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6호(2016년)

상주학. 상주문화 26호.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의 양선사상고(揚善思想考)

빛마당 2017. 1. 31. 12:28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의 양선사상고(揚善思想考)

-인간성 옹호를 중심으로-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權 泰 乙


 

. 머리말

지난 1014, 우천학맥(愚川學脈) 연구 발표시 우천학맥의 근간이 된 학문과 사상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때, 우천학맥 속에는 남의 악()을 숨겨주고 선()을 드러내는 양선사상(揚善思想)이 두드러진 특성의 하나임을 발견하였다. 다만, 그 때는 개별자적 연구가 아니라 우천학맥 제 선비를 통한 공통된 특성을 살핀 것이었고 특히, 강고(江皐)와 계당(溪堂) 양 대에 이 사상이 가장 두드러짐을 발견하였다. 이에,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17621834)의 양선사상을 효녀효열부군자유(君子儒)를 지향한 이족(吏族)의 선비를 중점적으로 살펴 파악하도록 한다.

남의 악을 숨겨주고 선을 드러냄은, 궁극적으로 성선(性善)의 존재인 인간으로 하여금 본성(본질)에서 멀어지지 않게 하려는 성선의 옹호며, 나아가 인간성 옹호의 미덕이라 말할 수 있다. 강고계당 등으로 전승된 우천학맥의 근원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수암(修巖) 류진(柳袗) 부자로부터 발원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이 양선사상 역시 서애가 물길을 연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서애가 별세하던 해(1607.5.6) 3월에 형의 아들 기()에게 유계(遺戒)를 받아쓰게 하였는데,

 

너희가 힘써 선사(善事)를 생각()하고 힘써 선사(善事)를 행하면 조상 대대로 전해 오는 문벌(家世)을 다행히 보전하리라.”

 

라고 하였다. 이 선사(善事)의 범위는 넓으나, 남의 착함을 드러내는 양선(揚善)도 그 주요 덕목임에는 틀림없다. 본론에 앞서 강고의 행적 중 선행(善行)부터 먼저 살펴 본론의 논의에 도움이 되게 한다.

 

 

.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의 행적

강고는, 아버지 광수(光洙)와 어머니 풍양 조씨(趙氏) 처사 시경(時經)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나 백부 발()의 사자(嗣子)가 되었다. ()는 상원(象遠)이요 다른 호는 만포(晩圃). 10(1771)에 내형(內兄)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가은(可隱) 조학수(趙學洙) 형제분에게 나아가 사람됨의 근본과 학문하는 방법을 익혔는데, 평생 두 분의 은혜가 컸음을 잊지 않았다. 18(1779) 때 향시에 장원하였고 25(1786) 봄에 생원 복시(覆詩)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27(1787)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 나아갔으니, 퇴계(退溪)서애(西厓)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수암(修巖)으로 전승된 퇴계학통이 우복의 6대손 입재에게 전승되어, 강고는 이같은 학통을 가학(家學)의 연원(淵源)이라 보았던 것이다.

강고는, 공맹(孔孟)의 실천 유학을 더욱 신봉하여 28세에 이미 도신(道臣관찰사)의 천거가 있을 정도로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34(1795) 겨울에 예조참판 이익운(李益運)좌승지 임제원(林濟遠)이 경학 행의(經學行義)로 조정에 천거하여 특명으로 용양위 부사용(9)에 임명되었다. 이 뒤 학덕으로 정조의 신임을 얻어 진유(眞儒)진강관(眞講官)으로 예우받아 세자익위사의 익찬익위로 동궁을 보도하였다. 성심성력을 기울여 순조익종헌종의 3조에 걸쳐 동궁을 보익한 공으로 순조의 특명으로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3)에 이르렀다.

강고가 장수현감(1797)이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섰는데, “전 만고 후 만고, 청백(淸白)의 제일이요 선치(善治)의 제일이로다.”(前萬古 後萬古 淸第一 治第一)라고 하였다. 청렴결백함으로써 백성을 다스려 그 은혜가 큼은 만고 전만고 후에도 으뜸이라 칭송한 것이었다. 특기할 일은, 장수현감 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실효를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전례없는, 향교(鄕校) 안에 경로당(敬老堂)을 설치하여 춘추 석전제(釋奠祭)에는 양로연을 겸하여 시행한 사실이다.

37(1798)에는 원자궁 강학청요속(元子宮講學廳僚屬)으로 청양현감을 겸하였는데, 그해 겨울에는 흉년에 주린 백성이 도처에서 쓰러지자 봉록을 덜어 45백 석의 곡식을 마련하여 사진(私賑)을 행하였다. 상부에 알려 공진(公賑)을 기다리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전임자가 자신의 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빚진 고을의 재정을 거짓으로 숨겼기 때문에 상부에서 구휼미를 주지 않을 것을 안 때문이었다. 48(1809)때는 흉년이 들어 온 문중에 주린 이가 속출하자 12월에는 또 사비로 수 개월 분의 구휼미를 마련하여 문진(門賑)을 시행하였다. 54(1815) 3월에는 의성현령이 되었는데 연이은 흉년에 아사자가 길거리에 즐비하자 다시 봉록의 반을 덜어 곡식 8백 석을 마련하여 사진(私賑)을 행하였다. 이때 후임으로 부임한 현령이 뒷날 좌의정에 오른 김홍근(金弘根)이었는데, 이때 강고가 고을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고 주린 백성을 사진(私賑)으로 구제한 사실을 몸소 견문하였기에, 강고 사후 8년만인 1841(헌종 7)에 조정에서 청백리(淸白吏)를 선정할 때 왕명을 받은 좌의정 김홍근이 적극적으로 강고를 추천하여, 강고가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이 외에도 강고가 행한 선행은 많으나 줄인다.

강고(江皐), 선조 서애(西厓)의 유훈대로 선사(善事)를 생각하여 선사(善事)를 행함으로써 서애의 뒤를 이어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된 선비가 되었다. 강고가 선조의 유훈을 잘 이었음은, 실천 유학자의 도리로 인민애물(仁民愛物)이 주요 덕목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겠다. 요약하면, 백성을 사람의 도리(人道)로써 대우한 강고의 양선(揚善)은 곧 인간성 옹호와 맥이 닿은 사상임을 알 수 있다.

 

 

. 인간성(人間性) 옹호로서의 양선(揚善)

1. 신분의 귀천을 초월한 향리(鄕吏)의 딸 이 효녀

(李孝女)의 성효(誠孝)

이 항에서는 강고가 장수현감(1797)이 되어 향리(鄕吏) 박양은(朴良溵)의 딸이 행한 지극한 효를 찬양함으로써 선행(善行)에는 신분의 귀천상하가 있을 수 없음을 보이었다. 먼저, 전문을 소개한다.

 

1) 이 효녀전(李孝女傳) - 전문 -

세상에는 남과 비길 데 없이 뛰어난 일을 행함이 가끔 지위나 신분이 낮은 여자의 부류에서 나오는데, 사대부가에서 나오기 어려운 바가 있으니 이것이 더욱 숭상할 일이다.

내가 이 고을(장수현)을 맡아 향리(鄕吏) 이양은(李良溵)의 딸이 효행(孝行)이 있음을 들었다. 그 어머니 병이 위태한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인육(人肉)이라야 병을 낫게 할 수 있다 하였다. 효녀가 즉시 몰래 칼로 왼쪽 넓적다리를 베었으나 처음은 칼날이 무디어, 칼을 갈아서 손바닥 크기로 베어 약을 조제하여 먹게 하였더니 어머니의 병이 드디어 능히 나았다. 앞의 수령이 효행 사실을 채록하여 감영에 보고해 일이 조정에 알려져 복호(復戶)의 은전(恩典)이 있었다 한다.

여자요 지위나 신분이 낮으면서도 그 성효(誠孝)가 비길 데 없이 뛰어남은 능히 이같도다. 그가 무딘 칼을 잡고 벨 때와 날을 세운 칼을 잡고 벨 때를 상상하면, 단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일만 알았지 그의 몸이 죽어서 불쌍히 될 것은 몰랐으니, 끝내는 그 지극함이 천심(天心)에게까지 미치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도다.

, 지극하구나. 숭상할 일이로다. 이것은 또 지위나 신분이 낮다하여 업신여길 일이랴. 다른 날 읍지(邑誌)에 이를 써서 국사에 실리어 효녀전(孝女傳)이 된다 하여도 조금도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정사년(1797정조21) 국화절에 장수현 관사에서 쓴다.”

2) 구성상 주요 내용

위의 효녀전은 기(起承轉結)4단 구성을 취하였다. 이 구성에 따라 주요 내용과 그 특성을 살피도록 한다.

기단락(起段落)의 요지는, 사대부가에서도 나오기 어려운 선행(善行孝行)이 지위나 신분이 낮은데다 여자에게서 나왔으니, 이는 더욱 숭상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머리말로 천출(天出)의 효심은 지위나 신분남녀의 존비관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본질임을 암시하여 전기(傳記)를 서술해 나아갔다.

승단락(承段落)의 요지는, 어머니 병을 낫게 할 생각만 하였지 자신의 생명조차 돌보지 않은 효녀의 지성(至誠)은 하늘(天心)도 감동시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고, 고을 수령이 효녀의 선행을 조정에 알려 포상으로 가정의 부역을 면제받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향리(鄕吏)의 딸로 태어나 목숨을 걸고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한 효녀에게는 이미 하늘의 은혜가 있고 나라의 은혜가 있음을 특기하였다. 그러나, 작자는 향리 이양은의 딸이 이룩한 효행은 단순히 당세의 상()만 받고 그칠 일이 아니라 여기었다.

전단락(轉段落)의 요지는, 허벅지 살을 벨 때의 효녀의 지성은 비길 데 없이 숭고한 인간 정신의 드러남임을 극찬함에 있다. 작자는 전()의 단락에 와서 효녀를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 그것은 곧, 효녀가 어머니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허벅지살을 벨 때의 정경(情景)에 시선이 멈춰 있다. 처음은 무딘 칼로 베다 실패하고, 다시 칼날을 세워 손바닥만한 살점을 도려낼 때의 정경이다. 상상만 하여도 천고에 비길 데 없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효심에 작자가 놀란 것은, 하늘의 마음(天心天理)에 미친 효녀의 효심이 곧 천심(天心)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름을 도()라 한다.” 하였거니와 인성(人性)은 천리에서 온 것이요 이 성()을 따라 효도(孝道)를 실행하였으니, 효녀의 마음이 곧 하늘 마음임에 놀란 것이다. 그러기에, 작자의 시점이, 살을 벨 때의 무딘 칼과 날카로운 칼을 잡은 효녀의 행동에 가 있지 인육이 약효가 있는가에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천리를 논하고 인성을 논하며 제도상의 가장 상층에 존재하는 사대부가에서도 나오기 어려운 지성감천(至誠感天)의 효행이 비천한 신분의 향리가(鄕吏家), 그것도 여자에게서 나왔기에 대서특필하였다 하겠다.

결단락(結段落)의 요지는, 이 효녀의 지극한 성효(誠孝)는 국사(國史)에 효녀전(孝女傳)으로 길이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효행임을 거듭 천명함에 있다. 강고가 이 효녀전을 쓴 표면적 목적은, 만난을 극복하고 천심과 같은 효심을 발휘한 이 효녀를 입전(立傳)함에 있으면서도 이면적으로는, 인간의 성심(誠心)은 인위적 제도나 특정 계층의 편견으로 좌우될 일이 아닌, 고귀한 것임을 독자에게 일깨우려 함에 있었다 하겠다.

 

3) 소결(小結)

강고가 찬한 <이 효녀전>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먼저는, 신분의 장벽을 초월하여 이 효녀가 이룩한 지고지순한 효심(孝心)이 곧 천심(天心天理)임을 일깨우는 선심(善心)의 표본이 된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인위적인 제도나 관념화된 사고 저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근본적 가치가 있음을 일깨우려 한 데 있다 하겠다. 선조 서애(西厓)의 유훈대로 염선사(念善事)행선사(行善事)의 실행으로 향리(鄕吏)의 딸이 이룩한 효행을 천양하였거니와 이는 곧 어느 누구의 본질적 인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간성 옹호로 귀결되는 강고의 인간관이 빚은 결과(結果)라 할 수 있겠다.

 

2.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오를 만한 오 효부(吳孝婦)

1) 오 효부전(吳孝婦傳) -전문-

오 효부(吳孝婦)는 상주 덕촌(德村) 양가(良家)의 딸이다. 성품과 자질이 단정하고 깨끗하여 어려서도 장난스런 놀이는 하지 않았다.

나이 열 여섯에 진촌(津村)의 김씨 성(金氏姓)을 가진 자에게 시집갔는데 겨우 1년만에 남편을 잃었다. 졸곡(卒哭)을 잘 마친 뒤, 시부모에게 다른 자식이 없음을 염려하여 감정을 억누르고 슬픔을 참으며 진심으로 마치 처음 시집올 때와 같이 극진히 봉양하였다. 이윽고, 3년상을 마치자 그녀의 부모가 일찍 과부가 된데다 자식조차 없는 딸을 가엾이 여겨 그 뜻을 뺏고자 하였다. 하루는, 그녀를 집으로 오게 하여 만 가지로 타일렀으나 효부는 대답도 않고 곧 해질녘인데도 돌아왔다. 시부모가 괴이히 여겨 억지로 연유를 물으니 효부가 말하기를, ‘부모님의 뜻을 살피니 사람을 헤아릴 줄 모름이 있는 까닭에 머무를 수 없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시어머니가 시험삼아 말하기를, ‘우리 또한 애련하게 생각하니, 네 부모 말씀을 따름이 좋을 것같다.’라고 하자 오 효부가 속으로 흐느끼며 말하기를, ‘지아비가 죽어도 따라죽지 않았음은 시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끝까지 봉양못할진대 무엇 때문에 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남몰래 침방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목을 매었으나 집 사람들이 구하여 미수에 그치었다.

시아버지 병이 중함에 도와 보호함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급기야 죽음에, 초상이 난 뒤로부터 졸곡하고 제사함에 이르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유감됨이 없게 하였다. 시어머니가 늙어 물건을 보지 못하자 늘 강마을에 날씨가 따스하면 문득 손을 이끌어 담장 안을 한두 바퀴 돌아서 시어머니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드렸다. 가난하여 구차히 지내 고달픔에 지친데도 봉양함에는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아 혹 새로 나온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품어가 드렸다. 이같이 하기를 40여 년만에 시어머니가 천수를 다하고 마침에 상례와 제례의 모든 예절을 시아버지 상을 당한 때와 똑같이 하였다. 평생에 사람을 대하여 웃으며 말한 적이 없어 비록 이웃과는 집이 붙었는데도 그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으며, (효부의)나이가 이미 육십 사 세가 되었다. 금년(1825) 가을 태수 홍공(洪公)이 새로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향리 열효부(列孝婦)의 일을 듣고 공이 무릎을 치며 고상함에 감탄하여 쌀과 고기로 후하게 은혜를 베푼 까닭에 이에, 효부의 행실이 비로소 원근에 알려졌다 한다.

내가 강가의 언덕을 지나다가 이른바 효부의 집을 물었더니 낮은 울타리에 짧은 처마의 집이 좁고 초라한 동리 가운데 있어, 바라보니 절로 공경심이 일었다. 무릇, 지아비가 죽고 자식이 없는데도 시어머니를 봉양함에 변함없이 끝까지 제사를 받들어 모신 사람으로 옛날에 진효부(陳孝婦) 한 사람이 있더니 누가 알았으랴, 백세(百世) 뒤에 평민이 모여사는 한미(寒微)한 데에 다시 이같은 효부가 있을 줄이야. 누가 그 효행만 하겠는가, 누가 그 효행만 하겠는가! 비록 (진효부와) 아울러 열녀전(列女傳)에 편집하더라도 부끄러움은 없으리라.”

2) 구성상 주요 내용

위 효부전도 기(起承轉結)4단 구성을 취하였다.

기단락(起段落)의 요지는, 오 효부(吳孝婦)는 상주 덕촌(德村) 양가(良家)의 딸로, 성품과 자질이 단정하고 깨끗하여 어려서부터도 바른 몸가짐을 지니고 살았다는 내용이다.

승단락(承段落)의 요지는, 16세에 김씨 성을 가진 자(津村 거주)와 결혼하였으나 일년만에 남편이 죽었다. 따라 죽어야 하나 다른 자식도 없는 시부모를 차마 두고 갈 수 없어 봉양키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는 내용이다. 3년 상을 마치자 친정 부모가 딸을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시어머니가 시험삼아 개가하라 하자 목매어 자결하려다가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었다. 남편을 따르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남편을 낳아준 시부모님을 봉양함이 도리에 맞음을 실행으로 옮기었다. 효부의 효는 열을 겸하여 효열부(孝列婦)라 일컬을 만함을 작자는 결론으로 삼았다.

전단락(轉段落)의 요지는,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여 두 사람이 다 천수를 누리게 하였는데, 이같은 세월이 40여 년이요 효부의 나이 또한 64세가 되었다. 상주목사가 오 효부의 선행을 알고 미육(米肉)으로 후한 포상을 내려 비로소 효부의 일이 널리 알려졌다는 내용이다. 시아버지에게 행한 효성은 물론 시어머니에게는 더욱 지극함이 있었다. 나이들어 시어머니가 앞을 못 보자 따스한 날이면 손을 잡고 담장 안을 한두 바퀴 돌아 울적함을 풀어주고, 새로운 물건이 나면 반드시 품어가 시어머니에게 드렸다. 16세에 결혼하여 일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자식도 없는 청상과부로서 친정 부모의 개가 종용이나 시어머니의 떠본 말에도 자결을 결행하려 했던 오 효부, 40여 년 효행에 자신도 이미 64세가 되었다. 남편에 대한 정과 의리가 없었다면 효부의 성효(誠孝)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단락(結段落)의 요지는, 효부가 사는 집만 보아도 공경심이 인다는 작자의 술회다. 나아가, 작자는 한() 나라 때 진 효부(陳孝婦)가 행한 효행과 똑같아 나란히 열녀전(列女傳)에 올려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한나라 진 효부의 효행을 그 개요만 살펴 오 효부전과의 대비를 통하여 결론을 맺고자 한다.삼강행실도에서는 주자가소학선행 명륜에서 소개한 진 효부의 효행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알맞게 요약하여, 본 고에서는소학에 소개된 진 효부(陳孝婦)의 효행을 4단 구성에 따라 요약한다.

기단락(起段落). ()나라 진현(陳縣)의 효부가 나이 16세에 시집가서 자식을 두지 못하였는데 남편이 국경의 수자리로 가며, 사생을 알 수 없으니 노모를 부탁하여 효부가 이에 허락하였다.

승단락(承段落). 남편이 죽었으나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여 고부 사이가 화목하였다. 진 효부가 길쌈하고 베짜서 생업을 유지하면서도 끝내 개가할 뜻은 없었다.

전단락(轉段落). 3년상을 마치자, 친정 부모가 딸이 일찍 과부가 된데다 자식조차 없어 개가를 종용하였다. 진 효부가 말하기를, 남편과의 약속을 어김은 신의(信義)를 저버림이라 무슨 낯으로 살겠는가 하고, 자결하려 하여 부모도 다시는 권하지 못 하였다. 28년 간 시어머니를 봉양하여 80여 세에 죽자 전답과 주택을 팔아 장례를 치르고 끝까지 제사를 지냈다.

결단락(結段落). 회향태수(淮陽太守)가 진씨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황금 40근을 하사하고 복호(復戶)를 내렸으며 효부(孝婦)라 이름하였다.

 

3) 소결(小結)

기단락(起段落)의 오 효부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천성대로 몸가짐부터가 단정하였다. 한편, 한나라 진 효부는 16세에 남편을 만났으나 수자리에 나아갔다가 죽었다. 진 효부는 남편이 어머니를 부탁함에 어떤 경우에라도 모시겠다고 하였다.

승단락(承段落), 오 효부가 16세에 결혼하여 이듬 해에 남편이 죽었으나, 친정 부모의 개가 종용이나 시어머니의 개가를 떠본 말에도 자결하려 하였다. 한편, 진 효부는 길쌈하고 베를 짜서 생계를 꾸리며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전단락(轉段落), 오 효부가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어 천수를 누리게 한 세월이 40여 년이요 자신도 64세가 되었다. 상주목사가 오 효부의 선행을 가상히 여겨 미육(米肉)으로 후하게 포상하여 그 효행이 원근에 비로소 알려졌다. 한편, 진 효부도 친정 부모의 재가 종용에 죽음으로 맞섰고, 신의(信義)를 지켜 28년 간 시어머니를 모시어 80여 세의 천수를 누리게 하였으며, 전답과 집을 팔아 장례를 치르고 끝까지 지성으로 제사하였다.

결단락(結段落), 오 효부의 효행은 열()을 겸한 것으로소학에 오를 만하고삼강행실도에 실릴만 하다고 하였다. 한편, 진 효부는 회양태수가 그 선행을 천양하여 조정에서 포상하고 효부(孝婦)’라 이름하였다.

실로 두 효부의 행적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효성이란 점에서 너무도 닮았다. 내용상으로 보아 진 효부가 생활고에 더 쪼들린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시어머니 봉양이 28년이다. 이와 달리 오 효부는 생활고에 대한 언급은 간략하였으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두 분을 모신 지 40여 년에 자신도 64세에 이르렀다. 환경의 상이(相異) 너머에 천고에 희귀한 두 효부의 넋은, 경중고하로 논할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강고(江皐), 한나라 진 효부가 백세 뒤에 조선의 오 효부로 환생한 듯이 여겼을 것이기에 두 효부를 아울러 열녀전(列女傳)’에 편집하여도 조금도 괴이할 것이 없다고 단언한 것이라 하겠다. <오 효부전> 역시 한 효부의 선행을 천양함에 그치지 않고, 천부적 인간성은 그 누구에게나 숭고한 것이어서 존중되고 옹호되어야 한다는 강고(江皐)의 인간관을 보인 전()이라 할 수 있겠다.

 

3. 신분적 제약을 초월한 이명구 가(李明九家)의 탁행(卓行)

이 항에서는, 상주 향리(鄕吏)의 후예란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며 군자유(君子儒)를 지향했던 이명구(李明九)가 열 일곱 분 선조의 행적을 기술한 글 모음집인월성세장(月城世狀)을 편집하고, 강고(江皐)에게 그 발문을 청하매 이에 응해 쓴 <서 세장 후(書世狀後)>연조귀감(掾曹龜鑑)에 등재되어 이를 살피고자 한다.

1) 서 세장 후(書世狀後) -전문-

이족(吏族)에서 옮겨 유행(儒行)으로 나아간 자는 천 백 인 가운데 한 사람 정도인데 내가 본 바로는 이명구(李明九)가 거의 그런 사람인 듯하다. 나와 이생(李生)은 오래되어 더욱 친밀해져 진실로 온 마음을 기울여 학문에 뜻을 두고 그 길로 나아가 참으로 유가(儒家)의 기풍과 뜻과 의지가 있음을 사랑하였는데, 그 유래한 바는 우연이 아니다.

지금 월성세고(月城世稿)를 보니, 과연 어긋나지 않는다. 대개, 대대로 물려받은 아름다움은 이미 여러 무리 중에서 기이함이 있었고, (이명구의) 10세조 증 참판 기연(起鍊)에 이르러서는 왕자 사부(王子師傅) 하락(河洛)을 사사(師事)하여 심히 밀어주고 격려해 줌을 입었었다. 우리 선조 문충공(文忠公西厓)이 상주목사로 부임함에 미치어서는 사부훈장(四部訓長)으로 기용하여 기대함이 특별히 두터웠음은, 우리 선조께서 반드시 취할 만한 까닭이 있었음에서 였을 것이다.

그의 아들 동지중추부사 경남(景南)은 충효(忠孝)와 지절(志節)이 있고, 어버이를 섬기되 증민(曾閔)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었다. 임진왜란(1592)을 당하여 적개심에 의분을 떨치고 일어나 향리의 사람들과 감사대(敢死隊)가 되기로 약속하여 성공하지 못하고 무고를 당하여, 억울하게 관아의 서리(吏役)로 종사하게 되었으니 운명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한 조각 참된 충성은 죽음을 각오하여 후회함이 없었다. 서궁(西宮) 유폐의 논의가 있던 날은 상소문을 지니었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함락된 뒤에는 구슬같은 눈물을 흘렸으니, 그의 충의로 이는 분노가 격렬함은 또 어떠하였던가. 이로부터는 변함없이 선대의 사업을 이어 세대(世代)로 기술(記述)함이 있으며, 명구의 아버지 복운(復運)은 타고난 성품이 맑고 빼어나 식견이 남달리 뛰어났으니 연리가((掾吏家)에 이같은 기재(奇材)가 났으나 아깝게도 불행히 단명하였다.

, 갓이 선비요 옷이 선비라 이름()은 맞으나 실제()는 아닌 자가 도도함에랴. 곧 명구 가(明九家)는 전하여 지킬 것을 익히 익혔으니, 이름은 비록 아전()이나 그 실제를 살피면 선비()일 뿐이다. 명구(明九)가 그 가문에서 태어나 선조에 대하여 마음씀이 깊고 두터워 이 원고를 모음에 부지런히 하고 게으르지 않았다. 장차 이로써 지난 일을 미루어 헤아리고 옛 사람의 글을 읽으며 군자유(君子儒)를 사모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처지를 가지고 덮어 가릴 일이랴. 내가 명구에게 이르기를, ‘이 원고를 삼가 잘 보존하여라. 이는 단지 네 가문만이 대대로 지킬 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만포(晩圃) 류심춘(柳尋春) .”

 

2) 구성상 주요 내용

위의 글 역시 기(起承轉結)4단 구성을 취하였다.

기단락(起段落)의 요지는, 이족(吏族)의 후예로 유행(儒行)을 지닌 이가 천 백 인 중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가운데서 이명구(李明九)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였다. 유자(儒者)의 품행과 행실을 지닌 이명구가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란 전제로 글을 이끌었다.

승단락(承段落)의 요지는,월성세고를 보니 이명구같은 인재가 태어날 만한 그의 선대의 업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명구의 10세조 기연(起鍊)은 왕자사부 하락(河洛)의 제자요, 작자의 선조 문충공 서애가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흥학육영의 선정을 베풀 때 상주읍 사부도훈장(四部都訓長)으로 기용한 큰 선비였다. 이명구 가의 근원은 유자(儒者)였음을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전단락(轉段落)의 요지는, 실제()는 유자(儒者)인데 이름()은 이속(吏屬)이라는 신분상의 멍에는 한낱 인위적 제도에 불과함을 입증한 것이다. 이경남은 충효와 지절이 있어 임란에 구국(救國)의 앞장에 섰으나, 천추에 한이 된 무고를 당하여 유자(儒者)가 이속(吏屬)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충신 열사만이 할 수 있는 충의는 신분 때문에 변하지는 않았다. 충의로 호조참의가 증직되고 향토사에서는 충신으로 입전하였다. 강고의 전() 설정은, 인위적 제약도 진심성심 앞에서는 장벽이 될 수 없음을 보이려 한 데 있다고 하겠다.

결단락(結段落)의 요지는,월성세고는 한 가문의 훌륭한 세장(世狀)일 뿐 아니라, 만인이 본받아야 할 진유(眞儒)의 표본임을 추천함에 있다 하겠다. “떳떳한 생업이 없는데도 떳떳한 마음(恒心)을 지닌 자는 오직 선비()라야 가능하다.”라고 한 맹자의 말이 있듯이, 신분이 이()에 속하고도 항심(恒心)으로 충심(忠心)10()토록 지니고 실행한 기록물인월성세장이야말로 한 가보(家寶)로서만이 아니라 만인의 귀감(龜鑑)으로서 그 존재 가치가 있다고 작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3) 소결(小結)

이명구 가(李明九家)월성세장(月城世藏), 향리란 신분적 제약을 초월하여 참 선비참 인간의 모습을 담은 10() 선행(善行忠孝)의 표본이라 하겠다. 이는, 항존(恒存)해야 할 항심(恒心)의 표상(表象)이 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저술임을 작자는 거듭 강조하였다. 이름()과 실제()가 상반되는 선비가 도도하던 시절에, 이름은 비록 이()나 실제는 선비인 이명구(李明九)이명구 가(李明九家)를 통하여 강고가 궁극적으로 보이고 싶었던 작가의식은 역시 인간성 옹호로 귀결된다 하겠다.

 

4. 사람의 가치를 일깨운 옥계유고(玉溪遺藁)

이 항에서는, 신분상으로는 역리(驛吏)의 후예나 효와 학문과 교육, 문학상에서는 사표(師表)가 될 만한 행적을 이룬 옥계(玉溪) 강봉문(姜鳳文)의 유고에 발문을 쓴 강고의 인간관을 살핌에 주 목적을 둔다.

 

1) 서 옥계유고 후(書玉溪遺藁後) -전문-

백성이 모여 사는 여항(閭巷)의 지위나 신분이 낮고 천한 데 처하여서는 다만 열심히 농사지어 생계를 유지하면 만족할 일인데도, 또 어찌 글을 배우고 자신의 처지에 맞는 처세의 방법을 지킴이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본분임을 알았으랴. 오직 타고난 성품의 온전함이 처음에는 지위나 신분의 한계가 없는 까닭에 간혹 분발하여 떨치고 일어나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부지런히 힘써 이룩함이 미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자인즉 유가(儒家)에서 생장하여 학술로써 가업(家業)을 계승하는 자와 같아 보이니, 더구나 어찌 존중하지 않으랴.

근세 화산(花山안동)에 옥계처사(玉溪處士) 강군(姜君)이 있는데 그 가문은 역리(驛吏)요 직분은 농업이었다. 깨우쳐 가르침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서 능히 일찍이 분발하여 온 마음을 기울여 학문에 뜻을 두고 그 길로 정진하여 강포(江浦) 유공(柳公)을 좇아 사자서(四子書)를 수학하였다. 또 차례로 문학가를 찾아가 강설(講說)하고 논란(論難)하되 근본 뜻을 깨달은 뒤에야 그치었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어버이를 섬김에 극진히 봉양하였고, 정성과 예의를 고루 갖추어 아버지 상()에는 철죽(啜粥)의 슬픔을 다 하였으며, 어머니 병 중에는 겨울에 뱀을 구하는 기이한 일이 있음에 향리에서 찬탄하여 효성의 소치라고들 여기었다. 두 아우와는 기뻐하고 화락하여 한 집안에서 살되 정의와 의리를 겸하여 다 하였다.

마을의 수재를 잘 격려하고 이끌되 재능에 따라 교육하여 성취한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일찍이 향해(鄕解)에 합격하여 회시(會試)에 나아갔다가 야박한 풍습을 보고는 드디어 포기하고 다시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다.

만년에 옥계(玉溪) 한 구역을 가려 살았는데 시냇물이 졸졸졸 흘러 경박한 세속의 티끌이 이르지 않아 그 곁에다 집을 짓고, 농사를 감독하고 배우러 오는 이를 가르침에 몸을 마치어도 후회는 없었다. 아마, ()과 같은 이야말로 또 어찌 지위나 신분으로써 제한할 수 있으랴. 도리어 나로서는 거듭 경외(敬畏)함이 있다. ()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 늘 두려워 할 외() 한 자()를 지니고 살았다. 대개, 두려워 한 외자(畏字)의 뜻은 가장 공경()함에 가까우니 진실로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그것은 심신을 수양하는 도리에 있어서 반은 넘은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의 이 말이 어찌 체험하여 얻은 바 없이 한 말이랴.

아깝구나. 명성(名聲)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 표창하고 찬양함이 후세에 미치지 못하여, 공연히 옥계수(玉溪水)로 하여금 모() 처사(處士)가 갓끈을 씻은 곳이 여기라고 가리켜 보임에 그치게 하였도다. ()의 손자 주복(周福)이 유고(遺藁)와 부록(附錄)을 가지고 두루 제가(諸家)를 찾는 중에 나에게 와서 한 마디의 말을 구함이 더욱 근실하여 부득이 마음에 느낀 바를 써서 돌려 보냈다.”

2) 구성상 주요 내용

이 글 역시 4단 구성을 취하여 각 단락을 따라 주요 내용을 살피기로 한다.

기단락(起段落)의 요지는, 역리(驛吏)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옥계(玉溪) 강군(姜君)에게는 유가(儒家)의 가업(家業)을 계승한 듯함이 있었다는 말로 집약된다. 이는, 비천한 지위나 신분의 한계(吏族)를 극복함에 천부의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로 가히 인간 승리라 일컬을 만하다. 이 인간 승리는 옥계(玉溪)에게 있어서는, ‘천부지전(天賦之全)’ 타고난 성품의 온전함은 사람이면 다 같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데 불과하다.

승단락(承段落)의 요지는, 화산(花山)의 옥계처사(玉溪處士) 강군(姜君)은 이족(吏族)이면서도 사대부가 이루기 어려운 학문효우(孝友)교육지조(志操) 등에 특출함이 있었다 하였다.

첫째, 이족(吏族)으로서 학문에 뜻을 두어 당대 석학이었던 강포(江浦) 유홍원(柳弘遠)의 문하에 나아가 실천 유학의 근본이 되는 대학중용논어맹자를 배워 실천 위주의 학문을 숭상하였다. 나아가, 당대의 문학가(文學家)를 찾아가 견문을 넓히고 지식의 극대화를 꾀하였다.

둘째,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나, 가까울수록 정의와 의리(恩義)를 겸행하였다.

셋째, 후진을 양성함에 각자의 재능에 맞게 교육하여 성취한 제자가 많았고, 옥계는 사표로 존중될 만하였다.

넷째, 선비 본연의 자세를 지키려는 지조(志操)가 있어 명리의 각축장이 된 과거장에 나아가지 않았다.

승단락(承段落), 기단락의 유가에서 태어난 듯함이 있다고 전제한 말을 실증해 보인 단락이다. 선비도를 지켜, 학문과 문학에 일가를 이루고, 효우를 실천하였고, 교육자로서 사표가 되었고, 지향하는 바의 뜻을 지녀 명리를 쫓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상의 네 가지는 보통의 선비로서는 그 중의 하나에 능하기도 어려운 일들인데, 옥계가 이를 겸행하였다고 한 것이다.

전단락(轉段落)의 요지는, “농사를 감독하고 배우러 오는 이를 가르침에 몸을 마치어도 후회는 없었다.”(課農訓學以沒其身而無悔)는 말 속에 다 함축되었다. 크게 쓰일 동량재나 인위적 제도의 굴레(吏族)를 초극하는데도 얼마나 피나는 아픔이 있었던가는 위의 네 가지를 이룬 사실로 대신하였다. 나아가, 농사로 생업을 삼고 선비로서 후진을 양성함에 생애를 다한 것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통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도(儒道)에 성실하였고, 끝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 없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기에 남을 원망하여 성낼 일이 없는 군자(君子)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이 단락은 논리 전개상의 전환으로 삼은 단락이라 하겠다. 한 마디로 인도(人道敬畏)로써 천도(天道)에 접근하려 한 옥계처사야말로, 하찮은 인위적 제도로 평가될 차원은 이미 넘은 존재라고 강고는 보았다 하겠다.

결단락(結段落)의 요지는, 세상에 옥계처사가 고결한 은군자(隱君子)였음을 아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옥계수(玉溪水) 뿐이라 귀결지었다. 옥계처사의 손자 주복(周福)이 처사의 유고인옥계유고(玉溪遺藁)에 발문을 써 달라 했을 때 강고(江皐)가 허락하여 쓴 것은, 옥계처사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고결(高潔)한 영혼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3) 소결(小結)

옥계유고(玉溪遺藁)에 쓴 강고(江皐)의 발문은 그 주안점이 글(詩文)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시를 외고 글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는가.” 라고, 맹자(孟子)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강고는 저자의 사람됨을 살핌으로써옥계유고를 읽는 이로 하여금 글을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하였다고 하겠다. , 고결한 군자에게서 나온 글임을 언외(言外)로 천거한 것이라 할 만한 발문이다. 강고의 양선사상(揚善思想), 2백 년 전(1829년 옥계유고 발간)에 그의 인간성 옹호라는 인간관(人間觀)에 근원한 것임을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보다 근대화된 사람 중심의 인간관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그 사람이 행한 선사(善事)와 비례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 옥계유고의 발문이라 하겠다.

 

 

. 맺는 말

본 고는,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17621834)이 지은 전기(傳記) 두 편과 발문(跋文) 두 편을 통하여 그의 양선사상(揚善思想)이 사람은 인도(人道)로써 대우하여야 한다는 인간성 옹호 정신의 근원임을 확인하였다.

<이 효녀전(李孝女傳)>의 주인공 이 효녀는, 장수현 향리(鄕吏) 이양은(李良溵)의 딸이다. 어머니에게 바친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이 효녀의 효심(孝心)은 천심(天心)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인위적 제도상의 한계 곧 이족(吏族)이라는 굴레를 짊어진 채 인간의 본성본심을 효성으로 발휘함으로써 효녀의 표상(表象)이 될 만하여, 향사(鄕史)에 효녀로 입전(立傳)되고 국사(國史)에 효녀로 입전될 만한 효행의 주인공으로 이 효녀를 천양하였다. 천심(天心天理)에 닿은 효심(孝心)을 지닌 이 효녀야말로, 지위나 신분으로 논하기에는 이미 어떤 것으로도 제약할 수 없는 인간성 본연의 모습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참 사람임을 강고는 확인하였다.

<오 효부전(吳孝婦傳)>의 주인공 오 효부는, 상주 덕촌(德村) 양가(良家)의 출신으로 진촌(津村)의 한미(寒微)한 김씨 가(金氏家)로 출가한 부인이다. 주자(朱子)에 의하여 효부의 표상이 되어소학선행 명륜편에 입전된 한()나라 효부 진씨(陳氏)의 효행에 조금도 손색없는 효행을 이룩함으로써 조선의 효부로 중국의 효부와 나란히 열녀전(列女傳)에 오를 만하다고 하였다. 강고가 오 효부나 진 효부가 다 남이 할 수 없는 효성을 다한 근원에는, 남편에 대한 정의(情義)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절조가 있었기에 효열(孝烈)의 실행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중국의 효부와 나란히 방명을 남길 만한 조선의 효부가 상주 진촌(시가)에 살았음을 특기하였다. 이는, 강고의 양선사상이 인간성의 존귀함을 일깨움에, 지극한 효행의 주인공은 지역의 대소신분의 귀천과는 관계없이 그 존재 자체가 존귀함을 보여 주였다고 하겠다.

<서 세장 후(書世狀後)>, 상주의 연리 가(掾吏家)인 월성 이씨 후손인 이명구(李明九)가 그의 선조 열 일곱 분의 행적을 세대별로 기술한月城世狀에 강고가 쓴 발문이다. 사대부가에서도 행하기 어려운 10세간(十世間이명구 기준)의 충효(忠臣 3효자 3, 상산지 등재) 세적(世蹟)은 이미 인위적 신분 제한을 초극한 만인의 귀감(龜鑑)이 되었음을 강고가 천양하고, 나아가 명실(名實)이 상반된 사대부가의 경종(警鍾)으로 내건 것이라 하겠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에 있음을 깨우치려 한 강고의 양선사상은 충효가(忠孝家)를 통하여 역시 인간성 옹호로 귀결시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 옥계유고 후(書玉溪遺藁後)>, 화산(안동)의 역리(驛吏) 후손인 옥계(玉溪) 강봉문(姜鳳文)의 문집에 쓴 발문이다. 조선조 제도상 이족(吏族)이란 이름()은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인간적 가치를 군자유(君子儒) 지향으로써 실천 위주의 유학자요, 효우 실행의 자식이요, 인재 양성의 사표(師表), 선비도()를 지킨 지조인임을 강고는 확인하여 천양하였다. 만인의 인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강고의 인간관은 보다 근대화된 관()으로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행한 일의 가치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근 이백 년 전에 일깨워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강고(江皐)의 양선사상(揚善思想), 인간성(人間性) 옹호(擁護)로 발현되어 본심(본성)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홀시될 수 없으며, 나아가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행한 일의 가치로 측정됨을 일깨우는 데까지 미치었다.

오늘날에도 고하(高下)를 따지고 존비(尊卑)를 따지는 부류가 있음을 생각하면, 강고(江皐)야말로 2세기 전에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행하는 일의 진실성과 비례함을 일깨운 선각자적 큰 선비였다 하겠다.(火旺山 禮東房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