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역전설
가. 함창읍
1) 쌍화제(雙花祭)
함창읍사무소에서 700미터 정도 떨어진 윤직 1리 752번지 신경주(申京注)씨 댁에150여 년이나 해묵은 회나무 아래 높이 2미터 조금 넘는 ‘우(위(爲))하는 바위’가 있다. 소나무 가지로 덮여 마을 사람이나 외부 사람들이 볼 수 없게 감추어 놓은 이 바위는 마을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다.
원래 세 개의 큰 돌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삼각형 모양으로 놓여 있었으나 1920년경 새로이 큰 길을 개설하면서 두 개는 매몰되고 마을 사람들은 매년 동제사(洞祭祀)를 올리고 있다.
이 큰 돌을 연유로 예부터 마을 이름이 쌍화(雙花)또는 삼암리(三岩里)라 불리어졌다. 이 마을에서 순조(純祖. 1830년 경 추정)때 단양 조씨(亶壤趙氏) 집안에서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정승자리까지 올랐다 하여 아름다운 두 송이의 꽃이 피었다는 뜻에서 쌍화라 불리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뒷산에 묘 두 봉(峰)이 있다. 또 삼암리라 는 명칭이 세월이 흐르면서 사음매, 시아매로 변형되어 불리어지고 있다.
그런데 세 개의 돌이 있을 때는 마을에 별다른 재화(災火)가 없었으나 두 개의 돌이 도로에 묻힌 후부터는 마을에서 행하여 오는 동제사도 중단했다. 동제사를 지내지 않은 그 이듬해부터 정월이면 매일 재화가 발생하는 이변과 마을 처녀들이 가출하는 일이 생겨 큰 근심과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정월이면 발생하는 불은 담벼락에서 발화되어 행랑채나 마구간 등 부속건물에 인화되었다가도 쉽게 꺼지곤 했다. 그러다 불은 이웃집으로 번져 하룻밤에 일곱 차례나 일어나기도 했다. 기이하게도 큰 채의 건물에는 옮겨 붙지 않는 다행스러움도 있었으나 동리 사람들은 불안과 초조감을 떨치지 못했다. 불을 끄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골목을 지켰으나 불길은 끊이지 않은 채 날이 밝아오니 이 불을 도깨비불이라 했다.
또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나 가출하는 일을 예방하지 못한 채 몇 해를 넘기게 되자 이러한 재앙을 피해 보려는 마음에서 중단했던 동제사를 다시 갖게 되었다.
동제는 매년 정월 열나흘날 밤 11시부터 시작하여 회나무 아래 숨겨져 있는 큰 돌에서 제례를 먼저 올린 다음 가가호호 빠짐없이 소지를 사르며 마을의 평안과 발전을 빌었다. 큰 바위가 간직하고 있는 연정을 품고 묻힌 바위에 대한 위로와 가정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가 새벽녘에 끝난다.
허물이 없고 생기복덕(生起福德)이 있는 사람 세 명을 제관으로 정한다. 정해진 제관을 ‘주판’이라 하며 제물을 장만하는 집을 주판집이라 칭한다.
동제는 어느 지방과도 같이 상가출입과 남녀관계를 금한다. 제례 당일은 목욕재계하고 제물도 주판이 직접 시장에 나가 과일, 어물, 쇠고기와 고급술을 구입하고 음식도 주판집에서 장만한다.
마을에 외부인이 출입하지 않도록 금줄을 치며 각 가정과 골목, 우물까지 깨끗이 청소하고 제기도 매년 사용하던 그릇을 정성들여 사용한다. 동제사가 끝난 보름날 아침은 온 동민이 모여 제례 음식으로 음복을 나누고 이 자리에서 1년의 마을 살림살이를 의논한다.
쌍화는 땅에 묻힌 숫돌이 사랑하던 암돌을 남겨두어 한 맺힌 사랑이 불로 나타나 암돌을 유인해 마을에서 끌어내려는 표현이라고 한다. 그것이 잘못됨에 마을 처녀가 가출하는 현실을 빚었다고 한다. 사랑의 표현을 불이라 뜻해 쌍화(雙火)라 하니 아름답게 쌍화(雙花)로 쓰이게 되었다.
이 바위는 2003년경 도로확장 공사로 현재 함창 신광주유소 앞 J・C소공원으로 큰 제(祭)를 치른 뒤 이전하였다.
2) 애기비
함창읍 교촌리에 아기비가 있다. 약 400여 년 전에 이곳에 마음씨 착한 한 모자가 살았다. 매우 가난한 데다 어머니는 병마저 들어 수년째 고생하고 있었다. 아들이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병이 점점 악화되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아들은 돈이 없어 좋은 약을 구해 드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어머니께 마시게 하였다. 어머니는 차츰 혈색이 좋아지며 병도 낫게 되었다 한다. 이에 동민들은 효성을 기리기 위해 아기비를 세웠으며 마을 이름도 아기비 또는 애기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 계림동
1) 토끼바우
옛날 이경대(李敬大)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소문난 효자였다. 고을에서도 자녀들을 훈계할 때면 “이경대의 효성을 보아라.” 할 정도로 이름난 효자였다.
어느 날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병명도 모르는 병으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는 온갖 약을 구해 오고 갖은 정성을 다해 간호를 했으나 아버지의 병은 차도가 없고 점점 위중해 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효성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고 더욱 정성을 다했지만 결국 아버지를 여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버지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아버지 곁에 앉아 있는데 비몽사몽간이었다.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그를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꿈속에서도 그는 백배사례하며 아버지를 소생시킬 방도를 물었다.
“서성리(西城理) 길가에 있는 바위로 가 보게.”
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백발의 노인은 사라졌다. 깜짝 놀라 깨니 꿈이었지만 그는 이제 더 아버지를 소생시킬 힘이 없음을 알고 혹 하늘이 도와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희망을 가졌다. 그는 날이 밝기를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직 어둑어둑한 서성리 길가로 나갔다. 희미한 시야에서도 꿈에 본 바위를 발견하고 그는 숨을 죽였다. 그는 조심조심 바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한 바퀴 바위 주변을 도는데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그는 일부러 쫓는 시늉을 하고 다가섰다. 토끼는 도망도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 토끼가 영약이란 말인가.’ 번쩍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바심에 그는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토끼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토끼의 두 귀를 움켜쥐었다. 토끼는 버둥거리지도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싶어 그는 집으로 와 토끼를 잡아 생간을 내어 아버지께 드렸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숨이 곧 질 것 같던 아버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하였다. 며칠도 채 안 되어 아버지는 거짓말같이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신령님, 고맙습니다. 저희 아버님께 영약을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수없이 허공을 향해 절을 하면서도 신령님이 내려 주신 영약이 토끼의 형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소문이 나자 사람들은 토끼를 잡은 그 바위를 토끼바위라고 했다고 하는데 지금 냉림동 성모병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다. 남원동
1) 장백사 터
내서면 북장리 노악산 정상에 옛날 신라 흥덕왕 5년 진감국사가 장백사란 절을 짓고 개산하고 고려 명종 때 각원 화상이 현재의 남장사로 절을 옮겨 남장사로 개명하였다. 이 절을 옮긴 사유를 민간의 구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해 흉년이 들었는데 사람의 피를 먹고 사는 빈대까지 유난히 극성을 부렸다.
칠월칠석을 며칠 앞두고 신도들이 식량을 지고 험준한 산길을 올라 절에 당도 했을때 스님이 코를 골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깨울 수 없어 지치고 허기진 몸으로 기둥에 기대앉아 있는데 허벅지가 따끔따끔 하였다. 들여다보니 빈대가 튀고 있었다. 짓궂은 마음이 들어 빈대를 잡아 스님 곁에 두고 돌아와 앉았다. 잠시 후 스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인사도 제대로 안 받고 변소로 달려갔다. 잠시 있다가 나와 손을 닦고 식사대접을 하여 신도들은 맛있게 밥을 먹고 돌아왔다. 그날 밤 관솔불을 밝히고 빈대 생포를 하여 이튿날 짐을 지고 갈 때 가지고 갔다. 스님이 안 자고 기다리는지라 쓸모가 없게 된 빈대를 담밖에 버렸다. 그때부터 절에 빈대가 많다는 소문이 일기 시작하더니 이듬해는 빈대가 담을 쌓는다는 소문까지 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스님이 먼 길을 가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도 아프고 고단하여 물 좋고 그늘 좋은 곳에 쉬다가 잠시 잠이 들었다. 세상은 하얀 백설로 덮였는데 숲 속의 법당에 햇살이 환하고 부처님의 눈에서 나는 눈부신 빛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여기가 영원한 너의 집이니라.”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꿈에서 깨었다. 과연 지금 이곳이 영원히 부처님을 모실 훌륭한 절터임을 깨닫고 절을 옮겨 지으니, 지금의 남장사라고 한다.
라. 북문동
1) 개무덤이
옛날 부자 박씨(朴氏)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여서 술을 먹으면 아무 데서나 자는 버릇이 있었다. 하루는 주막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도깨비에게 홀렸는지 길을 잃고 담배를 피우다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술에 취해
깊이 잠이 든 사이 담뱃불이 잔디에 옮겨 붙어 주위가 온통 불바다가 되었지만 박 씨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 때 박 씨 집에서 기르던 개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박 씨의 옷자락을 물고 깨우려 애를 썼으나 박 씨는 도무지 일어나지를 않았다. 개는 근처에 있는 웅덩이로 달려가서 몸에 물을 적시어 달려왔다. 박 씨 곁에서 몸을 뒹굴어서 불길을 잡아 나갔다. 뒹굴다가 웅덩이로 달려가서 물을 적셔오고 다시 물을 적셔 와서 뒹굴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개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고 말았다. 얼마 후 깨어난 박 씨는 죽은 개와 담뱃대를 보고 일의 앞뒤를 짐작하였다. 날이 밝자 박 씨는 죽은 개의 무덤을 정성스럽게 만들어주고 제사도 잊지 않았다. 그 후 이곳에 마을이 생기고 그 이름도 개무덤이라 했다고 한다.
2) 영암각(靈巖閣)
상주에 부임하는 목사가 북행을 하면 자주 해를 입었고, 불상사도 잦았다. 어느 날상주로 부임한 목사가 북쪽 순시계획을 하고 있던 초저녁 깜빡 잠이 들었다. 꿈속에 큰 바위 한 채가 흔들거리며 나타나 애원을 하였다. “원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비록 하찮은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제 소원을 들어 주시면 북쪽의 악령도 제거하고 이 고을이 평화롭게 살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몹시도 애절하였다. 그러더니 바위는 뒤뚱거리며 사라졌다. 목사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잠을 청했는데 밤중에 아까의 바위가 또 다시 나타나서 전처럼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제발 비바람이라도 피하게 해주십시오.” 목사의 머릿속에는 바위의 형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날이 밝자, 목사는 사람을 시켜 꿈에 본 형상의 바위를 찾아 나섰다. 산봉우리를 빼다 놓은 듯한 형상의 큰 바위가 천봉산 아래 비탈진 곳에 놓여 있었다. 검은 바위는 눈물이 어린 듯 반짝거렸다. 바위도 추위를 타다니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목사는 바위를 쓰다듬었다.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목사는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고 꿈을 꾼 이야기를 상주의 유지들에게 들려주었다. 상주의 유지들도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여기고 바위를 감싸줄 집을 짓자는 뜻이 쉽게 모아졌다. 그날 밤에 또 바위가 나타나더니 “원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바위에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기 시작한지 두 달도 채 안 되어 집이 완성되었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바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옷을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원님,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이 고을은 악귀가 없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고을이 될 것입니다.”고 하며, 백배사례하고 사라졌다. 과연 상주는 변괴가 나지 않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사람들은 모두 바위의 음덕이라 믿게 되었다. 그 후로 이 바위가 있는 곳을 미륵당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건물을 영암각이라 부르게 되었다.
3) 천봉산 남매당
옛날에 가족이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 부모는 농사를 업으로 하였지만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효자효녀로 소문이 났다. 그렇게 단란했던 가정에 병마가 엄습하여 어머니가 앓아눕게 되었다. 병명도 모르는 병이라 약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남편과 자식들을 염려하다 운명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년이 되어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았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새어머니가 달갑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생각하여 남매는 아무런 내색 없이 새어머니께도 효성을 다했다. 그런데 새어머니는 성품이 그리 곱지 않았으며 데리고 온 아들도 하나 있었다. 자기 소생과 전처소생에 대한 차별이 심했지만 남매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구박과 모함 등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버지에게 누가 미칠 것이라 생각하고 남매는 집을 나가기로 하였다.
남매는 천봉산에 숨어 살며 칡이며 산나물을 먹고 지냈다. 이런 생활이 몇 해 계속되었다. 어느 혹독히 추운 겨울이었다. 입었던 옷도 헐대로 헐고 영양실조도 극심하여 남매는 끝내 얼어 죽고 말았다. 한 나무꾼이 이들 남매를 발견하고 고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무꾼의 꿈에 남매가 나타나 쉴 자리를 마련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저희 소원을 하나만 더 들어주십시오. 저희는 원통하여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제발 저희 남매의 동상을 만들어 후세의 계모에게 깨우침을 주도록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남매의 애절한 한을 동리 어른들께 일일이 고하였다. 이에 동민들이 나서서 집을 짓고 남매의 동상을 만들었는데 재력이 부족해 동상(銅像) 대신 목상(木像)이었고 이 집은 오늘도 모정을 그리다 죽은 남매의 묘(廟)로 남아있다. 남매당은 천봉산 성황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4) 충렬사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조정에서 급파한 순변사 이일 장군이 중앙에서 함께 온 60여 명의 병력과, 피난한 상주 백성을 급히 모아 조직한 800여 명의 향병은 왜장 소서 행장이 이끄는 17,000여 명의 적병과 4월 25일 북천에서 기습공격을 받고 싸웠다.
전투가 불리해지자 이일 장군은 도망가고, 중앙에서 내려온 종사관 교리 윤섬, 병조좌랑 이경류, 종사관 박호, 상주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등은 많은 향군과 함께 전사했다. 5월 17일 의병장 김일은 북천에서 전사했다.
1698년(숙종24)에 충렬사를 무양동 97번지에 창건하여 판관 권길, 통제사 정기룡, 찰방 김종무, 한림 전극항을 봉향하고, 호장 박걸을 종향(從享) 방사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하면서 위패는 후손들이 모셔가고, 단소(壇所)만 남아 충렬단이 되고 김종무 1위만 향사했다.
임란북천전적지가 1988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고, 1993년 충렬사를 만산동 임란북천전적지에 다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경류 공이 병조좌랑이었을 때 계(啓)가 잘못 내려져서 둘째형 대신 변기출의 종사관으로 가게 되었다. 영우에 진을 쳤다가 패하였는데 변기출은 도망가 버리고, 군중은 주장(主將)이 없어 크게 혼란하였다. 공은 상주에서 이일이 혼자 싸운다는 말을 듣고 윤섬, 박호와 함께 가서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여 일진(一陣)이 함몰함에 윤공과 박공이 전사하였다.
공이 홀로 진 밖으로 나오니 종이 말을 잡고 기다리고 있다가 공을 보며 울면서 고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속히 서울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웃으며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내 어찌 목숨을 아끼랴.” 하였다. 곧 붓을 꺼내 노친과 백씨께 고별하고 도포자락 가운데 감춰 종으로 하여금 전해주게 하고 다시 적진을 향하려 하자 종이 껴안고 울며 놓지 않았다. 공이 “네 정성이 또한 아름답구나, 내 응당 네 말을 들으리라. 그러나 내가 심히 배가고프니 네가 밥을 좀 얻어오너라.” 하였다. 종이 그 말을 믿고 민가에 가 밥을 얻어오니 공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종이 적진을 바라고 통곡하며 돌아갔다. 공은 밥 얻어오라 부탁하여 종을 보내고 곧 몸을 돌려 적과 싸우다 해를 입으니 그때 나이 24세(임진년)였으며 상주 북문 밖 들판에서였다.
그 종이 말을 끌고 와 온 집안이 비로소 흉보를 듣고 글을 쓴 날을 기일로 삼아서 제사지냈다. 그 종도 병으로 죽고 말 또한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공의 의관을 염하여 관에 넣고 광주(廣州) 돌마면(突馬面) 선연의 좌록(左麓)에 장례 치르고 그 밑에 또 종과 말도 함께 묻었다.
그 후 상주 사림에서 단을 쌓고 조두(俎豆: 제사)의 예를 치렀는데 조정으로부터 도승지가 증직되었다. 을묘년(乙卯年. 1795)에 정조께서 친필로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이라 써 내려 북반에 각을 세우게 하고 명하여 삼종사관(三從士官)을 함께 모셔 봄가을로 제사지내게 하였다.
공이 죽은 후 매일 밤이면 집에 들르는데 음성이나 웃는 모습이 완연히 살았을 때와 같고 부인 조씨(趙氏)와 말을 주고받는 것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매일 밥을 차려 드린 즉 음식 먹는 게 생시와 같았으나 뒤에 보면 음식은 여전히 먹은 흔적이 없었다.
매일 해가 진 뒤에 와서 닭이 울면 돌아갔다. 부인이 공의 시체는 어디 있느냐고 묻고 만약 알려주면 장차 반장(返葬)하겠노라 하자, 공이 추연히, “허다한 백골이 쌓인 가운데서 어찌 구별을 할 수 있겠소?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하오. 또 내 백골이 묻힌 곳도 절로 해가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 외의 집안일을 분별하여 처리하는데도 평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소상(小祥) 후에는 이틀에 한 번씩 강림하다가 대상(大祥)를 맞아서는 부인에게 이별을 고해 말하길, “오늘 이후로는 내 장차 오지 않으리라.” 하였다. 때에 공의 아들 부사공(府使公)은 네 살이었는데 공이 아들을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반드시 과거에 급제할 것이나 불행한 때를 만날 것이오. 그때 내가 다시 오리다.” 하고 문을 나섰는데 이후로는 다시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20여년, 광해조에 공의 아들이 급제하여 사당에 참례할 때 공중으로부터 신은(新恩. 새로 급제한 사람 즉 공의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있어 사람들이 다 기이하게 생각했다.
공의 모친이 평소에 병환이 있었는데 때가 6월이었다. 그 어머니가 조갈증이 있어 귤을 생각하고 만일 귤을 얻어 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귤을 얻을 길이 없었다. 며칠 후 공중으로부터 “형님, 형님!” 부르는 소리가 있어 그 백씨(伯氏)가뜰을 내려다보니 구름 가운데서 공이 귤 세 개를 던지며 “어머님이 귤을 생각하시기에 제가 중국 동정호에 가 얻어왔습니다. 드리도록 하십시오.” 하고는 문득 사라졌다. 백씨가 그것을 받아 늙은 어머니께 드리니 병환이 곧 나았다. 도항(陶巷) 이문정 공(李文正公)이 공의 신도비명에 ‘공중에서 귤을 던졌으니 신이함이 황홀 하도다’ 한 것이 곧 이를 두고 이름이다.
늘 제삿날을 당하여 유식(侑食)할 때면 반드시 숟가락과 젓가락질하는 소리가 있었다. 어느 해 제사에는 문을 닫은 후에도 수저소리가 없자 그 서족(庶族)의 병현(秉鉉)이란 사람이, “내 어려서부터 이 제사에는 꼭 참례하여 수저소리를 들었는데 오늘은 들리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하다.”고 말하였다.
곧 제사가 끝난 후 바깥사랑에서 갑자기 종을 부르는 소리가 있어 집안사람들이 놀라고 황급하여 들어보니 공이 살아있을 때의 음성이었다. 종이 명을 받고 들어가니 그를 시켜 떡을 찐 계집종을 잡아다가 뜰아래 꿇어앉게 하고 엄히 분부하여, “귀신의 길에는 사람의 털을 가장 꺼리거늘 너는 어찌하여 살피지 아니했느냐? 네 죄는 종아리를 맞을 일이다.” 하고 곧 종아리를 치게 한 후에 이후는 극히 조심하라 는 분부를 내리고는 놓아주게 하였다.
집안사람들이 자세히 떡 그릇을 살펴보니 과연 머리카락이 나왔다. 그 이후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제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5) 천봉산 음경바위와 도양산 공알바위
상주시 만산동에 천봉산(天峰山)이 있는데 분지의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경사진 곳에 음경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낙상리(洛上里)의 도양산(道陽山. 일명 석문산(石門山)에는 공알 바위가 있다. 만산동의 음경바위와 낙상동의 공알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천봉산의 음경바위를 도양산 쪽으로 돌리면 그곳의 처녀들이 마음이 들떠 소동이 이는 괴이한 일이 허다하였다. 피해를 늘 받는 낙상리 주민들은 이 바위를 불(火)바위라 불러 왔으나 지금은 누가 깨뜨려 버렸는지 바위의 밑동만 남아 있다.
6) 이경남가(李景南家)의 세충(世忠)
상산의 아전 이경남은 임진란을 당하여 창의하였는데 감사대(敢死隊)를 지어 권길(權吉. 판관)의 휘하에 속해 판관이 심히 아끼는 바 있었다. 1593년 가을 명나라 장수 오유충(吳惟忠)이 본주에 주둔할 때 부서(簿書)를 맡았는데 민첩하고 또한 병사(兵事)를 논함에도 충분감격(忠憤感激)함을 명나라 장수 역시 심히 가상히 여겨 비단과 기물(器物)로 포상하고 별부파총(別部把摠)에게 부탁하여 뒤에 군공(軍功)으로써 벼슬에 올랐다.
광해군 정사(丁巳)년에 폐모의 논의가 일어나자 소(疏)를 지어 걸어서 상경하여 대궐문에 엎드린 7일만에도 소를 올릴 길이 없어 숭례문 아래서 소를 불사르고 통곡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조14(1637)년 병자호란에 청군이 창궐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해 있을 때 그 아들 지원(枝元)이 관찰사를 좇아 근왕(勤王)할 때 이경남은 “너는 서도(徐度)의 효자가 되지 말라. 나는 왕릉(王陵) 현모(賢母)를 본받고 싶다.”라는 글자를 손수 써주어 힘쓰게 하였다. 이듬해에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두루마기를 입고 양자(陽子)를 대폐(戴蔽)하고 주(州)의 동쪽에 있는 동해사(東海寺)에 숨어 도해팔영(蹈海八詠)으로써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다. 늘 명나라 장수가 준 술잔으로 술 마실 때면 “비록 이 세상을 잊고자 하나 갑자년 취한 술잔 속에 천지일세.” 하였으니 대개 술잔 밑에는 명나라 연호가 씌어있었던 까닭에서였다. 임종에도 정신은 맑아 ‘육검남왕사, 북정중원일(陸劍南王師, 北定中原日)’을 외며 제사에 이 시를 잊지 말라고 고하고는 의연하게 운명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경남을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불렀다. 일찍이 본주의 서쪽 묵서산(墨西山)에 복거(卜居)하며 옷과 신을 묻고 스스로 광명(壙銘)을 지었는데 “황조(皇祖) 일통(一統) 화화롭기 백년이여, 일찍이 내 가정(嘉靖) 연간에 태어나 오늘에 이르러 몸 둘 바 없음이여. 오로지 묵서산에 장사하노니 식자(識者)는 생각하리라, 노련(魯連)은 바다를 밟아 죽고 이제(夷齊)는 수양산에서 묻히도다.”라 하였다.
이경남의 아들 지원(枝元)이 병자호란을 당하여 때에 호장(戶長)으로 도백(道伯) 심연(沈演)의 근왕병에 자원하여 달천(撻川)에 도달하자 구성(媾成)이 됨을 알고 통곡하며 귀향하였는데 회포를 읊은 시가 있다. 갑신(甲申) 삼월에 숭정황제(崇禎皇帝)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사 일월암(日月岩)에 올라가 단(壇)을 베풀고 망곡(望哭)하였으며 매년 명나라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 세 황제의 제사 일에는 정화수 일배로 분향하며 이곳에서 절하였으므로 이 단을 대명단(大明壇)이라 일컬었다. 향리의 처사 채득기(蔡得沂)가 일찍이 성서(城西)의 이지원(李枝元) 초려를 방문하여 낙동강의 별장(경천대 무우정)에서 함께 지내자 하였을 때 지원이 웃으며, “동해는 고촉(高躅)이요 서산은 일민(逸民)으로 취향이 다르니 하필이면 이웃을 한 후라야 좋겠습니까?”하니 채득기도 한탄하며 “서산의 일민(逸民)은 그대가 절로 당할지라도 동해의 고촉 그것은 내 응당히 피하리.”라 하고 ‘서산정사(西山精舍)’ 넉자로서 현판에 제(題)하여 주었다. 사후에 군자정(軍資正)에 증직되었다.
지원의 아들 근생(根生)이 나이 19세에 호장(戶長)이 되었는데 이는 가세충효(家世忠孝)로써 특히 관장(官長)의 장려한 바였다. 근생은 관아의 문을 지날 때면 반드시 공수(拱手)하여 지났으며 집에 물러나 있더라도 관자의 벽제소리가 나면 반드시 뜰에 내려 엄숙히 하여 세상 사람이 다 그를 칭찬하였다. 회갑 일을 당해 병을 치료하느라 동해사에 있었는데 그 아들들에게 글을 보내어 “내 숭정(崇禎) 3년에 태어나 8세에 정축(丁丑)의 변을 당하고 15세에 의황제(毅皇帝)의 순국(殉國)을 들었다. 이후 세월이 빨라 47년이 되었으나 늙어서도 명나라에 60년을 살았지만 회복되는 날은 얻지 못하여 족히 음읍(飮泣)할 일이거늘 어찌 술을 차리고 지난날을 우러를 수 있으랴!” 하였다. 이어서 “시경에 말하길 ‘서럽다 부모여 절 낳으심에 애쓰셨도다.’ 또한 정자 말하길 ‘부모 계시지 않은 사람이 생일이면 응당 배나 비통해진다.’고 하였듯이 늘 이맘때 이날이면 오히려 나도 같거늘 하물며 회갑을 맞아서랴. 너희는 나의 이 뜻을 알아서 속객(速客)치 말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참의(參議)로 증직되었다.
근생의 아들 시발(時發)이 숙종 경오(庚午)년에 정조호장(正朝戶長)으로서 임금을 뵈었을 때 인현왕후(仁顯王后)는 손읍(遜泣)하여 사제에 계셨다. 임금을 뵙고 난 후 여러 호장들에게 “오늘 우리 성모께서는 별궁에 옮겨 계시지만 신하된 사람은 당연히 찾아뵙는 게 옳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여러 호장이 따르려 아니하였다. 시발이 탄식해 ‘고인에 홀로 서궁(西宮)에 배알한 분이 계신다.’ 하고 서궁을 향해 절을 올렸다. 또한 정축(丁丑)년 남한산성 함락 60갑을 당하여 이는 감회를 추념하여 천하의 흥망 유류박희(有類博戱. 도박 같은 게 있고), 위작박희(僞作博戱. 도박을 하는 것이)가 있다. 그 충분(忠憤)이 발하는 것을 전함이다. 우리 황명(皇明)의 수치를 설원함이다. 왕왕이 잃는 자가 북으로 홀로 대에 올라 통음하며 황룡부의 뜻이라.” 하였다.
시발의 아들 삼억(三億)이 경종(景宗) 신축(辛丑)년에 조정만(趙正萬)이 본주(本州)에 목(牧)으로 남성루(南城樓)를 중수할 때 삼억으로 하여금 일을 감독케 하고 마치자 홍치구루(弘治舊樓)에 제액(題額)을 청하자 이에 기문에서 “성상원년(聖上元年) 신축(辛丑) 가을에 감히 목후(牧侯)의 명을 받아 남루의 일을 감독하여 양월(陽月. 10월 15일 필역을 고하고 장차 주작문(朱雀門)・진남문(鎭南門)・무남루(撫南樓) 등을 열서편액하고 이 루에 이름 붙이기를 생각하였다. 처음 황조(皇朝) 이묘(李廟)에 이루고 그 후 이백 유여 년에 다시 금일에 중수하니 남외(襤外)에 건곤(乾坤)이 다 적에게 멸망하였으니 이에 양제(樑題)조차 유촉(遺躅)이 어제 일처럼 완연하다. 옛일을 생각하니 감회가 일어 족히 음읍(飮泣)할만 하니 만약 주 선생으로 하여금 보게 한다면 반드시 백(栢)을 읊을 생각이 일거나 아니면 이 누에 오르면 문산(文山)이 하지심(下之心) 아니할 마음이 일지 않으랴. 드디어 이로써 목후(牧侯)에 아뢰니 가히 홍치구루라 걸 만하다.” 하였다.
영조(英祖) 무신란(戊申亂)에 아전의 우두머리로서 충분감개(忠憤感慨)하여 아전을 엄히 단속하고 주민을 어루만져 위안하길 죽을 각오로 아니 함이 없었다.
삼억의 아들 경번(慶蕃)이 영조 기사년(己巳年)에 정조호장(正朝戶長)으로 상경하였는데 궐문에 나아가 숙알(肅謁)하는데 임금이 모모의 읍 호장을 입시하라 명한데 경번 역시 그 중에 뽑혔다. 사궁(司宮)을 따라 배알하려고 중문(重門)에 도착하여 뜰아래 부복하였는데 임금이 “상주 호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경번이 조금 나서서부복하니 임금 명하기를 그로 하여금 품계(品階)로 나아가 절하게 하였다. 그리고 묻기를 “주민은 다 질고(疾苦)가 없던가?” 일어났다 엎드리며 “성상의 은덕을 입어 다 편안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향리의 소사(小史)가 백성을 괴롭힌다 하니 참말인가?” 기복(起伏)해 대답하길 “신이 품은 바는 신래(神來)이나 지척에 임금님의 위엄이 계시어 입으로 말씀드리기 어렵사오니 청컨대 지필을 주시옵소서.” 임금이 지필묵을 내리게 명하여 경번이 드디어 뜰아래 물러가 본초(本草)에 개략을 적어 정서하여 드리니 상하가 본 후 좌우에게 말하길 “먼 시골의 호장이 이같이 박식하다니 의외로다.” 하시고 앞에 나와 고개를 들라고 명하고 또 경유사(經由史)가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해 말하길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어사의 별단(別單)을 보니 관정(官政)의 득실, 민생의 이병(利病)이 다 아전의 사람을 얻고 못 얻는데 관계되니 만약 너희가 허과(虛過)하면 수려의 허물이 된다. 이제 너에게 정승(政丞)의 직을 제수하려니 미경유사운(未經由史云)한 것은 그만두어라.” 하시고 또 묻기를 “너는 호장에서 지금 계급이 무어냐?” 대답해 “종조호장의 첩(帖)을 받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 같은 인재가 있는데 어찌 월차(越次)하여 통덕랑(通德郞)으로 특별히 승배하는 것이 옳지 않으랴.” 하시고 명하여 밖에다 하사 술을 명하여 퇴출을 명하였다. 경번과 여러 호장이 사배(四拜)의 예를 행하고 궐문을 나서니 사알(司謁)자가 자리를 베풀고 술상을 차려 어명으로써 상주 호장을 불러 술을 내리어 드디어 기복(起伏)하고 다 마셨다. 또 사배사은(四拜謝恩)을 행하니 여러 호장이 둘러서서 구경하며 부러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삼억 4세 충효각 :상주시 무양동 197-3)
마. 신흥동
1) 산신당(山神堂)
지천동 616-1번지 마을의 서쪽 연악서원 뒤편에 있다. 이 당집이 지천마을의 상신당(上神當)이다. 마을 입구 솔밭에 솟대가 있어서 하신당(下神堂)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음력 정월 초이레에 동제를 지낸다. 당집은 시멘트 블록조의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었고, 앞면에 여닫이문을 내었다. 당집 옆으로 큰 팽나무와 은행나무가 있고, 주변은 방곽으로 시멘트 블록 담장을 둘렀다.
2) 상사암
옛날 신라시대에 어떤 젊은이가 갑장사로 수도하러 왔는데 그에게는 고향에 사랑하던 처녀가 있었으나 인생의 무상을 느껴 결혼을 포기한 채 입산하였다. 젊은이는 세속을 떠난 후 사랑하던 처녀를 잊고 구도에만 정진하였다. 처녀는 이제나 저제나 수도하러 간 젊은이를 기다리다 마음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죽은 처녀의 영혼은 구렁이로 변신하여 살아생전의 애인 있는 곳을 찾아갔다. 갑장사 상사암에서 수도하고 있는 애인을 발견하자 구렁이는 그의 온몸을 칭칭 감아 버렸다. 수도에 몰두한 젊은이는 처음에 몰랐다가 몸이 이상해 눈을 뜨자 자기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를 짐작하였다. 젊은이는 그 구렁이가 자기가 사랑하던 여인이란 직감이 들었다. 구렁이는, 함께 죽어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는 수도하는 중이었기에 구렁이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더욱 마음을 가다듬어 불경을 외기 시작하였다. 얼마 동안 몸을 감고 있던 구렁이는 스르르 몸을 풀고 어디론지 사라졌다.
날이 훤히 밝아왔다. 간밤의 번뇌를 씻은 개운한 아침이었다. 젊은이가 무심코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간밤의 구렁이가 절벽 아래 떨어져 죽어 있었다. 젊은이는 측은한 생각이 일었다. 비록 인연을 끊었지만 젊은이는 여인을 위해 기도하며 제사를 지냈다. 이 후로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 바위에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의 일이다. 어느 가을날 이름도 없는 젊은 중 한 사람이이 갑장사를 수도장으로 잡고 왔다. 그때 이 절에는 전부터 이곳에서 수도해 온 젊은 여승이 있었다. 얼굴도 고운 이 여승은 한겨울 동안 수도에 전념하는 수도승을 위해 모든 시중을 정성껏 하였다. 그러다가 이 여승은 수도승의 늠름한 모습에서 애정을 느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자제극기의 나날을 보냈지만 시간이 갈수록 번뇌는 끊일 줄 몰랐다. 겨울이 지나며 서서히 연악산 눈이 녹고 개울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였다. 여승은 그 시간만큼 더욱 초췌해지고 겨우 몸을 지탱할 지경이었으나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수도승은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수도승이 떠날 날이 왔다. 수도승이 떠나는 순간에도 차마 무슨 말을 못한 여승은 속으로 다짐하였다. 소복으로 갈아입은 여승은 조용히 상사바위로 올라갔다. 번뇌에 쌓일 때면 간간이 찾던 벼랑이었다. 수도승은 벌써 산문을 나서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스님, 절 한 번만 보세요.”
여승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수도승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여승의 절절한 목소리가 다시 메아리로 돌아오는 순간 수도승도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수도승의 눈에 흰 비단천이 벼랑에서 떨어지고 있음이 보였다.
수도승은 조용히 몸을 돌려 갈 길을 갔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연악산(淵嶽山) 갑장사(甲長寺)에서 남쪽으로 70미터쯤에 큰 바위가 있는데 높이 약 50길이나 되는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이 바위가 상사바위다.
3) 백정암(白丁巖)
갑장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거대한 기암괴석이 하나 보인다. 이 바위를 백정암 또는 백질암(백길바위)이라 부른다.
옛날 어떤 노인이 마음을 정제(整齊)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정도(正道)를 다해 천일기도를 마치고 그 벼랑에서 뛰어 내리면 신선이 된다는 말을 듣고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그 노인은 많은 역경을 견뎌가며 수도를 하던 중 끝까지 버틸 수 없다는 마음에 벼랑 아래로 떨어지자니 수도가 부족하여 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때 마침 백정(白丁) 한 사람이 고리를 만들 버들을 구하러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산중에서 우는 소리를 들은 백정은 그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로 이 산중에서 울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노인은 그간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백정은 자신이 노인의 뒤를 이어 수도하고 신선이 되기로 작심하였다. 과연 백정은 기한을 다 채우도록 열심히 수도하였는데 벼랑에서 몸을 날리자 신선이 되어 하늘로 갔다.
이 바위는 그때부터 백정암 또는 백 길이나 된다 하여 백질암 이라고 불러져 왔다.
4) 효자 대밭골
상주시 서곡리 다릿골 동쪽, 대밭이 있는 마을이 있다. 옛날 부모님에게 효성이 지극한 한 효자가 살았는데 부모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추운 겨울날 약초를 캐러 산을 헤매다가 도중에 길을 잃어 산속에서 추위에 얼어 그만 죽고 말았다. 효자의 시신을 거두어 뒷골에 묻었는데 효자가 죽고 난 이듬해 무덤 위에 검은 대나무 한 그루가 솟아나 후세 사람들은 효성이 지극한 효자의 넋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마을 주위 밭둑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5) 호랑이를 감동시킨 강원(康源)의 효성
재령 강씨 강원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사람이다. 강 효자가 그의 어머니 시묘를 할 때의 전설이 있다. 어느 날 급한 볼일이 있어 집에 잠시 들렀다가 묘소를 가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 난감하게 되었다. 강효자는 헤엄을 칠 재주도 없으면서 시묘할 생각만 하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거센 물살에 강 효자는 떠내려가게 되었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일심으로 신령님께 기도하기를 ‘제 목숨 하나 아깝지 않사오나 어머님 혼자 계시니 이일을 어찌 하오리까!’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위급한 찰나에 어디서 왔는지 큰 호랑이가 물로 뛰어들어 강 효자를 구출하고 또한 어머니의 묘소까지 업어다 주었다.
어느 날은 시묘 중 강 효자가 이리떼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또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날의 그 큰 호랑이가 달려들어 강 효자를 구출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 같은 위기에서 강 효자를 구출한 일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있어 미물도 강 효자의 효성에 감동한 때문이라고 모든 이가 찬탄하여 끝내 조정에서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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