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서당(新安書堂) 기사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상주고등학교 교사
김 정 찬
1. 들어가는 말
상주지역의 서원과 서당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는《상산지》와《상주의 서원》등이다.《상산지》에는 상주지역의 서당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다. 신잠 목사가 부임하여 18개 서당을 세운 후, 서당을 승격하여 서원으로 활용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원의 경우는 제향(祭享)과 교육(敎育)의 역할을 담당하여 상징성이나 자료 보관, 지방 세력화와 문중현창(門中顯彰)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까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서당의 경우는 교육을 전담한 소규모 단위로서 명맥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서당의 명맥을 이어오는 경우도 각 서당에 보관된 자료는 아주 드물고, 그 드문 자료 가운데 세상에 공개한 경우는 더욱 드물다.
서당의 자료가 공개되지 못한 것은 대부분의 자료가 없어졌거나, 있어도 서당의 기능이 사라지면서 서당건립 주역 집안의 후손이 계의 형식으로 명맥을 이어오면서 그 집안에 그냥 소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 시대에 이르러 서당의 자료가 공개되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신안서당(新安書堂) 기사(記事)는 몇 해 전에『함창향교지』를 발간할 때, 함창향교에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와 일부자료를 번역하게 되었는데, 그때 향교 관계자로부터 함께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알게 된 자료이다.
함창, 이안, 공검을 배경으로 하는 서당 중의 하나인 신안서당의 시대별 사안에 대하여 기록한 <신안서당 기사>를 통해 신안서당의 연혁, 유래와 위치, 명칭의 의미, 왕래한 인사, 지역에서의 역할, 시국에 대한 관점, 상주와 함창 인사의 교류 상황 등에 대해 알 수가 있어 상주문화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 이 번역물을 소개한다.
2. 신안서당 해제
신안서당(新安書堂)은 증거서당(曾居書堂)에서 숭안서당(崇安書堂)으로, 숭안서당에서 신안서당으로 명칭이 고쳐졌다. 신안서당 기사는 1721년부터 1905년까지 185년 동안 총 19건의 내용을 누가(累加) 기록한 책이다.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년도 | 내 용 |
1721 | 류봉휘, 조성복을 토벌하는 상소 |
1723 | 몽와 김상공 사약 시 호상자를 향안에서 묵삭한 내용 |
1723 | 증거촌에 서숙을 지음 |
1735 | 1722년 묵삭자에 대한 토죄 통문 |
1728 | 증거서당에서 무신란 토벌을 위한 임원 선출 |
1731 | 이건 논의 |
1737 | 숭안서당으로 개칭 |
1732 | 유암 선생 사당 건립 논의 |
1739 | 창고 불 |
1740 | 창고 재건 |
1743 | 숭안서당 설강 |
1770 | 신보(新洑)로 이건 논의, 신안서당으로 개칭 |
년도 | 내 용 |
1773 | 회옹 영정 완성 |
1775 | 공자와 주자 영정 마련 |
1786 | 영정 사마소로 옮김 |
1787 | 왕비대전 언교로 대신 성토 상소, 서당에 영정 봉안 |
1788 | 우암 선생 영정 마련 |
1791 | 서당훼철 |
1905 | 이건논의, 서당 낙성식 |
* 원본에 년도가 섞여 기록됨
3. 신안서당 기사 번역
【경종(景宗) 1년, 신축년(1721)】
11월
우리 영남에서 소청(疏廳)을 상주에 개설하고 류봉휘(柳鳳輝)와 조성복(趙聖復)을 토벌하기를 청하는 것은 조정을 안정시키고 인심을 진정시키려고 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고을의 진사(進士) 남전(南躔)은 소수(疏首)가 되고, 관행(管行)은 선산의 박진강(朴振綱), 장의(掌議)는 상주의 황수망(黃壽望), 유사(有司)는 의성의 신경화(申慶華), 공사원(公事員)은 금산(金山)의 이도장(李道章), 함창의 남륙(南陸, 소수의 막내 동생), 제소(製疏)는 진사 성덕징(成德徵)이다. 소수 또한 초안을 써서 서로 비교하여서 정본(定本)을 만들었다.
12월 7일
출발했다. 성진사 및 김태휘(金兌輝)․성이명(成爾溟)․성이식(成爾湜)․신진원(申鎭遠)․조중태(趙重兌)․성이순(成爾淳)․성이함(成爾涵)․김종(金淙)․이구령(李九齡)․생원 남돈[南墩, 소수(疏首)의 둘째 동생]․성이한(成爾漢)․채명협(蔡命恊)․김홍정(金弘鼎)․김홍기(金弘器)․성이혼(成爾混) 등 여러 사람이 수행(隨行)하여 함창에 도착하여서 당색이 다른 함창 수령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유곡역(幽谷驛)에서 자고 다음 날 유곡역의 뒤 작은 고개를 지나는데 수행하던 여러 사람들은 모두 헤어져 돌아갔다.
12월 10일
고사리(高沙里)에 도착해서 6일 날 밤에 조정의 국면이 바뀌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2월 12일
누암(樓巖)에 도착하여 상서(尙書)인 장암(丈岩) 정호(鄭澔)를 방문했는데, 그의 맏아들인 상사(上舍) 정의하(鄭義河)가 “김일경(金一鏡)이 큰 풍랑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을 들으니, 이번의 소(疎)는 그 적당한 시기가 아니므로 서울에 가서 상세하게 알아본 다음에 뜻을 펴는 게 좋겠다.”고 했다.
12월 15일
서울에 들어와서 며칠 동안의 조보(朝報)를 보니 유배가 곳곳에 이어지고, 국문하고 감옥에 넣는 일이 많았었다.
12월 16일
민익수(閔翼洙)와 민우수(閔遇洙) 댁에 들러 조문했다. 그때 우수(遇洙)는 엄정한 귀양길을 떠났고, 그의 부생(婦甥)인 진사 윤지술(尹志述)은 다음 날 처단되게 되어 있었다.
12월 17일
아침에 들으니, “주거(廚車)에 윤상사를 싣고 당고개(唐古介)로 향하는데 그의 노비 20여 명이 좌우에서 둘러 싸고서 뒤를 따르며 통곡하니, 길가에서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눈물을 흘리더라.”고 했다.
12월 18일
어쩔 수 없이 돌아 가기로 하고는 고향길을 향했다.
12월 19일
소수(疎首)는 판교(板橋)를 향하면서 율시를 읊었다.
“500리 길을 함께 갔다가 돌아오니
사나운 풍설에 길은 다니기가 힘들다네
한 장의 소(疎)를 올려 역적을 토벌하려는데
어찌 저들이 그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삼신(三臣)은 배척되어 창명(滄溟)은 멀어지고
일사(一士)는 내치게 되니 억울한 죽음이 남아있네
이 지경에도 말 없으니 하늘은 대체 무슨 연유인가
고개 돌려 서쪽을 바라보니 눈물만 고인다네”
12월 21일
황수망(黃壽望)과 신경화(申慶華) 등 여러 사람은 대로(大路)를 따라 갔다.
12월 22일
박진망(朴振網)은 삼산(三山)을 향하여 갔는데, 소수(疎首)는 연풍(延豐)을 따라갔다.
12월 23일
집에 돌아왔다.
【임인년(1722, 경종 2)】
여름에 몽와(夢窩) 김상공이 성주(星州)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의 상여 행차가 함창을 지나가는데 동지들이 호상(護喪)하여 읍내에 들어오니 일변(一邊)에 의해서 내몰리게 되었다. 김리(金吏)가 자청하여 그의 집에 널을 안치했다. 이때 각각 자기 집의 부리는 상일꾼들을 차출하여 호상해서 고개를 넘었다.
6월 7일
일변이 읍내에 들어와서 향안을 꺼내놓고 호상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아울러 교원(校院)의 임안(任案)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벌목(罰目)을 내걸었는데, 그 벌목에 ‘역적의 시체를 맞이하여 지킨 그 죄는 모두가 똑 같다.’라고 했다. 이날 동지 여러분들은 다음날이 숙종대왕의 종상(終喪) 곡반(哭班)이기 때문에 읍내에 모였다.
6월 8일
상사 남전(南躔)이 그 동생인 상사 남돈(南墩)에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국상의 제도가 끝났지만 천하의 아픔이 더욱더 끝이 없다. 나는 병으로 밤이 되면 한층 심해지니 형편 상 움직이기가 곤란할 따름이다. 저들의 흉계를 드러낸 것은 본디 말로 할 수도 없지만 소위 모모라는 사람도 감히 그 가운데에 참여했느냐? 이런 상황에 이르러도 특별히 다른 도리가 없어서 주쉬(主倅)께 정서(呈書)하니 사의(辭意)는 대략 모모이었고, 이유로 지나가는 때를 맞이하여 일부는 메고 가는 것을 돕기도 하고 또 일부는 길가에서 조문하기도하니 이른바 지은보은(知恩報恩)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한 말일텐데, 저들이 마침내 시류에 편승하여 억지를 부리는 것이 이와 같고, 궁흉극악(窮凶極惡)의 일이 이와 같으니, 이 분통을 만약 공정(公庭)에서 드러내어 명백하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서 쫒아가겠는가? 또 그 옛날에 정인홍이 역적의 괴수로서 그때 정온(鄭蘊)은 일찍이 문자(問字)의 일 때문에 죽임을 당했는데 당시 후의 세상은 그를 비난한 자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는데, 지금 우리들이 당한 것은 평소의 문자(問字)에 비견될 것도 아니고, 잠시 나가서 조문한 것인데 무슨 조금의 덜어낸 수제(受題)가 있다고 처리하여 향당에 모두 모여서 벌목(罰目)을 철거하고 또 향록(鄕錄)을 꺼내어서 이른바 공사원이라고 하는 네 사람이 한결같이 묵삭(墨削)하고 그 아래에 메달아서 “함인불칙(陷人不則)”이라고 하고 또 착취하여, 예리(禮吏)와 사나운 군사들 15개를 불러서 뒤에서 소리 지르며 “이것은 너희들의 죄가 아니고 공사원의 죄다”라고 하니 또한 적은 고삐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고장은 본디 서로 화합하고 특별히 모가 나거나 반대하는 게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내왔는데 지금은 저들이 극률(極律)을 가지고 나를 모함하니 이 외에 무슨 일을 보고도 끝내 묵묵하게 있겠는가? 선비라고 불리는 사람은 조금도 이런 이름과 뜻을 받을 수 없으니 회중(會中)의 여러 친구들에게 물어서 조금도 꺾지 말고 위 항의 조건을 따라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이때 이후로 고을의 동지들이 서숙(書塾)을 짓는데 정자(正字) 채명보(蔡命寶)와 상사 이호겸(李好謙) 그리고 신진대(申鎭岱)가 먼저 이 의견을 남진사께 발의했다.
11월 15일
남 진사․채 정자(蔡正字)․이수겸․류현령(柳玄齡)이 상사 신진구 집에서 회의를 하여 형편대로 재물을 모으라고 하여 현(縣) 아래의 증거촌(曾居村)에 터를 잡았다.
【계묘년(1723, 경종 3)】
봄에 처음으로 세 칸짜리 집을 증거촌에 지었다. 그 후에 도암(陶菴)- [청원(淸源)에서 놀다가 돌아갈 때이다]이 채징휴(蔡徵休)를 찾아와서 서숙(書塾)에서 며칠을 함께 머물렀는데 여러 생도들을 모아놓고 강학하고 또 시를 지어서 당유(堂儒)에게 증정했다.
【영종(英宗) 을묘년(1735, 영조 11)】
교중(校中)에 통보하여 임인년 6월에 일변(一邊)이 자의(恣意)로 묵삭(墨削)한 자들을 토죄(討罪)하는 일인데 그 내용은 “아! 슬프도다. 저번 임인년 6월 7일 날의 일은 과연 어떤 풍습인가? 말을 하면 입을 더럽히고 글로 쓰면 종이만 버릴 일이로되, 다만 그날은 임금의 상(祥) 하루 전 날로서 온 나라가 생업을 놓고 통곡하고 애도해도 부족한데 마침내 무리들을 끌어 모아서 공개적인 모임을 확장하여서 이이(異已)를 구함(構陷)하는 것을 제일 능사라고 여기는데, 여러 신민(臣民)의 분의(分義)를 헤아려 보건데 이것이 과연 분수에 맞는 것인가?
예를 들어 금장(錦裝)한 향안(鄕案)의 경우는 선부노(先父老)의 성명이 등재되어 있는 백년이나 된 오래된 문적이다. 일읍(一邑)의 문헌은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향당(鄕黨)의 이 향록을 떠받드는 것이 얼마나 지극한데 모함하는 사람들에게 감금되고 근본을 존중하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아서 더럽고 추한 필묵이 문서 속에 어지럽고 지면을 더럽게 하여 폐기되니 저 파손된 향안이 후생들에게 도리 상 어찌 참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의 거조(擧措)는 위로는 성조(聖朝)의 기풍을 누가되게 하고 아래로는 선배들의 구적(舊蹟)을 멸시하는 것이니 이 패난(悖亂)은 역적 김일경의 흉악한 기세를 이어받는 것에 불과하다. 원근에서 전해들은 사람들이 누가 마음을 아파하지 않겠으며, 옆에서 몇 년이나 들었는데 아직 일관된 공의(公議)의 바로잡을 것을 듣지 못한 것은 이것은 저희들의 분하고 원통한 일일 뿐 아니라 윤리 상 균등한 바에 맞지 않는 것이니 그 과연 반성하고 자송(自訟)하는 생각이 없겠는가? 이제부터 원수는 처형하고 조정은 더러운 것을 떨어버리고 말쑥하게 하여 향학의 규범은 이제 그 다음 차례 일이다. 저희들은 이제 날을 정하여 횡당(黌堂)에 모두 모여서 그 당시의 폐단을 일으킨 무리들을 적발하여 일일이 바로잡은 다음에 이런 뜻을 관(館)에 통보할 계획이니 바라건대, 여러분들께서는 잘 헤아려서 답장을 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이다. (을사년 2월 29일에 통문은 진사 남전이 제작함)
3월 11일
교중(校中)에 모셔서 임호서원에 통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의 유록(儒錄)에서 이름을 지운 그 사건은 참으로 우리 함창에서는 백 년 동안이나 없었던 변괴이다. 순수한 교화가 베풀어진 풍토가 바뀌어 어지럽게 되고, 인후(仁厚)의 고장이 박악(薄惡)하게 되니 언덕위에서 공정하게 내려다보면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아! 패언을 말하는 자는 그 패(悖)를 부르고,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니 이번 달의 처치의 당연함은 그 해야 할 바를 가지고 갚게 해야 하는데 다만 잘못된 풍습은 꼭 비교할 필요는 없고, 지극히 어그러진 일은 다시는 답습할 수가 없다. 이에 헤아려서 합당한 벌을 시행하되 이미 향교의 벽에 걸었으니 서원에만 빠뜨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일부러 통고를 하니 바라건대, 잘 헤아려서 빨리 시행하기를 바랍니다.
남진사 제작
향사당에 보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고을에서 문헌을 존중하는 것이 향록보다 더 한 것이 없으니 그 임원이 된 자는 당연히 삼가 잘 지켜야 되는데, 지난번에 저들이 모함(謀陷)할 때 수석(首席)에 있는 사람들이 그 위세에 겁을 먹고 멋대로 그 중요한 향안을 내 놓아서 금장(錦粧)에 어지러운 붓과 더러운 먹으로 덮어씌우고 더럽히게 하게 되어 책자 가운데 백 년이나 된 옛 기록이 하루아침에 못 쓰게 되었으니, 사론(邪論)의 죄를 적발하는 것은 당연한 바가 있고 그리고 그것을 잘 간수하지 못한 책임 또한 면하기 어렵도다. 이에 벌목(罰目)을 이와 같이 일부러 보내니 향사당의 벽에다가 걸어서 훗날의 무궁한 폐단을 경계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앞서 2월 7일】
남 진사가 흥암서원의 원장으로서 상주향교에 통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궁에서 벌을 주는 그 일은 지극히 중대하므로 반드시 일은 그 사실에 의거해야 하고 벌은 그 윤리에 합당한 다음에야 사람들의 마음과 뜻을 복종시키고 눌러 앉힐 수가 있는데 간혹 그렇게 하지 않고 전혀 근사하지도 않는 말로써 억지로 눌러서 강제로 벌을 주면 벌을 받은 사람이 어찌 달게 받을 수 있는 논리가 있으며 벌을 준 사람도 또한 어찌 반좌의 의미가 없겠는가? 여러분들께 말해보면, 저번에 무엇때문에 향교의 향안에 이름을 지워서 어지럽게 했고 또 과장(科場)에서 멋대로 관직을 박탈하고 벌을 주는 것인지를 모릅니까? 이것은 김일경과 목호룡 두 역적의 흉악한 세력에 의지하여 이와 같이 모함을 일삼은 일변(一邊)의 음계(陰計)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봐도 마음이 싸늘하고 뼈가 저리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겠습니다. 저희들은 그때에 어찌 부형들을 위해서 신변(伸卞)하고 싶지 않겠는가만 들판을 태우는 불길에 향할 수가 없는 것은 괄낭의 경계와 통하는 바이니 신중하기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두 역적이 처형되고 군흉(群凶)들이 몸을 빼내 달아난 것은 그것은 잘못된 벌을 시원하게 씻어내는 길과 억지로 모함에 빠뜨린 자들에게 반좌율을 적용하기 위함이니 그 이치를 찾아내니 형세가 부득불 그런 것이지만 다만 흉론(凶論)의 무리를 찾아내는 것과 종적이 음흉하고 출몰이 요술같은 것은 누가 우두머리가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통고하니 여러분들은 일일이 적발하여 빨리 반좌(反坐)의 죄를 시행하여 공의(公議)가 획신(獲神)하고 사분(私憤)이 시원하게 씻어지도록 하기 바랍니다.
3월
흥암서원에서부터 도남서원으로 통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심하도다. 지난번 임인년(壬寅年)에 그쪽 서원의 심원록 가운데 목사 조정만(趙正萬)의 이름을 지워버린 일은 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듣고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유록(儒錄)을 지우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로서 다시금 극벌에 더할 수 없는 일이니 비록 평소의 친구간에라도 그 죄가 아니라면 결코 억지로 더하여 가볍게 시행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잘 다스리는 성주이고 의를 지키는 수령으로 지극히 엄하고 또 절도가 있으며, 또한 조정만 목사가 무슨 하자로 지적할 수 있다고 하여 감히 이와 같은 윤리에 어긋나고 의에도 맞지 않는 패거(悖擧)가 있단 말입니까? 이런 일이 있는 다음부터 원근에서 전해들은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어찌 우리 남방의 예의의 고장이 궁벽한 고장의 괴패(乖悖)의 풍습으로 바뀌어버렸단 말입니까?
아! 나라에 살면서 성훈(聖訓)이 훤하게 비추지 않음이 없는데 오직 그러한 거조(擧措)는 비단 입으로 말하기에도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분의 도리상에 있어서도 당연히 그 사람들을 적발하여 그들에게 벌을 주지도 못했는데 그럭저럭 3년이나 끌어와서 아직도 듣지도 못하고 허락하지도 못함은 많은 사림 가운데에 과연 하나도 의리를 밝히고 시비를 판정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가만 생각하니 여러분들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끝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공의(公議)하여 이와 같이 통고하니 바라건대, 잘 헤아려서 잘 처리하기 바랍니다.
제작은 위와 같은 인물임.
4월
향교로부터 관학(館學)에 답통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참혹합니다. 접때 김일경이 멋대로 굴고 군흉(群凶)이 그림자처럼 붙어서 요술같은 행동을 하고 서로 모의하여 관직에 있던 사람을 죽이고 사류(士流)를 모함에 빠뜨려서 분하고 원통해하는 마음이 전국의 어디에나 마찬가지인데도 다만 우리 고을의 무지한 무리들은 마침내 도리어 그 흉악한 무리들에 들붙어서 그들의 음계(陰計)를 빙자하여 아첨하고 의기양양하며 마침 이 기회에 편승하여 모함을 일삼아서 일변(一邊)은 패거리를 불러 모으고 또 교원(校院)에 있는 유적(儒籍)에 묵삭(墨削)한 흔적이 낭자하고 과장(科場)에서 자기들 멋대로 벌을 주어 관직을 박탈합니다. 교남(嶠南)의 60여 리의 주를 둘러봐도 모두 그러하니 호서와 호남도 이런 사실에 의거하여 가히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그 기상의 흉참(凶慘)과 정태(情態)의 비익(奰匿)은 다만 김일경의 역적과 함께 이른바 한 꿰미로 오는 것입니다. 아! 비통하도다. 이 무슨 변괴인가? 지금 보니 임금의 교화가 더욱 새롭고 조정이 더 깨끗해졌으며 원흉이 이미 처단되었고 여러 잘못 된 것이 모두 바로 잡혀서 모두 달성이 되었으니 향학(鄕學)을 바로잡는 것도 그 바로 다음 일입니다. 방금 그 때의 작폐한 사람을 적발하여 장차 통보하니 이것을 받고 위시(委示)하여 실로 우리들의 마음을 알기 바랍니다. 이 고을의 죄를 범한 사람의 성명이 아래 항목에 있으니 다만 뱀을 죽이되 죽지 않는 것과 호랑이를 찌르되 죽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폐단이 도리어 서인(噬人)에 이르게 되는 반드시 그 죄상을 듣고서 그 죄목을 엄하게 하여 태학과 사학(四學)에 분게(分揭)하고 삼방(三榜)에 얼마동안 응시하지 못하게 제한한 다음에야 거의 그 마음의 추악함을 잡고 그 죄악을 징계할 수가 있으니 아울러 잘 살펴 관리하기 바랍니다.
만든 사람은 상동(上同)
【무신년(1728. 영조 4) 3월】
청주의 적들이 일어나고 거창과 안음에서도 적이 연이어 들고 일어났는데 4월 1일에 의거(義擧)하여 적을 토벌하기로 위해서 채준(蔡遵)․채징휴․채징흥․조수구(趙守球)․신진구(申鎭九)․이윤암(李允馣) 등이 증거서숙에 모여서 온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서 동지들에게 다음날 증거서당에 모이기를 요청했다.
4월 2일
동지 여러분들이 모두 모여서 적을 토벌하기를 의논하였는데 본 읍의 동지들은 숫자가 적으므로 원근의 동지들이 한 목소리로 응해주기를 원해서 상주의 흥암서원에 통문을 보내고, 금산(金山)·개령(開寧) 및 선산과 성주 등 여러 읍에 통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아! 원통하다. 오늘날의 이 역적들의 변괴는 천고에 없던 일이로다. 같은 하늘아래서 같은 땅을 밟고 사면서 모두가 함께 임금의 교화를 입었는데 누가 절치분비(切齒奮臂)하여 의거(義擧)토적하여 생각이 그 머리를 자르고 그 고기를 먹지 않겠는가? 얼마나 다행인가 하늘이 두 곳의 적진을 도우고 보살피어 일시에 두목을 탕멸하고 여러 죄수를 나란히 붙잡아 형벌에 복종하여 벌을 받게 하니, 종사(宗社)의 기쁨은 이보다 더 클 수는 없는데, 다만 듣자하니 한 무리의 흉악한 무리들이 안음(安陰)에 잠복하여 있고 또 그 나머지 일당이 여러 고을에 퍼져 있다고 하니 그 무리들을 불러 모을 것 같은 걱정이 되지 않음이 없다. 그러니 어찌 예방하는 대책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 교남(嶠南)의 풍속이 추로위국(鄒魯衛國)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본디 축적한 바이니 임금을 따라 죽는 그 의리도 또한 마땅히 힘쓴다면 이런 변괴와 난리를 당했을 때와 충분(忠憤)의 격렬함을 당하여서는 다시 또 어떻게 해야겠는가? 일은 반드시 깊이 고려한 다음에 성립이 되고, 도모하는 것은 반드시 비리 계획을 잘 하고 난 다음에야 이루어지는 법이라. 이에 향중(鄕中)의 동지들과 함께 본현(本縣)에 모두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해야지 막중한 일은 약간의 사람이 조변(措變)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알려서 한 목소리로 매진하는 의미를 빌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잠재우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여러분들께서 각자 애를 쓰고 걱정하여 의논하여 펴나갈 규정을 정하여서 좇아서 두루 게시하여 서로 상응(相應)하기를 천만 바랍니다.”
라는, 내용이다.
이날 적을 토벌할 의논을 하여 임원을 정하였는데, 위장(衛將) 채명형(蔡命亨)을 장군으로 한 것은 이웃 고을의 여러 분들의 동참을 기다리려고 한 것이며, 좌랑(佐郞) 남전(南躔)을 대장으로 한 것은 먼저 이와 같이 추천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관(謀官)은 생원 신진구, 소모장(召募將)은 유학 류현령(柳玄齡)과 류귀령(柳龜齡)․이위겸(李撝謙)․남추(南墜)․진사 신진원(申鎭元)․유학 채명천(蔡命千)․이윤암(李允馣)이며, 일기(日記) 유사는 유학 채명협(蔡命恊)․채명홍(蔡命洪)이다. 각자에게 노복과 쓸 사람들 가운데 전해지지 않는 사람을 모으게 하여 창군(倡軍)할 이름을 의논하게 했다. 상사 남돈(南墩)이 “창의(倡義)라는 말로 이름을 하자.”라 했는데, 상사 신진구는 “저들도 이 이름을 차용할테니 아마도 그 이름은 서로 뒤섞일 것 같다. 그러니 이름을 토적(討賊)으로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라고 했다. 이에 모두가 “좋다.” 라고 했다.
4월 3일
흥암서원의 답통(答通)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본원(本院)과 상의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 대장을 추천하는 것이 남 좌랑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4월 5일
채징휴․이윤엄․남추․신진언․채명협․남도식․채명홍 등이 흥암서원으로 향하는데, 흥암서원의 통문이 도착하지 않은 것은 4월 1일에 여러 적들이 이미 진압되어서 관군이 모두 해산하여 돌아갔다고 말하기 때문에 가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
이상은 증거서당(曾居書堂) 때의 일이다.
【신해년(1731, 영조 7)】
5월
상사 채진운(蔡鎭運)․정자(正字) 채명보(蔡命寶)․상사 이호겸(李好謙)․조수구(趙守球) 어른․남도식(南道軾) 어른․별검(別檢) 채명천 등이 증거서숙(曾居書塾)에 모여서 상의하여 증거(曾居)는 비록 좋기는 하지만 읍시(邑市)와 가깝고 옥우(屋宇)가 너무 좁아서 많은 선비들이 공부하기에는 좁다고 생각하여 이건하기로 모의하고 생각하여 터를 북쪽으로 확정하여 이안(利安)과 사교(沙郊) 두 곳으로 확정하여 두 개 중 가부를 취하니 이안은 다섯 분이고, 사교는 열한 분인데 의견이 둘로 갈라져서 다시 오봉산(五峰山) 아래로 논의하여 터로 쓰일 밭을 매입할 때에 이르러 중지하고 또 공동(孔洞) 아래의 신안(新安)을 논의하여 산사 신진원에게 터로 쓸 밭을 요청하다가 또한 중지했다.
【정사년(1737, 영조 13)】
봄에 이안에 모였는데 신진대(申鎭岱) 어른이 “촌남(村南) 향북(向北)한 곳은 저희들의 종가 제전(祭田)입니다. 아무 이상이 없다면 이곳으로 정하는 것이 어떤지요?” 라고 하니 모두가 논의하여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2월 25일
계향(癸向)으로 터를 잡았다. 채징휴(蔡徵休) 어른이 축사(祝辭)를 만들어서 관영에 올리니 방백(方伯) 민응수(閔應洙)가 처분을 내렸는데, 채조(采租) 각 20곡(斛)과 역정(役丁)을 형편에 따라 도와주고 생각해주겠다고 했다.
6월 2일
주춧돌과 기둥을 세울 때는 처음으로 가물었는데 지난달 13일에 대들보를 옮길 때 비가 오고 또 크게 가문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으나 또 비가 오니 모두가 이상하다고 했다. 바야흐로 각 당이 의논하고 있는데 남 좌랑 어른이 편지를 보내어 “이안(利安)의 옛 이름이 숭덕(崇德)이니 숭덕(崇德)의 ‘숭’자와 이안(利安)의 ‘안’을 합하여 ‘숭안(崇安)’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라고 했다. 도식(道軾)이 또 편지를 보내어서 말하기를 “주자는 숭안에 살았다.”라고 하고, 채징휴 어른은 좋다고 하면서 “숭안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경앙(景仰)의 의미에 맞다.” 라고 말했다.
6월 23일
상량문은 남 좌랑․채징휴 어른․상사 진경(鎭經) 세 분 모두 육위(六偉)의 글을 지었다. 남좌랑 어른의 글을 사용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부할 곳이 없어서 유림에서 안타까워한 것이 절실하더니
땅을 측량하고 방향을 잡아서 마침내 커다란 건물을 경기(經紀)한 것을 보았네.
몇 년이나 쑥밭으로 황량하던 이 곳이
이제야 글 읽는 특별한 곳이 되었네.
가만 생각하니 선비들의 재목을 이루어주어
오로지 공부할 수 있는 땅을 마련하였네.
집에는 숙(塾)이 있고 주(州)에는 서(序)가 있어서 이로부터 삼대(三代)의 큰 법규가 되고
겨울에는 예기를, 여름에는 시를 익혀서 육예(六藝)의 실학에 오로지 힘쓴다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그 성정(性情)을 함양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바로잡고 노력하는 것은 그 기질을 변화하기 위함이라네.
예부터 흥학(興學)의 도는 이와같은 것에 지나지 않고
가만 생각하니 선비를 만드는 방법도 어찌 여기에서 벗어나리오?
우리 일읍(一邑)의 선비[장보(章甫)]가
장차 조그마한 유궁(儒宮)을 경영하되
공장요포(工匠料布)의 자질은 그 마땅함을 헤아려서 경내(境內)육방(六坊)에서 두루 구하여 합하고
장획방원(匠畵方圓)의 책임은 그 인을 채택하여 현서(縣西)의 십리에서 널리 펴 시험해본다
오랫동안 좋은 터를 얻지 못하다가
지금 그 좋은 터를 비로소 점지했네.
더구나 이 숭안(崇安)이라는 새 이름은
이동(里洞)의 옛 이름을 참작한 것이라네.
기이한 봉우리가 전후로 둘러싸고 있으니 인산(仁山)이 우뚝한 것으로 징험할 수 있고
신령한 냇물이 좌우로 감아 돌고 있으니 또한 지수(智水)가 활활 흐르는 것을 불 수 있다네.
여러 인재가 이 동네에서 우뚝 일어난 것은 예부터 그런 것이요
남긴 업적이 옛 터에 아직 남아 있어 지금도 본받을 만 하도다.
주역에 말하기를 ‘길지가 여기인데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를 취한단 말인가?’라고 하더니 다행이 흥학하는 혜화(惠化)를 맞이하고 지주가 화전(花田)의 유풍을 진작하는 때를 맞아 사람들이 함께 도모하여 그 때를 맞이하여 이치를 싣고 있으니 이에 일을 도와준다는 특별한 제사(題辭)를 내려주시고 순상께서는 려호(驪湖)의 아망(雅望)에 맞게 하는구나.
방향을 보니 남쪽을 등지고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형세를 살펴보니 들판을 바라보고 구릉을 등지고 있구나.
우선 강마하는 당을 세우는데 하나같이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쳤지만
제사의 공간은 훗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되겠도다.
방헌호달(房軒戶闥)은 각각 그 마땅함을 얻어서 소기(素記)를 모방하여 상하로 하고
유인단선(黝垔壇墠)은 모두 그 법도를 따라서 려학(廬學)을 보고 선후로 하였다.
화양(華陽)를 우러러보니 암암(巖巖)의 기상을 접하고 있는 것 같고
이곳의 서원을 돌아보니 양양(洋洋)한 현가(絃歌)가 들리는 것 같구나.
큰 일이 모두 이루어지려는 즈음에
한 마디 말로 권면(勸勉)에 보태고자 하노라.
이 당에 오르고 이 방에 들어가니 후학들의 의귀할 곳이 여기에 있는 듯 하고
시경을 외고 서경을 읽으니 선현의 사업을 흉내내는 듯 하도다.
입도(入道)의 큰 근본을 말로 한다면 우선 효제(孝悌)로부터 입심(立心)하는 것이요.
성덕(成德)의 지극한 공을 논해 본다면 반드시 지극히 참된 마음과 완전한 덕성에서부터 입각하게 되는 것이리라.
아침 저녁으로 생각하고 연역하여 과정(課程)을 감히 오늘에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궁양(窮養)과 달시(達施)하여 펴지는 것을 훗날에 기약할 수 있으리라.
이것은 우리들에게 소망하는 것이니
영원히 제군들에게 모범이 되리라.
이에 소리 내어 불러서
육위(六偉)의 상량가를 드러내노라.
들보를 동으로 던져보자
오봉산(五峰山) 여러 산악이 창공에 뻗어 있구나.
성현이 세운 것이 이처럼 탁월하구나.
9인(仞)의 높이가 어찌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무너지겠는가?
들보를 서쪽으로 던져보자
화양동 만장(萬丈)이 암서(巖棲)를 생각하게 하는구나.
춘추(春秋)의 대의(大義)가 천지를 지탱하니
여기서부터 백성들의 윤리는 거의 미혹하지 않으리라.
들보를 남쪽으로 던져보자
수많은 냇물이 함축되어 스스로 못을 이루는구나.
어연(魚鳶)이 상하로 마음껏 뛰고 날고 있으며
은혜가 명언으로 전해져서 고요한 속으로 참여하게 하는구나.
들보를 북쪽으로 던져보자
천추의 정려문이 길가에 서 있구나.
높구나 정절이여 그 누가 행한 것인가
함께 삼강(三綱)에 들어가 행록을 특별나게 했구나.
들보를 위로 던져보자.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끝없이 펼쳐있구나
가슴속으로 하여금 똑같이 맑게 하려고 하니
반드시 빛나는 대(臺)를 향하여 예장(翳障)을 없애리라
들보를 아래로 던져보자.
맑은 시냇물 한 굽이가 앞 들판을 휘감고 있구나.
수레와 말굽이 뒤섞이어 잠시도 쉬지 않으니
그 누가 득도한 사람인지 물어보리라.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한 다음에 산천은 그 수려함을 키우고 귀신은 불상(不祥)을 꾸짖어 인재(人才)는 많고 많은 아름다움을 얻고, 사풍(士風)은 우뚝우뚝한 성대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과 행동은 법칙이 되어 귀한 것은 성현을 바라는 것이요 눈 한 번 깜짝하는 사이에도 기르는 것이 있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도 보존하는 것이 있으니 그 공은 끝을 알고 그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명성과 예기(銳氣)는 다만 일변의 빈투(賓渝)일 뿐 아니고 여운(餘韻)과 유풍(遺風)은 저 멀리 염낙(濂洛)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한 개의 모범과 백세의 준승(準繩)은 채명오(蔡命五)에게 쓰게 하여 중량(中樑)에다가 새겨 넣으니 지주가 일생(一牲)을 주어 제수로 쓰게 하고, 양제(梁祭)와 빈섬 백 립(立) 그리고 한 고을의 역정(役丁)을 내려주니 지주는 도암(陶菴)선생의 종씨(從氏)인 이집(李䌖)입니다.
【이보다 앞서 임자년(1732, 영조 8)】
11월 19일에 서울의 각 곳에 통문을 보내어서 진신(縉紳)과 유사(有司)들에게 청하기를 “저희들은 바야흐로 우암(尤菴) 선생을 모시는 당을 함창현의 남쪽 5리쯤에다가 세우려고 하는데 이른바 그곳은 공검지(공험지․孔險池)의 상류로서 이곳은 우암 선생께서 평소에 지나다니면서 휴식하던 곳입니다. 유풍과 여운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그 제사를 지내고 받드는 일은 꼭 표적이 될 필요는 없지만 다만 흉년에 재용은 부족한데 큰 일을 일으키다보니 재력은 나올 곳이 없어서 각각 약간의 전곡(錢穀)을 모아서 겨우 재풍등물(材風等物)은 마련했으나 창건과 장식하는 것 그리고 벽 칠하는 공정에 필요한 수요품 등은 그 어려움이 상벽에 비할 바는 아니고, 영정은 이곳에 없으니 여러 군자가 장차 중도에서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해 주셔야겠습니다. 이에 진신(縉紳)과 유사의 임무는 여러분들께 이렇게 바라게 되었으니, 사문(斯文)의 큰일을 돕고, 힘이 모자라는 점을 고려하여서 교남(嶠南)에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어 수위(守衛)가 잘 되어 일을 잘 마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천만 바라겠습니다. 남좌랑이 통문을 만듬.
통문을 발송하는 일은 이수겸․남돈․신진구․류현령․채징휴․조수구 등이다.
이 달에 선비들이 통문에 답하여 왔는데 그 대략은 “우암(尤庵)은 율곡(栗谷)을 이은 분이요, 율곡은 주자(朱子)를 이은 분이다. 존모의 정성에 있어서 동정(同情)을 도모하지 않고 먼저 우암 선생을 받든다면 어찌 고인께서 주문공(周文公)을 단수로 천거하여 여러 성현이 바로 옆에 있는 듯한 의미이겠는가? 선비들과 유사에는 사간(司諫) 이용(李榕)․정언(正言) 김상신(金相紳)․지평(持平) 정홍제(鄭洪濟)․필선(弼善) 정광제(鄭匡濟)․지평 안상휘(安相徽)․지평 송국위(宋國緯)이다.
7월 16일
낙성(落成)하고 백일장을 여는데 수령인 구만희(具萬喜)가 술을 선사해 주었고 또 당유(堂儒)에게 시를 주었는데 그 시에 화답하여 지은 시로 한 책을 이루었다.
【기미년(1739, 영조 15)】
봄에 고사(庫舍)에 불이 났다
【경신년(1740, 영조 16)】
기와집을 매입하여 고사(庫舍)를 다시 지었다.
【계해년(1743, 영조 19)】
수령 이종원(李宗遠)이 일면(一面)의 연정(烟丁)을 데리고 수선할 때 돕도록 해 주었다. 이 이후로 설강(設講)했는데, 회장(會長)은 채징휴이고, 직월(直月)은 조수구·상사 신진경이요, 검강(檢講)은 이위겸·채명협이요, 강색(講色)은 남도철(南道轍)·채명홍(蔡命洪)이요, 청강(聽講)은 좌랑(佐郞) 남전·상사 남돈·주서(注書) 채명보·이수겸·채준(蔡遵)·류현령이요, 강학한 책은 주서(朱書)이다. 당액(堂額)은 퇴어자(退漁子) 김태진(金台鎭)이 썼다. 임인년 이후로 일변(一邊)과 함께 같은 학교에서 지고 싶지 않아서 증거(曾居) 촌에다가 서숙을 처음으로 짓고 다시 무신년(戊申年)에 특별히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 위해서 별도로 우리가 의귀할 곳을 지었다. 나중에 숭안(崇安)으로 이건하니 일변(一邊)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이상은 숭안서당(崇安書堂) 때의 일이다.
【경인년(1770, 영조 16)】
2월
강회(講會)한 다음에 별검(別檢) 채명천․상사 조협․이윤암․남도륜․이제백․이재성․채원신․채광후․류한령․남도완․신광서 등 여러 사람이 서당의 터가 한습(旱濕)하고 세월이 오래되어 주춧돌이 기울어서 다시 의논하여 이건하기로 하고 공동(孔洞)하류의 신보(新洑)내에 땅을 정했는데 그곳은 암석이 고기(古奇)하고 동학(洞壑)이 조용하고 그윽하며, 징담(澄潭)이 격단(激湍)하니 참으로 장종(將終)할 만한 곳이었다. 그 터는 두산(斗山) 단록(短麓)인데 남쪽의 몇 두락(斗落)은 신사댁(申思宅)의 밭이다. 그 강산의 빼어남을 취하고 토지의 많고 적음과 그 밭가에 있는 송율(宋栗)은 따지지 않고 125량(兩)을 주고 문서로 작성하여 영구 매입하고 터를 잡고, 정초(定礎)할 무렵에 사댁(思宅)의 사촌인 사막(思邈)이 억지를 부리며 자기 집의 옛 물건이라고 하며 멋대로 훼방을 놓으니, 이제성(李霽晟), 신광후(申光厚), 남도완(南道輐)등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본관(本官)에 글을 올리니 본관이 그날 직접 심의하니 그 산은 천황(天荒)의 땅이고 밭은 사택(思宅)의 형인 사억(思億)의 상속으로 얻은 토지이므로 즉각 사막(思邈)을 불러들려 기송(起訟)이 근거가 없음을 책임지우고 법에 의거하여 결안(決案)하고 즉각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날 그들에게 동역(董役)하게 하는 은혜를 입으니 본관은 김이탁(金履鐸)이고 그 날짜는 4월 17일이었다. 이른바 사막(思邈)이라는 사람은 무신년에 역적인 필인(弼仁)의 아들로서 역변(逆變)이후로 사억(思億)의 숙부인 석(晳)이라는 분에게 맡겨서 양자가 된 사람이다. 우리 고을의 토역(討逆)의 의논이 이 서당에서 나왔는데, 우리 서당의 토역(討逆)의 논의가 이 서당에서 나온 이후로 이른바 사막(思邈)이라는 사람은 이 서당 보기를 원수 보듯이 하여 지금에 와서는 백방으로 모해(謀害)하고 있는 것이다.
18일
임원을 분정(分定)하였는데 도감(都監)은 별검(別檢) 채명천․이윤엄․남도륜․생원진사 조협․유사 남도완․이재성․신광후 등이 날마다 동역(董役)했다.
5월 1일
상량문은 신광서(申光緖)가 짓고 성택렬(成宅烈)이 썼다.
7월
당우(堂宇)가 완성이 되었다고 알리고, 16일에 낙성(落成)을 마치고 강회(講會)를 열었는데 강장(講長)은 상사 조협․직월(直月) 신엄(申儼)․검강(檢講) 채경원(蔡景元)․이제백(李霽白)․남종필(南宗弼)․성우렬(成宇烈)․강색(講色)은 채경헌(蔡景獻)․신광택(申光宅)․채영대(蔡英大)․류득배(柳得培)이며, 청강(聽講)은 별검(別檢) 채명천․류한령(柳漢齡)․남도륜․이윤암이었다. 당액(堂額)은 오래되었기 때문에 ‘숭’자를 고쳐서 ‘신안서당(新安書堂)’이라고 걸었으니 다만 주자(朱子)를 존모(尊慕)하는 마음이 송정(宋丁)에 까지 미치게 하고 싶어서이다.
【계사년(1773, 영조 49)】
봄에 상사 조협․채경증(蔡景曾)․이제성․남도완 등 여러 분이 영정을 그리는 것과 여러 기구를 갖추는 것을 애써 이루었는데 회옹(晦翁)의 진상(眞像)은 근방에 걸어놓은 곳이 없기 때문에 중지시켜버렸다.
【정종 을미년(1775, 영조 51)】
12월
강회할 때 교하(交河)의 죽은 사전(師傳) 이세환(李世煥)의 집에 공부자(孔夫子)와 주부자(朱夫子) 두 분의 영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생을 보내어 상자에 넣어 오게 하였다.
【병오년(1786, 정조 10) 봄】
일변인(一邊人) 채연․남필량(南必亮)․권박(權樸)․권종섭(權宗燮)․채기탁(蔡蓍鐸) 등이 남의 위세를 믿고 협세(挾勢)하자 류병균(柳秉均)이 영정을 늑탈(勒奪)하여 사마소(司馬所)에 옮겨 봉안하였다. 서당 뒤에 언덕을 사이에 두고 냇물을 넘어서 우리의 서당과는 경쟁이 될 듯한 청암서당이 있었는데 이 서당은 경오년에 세워진 것인데 무신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일변인들은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필인(弼仁)의 손자인 광직(匡稷)을 표리(表裏)로 삼았다.
【정미년(1787, 정조 11) 1월】
왕대비전(王大妃殿)이 언교(諺敎)를 반포하자 대신들을 성토하자는 의견들이 태학(太學)에서 먼저 일어나서 관료나 선비들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달 13일에 이제백․채경원․이제봉(李霽鳳)․채경증․채영대․이대규(李大奎) 등이 서당에 모여서 밀봉한 상소문을 올리기로 의견을 모으고 상주향교에 통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우리 대왕비전의 언교가 팔역(八域)에 반포되었으니 그 내용과 의미는 측달(惻怛)하고 의리는 삼엄하니, 오늘날 신하된 사람들 가운데 그 누가 감읍하여 애통해하고 원통해하지 않으리오? 조정 관료들과 관학의 차소(箚疏)는 정중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원수(怨讐)를 아직 모두 찾아내지 못했으니, 아! 슬프도다. 9월과 5월의 변괴를 생각하면 모골(毛骨)이 오싹해짐을 느끼지도 못하겠도다. 우리 영남에서 충의의 고장이 목욕(沐浴)하고 역적을 토벌하려고 청하는 거사를 어찌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이에 여러분들께서는 서둘러 대론(大論)을 펴시어 도내에 두루 통고하여 여러 사람이 궁궐 문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여 역적을 토벌하도록 해 주기를 천만 바랍니다.”라는 내용이다.
남주(南州)의 답통(答通)에 “상주에서 도회를 열고, 설소(設疏)하여 소수(疎首)는 이제봉, 소색(疏色)은 채경증․신우동(申宇東), 관행(管行)은 정색(鄭穡), 도청(都廳)은 심능익(沈能翊)․김순(金純)으로 정했다.”고 했다.
3월 25일
소유(疏儒)가 대궐 앞에 엎드려 있은 지도 한 달여 정도가 되지만 윤허를 받지 못했다.
10월
채경증․이대규가 방백 김광묵(金光黙) 공에게 직접 가서 소장을 올렸고, 그 제사(題辭)도 도착했다.
10월 12일
류후(柳候)가 관례에 따라서 영정을 모시고서 서당에 다시 봉안하였다.
10월 13일
당원(堂員)이 모두 모여서 받들어 모시고[瞻抖] 설강(設講)하였는데, 강장(講長)은 신광윤, 직월(直月)은 채경원, 검강(檢講)은 이제봉․신상목(申尙穆)이고, 강색(講色)은 채경증․이대규이며, 청강(聽講)은 이제백․신채(申綵)․성우열이며, 강생(講生)은 본 읍의 50여 명과 타 읍의 10여 명이다. 이 달 보름 후에 거재유생(居齋儒生) 3명에 한해서 교대하기로 정하고 거재절목(居齋節目) 10여 조와 백록동규, 동서명(東西銘), 야기잠(夜氣箴), 무이구곡시를 써서 걸었다.
【무신년(1788, 정조 12)】
10월
영동(永洞)의 송환우(宋煥愚) 집에 우암 선생의 진상(眞像)이 있다고 들어서 유생을 정하여 가서 청하기로 했다. 11월 3일에 옮겨서 상자에 넣었는데 매번 아침 강회에 거재(居齋)에 교대하게 했다. 때에 따라 늘 그렇게 했다.
【신해년(1791, 정조 15)】
봄
채연․남필량․이제봉․신광직․권박․권종섭(權宗燮)․채기탁(蔡蓍鐸) 등이 경저(京邸)에 체류하면서 채제공(蔡濟恭)에게 서당을 서원으로 해 달라고 했으나 임금에게 잘못 전달되어 당유(堂儒)는 형을 받고 영정은 옮겨서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본관(本官)은 붙잡혀 들어가고 서실은 훼철되었는데, 사들인 당전(堂田)은 광직(匡稷)에게 잃게 되었다. 저들의 무망(誣罔)의 죄는 돌아갈 곳이 있지만 우리들은 서당을 짓는 책임을 마치지 못한 것 또한 면할 수 있으니 원한과 안타까움을 씻을 수가 있으리라.
이상은 신안서당 때의 일이다.
서당이 철거되어 심곡(心谷)에서 개인 집을 샀고, 나중에 또 공검호 주변의 한 기와집을 사서 옛날의 모습처럼 문설미에 거는데 이대규 공이 당기(堂記)를 지었다. 뒷날 또 향음주례를 행하였고, 강회를 열었는데 십학(十學)을 강의하였다. 강재(剛齋) 송 선생께 서당의 편액인 ‘신안서당’을 부탁하였다.
【순종(純宗) 을사년(1905년)】
상사 남이목(南履穆)과 신경기(申璟璣), 류현필(柳鉉弼)이 도계(陶溪)의 탁동(卓洞)을 지나가다가 “그 터가 확 트이고 강산(江山)의 정취가 좋은데 지금 서당 자리인 도호(陶湖)는 수토(水土)에 불리하니 어찌 이곳으로 옮기지 않는가?”라고 하자, 서로가 “좋다”라고 하였다. 10월의 모임에서 여러분들의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병오년(1906년) 2월】
서당을 무너뜨리고 그 재목과 기와를 옮겼다. 26일에 터를 잡고 남상사께서 축문을 제작하셨다.
3월 9일
유시(酉時)에 상량문은 남 상사께서 제작하셨다.
옮길 곳이 마땅찮았는데 땅은 오늘을 고대하고 있었고
의귀할 곳이 있으니 하늘은 백년토록 미루던 일을 정하였도다.
상량할 때
칭송은 끝이 없도다.
옛날 신해년이 처음이고
새로 무신년에 다시 지었도다.
가만 생각하니 우리 마을은 추로(鄒魯)의 한 고장인데
당세(當世)을 보건데 어찌 선악[薰猶]이 함께 하겠는가
처음으로 숭안(崇安)에 서당을 세우고
선비들에게 경서를 안고 공부하게 하였도다.
려호아망(驪湖雅望)은 순상(巡相)의 은혜를 입어 처음으로 짓기도 하고 또 신안(新安)으로 옮기게도 되었고
화전유풍(花田儒風)은 어진 수령을 만나서 처음으로 세워지고 또 옛 가야의 땅을 취하게 되었도다.
마침 일갑(一甲)이 되었는데 하늘은 뜻이 있는 듯하니
두 부자(夫子)의 영정을 세운 것은 주자와 송자가 우리의 스승이기 때문이도다.
숙(塾)이 변해서 상(庠)이 되니 감히 녹동(鹿洞)에 모설(冒設)하지 않고
서당이 서원으로 되니 어찌 한림원에 꾸미고 속일 수 있겠는가?
우리의 도가 그릇된 것인가?
우리 유림은 끝이로다.
우선 심곡(心谷) 터를 얻었으나 좋은 터가 아니어서
곧 공검으로 옮기는데 마침 개인의 집이 있었도다.
길지(吉地)를 기다려서
우리들에게 흥이 나게 하는구나.
이 탁동(卓洞) 한 구역은
도계(陶溪)의 상록(上麓)이니
국사봉이 높아서 그 가운데에 오봉(五峰)이 늘어져 있고
옥녀봉이 우뚝한데 그 한 지맥이 불쑥 아래로 뻗어 있구나.
방향이 뒤는 유(酉)이고 앞은 묘(卯)이니 그 위치는 정방(正方)이요,
뒤는 높고 앞은 낮으니 그 세는 앞이 탁 트여 밝도다.
두 물줄기가 띠를 이루니 북천(北川)과 동강(東江)이요,
두 산이 저절로 문이 되니 왼쪽은 교(嶠)요 오른쪽은 언(堰)이로다.
남령(南嶺)을 지키며 둘러싼 것은 다만 성이요,
중평(中坪)을 둘러싸며 퍼져있는 것은 논밭이로다.
영강과 교하의 산자락이 면전(面前)에 겹겹이 늘어져 있고
학가산이 구름 밖에 두 손을 맞잡은 듯 퍼져 있구나.
평평한 모래는 희고 갈매기는 한가로우며
층암은 우뚝하고 봉황은 상서를 바치는구나.
관부(官府)에는 바람 따라 고각생황(鼓角笙簧)이 들리고
봉대(烽臺)에는 밤중에 육해산수(陸海山藪)를 알리네.
하늘은 높고 땅은 아득하여 일월은 끝이 없고
산은 멀고 물은 아득하여 안개는 아득하구나.
대개 안계의 확 트임을 취하니 만상이 죽 늘어져있으니 완상할 꺼리요
이 흉금을 탁 트이게 하여 하늘과 땅이 개벽하니 체도(體道)의 재료가 된다.
이에 영재를 저양(儲養)하니 어찌 작은 그릇에 그치겠는가?
마땅히 그 조정에 드날리어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
처음에 내 마음속을 뒤흔드니
모두가 ‘이에 우리가 있을 곳을 얻었다’라고 하더라.
옛날의 다섯 칸 짜리 집을 헐어서
몇 칸의 집을 새로 지었다네.
규모와 제도를 찾아서 재목를 쓸 때는 그 좋은 것을 다했고
음양의 순환을 참고하니 좋은 때를 만났도다.
지금 이 당의 동량(棟樑)은
훗날 국가의 큰 근본이 되리라.
거경궁리(居敬窮理)는 존심치지(存心致知)의 공을 지극하게 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은 명체적용(明體適用)의 학문을 힘쓰게 하네.
과거에 얽매어 급제하는 영광에 사로잡히지 말고
여사(餘事)로 문장에 힘써서 문장 꾸미기를 다하라.
이것은 이른바 그대들에게 바라는 바이니
어찌 이 당에서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
이에 한마디 말로
육위(六偉)를 찬양한다.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져보자
교하의 산녁에 아침 해 그림자가 몽롱하다.
우리의 도를 다시 꼭대기로 되돌리고 싶으니
제군들의 마음 속에 달려 있도다.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져보자
신안의 흐르는 물이 봄을 맞아 흐르는 구나
우리들이 그 물의 근원을 찾아가고자 하니
옥녀봉 앞에 서로 손 잡고 모였도다.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져보자
만장봉대(萬丈烽臺)의 큰 횃불이로다.
창명(滄溟)과 평사(平沙)에 거울처럼 알려주기 위함이니
우리들의 노래는 성은(聖恩)이 미친 것 때문이라네.
대들보를 북으로 던져보자.
빛나는 많은 인재들 이 왕국에서 나왔도다.
우리 임금님 준철(濬哲)과 문명(文明)의 모습
앞서간 그 누군가가 성역(聖域)으로 이끌어주는구나.
대들보를 위로 던져보자.
사람의 마음이 원래 귀한 것은 존양(存養)이 있기 때문이라.
길러서 곧바로 솟아올라 우뚝우뚝할 때에
높디높은 하늘이 넓다고 말하지 말라.
대들보를 아래로 던져보자.
두 물줄기 중간에 큰 들판이 펼쳐져있구나.
농부들 모두가 고생하는 것 차마 보겠는가?
이 당에서 노는 선비들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한 다음에 하늘의 때는 휴식할 때요 땅의 기운은 커지는 때에 우리 고을은 모두가 추로(鄒魯)의 선비이니 어찌 대한(大漢)의 양생(兩生)에 그치겠는가? 우리들의 도는 낙민(洛閩)의 근원에 접하고 있으니 ‘신안’이라는 두 글자에 부끄럽지 않도다. 하학상달(下學上達)은 하늘이 내린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요 요군순민(堯君舜民)은 인도(人道)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힘쓸지어다, 우리 서당의 사람들이여!
우리 유림을 질정하도다.
4월 15일 낙성한 다음에 강재(剛齋)선생께서 쓰신 편미(扁楣)를 걸고 남 상사께 기문을 부탁 했다
4. 나오는 말
<신안서당 기사>는 함창을 주 무대로 하는 유림이 주도하여 설립, 운영하고, 같은 상주이지만 약간의 차별화된 성향과 의식을 가진 인사들이 운영하였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점에서 의의가 크고, 1721년부터 1905년까지 185년간, 서당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내용을 누가기록한 점은 더욱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상주지역을 당색이라는 측면에서 얘기할 때, 완충지대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것은 남인과 노론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상주지역 거주 남인이면서 이웃 지역의 노론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지리적인 여건은 사상이나 성향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아 수가 있겠다. <신안서당 기사>를 통해서도 이런 점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다.
185년간 누가 기록하였지만 책으로 완성되지 않았고, 시차를 두고 누가기록한 경우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누가 기록한 것은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신안서당기사>처럼 오랜 기간 동안의 서당의 내력과 사안을 기록한 경우는 극히 드물고, 그 희귀한 자료가 현대어로 번역되는 경우는 더욱 드물기 때문에, 이 자료가 공개되면, 상주지역 서당의 중요한 자료를 연구할 수 있고, 또 더 나아가 다른 서당의 자료를 세상에 드러나게 하여, 상주의 역사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은 대단한 성과라 할 수가 있다.
좋은 자료를 제공하여 준 함창향교 관계자께 감사의 마음을 표하면서, 앞으로 더 많은 서당이나 서원의 자료를 일괄 정리하고 현대어로 풀이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상주지역의 역사문화를 알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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