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상주읍성 관련 새로운 자료 소개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박물관 학예담당
김 진 형
Ⅰ. 머리말
최근 들어 상주지역에서는 상주읍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3년 사이에 실시된 왕산 주변 읍성 발굴조사와 재작년에 상주박물관에 입수된 일제강점기 읍성관련 사진 엽서 7장은 이러한 관심을 증가시키는데 한 몫을 한 것 같다. 이를 대변하듯 상주읍성 관련 글들이 이전에 비해 늘어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분명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는 상주읍성의 올바른 복원 및 가치 조명에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 판단된다.
이와 함께 금년 초 상주박물관의 유물 구입과정에서 또 다른 한 장의 엽서 사진이 입수되었다. 2015년도에 입수된 사진에는 왕산에서 시내를 바라본 사진이 없어 관아를 포함한 상산관, 진남루 등의 상세한 모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금년에 입수된 사진은 우리가 기다리던 왕산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찍은 사진이다. 뒤에서 소개하겠지만 진남루, 균부소 등 지금까지 그 모습을 알 수 없었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글에서는 금년에 추가로 상주박물관에 입수된 사진 1장을 소개하겠다. 이를 통해 상주읍성 내 여러 관아시설들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련 자료에 나오는 상주읍성 남문 수리 요청 공문과 도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추후 남문 복원에 상당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Ⅱ. 2016년 추가 입수된 사진엽서 소개
여기에서 소개할 1장의 사진은 2016년 상주박물관 유물구입사업 시에 입수한 것이다. 매도자는 서울에서 골동품 상(商)을 운영하는 분으로 매도자가 밝힌 입수 경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 소장한『경북 관아 군별 사진엽서 모음집』이라는 파일북에서 자신의 소장유물과 교환한 것이라 전한다. 입수된 사진은 2015년 입수한 7장의 우편엽서와 마찬가지로 우편엽서의 표지에 장식된 것으로 상주읍성 내 왕산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며 찍은 것이다.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엽서로서 사용되지는 않았다. 크기는 가로 14.1cm, 세로 9.1cm이다. 전면의 각 사진 아래부분에는 사진제목이 표시되어 있다. “朝鮮慶尙北道尙州公園 全市街ノ望”라 우측 하단부에 표기하였고, 그 옆에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사진의 후면은 상단중앙에 “POST CARD.”와 우편에는 우표를 붙이는 곳이 표시되어 있다. 우측 중앙에는 “郵便はかき” 즉 우편 엽서라고 표기하였다.
< 사진 1. 사진 제목과 발행처 상세 및 엽서 사진 후면 >
사진의 제목 표기와 후면의 표기형태는 2015년에 입수한 7장의 사진과는 확연이 구별된다. 우선 2015년의 사진에는 발행처가 하단부에 가로로 “상주육군어용달강진상점발행(尙州陸軍御用達江津商店發行)”이라 적혀 있는데 반해 이번에 소개하는 사진에는 발행처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아울러 제목의 표기에 있어서도 2015년 사진에는 7장의 사진 모두 사진 좌측에 같은 글자체로 전각 또는 고무인 형태의 것에 글자를 새겨 청색 계통의 잉크로 찍은 것이라 보이는 것도 다르다. 사진 후면 역시 표기 형태가 다른데 이는 당시 발행처의 차이로 보여 진다.
이하에서는 사진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 2. 2016년 상주박물관에서 입수한 시가지 전경 사진엽서>
이 사진의 촬영장소는 고도의 차이가 확인되는 것 그리고 건물들 가운데 상산관의 위치로 볼 때, 왕산 정상부는 분명한 것 같다. 앙상한 나무와 왕산 앞 광장의 군인들의 옷차림을 볼 때, 촬영은 늦가을에서 겨울에 이루어 진 것으로 생각된다. 저 멀리 남동쪽으로 초가가 보이고 초가와 기와 건물의 경계가 확연하다.
< 사진 3. 1 : 균부소, 2 : 상산관, 3 : 내삼문, 4 : 진남루,
5 : 공고, 6 : 작청, 7 : 청유당, 죽리관, 제금당 8. 내아 >
이 사진에 보이는 건물들은 1827에서 187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고 강주진 소장의 상주읍성도를 통해 추정이 가능하다. 우선 사진의 상단 좌측부분의 3관의 건물은 상산관(商山館)이 분명한 것 같다. 상산관 앞쪽으로 가려진 맞배지붕의 건물은 내삼문(內三門)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외삼문 형식의 루 건물이 있는데 이는 진남루(鎭南樓)로 보여 진다. 2층의 누각 형태의 건물로 팔작지붕을 가지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보여 지지만 확실치 않다. 그리고 상산관 뒤쪽의 건물은 상주읍성도를 통해 볼 때, 세금을 관리하던 균부소(均賦所)의 건물로 보여진다. 균부소는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며, 건물 뒤편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상산관 주관 좌측의 좌관
< 도면 1. 상주읍성 모식도 (강주진 소장 읍성도) >
건물 옆쪽으로 맞배지붕의 긴 건물이 보이는데 이는 상주읍성도를 통해 볼 때, 서재 등 창고의
용도인 공고(工庫) 건물인 것으로 보여 진다. 공고 주변으로도 몇몇의 건물들이 확인되지만, 상주읍성도의 배치를 참고해 보면 청심당(淸心堂), 통인청 등의 건물인 것 같다.
사진의 중앙에 팔작지붕의 대형 기와 건물지 역시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지만, 상주읍성도를 통해 본다면, 청유당(聽猶堂), 죽리관(竹裡館), 제금당(製錦堂) 등의 건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와 같은 건물의 위치를 사진에 표시해 보면 <사진 3>과 같다. 그리고 이 사진의 촬영연대는 내부 건물들의 정확한 분석을 통해 가능하겠지만 2015년도에 입수한 사진과 비교해 볼 때,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Ⅲ. 상주읍성 남문 수리요청 공문 및 도면 소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가운데 상주읍성 남문 수리와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가운데〔보존〕철에 해당되는 것은 전국 각 지역의 유물과 유적, 건축물 등의 보존과 관련된 문서철이다. 문화재의 현상 유지나 복원을 위한 보존·보수 공사 문서와 사전 조사, 보존 대상 목록, 법령 및 규칙, 관련 단체 등의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문서는 문화재의 구조, 형태를 변경하거나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지는 보수 기록이다. 보수 대상에는 사찰, 궁궐, 사당, 관청 등 목조건축물이 많고 탑과 같은 석조물과 고분 등도 있다. 또한 담장을 만들거나 보호 시설을 설치하는 등 유적 주변 정비와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보존·보수 공사 관련 문서는 공사 진행 순서에 따라 공사비 청원, 공사 실시, 준공 관련 문서로 구분되는데, 이러한 문서를 살펴봄으로써 당시 보존·보수 공사가 어떠한 과정으로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제작된 도면은 광복 이후 행해진 다양한 문화재 보수 공사를 재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가운데 1917년에서 1921년에 생산된 “다이소(大正) 6년-10년 고적보수공사 시행 건 1”이라는 문서철에는 ‘관유 건물 수리보존 건’ 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상주읍성 남문의 수리요청 공문과 도면 총 4장의 문서이다.
<‘관유건물수리보존에 관한 건’ 문서, 우측부터 문건 1, 문건 2, 문건 3>
위 문서를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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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건 1]
상주서발 제 2401호
대정 9년 9월 7일
상주군수
경상북도지사 앞
관내의 건물 수리 보존에 관한 건
1. 소재지: 상주면 남정리
2. 명칭등: 남문루(일명 홍치구루)
조선식 건물로 면적 이십 이 평 다섯 칸
오른쪽(에 기재한) 루문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전의 건조물인데, 그후 약
[문건 2]
오십여 년 전에 (상주)목사 민치서란 자가 경성 남대문을 본 떠 수리를 가한 이래 상주의 일대 奇蹟으로 보기드문 일로서, 본 도내의 구읍에 현존하는 것은 하나의 本門(대문)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에 상주, 본 도의 고적으로 영구 보존의 필요를 아룁니다. 이에 고적 보존비를 지원해 수리할 수 있도록, 별지에 정비 견적서 및 구체적인 내용을 첨부하여 아뢰옵나이다.
수리 개요
1. 석담을 전부 콘크리트로 대체하여 견고하게 쌓을 것
[문건 3]
2. 기와를 교체할 것
3. 문내측
4. 枚張 4방에 높이를 3척으로 난간을 설치할 것
견적 금액 4천 9백 3십 3원 8십 6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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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과 같이 이 공문서는 대정 9년 9월 7일, 즉 1920년 9월 7일에 작성된 것이다. 상주군수가 경상북도지사 앞으로 관유 건물 수리를 청원하는 공문서로 그 대상은 상주 남정리에 소재하는 남문이다. 여기서 명칭을 살펴보면 남문의 정식명칭은 남문루라 하고 있으며 홍치구루는 별칭 비슷하게 따로 부르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남문루의 면적은 22평이라 하고 5칸이라 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에 입수된 사진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 확실해 보이는데 여기서는 정면, 측면 합해서 5칸이라 표현한 것 같다.
〔문건 2〕의 내용을 보면, 민치서 목사가 50여 년 전에 남문을 수리할 때에는 경성 남대문을 참고하였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 수 있다. 여기서 50여 년 전이라 하면『상주목선생안』에 기재되었다시피 민치서 목사의 재임기간인 1870년~1871년에 이루어진 수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리개요를 보면, 4가지의 수리요청이 확인되는데 1, 2번은 석담과 기와를 교체하겠다는 내용이지만 3, 4번의 정확한 해석은 안되지만 3번은 ‘문 내측 00를 칠할 것’이라 하여 남문 내면을 페인트 등으로 칠할 것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번은 ‘사방에 높이 3척의 난간을 설치할 것’이라 해석되는데 여기서의 난간이 문루 여장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주박물관에서 지난해 입수한 남문 사진에도(1909년) 문루 여장이 일부 훼손되어 있음을 볼 때 문루 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문 정면도, 문건 4>
Ⅳ. 맺음말
지금까지 일제강점기 상주읍성 관련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상주읍성과 관련된 사진엽서가 추가로 박물관으로 입수되어 그동안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읍성 내의 관아 건물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소장 문서 역시 남문의 실제 제원과 모습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였다. 특히 민치서 목사가 남문의 수리가 필요하다 판단하여 경성의 남대문을 사전 벤치마킹 하였다는 내용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러한 자료들이 축적이 된다면 향후 읍성의 복원에 상당한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상주읍성의 모습에 대해서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상주읍성의 모습을 우리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 후기 상주지역 사족의 각종 문집이나 문서를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고, 전국에 분포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자료,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 역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상주읍성에 대한 연구가 한층 더 진일보 발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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