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6호(2016년)

상주학. 상주문화 26호. 『청대일기』에 전하는 상주문화(Ⅰ)

빛마당 2017. 2. 5. 19:48

청대일기에 전하는 상주문화()-상주관련 주요 記事를 중심으로-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1. 머리말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은 조선 숙종 영조 년간에 상주를 대표할 만한 명유현관(名儒顯官)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은 오늘을 잇게하는 중요한 사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70세의 노구에(1749, 영조 25) 완성한 청대본 <商山誌>는 상주 향토 사료로서 귀중한 전고(典故)이고 24세부터 일평생 동안 써온 일기는 또 하나의 생생한 역사사료이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지난 2015년 이 귀중한 <청대일기>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세상에 내 놓으므로, 현대인들이 그 당시의 실상을 쉽게 탐구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무엇보다도 청대가 상주 출신의 선각자이고 지역을 선도하는 명현(名賢)이며 일기의 내용 중에는 상당부분이 상주와 관련된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실이 수록되었기 때문에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필자는 일기 전체를 탐구하면서 상주와 관련한 중요부분을 발췌하여 세간에 알림으로서 누구인가 상주향토사 측면에서 일기에 기록한 사실에 입각하여 더 깊은 연구가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2.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의 가계와 주요 행적

. 가계

청대 권상일의 자는 태중(台仲)이요 청대(淸臺)는 그가 살던 근처에 흐르는 금천(錦川)의 경승지인 농청대(弄靑臺)에서 취한 자호(自號)이다. 관향은 안동이요 1679(숙종 5) 상주 근암촌(近巖村)에서 출생하여 1759(영조35)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청대의 6대조인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5대조 송소(松巢) 권우(權宇)는 퇴계의 문하에서 배워 학행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고조부 금곡(琴谷) 권익인(權益隣)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1616(광해군 8) 34세에 생원이 되었다. 증조부 권구(權坵)는 예천에서 상주 근암리로 이주 정착 하였는데, 1651(효종 2) 41세에 생원이 되었고 조부 권이칭(權以)과 아버지 권심(權深)은 비록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학문이 독실하여 가학(家學)으로 청대와 같은 명현(名賢)을 배출하였다.

이처럼 청대의 가문은 대대 명문으로 영남도학의 정통학맥을 끊이지 않고 이어온, 이른바 안동권씨 근암 문호(門戶)를 크게 열었다고 할 수 있다.

 

. 주요 행적

청대 권상일은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조부로부터 글을 배워 영남학파의 맥을 이었다. 과거에 여러 차례 응시하여 32세에(17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입격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제수받았다.

2년이 지난 34세에 관직 출사의 기쁨을 겨우 맞이하는 때, 한해 동안에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조모까지 세분을 차례로 떠나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삼년상을 치루고 37세에 저작(著作)을 제수받은 후 성균관 전적과 성균관 직강 등을 역임하고 42세부터 예조와 병조좌랑 등 중앙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노론과 소론 집권기에 고단했던 남인 출신 관료로서 어려운 관직생활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학문 연마에 힘써 이황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퇴계집(退溪集) 등 본격적으로 성리학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38세 때는 15년 선배인 식산 이만부(李萬敷, 1664~1732)와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 및 이발기발(理發氣發) 문제를 토론하는 편지를 주고 받은 바 있고, 45세부터는 밀암 이재(李栽, 1657~1730)와 오상원(吳尙遠), 송인명(宋寅明) 등과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여 학문연구에 정열을 쏟았다.

1727(영조 3) 49세에는 처음으로 외직인 만경현령에 임명되어 민생과 교육에 남다른 열성으로 관찰사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이듬해 일어났던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는 고을 수령으로서 신속한 대비와 적절한 진압에 공을 세웠다.

173153세에는 영암군수에 이어 사헌부 장령을 제수받았고, 이듬해에는 도산서원 원장으로 발탁되어 서원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55세에는 다시 외직으로 양산군수를 거쳐 군자감 정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퇴계언행록을 교열 간행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735(영조 11) 57세에 울산부사로 또 다시 외직으로 나아가 고을의 교육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울산 최초의 사찬읍지(私撰邑誌)인 학성지(鶴城誌)를 간행하는데 독려와 감수를 하고 서문을 수록하였다.

1738(영조 14) 60세에 이르러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다음 해에는 영주의 소수서원에 봉향선현을 배알하고 부석사를 유람하였다.

62제에는 고향에 이미 지어 두었던 공담료(供淡寮) 근처인 농청대(弄靑臺)에 아담한 존도서와(存道書窩)를 지어 산수를 즐기면서 학문전념의 처소로 삼았다.

1741(영조 17) 63세에 세자시강원 필선과 사헌부 장령에 수차례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65세에는 도산서원을 방문하였다.

1745(영조 21) 67세에 봉상시정. 68세에 사헌부 헌납. 성균관 사성. 사헌부 집의를 거쳐 69세에 당상관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어 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동부승지를 재임할 때 영조 임금의 물음에 퇴계를 비롯한 영남학의 연원과 동방오현에 대하여 소상히 답하여, 이황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 남인의 정치. 사회적 역할과 공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748(영조 24) 70세에 좌부승지를 치사(致仕)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소학을 강론하였다.

이 무렵 그는 완숙한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당대 대표적 학자들이었던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대산 이상정(李象靖, 1711~1781)과 태극론(太極論)이기론(理氣論) 등 성리학 핵심에 관하여 토론을 하였던 중요한 시기였고 상주읍지인 청대본 상산지(商山誌)를 찬술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1749(영조 25) 71세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이조참의는 조정의 주요 요직인데 노론집권 시기에 정치적으로 남인 인사였던 청대에게 중책을 제수한 것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의 일환으로, 김상로(金尙魯) 등이 영남 인사에게도 이조(吏曹)의 관직을 주어야 한다는 건의에 따른 것이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지는 않았다. 이어서 사간원 대사간홍문관 부제학사헌부 대사헌 등 삼사(三司)의 최고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와같이 청대를 계속하여 중앙의 요직에 제수한 것은 그가 영남의 남인 중에 영향력이 가장 큰 대표적 존재였음을 의식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조재호(趙載好, 1702~1762)는 영남지역의 풍속과 인물을 묻는 영조에게 이르기를,

영남지역의 선비들이 퇴계 이황의 유법(遺法)을 지켜 분수를 편안히 지키면서 곤궁함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서 잘 견디고 있는 가운데 많은 문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어진 명망가로는 단연 권상일이다.”

 

라고, 하였다.

1754(영조 30) 76세에는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2년 뒤 78세 때에는 영조 임금이 친히 의복과 음식물을 보내어 노년의 청대를 위로하기도 하였고, 1758(영조 34) 80세에는 마침내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예를 얻었다.

1759(영조 35)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유림 400여 명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영조는 예조좌랑을 예관으로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불천위(不遷位)로 모실 것을 명하였다.

1772(영조 35) 영조는 문득 권상일이 생각난 듯, 그의 아들과 손자를 찾아서 특별히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임금은 선왕 영조가 남인인 권상일을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한 사실을 두고 간간히 인재등용의 미담사례로 인용하였다고 한다.

1776(정조 원년) 상주 고향의 선비들이 농청대 주변 여기저기에 청대가 살아 생전에 이름을 붙였던 존도와(尊道窩)농청대(弄靑臺)태고암(太古巖)불마애(不磨崖) 등의 글자를 바위에 새겨 추모하였으니 그 글자들은 지금도 남아 있어 그날을 추억하게 한다.

1783(정조 7) 후인들이 향약소(鄕約所)인 죽림정사(竹林精舍)에 청대의 위판을 모셨다가 3년 뒤에 고향 상주의 근암서원(近嵒書院)으로 이안(移安)하였다.

근암서원에는 우암 홍언충(洪彦忠), 한음 이덕형(李德馨), 사담 김홍민(金弘敏), 목재 홍여하(洪汝河) 4현을 배향 하였는데, 이때 청대 권상일과 활재 이구(李榘) 그리고 식산 이만부(李萬敷)를 함께 배향하였다.

이후 정조 년간에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시장(諡狀)으로 희정(僖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청대 권상일의 행적을 요약하면,

청대는, 학문은 가학을 통하여 퇴계를 이었다고 자부하여, 기심성론(理氣心性論)은 퇴계의 초기학설을 고수하였는데, () ()를 완전히 다른 둘로 분리하여 리는 주재적(主宰的)이고 기는 보조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관직에 나간 후에는 영조의 각별한 관심으로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뜻을 두지 않고 한번 나아가면 세 번 물러서는 산림학자의 면모를 본받았다. 따라서 실제로 관직에 재임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평생동안 상당한 기간을 초야에서 독서와 후진을 양성하는 데 일관하였다.

근암서원은 고종년간에 서원 훼철령에 따라 터만 남아 있었는데 1970년대에 본손의 주선으로 복설하였다가 수년 전에 정부예산으로 다시 중창하여 문경시 당국으로 하여금 법고창신의 교육장소로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다.

 

. 당시의 정국(政局)과 청대의 위상

조선 중기 명종 년간에 훈구세력이 물러나고 사림파가 집권한 이후 정계를 주도했던 영남의 정치세력은 1623년 광해군 정권이 무너지고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정계에서 점차 멀어지고 기호지방의 정치세력이 주축이 된 이후 60여 년 동안 중앙정계를 지배 하므로 하여 영남의 인사들은 대부분 재야로 밀려나게 되었다, 더구나 영조 4(1728)에 일어났던 무신난은 집권세력들로 하여금 영남을 반역향으로 낙인하고 이후 영남세력의 중앙정계 진출을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영조시대 재상급 관료로 진출한 인물은 청대 권상일이 거의 유일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그가 영남을 대표하는 정치적 위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청대일기의 체제와 구성

청대는 매일 매일의 일상을 책력 위에 간략히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후손 중에 누구인가가 보록(寶錄), 일기록(日記錄), 청대선생일록(淸臺先生日錄) 등으로 이름하여 정리한 것으로 추정한다.

1989년 여강출판사에서淸臺全集두 권을 영인하여 유가지(有價誌)로 간행함을 계기로 그동안 종적을 감추었던 일기 가운데 15책을 새로 발굴하여 수록하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청대선생일록으로 일괄하여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이후 200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 일기를 활자화하여 한국사료총서로 간행하면서청대일기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일기는 청대가 24세이던 1702년부터 시작하여 1759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58년동안의 기록이다. 청대 연보에는 20세이던 1698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759년 세상을 떠나기 10일 전까지 써서 모두 30여 권에 달한다고 하니, 무려 62년동안 일기를 썼다고 하지만 모두 15책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연보에 의한 처음 4년간의 일기가 전하지 않고 있으며, 중간에도 간간히 누락한 해가 있다. 한 기간 동안 완전히 누락된 해는 1698~1701, 1705. 1714~1718, 1726, 1728, 1730, 1735, 1740~1744년으로 모두 19년 분에 달한다. 따라서 전하고 있는 일기는 43년 분이 남아 있는 셈이다.

 

청대일기15책의 수록기간을 책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임오(1702) 1~ 갑신(1704) 12

2; 병술(1706) 1~ 정해(1707) 12

3; 무자(1708) 1~ 경인(1710) 6

4; 경인(1710) 6~ 계사(1713) 9

5; 기해(1719) 1~ 신축(1721) 9

6; 임인(1722)12~ 을사(1725) 8

7; 정미(1727) 1~ 정미(1727) 8

8; 신해(1731) 8~ 갑인(1734) 9

9; 병진(1736) 1~ 정사(1737) 8

10; 무오(1738) 10~ 기미(1739) 12

11; 을축(1745) 1~ 병인(1746) 12

12; 정묘(1747) 1~ 경오(1750) 12

13; 신미(1751)5~ 갑술(1754) 12

14; 을해(1755) 1~ 무인(1758) 12. 17296월 첨가

15; 기묘(1759) 1~ 기묘(1758) 7

 

 

4.청대일기의 주요기사(主要記事)

이 일기에는 청대가 관료로 초입사(初入仕)하여 예조정랑과 울산부사로 근무할 때의 기록과 지방출신 관료로서 서울에서 재경동향(在京同鄕)들 간에 유대와 교유 등에 관한 것들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일기의 내용중에 주요한 사항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과거와 관련하여 응시하던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사류들이 벼슬길에 들어가기 까지의 사실이 자세하게 기록 되었다.

청대는 15세에 조부가 별세한 이후 혼자 경전과 역사서를 열심히 공부하여 주위의 서원과 향교에서 실시하는 강회(講會)에 자신의 학문에 대한 정도를 가늠하기도 하였고, 서원이나 사찰 등지에서 거접(居接)하면서 공부를 하여 백일장을 비롯하여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던 향시(鄕試)와 회시(會試) 및 전시(殿試) 등에 응시하였던 기록을 구체적으로 담아 놓았다.

아버지와 삼촌과 함께 거의 매번 과거에 응시하면서, 시험을 치르는 고을에서 숙소를 구하느라 고생한 사실이라든지 8차례에 걸친 과거 응시에 향시의 경우는 대체로 10일내지 15일이 소요되었고 한성에서 실시하는 회시는 20일 이상이 소요되었다. 과거에 대한 욕망은 당시 사류들의 강열한 욕망으로 출세의 굴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거시험과 관련하여 가장 극적인 장면은 그의 아버지가 경상우도 시험장소인 의령에 갔다가 상피제(相避制)에 걸려서 응시도 못하고 돌아온 사실인데 그때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본다

 

새벽에 길을 나서서 짙은 안개를 뚫고 걸어서 상산 벼랑길을 넘어 현풍 읍내에서 아침을 먹었다. 한낮에 창령에 이르러 간신히 모산촌에 숙소를 얻었는데, 읍내에서 5리이다. 듣건데 자인현감 외종조부께서 우도의 시관이 되어 가친께서는 상피때문에 틀림없이 시험을 보실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통탄스럽고 고민되는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때 청대는 아버지와 함께 가지않고 경상좌도의 시험장소인 창령으로 갔었는데, 그곳에서 의령쪽의 시관이 자신의 외종조부인 자인현감 이적의(李適意)로 갑자기 바뀌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외종조부에게 급히 보내어 다른 가능한 조치를 취해보고자 하였으나, 편지가 제 시간에 도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청대의 아버지는 그것도 모른체 의령에 도착하고서야 시관이 자신의 처삼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시험장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청대의 관직 생활은 정치적으로 남인 출신이라는 배경과 학문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그리 길지는 않았으나 내외직을 두루 거쳐 당상관에 올랐고 마지막으로 선망하는 기로소에 들었기 때문에 일기의 내용 또한 이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다.

청대는 1710(숙종 36) 10월에 영남의 남인 정치세력으로는 유일하게 승문원에 분관되었다는 자부심으로 처음 출사하였지만 면신례(免新禮)에 대한 염려 때문에 상경이 늦어졌다. 17114월에야 한성에 도착한 후 면신례를 거쳤는데, 밤에 귀신복장을 하고 선배들의 집을 돌면서 자신의 명함을 돌리는 회자(回刺)와 허참(許參)의 과정을 혹독하게 거쳤다.

처음으로 맡은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는 외교문서를 여러 관료의 집에 들러서 회람을 시키는 회공(回公)과 외교문서를 찬술하는 제술(製述)에 관한 직임인데 특히 회공은 하루에도 몇 차례 말을 타고 여러 관원들의 집을 드나들어야 하기 때문에 초임자로서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울산부사 재직 시는 이 지역이 군사적인 요충이었지만 그보다 흥학에 더 힘을 기울여 구강서원(龜江書院) 기숙사를 건립하였고 유생들을 모아 직접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울산의 최초 향지인학성지(鶴城誌)를 간행하였다는 것은 후일에 상주의상산지(商山誌)청대본을 찬술하는데 경험 축적이 되었음을 짐작한다. 일본의 사신을 접대하는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출되어 동래를 오가며 외교활동을 한 사실과 수령으로서 일상을 적어 놓은 대목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병영에 가서 신임 사또를 뵙고 양문루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길로 우후(虞侯)를 만나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구강서원의 새 재사를 잠시 보고 다시 사창에 가서 환곡을 나누어 주었다. 어영청 금위영의 보미를 실어 보내는 일로 남문루에 앉아 있는데, 선창과는 지척의 거리였다. 이 남문루는 이 상국(相國)이 정미년에 지은 것으로 벽에는 율시와 도사 김응경의 서문이 걸려있다. 이사익이 돌아갔는데 농번기여서 너무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어서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진사 박망구가 들렸는데 언양의 김모의 회방연(回榜宴)을 보러 가는 길이다. 감영의 장교가 목수 20여 명을 거느리고 바람에 쓰러진 봉산의 나무를 베고 와서 산 아래에 머물러 있다. 수영의 장교도 왔다. 앞들 대부분 모내기를 하여 기쁘다.

 

지방의 수령으로서 일과와 사족들과의 교유사실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심경이 담겨있다.

 

청대가 평소에 생활하던 내용으로 혼례에 대하여 가격(家格)에 의하여 폐쇄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보여 주었는데 아들 욱() 배필로 하회의 류성화(柳聖和)의 딸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두 집안간에 혼인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풍산에서 심부름꾼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중략---이씨 어른의 편지를 받아보니 하회 류성화가 일전에 와서 통혼을 청한 일을 나에게 설명하고 확실하게 정하여 내년 봄에 지내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 혼사는 피차간에 이미 마음을 둔지 오래나 아이가 아직 장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 온 것이다. 이번 겨울에는 국상으로 거행할 수 없으나 내년 봄이면 열여섯 살이 되는데다 위로 노친이 계시고, 또 예에 열여섯이면 혼인할 수 있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정하고자 허락할 뜻을 보였다.

 

여기에서 양가 간에는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여 어릴때부터 혼의(婚意)가 있었지만 조심스럽게 기다려 주었다는 것이고, 남자가 16세 정도가 되면 장가를 가는 적령기에 들어 선다는 것과 국상 기간에는 백성들이 혼례를 치루지 못한다는 규례가 있었다는 것들을 복합적으로 알게 한다.

 

일기의 내용에는 편지 왕래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오는데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그 당시에 전염병에 무탈한 지 안부와 상사(喪事)에 대한 위문 그리고 청대 자신이 원장의 소임을 맡은 서원의 운영 전반에 관한 내용 또는 관가에 대한 관련 내용을 수록하였다. 그중에 초처 부인 김씨와 생전에 주고 받은 편지를 수습하여 한 축으로 만들어 놓고 늘 펼쳐 보면서 기록한 것을 여기에 옮겨 본다.

 

죽은 아내의 편지를 수습하여 한 축을 만들어서 때때로 생각날 때 펼쳐 보는데, 마치 마주 대하는 듯하여 비통한 가운데도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 뒤로 어찌 다시 이와같은 편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 생각 할수록 목이 매인다. 장인과 장모의 편지도 수습하여 아내의 편지 위에 함께 첨부하였다.

 

위 일기를 보면 청대의 선비로서의 자상한 면모를 엿 볼수 있으며 내외간에 애틋한 정이 그대로 배어 있음을 알게 한다.

편지를 왕래한 지인들로는 백화재 황익재(黃翼再, 1682~1747)와 성호 이익(李瀷, 1681~1763)과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아 편지로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인간적인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의 보편적 사례라고 하겠다.

 

일기의 내용중에는 시장(市場)의 발달로 화폐가 통용된 사실과 한 지식인의 시장에 대한 경제관념을 엿볼 수 있다. 청대가 주로 이용한 시장은 거주하던 산양면(山陽面) 소재지 시장인데 물가동향과 시절의 풍흉에 따른 물동량의 실태 등의 일부 기록을 여기에 소개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시세가 꾀나 헐해 졌다고 한다. 엽전 백문에 쌀은 두 말 닷되, 콩은 너 말, 겉곡은 닷 말 남짓이라고 한다. 이는 비가 순조롭게 내린 덕분이다. 금년의 흉작은 병인보다 더 심하지만 을해년(1695)과 병자년(1696)은 물가가 한 꾸러미의 엽전에 쌀 한 말이 채 되지 않았으나 올해는 그렇지 않다. 이는 관곡을 도처에서 많이 판매한 까닭으로 사곡(私穀)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이 밖에 친지 또는 관가로부터 선물을 받아 고마운 뜻을 편지로 답한 글이 여러 번 나오는데, 특별히 상주목사로부터 수차례 선물을 받은 것은 조정의 고위직 원임(原任)에 대한 관례적인 관행이엇던 것으로 보인다.

 

5. 상주 관련청대일기탐사(探査)

청대일기1권은 1702(숙종 28) 11일부터 시작되어 1759(영조 35) 114일까지이다. 다만, 지면 상 2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따라서 이 번호는 총 57년 간 중에서 1702(숙종 26)부터 1739(영조 15)까지 임을 밝혀 둔다. 일기의 기록 순서에 따라서 상주와 관련한 중요내용을 발췌하기로 한다.

1702(숙종 26)

 

14; 알묘때문에 서원 재사에 갔다. 모인 인원이 20여명 남짓되었다. 들으니 우리 고을 목사가 장령에 제수되었고, 그의 아들 태좌(台佐) 귀양지에서 석방되어 돌아왔다고 한다.

 

226; 근암서원에서 홍 목재를 배향하기 위하여 통문을 내어 옥성서원에 모여 논의하고 또한 김 사담(金沙潭)을 함께 배향하기 위해 하정일(下丁日)로 날을 정해 성대한 예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한다. 들으니 알성(謁聖)325일로 정했다고 한다.

 

426; 봉안제를 지냈다.

 

1703(숙종 27)

 

18; 진사 방목을 들으니 함창진사 권집(權緝)이 일등이라고 한다.

 

101; 여러 친구가 잡아 끌어서 도남서원에 갔다.(이때 청대의 나이는 24세였다.)

1704(숙종 30)

221; 송시열은 일찍이 사신이 북경에 갔을 때 신종 황제가 쓴 글을 구하여 돌아왔는데 그것을 화양동의 바위에다 새겼다. 그의 제자들이 비로소 지금 집을 지어서 글을 새긴 돌을 덮고 지난 달 하정일에 지방을 써서 신종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음악은 천자의 예악으로 행했으며, 모인 인원이 2백여 명이라고 한다. 화양동은 곧 송시열의 별장이다. 이 일은 모두 권상하가 한 것으로 곳곳에서 여론이 분분하다고 한다.

 

37; 우리 고을이 이 월간(李月澗), 전 사서(全沙西), 강 남계(康南溪) 등의 사당을 건립하는 일로 이달 3일 몇몇사람이 옥성서원에 모여 각 항목별로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곳곳마다 의론이 대립되어 끝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1706(숙종 32)

 

1027; 생원 조동욱이 근래 고을에 한 번 풍파가 있었다. 도남서원의 수임과 재임이 모두 논박을 받았는데, 서원이 텅 빈 지 벌써 달포나 되었다. 며칠 전에 향교와 서원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재임을 선출하고 원장은 여러 원임 어른께 추천을 받도록 했는데, 조동욱은 재임으로서 부훤당(負暄堂) 어른에게 추천을 받기 위해 온 것이다.

 

1707(숙종 33)

 

116; 들으니 세자시강원 진선 정시한(丁時翰)이 이달 초에 작고했다고 한다. 이 노인의 학문은 우르러볼 점이 많고, 그의 깨끗하고 시속을 초탈한 지조와 은둔하며 약매(若浼)한 행적은 지금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1708(숙종 34)

 

1019; 고을에서 충열사(忠烈祠)를 지어 판관 권길(權吉)과 통제사 정기룡(鄭起龍)을 제향하기로 하고 막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권공의 정충대절로 정기룡과 나란히 제향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사리를 모르는 자들이 정기룡에게 비중을 두어 그를 윗자리에 봉안하려고 하고 상주목사의 논의도 그러하니 진실로 아주 통탄할 일이다.

 

1215; 들으니 화령에 봉산서원에서 소재선생을 봉안하고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와 판곡(板谷) 성윤해(成允諧)를 배향하기 위하여 오늘 성대한 의례를 거행한다고 한다.

 

1709(숙종 35)

 

124; 보리를 갈기 시작했으나 오랜 가뭄 끝이라 밭을 갈 수 없다.

들으니 공검지에 용경(龍耕)이 없다고 하니 괴이쩍은 일이다. 옛날부터 섣달 그믐날 밤에 용경이 없었던 해가 없어서 풍년과 흉년을 겹쳤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너무나 모를 일이다.

 

316; 서원 재사에 가서 가친을 뵈었다. 오늘이 재계(齋戒)를 마치는 날인데 모인 인원이 20여 원 남짓이었다. 신 별검(申別檢)과 홍 주부(洪主簿) 어른도 왔다. 찰방 김종무(金宗武)를 충열사에 함께 배향하는 일로 선산 통문이 당도하였다. 우리 주의 매악(梅岳)과 도악(道岳)에서도 통문을 띄웠다고 한다. 김종무는 선산 사람으로 임진난 때 사근찰방으로서 상주에서 이일(李鎰) -원문이 빠짐- 혼전 중에 죽었다.

 

43; 문경에 산성의 내성을 쌓기 시작하여 와 있던 도의 승군(僧軍)을 징발해서 거의 일은 마쳤지만 또한 성터에 큰 나무가 많았는데 벌목을 하려해도 바위 위에 있어서 어려웠으나 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모두 저절로 쓰러졌다. 이상하다. 새재의 축성은 임진년 이후부터 조정의 의논이 여러 차례 나왔으나 실행하지 못했는데 지금에야 쌓기 시작하였으니, 이 또한 때를 기다림이 있는 것인가. 이인엽이 이 논의를 주장 하였다고 한다.

 

625; 들으니 관찰사가 문경을 다른 고을과 합쳐서 군()을 만드는 일로 장계를 올렸다고 한다. 상주의 산양, 영순 등 두 면과 예천의 소야면(所野面) 등을 떼어서 소속시킨다고 한다.

 

1121; 영빈서당 모임 장소로 가서 여러 어른들을 뵈었다. 이번 여름에 성주(星州) 사람들이 창석(蒼石) 선생을 도남서원에 배향하자는 뜻으로 우리 고을에 통문을 보내 왔는데, 답통을 하고자 하다가 그 일을 어렵게 여겨 이달 초에 향교와 서원에서 고을 장노들에게 조목을 여쭈었고, 이 때문에 우리 면의 여러 어른들이 서당 제사에 모인 것이다.

 

1710(숙종 36)

 

110; 근래 활재(活齋)간사잉어(看史剩語)를 보니, 선유(先儒)가 미쳐 깨우치지 못한 의론이 딱 들어맞아 통쾌하다. 간신적자를 서술한 곳에 이르러서는 더욱 엄격하여 부월(斧鉞)의 의리에서 연마하고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에서 힘을 얻은 것이 말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없다. 책 속에는 시대를 아파하고 회포를 부친곳이 매우 많았으니, 이는 공이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 노중련(魯仲連)처럼 바다에 빠지려는 뜻이 있어서 과거공부를 그만 두고 은둔하여서 이다. 그의 기상과 절개가 늠연하여 더욱 감탄할 만하다.

 

113; 일찍이 퇴도(退陶)별집(別集)을 보니 시권(詩卷)에 이소(二疏)라는 글자가 있어 소()자로 써 놓았기에 잘못된 결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연명집을 보니 영이소(詠 二疏) 라는 시가 있어 모두 소()자로 썼다. 비로소 선현의 문자를 이처럼 가벼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기록하여 뒷날의 경계로 삼는다.

 

114; 읍내 남문 밖에 돌다리 두께가 거의 한 자 남짓한데 지난 겨울에 갑자기 저절로 울어서 그 소리가 몇 리까지나 들리다가 어느날 밤에 중간이 부러졌다고 한다. 괴이쩍다 이 무슨 재변의 조짐인가.

 

74; 청간정(聽澗亭)에서 조달경(趙達經) 내외와 조씨 어른 형제 자질들을 만나보고 사우당(四友堂)에서 잤다.

 

76; 상주(喪主) 정주원(鄭胄源)을 조문하고 경주 영공을 뵈었다. 아침 밥을 먹은 뒤에 옥성서원에 가서 사당에 참배하였다. 재임 김00이 와서 맞이하였다. 유천(酉川)의 친구 이증춘(李增春) 집에서 잤다. 원장 이태지(李泰至)와 석지(碩至) 두 어른을 뵈었다. 회백은 합천에 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강사언(姜士言)이 그의 형 찬()과 아우 신()과 함께 읍내에서 잤는데, 나를 찾아 이곳에 왔기에 이야기를 나누고 작별하였다. 그들은 선영에 영전(榮奠)하는 일로 거창으로 가는데, 고령현감 김수담(金壽聃) 집에서 자고 갈 모양이다.

 

77; 종일 비가 내렸다. 이 마을 여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월간 창석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를 구경하였다.

 

79; 돌아오는 길에 이시지(李時至) 어른을 뵙고 연악서당에 당도하니 강수해(康守楷) 어른이 마침 그곳에 있었다. 이 서당은 처음 보는데 퍽 그윽하고 외져서 경치가 좋았다. 고한훤 어른을 만나 뵙고 날이 저물어 도곡서당에서 머물러 잤다. 요즈음 소나기가 오지 않는 날이 없다.

 

710; 강물이 불어나서 배를 타고 도남서원에 당도하니 원장 참봉 류경하(柳經河) 척숙이 와 있었고 재임 조세적(趙世迪)과 김경연(金景淵)이 모두 왔다.

 

1711(숙종 37)

 

120; 중동에서 말을 사왔다. 돈 스물 한 꾸러미를 주었다.

327; 충열사(忠烈祠) 봉안이 내일이어서 일전에 외남 등 여러 곳에서 통문이 왔다. 판관 권길(權吉)을 통제사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같은 사당에 제향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일 때문이다. 이 논의는 매우 정당하나 당초에 사당 건립은 오로지 정공을 위해서였는데 지역에서는 권공을 높이고자 하여 함께 제향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는 상주 고을의 절반이 모두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에 이르러 정공을 제쳐 두기는 매우 난처한 일이고, 또 정공도 나라에 충성한 공로가 있고 우리 상주에도 큰 공덕이 있으므로 한 읍에서 존숭하고 보답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하여 여러 의논이 완전히 정해졌으며 밀고 당길 일이 없다고 한다.

 

41; 가친께서 읍에서 돌아오셨다. 그저께 충열사에 봉안제를 거행하였는데 위판 순서는 권 판관이 윗자리이고 정 통제사가 다음이었다. 회원은 문무 세 곳을 통털어 이름을 올린 자는 참여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 일정한 규식을 삼았다. 담장 밖에 또 한 칸의 작은 사당을 건립하여 박걸(朴傑)을 제향하기로 하고 읍의 아전으로 하여금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고 한다. 박걸은 상주의 호장으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권공과 처음부터 끝까지 생사를 같이하였다. 그의 의롭고 장열함은 찬란히 빛나서 창석옹이 쓴 권공의 비문에 그 사실을 아주 상세히 말하였다.

 

822; 오현(五賢)의 필적을 도남서원에 새기고 또 포은의 필적을 구하여 아울러 새겼다. 지금 막내 작은아버지가 서원 임원이다.

 

111; 주자의 편지를 읽어보니 지금 이미 부득이하게 벼슬길에 나섰지만 오직 제주와 덕망을 감추고 말없이 조용히 있으면서 너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야 이 세상에서 화를 면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다 한번 불행하게 남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이는 곧 좋은 소식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매우 의미가 있고 우리들의 병통에 꼭 맞는 약이다.

지금 당론이 날로 심하여지고 한 종류의 인간들이 조정에 꽉 차 있어서 우리 영남이 더욱 미움과 질시를 받는다. 올 여름에 서울에 들어갔을 때, 맡은 일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제조들의 집을 두루 다녔는데 모두 흘겨보며 서로 바라볼 뿐 한 번이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는 자가 없었으니 통탄해 한들 또한 어찌하겠는가. 군자가 처신을 함에 있어 결코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굽혀 가며 스스로 저들의 모욕을 달갑게 받아 들일 수는 없으나, 다만 위로는 연로한 어버이를 봉양하는 사람으로서 관례대로 승진하기 마련인 참하(參下)의 직위라고 하여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는 것은 아주 의리가 없는 것 같고, 또한 드세고 과격하여 명성을 좋아하는 사람에 가까운 것 같아서 끝내 동강(東崗)의 비탈에 편안하게 누울 수 없을 것이니 아주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 당연히 도회정묵(韜晦靜黙)” 네 글자를 부신(符信)으로 삼아 띠에 적는 것을 대신해야 할 것이다. 또 조치도(趙致道)가 정자(程子)가 말한,

 

벼슬살이는 사람의 뜻을 빼앗는다.’ 는 설은 옳습니다. 만약 이것을 구제하려 한다면 당연히 일을 쫓아 성찰하고 그 경중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기미가 드러나는 사이에도 아주 광체가 나게 해야 합니다.

라는 말이 있으니 이 말도 마땅히 가슴에 새겨야 하나 단지 나에게 있어서 실제로 마음 속으로 얻는 균형이 없어서 중심이 일정하지 않다면 그 경중도 어찌 정밀하고 자세하게 살필 수 있겠는가.

! 나같은 만학도야 말로 힘써 노력하고 격려하고 분발하여 남이 백번에 해 내면 나는 천만 번이라도 해내는 공부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알고도 여전히 그럭저럭 흐느적거리며 놀면서 세월만 보내니 두렵지 아니한가.

 

1712(숙종 38)

16; 좌랑 황미숙(黃美叔)의 답장 편지를 받았다. 북경에서 지난 겨울 공물 표범 가죽 140장과 천은(天銀) 1천 양을 차감해 주었다고 한다. 아주 괴이쩍다. 표범가죽 한 장은 쌀 40섬이라고 하니 차감 해 준 것이 또한 많다. 조정에서 장차 사은사를 보낼 예정인데 정사로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를 임명하였다.

 

17; 날씨가 지난 겨울보다 더 춥다. 이경옥이 찾아와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들으니 황익재 재수가 지금 무안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치적이 제일이라고 하니 좋은 일이다.

 

229; 통신사가 어제 우리 읍을 지나면서 일본 문물이 아주 잘 갖추어 졌다고 전하면서 너희 나라가 퇴계를 정주와 다름없이 여기며 칭송하기를 입이 마를 지경이구나.” 라고 했다 하고, 또한 문명의 운명은 지금 우리나라에 달려있다.” 라고 과시 했다고 한다. 듣고나니 아주 가소롭다. 그러나 저들은 멀리 떨어져서 풍속이 다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을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평소에 예의의 나라라고 칭하면서 부끄럽지 아니한가. 도학이 밝지 못하고 인심이 나쁘게 빠져들어 위로는 조상에서부터 아래로는 민간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자기 무리를 심고 사욕을 쫓아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사람이라도 대중지정(大中至正)한 학문에 종사하여 세상의 도리를 붙드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을 생각할 때면 항상 나도 모르게 거의 눈물이 흘러내려 그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는 일본에도 성리학을 조금 아는 자가 있어서 이니 하야시라잔(林道春)이 조 용주(趙龍洲)에게 답장한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통신사의 부박하고 천박하며 탐욕스럽고 비루한 행위는 저들에게 비웃음을 많이 살 것이다. 저들이 군명(君名)을 욕보이고 우리나라를 경시한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올때에 다른 나라의 진귀한 물건을 많이 싣고 왔다고 하니, 더욱 통탄 할 일이다.

 

1713(숙종 39)

 

915; 이문언의 안부 편지를 받아보고 바로 답장을 하였다.

도남서원의 상소가 이미 모양새를 갖추어서 이달 18일에 소수(疎首)를 선출하기 위하여 의망(擬望) 단자에 권점할 것이라고 한다.

 

920; 치화가 고강(考講)을 치루고 도남서원 소회에 갔다가 돌아왔다. 어제 소수로 진사 장지걸(張之杰)을 선출하였고 모인 인원이 80인 남짓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회에서 한 조치가 사람들의 뜻을 영 모으지 못하였다고 하니 개탄스럽다.

 

1719(숙종 45)

 

220; 종을 공검지에 보내어 못의 물고기를 사 와서 피접장소를 들여 보내도록 하였다. 가친의 병세가 갈수록 좋아진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스럽다. 함창 종숙모가 어제 돌아가셨다고 한다. 매우 애통하다.

 

318; 상주 과옥(科獄)에 대한 정문(呈文)을 예조판서에게 올렸드니, 제사(題辭)지난해에 본조(예조)에서 계사를 올렸고 특명이 그대로 존재하는데 지금 어찌 감히 다시 번거롭게 달리 하겠는가. 더구나 조정에서 벌을 시행한 뒤에 유생들이 와서 벌을 해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사리에 합당하지 않으니, 당장 속히 물러가 처분을 공손히 기다릴 것이다.” 라고 하니 통탄스럽다. 이번에 마땅히 벌이 해제되기를 바랐으나 이와 같이 제사를 매겨 물리치니 어찌겠는가. 바로 향교의 임원에게 편지를 써서 경주인(京主人)을 불러 서둘러 상주 읍내로 부쳤다. 또 이 일로 예조 서리에게 배자를 작성해 주고 또 고향집에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1720(숙종 46)

 

719; 아침 식전에 수직한 곳에서 의정부로 가서 성문원의 포폄(褒貶)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승문원의 표폄이 긴요한 일은 아니나 조정의 논의가 주서(主書) 강박(姜樸)이 윗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차마 아무 까닭없이 관직을 삭탈하지 못하여 이 참에 하등을 매겨서 그 다음 지위의 관원으로 하여금 분관(分官)을 하게 하고자 함이다.

1721(경종 1)

   

218; 막내 작은아버지가 돌아왔다. 들으니 우리 상주는 조천경(趙天經)과 고계서(高啓瑞)가 입격하였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가상하다.

 

518; 도남서원에서 사람이 와 재수(再叟)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6월 초하루 분향에 마땅히 도원(道源) 데리고 올 터이니 나와 함께 만나 몇일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그길로 읍내에 가서 8일의 곡반(哭班)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답장을 써 보냈다.

 

61; 황 재수의 편지 두 통이 어제 차례대로 와 있었다. 어제 도남서원에 와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또 식산 이장(李丈)이 금릉에서 돌아와 읍내의 임시 거처에 있는데 이달 3.4일쯤 돌아 갈 것이라며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가겠다고 하고 싶으나 배탈이 나서 몸져 누워 못가서 안타깝다.

611; 도남서원 원장의 편지와 향중의 단자(單子)를 받아 보았다. 재임 류후빈이 서원 앞 뒷산의 금령을 범하게 한 일로 산지기를 매질하였는데 회곡(檜谷)의 김0(0)가 서원에 와서 그 때의 사령(使令)을 매질하였다. 이 때문에 시끄러운 사단이 생겨서이다.

 

71; 도남서원 원장에 천망(薦望)되었다는 천망지(薦望紙)가 왔다. 부망(副望)과 말망(末望)은 이천여(李天如). 황도원(黃道源)이다.

 

76; 사임 단자를 써서 도남서원에 보냈다.

 

715; 거접(居接) 유생이 지은 글 30여 장을 보내와서 채점하였는데 장원은 채식(蔡湜)이었다. 도남서원에 제출하였던 사임 단자에 원임(原任)의 발문을 받아 왔는데, 체임이 허락되지 않아 두 번째 사임 단자를 써 보냈다.

 

719; 도남서원에 보냈던 사임 단자가 돌아왔는데 또 체임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취임해야 할 것 같아서 26일에 서원으로 갈 계획이라고 색리(色吏)의 고목(告目)에 제사(題辭)를 써 보냈다.

 

726; 아침밥을 먹기 전에 시()와 부()의 문제를 내었다. 유생들이 와서 모였는데 다른 고을과 본 고을을 통털어 일백 인이었다. 도남서원의 재지기(齋直)과 구종(驅從)들이 근암에서 뒤따라 왔다. 밥을 먹은 뒤에 도남서원으로 떠났다. 모인 사람들이 억지로 붙잡았으나 중요한 지위에 처음으로 나아가는 자리여서 임의로 뒤로 물려 정할 수도 없거니와, 나의 본뜻도 그냥 들려서 자며 모임에 온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떠나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 떠나겠다고 청하여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죽파 이씨 아저씨 집에서 말 먹이를 먹이고 고모와 두 사촌 내외를 뵈었다. 오후에 길을 떠났다. 지나는 곳이 모두 강가여서 갯밭이 물에 잠겨 토사가 뒤덮혔는데 보기에 매우 참담하였다. 가는 길에 응동(鷹洞) 김경렴 어른을 뵙고 회진을 거쳐 배를 타고 서원에 당도하였다. 재임과 근처의 5·6인이 모여 있었다. 들으니 재수(再叟)가 정언(正言) 조지빈(趙趾彬)과 사소한 일로 서로 따지다가 장령에서 체직되어 일전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727; 재임이 모두 갈리어 곧바로 통문을 써서 조상경(趙尙經)여우(汝友)황서(黃漵)군징(君澄)에게 보냈다. 저문 뒤에 비가 개어 모인 인원들이 다 돌아가고 화숙(和叔) 형 만이 남았다. 중모로 가는 인편이 있어서 재수(再叟) 군징(君徵)에게 편지를 썼다.

 

730; 잠시 상주목사를 뵙고 나왔다. 못의 연꽃을 감상하려고 연당(蓮堂)으로 들어갔는데, 한 두 송이가 비로소 피어나 사랑스러웠다. 지나는 길에 조세후(趙世垕) 어른을 뵈었는데 이번 여름에 양산군수에서 체직되어 이곳으로 와서 멀리 살 계획이라고 하였다. 식산 어른을 뵈었드니, 다음 달 10일 쯤에 금강산 유람을 떠날 것이라고 한다. ----중략---- 도남서원의 물력이 고갈이 특히 심하여 지금 당장은 남은 곡식이 전혀 없는데, 향사가 다음 달이니 몹시 고민스럽다. 빚으로 쓴 돈이 일백 꾸러미에 가까워서 앞으로 조달을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고 한다. 이는 경자년(1720)에 상소문을 작성한 뒤로 연달아 홍수를 만나 묵은 부채가 그대로 밀려 온 때문이다.

 

821; 영귀문(詠歸門) 밖에 석단(石壇)을 증축하고 장남헌(張南軒)의 풍우정(風雩亭)의 뜻을 취하여 풍우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오시가 되기 전에 일을 마치고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들으니 상주목사가 역마를 타고 길을 떠났으며 좌수와 별감은 다 그대로 유임되었다고 한다. 신임 목사로 송인명(宋寅明)이 임명되었는데 일찍이 승지를 지냈다.

 

822; 무너진 여러 곳을 보수하고 영귀문의 편액이 갈라진 곳이 많기 때문에 보수하고 새로 칠을 하였다.

 

826; 서원 안의 모든 편액이 세월이 오래며 빛이 바래져서 거의 다 자획을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분을 칠하고 색깔을 돋우었다. 대개 사당의 편액 道正祠는 만취(晩翠) 오준(吳浚)이 썼다고 한다. 일관당(一貫堂)경재(敬齋)의재(義齋) · 영귀문(詠歸門)은 조시호(曺時虎) 공이 썼다. 조공은 곧 군수 조정융(曺挺融)의 아들로서 필법이 정묘하여 조화를 이루었다 할 만하다. 매호촌에 살았던바 곧 현종 숙종때 사람이다. 일관당의 경우 곧 자신이 써서 새겼는데 일찍이 당()자 위의 소()자가 너무 작다고 하면서 고치려고 하였으나 미쳐 고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사액은 누구의 글씨인지 모른다. 입덕문(入德門)은 퇴계의 글씨를 모사하여 새겨서 걸었다고 한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갑자 년간(1684)에 지어 지금까지 40년이 되도록 아직 편액이 없으니 이는 전배들이 겨를이 없어서 달지 못한 체 그럭저럭 지금까지 온 것이다. 명륜당(明倫堂)도 중간에 불에 타서 류 장령(柳掌令)이 일을 담당한 유사로서 고쳐 지은 것이다. 오후에 술을 담당한 유사 두 사람이 오고 김윤요(金允耀)가 들려서 잤다.

 

91; 축시(丑時) 초에 향사를 거행하여 날이 밝기전에 마쳤는데 예절에 조금도 어긋나거나 잘못된 점이 없었으니 아주 다행이다.

향사를 마친 뒤에 다시 개좌하여 김창건(金昌健)이정옥(李庭沃)에게 벌을 주었다. 김군은 지난번 향교 모임에서 술에 취하여 실수를 하였고 이군은 술을 담당한 유사로서 입재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비를 시켜 소지를 올렸기 때문이다. 주부(主簿) 송량(宋亮)의 사당을 세우겠다는 의논에 대하여 지난번 향교모임 때 교장(校長)은 송씨 문중이 그의 선조를 위하여 별묘(別廟)를 짓고 향중의 문자를 얻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 위판의 봉안은 리사(里社)와 같이 ----”라고 하므로 회중이 완강히 물리칠 수가 없어서 각 학궁에 통문을 내어 가·부를 물었었는데 그 뒤에 또 좌도의 통문이 와서 이번 서원 모임에서 이 일을 결론 지으려고 하였으니, 하도 괘씸하여 완강히 버티고 들어주지 않았다.

오후에 회원들이 모두 읍내로 가는데 나의 거취가 아주 곤란하여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모두의 의논이 이 곳에서 다시 통문을 내어 각 서당에 청하였으니 물러앉아 가지 않는 것은 도리상 미안하다고 하고 또한 일리가 있는 듯 하여 저물녘에 들어가 주인의 집에 머물렀다.---하략---

 

101; 도남서원 사람이 와서 태수(泰叟)의 편지를 받았다.

대제(大堤)에서 막 돌아와 신임과 구임이 맡은 일을 인계하는 일로 와 모였다가 사소한 곡절이 있어서 이루지 못한 체 마쳤다고 한다. 또 조 재임(趙齋任)이 우연히 원록(院錄)을 펼쳐보다가 이름자가 없어서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여 돌아갔다고 하니 몹시도 놀랍고 한탄스럽다.----하략---

 

1724(경종 4)

 

123; 비가 내렸다. 상주(喪主) 채명관(蔡命觀)의 집에서 자천대(自天臺) 사적을 청하여 얻었다. 채득기(蔡得沂)공은 난재의 현손으로서 본래 함창 사람인데 자천대의 산수를 좋아하여 이곳으로 옮겨 산 것이다. 병자호란 뒤에 의술로서 조정의 명을 받아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으로 갔는데 이때 효종이 봉림대군으로서 같이 갔다. 언젠가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시에 차운하여 원망과 책망 어찌 하늘과 사람에게 미치리요怨尤何敢及天人라고 하시면서 채공에게 차운하여 올릴 것을 명하여 공이 그 시에 차운하여 짓고 또 서문을 덧붙이니, 오로지 복수와 설욕만을 말하였다. 그 뒤에 여러차례 은총을 받아 창화(唱和)한 시편이 매우 많다. 귀국한 뒤에 공은 자천대에 은거하며 별좌(別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께서 동궁에 있을 적에는 여러차례 궁중의 종을 보내어 편지를 부치고 또 그림을 그려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등극하기 전에 공이 죽었다. 그의 증손자 휴징(休徵)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여덟자를 바위에 새겼다.

 

자천대는 도남서원 북쪽 오리 쯤에 자리하고 있는데 강이 맞닿아 바위가 층층이 쌓여 대를 이루고 바위사이에는 벼랑길이 있으나 험하여서 오르기 어렵다.

대에 내려오면 세면함(洗面函)과 바둑판이 있는데 모두 바위를 깍아 만든 것이다. 또 그 아래 흙을 제거하고 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평탄하여 앉을 만하며 좌우에는 노송, 매화, 대나무가 뒤섞여 서있다. 그 옆에는 초가집 두어칸이 있고 그 남쪽으로 수백 보쯤 되는 곳에는 작은 바위 봉우리가 있으며 봉우리 아래에는 귀암(龜巖)이 수면에 웅크리고 있다. 또 그 남쪽으로 백보쯤 되는 곳에는 용암(龍巖)이 있고 용암 아래에는 용혈이 있는데 가뭄이 드는 해에는 그 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밤에 용암 아래로 배를 옮겨 잤다. 자천대의 북쪽 몇 걸음 위에는 절벽이 있어 높이와 넓이가 거의 수천 척에 달하는데 병암(屛巖)이라 부른다. 또 그 북쪽에는 옥주봉이 있고 또 기암괴석이 있어 반은 강물에 잠겨 있다. 그 동쪽에 수백 보를 가서 강 건너에 개구암(開口巖)이 있는데 바위 위에는 김 부제학(金 副提學)의 정자터가 있다.

 

1725(영조 1)

 

217; 상주목사의 답장을 받았다. 식산 어른이 20일 쯤 합천에 가려고 하신다. 이는박천집(博泉集)을 경성(鏡城)에서 간행하여 와서 안동 광흥사에 맡겨 두었으나 오래 전하도록 널리 배포하는 데는 해인사만 못하기 때문에 지금 막 해인사로 옮기어 이 참에 수십 질을 더 간행하여 각 학궁과 친구들의 집에 나누어 보내려고 하므로 친히 이일을 살펴 보시려는 것이다. 근암서원 향사 이전에는 미쳐 돌아올 수 없을 듯하여 두 번째 사임 단자를 올려 체임되었다. 이곳 사림들이 매우 실망하였다.

 

들으니 그저께 저들 무리 10여 인이 갑자기 향교로 들이닥쳐 저들 스스로 임성숙(任成淑)을 상제(上齋)로 성 모김모를 장의(掌議)로 성모0000를 재임(齋任)으로 세우고 일찍이 미워하던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벌을 주어 고모조모김모여모홍모는 영원히 내치고 고모이모는 삭적(削籍)하였으며 김모· 000는 손도(損徒)하였다고 한다. ---중략--- 지난 날 재회(齋會) 때 저 쪽 사람들이 00서원(00書院)에 모여서 향교에 통문을 내어 이 일을 물었는데 이미 모두 감해(減解) 되었다.”라고 답하였다. 이로 인하여 분분하였는데 뜻밖에도 이런, 전에 없던 패악한 일이 일어났으니 한탄스럽지만 또한 어찌하겠는가.

 

226; 졸수재(拙修齋)의 터를 농청대(弄靑臺) 서쪽 기슭 너럭바위 위에다 닦고 별도로 몇 줄의 글을 지어서 술과 포를 갖추어 토지신에게 고유하였다. 산양 등 다섯 면이 상주목사 송인명의 송덕비를 세우는 일을 달포전에 시작하여 오늘 삼거리 큰길 가에 세웠는데 면내의 상하 인원이 다 모였다.

사람과 말을 보내어 나에게 참석할 것을 청하여 농청대에서 잠시 갔었는데, 바람이 심하여 간신히 돌아왔다.

39; 새벽에 향례를 거행하였는데 무사히 잘 지내서 아주 다행이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흥암서원의 통문이 왔는데 조 목사(趙牧師)를 심원록(尋院錄)에서 삭제한 일 때문이다. 이 일은 대개 김시후 한 사람이 우연히 서원에 가서 이름자를 먹으로 지워버리고 또 그 옆에다 주를 붙여 놓았기 때문인데 망령되고 패악함이 너무 심하다. 그냥 놓아 두어서 훗날 윗사람을 범하고 임금을 잊어버리는 길을 열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향중의 의논을 거쳐 오래 전부터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이럭저럭 끌면서 끝을 보지 못하였다. 저쪽에서 이미 글을 내어 말이 괴격(乖隔)하니, 하지않는 것도 공평한 도리가 아니므로 자리한 사람들의 주된 의견이 시행을 하고 통문에 답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이론은 자못 불쾌하게 여겼으니 이는 당습(黨習)의 소치인 바 한탄스럽다. 또 향교에 통문을 써 보냈다. 저문 뒤에 회원들이 흩어져 돌아가고 나도 집을 떠난지 이미 여러날이 되어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조신지(趙愼之)윤이시(尹以時) 아저씨가 당도하여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잤다.

 

315; 내가 도남서원에 보낸 사임 단자가 돌아왔는데 홍영동 이해남이 발미(跋尾)하고 또 편지를 보내어 극진한 뜻으로 유임할 것을 권유하였다.

안산(安山) 김진사 홍익위 두 어른이 근래 향중의 일로 사례하였는데 발미는 없으나 담긴 뜻은 모두 매우 도타웠다. 3년동안 원장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하루도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다 또 목정의 좋지못한 모습을 볼 때 다만 문을 닫아걸고 인사를 사절하여야 하나, 이 한가지가 쉬 수습하고 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아주 답답하다.

 

316; 상주목사가 심부름꾼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였는데 도남서원에 둔 마른 오동나무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답장으로 허락하였다.

 

326; 하회에 답장을 써 보냈다. 도남서원에 보낸 사임 단자가 돌아 왔는데 또 체임되지 않고 여러 곳에서 보내온 답장의 사연이 간곡하고 몹시 절박하여 어쩔 수 없이 우선 한 두 달은 멈추겠다고 짤막한 답을 하였다. 고을 어른들의 뜻이나 친구들의 모든 의견도 다 그러하였다. ---하략---

 

328; 듣건데 옥성서원 향사 모임 때 주 신재(周愼齋)와 김 개암(金開巖)을 효곡서원에 함께 봉향하자는 통문을 내었다니 아주 뜻 밖이다. 신재는 이미 소수서원에 입향되었는데 어떻게 효곡서원에 병향할 수 있겠으며, 개암 역시 그의 자손들이 필시 선뜻 따르지 않을 것이다. 신재는 본래 상주 사람으로 그의 증조부가 칠원으로 옮겨 간 것이다. 퇴계집에서도 상산(商山) 주무릉(周武陵)”이라 하고 상주향안구록(尙州鄕案舊錄)의 서문 역시 신재가 지은 것이다.

---중략--- 근래에 사당을 세우는 한 가지 일은 참으로 세변(世變)이다. 몹시 절통하나 한 사람이 구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떻게 하겠는가?

 

47; ---전략--- 효곡서원 임원의 품목을 보니 주 신재를 정위에 올려 봉향하고 삼현(三賢)은 동서로 나누어 배향 한다는 의론이었다. 이 일이 모양세가 좋지 않아 갈수록 복잡해지니 사람의 욕심이 무궁함을 알아볼 수 있다. 탄식한들 어찌하겠는가. ----하략 ----

 

525; 황 재수(黃再叟)가 지난 번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의 탄핵을 받아 이달 보름 후에 영광에서 돌아 왔다. 옛 사람이 이른바 세상에는 참으로 없는 것이 없다.” 라는 말이 이런 경우이다. 시사(時事)는 진실로 괴이쩍어 할 것이 없으나 다만 일찍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지 않아서 낭패를 당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몹시 한스럽다. 정월 달 환국 이후에 그도 돌아오고자 하였고 나도 편지를 써서 권하였으나 미쳐 실행하지 못한체 이런 영향을 받았으니 이 친구를 위해서는 아주 개탄스럽다.

218; 막내 작은아버지가 돌아왔다. 들으니 우리 상주는 조천경(趙天經)과 고계서(高啓瑞)가 입격하였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가상하다.

 

518; 도남서원에서 사람이 와 재수(再叟)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6월 초하루 분향에 마땅히 도원(道源) 데리고 올 터이니 나와 함께 만나 몇일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그길로 읍내에 가서 8일의 곡반(哭班)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답장을 써 보냈다.

 

61; 황 재수의 편지 두 통이 어제 차례대로 와 있었다. 어제 도남서원에 와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또 식산 이장(李丈)이 금릉에서 돌아와 읍내의 임시 거처에 있는데 이달 3.4일쯤 돌아 갈 것이라며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가겠다고 하고 싶으나 배탈이 나서 몸져 누워 못가서 안타깝다.

611; 도남서원 원장의 편지와 향중의 단자(單子)를 받아 보았다. 재임 류후빈이 서원 앞 뒷산의 금령을 범하게 한 일로 산지기를 매질하였는데 회곡(檜谷)의 김0(0)가 서원에 와서 그 때의 사령(使令)을 매질하였다. 이 때문에 시끄러운 사단이 생겨서이다.

 

71; 도남서원 원장에 천망(薦望)되었다는 천망지(薦望紙)가 왔다. 부망(副望)과 말망(末望)은 이천여(李天如). 황도원(黃道源)이다.

 

76; 사임 단자를 써서 도남서원에 보냈다.

 

715; 거접(居接) 유생이 지은 글 30여 장을 보내와서 채점하였는데 장원은 채식(蔡湜)이었다. 도남서원에 제출하였던 사임 단자에 원임(原任)의 발문을 받아 왔는데, 체임이 허락되지 않아 두 번째 사임 단자를 써 보냈다.

 

719; 도남서원에 보냈던 사임 단자가 돌아왔는데 또 체임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취임해야 할 것 같아서 26일에 서원으로 갈 계획이라고 색리(色吏)의 고목(告目)에 제사(題辭)를 써 보냈다.

 

726; 아침밥을 먹기 전에 시()와 부()의 문제를 내었다. 유생들이 와서 모였는데 다른 고을과 본 고을을 통털어 일백 인이었다. 도남서원의 재지기(齋直)과 구종(驅從)들이 근암에서 뒤따라 왔다. 밥을 먹은 뒤에 도남서원으로 떠났다. 모인 사람들이 억지로 붙잡았으나 중요한 지위에 처음으로 나아가는 자리여서 임의로 뒤로 물려 정할 수도 없거니와, 나의 본뜻도 그냥 들려서 자며 모임에 온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떠나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 떠나겠다고 청하여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죽파 이씨 아저씨 집에서 말 먹이를 먹이고 고모와 두 사촌 내외를 뵈었다. 오후에 길을 떠났다. 지나는 곳이 모두 강가여서 갯밭이 물에 잠겨 토사가 뒤덮혔는데 보기에 매우 참담하였다. 가는 길에 응동(鷹洞) 김경렴 어른을 뵙고 회진을 거쳐 배를 타고 서원에 당도하였다. 재임과 근처의 5·6인이 모여 있었다. 들으니 재수(再叟)가 정언(正言) 조지빈(趙趾彬)과 사소한 일로 서로 따지다가 장령에서 체직되어 일전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727; 재임이 모두 갈리어 곧바로 통문을 써서 조상경(趙尙經)여우(汝友)황서(黃漵)군징(君澄)에게 보냈다. 저문 뒤에 비가 개어 모인 인원들이 다 돌아가고 화숙(和叔) 형 만이 남았다. 중모로 가는 인편이 있어서 재수(再叟) 군징(君徵)에게 편지를 썼다.

 

730; 잠시 상주목사를 뵙고 나왔다. 못의 연꽃을 감상하려고 연당(蓮堂)으로 들어갔는데, 한 두 송이가 비로소 피어나 사랑스러웠다. 지나는 길에 조세후(趙世垕) 어른을 뵈었는데 이번 여름에 양산군수에서 체직되어 이곳으로 와서 멀리 살 계획이라고 하였다. 식산 어른을 뵈었드니, 다음 달 10일 쯤에 금강산 유람을 떠날 것이라고 한다. ----중략---- 도남서원의 물력이 고갈이 특히 심하여 지금 당장은 남은 곡식이 전혀 없는데, 향사가 다음 달이니 몹시 고민스럽다. 빚으로 쓴 돈이 일백 꾸러미에 가까워서 앞으로 조달을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고 한다. 이는 경자년(1720)에 상소문을 작성한 뒤로 연달아 홍수를 만나 묵은 부채가 그대로 밀려 온 때문이다.

 

821; 영귀문(詠歸門) 밖에 석단(石壇)을 증축하고 장남헌(張南軒)의 풍우정(風雩亭)의 뜻을 취하여 풍우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오시가 되기 전에 일을 마치고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들으니 상주목사가 역마를 타고 길을 떠났으며 좌수와 별감은 다 그대로 유임되었다고 한다. 신임 목사로 송인명(宋寅明)이 임명되었는데 일찍이 승지를 지냈다.

 

822; 무너진 여러 곳을 보수하고 영귀문의 편액이 갈라진 곳이 많기 때문에 보수하고 새로 칠을 하였다.

 

826; 서원 안의 모든 편액이 세월이 오래며 빛이 바래져서 거의 다 자획을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분을 칠하고 색깔을 돋우었다. 대개 사당의 편액 道正祠는 만취(晩翠) 오준(吳浚)이 썼다고 한다. 일관당(一貫堂)경재(敬齋)의재(義齋) · 영귀문(詠歸門)은 조시호(曺時虎) 공이 썼다. 조공은 곧 군수 조정융(曺挺融)의 아들로서 필법이 정묘하여 조화를 이루었다 할 만하다. 매호촌에 살았던바 곧 현종 숙종때 사람이다. 일관당의 경우 곧 자신이 써서 새겼는데 일찍이 당()자 위의 소()자가 너무 작다고 하면서 고치려고 하였으나 미쳐 고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사액은 누구의 글씨인지 모른다. 입덕문(入德門)은 퇴계의 글씨를 모사하여 새겨서 걸었다고 한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갑자 년간(1684)에 지어 지금까지 40년이 되도록 아직 편액이 없으니 이는 전배들이 겨를이 없어서 달지 못한 체 그럭저럭 지금까지 온 것이다. 명륜당(明倫堂)도 중간에 불에 타서 류 장령(柳掌令)이 일을 담당한 유사로서 고쳐 지은 것이다. 오후에 술을 담당한 유사 두 사람이 오고 김윤요(金允耀)가 들려서 잤다.

 

91; 축시(丑時) 초에 향사를 거행하여 날이 밝기전에 마쳤는데 예절에 조금도 어긋나거나 잘못된 점이 없었으니 아주 다행이다.

향사를 마친 뒤에 다시 개좌하여 김창건(金昌健)이정옥(李庭沃)에게 벌을 주었다. 김군은 지난번 향교 모임에서 술에 취하여 실수를 하였고 이군은 술을 담당한 유사로서 입재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비를 시켜 소지를 올렸기 때문이다. 주부(主簿) 송량(宋亮)의 사당을 세우겠다는 의논에 대하여 지난번 향교모임 때 교장(校長)은 송씨 문중이 그의 선조를 위하여 별묘(別廟)를 짓고 향중의 문자를 얻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 위판의 봉안은 리사(里社)와 같이 ----”라고 하므로 회중이 완강히 물리칠 수가 없어서 각 학궁에 통문을 내어 가·부를 물었었는데 그 뒤에 또 좌도의 통문이 와서 이번 서원 모임에서 이 일을 결론 지으려고 하였으니, 하도 괘씸하여 완강히 버티고 들어주지 않았다.

오후에 회원들이 모두 읍내로 가는데 나의 거취가 아주 곤란하여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모두의 의논이 이 곳에서 다시 통문을 내어 각 서당에 청하였으니 물러앉아 가지 않는 것은 도리상 미안하다고 하고 또한 일리가 있는 듯 하여 저물녘에 들어가 주인의 집에 머물렀다.---하략---

 

101; 도남서원 사람이 와서 태수(泰叟)의 편지를 받았다.

대제(大堤)에서 막 돌아와 신임과 구임이 맡은 일을 인계하는 일로 와 모였다가 사소한 곡절이 있어서 이루지 못한 체 마쳤다고 한다. 또 조 재임(趙齋任)이 우연히 원록(院錄)을 펼쳐보다가 이름자가 없어서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여 돌아갔다고 하니 몹시도 놀랍고 한탄스럽다.----하략---

 

1724(경종 4)

 

123; 비가 내렸다. 상주(喪主) 채명관(蔡命觀)의 집에서 자천대(自天臺) 사적을 청하여 얻었다. 채득기(蔡得沂)공은 난재의 현손으로서 본래 함창 사람인데 자천대의 산수를 좋아하여 이곳으로 옮겨 산 것이다. 병자호란 뒤에 의술로서 조정의 명을 받아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으로 갔는데 이때 효종이 봉림대군으로서 같이 갔다. 언젠가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시에 차운하여 원망과 책망 어찌 하늘과 사람에게 미치리요怨尤何敢及天人라고 하시면서 채공에게 차운하여 올릴 것을 명하여 공이 그 시에 차운하여 짓고 또 서문을 덧붙이니, 오로지 복수와 설욕만을 말하였다. 그 뒤에 여러차례 은총을 받아 창화(唱和)한 시편이 매우 많다. 귀국한 뒤에 공은 자천대에 은거하며 별좌(別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께서 동궁에 있을 적에는 여러차례 궁중의 종을 보내어 편지를 부치고 또 그림을 그려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등극하기 전에 공이 죽었다. 그의 증손자 휴징(休徵)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여덟자를 바위에 새겼다.

 

자천대는 도남서원 북쪽 오리 쯤에 자리하고 있는데 강이 맞닿아 바위가 층층이 쌓여 대를 이루고 바위사이에는 벼랑길이 있으나 험하여서 오르기 어렵다.

대에 내려오면 세면함(洗面函)과 바둑판이 있는데 모두 바위를 깍아 만든 것이다. 또 그 아래 흙을 제거하고 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평탄하여 앉을 만하며 좌우에는 노송, 매화, 대나무가 뒤섞여 서있다. 그 옆에는 초가집 두어칸이 있고 그 남쪽으로 수백 보쯤 되는 곳에는 작은 바위 봉우리가 있으며 봉우리 아래에는 귀암(龜巖)이 수면에 웅크리고 있다. 또 그 남쪽으로 백보쯤 되는 곳에는 용암(龍巖)이 있고 용암 아래에는 용혈이 있는데 가뭄이 드는 해에는 그 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밤에 용암 아래로 배를 옮겨 잤다. 자천대의 북쪽 몇 걸음 위에는 절벽이 있어 높이와 넓이가 거의 수천 척에 달하는데 병암(屛巖)이라 부른다. 또 그 북쪽에는 옥주봉이 있고 또 기암괴석이 있어 반은 강물에 잠겨 있다. 그 동쪽에 수백 보를 가서 강 건너에 개구암(開口巖)이 있는데 바위 위에는 김 부제학(金 副提學)의 정자터가 있다.

 

1725(영조 1)

 

217; 상주목사의 답장을 받았다. 식산 어른이 20일 쯤 합천에 가려고 하신다. 이는박천집(博泉集)을 경성(鏡城)에서 간행하여 와서 안동 광흥사에 맡겨 두었으나 오래 전하도록 널리 배포하는 데는 해인사만 못하기 때문에 지금 막 해인사로 옮기어 이 참에 수십 질을 더 간행하여 각 학궁과 친구들의 집에 나누어 보내려고 하므로 친히 이일을 살펴 보시려는 것이다. 근암서원 향사 이전에는 미쳐 돌아올 수 없을 듯하여 두 번째 사임 단자를 올려 체임되었다. 이곳 사림들이 매우 실망하였다.

 

들으니 그저께 저들 무리 10여 인이 갑자기 향교로 들이닥쳐 저들 스스로 임성숙(任成淑)을 상제(上齋)로 성 모김모를 장의(掌議)로 성모0000를 재임(齋任)으로 세우고 일찍이 미워하던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벌을 주어 고모조모김모여모홍모는 영원히 내치고 고모이모는 삭적(削籍)하였으며 김모· 000는 손도(損徒)하였다고 한다. ---중략--- 지난 날 재회(齋會) 때 저 쪽 사람들이 00서원(00書院)에 모여서 향교에 통문을 내어 이 일을 물었는데 이미 모두 감해(減解) 되었다.”라고 답하였다. 이로 인하여 분분하였는데 뜻밖에도 이런, 전에 없던 패악한 일이 일어났으니 한탄스럽지만 또한 어찌하겠는가.

 

226; 졸수재(拙修齋)의 터를 농청대(弄靑臺) 서쪽 기슭 너럭바위 위에다 닦고 별도로 몇 줄의 글을 지어서 술과 포를 갖추어 토지신에게 고유하였다. 산양 등 다섯 면이 상주목사 송인명의 송덕비를 세우는 일을 달포전에 시작하여 오늘 삼거리 큰길 가에 세웠는데 면내의 상하 인원이 다 모였다.

사람과 말을 보내어 나에게 참석할 것을 청하여 농청대에서 잠시 갔었는데, 바람이 심하여 간신히 돌아왔다.

39; 새벽에 향례를 거행하였는데 무사히 잘 지내서 아주 다행이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흥암서원의 통문이 왔는데 조 목사(趙牧師)를 심원록(尋院錄)에서 삭제한 일 때문이다. 이 일은 대개 김시후 한 사람이 우연히 서원에 가서 이름자를 먹으로 지워버리고 또 그 옆에다 주를 붙여 놓았기 때문인데 망령되고 패악함이 너무 심하다. 그냥 놓아 두어서 훗날 윗사람을 범하고 임금을 잊어버리는 길을 열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향중의 의논을 거쳐 오래 전부터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이럭저럭 끌면서 끝을 보지 못하였다. 저쪽에서 이미 글을 내어 말이 괴격(乖隔)하니, 하지않는 것도 공평한 도리가 아니므로 자리한 사람들의 주된 의견이 시행을 하고 통문에 답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이론은 자못 불쾌하게 여겼으니 이는 당습(黨習)의 소치인 바 한탄스럽다. 또 향교에 통문을 써 보냈다. 저문 뒤에 회원들이 흩어져 돌아가고 나도 집을 떠난지 이미 여러날이 되어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조신지(趙愼之)윤이시(尹以時) 아저씨가 당도하여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잤다.

 

315; 내가 도남서원에 보낸 사임 단자가 돌아왔는데 홍영동 이해남이 발미(跋尾)하고 또 편지를 보내어 극진한 뜻으로 유임할 것을 권유하였다.

안산(安山) 김진사 홍익위 두 어른이 근래 향중의 일로 사례하였는데 발미는 없으나 담긴 뜻은 모두 매우 도타웠다. 3년동안 원장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하루도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다 또 목정의 좋지못한 모습을 볼 때 다만 문을 닫아걸고 인사를 사절하여야 하나, 이 한가지가 쉬 수습하고 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아주 답답하다.

 

316; 상주목사가 심부름꾼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였는데 도남서원에 둔 마른 오동나무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답장으로 허락하였다.

 

326; 하회에 답장을 써 보냈다. 도남서원에 보낸 사임 단자가 돌아 왔는데 또 체임되지 않고 여러 곳에서 보내온 답장의 사연이 간곡하고 몹시 절박하여 어쩔 수 없이 우선 한 두 달은 멈추겠다고 짤막한 답을 하였다. 고을 어른들의 뜻이나 친구들의 모든 의견도 다 그러하였다. ---하략---

 

328; 듣건데 옥성서원 향사 모임 때 주 신재(周愼齋)와 김 개암(金開巖)을 효곡서원에 함께 봉향하자는 통문을 내었다니 아주 뜻 밖이다. 신재는 이미 소수서원에 입향되었는데 어떻게 효곡서원에 병향할 수 있겠으며, 개암 역시 그의 자손들이 필시 선뜻 따르지 않을 것이다. 신재는 본래 상주 사람으로 그의 증조부가 칠원으로 옮겨 간 것이다. 퇴계집에서도 상산(商山) 주무릉(周武陵)”이라 하고 상주향안구록(尙州鄕案舊錄)의 서문 역시 신재가 지은 것이다.

---중략--- 근래에 사당을 세우는 한 가지 일은 참으로 세변(世變)이다. 몹시 절통하나 한 사람이 구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떻게 하겠는가?

 

47; ---전략--- 효곡서원 임원의 품목을 보니 주 신재를 정위에 올려 봉향하고 삼현(三賢)은 동서로 나누어 배향 한다는 의론이었다. 이 일이 모양세가 좋지 않아 갈수록 복잡해지니 사람의 욕심이 무궁함을 알아볼 수 있다. 탄식한들 어찌하겠는가. ----하략 ----

 

525; 황 재수(黃再叟)가 지난 번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의 탄핵을 받아 이달 보름 후에 영광에서 돌아 왔다. 옛 사람이 이른바 세상에는 참으로 없는 것이 없다.” 라는 말이 이런 경우이다. 시사(時事)는 진실로 괴이쩍어 할 것이 없으나 다만 일찍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지 않아서 낭패를 당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몹시 한스럽다. 정월 달 환국 이후에 그도 돌아오고자 하였고 나도 편지를 써서 권하였으나 미쳐 실행하지 못한체 이런 영향을 받았으니 이 친구를 위해서는 아주 개탄스럽다.

528; 도남서원에서 사임단자가 돌아왔는데 또 체임되지 않았으니 매우 답답하다. ---하략---

 

614; ---전략--- 저녁에 도남서원에서 사임 단자가 돌아왔는데, 체직이 되어서 아주 다행이다. 마음이 아주 홀가분하고 좋아 세상을 벗어난 듯하다.

천장(天章)의 편지를 받아보니, 저쪽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린다고 하여 염려스럽다. 봄에 향교가 변고를 겪은 뒤로 또 도남서원에 어떻게 해 보려고 생각을 내고 있다. 전하는 소문이 무성한데, 저들 가운데서 성모씨가 극력 가로 막아서 아직까지 중지된 것인데 또 이런 소식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626; 도남서원 구실아치가 가져온 고목을 보니 그저께 초저녁에 교임 성모씨가 이른바 김해의 상소 일행 여덟 사람을 거느리고 서원 재사에 난입하여 원장 성모재임 성모김모를 지정하여 선출하였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서늘하다. 세변(世變)이 줄곧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하서(夏瑞)가 어제 비로소 길을 돌렸는데 이 기별을 듣고 원촌에 머물러 자고 오늘 추천장을 받들고 옥성서원으로 향할 것이라고 한다. 저들의 소()는 곧 태신(台臣) 류봉휘(柳鳳輝) 등 여러 사람의 목을 밸 것을 청하는 것이라고 한다.

1736(영조 12)

 

113; 번고를 하여보니 쌀은 300, 콩은 134, 벼는 978석이었다. 느지막이 떠나 고사(高沙)안봉(安峯)대천(大川)의 세 봉산(封山) 등 몇 곳을 직간하고 저물기 전에 관아로 돌아왔다. 언양현감 겸임과 창고 봉쇄의 관문이 왔다. 내성 족제 권상삼(權相三)안동 종질 권천걸(權天杰)이 어제 저물녘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 ---중략---

들으니 외남 사람이 함창 사람과 서로 호응하여 지난 섣달 초에 옥성서원에 소청을 설치하고 저들 무리에 맞서려 하였는데 각 고을에서 모두 호응하지 않고 근방의 몇 개 고을만 어쩔 수 없이 와 모여서 그저께 권점을 하여 소수(疏首)로 상사 이인지(李麟至)를 뽑았다고 한다.

 

1739(영조 15)

 

121; 옥성서원(玉城書院) 분향 고목을 전하러 온 인편에 세 번째 사임 단자를 써서 보냈다.

 

1745(영조 21)

 

828; ---전략--- 저문 뒤에 홍국관이 찾아왔다. 지금 막 도남서원 재임이 되었는데 서원 심원록에 지난번 어떤 과객이 성모김모에게 검은 먹으로 권점을 쳐 두어서 향교에서 통문을 내어서 그 사람의 성명을 적발하여 보고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며 성모도 통문을 내어 수임(首任)과 부임(附任)이 이 일 때문에 모두 모였는데, 원장이 성모에게 편지를 써 답장을 받았으므로 미봉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 같다고 한다. ---하략---

 

1746(영조 22)

 

129; 날씨가 조금 풀리는 듯 하였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외남의 김상채(金相采)가 보러 왔다. 그의 고조부 일묵재(一黙齋)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묘갈(墓碣)을 청하였는데 고사하여도 되지를 않아 우선 받아두었다. 향교의 품목이 왔는데 상주에 새끼를 벤 양 한 마리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흑염소로 봉납하는 일이었다.

삼가 들으니 대왕대비의 환갑을 송축하는 교지 반포의 일로 차사원(差使員)이 지난번 상주에 들렸다고 하여 신민의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319; 올 봄은 극심한 흉년이라 할 만하나 시장은 돈 한 양에 벼가 열말, 쌀이 너말, 콩이 여섯말이니 이 때문에 인심이 흉흉하지 않아 다행이다.

도처에 호환(虎患)이 아주 심한데 우리 마을도 큰 호랑이가 수시로 나타나 개를 물어간다. 이는 금곡(金谷) 소나무가 울창하여 호랑이가 와서 그런 것이다.

 

327; 양성(陽城) 김계징(金季澄)이 그의 선조 일묵재(一黙齋)의 묘갈문을 받기 위하여 어제 왔다가 오늘 돌아갔다. 사시에 나무가 부러질 듯이 큰 바람이 불고 또 황사가 날렸다.

421; 경주 옥산서원 사람의 통문이 근암서원에 왔기에 살펴보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성즙, 이성재, 이성량, 이성수, 이희성, 이희심, 이희근, 이순년 등은 곧 회재 선생의 서자인 이전인의 후손들이다. 평소 적손을 무시하는 마음을 쌓아와 분수에 넘치는 일을 자행하여 오랫동안 악을 쌓아왔다.

또 사림을 능욕하고 서원을 차지할 계획을 내어 곧 흉악한 사람들인 이항엽, 이강식, 이일엽 등과 함께 죽기를 각오한 무리를 맺어 악행을 같이 저질렀다.

대개 이항엽 등의 조상인 이항, 이온, 이징이 120년 전 경술(1610) 연간에 회재 선생의 묘소에 해코지를 하고 석물을 망치로 훼손하였는데 그 정상이 탄로나서 초사를 바쳐 죄를 자복하였으며 심문한 문안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어 이성즙 등에게는 진실로 백세토록 잊기 어려운 원수가 되는데도 도리어 그들과 결탁하여 끌어드릴 생각을 하고 서원을 빼앗을 발톱과 어금니로 삼아 작년 6월에 서로 따르며 서원에 들이닥쳐 서원 임원을 몰아내고 몇 달동안 점거하였었다. 추향 때가 되어서 온 고장의 사림들이 차마 정결한 사당의 중대한 예를 흉악한 서얼들에게 맡겨둘 수 없어서 일제히 서원에 갔는데 이성즙, 이항엽 등이 서원 문을 굳게 걸어 잠근체 몽둥이를 둘러매고 돌을 던지는 등 흉악하고 패악한 짓거리를 마구해 댔다. 이에 유생들이 사유를 갖추어 관아에 보고하였으나 관아에서 금지하여 물리치지 않고 이들로 향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사문을 모욕하고 명교(名敎)를 문란시킨 행태가 극심하였다.

당초 빼앗고 들어왔을 때 선생의 본손이 차마 좌시할 수 없어서 일제히 모여 막았으나 이성즙 둥이 종 30여 명을 거느리고 야음을 틈타 소란을 일으키고 또 사람을 죽였다고 무고하여 관아에서 칼을 씌우고 수금하였는데 일이 거짓으로 판명되어 곧바로 석방하였다고 한다.

91; 근암서원의 원장이 보러 왔는데 도남서원의 향사가 이달 4일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 길을 나선 것이다. 작년봄 향사 때 참봉 정원보(鄭源甫)가 도남서원의 원장이 되었는데 비방이 많았으나 사직하지 않았다. 올 여름에 이증우[李增雨, 여발(汝發)]가 원리(院吏)에게 배자(牌子)를 내어 재임을 논박하였고 가을에 또 원중에 통문을 내어 수임(首任)을 논박하였다. 며칠전에 성서(聖瑞)달부(達夫)장원(長源) 등 세 원임(原任)이 본원에 와 모여 여발과 의논하여 신임 원장을 냈는데 화국(華國)을 선발하였다. 그래서 지금 향사를 지내는 일 때문에 나가는 것이다. 채유징(蔡幼澄) 군이 와 말하기를 이번에 인동에 가서 여헌(旅軒)00서원과 야은(冶隱)의 금오서원(金烏書院) 및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방문했다고 하였다.

 

927; 바람이 불며 또 흐리고 추웠다. 신군약(申君約)이 봉서(鳳栖) 상가에서 찾아 와 밤에 서원 아래 촌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들으니 조령(鳥嶺)에 성() 쌓는 공사가 한창 벌어졌는데 함창의 연호군(煙戶軍)이 부역을 맡았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