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6호(2016년)

상주학. 금요사랑방. 당교(唐橋) 전설, 그 진실을 살피다

빛마당 2017. 2. 2. 08:53

당교(唐橋) 전설, 그 진실을 살피다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원

안동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조희열

 

상주 지역에 전해 오는 당교(唐橋)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와 문경시 사이에 지역 주민들이 떼다리라고 하는 당교가 있다. 문경시는 시청 경내에 19907월 국사편찬위원 · 문화재위원 ·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정영호가 지은 당교사적비()를 세워 놓았는데, 이 비만 보면 마치 당교는 문경시 경내에 있는 유적인 것처럼 착각을 할 수가 있다. 상주시도 비를 세워 이것을 다리()’로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도 다음 책의 영향인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창현교량(橋梁)’조에 당교(唐橋)’를 기록하기를

 

()의 북쪽 6리에 있다. 신라 고기(古記)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여기에 머물렀을 제 김유신이 그 계획을 알고 당나라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어 취하게 하고 모두 여기에 묻어 죽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당교라고 이름 지었다.’ 하였다.

 

라고 전한다. 이 책 역시 교량(橋梁)’조에 기록하여 다리라는 강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리와의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 삼국통일 전쟁과 나당(羅唐) 관계

 

당교지명 유래를 자세히 알기 위해 당시 신라와 당나라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은 당나라 건국 이전부터 한반도를 자기의 수중에 넣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옛 한사군 설치를 제외한다면 수나라의 고구려 침입이 그 시작이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라 할 만한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입했지만 실패하고, 그 여파로 오히려 멸망의 길을 걸었다. 수나라를 이어 건국한 당나라는 초기부터 한반도 정벌의 발판으로 고구려를 침입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한편 신라는 당나라 건국(618) 후인 621(진평왕 43)년 가을부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토산물을 바치고, 심지어 649(진덕왕 3)년부터는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가 공격해 올 때마다 군사 원조를 요청했고, 당나라는 이에 응했다.

659(태종 무열왕 6)년 백제가 자주 침입해 오자 여름 4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했지만 답이 없자 신라는 초조해졌다. 6603월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수륙군 13만 명으로 백제를 치게 하였다. 이때 신라의 태종 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도록 했는데, 이것으로 보면 당나라는 신라를 당나라의 속국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이 전쟁을 통해서 당시 당나라의 심중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660621일 소정방은 덕물도에서 신라 태자 법민을 만나 나는 710일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라 하자 법민은 이에 약속하고 돌아와 김유신 · 품일 · 흠춘과 함께 정예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출정하게 하고 왕은 금돌성으로 가서 머물렀다.

660년 가을 79일 김유신 등이 황산벌로 진군해 보니 백제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기다리고 있었고, 김유신이 3 길로 나누어 4번을 공격했지만 전세는 불리했다. 화랑 관창의 죽음 후 비로소 계백 장군을 전사 시키고 좌평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을 사로잡은 후 진군(進軍) 할 수 있었고, 같은 날 소정방은 부총관 김인문과 함께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깨뜨렸다.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신라 독군(督軍) 김문영의 목을 베려 했고, 김유신이 이에 반발하여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한 후 백제를 깨뜨리겠다.’며 분통을 터뜨리자 비로소 소정방이 물러선 것이다.

718일 백제의 의자왕이 항복을 했고, 소정방은 93일 당나라로 돌아갔는데, 무열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와 117일까지 싸운 후 22일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도 백제의 유민들은 계속 공격해 왔다.

6616월 당나라에 있던 김인문과 유돈이 돌아와서

 

당나라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마침내 문무왕께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로 응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알려왔다. 2차 여당(麗唐)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717일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하여 고구려 정벌군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천존 · 죽지 ·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삼고, 품일 · 충상 · 의복을 상주(上州) 총관으로 삼았다고 했다.

상산지, 공서(公署)창고의 은성창(銀城倉)에 기록하기를

 

상주(上州)의 유지(遺址)에 있다. 전에 창고가 없어서 빈민구호를 위해 봄에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받는 곡식을 수납하는데, 길이 멀어 민폐가 많으므로 본 면의 향약사(鄕約社)를 빌어 창사(倉舍)로 하다가 1689(숙종 15)에 새 창고를 세웠다.

 

고 했다. 지금의 상주시 은척이 상주(上州)의 유지(遺址)라는 것이다.

상산지고적(古蹟)’고도(古都)’ 사벌국고도에서

 

상주(上州) 옛 터가 주북 (州北) 45리 밖의 은성촌(銀城村)에 있으니 촌하(村下)에 창고와 관아의 옛 터가 있으며 당 고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라 문무왕이 품일(品日) · 충상(忠常) · 의복(義服)으로 상주 총관을 삼아 대장 김유신 등 18명의 장수와 함께 당과 합세 고구려를 쳐부수었다고 한다.

 

라 기록했다.

8 문무왕은 이들과 함께 시이곡정(始飴谷停)에 머물렀는데 백제 잔당이 옹산성에서 길을 막아 927일 이를 쳐부수고, 1029일 당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왕은 서울로 돌아왔다.

662년 봄 정월 객관에 머물던 당 나라 사신은 왕을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 )’으로 책명 했다.당나라가 신라를 속국으로 여기고 있음이다. 이때 왕은 김유신과 김인문 · 양도 등 9명의 장군과 함께 2,000여 대의 수레에 쌀 4천 섬 · () 22천여 섬을 싣고 고구려와 싸우고 있는 당나라 군사를 돕기 위해 평양으로 가게 했다.

23일 지금의 임진강 북쪽 산양에서 적을 만났는데, 귀당 제감 성천이 이현에서 공격하여 이기고 군량운송을 성공 시켰다.

그러나 당나라 소정방은 다른 부대의 지휘관 임아상과 방효태가 사망하고, 보급선은 끊어지고, 얼어붙은 패강을 이용하여 사방에서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전황은 어려워지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차 신라가 공급한 군량을 얻자 2월 전쟁을 그만 두고 돌아갔다.

666년 겨울 12월 당나라는 이적을 요동동행군대총관으로 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고, 신라는 667년 가을 8월 문무왕이 김유신 등 30여 명의 장군을 인솔하여 서울경주을 출발하여 102일 한성정에 도착하여 당나라의 이적(李勣)이 오기를 기다렸다.

668921, 삼국사기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신라 군대는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을 찾아뵙고,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 덕남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신라의 대군이 고구려를 평정할 때 신라의 문무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향하다가 힐차양(肹次壤)에 이르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고 하여 사실상 이때 고구려의 멸망을 알리고 있다.

 

3. 당교(唐橋)와 관련한 기사(記事)들 사실인가?

 

삼국유사1권 기이 제1 ‘태종 춘추공은 기록하기를

 

건봉(乾封) 2(667)에 소정방이 죽자 당나라 황제는 매우 애도해 하며 좌효기대장군 유주도독(左驍騎大將軍 幽州都督)을 증직하고, 시호(諡號)()’이라 하였다. 이상은 당사(唐史)의 글이다.―」

 

라 했다. 667년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한 해 전의 일이다. 같은 책에서 또 이르기를

 

또한, 신라 고전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또 신라도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모의를 알고 당나라 병사들을 초대하여 향연을 베풀고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구덩이에 묻었다. 지금의 상주 지경에 당교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땅이라고 한다.’ 당사(唐史)를 보면 그 죽은 이유는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신라의 속설이 근거가 있는 것일까? 만약에 임술(662)년에 고구려를 치는 싸움에서 신라 사람들이 소정방의 군사를 죽였다면 후일인 총장 원년 무진(668)에 어찌 당나라에 청병을 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이것을 보면 신라의 고전이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668)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당나라를 신하로서 섬기지를 않고 고구려 땅을 마음대로 소유한 일은 있어도 소정방과 이적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

 

라고 했다.

그러나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에는 소정방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왜 죽었는지 언급이 없다.

만약 이 기사가 맞는다면 당나라 군사가 왜 하필 상주근교의 당교에 진을 쳤을 까 하는 것이다. 삼국시대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역 통로는 육로로는 당항포로 뿐이었고, 이 길은 반드시 상주를 거쳐 가야 하는 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그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주가 적당했을 것이다.

이 당시 지금의 경상북도 서북부 지방은 모두 상주에 속한 지역이었다.

삼국유사2문호왕 법민

 

총장 원년 무진(668) 9월 계사에 이적(李勣)이 고장왕을 사로잡았으며, 12월 정사에 황제에게 포로를 바쳤다. 상원 원년 갑술(674) 2월에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치게 하였다. 신라 고기의 기록에서는 육로장군 공공(孔恭)과 수로장군 유상(有相)으로 하여금 신라의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여기에서는 唐書 高宗記인문(仁問)과 흠순(欽純) 등의 알만 말하고 유신의 일은 빠뜨리고 언급하지 않았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遊兵)과 여러 장병들이 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이를 알고 발병(發兵)을 하여 쳤다. 이 공격에서 김유신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고, 소정방의 이름도 없다. 김유신은 이미 문무왕 4(664) 정월 은퇴를 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었다.

다음 해에 당의 고종이 인문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의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는데 우리를 해하니 무슨 이유냐?’ 하고 감옥에 가둔 다음 군사 50만을 훈련시키고 설방(薛邦)을 장수로 하여 신라를 치게 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5년 조에 당 고종은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에 임명하여 신라를 경략(經略)케 하였으며 또한 설인귀가 천성(泉城)을 공격하다가 패주한 사실이 보인다. 이때 의상법사가 유학을 하러 당에 들어왔다가 인문을 찾아 나아가 보니 인문이 그 사실을 말하였다. 의상이 곧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매우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 대책을 강구할 때 각간 김천존이 아뢰기를 근자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하고 돌아왔으니 청하여 물어 보십시오하였다.

 

라고 전한다. 이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장수 이적은 고구려의 포로 고장왕과 함께 20여만 명을 이끌고 돌아갔지만 일부 장병들이 남아있었고, 이들이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문무왕 법민이 공격한 것이다. 그런데 공격한 곳이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우리는 당교라고 추정하고 있다.

다음 해 보고를 받은 당 고종이 김인문을 옥에 가두었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시켰는데, 때마침 당나라로 유학을 왔다가 김인문을 찾아 온 의상법사에게 말하여 신라에 알리게 했다는 것이다.

신라는 당나라 군사의 침공을 막을 대책으로 절을 지어 불법으로 막고자 했으나 시간이 부족하자 임시로 사천왕사를 지어 공격해 오는 당나라 군사를 바다에서 태풍으로 침몰하게 했고, 그 후에 사천왕사를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사실로 보아 신라는 김유신이 아닌 문무왕이 직접 영을 내려 어딘가에서 당나라 유병(遊兵)을 공격하여 죽였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당시 소정방이 전투에 참가한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4. 삼국통일 후 나당(羅唐)전쟁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당은 신라에게 평양 이남의 땅은 신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있었고, 신라왕은 그 땅과 백제 땅을 차지하여 두 나라간 분쟁이 시작되었다.

669년 신라는 김흠순과 김양도를 당에 사죄사로 파견하고 급찬 기진산을 당에 보내 자석 2상자를 바쳤다.

9월 토번이 당나라 영토인 타림분지를 급습하면서 토번과 당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겨울에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 구진천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6703월 토번과 당의 전쟁이 시작 된 것을 알게 된 신라는 고구려인들과 함께 2만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공격하고 승리하였지만 당나라 원군이 오기 전 곧 철수했다.

6704월 당나라는 토번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한반도 지역을 관할하던 안동도호부 도호 설인귀를 토번 전선으로 이동시켰지만 7월 설인귀의 10만 대군은 전멸하고 설인귀 본인만 겨우 살아나왔다.

6707월 당에 사신으로 간 2사람 중 김흠순은 돌려보내고,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므로 김도양은 억류하여 가두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김흠순이 돌아오면서 땅의 경계를 그린 지도를 가지고 왔는데 백제 땅을 신라에 돌려주는 것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당 동맹을 맺을 때 당은 백제 땅을 신라에게 돌려주기로 했었으므로 백제 땅을 신라에 돌려주지 않은 당이 계약을 어긴 것이었다.

671년 가을 7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신라왕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 오호라! 전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역적의 신하가 되었구나! 처음에 잘 하다가 끝에 가서는 나빠진 것이 한스럽고 근본은 같았는데 끝이 달라진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왕께서는 지혜가 뛰어나시고 위풍과 정신이 맑고 수려하시니 겸손한 뜻으로 돌아가 도를 따르는 마음을 가지신다면 제향을 제 때에 받을 것이요 사직이 바뀌지 않게 되어 길함을 가려 복을 받을 것이니 이것이왕에게 좋은 계책입니다. … 」

 

라 했다.

6719월 당나라는 장수 고간은 당나라 군사 1만 명과 말갈 추장 이근행의 기병(騎兵) 3, 도합 4만 병력으로 평양성의 방어력을 강화하고, 황해도 대방지역으로 신라를 공격했는데, 신라는 우잠성과 대양성, 동자성이 전멸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이들 기병을 대적하기 위해 6729서당 중 장창당(長槍幢)을 창설했다.

신라는 당나라의 보급선이 길어져 바닷길을 이용할 것으로 보고 끈질기게 보급선을 추적했는데, 106일 마침내 서해를 거쳐 재령강 하류로 들어오던 보급선 70여 척을 침몰시키고 100여 명을 생포했다.

6727월 당나라는 재침하였고, 8월 신라는 석문황해도 서흥에서 주력군이 격파되었다. 그러자 신라는 9월 당나라에 사죄사(謝罪使)를 파견했고, 이후 전술과 전략을 수성전(守城戰) 형태로 바꾸었고,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 부흥군과 전투를 하고 있는 동안 6739월까지 내륙과 변방에 13개의 성곽을 증축하거나 축조했다. 674년은 토번이 당나라를 공격했음인지 나당 전쟁은 소강상태를 지내다가 6752월 당나라는 또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는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또 많은 공물과 함께 당에 사죄사를 파견했다.

6751029일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이근행의 말갈 군과 싸워 승리하고, 338십 필의 말을 노획하고, 같은 시기 천성 전투 승리로 병선 40척을 노획했다. 이후 이근행은 매소성을 떠나 돌아가 이듬해 3월 토번과의 전투를 위해 청해에 투입되었다.

67611월 사찬 시득의 신라 수군이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당 수군과 싸워 실패했지만 이후 22회의 기습전에서 승리하였다. 그해 겨울 토번왕 만손만첸깐포가 죽자 왕위 계승 다툼으로 내분이 일자 당은 이 기회에 토번을 공격하기 위해 한반도에 주둔한 군사를 이동시키면서 8년간의 나당 전쟁은 끝이 났다.

 

5. 소정방(蘇定方)과 관련한 기사(記事)

 

소정방(蘇定方, 592667)의 본명은 소열(蘇烈), ()가 정방이다. 환갑을 넘겨 주목 받은 인물로 강행군과 속공 전술을 구사하여 서돌궐 · 사결 · 백제를 멸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고, 고구려 평양을 공격했던 인물로 노환으로 중국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그는 본래 기주(冀州) 무읍(武邑) 출신으로 10여 세에 아버지 소옹(蘇邕)을 따라 수나라 말기 일어난 마을의 도적을 토벌했고, 아버지가 죽자 그 무리를 이끌며 장금칭(張金稱) · 양공경(楊公卿) 같은 도적을 격파하기도 했다. 후에 두건덕(竇建德)을 섬겼고, 그의 부하 장수 고아현(高雅賢)의 눈에 들어 양자가 되었다. 두건덕이 죽은 후는 유흑달(劉黑闥) 밑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유흑달과 고아현이 죽은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630년 당나라 광도부 절충(匡道府折衝)이 되어 이정 밑에서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과 적구(磧口)에서 싸워 이겨 좌무후중랑장(左武候中郎將)이 되었고, 655년 좌위훈일부중랑장(左衛勳一府中郎將)이 되었다.

655년 정명진(程名振)과 함께 적은 병사를 거느리고 요수(遼水)를 건너 고구려를 습격하자 얕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역공한 고구려 군 1,000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여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이 되고, 임청현공(林靑縣公)에 봉해졌다.

656년 서돌궐 정벌 때 선봉에 서서 500명의 기병으로 2만 명의 서돌궐 군을 공격하여 1,500여 명을 죽이고 말 2,000필을 노획했다.

657년 이려도행군대총관이 되어 서돌궐 정벌에 성공하여 좌효위대장군이 되고 형국공(邢國公)에 봉해졌으며, 그 아들 소경절도 무읍현공(武邑縣公)으로 봉해졌다.

659년 소륵 · 주구파 · 갈반타가 반기를 들자 토벌을 명받고 안무사가 평정하여 좌무위대장군이 되었다.

660314도 대총관을 제수 받고, 나당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 토벌을 명받았다. 613만 병력으로 산둥반도 성산에서 황해를 건너 덕물도에 도착하였고, 신라 태자 법민을 만나 서로 약속하고, 당나라는 해로로, 신라는 육로를 통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여 정벌했다.

663년 양주안집대사가 되어 토번지금의 티베트과 싸웠고, 66776세로 죽자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유주 도독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이라 했다.

 

이러한 소정방을 우리나라에서는 신격화하고 있다.

고려사권제56, 지제 10, 대흥군(大興郡)

 

대흥군은 원래 백제의 임존성금주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은 임성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 본주에 소속시켰으며,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의 사당이 대잠도봄과 가을에 정부에서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에 있다.

 

라 했다. 여지도서는 대흥현 서쪽 3리에 소정방의 사당을 표기하고 있다.

임존성은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 금마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수산 정상부에 있는 둘레 2,450에 달하는 테뫼식 산성인데, 사적 제90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축성방법은 주로 외벽은 돌로 쌓고 내벽은 돌과 흙을 섞어 쌓았는데, 안쪽으로는 78정도의 내호(內壕)가 둘러있다. 성벽의 높이 약 2.5, 성벽 폭 약 3.5, 성벽 윗부분 폭은 약 1.6내외이다.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이 성은 백제 멸망 당시 항복했던 흑치상지가 무리를 이끌고 이곳에서 백제 부흥군에 가담했는데, 불과 10일 만에 3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660826일 신라가 이 성을 공격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663년 백제 부흥군이 궤멸한 후에도 지수신(遲受信) 등이 지키는 임존성은 신라군의 공격에도 30일을 버티다가 함락되었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이 끝났던 것이다.

 

동국이상국집 38, ‘소정방 장군에게 올리는 제문(祭文)’

 

「…외국이 중국에 복종하지 않은지 오래였으므로 태종이 장차 만국을 복종시키고 문궤(文軌)를 통일하려고 하여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고구려를 치게 하였는데, 불행히도 추기(騶騎)를 우리나라에 머무른 채 환국(還國)하지 못했으므로 유사(遺祠)가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외국이 복종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건만 문 황제당 태종는 오히려 분연히 노하여 군사들을 원정(遠征)에 내보내어 고달프게 하였고, 끝내는 몸소 진두(陣頭)에 서서 경략(經略)하기까지 한 것은 장군도 아는 일이며, 하물며 동경(東京)은 우리나라의 배읍(陪邑)인데 감히 군사를 일으켜 국가를 배반 함에리까! 입을 벌리고 주인을 향해 짖는 것은 개짐승도 하지 않는 법인데, 모르겠습니다만 장군의 생각에는 이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삼가 바라건데 고금에 하국(下國)을 정벌하는 경중의 마땅함을 참작하시어, 옛날 장군의 범 같은 걸음과 매 같은 눈초리의 위엄을 되살리시어, 관군으로 하여금 속히 추속(醜俗)을 쓸어버리고 곧 반사(班師)하게 하여 주시면, 장군이 비록 객혼(客魂)으로 이곳에서 제사를 받으셔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

 

라 하여 소정방이 한반도에서 죽었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6. 당교(唐橋)의 의미

 

당교라는 이름을 널리 사용하면서도 현지에서는 떼다리로 불렸다. 그래서 당교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리로 이해하고 있다. 당교를 소개하는 자료마다 상주시와 문경시 경계에 있는 다리를 사진으로 찍어 소개하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창현에도 당교를 교량(橋梁)’조에 기록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이해해 왔다.

신라를 공격하겠다고 하는 당나라 군사가 과연 몇 명 쯤 되었기에 다리에다가 비교했을까? 신라시대 놓은 다리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지금 놓인 다리만큼이나 했을까? 하는 의심 한 번 가져보지 않은 결과이다.

당교의 순 우리말 이름은 떼다리이다. 이 떼다리를 경덕왕 16(757) 우리나라 모든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꿀 때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당교가 되었다.

떼다리에서 는 당()나라를 뜻하는 가 경음화(硬音化)한 것이다. ‘다리는 어원이 땅을 뜻하는 이다. ‘은 지금도 일부 말에 남아서 쓰이고 있는데, ‘양달응달이 그 예다. 그러므로 떼다리는 본래 말이 되달떼달이다. ‘떼달에 어미(語尾) ‘-가 붙어 떼달+떼달이떼다리가 된 것이다.

은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또는 로 적기도 했는데, 경주의 월성(月城)과 대구의 달성(達城)이 그 예다.

떼다리는 한자로 옮겨 적을 때 당나라를 뜻하는 ()’으로 옮기고, 이미 다리로 변한 ()’로 기록하여 당교(唐橋)’가 되었다.

그러므로 유적지 당교다리와는 구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즉 유적지 당교에 놓인 다리를 당교라고 할 수는 있지만 유적지 당교를 다리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유적지 당교는 조선 시기까지도 모두 상주지역에 속해 있었지만, 191441일 행정구역을 폐합하면서 당교리(唐橋里) · 쌍화리(雙花里) · 두산리(頭山里) · 용지리(龍池里) · 영순면의 달산리(達山里) 일부 · 호서남면의 모전리(茅田里) 일부를 병합하여 상주군 함창면 윤직리에 편입했다.

그 후 다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원윤직리 · 떼다리 · 쌍화리 · 두산리는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에 두고, 윤직리 일부와 용지리 · 모전리의 다방터를 문경시에 편입했다.

그러므로 당시 당나라 군대가 머물던 땅 대부분은 지금도 상주시 경내에 있다고 하지만, 그 일부는 지금의 문경시 지역에 편입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