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6호(2016년)

상주학. 상주문화 26호. 발굴조사를 통해 본 상주의 도자기

빛마당 2017. 1. 31. 13:16

발굴조사를 통해 본 상주의 도자기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박물관 학예사

신 순 철

 

. 머리말

조선시대에 행정, 사법, 군사권을 가진 관찰사가 파견된 경상도지역 행정 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을 가진 상주는 문헌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최상의 도자기 제작기술을 보유했던 지역이다.

상주는 편리한 교통과 태토 및 땔감 등 자연적인 조건을 기반으로 삼국시대부터 토기를 제작한 가마터가 있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최고 절정을 이루었다.

도자기 가마터의 분포는 청자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있는 이른 시기 분청사기 가마터는 현재 행정구역으로 모동면과 모서면을 중심으로 다수 분포하고 있으며, 15세기 이후부터 조선시대 후기가 되면 동쪽으로 가마터가 넓게 확산된다. 그러나 가마터가 확인되는 지역은 넓으나 생산되는 자기의 질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 상주에서는 왕실과 중앙정부에 공납되는 자기는 더 이상 생산하지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상주박물관에서는 2015년부터 문헌에서 확인되는 가마터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가마터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상품자기소의 위치를 확인했으며, 당시에 생산된 고급 자기를 확인하는 성과를 이뤘다. 본 글에서는 문헌에 기록된 지역을 중심으로 실시한 가마터의 발굴성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 문헌으로 보는 상주의 도자기

자기의 제작과 관련되는 기록으로는 우선 자기를 제작하는 지역인 磁器所에 대한 기록과 자기소의 근거가 되는 명문분청사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기소는 고려시대에 전라남도 강진의 大口所七良所 2개소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는 강진과 부안을 중심으로 청자가 제작되었으나 고려말 몽고와 왜구의 침입 및 무신정권기 양반의 수탈 등으로 혼란한 시기에 두 지역의 장인들이 전국으로 흩어져서 자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자연스럽게 분청사기로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초기의 분청사기는 고려 말의 상감청자와 매우 닮아 있다.

고려 말에 흩어진 자기소의 장인들에 의해 조선시대 초기에는 자기소가 전국에 139개소가 확인된다. 고려 말의 자기소가 증가된 현상에 대해서는高麗史節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자기의 제작에 대해서는朝鮮王朝實錄,東國輿地勝覽,慶尙道地理志등 여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朝鮮王朝實錄世宗實錄地理志에 가장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세종의 명에 의해 1424~1432년 사이에 지리지 편찬을 위한 자료수집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고, 1454세종실록이 편찬될 때 함께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따라서 지리지에 기록된 내용은 자료수집이 이루어진 1420년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군사 등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제반자료들이 중점적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자기소도기소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는 토산조의 내용도 제작되었다. 지리지의 토산조는 팔도현의 관청소재지를 기준으로 자기소와 도기소를 동서남북으로 표기하였고,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상품중품하품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어 15세기 전반에 자기소의 분포와 품질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문헌사료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상품자기소는 경기도 광주 벌내(벌을천), 경북 상주 추현리, 경북 상주 이미외리, 경북 고령 예현리 등 4개소, 중품자기소는 충청도의 23개 자기소 중에 11개소, 경상도의 37개 자기소 중에 8개소, 전라도의 31개 자기소 중에 14개소, 황해도의 12개 자기소 중에 5개소, 강원도의 4개 자기소 중에 2개소, 평안도의 13개 자기소 중에 1개소 등 모두 41개소, 하품자기소는 94개소가 있다. 이 중 경상도에는 37개 자기소 중에 상품자기소가 3개소, 중품자기소가 8개소, 하품자기소는 26개소가 분포되어 있다.<1 참조>

지방

품등

비 고

경기도

14

1 13

 

충청도

23

11 12

 

경상도

37

3 8 26

 

전라도

31

14 17

 

황해도

12

5 7

 

강원도

4

2 2

 

평안도

13

1 12

 

함길도

5

5

 

전국 139개소(상품자기소: 4, 중품자기소: 41, 하품자기소: 94)


한편, 명문(銘文) 분청자기(粉靑沙器)의 종류 중에 지명은 경상도가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것으로 미루어世宗實錄』「地理志가 편찬될 당시 경상도 지역만의 독특한 도자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는 예종 원년(1469)에 편찬된 경상도의 地誌로서 1453년에 시작하여 1477년에 완성된 팔도지리지의 편찬과정에서 작성된 도별지지이다. 세종때 편찬한 경상도지리지의 속편으로 변동사항을 보완하기 위해 내용이 강화되었다. 조사항목 중에 도기소 자기소 모모처 품상품하(陶器所 磁器所 某某處 品上品下)’에 대한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1455(세조 1) 양성지가 세종실록지리지의 미비점을 보충하여 1476(성종 7)에 완성하였으며 1485년과 1487년에 2차에 걸쳐서 수정하였다. 이후 1524년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되었는데 1531년에 수정된 것은 신증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통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15세기에는 자기소의 그 수가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한 문헌을 통해 상주지역의 자기소의 변화를 보면 <2>와 같다.

문헌자료의 검토를 통해 경상도 지역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37개소,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9개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4개소의 자기소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경기도 광주에 국가 주도의 관요(1467)가 생기면서 지방의 자기소는 점차 사라져 갔음을 알 수 있다.

 

<2> 문헌으로 본 상주지역 자기소의 변화

지역

세종실록지리지

(1454)

경상도속찬지리지

(1469)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자기소

(개소)

품등

자기소

(개소)

품등

자기소

(개소)

품등

3

21

1

중모현(中牟縣)

북쪽 추현리(楸縣里)

중모현(中牟縣)

동쪽 이미외리(已未隈里)

공성현(功城縣)

서쪽원동(院洞)

중모현(中牟縣)

노산리(奴山里)

분청사기는 관청명을 비롯하여 장인명, 지역명 등 명문이 기록된 것이 또 하나의 큰 특징이다. 이러한 글자가 새겨지게 된 배경과 당시의 공납상황에 대한 기록은고려사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옹에서는 매년 사람을 각도에 보내어 궁중에서 사용하는 내용자기의 제조, 감독을 1년에 한차례씩 하게 하였으나, 을 빙자하고 를 영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침탈하니 한 도에서 실어가는 것이 소 8, 90수레에 이르므로 지나는 곳마다 떠들썩하고 경도에 이르러 바치는 것은 겨우 백분의 일이요, 나머지는 모두 이를 사취하니 폐가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高麗史 列傳 卷31 趙浚 條)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해 왕위에 오르노니,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과 법제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에 의거토록 하라.(太祖實錄, 1, 1728)

 

內竪 安和尙을 경상도 중모화령 등의 현에 보내어 花器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太宗實錄, 21, 11429)

전라도 도관찰사에게 명하여 해마다 자기를 바치게 하였다.(太宗實錄, 26, 13716)

⑤ …… 호조에서 또 아뢰기를 장흥고의 공물 중 사목기에 금후로는 長興庫라 세 글자를 새기고 기타 각사에서 납부하는 것도 또한 장흥고의 예에 의하여 각기 그 사호를 새겨서 제품을 만들어 상납하게하고 윗 항의 표시가 있는 그릇을 몰래 가지고 있다가 드러난 자는 관용물건을 훔친 죄를 받게 함으로써 큰 폐단을 끊게 하소서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太宗實錄, 33, 17420)

 

공조에서 계하기를, “대개 진상하는 그릇은 마음을 써서 치밀하게 제작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아서 파손되니 지금부터는 그릇 밑바닥에 만든 장인의 이름을 써 넣어서 후일의 참고로 삼고, 마음을 써서 만들지 않은 자에게는 그 그릇 값을 물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世宗實錄, 11, 3416)

 

각 도의 월과 갑은 일찍이 보낸 見樣에 의해 견고하고 치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중략) 이제부터 방물도 또한 見樣에 따라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太宗實錄, 28, 1411)

 

예조에서 각 도산천단묘순심별감(道山川檀廟巡審別監)이 보고한 조건에 의해서 마련하여 아뢰기를(중략) “각 관에서 변···········비 등 제기의 제도를 알지 못하여 마음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정결하지 못하오니, 마땅히 봉상시의 각색 제기를 각 도로 나누어 보내어 이를 본떠 주조(鑄造)해 만들도록 하고 또 제기를 간직해 두는 창고를 만들어 단지기로 하여금 간수하게 하자는 윗 조항은 아뢴대로 시행하게 하되, 제기의 주조는 우선 자기로 구워서 만들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世宗實錄, 49, 128)

예조에서 평안도 감사의 궐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단군기자고구려 三殿의 제기를 처음에는 圖畵體制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나 모두 법과 같지 않으니, 청하건대 三位의 제기 중에서 보궤 등을 鑄器로서 고치고 변비는 봉상시로 하여금 만들어 보내고, 瓦㽅本道로 하여금 見樣을 하여 구워 만들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世宗實錄, 49, 148)

 

위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앙에서 자기의 형태와 문양의 제작을 관리 감독을 하여 자기의 질을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의 일환으로 의 예에서와 같이 자기의 공납과 관련하여 명문을 기입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도면 1> 상주지역 자기 가마터 분포도

. 상주의 분청사기 가마터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상주지역의 분청사기 가마터는 모두 16개소이며 이 중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磁器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의 모동면과 모서면인 中牟縣 일대로 상판리 가마터 일대를 비롯해서 대포리 가마터, 우하리 가마터 등으로 추정된다. 상품자기소와 중품자기소가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판리 가마터 1~7과 우하리 가마터는 현재 상판저수지를 중심으로 3반경 안에 분포하고 있다.


                                                                

<도면 2> 상판저수지 주변 분청사기 가마터 분포도

문헌기록이나 지표상에서 수습되는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상주 도자의 중심은 조선시대 전기의 분청사기라고 볼 수 있다. 상주박물관에서는 2015년부터 가마터 발굴조사를 시작하였다.

발굴조사대상지인 상판리 가마터 16 유적은 기존의 지표조사를 통해 가마터가 있을 것으로 보고가 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땅 위에 드러난 유물을 통해서만 추정을 하였기 때문에 유적의 정확한 성격이나 가마의 구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두 번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상주지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분청사기 가마터를 확인하였으며, 동시에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과 일치하는 유적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최근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상판리 가마터 16 유적의 발굴성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 문헌기록에 부합하는 분청사기 가마터 현황

연번

유적명

조업시기

비고

1

상주 상판리 가마터 1

15세기 전반

세종실록

중모현 이미외리 추정

2

상주 상판리 가마터 2

15세기 전반

 

3

상주 상판리 가마터 3

15세기 전반

 

4

상주 상판리 가마터 4

15세기 전반

 

5

상주 상판리 가마터 5

15세기 전반

 

6

상주 상판리 가마터 6

14세기 말 ~

15세기 초

태종실록

중모현 가마터 추정

7

상주 상판리 가마터 7

15세기 전반

 

8

상주 우하리 가마터

14세기 말 ~

15세기 초

세종실록

공성현 원동 추정

9

상주 대포리 가마터

15세기 전반

세종실록

중모현 추현리 추정

(1) 상판리 가마터 1 유적

상판리 가마터 12015520일부터 85일까지 발굴조사를 하였다. 유적의 위치는 모동면 상판리 산 58-1번지 일원이다. 유적은 고내미골과 지내미골 사이 야산(해발 387m)의 남쪽 말단부에 해당한다. 발굴조사를 착수할 당시에는 지표상에 분청사기편과 도침, 가마벽체편 등이 다수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다.

유적에서는 자기가마 1기와 폐기장 1개소가 조사되었다.


<사진 1> 상판리 가마터1

및 주변 가마터 및  <사진 2> 가마의 구조

 규모는 길이 22m, 너비 1.6~1.8m이며, 소성실의 경사도는 22°정도이다. 가마의 구조는 아궁이, 연소실, 소성실, 초벌칸, 연도부로 구분된다.

  아궁이는 연소실의 입구로 땔감을 넣은 입구에 해당한다. 30~40㎝내외의 천석을 이용하여 만든 듯하나, 무너져 있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는 없다.
  소성실은 번조실이라고도 하며 자기를 놓고 소성하는 곳이다.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규모는 길이 170㎝, 폭 160~180㎝, 깊이는 10㎝내외이며 요상면의 경사도는 22°이다. 소성실의 바닥은 단이 없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구조이며 요상에 불기둥 등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 통형 구조의 가마이다. 가마가 상당부분 노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로 인해 훼손이 심해 소성실 벽체가 10㎝ 정도만 남아 있어 천정과 벽체의 구조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다. 조업시 연료의 보충과 기물의 출입을 했던 용도인 측면 출입구는 아궁이에서 가까운 부분에 1개소만 확인된다. 가마의 조업회수와 관련 있는 보수흔적은 연소실과 소성실의 연결되는 지점에만 확인되는데 불의 영향으로 굳어진 소결층과 모래층으로 이루어진 요상면이 2단 남아있다. 소성실 내부에는 표토 아래에 소토덩어리와 벽체편이 포함된 적갈색사질점토로 채워져 있으며 일부 요상에서 모래층이 확인된다.
  유물은 소성실의 전면에 도침이 흩어져 있는데, 연소실에서 가까운 부분에는 일부 도침이 열을 지어 있다. 도침은 소성할 당시에 사용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며 도침간의 거리는 10㎝내외로 매우 가까운 편이다. 도침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도침의 크기도 지름 10㎝내외로 매우 작은 편에 속하므로 도침위에 올려놓는 자기의 크기도 매우 작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도부와 초벌칸은 유적의 북쪽 상단부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규모는 평면 220×220㎝, 깊이는 30㎝이다. 소성실에서 초벌칸으로 오면서 ‘ ’형태로 이어지다가 평면은 원형으로 넓어지며 요상면은 붉게 산화된 흔적만 확인된다. 초벌칸 바닥의 경사도는 거의 수평에 가까운 상태이다. 내부에는 후대의 나무뿌리로 인해 교란되어 가마의 폐기양상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연도로 이어지는 부분의 형태를 추측하기는 어렵다.  
  초벌칸은 조선시대 전기 가마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소성실의 끝부분에 연도부가 있는 곳에 위치한다. 가마의 가장 상단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대부분 훼손되고 남아있는 경우가 없는데 이번 유적에서는 양호한 형태로 확인되어 초벌칸의 구조 파악에 좋은 자료이다.
  초벌칸의 구조는 중앙을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벽체부분을 지름 15~40㎝의 석재를 이용하여 4~5단을 쌓아서 구축하였다. 내부의 중앙 바닥에 초벌된 접시, 대접편이 깨진 상태로 다수 남아 있는 상태였다.
  폐기장은 가마의 동쪽에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넓게 퍼져 있는 양상이다. 규모는 길이 27m, 너비 11m, 깊이 20~60㎝이다. 폐기장의 퇴적양상은 비교적 간단한데 소토를 포함한 명갈색사질점토 아래에 자기편과 벽체편, 소토 등이 다량 포함된 적갈색사질점토층이 확인된다. 폐기장내의 유물은 적갈색사질점토층에서 출토되었다. 폐기장내에서 확인되는 재층은 가마의 중앙에서만 소량 확인되는데 재층의 두께가 10㎝ 내외이며, 길이는 3m 내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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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상판가마터 유적 1

폐기장내에서 확인되는 유물의 양상은 초벌칸이 있는 상단부 주변에는 자기 초벌편이 깨어진 채로 모여 있는 양상이 확인되며, 중앙부와 하단부에는 초벌편 외에도 벽체편, 도침, 자기편이 다수 확인된다.

폐기장 내에는 가마와 50~100정도 떨어진 지점에 가마의 방향과 평행되게 너비 1m, 깊이 50로 굴착한 흔적이 확인되는데 가마의 벽체와 천정편이 채워져 있는 양상이다. 가마의 방향을 따라 굴착을 한 것으로 보아 배수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유물은 폐기장에서 대부분 출토되었으며, 가마 내부에서는 소성실에서 도침과 베개가, 초벌칸에서는 대접과 접시가 출토되었다.

유물의 종류는 일상용 용기인 대접과 접시를 비롯하여 도침, 갑발 등 소성도구, ()와 궤(), (), 표형병(瓢形甁) 등 제례와 관련된 유물, 장고와 같은 상형자기 등 다양한 기종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에는 화려한 문양이 시문되는데,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을 이용하여 다양한 크기의 국화문과, 나비문 등을 기면의 내외면에 분장하였다. 유물의 문양구성을 보면 내저면의 중앙에는 국화문이나 나비문을, 그 바깥으로 소국화문 또는 집단 소국화문을 내저면과 측사면에 그릇 전체에 빽빽하게 시문하였는데 이것은 인화기법 중에 가장 번성한 시기의 기법이며 기술적인 면에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겹침없이 정교하게 시문을 한 것으로 보아 한 고도의 기술을 가진 장인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굽내면에는 굽다짐흔 외에도 백토 분장이 안 된 국화문이나 나비문을 찍었는데 다른 유적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기법이다.

유적에서는 분청사기 베개가 4점 출토되었는데 그동안 청자베개는 많이 알려져 있으나, 분청사기 베개는 유물의 수량도 많지 않을뿐더러 출토지가 분명한 베개는 처음으로 확인되어 그 의미가 크다.

각종 제례에 쓰이는 보()와 궤()를 비롯하여 표형병은 관청이나 사찰에서 주로 출토되는 유물인데 본 유적에서 제작되어 관청이나 절 등에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유적에서 출토된 잔탁은 김천 교동유적客舍址에서 비슷한 잔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잔탁의 용도 및 사용처에 대한 추정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고급자기를 생산하는데 사용되는 갑발은 3점만 확인되는데 출토유물의 양에 비해 극히 소량에 불과하다. 기물의 중첩소성은 최대 3단까지 확인되는데, 가마 내부에 남아있는 도침간의 거리를 통해 볼 때 소형의 기물을 대부분 갑발을 사용하지 않고 소량 소성하여 생산하는 가마인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갑발 없이도 고급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을 갖춘 집단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명문은 폐기장에서 3점이 출토되었는데 굽내면에 유약 위에 표시한 ‘×’문이 2점 있으며,

초벌된 대접 안쪽에 희미하게 主子色手五十三묵서명의 명문이 1점 확인된다.


이 시기에 확인되는 명문은 대체로 관청명, 장인명, 지역명, 기호 등이 짧게 나타나는데, 상판리 유적에서 확인되는 명문은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명문의 형식과는 차이가 있는데, ‘主子色에서 일하는 자 오십 삼이라는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오십 삼의 경우에는 사람의 수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자기의 수량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기 때문에 향후 자료가 추가된다면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2) 상판리 가마터 6 유적

유적은 지내미골 안의 비교적 넓은 평지와 구릉 말단부를 포함한다. 유구는 구릉 말단부에 자기가마 1기가 있으며 폐기장은 가마를 중심으로 좌우에서 확인되는데, 가마의 오른쪽에 위치하는 동폐기장은 계곡부와 접해 있어 급경사를 이루고 왼쪽에 위치하는 서폐기장은 급경사로 내려오다가 편평한 지형으로 연결된다.


가마는 조사대상지의 중앙에 위치하는 구릉의 능선을 따라 해발고도 277~282m에 등고선과 직교되게 조성되었다. 가마의 최상단부 즉, 소성실 상단과 연도부쪽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가마의 전체 길이는 22m 정도이며 너비 1.8~2.2m이다. 소성실의 경사도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불턱에서 1소성실까지는 5°이고, 2소성실에서 7소성실의 전체 경사도는 평균 20˚이다.
  연도부와 초벌칸은 가마의 최상단부에 위치하나 후대의 민묘로 인해 전체적으로 삭평이 이루어져 바닥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잔존형태로 본 초벌칸은 평면 원형이다. 초벌칸의 북쪽으로는 지름 15㎝ 내외의 할석 1열이 남아있다.
  소성실은 가마의 중앙부에 해당하며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규모는 잔존길이 1,470㎝, 최대폭 230㎝, 소성실 내부폭 140㎝, 깊이는 20~45㎝내외이다.


<사진 6> 가마전경

  소성실의 내부에는 불기둥이나 계단 등 시설의 흔적은 없으며 단이 없이 완만하게 연결되는 구조이다. 가마는 지표상에 상당부분 노출되어 있었으나 잔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벽체는 가마가 경사면에 위치하기 때문에 초벌칸에 가까운 소성실보다 아궁이쪽의 소성실이 잔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초벌칸에 가까운 소성실은 벽체가 남아있지 않거나 남아 있어도 10㎝ 미만인 반면, 아궁이쪽에 가까운 소성실은 벽체가 최대 45㎝ 정도 남아 있다. 천정부는 오랜 시간이 지나 훼손되어 형태는 알 수 없다. 소성실내 측면 출입구는 아궁이에서 봤을 때 오른쪽에 위치하며 8개소가 남아있으며, 초벌칸에 가까운 5와 6소성실의 왼쪽으로 처음에는 출입구가 있었으나 벽체보수를 하면서 출입시설을 막은 흔적이 확인된다. 출입구의 폭은 80㎝정도이며 출입구 사이의 간격은 120~140㎝ 정도이다. 요상(窯上)은 전체적으로 적색산화층으로 남아있는데 측면 출입구가 위치하는 부분에는 단단한 회색소결층이 확인된다. 이것은 조업시 이 곳으로 땔감을 보충하였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 비해 고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소성실 내부는 적갈색 소토덩어리와 벽체편이 포함된 적갈색 사질점토로 채워져 있으며 요상(窯上)에는 조업 시 자기가 부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된 모래가 일부 남아있다. 소성실은 암반층을 굴착하여 조성한 뒤 점토로 마무리를 하였으며, 최초의 벽체와 보수를 한 벽체 사이에는 할석과 도침을 이용하여 넣어서 벽체를 보수한 흔적이 있다. 보수를 한 벽체는 최대 4겹이 확인된다. 소성실내에는 대접과 접시 및 도침이 흩어져 일부 남아 있다.
  아궁이는 소성실의 하단부에 위치한다. 아궁이는 암반층을 굴착하여 조성하였는데, 벽체부분은 점토로 다듬어 마무리를 하였으나 바닥은 암반을 굴착한 그대로 이용하였다.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규모는 300×200㎝, 불턱의 높이는 100㎝ 정도이다.


<사진 6> 아궁이 불턱 세부

  불턱은 암반을 비스듬하게 굴착한 뒤, 점토를 이용하여 벽면을 다듬었는데, 아궁이 바닥에서 20㎝정도 올라와서 점토를 덧대었다. 불턱은 비스듬하게 굴착된 암반면과 점토사이에는 할석을 채워 넣어 수직으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점토로 불턱을 마무리한 위에도 할석으로 2~3단 쌓아서 소성실과 높이를 맞추었다.
  아궁이내에는 천정과 벽체편 및 소토가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바닥에는 목탄으로 인해 재가 소량 깔려 있다. 아궁이 입구에는 별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으며, 아궁이내에서는 도침을 비롯해서 대접과 접시가 출토되었다.
  아궁이 입구부분은 암반층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양상인데 암반층 위에 유수에 의한 자연 퇴적층이 있고 그 위에 소토가 포함된 적갈색사질점토층이

<사진 6> 폐기장 전경

 쌓여있다. 이 층은 아궁이의 앞쪽으로 평면 50㎝정도 확인되는데 조업과 관련한 유물은 전혀 출토되지 않으며 그 밖의 시설물도 확인되지 않는다. 
  폐기장은 자기가마를 중심으로 양쪽 경사면을 따라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가마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계곡부와 접해있는 것을 동폐기장, 왼쪽에 있는 것을 서폐기장으로 구분하였다.
  가마의 서쪽에서 확인되는 서폐기장은 가마에서부터 급한 경사로 내려오다가 비교적 완만한 평지와 연결되는데 평지부분에는 주변의 계곡으로 인해 형성된 모래층이 부분적으로 퇴적되어 있는 양상이다. 서폐기장의 중앙부분에서 남쪽으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구가 형성되어 있다. 구는 가마의 5소성실에서 50㎝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며 남쪽으로 경사면을 따라 넓게 퍼져있는 양상이다.
  유물은 가마 내부에서는 소성실에서 대접과 접시 및 도침이 소량 확인되었으며, 가마의 양쪽으로 넓게 형성되어 있는 폐기장에서 대부분 출토되었다. 폐기장에서는 대접과 접시를 비롯해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동폐기장에는 초벌칸이 위치하는 북쪽으로는 초벌자기편이 다수 확인되며, 남쪽으로는 재벌자기와 대접, 접시 외에 병, 합을 비롯해서 도침과 비짐이 최대 170㎝ 정도 퇴적되어 있다. 서폐기장은 동폐기장에 비해 유물의 출토수량은 적으나 대접과 접시를 비롯하여, 병, 합, 베개와 장고, 화분, 돈(墩)과 같은 일반적으로 출토 빈도가 낮고 한정된 계층이 사용한 고급자기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본 유적의 장인은 고급기술을 갖춘 집단임을 추측할 수 있다.
  소성도구로는 가마에서 소성할 때 받치는 도침과, 자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갑발, 물레에 끼우는 도구인 갓모가 있다. 그 중 가마에서 자기를 구울 때 가마의  바닥과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기 밑에 받치는 도침은 다양한 크기가 확인된다. 이로 미루어 보아 가마에서 소성되는 자기의 크기와 종류가 다양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문양은 그릇의 내면과 외면에 백토와 자토를 이용하여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으로 시문하였다. 상감기법의 문양으로는 기내 저면에는 상감기법의 연화문과 인화기법의 국화문을 시문하였으며, 내측면에는 상감기법의 蓮唐草文柳文雨占文龍門魚文鶴文, 인화기법으로는 육원문如意頭文蓮瓣文, 구연단에는 상감기법의 艸文雷文이 있다. 기외면에는 측면에 蓮唐草文雷文이 확인된다.

 

<4> 명문자기 출토 현황

 

명문

수량

 

司膳

10

 

6

 

4

 

3

 

13

 

双林

9

 

4

 

3

 

1

 

불명

4

 

합 계

53

명문자기는 53점이 출토되었다. 명문은 적색안료와 백색안료를 이용해서 그릇의 내면 중앙에서 확인되는데 호 외면에 시문한 것도 2점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명문의 종류는 관청명, 장인명, 지역명, 기호 등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상판리 가마터 6 유적에서 출토되는 명문은 관청명과 장인명 외에 사찰을 의미하는 명문()도 있다.

명문을 구분해 보면, 관청명으로는 司膳, 장인명으로는 双林이 있으며, 사찰을 의미하는 이 있다. 그 외에 판독이 어려워 의미를 알 수 없는 명문이 4점 확인된다.

분청사기에서 확인되는 명문은 문양의 종류와 시문기법과 더불어 유물의 제작시기를 판단하는 근거자료가 되는데, 특히 관청명은 문헌에 남아있는 관청명과 비교를 통해 유물의 제작 시기를 판단하는 중요 자료이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명문 중에 관청명으로 판단되는 명문을 문헌기록에서 찾아 검토를 해보면,

司膳명은 司膳署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사선서는 고려(高麗) 때부터 임금의 식사(食事)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官廳)이다. 상식국(尙食局)이라 부르던 것을 25대 충렬왕(忠烈王) 34(1308)년에 司膳署로 고쳤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다.(1308~1356, 1372~1466)

順承府慶順府로 추측할 수 있는데, 순승부(順承府)는 세자를 위한 관청이다. 충녕대군(세종대왕)이 세자로 책봉된 후(태종 186), 경승부(敬承府)에서 개칭되었다. 이후 세종대왕이 즉위한 후에 順承府는 다시 仁壽府로 개칭되었다(1418). 경순부(慶順府)는 세종 310월에 정종의 비를 위한 관청인 인령부(仁寧府)를 경순부(慶順府)로 만들어 동궁에 속하게 하였다(1421).

承寧府仁寧府로 추정된다. 승령부(承寧府)는 고려 말 내용공상(內用供上) 창고인 내장고(內藏庫)의 재원(財源)을 승계하였다. 태조의 태왕상부로 태종 4년에 육조직계제를 시행하고 그 직속아문을 정할 때 이조의 속사가 되었다(1400~1411). 인령부(仁寧府)는 정종 2(1400)에 정종의 를 위한 中宮府로 세워져 세종 3(1421)慶順府가 됨으로써 폐지되었다(1400~1421).

위의 관사명과 문헌기록의 비교를 통해 유적의 조업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는데, 가장 오랜 시간동안 존속된 司膳명을 통해서는 1372년 이후부터 1466년의 시기로 추정할 수 있으며 명을 통해서는 1418년 또는 1421년으로 추정되며, ‘명을 통해서는 1400~1421년으로 볼 수 있다. 위의 문헌자료를 통해서 볼 때 가마의 조업 시기는 크게 1400년부터 1420년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가마의 고고지자기분석과 같은 과학분석 결과 자료와 유물에 나타나는 문양의 종류 및 시문기법과 기형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가마의 조업 시기는 좀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 맺음말

상판리 일대 가마터는 世宗實錄地理志의 중모현 이미외리 상품자기소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판단되는데 이번 상판리 가마터 6 유적 발굴조사에서는 청자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는 상감기법의 분청사기, 즉 초기 형태의 분청사기가 다량 출토되고 정형화되기 이전의 분청사기 인화기법의 문양이 많이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 초기의 자기소일 가능성이 크다.

이번 상판리 가마터 6 유적의 가마와 폐기장에서는 상주지역에서 처음으로 분청사기가 제작되는 양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다량 출토되었다. 유물은 대접과 접시 등 일상용기가 주류를 이루지만 베개, 향로와 향로받침, 화분, () 등 일반적으로 출토빈도가 낮고 한정된 계층이 사용하는 고급자기, ‘司膳’, ‘’, ‘’, ‘’, ‘’, ‘’, ‘双林’, ‘’, ‘등 명문자기도 상당량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서 가마에서 생산된 자기의 수준과 소비처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상판리 가마터 1은 분청사기가 가장 번성한 시기의 최고급 기술을 가진 장인이 조업한 가마터로서 조선시대 전기의 최상품의 분청사기 자료를 다량 확인하는 성과를 이뤘다.

또한 학술발굴조사를 통해 상주지역, 나아가 조선시대 초기 가마의 구조를 파악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물이 변화하는 양상을 이해하고 나아가 상주 도자문화의 시원기를 해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확보하였다.

향후 조사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상주지역의 가마의 유형 및 이 일대의 가마터의 성격을 파악하고 정비를 통하여 이를 활용방안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