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상주의 아동문학

상주의 아동문학 연재(5)

빛마당 2017. 2. 25. 16:29

. 공검면

공검면의 설화는 공갈못과 그 주변의 관련된 설화를 앞서 기록 하였기에 생략한다.

 

. 공성면

 

1) 오감수

250년 전 김해김씨가 정착할 땅을 찾아 헤매다가 지금의 오감산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밤에 목이 말라 물을 찾던 중 조그마한 옹달샘을 발견하여 이 물을 마셨더니 물맛이 아주 좋았다. 다섯 가지의 맛이 나는데 생기가 돌며, 신통력이 있어 하고자 하는 일은 다 이루어지는 신기한 물이었다. 김 씨는 이 우물을 떠날 수 없어 이 산 밑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 후로 이 산 밑에 살면 큰 부자가 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후부터 이 산을 오감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2) 용산골

 

용신리 북쪽 범어산 줄기를 따라 동으로 500미터 지점 넓은 초원에 옹달샘이 있는데 용수연이라 부르고, 이 일대를 용수골이라고 하는데 그 후 지네골 이라고도 한다.

용수연에는 해마다 무더운 유월이 되면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이 우물을 다 마시고 풀밭 위에서 즐기다가 3일 후 돌아가곤 했다. 어느 날 용이 이 샘물을 다 마시고 누워서 쉬고 있는데, 황소가 풀을 뜯다가 자는 용을 그만 밟고 말았다.

그 순간 용은 우람한 몸을 꿈틀거렸다. 용은 아픔과 분함을 못 이겨 소를 노려보다 쏜살같이 몸을 날려 소의 목덜미를 휘잡고 세찬 꼬리로 다리를 감아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소도 그냥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용과 황소는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큰 싸움이 붙었다.

거칠고 맹렬한 싸움은 석 달 열흘간 계속되었고, 산더미 같은 두 짐승은 결국 지칠 대로 지쳐 죽고 말았다. 용과 황소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풀밭은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버렸다.

그로부터 이 풀밭에서 풀을 먹은 소는 사흘 동안 피똥을 싸다가 죽어버렸다. 지금은 이 풀밭이 논으로 변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이곳의 풀을 소에게 먹이지 않고, 나물도 뜯지 않는다고 한다.

 

3) 인창리 삼층석탑

인창리 301-1번지인 탑골 김한범 씨 집 마당가에 있는 탑으로 고려시대 탑으로 보인다.

박 씨 문중에 자식이 없는 부부가 있어 이들이 자식을 얻기 위하여 마을 뒷산의 바위 밑에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49일째 되던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렇게 먼 곳까지 오지 말고 마을에 석탑을 쌓아 거기에서 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여 삼층석탑을 건립하여 공을 드렸다. 연 옥동자를 얻었다. 그 후 이 아들은 진사급제를 하여 부근에 명성을 떨쳤다. 인근 동리 아들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이 탑에 공을 드리러 왔다고 한다.

 

4) 평천리

비이()고개 북서쪽에 있는 마을. 용안리 구룡마 남동쪽에 있다. 구룡(九龍)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홍수를 피해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구룡(九龍)이 평천(平川)에 논다는 뜻으로 이름 했다고 한다.

옛날에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어서 이 부자라고 했는데, 워낙 구두쇠여서 남에게 베풀 줄 모르고 살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이 부자 집에 시주를 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했다. 스님은 이 부자에게 깨우침을 주고자 집 처마 밑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내를 마을 가운데로 돌리면 더 큰 부자가 될 텐데.”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말을 들은 이 부자는 솔깃했다. 스님의 말대로 얼른 물길을 바꿔 마을 가운데로 흐르게 하였다. 그러자 집안이 서서히 망하기 시작했다. 큰 마을이던 평천도 섬뜸, 가운데뜸, 골뜸, 각골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5) 효곡 마을의 효자각

지금부터 150여 년 전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왕실이라는 동네에 최만재(崔晩裁)라는 청년이 농사를 지으며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만재 청년은 어려서부터 행실이 올바르고 특히 부모님 말씀에 잘 따르며 그 효심이 뛰어나 마을 어른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평화롭게 살고 있던 만재 청년의 집안에 큰 근심거리가 생겼다. 만재 청년의 아버지인 최혁형 노인이 시르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에는 그날부터 웃음을 잃게 되었으며 평소 효성이 지극했던 만재 청년은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유명하다는 의원을 찾아보고 약을 써보는 것에만 일념으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만재 청년은 낮에는 나무를 해다가 장에 내다 팔아서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하여 드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나 아버지의 병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대소변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더욱더 심해지기만 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왔다. 오늘도 만재는 깊은 산에 가서 약초를 캐다놓고 아버지 곁에서 병구완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미음을 몇 숟갈 받아 자시더니 고개를 내저으시는 것이었다. “아버님, 무엇이든지 잡수시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해보십시오.”, “얘야, 참외가 먹고 싶구나.” 순간 만재 청년은 무척 당황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다 , 어디 구해보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왔다. 아버님이 잡수시고 싶다고 하는데 차마 구할 수가 없다고 말씀드릴 수 없어서 그렇게 대답은 하고 나왔으나 추운 겨울에 어디 가서 참외를 구한단 말인가? 이제까지 아버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드렸지만 추운 겨울에 참외를 구한다는 것은 정말 산에서 바닷고기를 구하는 것보다도 더욱 불가능함을 생각할 때 만재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한 걱정 속에서 몇 날이 지나갔다. 첫눈이 내려 온 세상은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만재는 참외를 구해 아버님께 드리지 못함을 애통하게 생각하며 팔을 베고 누워 걱정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꿈속에서 긴 도포자락에 흰 수염을 날리며 큰 지팡이를 든 노인이 나타나 만재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만재야, 뭘 그렇게 걱정을 하고 있느냐? 집 뒤편 나무더미 사이에 참외가 있느니라. 그걸 따서 아버님께 드려라!”, “? 참외가 우리 집 뒤뜰에 있다고요?” 너무나 기쁜 나머지만재는 꿈속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만재는 벌떡 일어나 뒷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흰 눈이 하얗게 쌓인 나무더미 곁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다가갔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흰 눈이 쌓인 나무더미 사이에 참외덩굴이 올라와 노란 꽃을 피우고 커다란 참외 한 덩이가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만재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참외를 따서 볼에 부비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참외를 잡수시고 난 후 아버지의 병환은 씻은 듯이 나았다. 정말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재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해서 하늘이 도운 것이다.

병상에서 일어난 노인은 만재의 지극한 효성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늙어 세상을 떠났다. 만재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르고 아버님의 묘소 앞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묘소를 지키며 맛있는 고기를 먹지 않고 좋은 옷을 입지 않고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밤이 되면 산속에 사는 호랑이 한 마리가 내려와 움막을 지켜주다가 날이 새면 산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또한 장에 가서 농기구를 사가지고 밤늦게 돌아오면 호랑이는 높은 고갯마루까지 마중을 나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꿈속에서 호랑이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가 지금 어느 골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나를 구해주시오.” 하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만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와 보았다. 매일 밤 호랑이가 있던 자리에 호랑이가 없었다. 일러준 장소로 쉬지 않고 달려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호랑이를 잡았다고 고함을 지르고 야단들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함정 속에 빠졌던 것이다. 만재는 호랑이를 덥석 끌어안으며 이 호랑이는 나의 호랑이니 잡지 마시오.”라고 외쳤다. 이 광경을 본 마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과 마을로 전해지게 되어 만재의 효행은 온 고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상주의 유명한 선비들은 만재의 효행을 칭찬해주도록 관가에 천거하였다. 관가에서는 만재의 효행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의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효자각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상주 고을 원님이 되어 오는 모든 원님들도 이곳 효자각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곳 왕실은 효자가 난 곳이라 하여 효곡(孝谷)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6) 송량(宋亮) 일가의 충효열(忠孝烈)

송량 일가 정려각에는 효자고처사여산송이해지려(孝子故處士礪山宋以海之閭) 절부고사인노경건처유인여산송씨지려(節婦故士人盧景健妻儒人礪山宋氏之閭)”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효자와 절부는 충효열로 이름 난 송량(宋亮) 일가의 자녀들이다.

상산의 숨은 선비 송량은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고 학문이 뛰어난 사람으로 천거함으로써 벼슬이 헌능 참봉에서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임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해 싸웠고 낙동강 가에 오현사(五賢祠-도남서원) 창건의 도청직을 맡았으며 덕동에 우곡정사(愚谷精舍)를 세워 백성 교화에 힘썼다.

아들 이회는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임란 때 사람들이 모두 피란을 가나 그는 혼자 향교에 달려가서 오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위패를 깨끗한 곳에 묻었다. 그리고 부모를 모시고 백화산으로 피했다. 어느 날 저녁 왜구가 몰려와서 부모를 해치려고 하였다. 이회는 앞서 달려가서 막아서며 대항해 싸우다가 애석하게 최후를 맞았다. 이때 이회의 아우 이필도 함께 참변을 당했다. 두 아들의 희생으로 부모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우곡의 딸이 노경건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남편도 왜적한테 피해를 입었다.

남편과 함께 내 비록 죽을지언정 너희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꾸짖자 화가 나 서 오른팔을 베어내도 변절치 않고 항거하다가 죽었다. 한 마을에서도 같은 날 참변을 당한 것이다.

한 집안에 효와 열의 두 절개가 있음을 모두가 칭찬하였다. 1698(숙종24)에 고을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적어 감사에게 올렸다. 1729(영조7) 가을에 효곡사 가까이 정려를 세웠다.

성현을 위하여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는 것은 정의요 부모를 위하여 힘을 다하다가 죽는 것은 효이다. 효와 의는 죽더라도 좋은 일이나 홀로 뒤를 이을 자손이 없으니 하늘의 뜻을 알기 어렵다.”고 정종로는 비문에 남겼다.

이회의 여동생 노실부인(盧室婦人)이 오빠인 이회와 같은 날에 죽었다. 같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니 한 집에 두 가지 절개가 있음이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백 년이 지난 뒤라도 이 앞을 지나는 사람은 절하며 이 아버지에 이 아들과 이 딸이 있다는 것을 새길지어다.”고 이증엽이 정려문에 써놓았다.

그리고 막내딸이 정이괄에게 시집을 갔는데 왜구를 피하여 호남 장수현에 들어가 살았다. 남편이 죽자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시어머니가 죽자 시아버지 곁에 장사지내고 자기도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은 시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인데 이제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명이 박한 이 한 몸은 또 어디로 갈 것인가하고 통곡하면서 목 매 죽었다.

아버지 송량은 의병을 일으켜서 나라에 충성하고 이들 이회, 이필 형제는 죽음으로써 부모를 살린 효행을 실천했다. 딸 노실부인은 정절을 지켰으니 열이며 정실부인은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시다가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었으니 한 집안이 충효열을 다했다. 아버지와 아들딸 다섯 사람이 행한 이와 같은 도리는 참으로 귀하고 드문 일이다. (송량일가 정려문 :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516)

 

. 낙동면

 

1) 분통골

낙동중학교의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 고려 말에 백암 김제 선생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해했다.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곧장 이 길로 집에 가거든 나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어 귀국할 수 없으니, 그렇게 전하라.”

하고 걸음을 되돌렸다 한다.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충성심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해마다 그 날을 제삿날로 정하고 슬피 통곡하였다. 그 후로 이 마을을 분통골이라 불렀다 한다.

 

2) 참나무배기

고려말엽 낙동강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마을 주위에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 이 나무로 인근 동민들이 달구지와 디딜방아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구를 만들어 사용해 왔으며, 참나무가 울창한 마을이라고 하여 참나무배기 또는 참나무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말 고종 초에 우의정의 중책을 맡아 안동김씨 세도정치 종언에 따른 긴장된 난국을 원만히 수습하고, 좌의정 봉조하(奉朝賀)에 오른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1867년 경 중동면 우물리에 은거하고 있었다.

상주는 서울에서 조령을 넘어 영남으로 이르는 길목이어서 높고 낮은 관원들이 오가는 길에 낙동을 지나게 되고, 낙동 나루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우물리로 봉조하(奉朝賀)인 그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 관례였다.

문안인사가 잦아지자, 그는 관원은 국가의 중책을 맡아 바쁠 것인데 내가 길 가에 나가 앉으면 그들이 편리할 것이다.” 하여 낙동 나루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러자 정말 문안 인사하기가 편해졌다. 그 후 그를 낙동강 가에 사는 대감이라 해서 낙동 대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자라바우

옛날 한 스님이 양진당에 찾아와 양진당이 곧 물에 잠길 것이니 대비책을 마련하라고 충고했다. 조 씨 문중 사람들은 불쾌하게 생각하고 이 스님을 내쫒아 버렸다. 그후 큰 홍수가 나고 스님의 예언대로 양진당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에 조 씨 문중에서는 그 스님을 찾아가 해결책을 묻게 되었다. 스님은 건너편 마을에 있는 자라바위를 한번 뒤집으면 물이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의 말대로 자라바위를 뒤집자 양진당은 원 상태로 복구되었다고 한다.

본래 자라 형상을 하고 있어 자라바우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 바위는 347번 지방도로를 개설하면서 한 번 더 뒤집혔다고 한다. 이때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고 하는데 본래의 모습은 확인할 수가 없다. 혹 고인들의 상석일 가능성도 있으나 전설대로라면 원 위치를 이탈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0년대까지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내곡리 326-2번지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4) 의우총(義牛塚)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낙동 강변에 권 씨(權氏) 집안이 살고 있었다. 부유한 편은 아니었으나 슬하에 자식(상복) 하나를 둔 단란한 가정이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집에서 부리던 암소가 새끼를 낳게 되었다. 송아지를 낳는 일이권 씨 내외에게도 기뻤지만 열 살 넘은 외아들에게는 더욱 기뻤다. 그 후, 송아지를 몰고 밖에 가 노는 것이 아들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송아지에 정신이 팔린 아들에게 부모는 우선은 공부해서 가문을 빛내는 일이 급선무라고 타일렀으나 아들의 정신은 송아지에게 더 있었다. 부모들도 외동아들이라 또한 강경하게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송아지가 황소로 변했고 상복이는 서당에 갈 때 소를 타고 다녔다. 서당이 파할 시간이 되면 황소도 미리 서당 앞으로 나올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상복이는 서당에서 늦게 귀가하게 되었다. 물론 그 황소를 타고였다. 어둠이 깔린 들판을 지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너무도 놀란 상복이가 그만 소잔등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호랑이가 돌진해 왔고 황소 역시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 얼마가 지났는지 모른다. 정신을 잃었던 상복이가 눈을 떴을 때는 두 짐승의 격렬한 싸움은 끝나 있었다. 호랑이는 황소 뿔에 찔려 죽어 있었고 황소 역시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상복이는 눈물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된 황소를 한동안 쓰다듬다가 집으로 달려갔다.

이 사실을 들은 부모와 동민들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보통 소가 아니구먼!”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질렀다. 의로운 소를 그냥 둘 수 없다

하여 권 씨 부부는 소를 묻어 주고 그 앞에 의우총(義牛塚)이란 비석을 세웠다.

 

5) 김일(金鎰) 따님의 효행

자산과 북천 일대는 임란 당시 조선 중앙군(순변사 이일)과 왜의 선봉 주력부대(소서행장-총대장)가 최초로 싸움을 벌였던 곳. 이 싸움에서 8백 여 우리 군인과 의병이 장렬히 순국한 호국의 성지이다.

낙동 화산사람 김일은 함락된 상주성을 되찾기 위해 향병 5백 여 명을 모아 북계 지금의 북천)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임진년 517, 김일은 출전에 앞서 죽기를 각오하고 옷깃에 신표(信標)를 해두었다.

낙애집(洛涯集) 에 의하면 김일의 따님은 꽃다운 나이 17세의 처녀로 아버지의 전사하신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너무나 애통하여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어 아버지의 시신을 모셔 와서 장례를 치러야겠다는 생각으로 먼 길을 서둘렀다. 집 일꾼을 앞세우고 자지러지는 어머니를 부축하여 허둥지둥 싸움터에 당도하니 아수라장이었다.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고 죽은 시체가 산같이 쌓여 있었다. 너무나 처참한 광경인지라 정신을 잃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병들의 눈을 피해가며 많은 시신 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시신들 틈에 몸을 숨기기도 하며 사흘 만에 가까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 순간 왜병들이 뛰어들어 어머니를 위협했다. 어머니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네놈들 때문에 죽은 지아비 시신도 못 모셔간단 말이냐?” 칼을 뺀 왜병 앞에 어머니는 조금도 굴복함이 없이 의연히 나서서 항변했다. “어디 죽이려면 죽여 봐라.” 하는 순간 칼이 번쩍이고 어머니는 푹 꼬꾸라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양민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인지 왜병들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느닷없이 어머니마저 잃은 처녀는 죽을 생각도 했으나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일꾼이 업어 모시게 하고 어머니는 자신이 업고 일어섰다. 피눈물을 닦으며 밤길 삼십여 리를 걸어 고향 장천(낙동면 화산리)의 옥산 뒷산에 안장했다. 조선 의사 김일의 무덤 조선의사김일지묘(朝鮮義士金鎰之墓)는 바로 의사의 고명딸이 바친 정성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부모님의 묘소 옆에 묘막을 짓고 시묘 살이 삼년을 자청했으나 여자의 시묘는 예법에 없다는 집안 어른들의 만류로 좌절되었다. 눈물로 삼년상을 마친 뒤 감역(監役) 김광윤(金光潤)에게 출가했다.

김일의 거룩한 순절은 뒤따라 많은 의병들이 분연히 일어나 나라사랑에 동참케 했다. ‘내가 아들로 태어났다면 원수 갚는 일에 이 몸 던질 테지만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손이 없으니 망극한 일이라 하였다.

왜란이 평정된 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김일에게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痛訓大夫 司憲府 執義)를 추증하고 충의단(忠義壇)에 입향케 했다. 정조(正祖) 때는 의사(義士)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의 딸을 효녀심청재생(孝女沈淸再生)이라 하여 칭찬하고 출생지(낙동면 내곡리)에 효녀각을 짓게 했다.

 

6) 물량리의 효자 김현윤

효자 김현윤(金顯潤)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른처럼 상례를 치렀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지켜 40여 년간 봉양하는데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에게 효를 다하기 위하여 술과 담배를 끊고 절약한 돈으로 과일과 고기 등 좋은 음식을 드리는 등 행실이 평범함을 초월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 살이 하는 등 지극한 효도를 다하였으며 상주 함창 지역에서 칭송이 자자하므로 1914년 상주군수 박해령(朴海齡)이 상소를 하여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1946년 김해김씨 문중에서 재건하였다. (김현윤 효자비 : 상주시 낙동면 물량리 883)

 

. 내서면

 

1) 북장사 파랑새와 괘불(掛佛)

상주 시내에서 서쪽으로 12킬로미터, 내서면 소재지인 신촌교에서 북쪽을 향하여보면 천주산 북장사(北長寺)로 가는 도로가 있다. 도로를 따라 걷노라면 어느새 북장사가 나타난다.

이 절에는 길이 12미터, 8미터의 거대한 괘불이 있는데 이 괘불을 보면 영험 있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 괘불은 절에 경사가 있을 때 또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의 대행으로 이 괘불을 건다고 한다.

 

괘불대정 무진년 조상 화주 만승남 정학(掛佛大幀 戊辰年 造像 化主 望勝男 情學)”

 

이라고 사적기에 적혀 있으니 1688년 숙종14년 때의 일이다.

이 괘불을 한번 걸려면 30여 명의 인력과 많은 장대 등의 재료가 들어서 거액의 경비가 소요되어 꼭 걸어야 할 시기에도 중지한 예가 여러 번 있다 한다. 이토록 크기가 거대한 괘불에는 남다른 내력이 전한다.

옛날 당나라에서 왔다는 스님 한 분이 북장사를 찾아왔다. 그 스님은 탱화를 그리는 유명한 화승(畵僧)이었던 모양이다. 마침 이 절에서 거대한 탱화를 제작할 참이었는데 그 스님이 찾아 왔으니 주지 스님은 그를 반겨 맞아 주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3일 동안 이 법당 안에서 일을 할 것이니 잡인을 금하고 들여다보지 말도록 하여 주시요.” 북장사 주지에게 이 말을 일러 놓고 그는 법당으로 들어갔다.

절 경내에는 솔바람소리만 일렁일 뿐 고요가 깃들기 시작했다. 잡인을 금하라고 했으니 절 주지는 될 수 있으면 법당 뜰을 거닐지 못하도록 일러두었다. 그날따라 법당은 더없이 고요하고 쥐죽은 듯 고요했다.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리기에 저토록 쥐 죽은 듯 고요할까? 아니 왜 그토록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을까?’

법당 뜰을 쓸던 부목승은 허리를 펴면서 의아한 생각에 젖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로 여겨졌다. 일을 하면 무슨 소리라도 들릴 텐데, 저토록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다니, 빗자루를 멈추고 또다시 의문에 잠기는 부목승이었다.

주지 스님이 또한 들여다보지 말라 하였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러나 참으로 궁금하단 말이야.”

부목승은 자기도 모르게 법당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순간 이건 분명히 엉터리일 것이다. 도대체 뭣을 하고 있는지 한번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품은 부목승은 주지 스님의 엄명도 잠시 잊어 버렸다.

부목승은 살그머니 법당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구멍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아, 대체 이게 어인 일인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스님은 간 곳이 없고 다만 파랑새 한 마리가 목을 돌리더니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부목승은 깜짝 놀라며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법당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 보아도 스님은 간 곳이 없었다.

절이 발칵 뒤집혀졌다. 그러나 이어하리요. 괘불의 오른손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사라진 스님을 탓할까? 한쪽 팔이 없는 이 거대한 괘불의 마음은 경솔한 인간을 한탄하고 있을까? 천주산 기슭엔 오늘도 파랑새의 한 맺힌 울음이라도 품듯 고요하기만 하였다.

 

2) 쌀 바우

옛날 서만리 바깥 장서 바우 뒤에 절이 있었다. 이 절의 뒷산에 있는 큰 바위의 구멍에서 사람 숫자만큼의 하루치 밥 분량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손님이나 신도들이 많이 오는 날에는 정확하게 불어난 숫자만큼 분량의 쌀이 나왔다. 어느 날 욕심 많은 승려가 탐이 나 쌀 바위의 구멍을 크게 뚫고자 하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이후로는 쌀이 전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신도들의 발길도 줄어들고 나중엔 절조차 무너져 버리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전해지고 있다.

 

. 모동면

 

1) 백화산 백화암

백화산 아래 보문에 있었다는 절. 문유채(文有采)는 상주 사람인데, 일찍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하다가 집에 와 보니 부인 황 씨가 실행(失行)하여 딸을 낳았으므로 쫓아냈다. 황 씨의 집안에서 문생(文生)이 아내를 죽였다고 생각하여 고발하니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문생은 7년간 옥살이를 했다.

상서(尙書) 조정만(趙正萬)이 상주목사가 되어 전말을 알고는 황 씨를 찾아 죽이니 문생은 석방되었다. 선생은 출가하여 지산사(止山寺)에 살았는데, 벽곡법을 행하여 열흘씩 안 먹기도 한고 한꺼번에 대여섯 되를 먹기도 하였다.

문생은 하루에 사오백 리를 걸을 수 있고, 얇은 옷 하나로 겨울을 나기도 했는데, 경술년 겨울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있을 때는 큰 눈이 왔는데도 얇은 옷 하나만 입고 찬 데서 잤다. 신광사에 사흘을 있었는데 밥을 먹지 않아서 중들이 걱정을 하자 쌀 한 말의 밥을 앉은 자리에서 다 먹었다. 그가 신광사를 떠날 때 걸음 빠른 중이 그의 뒤를 밟아 비로소 문유채 임을 알게 되었다.

문생은 어느 해 겨울에 산꼭대기의 폐사에 들어갔는데 모두들 그가 동사했을 것이라고 했으나, 이듬 해 봄에 올라가 보니 그는 주린 빛도 없이 암자에 앉아 있었다.

불경을 계속 읊고 있는데 혹 불경에 대해 논하려고 묻는 자가 있으면 다만 읽을 뿐 알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문생은 백화암(白華庵)에 있다가 마가암으로 옮겨서 죽었다고 전한다.

 

2) 임천석대

고려 말 악사(樂師) 임천석이 고려 패망 후 이 곳에 은거했는데, 조선 태종이 음률을 잘 한다는 말을 듣고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대 아래 깊은 물에 떨어져 죽은 곳이라고 전한다. 특히 상산지에는 원효사(元孝寺) ()이 불쌍히 여겨 밥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 에는 신라 때 일로 전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21(1797) 213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 온다.

전 지평 김광우(金光遇)가 상소하기를, ‘옛날에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까지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성취하고 수립한 것이 우주 간에 빛났으나, 명성과 지위가 없어 포양(褒楊)할 수 없으니,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그 충렬을 드러내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라고 전한다.

 

3) 거북바위

모동면 수봉리 앞들(속칭 반시이들)에 거북바위가 있다. 이 거북바위는 몸체를 움직일 수 있는데 가리미(동명) 쪽으로 머릴 돌려놓으면 불상사가 일어나거나 처녀총각이 도망가는 변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아마 거북바위 형상이 음경을 닮은 데서 불()바위란 생각을 이곳 주민들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 모서면

 

1) 금은골

마을 뒷산 너머에 순 암벽으로 된 나지막한 산이 있고, 입을 반쯤 벌린 듯 한 큰 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수십 명이 피난을 했다고 한다.

또 이 굴 속에서 한 부부가 살았다. 식량이 떨어져 고심을 하다가 우연히 굴속에 오목하게 파인 곳이 있어서 그 곳을 손으로 만지니 두 부부가 먹을 만큼의 식량이 나왔다. 하루는 손님이 열 명이 와서 또 그 곳을 만지니 열 명이 먹을 만큼의 식량이 나왔다. 꼭 사람 수만큼의 양식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부는 욕심이 생겨 그곳을 파헤쳤더니 그 후로는 한 톨의 양식도 나오지 않았다 한다.

 

2) 남매 바우

옛날 두 남매가 나붓재를 넘다가 오라비는 큰 바위를 길에서 뽑아 재 옆으로 치우고 누이는 먹을 것을 구해 오기로 했다. 누이가 양식을 구해 와 보니 오라비가 바위 옆에서 혼수상태가 되어 있었다. 누이는 오라비를 살리려 노력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하자 그 곳에서 같이 죽었다. 그래서 남매바우라 한다.

 

3) 박선간 효자각

옛날에 아버님을 따라 죽어간 효자 한 사람이 있었다. 모서면 득수 2리 속칭 유방리 들판 한 가운데 박선간 효자각이 위치하고 있다. 이 효자각을 세우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옛날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마부로 생활해 나가는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박선간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선간의 아버지는 어느 해 몹쓸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된 후 10여 년간이나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선간은 아버지를 간호하였다. 이곳저곳 다니며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정묘년 3월초) 박선간이 집을 비우고 없는 때에 집에 불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간은 부랴부랴 집에 도착하였으나 아버지는 이미 불에 타 돌아가신 뒤였다. 이에 선은 자기의 불효함을 후회하면서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죽었다. 동네 사람들이 감탄하여 통곡하고 그의 효성을 조정에 아뢰니 조정에서도 이런 효자는 보기 드물다하여 효자라 하명하였다. 그 후 득수 동민은 그 자리에 효자각을 지었다.

효자각을 지은 지 수백 년 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허물어지게 되자 득수 동민들은 의견을 모아 정미년 5월에 다시 지었다. 그 후부터 동민들은 음력 1030일이 되면 동민 전체가 모여 박선간의 효도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4) 민치문(閔致汶)의 정효각

여흥인(驪興人) 효자 민치문은 묵헌(黙軒) ()의 후손으로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슬하에서 성장했다.

계모는 타고난 성품이 고약하여 전실 소생인 치문에게 온갖 학대를 가하였으나 한 번도 불응한 일이 없었다. 더구나 성질이 편벽하여 섬기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온갖 정성을 다하여 계모를 섬겼다. 이복동생도 친동생같이 아끼고 사랑했으며 자상하게 돌보아 주었다.

부친의 몸에 종기가 나서 여러 달을 고생하였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병을 낫게 하였다. 계모가 세상을 떠나자 애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산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같이 시묘를 했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은 아우와 상의하여 행하되 모든 범절이 어른과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그의 지극한 효성은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주위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1895(고종32)년에 민치문의 이같이 갸륵한 효행을 전해들은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동몽고관(童蒙故官: 동몽훈도(童蒙訓導)라고도 함. 조선 초 어린이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군현(郡縣)에 두었던 관직)의 벼슬을 내려주고 정려(旌閭)를 세우게 했다. 그 이듬해에 효자각을 건립하였다. (민치문 효자각 : 상주시 모서면 정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