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상주의 아동문학

상주의 아동문학 연재(2)

빛마당 2017. 2. 25. 16:25

5장 상주의 문학

 

1절 읍성국가시대의 상주문학

전장에서 이미 밝혔지만 앞서 밝힌바 아동문학의 범주(範疇)와 영역을 전래동요 및 전래동화까지 포함한다면 삼국시대 이전의 민요 및 설화로부터 그 아득한 사적 계보를 들추어내어야 될 것이다.

다만, 우리의 고전아동문학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라는 양식적 분화(樣式的 分化)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일반문학 속에 거의 섞여있다는 사실, 특히 기록문화 쪽보다는 구비문학적 전통 속에 그 자취와 계보를 온전히 담고 있다는 사실이 한 특성으로서 지적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고전아동문학 나아가 상주의 고전 아동문학도 멀리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이미 고대 부족국가시대로부터 제천 행사를 행하여 왔다. 제천 행사(祭天行事)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제, 10월제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추수 감사제 성격을 띤다. 제천 행사 때 백성들은 며칠씩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즐겼고, 나라에서는 형벌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석방시켰다고 한다. 힘든 농사일을 마치고 난 후에 모든 사람이 어울려 공동체적인 축제를 즐겼다. 모든 의식은 부족 전체의 행사로, 상고 시대 부족들의 종교· 예술 생활이 담겨 있는 원시 종합 예술의 형태를 띠고 있어 예술의 기원으로도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1. 전설과 설화

우리 민족에게는 수많은 설화와 전설이 구전되어 왔다. 이 설화와 전설은 재미있는 이야기 꺼리로 많은 이들에게 들려졌고, 그 즐거움으로 인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지방 역시 수많은 설화와 전설들이 전하여 왔다. 지금까지 상주 전설로 가장 오래된 것은 사벌국 관련의 왕활교(王活橋) 고녕가야국 관련의 대가산(大駕山) 전설을 비롯하여 상주 지형과 관련된 행주(行舟)전설, 공갈못(公儉池)과 관련된 매아(埋兒)용투(龍鬪)용경(龍耕)전설, 견훤과 관련된 전설 등이 있다. 이들은 다 구비문학으로서 후대에 상주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상주의 전설은 우리나라 구비문학이 그러하듯 그 내용이 방대하게 분포되어 있을 뿐 만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어떤 기준에 의해 범주를 정하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전설은 대체로 그 전승 장소에 따라 지역전설과 이주전설로 나누어진다. 지역전설은 특정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전설로서 그 지역의 지형적 특징, 명칭의 유래, 관습의 기원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내용의 전설이 여러 지역에서 함께 발견될 때 이를 이주전설, 즉 광포전설이라고 한다.

또 한 전설은 발생목적에 따라서 설명전설, 역사전설, 신앙전설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설명전설은 자연이나 사물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설명할 목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역사전설은 어떤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전설의 시공간이 확장됨에 따라 향토적, 국가적 영웅전설과 야담(野談), 야사(野史) 등이 해당된다. 신앙적 전설은 민간신앙에 기초한 것으로 금기를 알려주는 전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전설의 성격을 결정짓는 커다란 조건은 지역성과 역사성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 정도에 따라 전설의 성격이 결정된다. 두 가지 요소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또는 어느 한쪽의 자취가 없게 되면 전설은 그 모습이나 성격을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설이 향토사담(鄕土史談)을 기본 성격으로 삼고 있기는 하나, 이 두 가지 요소에 따라 많은 변화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역성의 비중이 크면 지역전설범주로 분류하여 각 지역별로 정리하였고, 역사성이 강하면 역사전설범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여기 수록한 것은 상주전설의 일부분이다. 다만 앞으로 기존 자료와 함께 활발한 채록을 통하여 상주전설에 대한 구체적이고 면밀한 조사 작업이 꾸준히 이어져야 할 것이다.

상주에는 두 읍성국가가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벌면 금흔리를 중심으로 하여 사벌국(沙伐國)이 존재하였다가 신라 점해왕(재위 247~261)이 병합하여 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거니와 함창 지방에는 고녕가야국(古寧伽倻國)이 존재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만으로 이 시기의 문학을 논하기는 사실상 어려우나 구비문학으로서 설화가 있어온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 사벌국 전설전설

 

먼저, 사벌국과 관련된 설화부터 보기로 한다. 사벌왕 현몽(沙伐王現夢) 설화가 있다.

사벌국의 국도(國都)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벌 왕릉이 옛 사벌촌 서쪽 수백 보의 둔진산 밑에 있어 구릉(丘陵)이 오뚝하고 단장(壇場)이 무너졌으며, 곁에는 석탑(石塔)이 있어 옛 노인들이 왕묘(王墓)라고 전해 왔다. 강희(康熙) 임자년(壬子年1672)에 목사 이초로(李楚老;재임 1668.2~1669.6)의 꿈에 옥대를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고하기를, ‘나는 사벌왕이다. 능히 사벌에 있는데 소와 양이 침범하니 그대가 금지시켜 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 목사가 깨어나 기이하게 여겨 고을 사람을 불러 묻고 비로소 능이 있는 것을 알고 크게 봉축을 하였다. 그 촌의 들판에 돌다리(石橋: 현재는 농토로 변하여 없어짐)가 있는데 민간에서 왕활교(王活橋)라 일컫는다. 이는, 이 다리 밑에서 왕이 적을 피하였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향지에 실렸으나 오랜 동안 상주에 전해진 설화로 사벌 왕릉과 왕활교의 설화이다. 이 같은 설화는 사실을 기다리는 하나의 가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설화는 간단하나, 이 설화가 상주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으니 상주는 사벌국의 국도였다는 자부심이 그것이다. 또한, 사벌왕성(沙伐王城)에 따른 설화가 있다.

 

병풍산에 옛 성이 있으니 세인이 전하기를 사벌왕이 쌓은 성이라 한다. 그 가운데 하나의 못()과 세 개의 우물()이 있다. 동쪽 성 밖은 깎아지른 절벽이 백 길이나 되는데 세인 이 전하기를 성 안에 물이 부족하면 물수레(水車)로 강물을 끌어서 성으로 넣었다 한다. ”

이 설화 역시 사실을 아직껏 고증을 못한 것뿐이다. 특히, 읍성국가 시대부터 물수

(水車)를 이용하였다는 전설 속에는 상주의 문명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음을 알게 하는 단서도 된다. 한편, 함창은 6가야의 하나로 고녕가야국이 있었던 지역인 만큼 가락국 탄생 신화와 직결된 구지가(龜旨歌迎神君歌)가 일찍부터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해 둔다.

. 고녕가야(古寧伽倻) 전설과 설화

1) 고녕가야왕(古寧伽倻王)의 강생(降生)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 임인(壬寅) 3월 첫 번 째 사일(巳日 : 액을 덜기 위해 목욕하고 물가에서 술 마시던 계곡일(稧浴日))9(9: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이 살던 곳(9이 수장으로 통솔했던 백성은 1백호 75천명이었다)의 북쪽 구지봉(龜旨峰)에서 사람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에, 9간과 마을사람 수백 명이 거기로 모였는데 사람 소리는 났으나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지봉에서

거기 누가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다시 말이 계속 되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봉입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시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 하셨다. 너희들은 이 산꼭대기를 파라. 그러면 곧 하늘에서 온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매우 기뻐 춤추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파며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을래.’ 하며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우러러 하늘을 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줄끝을 찾아보니 붉은 비단이 둘린 보자기에 금함이 싸여 있고 그 안에 여섯 개 금란(金卵)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고 기뻐하며 수없이 절을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我刀千)의 집으로 돌아와 탑()위에 두었다.

12일을 지난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합을 열어 보았다. 알 여섯이 모두 변하여 어린애가 되어 있었다. 용모가 무척 기이했으며, 이내 평상에 앉았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어린애는 나날이 자라 열 며칠이 지나자 키가 9척이나 되었으며 용모는 단정하였다.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그 중 제일 먼저 강생한 수로(首露)를 왕으로 삼아 금관국(金官國)을 세우게 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을 각각 가야국 왕으로 삼았으니, 성창(成昌)이 고녕가야, 성안(成安)이 아라가야, 고녕(高靈)은 대가야, 성주(星州)는 벽진가야, 고성(固城)은 소가야가 되었다.

금알에서 태어났다 하여 금성(金姓)이라 하였으며 함창에 세운 고녕가야의 후손을 함령(咸寧) 또는 함창김씨(咸昌金氏)라 부르게 되었다.

고녕가야국(古寧伽倻國)에 관하여 삼국사기권 제34고녕군(古寧郡)은 본래 고녕국인데 신라가 이를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古陵縣 이라고도 한다)으로 만들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며, 지금의 함녕군(咸寧郡)이다. 3개의 영현이 있으니 가선현(지금의 加恩縣), 관산현(지금의 聞慶縣), 호계현(지금의 虎溪縣)이 그것이다.”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 오가야(五伽倻) 항과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 고녕가야(古寧伽倻) 즉 함영(咸寧), 지금의 함창(咸昌)임을 밝히고 있다. 함녕은 고려 광종(광종) 때 개칭된 이름이며, 현종 9(1018) 및 조선조 태종 때엔 함창(咸昌)이라 하였다.

 

2) 대가산 설화

 

또한, 함창 지방에는 고녕가야국과 관련된 설화로 대가산(大駕山) 설화가 있으니, “대가산은 군의 서쪽 7 리에 있는데 민간에서 전하기를, 가야왕(伽倻王)이 이곳에 행차하여 놀았기에 대가산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 “정화지(井花池)는 군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일명 상감지(上監池)라고도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가야왕(伽倻王)이 일찍이 이곳에 행차하여 놀았기에 상감지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두 설화가 다 고녕가야국의 왕과 관련된 설화들이다.

2. 상주의 대표 설화

 

. 공갈못 설화

 

1) 매아설화埋兒說話)

 

옛날 공갈못을 만들 때, 사방의 물이 하도 많아 둑을 쌓으면 터지고 하여 공갈이란 아이를 못 둑에 묻고 쌓아 이루었으므로 공갈못이란 이름이 되었다고 홍귀달(1438-1504)명삼정기(名三亭記)에다 기록해 두었다. 그 뒤로 공갈이를 묻은 연유에 대해서는 남들이 다 제방 쌓는 부역을 할 수 있었는데도 공갈이 집은 할 수 없어 아이를 내 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갈못을 축조할 때 물이 너무 많아 막을 수가 없자 공갈이를 묻고 쌓았더니 둑이 완성되었다. 또한, 못 둑을 쌓으면 터지고 하여 스님을 기둥으로 삼아 둑을 쌓았 더니 완성되었다.”

2) 인주설화人柱說話)

옛날에 한 스님이 공검지 주변 마을에 시주를 나갔다. 그러나 공갈못물이 말라 흉년이 든 마을에서 공양미를 시주받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마을에는 어린 아이들 만 남아서 집을 보고 있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공갈못 둑 쌓는 일에 총동원되었다. 공갈못 둑은 물이 많아서 쌓으면 연신 터졌으므로 동민들은 큰 걱정 중이었다.

스님은 공사현장에 나아가 굶주린 백성들의 참상을 보고 목이 멨다. 둑에 비해 못물이 많아 걸핏하면 터져서 마을 사람들의 걱정이 불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스님은 무거운 말문을 열었다. “사람을 못 둑 복판에 세우고 쌓으면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합장을 거듭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 일은 애당초 될 일이 아니었다. 스님은 며칠 지나 다시 와서 쌓고 있는 못 둑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우뚝 섰다. 그리고는 비장하게 나를 기둥으로 삼아 못 둑을 쌓으시오.” 했다. “스님, 안 됩니다. 죄를 지으면서까지 못 둑을 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가서 스님을 움직이려 했으나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사람을 묻지 않으면 못 둑은 영영 완성되지 못한다.’는 스님의 간곡한 말을 듣고 눈시울을 붉힌 채 스님을 기둥 삼아 둑을 쌓아 완성하였다. 그 뒤로 못 둑은 무너지는 일이 없었다. 가뭄에도 걱정 없이 농사를 짓게 되어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거룩한 살신의 보시를 행한 스님은 부처의 화신이었다.

 

3) 용갈龍耕)이 전설

 

음력 정월 14일 겨울밤인데도 못 근처의 소들이 땀을 흘린다. 그것도, 소들이 밤을 새워 공갈못의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또한, 공갈못이 겨울이면 얼음에 일자(一字)로 금이 그어지는데, 이는 용이 얼음을 간 흔적이라 하여 용갈이가 동서로 뻗치면 그 해는 풍년이 들고 남북으로 뻗치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일설에는, 용갈이가 잘고 고르게 얼음이 갈라지면 풍년이 들고 굵고 성글게 갈라지면 흉년이 든다고도 하였다.”

 

4) 쌍룡연투설화(雙龍戀鬪說話)

 

상주에 사는 김()이란 사람이 경주에 갔다 오는 길에 아리따운 미녀를 만나 길동무가 되었다. 김은 처녀가 너무 아름다워 불길한 예감에 공포마저 느끼었다. 대구가 가까운 오명원(午鳴院)에 도착하니 미녀가 갑자기 물을 이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물을 방안에 쏟으며 황룡으로 변해 버렸다. 얼마 뒤 다시 미녀로 변신한 황룡이, ‘나는 경주 용담에 있는 용녀인데 지금 공검지에 가면 그 못에 있는 암룡과 싸움이 일어날 것이니, 당신은 나를 도와주시오.’ 하였다. 김은 놀라서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겠느냐고 하니, 용녀가 말하기를 모월 모시에 공검지에서 세 용이 싸움을 할 것인즉 청룡은 숫룡 즉 나의 남편이 될 용이요 황룡은 나요 백룡은 나의 출가를 방해하는 암룡이니 그 백룡을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김은, 용녀와 약속을 하고 싸움이 있을 날에 공검지로 갔다. 과연 세 용이 결사적으로 격투를 시작하였다. 김은 급히 칼을 빼어 백룡을 내리쳤으나 당황한 나머지 잘못하여 청룡의 허리를 자르고 말았다. 청룡이 피를 쏟으며 물속으로 잠기자 황룡이 나타났다. 김을 향해 남편을 죽인데 대해 몹시 원망하더니, 자기를 과부로 만들었으니 대신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김은, 집에 가서 부모형제와 처자를 작별하고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공검지를 떠났다. 집으로 가던 도중 갑자기 열이 오르고 전신이 아파 집에 도착한 이튿날 죽고 말았다. 김의 식구들이 크게 놀라 무당에게 물으니 용신의 장난이라고 하였다. 못 가에 단을 쌓고 무당에게 굿을 시키었다. 그때 못 속에서 황룡이 나타나더니, ‘나는 당신이 오기를 고대 하였는데, 이제야 오는구려.’ 하면서, 흡사 사람을 껴 안듯하며 다시 못 속으로 들어갔다.”

위의 세 설화는, 공갈못((恭儉池) 축조와 농사와 연정과 연관되어 한 못에서 파생한 설화들이다. 그리고 이 못에서는 공갈못 연밥따는 노래 채련요(採蓮謠)가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불리고 있다. 실로 이 민요가 언제부터 불러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어, 못의 축조 시대에 생긴 노래로 여겨진다.

 

채련요(採蓮謠)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녀야

연밥 줄밥 내 따 주께

이내 품에 잠자 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가요

 

이 외에도 공갈못과 그 주변에 대한 설화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5) 우경설화(牛耕說話)

 

음력 정월 14, 겨울밤인데도 못 근처에 있는 소들은 땀을 흘린다. 그것은 소들이 밤을 새워 공갈못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 한다.

 

6) 공갈못 크기 설화

 

볶은 콩 한 되를 하나씩 먹으며 지반을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 볶은 콩 서 되를 하나씩 먹으며 말을 타고 지반을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고 하는 공갈못 크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7) 지형(地形) 설화

백곡(百谷)의 물이 이 못으로 흘러 들어오면 당상(堂上)이 날텐데 구구속수(九九谷水)가 들어 와서 당상이 나지 못했다.

 

8) 공갈못 구경 설화

 

죽어서 저승에 가도 상주함창 공갈못을 구경하고 왔느냐?”고 물어서 구경치 못

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쫓는다고 한다.

 

9) 용을 잡은 이여송(李如松)

 

선조 임진왜란에 이여송이 이곳을 지나다가 제방을 끊고 발을 대어 잉어와 용을 잡아먹고 갔다는데 지금도 호반의 북쪽 한 지점(경북선 철교가 놓인 자리)이여송의 발 자리라 부른다.

 

10) 지킴이 건드려 메워진 공갈못

어느 해 가뭄이 심하여 공갈못 물이 다 마르고 겨우 한복판에 물이 조금 고여 있는데 모든 물고기가 다 모여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물을 쳐서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그 중 한사람이 걷어 올린 그물에 누런 송아지 같은 형상의 알 수 없는 물짐승이 잡혔는데 잡아들고 가지도 못하고 겨우 끌어갈 지경이었다. 모여든 사람들의 공론이 분분하여 결정도 짓지 못하던 차에 갑자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쳤다. 억수같은 비가 내리고 못물이 불어나 가득 잠기면서 잡아두었던 물짐승을 그대로 못에 두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공갈못이 차츰 흙으로 메워지기 시작하여 지금처럼 못이 모두 논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물짐승 즉 공갈못의 지킴이를 사람들이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11) 잉어명당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왕릉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능골이라는 곳에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연산군 때 대사헌을 지낸 퇴제 권찰도의 묘가 바로 잉어명당자리라고 한다.

이 묏자리를 볼 때 무학이라는 지관이 이 자리를 가리키며, “이곳은 명당이니 너무 깊이 파지 말고 묘를 쓰시오.” 하면서 자손들에게 퇴제의 묏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리고 거듭거듭 당부하기를 두 자 이상 파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퇴제의 자손들은 관을 깊이 묻는 것이 자손 된 바른 도리라 여기고 지관의 당부를 무시한 채 깊이 파내려 갔다.

석 자쯤 팠을 때 갑자기 큰 잉어 한 마리가 튀어 나와서 앞에 있는 연못으로 들어

가 버렸다. 놀란 자손들이 지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그 연못물을 퍼내고 잉어를 다시 잡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잉어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장사지냈다. 이미 잉어가 튀어 나갔기 때문에 명당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줄로만 알았는데, 퇴제의 아들은 후에 손자까지 줄곧 높은 관직에 올랐다.

해방되기 전 명당 앞의 잉어가 들어간 연못을 메웠더니 그 앞들은 해마다 가뭄이 들어 흉년 농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그 자리에 조그만 웅덩이를 팠더니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12) 못물 설화

 

공갈못에는 뱀()과 거머리가 없다.

 

. 은자(銀尺) 설화

상주는 신라 통일 이전부터 사실상 신라의 제2의 수도라 할 만큼 군사적경제적지리적 위치가 주요한 고도(古都)요 웅주(雄州)였다.

525(법흥왕12)에는 사벌주에 상주(上州) 주치소를 두었는데 이 상주(上州)의 고기(古基: 옛터)가 상주 은척(銀尺)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상주(上州)의 고기(古基)가 주의 북쪽 45리 은성촌(銀城村銀尺)에 있는데 촌의 아래 창 기(倉基 : 창고터)와 아대(衙垈 : 관아터)가 있다.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 라 문무왕이 품일(品日)충상(忠常)의복(義腹)을 상주총관(上州摠管)으로 삼아 대장 김유 신(金庾信)18()으로 하여금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을 돕게 하여 깨뜨렸 다.”

 

이 설화는 역사적 사실을 향토사에서 기록화한 것이다. 장수들은 실제의 역사 인물로 상주의 목민관들이었으나 은척이 상주(上州)의 옛터란 사실은 현재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고고학적 성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단지, 은자(銀尺) 설화가 남았으니,

 

옛날 신라에는 금은(金銀)으로 된 두 개의 자가 있었는데, 이들 자는 목숨을 연장

시키는 자들이라 인구가 계속 불어나 살기가 어려워지자 나라에서 이 두 자를 영원

히 감추기로 하였다. 그래서, 금자(金尺)는 경주에 묻고 은자(銀尺)는 상주(上州)

은성촌(銀城村銀尺)에 묻어서 면()과 산(: 은자산)의 이름이 생겼다 한다.”

 

라는, 설화가 있고 현재도 은자산이 있다.

 

. 사불산 연생설화 및 당교설화

 

또한, 상주는 일찍부터 불교도 성행한 곳이라 불교 관련의 설화도 많다. 사불산(四佛山일명 功德山; 현재는 문경시 권역)에는 587(진평왕9) 대승사(大乘寺) 창건의 설화가 있다.

 

죽령(竹嶺)의 동쪽 백 리 가량 되는 곳에 높이 솟은 산이 있었는데, 진평왕 9년 갑신(丁 未587)에 문득 사면이 한 발이나 되는 한 큰 돌이 나타났다. 사방여래(四方如來)의 상이 새겨지고 모두 홍색의 비단으로 쌓여 있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그 산꼭대기에 떨어진 것 이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쳐다보고 절하고는 드디어 절을 그 바위 곁에 세우 라고 분부하여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法華經)을 외는 중(이름은 전하 지 않음)을 청하여 이 절을 맡겨서 깨끗이 쓸어 돌을 공양하고 향불을 없애지 못하게 하였 다. 그 산은 역덕산(亦德山)이라 하는데 혹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중이 죽어서 장 사 지냈더니 그 무덤 위에서 연()이 났다.”

 

이 설화는, 사불설화(四佛說話)와 연생설화(蓮生說話)의 두 설화로 구성되었다. 이 설화는 이차돈 순교(527법흥왕14) 60년 만에 생겨난 불교설화다. 대승사 창건의 신성시는 당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신앙심과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은 자명하다.

또한, 공덕산(功德山) 미면사(米麵寺白蓮社)에는 용녀설화(龍女說話)와 미면설화

(米麵說話)가 있으니,

 

옛 절이 있으니 미면사(米麵寺)를 일명 백련사(白蓮寺)라고도 한다. 대개, 의상대사(義湘 大師)가 머물러 설강할 때에는 용녀(龍女)가 늘 모시었는데, 뜰 가운데 좌우에 우물이 있 어 한 곳에서는 쌀()이 나오고 한 곳에서는 국수()가 나오길 날로 같아서, 비록 바다 같은 대중을 공양하더라도 오히려 다함이 없었다. (중략) 백련사(白蓮寺)의 유래를 물으 니 그곳 사람들의 말이 원효(元曉) 성인이 이곳에 거처하면서 법화경을 강론하자 흰 연 꽃이 땅속에서 솟아나, 그래서 이름을 백련(白蓮)이라고 했다.”

 

는 설화가 있다. 이와 같은 설화는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도 충분한 매체 구실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에 얽힌 설화로 당나라 소정방이 김유신의 꾀에 죽었다는 당교설화(唐橋說話)가 있다.

 

, 신라 고전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하여 머물렀다. 유신은 그 음모를 알고 당병을 초대하여 짐주(독주)를 먹이니 모두 죽었음 으로 구덩이에 묻었다. 지금 상주 경계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곳이 그를 묻은 땅이라 한다.”

 

설화야말로 사실을 기다리는 역사적 가설임을 감안할 때 이 당교설화 역시 사실로

정착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화 자체로서도 상주인에게는 대단한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 문학가들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을 제고시키는 매체가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 견훤설화

이 시기는, 668(문무왕8) 고구려가 망하고 명실 공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신라가 망할 때까지이나 918년에는 이미 고려가 개국하여 신라의 말기는 사실상 그 국운이 고려에게 좌우되었다 하겠다. 그런, 신라의 찬란한 문화는 이 시기에 이룩되었고 상주 역시 신라 9(685년 신문왕 5)의 하나로 757(경덕왕 16)에 상주(尙州)로 개칭되고 1() 10() 30()을 관장하는 대읍으로서 정치·행정군사산업문화의 제 분야에 어느 지방보다도 선진하였을 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크게 발전하였을 것은 추측되나 문헌 기록이 없어 그 자세함은 알 수 없다.

상주는 후백제왕 견훤의 고향(상주 가은)인 만큼 그와 관련된 설화가 많다는 사실이다.

먼저, 호유설화(虎乳說話)부터 보도록 한다.

 

견훤은 상주 가은 사람이다. 본 성은 이()인데 뒤에 견씨(甄氏)로 바뀌었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부로 자활하였는데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나서 젖먹이일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아버지 에게 밥을 갖다 날랐다. 아이를 수풀 아래에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여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상히 여기었다.”

 

이 설화는 견훤이 비범한 인물임을 드러내는 영웅설화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설화로 지렁이설화(蚓子說話)도 있으니,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살고 있었는데 딸 하나가 있었으며 모습이 단 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양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에 와서 관계 합니다 하니, 그녀의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기를,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 에 꽂아두어라 하였다. 딸은 그의 말에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북쪽담 밑에서 찾아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 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

 

라고, 하였다. 이 설화는 천룡(天龍)이 되지 못하고 지룡(地龍)에 그칠 뿐인 운명을 예시하거나 또는 결과론적 탄생에 대한 설화라 할 수 있다. 이 설화와 주지가 같은 설화에 상주 지방의 설화에는,

 

견훤의 어머니가 처녀 시절에 가은의 가동아의리(加東阿义里)에 살았는데, 미남 소년이 밤을 타서 와 사통하고 새벽이 되면 홀연히 가 버렸다. 처녀가 괴이히 여겨 문의 자물쇠를 굳게 잠갔으나 오고 감이 여전하였다. 처녀가 명주실로 그 허리를 묶고는 새벽이 되어 가 서 찾으니 사면이 깊은 계곡 중의 묵은 옹기() 속으로 들어가, 옹기 뚜껑을 열고 보니 10여 자나 되는 거대한 지렁이였다. 이 절이 추심사(推尋寺)란 이름을 얻은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랴.”

 

, 말 바우(馬巖)설화와 아차동 설화(鵝釵洞說話)도 있다.

 

농암(籠岩) 궁터(宮基里) 입구의 용추 가에 말바우(馬巖)가 있는데, 견훤이 용마를 얻은 곳이다. 젊은 날 견훤이 용추변을 거닐고 있었으니, 오색 운무가 자욱하면서 바위 쪽에 서 말울음소리가 났다. 견훤이 바위에 올라가 용마를 얻었는데, 말도 주인을 만난 듯 좋 아하였다. 견훤이 기뻐하여 말의 걸음이 얼마나 빠른가 시험하고자 적지산을 향하여 화 살을 날리고, 가은 아차동에 왔지만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견훤이, 말이 늦었다고 생각 하여 말머리를 베는 순간 화살이 그제야 날아왔다. 견훤이 후회하며, ‘시기가 불리함이 여 <시불리혜(時不利兮)>, 장차 내 어이할꼬 <장차내하(將次奈何)>’라고 하였다 한다. 이 뒤로 바위를 말 바우(마암(馬巖)라 하고, 동리를 아차동(아채동(鵝釵洞)이라 했다.

 

특히, 동명이 우리 음으로는 아차동이니, ‘아차하는 순간의 실수가 일생의 운명을 좌우한 견훤과 같이 설화 역시 불행한 영웅의 설화다. 이 밖에도 가은면 갈전면에는 아자개가 살아서 생긴 아개(阿介)라는 자연 부락이 있고, 농암면(籠巖面) 궁기리(宮基里)는 견훤이 군병을 모집하여 훈련할 때 본궁(本宮)을 설치한 곳이라 하여 고기(古基이터골옛터골)리가 있어, 견훤설화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 한마디로, 통일신라 이후의 상주문학은 문헌자료 미비로 그 전모를 밝힐 수는 없으나 헌강왕최치원 같은 분의 비문(碑文)이 상주에 섬으로써 그와 유사한 문체의 문학수준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할 수 있고, 견훤 관련의 설화는 구비문학의 백미로써 후대 상주문학사에 전문학(傳文學) 내지 소설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