사람을 논죄하라고 다음과 같이 명(命)하였다.
“각 도의 수령(守令)이 양반(兩班)과 인리(人吏)의 말을 듣고 제언(堤堰)을 파괴하여 고기를 잡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기강이 없고 잔열(殘劣)한 사람들이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진실로 이러한 수령이 있으면 조율(照律)하여 논죄하라.”.
사례 2 |
그런데 우희열(禹希烈)에 비해서 전(前)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 이은(李殷)은 평생을 제언 수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영달을 꿈꾸었던 사람이었다.
이은(李殷)은 영천(永川) 사람인데, 매양 제언(堤堰)의 이(利)를 임금에게 진달(陳達)하여서 두 번이나 감사(監司)의 직임을 받았다. 그러나 제방(堤防)을 쌓아 물을 끌어들여 농사는 잘 되었으나. 지세(地勢)를 살피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무리하게 취역(就役)시켰기 때문에 원망을 많이 샀다.
그런데 본인의 나이가 74세가 되자, 상서(上書)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은(李殷)은 본인의 벼슬이 침체(沈滯)되어 더 이상 등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상서(上書)하면 임금이 반드시 다시 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자, 깊이 이를 후회하였다.,
3. 맺는 말
태종(太宗)은 비록 왕자의 난을 겪었지만, 18년 재임기간을 통해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조세 확대를 위해서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들을 과감하게 시행하였다.
우선 중농정책(重農政策)의 시행으로「농업기술의 개발」,「개간 장려」,「수리시설 확충」등을 실시하였으며, 지방 수령의 의무 사항에 권농(勸農)을 규정하였다. 특히 양전사업(量田事業)으로 1405년부터 1406년까지 6도(道)를 양전하고, 1411년부터 1413년에 걸쳐 평안도, 함경도까지 양전(量田)함으로써 모두 120만 결(結)의 전지(田地)를 확보하였다.
또한 제언수축으로 실농(失農)한 자에게는 역사(役事)를 면해 주었으며, 자주 일어나는 가뭄에 대비해서 벼 직파 재배법(直播栽培法)을 널리 보급함으로 안정적인 주곡생산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제언 축조에서도 여러 가지 획기적인 일을 하였다.
첫째, 제언 축조를 총괄 지휘하는 제조(提調)의 품계를 정2품으로 하였으며, 경기도ㆍ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ㆍ풍해도ㆍ평안도에는 각각 제언 수축 전문가를 도안무사(都按撫使)로 하여 각지의 제언 수축을 일관되게 지도 감독하도록 하였다.
둘째, 저수지 내에 구멍 뚫린 기둥을 세워서 취수하는 시설을 보급하여 농업용수가 필요할 때 취수하도록 하는 기술 발전을 이루었다.
셋째, 벽골제에서 보듯이, 물넘이를 축조해서 홍수 시에 제방이 월류되는 것을 막도록 하여 제방의 둑의 안전을 고려하였으며, 그 지역이 지금도 ‘무네미’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어서 우리 공검지의 좌안(左岸)에 있는 ‘무너미’ 라는 동네가 공검지의 물넘이가 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하였다.
넷째, 공검지에서 취수시설로 보이는 목재 수통이 발굴되었는데, 이와 흡사한 목재 취수시설이 벽골제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저수지의 취수시설이 오랫동안 같은 양식으로 이어져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섯째, 벽골제 제방 아래 서북 방향에 약 3천 평 정도의 언덕이 하나 있는데 이것을 현지에서는 신털미산(山), 초혜산(草鞋山) 혹은 불이산(拂履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태종(太宗)의 복구공사 때 1만여 명의 백성들이 2개월간 동원되었는데, 이들의 못 신게된 짚신과 짚신에 묻어있던 흙을 턴 것이 산을 이룬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을만큼 많은 백성들의 부역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 공검지를 축조할 때도 인근의 백성들이 대거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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