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상주 모습(Ⅰ)
상주문화원 원장
김 철 수
1. 머리말
상주는 근 200년 동안 경상도를 관할했던 웅군(雄郡)이었으며 경상감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우리 상주의 역사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상주읍성(尙州邑城)이 헐려지고, 그 안에 있던 경상감영의 주요 건물도 사라지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
그래서 과연 일제강점기에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가는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는 숙제였다. 그러다가 작년 상주박물관에서 일제강점기에 찍은 상주읍성의 4대문 사진을 어렵게 입수해서 전시를 하여 머릿속으로 상주성의 모습을 그릴 수가 있었다.
얼마 전, 경북대의 엄창옥 교수가 책을 하나 보내왔는데, 내가 찾던 책이었다. ‘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라는 책이었고, ‘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저자는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학부의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교수였으며, 이 책이 바탕이 된 논문으로 도쿄(東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상주에서 2년 동안 자료를 수집했던 분이었다.
그리고 번역을 해 주신 분은 도시샤(同志社)대학의 글로벌지역문화학부의 홍종욱(洪宗郁) 박사와 중앙대학교 교양학부의 이대화(李大和) 박사였다.
반가워서 단숨에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궁금했던 일제강점기의 상주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만 가지고 있을 지식이 아니다.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가진 분들에게도 이를 알려드려야 하겠다 하는 생각으로 본문을 발췌하였고, 다른 보충자료를 추가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2. 상주의 식민지화
‘식민지화(植民地化)’라는 관점과 ‘도시화(都市化)’라는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동안 상주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상주가 식민지화(植民地化)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현상은 ‘지방지배체제’의 전환이고, 상주로 이주해 온 일본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이다.
조선시대 때의 지방지배체제는 목사(牧使)와 향리(鄕吏)체제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지방지배체제가 어떻게 전환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일병합 이후, 우리에게 새로 도입된 ‘군인과 경찰’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와 지방의 지배체제가 재편성되는 과정에서 ‘관료제’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지방지배체제(地方支配體制)의 재편성(再編成)
(1) 수비대(守備隊)·헌병대(憲兵隊)·경찰(警察)의 출현
‘수비대(守備隊)’, ‘헌병대(憲兵隊)’, ‘경찰(警察)’은 이미 있었다. 여기에서 ‘수비대와 헌병대’는 식민지 권력의 폭력장치였다.
먼저 ‘수비대(守備隊)’는 1882년의 임오군란(壬午軍亂) 후의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 공사관(公使館)의 호위를 위하여 조직한 순수 군대조직이었다.
‘헌병대(憲兵隊)’는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서 군대에 관한 사법(司法)과 행정경찰을 주된 임무로 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무렵부터 일본은 우리 경찰권을 무단으로 침해하면서 보통경찰의 영역까지 확대하였고, 1907년 이후 항일의병투쟁이 고조됨에 따라 ‘치안 유지’의 주체(主體)가 되었다.
‘경찰권(警察權)’은 종래에 관찰사나 수령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내부(內部) 아래에 경무청(警務廳)이 설치됨으로, 독립된 경무서(警務署)가 조선의 경찰권을 맡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수비대․헌병대․경찰은 모두 일본이 주도하는 폭력장치였으며, 특히 1900년대 후반부터 1910년까지 지방(地方)까지 깊숙이 침투해 왔다.
상주에 수비대(守備隊)가 들어 온 것은 1907년이다. 이 해 여름에는 한국 군대의 해산 등으로 의병운동이 다시 불타 올랐고, 가을에는 의병부대의 투쟁이 강원도․충청도에서 경상도 북부로 옮겨졌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한국주차군(駐箚軍)은 상주수비대(守備隊)를 증강 배치하였다.
1907년 12월에는 대전(大田)에 주력을 둔 일본보병 제47연대 산하 제1대대 본부를 상주에 두었다. 그리고 함창과 화령에는 보병 소대가 배치되었고, 낙동에는 보병 1개 분대가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군은 5월에 상주에는 상주수비구(尙州守備區) 대대를 설치하였고, 함창에는 보병 중대, 옥산과 낙동에는 보병 분대를 배치하였으며, 화령장에는 대전수비구(大田守備區) 관할의 보병 소대를 배치하였다.
<표 1> 상주지역 한국주차군 수비대의 편제
| 연대(聯隊) | 상주 (尙州) | 낙동 (洛東) | 옥산 (玉山) | 화령장 (化寧場) | 함창 (咸昌) |
1907년 12월 | 보병 제47연대 | 제1대대 | 보병 분대 | - | 보병 소대 | 보병 소대 |
1908년 5월 | 보병 제47연대 | 상주 수비구 대대 | 보병 분대 | 보병 분대 | 대전수비구 보병소대 | 보병 중대 |
1908년 11월 | 보병 제47연대 | 제1대대 | - | 보병 분대 | - | 보병 중대 |
1909년 8월 | 임시한국파견 보병 제1연대 | 보병 중대 | - | - | - | - |
이렇게 수비대 병력이 증가하는 것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서서히 형성되고 있던 상주의 일본인 사회였다.
당시 상주지역에는 전투가 거의 없었지만, 문경 등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래서 문경이나 예천에 살던 일본인 일부는 상주로 피난 와서는 18세~40세 남성들이 ‘자위대(自衛隊)’를 조직하고 우편국(郵便局)을 중심으로 상주성내(城內)에 결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대전수비대로부터 중대병력이 파견되어 왔기 때문에 의병활동으로 공포와 멸시를 받았던 일본 사람들은 “어두운 밤에 불빛을 찾은 듯한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1908년에 들어서면서 의병부대와 일본군 사이의 대규모 전투는 감소했기 때문에 상주에 주둔했던 수비대의 역할도 자연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09년 겨울에는 아예 수비대가 철수했다.
그러나 소규모의 전투는 오히려 증가되자, 일본은 수비대(守備隊) 대신에 조선 전역에 헌병대(憲兵隊)를 투입하였다.
1906년 12월에 상주경찰서는 경무분서(警務分署)와 고문분견소(顧問分遣所)를 설치하였다. 이때 상주경찰서는 상주군 뿐만 아니라 함창·예천·용궁·문경·선산·해령(海寧)까지 관할하였고, 이노우에(井上) 고문보좌관(顧問輔佐官) 밑에 25명의 보조원이 배치되었었다.
조선이 경찰 업무를 일본에게 위임하자, 경무분서(警務分署)는 경찰분서(警察分署)로 개칭하였고, 1908년에는 이 분서(分署)가 경찰서로 개칭되었다.
1910년 6월. 상주경찰서는 이웃 선산으로 옮겨가고, 상주의 경찰사무는 1919년까지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가 담당하였다.
<표 2> 상주지역 헌병대 시기별 편제
계 그중 보조 원수 | 분견소 소재지별 내역 | |||||||||||||
尙州 | 洛東 | 玉山 | 功東 | 芝山 (牟 西) | 壯岩 (化北) | 佳谷 (外西) | 化東 | 化寧場 | 咸昌 | 胎封 | 枾岩 | |||
1908. 7.18 | 73 | 48 | 大 25 | 大 12 | 大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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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 12 | 大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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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7. 1. | 87 | 50 | 金 10 | 金 10 | 金 10 | 金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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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咸 10 | 咸 27 | 咸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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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 1. | 89 | 50 | 金 12 | 金 10 | 金 10 |
| 金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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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咸 10 | 咸 27 | 咸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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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0.20 | 80 | 45 | 金 15 | 金 7 | 金 9 |
| 金 7 | 金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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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 7 | 咸 24 | 咸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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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7.30. | 81 | 45 | 金 16 | 金 7 | 金 9 |
| 金 7 | 金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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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 7 | 咸 24 | 咸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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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4. 1. | 82 | 45 | 金 17 | 金 7 | 金 6 |
| 金 7 | 金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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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 6 | 咸 23 |
| 咸 10 |
1913.9.12. | 85 | 48 | 金 20 | 金 v7 | 金 6 |
| 金 7 | 金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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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 6 | 咸 23 |
| 咸 10 |
1914.3. 1. | 83 | 47 | 尙 26 | 尙 8 | 尙 7 |
| 尙 7 | 尙 6 | 尙 7 |
| 尙 7 | 尙 9 |
| 尙 6 |
1915.6. 1. | 81 | 46 | 尙 24 | 尙 8 | 尙 7 |
| 尙 7 | 尙 5 | 尙 6 | 尙 3 | 尙 7 | 尙 9 |
| 尙 5 |
* 표 안의 수는 헌병대원을 나타낸 것이다.
* 분견소별 내역 란은 대구분대(大邱分隊)에 속한 경우는 ‘大’, 김천분대(金泉分隊)는 ‘김(金)’, 함창분대(咸昌分隊)는 ‘함(咸)’, 상주분대(尙州分隊)는 ‘상(尙)’의 기호를 붙였다.
* 고딕체 란은 사관(士官) 이상이 파견된 분견소를 가르킨다.
한말(韓末)에서 1919년까지는 ‘헌병경찰제도’가 도입되어 있었으며,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상주는 거의 헌병대에 의해 치안이 지탱되었다. 그리고 의병투쟁이 격심했던 1908~1909년에는 행정구역과 관계없이 헌병대가 편제되어 있었다.
이때 헌병대는 경찰업무만이 아니라 행정면에도 광범위하게 관여하였다. 산견(山繭)공동판매에도 헌병이 입회관(立會官)을 맡을 정도로 헌병대가 상주사회에 침투해 있었다.
그러나 1919년 8월. 조선 전역에서 이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래서 상주에서는 상주경찰서가 설립되어 헌병 분대로부터 일체의 사무를 인계받았다. 기존의 헌병대 파견소(派遣所)와 출장소(出張所)도 모두 경찰관 주재소(駐在所)가 되었다.
이것은 얼핏 보면 경찰 권력의 후퇴로 볼 수 있으나, 오히려 말단 경찰력은 확장되었다. 그 때까지 헌병대의 파견소나 출장소가 없던 면(面)에도 경찰서 출장소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 3월에 사벌면, 4월에 중동면, 5월에 공검면과 외남면, 6월에 은척면에 경찰 주재소가 신설되어 1면(面) 1주재소(駐在所)의 원칙이 달성된 것이다.
또한 1921년 6월에는 16,900원이라는 거액을 들여서 상주경찰서 청사를 준공하였다. 이때 경찰관의 수는 <표-3>과 같다.
<표-3> 상주의 경찰관과 주재소 수
| 경찰(警察) | ||||||
경부 (警部) | 경부보 (警部補) | 순사부장 (巡査部長) | 순사 (巡査) | 계 (計) | 주재소 (駐在所) 수(數) | ||
1924년 | 일본인 | 1 | 2 | 9 | 40 | 52 | 17 |
조선인 | 1 | 0 | 1 | 42 | 44 | ||
계 | 2 | 2 | 10 | 82 | 96 | ||
1928년 | 일본인 | 1 | 2 | 0 | 40 | 43 | 16 |
조선인 | 0 | 1 | 0 | 36 | 37 | ||
계 | 1 | 3 | 0 | 76 | 80 | ||
1937년 | 계 | 1 | 3 | 17 | 62 | 83 | 16 |
<표-3>을 보면, 경부(警部)나 경부보(警部補) 뿐만이 아니라 순사(巡査)도 일본인이 반 이상을 차지하였고, 면(面)의 주재소까지 일본인들이 파고들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관료조직의 말단인 면사무소의 직원들이 거의 조선인인데 비해서, 치안조직에서는 명백하게 식민지통치기구로서의 성격을 갖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관료기구의 재편성
러일전쟁 종결 후인 1905년 11월, 소위 제2차 한일협약(韓日協約)으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방행정기구는 1905~1910년 사이에 징세(徵稅)제도를 크게 개편하였다. 이는 종래에 수령(守令)-향리(鄕吏)에 의한 징세체제를 일신(一新)하여 징세기구 전체를 일본이 장악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의 결과로 ‘재무감독국(財務監督局)’ 관제(官制)와 ‘재무서(財務署)’ 관제가 공포되어서, 일본인 관리가 한국 정부의 지방징세기구로 진출할 수 있게 하였다.
1908년 당시. 상주재무서에는 주사 이상 직원 6명 중에 일본인 관리들이 3명이고, 조선인 관리가 3명이었다. 정3품직의 서장은 조선 사람이었다. 이는 정식으로 한일병합이 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서장(署長) 백락진(白樂晉, 정3품)
주사(主事) 천정성일(淺井誠一), 송문조(宋文朝), 조긍현(趙兢顯, 9품), 상전문삼(上田文三), 송전문웅(松田文雄)
재무서가 설치됨에 따라 군수(郡守)나 향리층(鄕吏層)은 징세기구에서 형식적으로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수 아래에 있는 면장 등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 등으로 해서 군수의 경우는 행정에서 완전 분리할 수 없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가장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 이족(吏族)들이었다.『상주목선생안(尙州牧先生案)』에 호장(戶長)․이방(吏房)이라는 향리직(鄕吏職)이 기록된 것은 1908년 6월에 부임한 이인용(李寅用) 군수 때가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에는 이런 향리직의 기재가 없다.
따라서 군수를 정점으로 한 군청(郡廳)이 징세기구가 되면서 향리는 지방행정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한편 ‘면(面)’이 말단 행정단위 역할을 키워나갔다. 1910년 9월에 조선총독부는 ‘면제(面制)’의 시행을 적극 추진하였다. 당시 상주는,
첫째로, 면(面)을 통폐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3월 1일에 군(郡) 통폐합을 시행하고, 4월 1일에는 면(面) 통폐합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317개 군(郡)은 220개로, 4,337개 면은 2,522개로 정리되었다.
따라서 통폐합전에는 상주가 22면이었고, 함창이 7면이었으나, 함창현이 상주에 통합되었음에도 상주군은 18개면이 되었다.
<표-4> 상주군 행정구역의 변화
| 구면(舊面) | 신면 (新面) | 행정(行政)동리(洞里)의 수(數) |
尙州牧 | 內東面·內南面· 內北面·內西面 | 尙州面 | 33 |
外北面·大坪面· 中北面 | 沙伐面 | 15 | |
長川面·外東面 | 洛東面 | 17 | |
靑南面·靑東面 | 靑里面 | 12 | |
功東面·功西面· 靑南面 | 功城面 | 19 | |
中東面 | 中東面 | 7 | |
外南面 | 外南面 | 8 | |
內西面 | 內西面 | 11 | |
外西面 | 外西面 | 13 | |
銀尺面 | 銀尺面 | 9 | |
化東面 | 化東面 | 9 | |
化西面 | 化西面 | 11 | |
化北面 | 化北面 | 11 | |
牟東面 | 牟東面 | 10 | |
牟西面 | 牟西面 | 12 | |
丹東面·丹南面· 丹北面·丹西面· | →比安郡(1895) →義城郡(1914) | ||
山北面·山東面·山西面·山南面·永順面 | →聞慶郡(1895) | ||
咸昌縣 | 水昌面·南面 | 恭儉面 | 12 |
縣內面·東面·北面 | 咸昌面 | 15 | |
水下面·上西面 | 利安面 | 13 |
한편 조선시대의 동리(洞里)가 최하위 행정구역으로 확정된 것은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때문이었다. 측량에 근거한 토지 소유권 확정사업의 진전과 병행해서 동리(洞里)를 ‘지형(地形)’, ‘교통(交通)’, ‘민정(民情)’, ‘취락(聚落)’ 등을 고려하여 통폐합함으로써 지도상에 명확한 경계를 가지게 되었다.
상주는 1913년 당시, 상주 745동리, 함창 106동리로 도합 851동리가 있었지만, 새로 정비된 행정동리(行政洞里)는 237개로 줄었다.
둘째로, 사업(事業)이 통합(統合)되었다.
새로 정비된 면(面)에서 하는 일은,
1. 도로(道路), 교량(橋梁), 도선(導船), 하천(河川), 관개(灌漑), 배수(排水)
2. 시장(市場), 조림(造林), 농사(農事), 양잠(養蠶), 축산(畜産) 기타 산업(産業)의 개량(改良) 보급, 해조충(害鳥蟲)의 구제(驅除)
3. 묘지(墓地), 화장장(火葬場), 도살장(屠殺場), 상수(上水), 하수(下水), 전염병(傳染病) 예방(豫防), 오물(汚物)의 처리(處理)
4. 소방(消防), 수방(水防)
이었고, 면(面)은 이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①재산을 보유할 것, ②각종의 수수료와 사용료를 징수할 것, ③부과금(賦課金)을 징수할 것, ④주민에게 부역을 부담시키거나 미곡과 목재 등의 현물을 징수할 것 등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위에서 열거한 사업의 대부분은 종래에 동계(洞契)를 비롯한 여러 조직이 맡았던 사업이었다. 그러나 면제(面制)의 목적이 종래 지방에 있는 여러 조직들이 하던 사업을 면(面)으로 통일 정리하여 질서있는 발달을 꾀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촌락의 사업이나 공유재산까지도 점차 면(面)에 통합되었다.
이러한 사업의 통합에 앞서서 총독부 중추원에서는 각 지방의 계(契)를 조사하였다. 1911년 당시 상주는 ‘내북면 화전동(花田洞)의 동계(洞契)’, ‘내남면 거물리(巨勿里)의 이중계(里中契)’, ‘수선산(修善山)의 송계(松契)’, ‘내동면의 성동사약(城東社約)’이 조사를 받았는데, 그 조사개요는 다음과 같다.
◦ 내북면 화전동(花田洞)의 동계(洞契)
1881년에 결성된 동계(洞契)이며, ‘동민들이 공동으로 돈과 곡식을 갹출 저축하여 동리의 일반 공공비(公共費)에 보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이 동계가 조선시대 말기에 다양한 ‘사업’에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우선 1894년 ‘동학당 창궐’ 때에 수성군(守城軍)의 고립비(雇立費)로 동비(洞費)가 소비되었다. 1906년에 본래의 상태로 재건하였으나, 1908년 ‘수비대 토벌 때, 인부 고립비(雇立費)’와 동비(洞費)로 소비하고 말았다. 그러나 1910년에 다시 동비를 징수하여 회복했다고 한다.
내북면 화전동(花田洞)은 읍내와 가까웠기 때문에 ‘갑오농민전쟁에서는 정부군에게’, ‘의병투쟁에서는 일본군에게’ 그 재산을 착취 당했으며, 면제(面制) 실시 이후 소멸되었다.
◦ 내남면 거물리(巨勿里)의 이중계(里中契)
수백 년 전부터 전해진 계(契)라고 하지만, 1898년에 새 규약을 만들어서 유지된 계(契)이다. ‘남천(南川) 교량의 재료, 동민의 연료, 동사비(洞祀費)’로 충당하기 위해, 동산에 양목(養木)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산림(山林)을 공동 관리하는 문제는 면(面)의 사무(事務)와 중복되기 때문에 면제(面制) 실시 이후 소멸되었다.
◦ 수선산(修善山)의 송계(松契)
연원은 300년 이상으로 소급되지만, 1889년에 재결성되었다. ‘청동면(靑東面) 내산(內山) 아래 여섯 마을 사람들에게 연료를 공급하고 해당 산록(山麓)의 사태(沙汰)를 방지하고 풍치(風致)를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산림(山林)을 공동 관리하는 문제는 면(面)의 사무(事務)와 중복되기 때문에 면제(面制) 실시 이후 소멸되었다.
◦ 내동면의 성동사약(城東社約)
1900년경에 결성되었으며, ‘동사(洞舍) 제사(祭祀) 비용 등의 공비(公費)’에 충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1910년에 ‘이자의 수봉(收捧)곤란’ 및 채권 회수 곤란이 뒤따르자 해산하였다.
세 번째는 면사무소(面事務所)가 설치되었다.
종래에는 면사무소가 없었고 면장(面長) 집에서 사무(事務)를 보았다. 1910년 12월에 면내에서 독립 건물을 확보가 어려울 경우는 면장 집에서 사무실을 만들어 ‘면사무소’로 사용하도록 통첩되었다.
상주에서도 1910년대에 면사무소가 생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1913년에 경상북도가 작성한『면리원선장사적(面吏員選獎事蹟)』에 외남면(外南面)의 사례가 있다.
당시 외남면장은 박인수(朴寅洙)로 상산박씨 였으며, 당시 면사무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사무실은 주택이 협애(狹隘)하고 집무상 불편했기 때문에 메이지(明治) 45년(1912) 사재를 들여서 조선식 가옥 1동을 건축하여 온돌 2칸을 거실로 하고, 마루방 1칸과 온돌 2칸을 사무실로 하고, 탁자 2개, 의자 5개 및 서상(書箱) 등을 구비해 체재(體裁)를 갖추었다. 사무는 분담을 하지 않고 주로 면장이 처리하였으며, 면장은 면서기와 고원(雇員)을 지휘하여 서무에 종사토록 하였다.
문서의 수수(收受)와 발송(發送) 그리고 기안(起案)과 결재(決裁)·편찬(編纂)과 이런 문서를 보존(保存)하는 일은 1912년까지는 군(郡) 훈령에 근거하였고, 1913년부터는 서무규정에 근거해서 적당히 취급하였다.
면(面)의 경비는 호수별(戶數別), 결수별(結數別)로 조정된 금액을 완납하게 하고 규정의 장부를 두어 수지(收支)를 정리하였다.”
또한 1910년대를 거치면서 상주의 면사무소는 급속하게 설치되었고, 비로소 ‘관청(官廳)’으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3)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 단체의 조직화
식민지 관료제가 1910년대에 ‘면(面)’ 수준까지 완료되자,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이 이어졌다.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은 1931년에 기본정책이 제시되고, 1933년부터 시작된 ‘관제(官制) 농촌 캠페인’이었다. 각 면마다 ‘지도부락’이 선정되고 관청·경찰·학교·금융기관이나 ‘지방유식자’들이 ‘군 농촌진흥위원회’와 ‘읍면 농촌진흥위원회’를 통해서 ‘지도’의 제일선(第一線)에 나섰다.
<표-5>는 당시 상주의 지도자(指導者) 구성이다. 이 표를 보면, 각 면(面)에 평균 50명 정도의 지도자가 있었다. 구장(區長) 306명(34%), ‘지방유식자’가 227명(25%), 면협의회원 184명(21%) 순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직 사이의 벽(壁)을 넘어서 동원되었다.
<표-5> 상주의 농촌진흥위원회 구성
상주군농촌진흥위원회 | 군청 산업 기술원 | 경 찰 서 장 | 공립초등학교장·실업학교장 | 금융조합 이사 | 도 평 의 회 원 | 각종 산업 단체의 부회장 | 각종 산업 단체의 부회장 | 지 방 유 식 자 | 계 | |
21 | 1 | 4 | 2 | 1 | 3 | 30 | 30 | 62 | ||
각읍면농촌진흥실행위원회 | 읍면리원 | 주 재 소 주 석 | 면내 초등 학교장 | 면내금융조합 이사 | 면 협 의 회 원 | 면내 산업·수리 조합 이사 | 지방 유식자 | 계 | 1 읍면당평균 | |
면장·서기 | 구장 | |||||||||
133 | 306 | 18 | 16 | 11 | 184 | 1 | 227 | 896 | 49.8 |
1937년 7월에 ‘노구교(盧溝橋)사건’이 발발하자, 조선에서는 총동원체제의 구축이 추진되었다. 이때 농촌진흥운동도 조금씩 기본이 변용되어 관제(官製) 조직화가 이루어졌다.
이때 상주에서도 ‘시국(時局)’과 관련하여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표-6>은 1937년에 상주에서 개최된 행사이다.
<표-6> 1937년의 ‘시국’ 관련 행사
개최일 | 장 소 | 내 용 |
7월23일 | 상주읍 사무소 | 상주읍장이 주도하여 상주국방부인회를 조직 |
25일 | 상주읍불교 포교소 | 상주불교청년회, 불교부인회 주최로 국위선양기원제를 개최 |
8월 8일 | 상주공립 보통학교 | 총독부 사회과 주최의 전선순회강연회를 개최, 관민유지와 각 농촌부녀단체 등 5백명이 참여 |
14일 | 상주군청 | 군수가 사회가 되어 군사후원연맹 상주분회를 개최 |
상주군청 | 군 농촌진흥위원회를 개최, 각 면에서 ‘국체관념명징’이나 ‘시국’에 관한 강연의 개최를 결정 | |
15일 | 상주향교 | 군수 주최로 상주유림 30명의 참가에 의한 황군위문선양기원제를 거행. |
24일 | 상주경찰서 | 제국재향군인회 상주분회의 임시총회를 개최, 회원과 관민유지가 참가. |
28일 | 상주공립 보통학교 | 재향군인회 상주분회의 주최로 대구 80연대의 남(南)소좌의 강연회를 개최 |
9월 1일 | 상주공립 보통학교 | 상주읍장 사회로 국위선양무운장구기원제를 개최, 관공서원, 일반유지가 참가 |
10월28일 | 상주신사 | 상해전승축하제를 개최, 상주읍장을 비롯한 각 관공서원, 일반사회단체원이 참가 |
29일 | 상주군청 | 농촌진흥위원회를 개최, 11월 7일~11월 13일에 행해진 국민정신작흥행사를 결정 |
11월 3일 | 상주경찰서 | 재향군인회 상주분회가 무기고 낙성식을 개최 |
11일 | 상주읍 사무소 | 상주경찰서장의 시국강연회 |
상주좌 | 경북도의원의 시국강연회 | |
12월13일 | 상주신사 | 남경함락 봉고제를 개최, 상주읍장을 중심으로 관공서원, 일반 읍민이 참가 |
그리고 <표-7>은 1938년 현재 상주의 조직화 상황이다. 각종 조합, 금융조합에 소속된 식산계(殖産契), 부인회 등의 관제 조직이 단숨에 조직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부락’을 단위로 전개되었다는 데에 특징이 있었다.
<표-7> 상주의 관제 조직화
(1938년 현재)
| 갱생공려조합(更生共勵組合) | 농가공려조합(農家共勵組合) | 농촌진흥조합(農村振興組合) | 식산계 (殖産契) | 부인회 (1937년) | 총수 |
조합수 | 34 | 257 | 279 | 계수 43 | 회수 340 | 부락 총수 457 |
호수 | 1,849 | 7,147 |
| 계원수 2,091 | 회원수 12,352 | 농업세대수 27,670 |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식민지 관료제는 서서히 상주 사회의 마을 수준까지 손길을 뻗쳐갔다.
2) 상주의 일본인 사회
1905년에 상주우편국(郵便局)이 설치되고, 국장으로 다나베 요시지로(田邊良次郞)가 부임한 것이 상주 사회에 일본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첫 번째 일이다.
그 이후 1906년경에는 15~16호에 40명 정도가 살기 시작했고, 1907년경에는 24~25호에 70~80명이 살았으며, 1909년 말에는 상주 읍내에 일본인이 65호 184명이 살았다. 상주 함창이 합병되지 않았을 때인 1912년에는 상주에 202세대 633명(남성 비율 56.2%)가 살았고, 함창에는 42세대 104명(남성 비율 61.5%)이 살았다.
상주 읍내에 일본인 학교인 상주공립심상소학교(尙州公立尋常小學校)가 생긴 것은 1907년 7월 11일이었다. 설립자금이나 재정은 일본인회(日本人會)의 학교조합(學校組合)이 조달하였다.
아동은 1907년 당시 10명 남짓이었고, 1910년 3월 말에는 남자 9명과 여자 7명이 교사 한 사람 밑에서 배웠다. 1918년에 상주학교조합 관할지구의 일본인 적령(適齡) 아동 취학율은 100%였고,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이지만 6년제의 교육이 시행되었다.
1910년대까지 조선인만이 다니는 공립보통학교가 4년제인 상주공립보통학교와 함창공립보통학교 밖에 없었던 것에 비하면, 일본인 아이들은 교육면에서 압도적으로 우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표-8>은 읍내와 그 이외 지역으로 나눈 민족별 인구통계를 나타낸 것이다.
<표-8> 상주의 민족별 인구
| 상 주 읍 내 | 기 타 | ||||||||
계 | 조 선 인 | 일 본 인 | 일본인 비율 (%) | 외국인 | 계 | 조선인 | 일 본 인 | 일본인비율 (%) | 외국인 | |
1911 | 5,924 | 5,530 | 380 | 6.4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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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5,854 | 5,330 | 508 | 8.7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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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 5,395 | 4,829 | 549 | 10.2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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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 6,189 | 5,360 | 806 | 13.0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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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 6,618 | 5,816 | 774 | 11.7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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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6,978 | 6,174 | 771 | 11.0 |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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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7,260 | 6,485 | 734 | 10.1 | 41 | 135,538 | 135,103 | 428 | 0.3 | 7 |
1922 | 8,663 | 7,675 | 922 | 10.6 | 66 | 147,308 | 146,611 | 672 | 0.5 | 25 |
1924 | 8,658 | 7,442 | 1,144 | 13.2 | 72 | 150,299 | 149,803 | 462 | 0.3 | 34 |
1925 | 9,639 | 8,466 | 1,086 | 11.3 | 87 | 154,978 | 154,383 | 551 | 0.4 | 44 |
1933 | 11,911 | 10,611 | 1,242 | 10.4 | 58 | 151,174 | 150,563 | 588 | 0.4 | 23 |
1934 | 12,328 | 11,108 | 1,171 | 9.5 | 49 | 152,616 | 152,004 | 592 | 0.4 | 20 |
1935 | 13,260 | 12,011 | 1,181 | 8.9 | 68 | 163,794 | 163,096 | 676 | 0.4 | 22 |
1936 | 13,570 | 12,314 | 1,187 | 8.7 | 69 | 164,620 | 163,833 | 763 | 0.5 | 24 |
1938 | 14,144 | 12,960 | 1,183 | 8.4 | 1 | 167,656 | 166,995 | 661 | 0.4 | 0 |
<표-8>을 보면, 읍내와 그 이외 지역에 사는 일본인들의 인구 밀도가 완전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읍내에서는 일본인이 인구의 약 8~13% 정도인데 비해서, 그 이외의 농촌부에서는 0.3~0.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상주의 면별 일본인 인구비율은 다음과 같다.
상주읍 - 41.7% 함창면 - 16.7% 낙동면 - 11.4%
중동면 - 1.5% 청리면 - 2.9% 공성면 - 6.7%
외남면 - 0.4% 내서면 - 1.5% 외서면 - 2.2%
공검면 - 2.6% 이안면 - 1.5% 화북면 - 0.5%
화서면 - 3.4% 화동면 - 1.1% 모서면 - 3.3%
모동면 - 5.4%
『발전지(發展誌)』에 게재된 ‘상주군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에 보이는 일본인 유력자의 이력을 <표-9>에 정리하였다. 이를 참조하면서 식민자의 상황을 알 수 있다.
<표-9> 상주의 일본인 유력자
이름 | 출신현 | 상주에 온 시기 | 직업 및 경력 |
豊田忠吉 | 愛知 | 1906년 | 미곡·비료·잡화상, 미곡상조합장, 학교조합 관리자, 면협의원 |
大岸廣 | 石川 | 1908년 | 加賀屋(여관 겸 요리집), 일본인회 서기, 학교조합 출납담당, 평의원, 消防組頭 |
工藤與葱吉 | 靑森 | 1908년 | 농업, 잡화상 |
廣津友助 | 山口 | 1908년 | 흑연광산→미곡상, 학교조합 관리자, 소방조두 |
稻垣德三郞 | 三重 | 1909년 | 이나가키藥店, ㈜상주상사 사장, ㈜상주주조 사장, ㈜조선자동차 감사역, 김천무진회사 중역, 상주면협의원, 학교조합의원, 상주상공회장 |
蒲生嘉藤治 | 香川 | 1911년 | 醬油釀造業 → ㈜讚岐주조 사장, 소방조두, 학교조합 의원 |
岡崎光儀 | 香川 | 1913년 | 양품잡화상, ㈜상주주조 중역, 상주상공회 부회장, 학교조합의원, 면협의원 |
山田房太郞 | 靜岡 | 1914년 | 전당포업, 상주금융조합장, 면협의원, 학교조합 평의원 |
大久保正雄 | 鹿兒島 | 1915년 | 재목업, 학교조합 의원, 상공회 평의원 |
吉野尙太郞 | 長崎 | 1915년 | 금융업, 비료업, 재향군인분회장, 도 평의원 |
高瀨吉雄 | 和歌山 | 1916년 | 농업, 학교관리자, 소방조두, 면협의원, 농회 의원, 번영회장 |
山口賢三 | 滋賀 | 1919년 | 미곡비료상, 정미업 |
袋常三郞 | 宮城 | 1922년 | 농업, 금융업, 상주청년단장, 재향군인분회장, 면협의원 |
福岡九八 | 鳥取 | 1924년 | 미곡비료상, 면협의원, 금융조합 평의원, ㈜경북운송 감사, ㈜상주주조 중역 |
和田泰一 | 山口 | 1924년 | 대구高田상회 상주지점 |
御原正平 | 兵庫 | 1928년 | 면장, 학교조합 관리자 |
久枝賴三 | 山口 | 1929년 | 경찰서 |
佐藤久成 | 秋田 | 1930년 | 조선식산은행 상주지점장 |
(1) 상공업자(商工業者)
상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중에서 상공업 종사자가 가장 많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병합 전부터 ‘본향직상점(本鄕直商店)’-석유, ‘원전무상점(原田茂商店)’-잡화, ‘추산원장상점(秋山元藏商店)’-도자기, ‘백석상점(白石商店)’-과자, ‘정상현길상점(井上賢吉商店)’-약, ‘가하옥(加賀屋)’-요리집 등이 읍내에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표-9>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대부분은 복수의 사업에 손을 대었고 상주상공회를 비롯한 몇몇 지역 조직에도 관여하였다.
(2) 광업자(鑛業者)
상주에서는 광산 경영에 관여한 일본인도 눈에 띄었다. 병합 직후에 발간된『경북요람(慶北要覽)』에 게재된『경북광업일람(慶北鑛業一覽)』을 보면, 1906년 이후 상주군에는 광산이 19곳이 있었다.
<표-10> 상주의 광산과 소유자(1906~1910)
位置 | 鑛山과 鑛山 所有者 |
內西面 | 금광(平澤岩太郞) |
內南面 | 금광(出口仁助외 2(人)) |
內東面 | 사금(神野玉五郞 ; 菰口態太郞) |
內西面 | 금광(本鄕直 ; 金斗寅) |
外南面 | 흑연(千寵助二) |
外東面 | 사금(神野玉五郞), 금광(渡邊榮太郞) |
外西面 | 금광(本鄕直) |
中北面 | 금광(平澤岩太郞 ; 本鄕直) |
長川面 | 금광(井上田鶴之助 ; 渡邊榮太郞) |
化東面 | 흑연(小宮萬次廊 외 1명 ; 한국식산주식회사 ; 矢島寬一郞 ; 古谷賢一·土井仲 ; 稻垣梅二郞 외 3명) |
牟東面 | 흑연(千寵助二), 砂鑛(長谷川竹吉 외 3명) |
牟西面 | 흑연(小宮萬次廊 외 3인 ; 한국식산주식회사) |
조선 말기부터 메이지(明治) 말기까지 사금(砂金)의 채취와 광석 분쇄에 의해서 다량의 금이 군(郡) 밖으로 반출되었다고『발전지(發展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병합을 전후해서 많은 일본인 광산업자들이 상주에 들어와서 채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총독부가 1914년에 상주광무소(尙州鑛務所)를 설치하고, 광구(鑛區) 4개소를 두어 조사를 개시했다. 1924년에는 총독부가 보류구역(保留區域)을 ‘상주광업사(尙州鑛業社, 사장 松方乙彦)’에 불하했고, 1929년에는 ‘사가(佐賀)탄광주식회사’에, 1932년에는 도쿄에 본사를 둔 ‘주가이(中外)광업주식회사’에 매각되었다.
한편 흑연광(黑煙鑛)은 ‘고미야(小宮)흑연광업회사’(모서면 유방리, 111.1만 평), ‘야마시다(山下)흑연광업회사’(이안면, 59.7만 평), ‘미야타에이지로(宮田榮二郞)흑연광산’(공검면, 52.8만 평) 등 큰 회사가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비교적 규모가 큰 광산이라면 ‘갱부(坑夫)가 70명 정도는 있었고, 여름철에는 200명까지 있었다.’고 했는데, 중동면 회상리에 있던 사광(砂鑛)은 1913년에 가장 성(盛)할 때는 갱부(坑夫)가 100명, 선광부(選鑛夫)가 100명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24년에 개통한 경북선(慶北線) 개설을 신청할 때, 광물자원(鑛物資源)을 반송(搬送)한다는 것이 큰 구실이었다.
그러나 광업(鑛業)에 관련한 일본인은 대부분 상주지역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3) 농업자(農業者)
상주에 있는 일본인 농업자 수는 <표-11>과 같다.
<표-11> 상주의 일본인 농민
| 호수(戶數) | 겸업내역 (兼業內譯) | 사람수(人數) |
1912년 | 32 | - | - |
1917년 | 88 | - | 359 |
1925년 | 57 | - | 224 |
1927년 | 69 | - | 313 |
1928년 | 77 | - | 334 |
1929년 | 77 | - | 336 |
1930년 | 78 | - | 352 |
1933년 | 71 | 14 | - |
1934년 | 64 | 9 | - |
1935년 | 57 | 9 | - |
1936년 | 56 | 8 | - |
1937년 | 54 | 7 | - |
1938년 | 54 | 1 | - |
1910년대에 농업이민(農業移民)이 시작되었으나 낮은 수준이었고, 특히 1930년대부터는 오히려 서서히 감소하였다.
일본인의 토지소유형태를 조사한 통계가 없기 때문에 일본인 농민들이 지역에서 어떠한 지위에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1912년에 상주의 일본인 농업경영자 24명이 23,500원을 투자하여 38.1정보(町步)의 논과 7.6정보의 밭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근업통계서(勤業統計書)』에 있다.
따라서 이 자료를 근거로 계산한다면, 한 경영자당 논 1.6정보, 밭 0.3정보의 토지를 소유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상주의 ‘모범농리(模範農里)’로 불렸던 외남면의 경우, 농가 1호당 경지면적이 전답 합쳐서 0.8정보였음을 감안하면 조선인 농민보다 일본인 농민이 경지를 더 많이 소유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인 농업이민이 어떠한 경로로 상주에 왔는지는 정확치 않다. 다만 국책회사인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를 통한 이민이 포함되어 있던 것은 확실하다.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는 1910년부터 매년 농업이민을 조선 각지로 보냈고, 1917년 이후는 우리나라에 이주해 온 일본인 농민의 3~4할이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의 농업이민이 었다.
또한, 상주에 몇 사람이 보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932년까지 상주(尙州), 화서(化西), 함창(咸昌), 공성(功城), 사벌(沙伐), 모동(牟東) 등 각 면(面)에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를 통한 이주자가 있었다.
동양척식회사의 농업이민은 비교적 저리(低利)로 회사 소유 토지를 양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토지 소유가 용이한 것이었다.
(4) 관공리(官公吏)
경찰과 같은 치안조직의 경우,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으나, 면사무소는 거의가 조선인이었다. 그리고 보통학교와 금융조합에도 관공리가 배치되었다.
보통학교는 조선 전체로 보아 1919~1921년까지는 3면(面)에 1개 학교씩 설립했으나, 1929~1936년까지는 1면(面)에 1개 학교를 세웠다. 이들 학교에서 종사하는 일본인 교원을 보면, 1930년에 일본인이 다니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가 읍내·함창·화서에 하나씩 있었는데, 10명의 교원 전원이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이 다니는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의 경우, 읍내 학교에는 22명의 교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일본인 교원이 8명이었고, 읍내를 제외한 농촌지역에는 10개 학교가 있었는데, 51명의 교원 가운데 일본인 교원은 11명이었다. 그러나 중모면이나 은척면 등에는 일본인 교원이 하나도 없었다.
금융조합은 보통학교만큼 많지 않았다. 1936년에 상주 관내에는 7개 조합(2개는 읍내)이 있었고, 3~4개면에 하나 꼴이었다. 직원 구성은 관련 자료가 없어서 알 길이 없다.
3. 읍내(邑內)의‘시가지(市街地)화(化)’
1) 읍치(邑治)의 환골탈태(換骨奪胎)
조선왕조시대에서 읍내(邑內)는 지방성곽행정촌락을 대상으로 한 ‘읍치(邑治)’였으나, 한일합방 후에는 이 읍내에 식민지 행정관청과 상업적인 시설이 들어서서 ‘시가지(市街地)’로 변했다.
1909년 당시, 이미 군아(郡衙) 외에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수비대(守備隊)·경찰서(警察署)·재판소(裁判所)·우편국(郵便局)·재무서(財務署)·금융조합(金融組合)·농상공은행(農商工銀行)·소학교(小學校)·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가 읍내에 자리 잡았다.
병합(倂合) 전까지 새롭게 설치된 관청 및 공공시설은 <표-12>와 같다.
<표-12> 병합 전 상주 읍내의 관공서
設置施設 | 設 置 日 | 名 稱 |
郵 便 局 | 1905년 6월 9일 | 釜山郵便局 尙州出張所 |
警 察 署 | 1906년 12월 | 尙州警察分署 및 顧問分遣所 |
普通學校 | 1907년 6월 1일 | 尙州公立普通學校 |
小 學 校 | 1907년 7월 11일 | 尙州公立尋常小學校 |
金融組合 | 1907년 10월 | 尙州金融組合 |
守 備 隊 | 1907년 12월 | 尙州守備隊 |
憲兵分遣所 | 1908년 7월 | 憲兵隊 大邱分帶 尙州分遣所 |
裁 判 所 | 1909년 1월 20일 | 大邱地方裁判所 尙州郡裁判所 |
상주읍성이『경상도지리지』에는 ‘홍무(洪武) 을축(乙丑)에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는 1385년(우왕 11)에 해당한다. 이에 앞서 1380년(우왕 6)에 상주에 왜구가 침입하여 7일간 머물며 관아와 민간의 집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고, 권근(權近)의 풍영루기(風詠樓記)에도 이 사실이 언급되어 있으며, 그 다음해 반자(半刺) 전리(田理)가 처음 읍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1380년 왜구의 침입 후 1381년부터 읍성을 쌓기 시작해서 1385년에 완성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주읍성은 읍치(邑治)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 읍성(邑城)의 성벽을 허문 것은 병합 후인 1912년경의 일이었다. 1929년에 증보된「상산지(商山誌)」권 3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임자년(1912)에 이르러서 그 성(城)을 부수고 그 누각(樓閣)을 허물어 이번에는 시가(市街) 통로(通路)를 만들었다. 호지(濠池)나 성(城)도 아울러 폐허가 되어 덧없이 미나리꽝이나 왕골밭이던 것이 이제는 전부 흙을 돋우어 가옥(家屋)을 짓고 말았다. 예전의 성(城)이나 연못이 있던 곳을 이제는 다시 기억할 수 없다.”
1911년에 육군(陸軍) 측량부(測量部)가 임시로 발행한「약측도(略測圖)․목산측도(目算測圖) 등의 집성(輯成)」에 실려 있는 5만분지 1의 지도에 상주읍성(尙州邑城)이 그려져 있다. 남(南)으로는 김천(金泉)과 북으로는 문경(聞慶)에 이르는 도로와, 서(西)로는 보은(報恩)과 동(東)으로는 낙동강(洛東江)에 이르는 도로가 상주성(尙州城)의 동서남북 4대문에 연결되어있고, 성내(城內)는 작은 길이 있는 듯이 했다.
그러나 1912년 이 성벽(城壁)이 허물어짐에 따라 상주읍성(尙州邑城) 한가운데에 큰 십자로(十字路)가 생겼고 읍성(邑城)이 시가지(市街地)로 변모해 갔다.
1930년대에 작성된 상주시가지도(尙州市街地圖)를 보면, 전에 성벽(城壁)이 있었던 부분이 골목길처럼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읍성(邑城)을 특징 지웠던 것들은 ‘덧없이’ 사라졌다.
이와 더불어 몇몇 지명(地名)에 일본식 ‘정(町)’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 서성내리(西城內里)와 북문외리(北門外里)는 ‘서정동(西町洞, 현 서성동)이 되고, 남성내리(南城內里)․남문외리(南門外里)․상남문리(上南門里)․낙중리(洛中里)․내서면 창내리(倉內里)’는 남정리(南町里, 현 남성동)가 되었다.
이를 전후해서 사족(士族)들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향청(鄕廳)’이 관(官)에 접수되어 버렸다. 상산지(商山誌)에 그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변혁 후 군대가 주류(駐留)하게 되자, 공가물(公家物)로 간주하였다. 사론(士論)은 심했지만 애석하게도 되돌릴 수 없었다. 금장(錦粧)은 향교(鄕校)로 옮겼다.”
향청(鄕廳)은 상주 사족(士族)이 읍성 북측에 자치적으로 세웠던 것으로 관아(官衙)는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공가물(公家物)’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이를 관에서 접수될 때에 ‘사론(士論)’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일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의병탄압을 위해 상주수비대가 파견된 것이 1907년 가을 무렵이었고, 또한 대대 규모의 상주수비대가 설치된 것은 1908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인근 지구에 있는 무학당(武學堂)이 1907년에 공가(公家)로 들어간 기록으로 보아서, 아마도 같은 무렵의 일이었다고 추정된다.
인봉리 90번지의 구 토지대장을 보면, 이 향청(鄕廳)은 1913년 3월 31일의 사정(査定)에서 이미 소유자가 ‘국(國)’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토지조사사업 당시 관유(官有)가 기정사실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장(錦粧)이란 향청에서 기록 보관해 온 향안(鄕案)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것과 관련하여, 1942년 상주를 답사한 농촌사회학자 스즈키 에이타로(鈴木榮太郞)가 상주 향청에 대한 조사 내용을 기록하였다.
“상주의 향청(鄕廳)은 군청 밖에 건물을 갖고 있었다. 신제도(新制度)로 되었을 때, 향청의 건물은 일체 관(官)에 거둬들여졌다. 군내의 유림(儒林)은 향청은 본래 군내의 유림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의 재판소에 진정(陳情)을 냈지만, 결국 반환을 받는 데 이르지 못했다.”
이 향청(鄕廳)이 공가(公家)로 넘어간 일은『상산지』의 내용과도 흡사하다. 중요한 것은 일본군의 주둔과 함께 사족의 중요한 거점이 관에 접수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족들이 분기(奮起)했고, 이것이 의병운동과도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옛 관아(官衙)는 <표-13>과 같이 다른 용도로 쓰이거나 헐렸다.
<표-13> 관공서의 전환
公家 | 轉換 內容 |
客館(商山館) | 1907년, 상주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사용하였다. 1910년에 전패(殿牌)를 도청에 봉납했다. |
廳猶堂 | 옛 동헌으로 1901년에 화재가 났다. 그 자리에 1921년 6월 12일 상주경찰서가 섰다. |
製錦堂 | 청유당 화재 후에는 군수가 여기에서 집무하였고, 그 후 수비대가 있었다. |
戶長廳 | 창고·검사실·법정을 증축하여 대구지방재판소 상주군재판소가 되었다. |
作廳(吏房廳) | 1909년부터 1925년까지 군청사무소가 설치되었다. |
刑吏廳 | 1920년까지 경찰서로 사용되었다. |
敎房廳 | 1926, 부산우편국 상주출장소가 세워졌다. |
鎭營 | 1925년, 옛터에 군청을 세웠다. |
制勝堂 | 진영 폐지 후 헐렸다. |
太平樓 | 1920년 향교의 동산(東山)으로 이축되었다. |
南門(弘治舊樓) | 1924년, 상주면소 구내로 이전되어 회의실이 되었다. |
二香亭 | 시가지 정리 때 군이 공매하여, 군내 유지가 사서 자양산(紫陽山) 아래로 이축하였다. |
武學堂 | 병합 후 새로 양로소(養老所)로 삼았다. |
迎賓館 | 병합 후 헐려 기업소(機業所)가 되었다. |
일반적으로 새로 관공서(官公署)를 설치하면 새로운 관사(官舍)를 짓는 것이 상례(常例)이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조선시대의 관아(官衙)에 들어가서 간판만 바꾸었다.
물론 건축비용 마련도 쉽지 않았겠지만, 그것보다는 조선(朝鮮)의 관아(官衙)를 사용함으로 해서 국민들이 이질감(異質感)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계산이 들어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시내에 있는 ‘왕산(王山)’이 ‘앙산(央山)’으로 변했고, 그 ‘앙산’ 위에는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사당으로 ‘상주신사(尙州神社)’가 세워졌다. 그리고 뭔가 일이 있을 때마다 일반인에게 참배를 강요하였다.
‘왕산(王山)’이 ‘앙산(央山)’으로 바꾼 것에는 숨은 계략이 들어가 있다고 본다.
왕산 남쪽에는 큰 광장을 가진 경찰서가 있고, 서쪽에는 법원이 만들어져서, 왕산의 주변에 신(神)을 의미하는 신사(神社)와 법(法)을 의미하는 법원(法院) 그리고 폭력(暴力)을 의미하는 경찰(警察)이 집결되어 시가지의 핵심을 ‘왕(王)’에서 ‘앙(央)’으로 변화를 연출시킨 것이다.
그리고 왕산 경내에는 벚나무를 심어서 1920년대에는 ‘조망(眺望)이 절경(絶景)인 시민 유일의 오락원(娛樂園)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2) ‘시가지(市街地)’로서의 읍내(邑內)
이와 같이하여 서서히 읍내(邑內)는 ‘시가지(市街地)’로 변화해 갔다. 그리고 외관(外觀) 뿐만 아니라 내부(內部)에도 1920년대 이후 경공업(輕工業)과 상업(商業)이 지역산업(地域産業)으로 부각되는 변화가 있었다.
<표-14> 상주에 있었던 회사
(1936년 현재)
本店 | 會社名稱 | 位置 | 創立年月 | 營業種類 | 公稱資本金 | 社長 |
尙州 | 讚岐酒造 株式會社 | 尙州邑 西町里 | 1918년 8월 | 주 류 제조업 | 78,000원 | 蒲生嘉‘ 藤治 |
尙州酒造 株式會社 | 〃 仁鳳里 | 1928년 4월 | 〃 | 120,000원 | 稻垣德‘ 三郞 | |
梁村合名 酒造會社 | 〃 梁村里 | 1929년10월 | 〃 | 23,000원 | 朴淳 | |
尙州運送 株式會社 | 〃 城東洞 | 1933년 1월 | 운송업 | 10,000원 | 和田泰一 | |
尙州麯子 株式會社 | 〃 西町里 | 1934년 6월 | 주 류 제조업 | 200,000원 | 朴寅洙 | |
合名會社 尙善酒造場 | 〃 西町里 | 1934년 9월 | 〃 | 24,000원 | 崔尙善 | |
尙州藥酒 株式會社 | 咸昌面 南町里 | 1935년 5월 | 〃 | 120,000원 | 朴淳 | |
咸昌酒造 株式會社 | 〃 舊鄕里 | 1934년10월 | 주 류 제조업 | 50,000원 | 金元漢 | |
咸昌物産 株式會社 | 〃 〃 | 1935년10월 | 운송업 | 50,000원 | 廣津友助 | |
京城 | 殖産銀行 尙州支店 | 〃 西町里 | 1918년10월 | 은행업 | 30,000,000원 | 倉品銕夫 |
大邱 | 大興電氣 株式會社 尙州支店 | 尙州邑 伏龍里 | 1924년 6월 | 전기업 | 500,000,000원 | 畑山莊司 |
門司 | 山下黑鉛 株式會社 | 利安面 雅川里 | 1920년 3월 | 광물가공 판 매 | 450,000원 | 宗三郞 |
東京 | 中外鑛業 株式會社 | 洛東面 城東里 | 1932년 5월 | 금은동철 | 7,800,000원 | 原安三郞 |
<표-14>를 보면, 자본금 상위(上位) 4사(社)가 대구(大邱)·경성(京城)·동경(東京)·모지(門司)에 본점을 둔 회사였고, 상주의 지역자본은 모두 상주읍내와 함창에서 설립되었다.
특히 1930년대가 되면서, 조선인(朝鮮人) 소자본가(小資本家)가 형성되었는데 대부분 지주(地主)였던 그들은 모두 농업의 잉여 생산물을 이용한 주조업(酒造業) 등의 경영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 갔다.
박인수(朴寅洙)와 최상선(崔尙善) 등은 읍내에 생활거점을 삼고 있던 이족가문(吏族家門) 출신이었다.
그리고 당시 본정통(本町通)과 태평정통(太平町通)의 교차점 이 상주 시가지의 중심부였다. 1920년대부터 서서히 읍내에 전기가 들어왔고, ‘일광당시계점(日光堂時計店)’, ‘금하당시계점(金河堂時計店)’, ‘금하전기상점(金河電氣商店)’이 들어섰다.
1936년. 읍내에서는 서정리·인봉리를 중심으로 서적(書籍)·문구점(文具店)·약방(藥房)·철물점(鐵物店)·간장가게·여관(旅館)·운송점(運送店)·인쇄소(印刷所)·의원(醫院)·철공소(鐵工所)·석유(石油)가게·미곡상(米穀商)·요리점(料理店)·구두방·극장(劇場) 등이 들어섰다.
1930년도 직업통계를 보면, 상주읍의 상업인구(商業人口)가 12.0%, 기타 지역이 2.6%였으며, 농업인구(農業人口)는 상주읍에서 70.7%, 기타 지역에서는 90.2%였다.
1924년 10월에 김천-상주 간 경북선(慶北線) 철도(鐵道)가 개통되었다.
상주군내에는 5개의 역(驛)이 있었다. 1936년 상주역(尙州驛)과 다른 4개 역의 사람과 화물(貨物) 이용 상황이 <표-15>이다.
<표-15> 경북선 철도의 이용현황(1936년)
경북선철도 | 인 원 | 화 물 | ||
탄 사람(인) | 내린 사람(인) | 발송(t) | 도착(t) | |
상주 | 88,625 | 74,224 | 15,685 | 16,346 |
그 이외의 4역 합계 | 70,768 | 67,058 | 16,202 | 6,580 |
상주군내 5개 우편국(郵便局) 가운데, 우편물은 상주우편국이 다른 4개 우편국의 합계보다도 1.3배 정도의 양을 취급하고, 전화의 발착수는 8.1배, 전보는 2.8배의 양을 취급하여, 인구비율을 고려하더라도 읍내(邑內)의 존재가 나름대로 두드러졌던 것을 알 수 있다.
<표-16> 지역별 우편 이용 상황
(1936년 현재)
통신 | 통 상 | 소 포 | 전 화 | 전 보 | ||||
인수 | 발송 | 인수 | 발송 | 발 | 착 | 발 | 착 | |
상주우편국 | 860,661 | 813,882 | 3,656 | 8,548 | 29,930 | 28,287 | 16,021 | 14,358 |
함창우편국 | 250,496 | 355,743 | 1,020 | 3,121 | 4,743 | 467 | 3,230 | 3,480 |
그 외 3국 | 205,989 | 458,264 | 728 | 3,571 | 1,851 | 88 | 2,063 | 2,188 |
이상으로 지역사회 지배구조의 변화와 읍내의 시가지화 과정을 보면 일제강점기속에서 상주의 사회적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조선왕조는 ‘관료제’를 포함한 독자적인 지방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그 속을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와서 밀어내듯이 쇄신하지 않고 기존의 시스템을 서서히 개편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구축한 중앙집권적인 지방지배체제를 계승하면서도 식민 지배의 편의에 따라 지방행정기구를 세우고 말단까지 행정기구를 갖추어 나간 것이 특징이라고 본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은 특히 보호국기간인 1905~1910년과 무단통치기간이었던 1910~1919년 동안에 지역사회에 새롭게 들어온 폭력 장치로써 큰 존재감을 나타내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들어왔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일본 사람의 존재는 지역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일제 강점기의 상주 모습(2)에서는 당시 지역 엘리트들의 활동과 정치공간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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