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5호

화동(化東)의 재건학교(再建學校) -화동재건학교(化東再建學校)와 자양재건학교(紫陽再建學校)

빛마당 2016. 3. 30. 16:05

화동(化東)의 재건학교(再建學校)

-화동재건학교(化東再建學校)와 자양재건학교(紫陽再建學校)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아동문학회장

김 재 수

 

. 재건학교(청소년새마을학교)의 설립 배경


8·15광복 이후 정규 과정의 학교가 있었지만 가난이라는 어려운 여건으로 인해 많은 젊은이들이 배움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향학열에 불타는 젊은이들을 위해 곳곳마다 뜻있는 선각자들과 봉사자들에 의해 야학이 생겨났다. 이러한 야학은 그 후에도 오래 동안 이어지다가 4·19의거가 일어나면서 국민계몽운동의 목적으로 본격적인 야학이 설립되었으며, 5·16군사혁명 이후에는 재건학교라는 이름으로 야학이 시작되었다. 재건학교는 검시야학·고등공민학교·새마을학교·향토학교 등의 이름으로 그 성격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사회교육의 한 형태로 제도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보상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잃지 않았다.

1961612일 공포된 '국가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19647월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로 바뀌었다가 1980년 공포된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따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흡수되었다. 이에 따라 재건학교는 다시 청소년새마을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 화동의 재건학교


화동에는 두 개의 재건학교(청소년새마을학교)가 있었다. 화동면 이소리 관제마을을 중심으로 설립한 화동재건학교(화동청소년새마을학교)와 선교리를 중심으로 설립된 자양재건학교이다.

이 두 재건학교에 관한 자료는 당시 재건학교 교사였던 이각희 씨와 여항동 씨, 자양재건학교 설립자인 이원복 씨가 생존하고 계셔서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과 생존해 있는 몇몇 분을 직접 만나 대담을 통해 화동재건학교와 자양재건학교의 면면을 다시 살려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은 당시 관계자들과의 면담과 남아 있는 자료를 모아 그 때 재건학교를 되돌아보고자 만든 자료임을 밝힌다.

 

1. 화동재건학교(화동청소년새마을학교) 설립과 운영


. 야학으로 문을 열다

196812월이었다. 화동면 이소1리 관제마을 여영정 씨 사랑방엔 몇몇 청년들이 모여 앉았다. 권중정 씨, 이채하 씨, 이각희 씨 등이었다. 이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야학을 열기로 의견을 모았다. 학생을 모집하였더니 우선 9명이 모였다. 이들에게 중학과정 야학을 시작한 것이 화동재건학교의 시작이다.

그러나 여영정 씨의 사랑방은 학교로 사용하기에 문제가 있어 그 이듬 해인 19693, 관제에 있는 동 회관(洞會館)으로 야학의 장소를 이전하니, 이때 학생들은 이미 40여 명이 모였다.


. 재건학교로 출발과 인가

비록 야학으로 출발하였지만 보다 큰일을 하기 위해 야학을 재건학교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1969년부터 여항동 씨가 참여하였다. 여항동 씨는 재건국민운동 상주군위원회 개발위원으로 재직하였기에 재건학교 설립인가를 획득하는 일을 맡았다. 여항동 씨는 화동재건학교 뿐만 아니라 모동재건학교, 자양재건학교 허가도 본인이 신청하여 인가를 받았다. 교재는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교재를 사용하였다.

마침내 196951일 관제마을 동 회관에서는 상주군수, 상주경찰서장, 공화당 제17지구당 사무장, 재향군인회장, 재건국민운동 상주군위원장, 화동면장 및 관내 기관장 유지 학부형 등 150여 명이 모여 화동재건학교 개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때 교사진은 형편에 의해 수시로 바뀌었다. 야학을 시작했던 권중정 씨는 개인적 형편에 의해 부산으로 떠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배우고자 하는 열정,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으로 이루어진 재건학교는 197135, 동회관이 좁아서 불편할 정도가 되자 화동국민학교 교장의 허락을 받아 화동국민학교 음악실 한 칸을 빌어 정식 교실에서 수업하게 되고 마침내 39일 제1회 졸업생 16명을 배출하면서 이어 71년도 56명의 신입생을 받아 입학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197231일엔 학생 39명을 받아 입학식을 거행하고, 1973221일에는 제2회 졸업식을 통해 30명을 졸업시키고 이어 30명의 신입생을 받아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 헐리는 교실, 그리고 이전

그러나 1973년 그해 4월이 되자 교실로 사용하던 음악실이 노후 교사가 되어 철거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428일에 화동면 농협창고로 임시 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최태주 교장을 비롯한 여항동, 이각희, 박정덕, 진호일, 이성걸, 김의숙, 장태순 선생은 우리의 각오라는 결의를 다지면서 재건학교의 신축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1973830일 자로 밝힌 이들의 각오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직업이나 직장이 틀리는 사람으로서 개인의 이익에 구애됨이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굳게 뭉쳤다.

국가 백년지대계는 교육이 기초이고, 우리들 자신이 배움에 굶주렸기 때문에 나보다 더 불행한 가정의 자녀 혹은 청소년들에게 내일의 향토개발을 위한 일꾼을 양성하고 싶은 의욕과 개인 생활의 향상을 기하고 미진한 불우 청소년의 향학열을 불태워 주기 위해서 화동재건학교의 간판을 쑥스러움 없이 군내 기관장 및 유지 여러분을 모시고 그 꿈을 무지개처럼 나래를 활짝 피었다. …… 중략……

그러나 197342070여 명의 보금자리였던 화동초등학교 내 학생들이 사용하던 음악실 한 칸마저도 낡은 교실로 헐리게 됨에 유랑아처럼 목적지 없이 떠나야 했다.

…… 중략 ……

그러나 1973428일 화동조합장 전병욱 씨의 주선으로 화동농협창고를 빌어 2학년이 수업을 하고, 또 이소1리 마을회관을 허락을 얻어 1학년이 수업을 계속하게 되어 학생과 교사 일동은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소리없이 흘렸다.

마침 1973730일 화동국민학교 개축으로 인한 노후 교실 1칸을 우리들 교사 8명은 가난하나마 주머니를 털어 그 교실 1칸 분의 목재를 구입하여 화동재건학교를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 중략 ……

우리들의 계획이 완성 되는 날 보잘것없는 교실 한 칸이 면민의 기술교육, 아동교육, 도서실, 예식장 등 다방면의 활용으로써 새마을 운동에 앞장서는 일꾼으로서 우리 고장 개발과 협동체로서의 보람찬 보금자리로 육성 발전시킬 계획이다.

이에 우리들의 힘이 빈약한 어려움을 상부상조의 뜻으로서 정성과 우리 고장의 발전을 위해 우리의 사업에 열과 성의로서 도와 뜻과 힘을 합친 결실을 맺기위해 무릎을 꿇고 하소연 드리는 바입니다.

저들의 신축할 건물이 지역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정성어린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이 서울과 지방지에 보도되었다. 영남일보와 서울신문에 이 소식들을 소개한 것이다.

영남일보는 공부할 방 마련해 주오. 화동재건중학교 90여 학생 호소라는 제목으로, 서울신문은 197282일 자 신문에 대쪽 정성에 온 마을 부축, 고입검정 15명 합격, 교실 짓겠어요.’ 라는 제목으로 장태순, 김의숙 두 젊은 여교사를 소개하였다.

이러한 교사들의 정성이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1973419일부터 교직원을 비롯한 화동면민과 출향인사들로부터 받은 찬조금액이 197631일까지 1,004,000원에 이르렀다.



                                 <영남일보와 서울 신문에 보도 된 화동재건학교>

 

. 새 교실 건축과 활동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우자란 교훈처럼 이들의 활동도 다른 중학교 학생들 못지않게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7145일 식목일을 기해 통일 동산 식목 기념행사를 비롯한 당시 수재민이 발생했다는 지상 보도에 이들도 수재민 돕기 성금 모금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그러면서 1973년에 시작한 교실 신축공사는 19747월에 마침내(현 이소 142-19 현 노인 회관 자리)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교실 신축을 위한 교직원들과 학생들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사를 위한 자재 운반은 물론 크고 작은 일에 열심히 함께 땀 흘린 결과였다.

새 교실이 완공되면서 학교의 위상도 높아졌다. 197410월엔 속리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197683일에는 반야사에서 직원 친목캠프를 열기도 했다.

이 외에도 1977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 58,320원을 조장원 면장에게 전달하기도 했고, 1977년에는 이리역 폭발사고로 인한 재해 돕기 성금모금운동을 벌여 성금을 전달하는 일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학교의 위상은 날로 약해졌다. 지역 경제의 활성화로 정규 중등학교 진학이 늘어나면서 19782. 16 7회 졸업식(학생 수 18)을 하는 날 제81년 수료식(학생 수 10)을 끝으로 학교의 문을 닫게 되었다.

 

. 화동재건학교의 이모저모

1968년부터 1978년까지 10년간 이루어 진 화동재건학교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교훈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우자

 

2) 교가

유달영 작사 석영기 작곡

 

우리들은 자라나는 푸른 솔이다.

하늘의 흰 구름을 만지려는 젊은 꿈

그 꿈을 담뿍 안고 우거지는 숲이라

비바람 눈보라에 더욱 푸른 솔이다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우자

온 나라 밝혀 밝혀 밝게 비칠 우리들.

 

                                                  <교가> <교모와 가방>

<교표> <사용하던 당시의 교실>

 

3) 연혁

196812. 04 화동면 이소1리 관제마을 여영정씨의 사랑방에서 마을 미 진학 청소년 9명에게 중학과정 야학을 시작

196903. 01 관제에 있는 동회관으로 야학을 이전(학생 40명 모임)

196905. 01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 화동재건학교로 이름을 고침(인가). 개교식(학생 59)

상주군수, 경찰서장, 공화당 제17지구당 사무장, 재향군인회장, 재건국민운동 군위원장, 화동면장 및 관내 기관장, 유지, 학부형 등 150여 명이 참) 교장 최태주, 주무교사 여항동)

197006. 01 화동재건학교 설립 승인(교장 최태주, 주무교사(면 간사) 여항동)

197103. 05 화동초등학교 음악실 1칸을 학교 교장의 허가를 얻어 이전

197103. 09 1회 졸업식(졸업생 16) 71년도 신입생 입학식(학생 56)

1971년 화동초등학교 음악실로 이전

197203. 01 72학년도 입학식(학생 39)

197302. 21 2회 졸업식(졸업생 30) 73년도 입학식(학생 수 30)

197304. 28 노후교사 철거로 농협창고로 임시 이전

1973. 신축교사 공사 시작

197402. 29 3회 졸업식(학생 수 25)

197409. 신축교사 완공

197502. 17 4회 졸업식(학생 수 7)

197605. 19 화동새마을청소년학교 설립 승인

197602. 19 5회 졸업식(학생 수 5)

197702. 16 6회 졸업식(학생 수 13)

197802. 16 7회 졸업식(학생 수 18)

197802. 16 81년 수료식(학생 수 10)을 끝으로 폐교

 

4) 졸업생 및 취업자 현황

1973. 3월 현재

 

진학

농업

공업

공공

기관

병원

종사

서비스

1971

·

6

6

6

·

2

16

1973

4

3

13

2

1

7

30

4

9

17

6

1

9

46

5) 교사현황

19733월 현재

직무

성명

년령

학력

직업

담당과목

교장

최태주

56

대졸

과수원

도덕

주무교사

여항동

31

고졸

농협직원

사회

교사

이각희

39

대졸

약국

과학

박정덕

35

대졸

한의원

수학

진호일

33

고졸

양조장

농업

이성걸

32

고졸

상업

체육

김의숙

22

고졸

가사

영어

교사서무

장태순

24

고졸

가사

국어. 가정

 

6) 각종 자료에 나타난 교사 현황(무순)

최태주(도덕), 이채하, 권중정, 박정덕(수학), 여항동(사회), 진호일(상업농업), 이각희(과학), 이성걸(체육), 김의숙(영어), 장태순, 강순임(국어), 조성용(체육), 성훈환(농업), 김상국(사회), 이일희(국어), 김영매(가정)

 

7) 학생 활동 이모저모

1971. 4. 5 통일동산식목기념

1971. 수재민 돕기 성금 모금 운동

1972. 9. 7 김창길 씨 도서 150권 기증

1974. 10 속리산 수학여행

1976. 8. 3 반야사 직원 친목캠프

1977. 불우 이웃 돕기 성금 모금 58,320원 조장원 면장에게 전달

1977. 이리 재해 돕기 성금 모금

이 외에도 체육대회 및 다른 재건학교와 친목행사 등이 있었다.

8) 사진으로 본 화동재건학교

 

관제 동사에 모인 학생들 1969년 개교식(관제 동사)와 개교 훈시하시는 서장님


* 아래 사진 자료는 생략함

 

1971. 4. 5 통일동산식목기념

1971년 화동초등학교 음악실로 이전 1971년 수재민 돕기 성금 모금운동

1972. 9.7 김창길씨 도서 150권 기증 1973. 4.28노후교사 철거로 농협창고로 임시 이전 

1973년 신축교사 공사 현장 1974년 완공된 신축교사 

1974.10 속리산 수학여행 1976.8.3 반야사 직원 친목캠프 

1977 불우이웃돕기성금 모금 1977 이리 재해돕기 성금 모금

58,320원 조장원 면장에게 전달

3회 졸업생 일동(1977.2.16) 4회 졸업생 일동

화동재건학교 학생들 운동회 모습 화동재건학교 현판

화동재건학교 제2회 졸업생 남학생 일동 화동재건학교 제2회 졸

최태주 교장 아침 조회 광경

학교 직인과 계인 그리고 고무인

 

2. 화동 자양재건학교

자양재건학교는 남아 있는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자양재건학교를 실제로 운영해 온 이원복 씨가 학교설립승인서를 보관하고 있고, 그분과의 대담자료를 참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양재건학교는 1969610일 상주군 화동면 선교리에 위치한 숭인국민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 학교의 설립승인원에는 화동면 판곡 1리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선교리의 숭인국민학교였다. 이원복 씨와 숭인초등학교 교사인 김재궁 씨 그리고 박안식 씨, 유진상 씨 김성오 씨와 지역 청년 조성용 씨 등 6명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숭인초등학교 교사인 김재궁 씨(국제대학 졸업)를 명예교장으로, 주무 교사로는 이원복 씨가 맡았다.

교육 내용은 중학교 3학년 과정을 1년으로 축소 개정된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발간한 교재였는데, 1권씩 총 12권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인 박안식 씨는 영어를, 유진상 씨는 사회를, 김성오 씨는 수학, 이원복 씨는 국어, 조성용 씨는 농업을 맡았다.

이들은 이 지역 청소년들의 높은 향학열에 힘입어 지역사회를 위해 일절 도움을 받지 않고 무보수로 학원을 운영했다.

운영 시간은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학생 1인당 월 교재대금으로 300원과 운영비로 200원을 받았다. 이 운영비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여서 램프를 사용했는데 램프에 사용될 유류 대이고 기타 사무비, 인지대로 사용하였다.

수업을 시작한 첫 달은 82명이 모일 만큼 학생 수가 많았다. 그러나 5개월 후 자원교사 4명이 다른 학교로 전근하는 일이 발생하여 대부분 수업은 주무교사인 이원복 씨가 전 과목을 혼자서 맡았다고 한다.

19696월 학교가 문을 열었을 때는 선교리와 판곡리 주변에서 82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교실 한 칸으로는 수용할 수 없어서 늦게 오는 사람들은 뒤에 서서 수업을 받기도 했단다. 차츰 인원수가 줄어들고 마침내 중학교가 활성화와 지역 주민의 이주가 많아 지원자들이 없게 되자 19772월에 폐교하고 말았으니 학교 운영은 78개월이 계속된 셈이다.

이 학교를 거쳐 간 학생 수는 약 170명 이상이 된다고 이원복 씨는 말한다.

이원복 씨는 선친을 따라서 서울에서 살았지만 1965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선교리로 귀향한 분이다. 주민 등록 상은 1939128일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1936년생이라고 하니, 올해 74세가 되는 셈이다.

1973, 그동안 재건학교 운영을 한 공로로 당시 박경원 내무부 장관으로부터 표창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안호상 회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그의 나이 29세의 청년시절 내외분이 귀향을 하고 잘 사는 농촌 만들기를 위해 야산을 개간하여 사과와 배를 심어 과수원을 일구었단다. 그러다가 배움에 목말라하는 이 고장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귀향한 지 3년 만에 자양재건학교를 시작한 것이다.

자양재건학교를 거쳐 간 170여 명의 졸업생들은 이를 바탕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와 저마다 일터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단다.

3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주택을 두 번이나 개축 또는 신축하느라고 그동안 보관해 두었던 각종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안타가워 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땐 빛바랜 학교 설립 승인서한 장을 마치 귀중한 보물처럼 내 앞에 내 밀었다. 74세의 모습에서 29세의 청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자양재건학교 설립 승인서 설립자 이원복 

자양재건학교 설립의 전신인 숭인초등학교의 폐교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