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일기(淸臺日記)』에 전하는
상주문화(Ⅱ-Ⅱ)
-상주 관련 주요 記事를 중심으로-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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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Ⅱ) 5. 상주 관련『청대일기』탐사(探査) 74 1) 1747년(영조 23)~1759년(영조 35) 74 6. 상주 관련 주요기사(主要記事)에 대한 고찰(考察) 96 가. 도남서원에 관하여 96 나. 근암서원에 관하여 102 다. 상산지 청대본 찬술에 관하여 103 라. 충열사 창건과 정기룡 장군 봉안에 대하여 104 마. 기타 관내 원사 창설 및 봉항에 대하여 107 바. 공갈못에 대하여 109 사. 우복 신도비에 대하여 110 아. 북천교에는 수백 년된 돌 교량이 있다 113 자. 교유(交遊) 인물 113 차. 기타 상주사(尙州史)와 관련하여 114 카. 경천대(擎天臺)와 채득기(蔡得沂)에 대하여 115 타. 환곡(還穀)의 변제(辨濟) 방식에 대하여 116 7. 맺음 말 116 |
『청대일기(淸臺日記)』에 전하는
상주문화(Ⅱ-Ⅱ)
-상주 관련 주요 記事를 중심으로-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지난 호(제26호)에서 지면의 부족으로 인하여 한꺼번에 싣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이번 호에 이어서 소개함을 알려 드립니다. (편집자 주) |
1747년(영조 23)
2월 6일 : 도처에 호환(虎患)이 수년이래 유난히 심하여 아직까지 그치지 않으니 이는 작은 제앙이 아니다. 떠돌며 구걸하는 사람도 끊이지 않으니, 올 봄 기근이 지난해 봄과 다를 것이 없는 듯하여 너무 마음 아프고 개탄스럽다.
7월 18일 : 며칠전 향청(鄕廳) 품목(稟目)을 보내왔는데 고시 문중의 단자 때문이다. 사리 류씨문중 단자 두 장도 왔는데, 향당의 공사원 한 사람이 향회 때 계사년의 일을 거론하여 배척한 일이 있어서 류씨문중에서 그의 이름을 도려내어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도남서원 원장 사직단자가 다시 왔는데 지난번 서원 모임때 소를 도살한 일 때문에 상주목사가 담당 아전과 고직이를 잡아다 가둔 지가 이미 여러 날이고, 또 다른 물의가 있었다고 한다. 제사를 써서 좌기(坐起)하기를 권하였다.
11월 25일 : …(전략)… 주상이 ‘우리 조정에 종사된 여러 어진이들의 학문과 언행을 상세히 말 할 수 있는가?’ 라고 하여
내가 “신이 어리석고 학문이 거칠어 어떻게 감히 추척하여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선정 신 김굉필과 정여창은 참혹하게 사화를 당하였기 때문에 문적을 모두 물과 불속에 던져 버려서 단지 언행 약간만『국조선유록(國朝先儒錄)』에 실려 있을 뿐입니다. 조광조 이언적은 선정 신 이황이 지은 행장이 매우 자세하여 고찰할 수는 있으나 다만 저술한 문자가 적어 후인들의 한이 되옵니다. 오직 이황만 학문을 쌓고 공부를 독실하게 하여 저술이 매우 많아서 우리 동방의 수천 년의 학문을 집대성한 유형이라고 할 만하고 또한 학문을 주고 받은 문도가 매우 많이 나와서 국가에 쓰이는 인재가 되어 사업이 밝게 드러난 자도 있고 산림에 묻혀 학문을 닦으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자도 있아온데 그의 학문의 문로가 바르고 옳아서 한번도 이단으로 흘러간 경우가 없었으니, 선묘조의 조정을 중흥시킨 여러 선비들이 그의 문도들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자
주상이 “그 서원의 원장을 한 적이 있는가?” 라고 하여 내가 “계축년(1733)에 원임을 하였사온데, 조정의 사제(賜祭)를 맞이하여 도내 유생들과 함께 성대한 제례에 참여하였고, 그 뒤에 두 번째로 원장을 맡았사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안동과 상주에 관한 일을 물었는데,
내가 “안동과 상주는 도내의 상류에 위치한 큰 고을로, 이름난 유생과 어진 신하들이 무리를 지어 나왔사옵니다. 선묘조 때는 영남에서 이름난 재상이 네명이나 나왔는데 두 명은 안동 출신이고 두명은 상주 출신입니다” 라고 하니
주상이 “누구냐” 라고 하여
내가 “류성용과 정탁은 안동사람이고 노수신과 이덕형은 상주 사람입니다. ” 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이어서 아뢰기를,
“상주에는 도남서원이 있사온데 선정 신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을 합향하고 노수신․류성용․정경세를 배향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주상이 “조광조만 홀로 빠진 것은 무엇때문인가? 혹은 사론이 불만이 있어서인가?” 라고 하여
내가 “그렇지 않사옵니다. 상주는 한 도의 요충지에 있어서 선정 여러 신하들이 왕래하고 두루 놀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문장공 신 정경세가 고을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서원을 세워 영남의 유현들만 제향하기로 발의하였고, 조광조는 서울 사람이기때문에 합향하지 않았사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또 “제향할 때 원장은 어떤 관복을 입고 유생은 어떤 관복을 입는가?” 라고 물어서
“도산서원 원장은 복두(㡤頭)와 단령(團領)을 입고 도남서원은 원장이 관을 쓰고 청금(靑衿)을 입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는 선정이 지었는가?” 라고 하여
내가 “본손의 집에는 고찰해 볼 문적이 없사옵니다. 이는 본손 자손들이 영락하여 주관할 자가 없기 때문에 문적이 다 흩어져서 일 것입니다. 문순공의 급재 시권 두 장이 서울의 한 사대부 집에 있었는데, 몇 년전에 겨우 찾아 온 적이 있었사옵니다. 고찰해 볼 문적이 없기때문에 그 허실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그 집안 부녀들이 서로 전해 오기를 ‘우리 선조께서 지은 것이다.’ 고 말하는 것을 본 즉이 있사옵니다. 또한 가사중에 ‘한양 논을 가난데로 노하스라’ 라는 이 한 구절은 이황이 아니라면 이러한 경지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주상이 “그럴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또 아뢰기를, “노래가사 때문에 특별히 치제(致祭)하는 것은 아마도 일의 체모에 합당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주상이 “동부승지가 도산과 도남 두 서원 원장으로 있을 때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한 일이 있는가?” 라고 하여
내가 “이 일은 아직까지 할 수 없었으나 도남서원에서 한번 강학하는 모임은 행한 적이 있아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현재 영남의 시종신(侍從臣)이 몇이나 되는가?” 라고 하여
내가 “정옥(鄭玉)․정권(鄭權)․이세사(李世師)․이세태(李世泰) 등 이옵니다.” 라고 하니
주상이 “정옥은 어느 군에 사는가?” 라고 하여
내가 “영천(영주)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자
주상이 “그와 서로 상종하였는가?” 라고 하여
내가 “정옥의 5대조인 고 상신(相臣) 정탁이 만년에 안동에서 예천으로 이사하였기 때문에 봉사손이 예천에 살고 또한 그의 여러 친족들이 많이 용궁에 살고 있어서 신의 집과는 거리가 멀지 않사옵니다. 정옥이 때때로 왕래하였기 때문에 신은 그와 상종이 퍽 잦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정탁과 정온은 일족인가?” 라고 하여
내가 “두 사람은 본관이 각기 다르고 또한 거주하는 곳이 몇 백리나 떨어져 있고 세대도 같지 않사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정옥은 학문에 대한 공부가 있는가?” 라고 하여
내가 “학문에 대한 전일한 공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평상시의 한마디 말과 한 번의 거동이 의리에 어긋나지는 않사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상주에 학문하는 선비가 있는가?” 라고 하여
내가 “몸을 닦고 행동을 조심하는 이는 없지 않사오나 학문에 대한 전일한 공부에 있어서는 신이 감히 지적하여 아뢸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여러 경서 중에 어느 책이 요긴한가?” 라고 하여
내가 “신의 얕은 생각으로는 오직 소학과 대학이 가장 요긴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주상이 “그렇겠지” 라고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신이 고향에 있을 때 조정에서 소학을 강의하여 각 고을이 강의를 하도록 명령한 것을 들었고, 신이 일찍이 이러한 일을 본적이 있었으나 형식으로 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 단지 너덧달 시행하다가 마침낸 해이해 져서 정지하거나 페지해 버리고 마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라고 하였다.
바라를 친 뒤에 물러 나왔다.
1748년(영조 24)
4월 22일 : …(전략)… 도남서원에서 하인이 와서 류 재임이 보낸 편지를 받아 보았다. 그저께 밤 동쪽 상방 광 속에 보관 해 둔 재복(齋服) 열두 벌과 백지 20여 권, 놋잔 두 쌍을 도둑 맞았다고 한다. 이러한 때의 인심은 놀랍거나 괴이쩍을 것이 못되나 또한 일찍이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지 않고 어설프게 저장한 소치이니 어찌하겠는가. 답장을 써서 보냈다.
4월 30일 : 밥을 먹은 뒤에 함창향교에 가니 함창현감과 함창 고을의 장로 및 유생이 벌써 일제히 와 있었다. 오늘은 교장(校長)이 백일장도 함께 시행해서, 한쪽에서는 소학을 강론하고 다른 쪽에서는 제술을 하느라 조용히 집중할 수 없어서 매우 개탄스러웠다. …(하략)…
7월 22일 : 예천 옥천서원 유생 임00이 보러 왔는데, 봄에 강당을 중수하고 상량문을 청하기에 나는 이와같은 일을 너무 싫어하여 고사하였는데 여전히 그치지를 않고 있다. 또 임춘(林椿)의『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두 권을 가지고 왔다. 임호서원 재임이 편지를 보내 왔는데 함창의 온 고을이 다음 달 1일에 검호 송정(松亭)에서 소학 도강(都講)을 연다며 와 주기를 청하였다.
윤 7월 1일 : 아침에 도남서원 묘우에 분향을 하고 곧바로 검호에 가니 여러 사람이 이미 와 모여 있었다. 검호 동쪽 정승대(政丞臺)에 장막을 쳤는데, 일찍이 어떤 이름난 재상이 와서 유람한 적이 있었다. 어떤 이는 상진(尙震)공이라고 하고 어떤이는 김귀영(金貴榮)공 이라고도 한다. 이곳 정승대가 있는 산 기슭이 꽤 높아서 호수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데 연꽃이 한창 피어 아직 시들지 않아서 매우 아름답고 감상할 만하다. 다만 사람들이 많고 날씨가 가물어서 한가한 정취가 전혀 없어 한스럽다. 시제(詩題)는 “작애련설탄동여자하인(作愛蓮說嘆同余者何人)”이고 부제(賦題)는 “화중군자고풍호중류(花中君子古風湖中流)” 이었는데 부제는 동작(東作)을 고쳐 쓴 것이 있기 때문에 함창현감이 출제한 부제로 하였다. 한쪽에는 강회를 하였으나 젊은이들은 글을 짓는데 생각이 있어서 조용히 강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어찌하겠는가. 시권을 거둔 후 애초에는 채점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으려다가 유생들이 너무 서운하다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두 축을 대략 채점하고는 곧바로 도사 김남로(金南老)에게 부쳤다. …(하략)…
윤 7월 20일 : 이여주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4월에 성중(成仲)의 상(床)자 운에 차운한 시를 부쳐 왔다. 또 경천이 4일에 부친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의문스런 말이 많이 있었다.
저녁이 된 후에 도남서원 사람이 와서 전해 준 재임 류국윤(柳國潤)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몇일 전에 문통(文通)이 속수서원(涑水書院) 수임(首任)이 된 것 때문이다. 향규에 “재하(在下)는 체임시켜야 한다.” 하였기 때문에 체임을 허락한다고 답장을 썼다.
8월 1일 : 아침에 도남서원 도정사에 분향을 하였다. 저물녁에 길을 나서 읍에 들어가 동문 밖을 거쳐 이중회(李仲會)를 찾아 보고 향청에 가니 좌수(座首)와 김 별감(金別監)이 있었다.
9월 5일 : 오전에 대축(大祝) 류성림(柳聖霖)과 장찬(掌饌) 채래(蔡淶), 황성중(黃性重), 김광철(金光澈) 등이 읍내에서 향촉과 제물을 받들고 왔기에 곧바로 희생(犧牲)을 살피는 성생(省牲)예를 행하였는데, 전례에 희생을 끌어오는 한가지 절차가 없는 것이 흠이다. 신시(申時)에 축문을 썼다. 축문은 처음 봉안할 때는 각 신위마다 썼는데 우복 선생이 지었고 그 후에 통합하여 하나의 축문으로 한바 있는데 창석 선생이 지었다.
9월 6일 : 축시(丑時) 일각전(一刻前)에 진설하고 닭이 울기를 기다려서 향사를 봉행하고 새벽이 되기 전에 예를 마쳤다.
9월 22일 : 들으니 흥암서원을 이건하는 일로 참봉 성이계(成爾溪)가 대성사에 와서 대들보로 쓸 목재와 다른 재목 60여 그루를 베었는데, 앞으로 목재를 100여리나 끌어 옮길 폐해와 지금 승려들이 격는 폐해는 말할 수가 없다고 한다.
10월 1일 : 새벽에 도남서원 도정사에 분향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상사(上舍) 김 익장(金翊章)이 보러 왔다가 저물녁에 돌아갔다. 여용(汝容)이 말하기를, 서천군수 강필신(姜必愼)은 지난번 개원(開原)에 있는 새집에 와서 며칠을 머무르고 돌아갔는데, 종질 조정빈(趙廷彬)과 조상경(趙尙絅)이 모두 서천 읍내에 임시로 살고 있으면서 끝없이 폐단을 일으켰는데, 사경(思卿 강필신)이 부임한 이후에 모두 편의를 따라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 개원에 있는 새집은 20여 칸으로 지었으나 크고 작은 쇠못은 모두 본가의 돈으로 상주 읍내의 장인(匠人)에게서 산 것이라고 한다.
10월 3일 : 아침이 되어 유생들이 모두 사당에 참배하고 나와 곧바로 앞 뜰에서 서로 읍하는 예를 행하고 비로소 강(講)을 시작하였다. 또 질문 제목도 내 걸었는데,
유생들에게 물은 것은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은 다만 ‘밝은 덕을 밝히는데 달려 있다(在明明德)’ 라는 한 구절 뿐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한 ‘밝은 덕’이란 어떤 것이며, 그것을 밝힐 때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한다(新民)는 설은 공자께서 조율한 바가 있으니, 하나 하나 가리켜서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다.
동몽(童蒙)에게 물은 것은 “옛날에 사람을 가르치는데 각각 그 규모에 맞게 가르치는 곳이 있으니, 가(家)에는 숙(塾)을, 향당에는 상(庠)을, 주에는 서(序)를 국에는 학(學)을 두어 가르치는 법을 갖추었다. 오늘날에도 옛 제도를 따르고 모방은 하고 있었으나 한갓 형식만 갖추었을 뿐 실효는 전혀 없으니 어찌하여서 인가.” 하였다.
12월 26일 : 지난 밤에 눈이 내려서 산과 들이 온통 하얗다. 들으니 흥암서원을 이건할 목재를 운반하는 일로 백성들이 난리를 만나 각 면의 민정들이 모두 식량을 싸 가지고 가서 며칠씩 운반하는 데도 목재가 크고 길어서 운반해 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1749년(영조 25)
1월 5일 : 새벽이 된 뒤에 도남서원 도정사에 참배하고 밥을 먹은 뒤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다. 두춘(斗春)과 군일(君一)이 왔다. 재임이 나와서 여군당(呂君鐺)에게 줄 통문을 써서 남겨 두었는데 향사를 거행하기 전에 다시 오기가 어려워서이다. 군일은 긴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고 오직 두춘과 문통만을 붙잡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일 : 도남서원 사람이 와서 여용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순영(巡營)에 보낼 답장과 양중·두춘에게 보낼 편지를 썼는데, 이달 21일에 모일 것을 알리는 약속으로 모두 읍내에 보내어 전하여 주게 하였다. 오늘 각 창에서 곡식 나누어 주는 일을 마쳤는데 현창(縣倉)에는 남은 환곡이 아직도 많다. 이면의 백성이 환곡을 갚을 수량이 많아서 앞으로 큰 폐단이 될 것인데 온 나라가 모두 그러하다. 상주의 환곡은 다른 읍과 견주어 볼 때 수량이 적은데도 오히려 이와 같다. 지난 해 승지 박필간(朴弼幹)의 소(疏)에 소견이 없지 않았으나, 조정에서 전혀 받아들여 시행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5월 8일 : 상산지를 수정하는 일로 고을의 여러 노인에게 편지를 부쳐 21일에 도남서원으로 와 모일 것을 청하였다.
5월 18일 : 진목촌 고확이를 찾아보고 미전촌 권두명의 집에가서 말먹이를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매악서당(梅岳書堂)에 가니 여러 사람들이 상산지를 수정하는 일로 와 모였다, 상사 조희문(曺希文)도 외남에서 며칠 전에 왔다. 오랬동안 헤어졌다가 만났는데, 요즈음 안질이 조금 나아서 책을 볼 수가 있다니 기쁘다.
5월 20일 : …(전략)… 여용과 정보가 도남서원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읍내에서 이내직과 오성재, 이태보, 이지명 형제가 와서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긴 비가 개이지 않아서 도롱이를 입고 산을 내려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니, 초록빛 강물과 짙푸른 절벽이 기이하고 예스러워 사랑할 만하다. 자천대와 신정(新亭)을 쳐다보니 아스라이 공중에 있어서 풍경이 정자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
먼저보고 느낀대로 절구 두 수를 지어 읊으니, 백종 부자가 차운하였다. 백종이 보고 느낀대로 절구 한 수를 읊고 또 7언 율시로 멀리 작별하는 심경을 읊기에 곧바로 차운하여 이에 작별시를 지어 주었다. 용암(龍巖)을 거쳐 귀암(龜巖)에 가는데 그 사이 서쪽 언덕바위가 볼 만한 곳이 있었다. 또 이름을 쓸 만한 곳이 있었으나 바쁘고 여가가 없어 들러지는 못하였다. 풍우단(風雩壇) 동쪽에 와서 배를 데고 내려서 서원 재사로 들어갔다. 용여가 어제 죽파에서 자고, 오늘은 저물녁에 자천대에 자고 곧바로 서원에 왔다. …(하략)…
6월 4일 : 도남서원 사람이 와서 전해 준 이건공과 손서응의 편지를 받아 보았고 백화(白華)․봉성(鳳城)․지천(智川) 등 서당 세 곳에서『상산지』를 수정하여 보내 왔다.
8월 1일 : 비가 내리다가 개였다. 저녁이 된 뒤에 도남서원 묘지기와 도사령(都使令)이 나를 만나러 왔다. 여용의 편지를 받아보고 또 기서의 장문의 편지를 받아 보았으며 또 그의 선조 신와공(新窩公)의 상산지 속지 한 책도 보내 왔다. 창석이 상산지를 수찬한 뒤에 이어서 수찬한 상산지 속지로 숙종 경오년(1690)까지만 수찬하고 그만 두었으니 그 후에 근 60년이 된다.
8월 12일 : 해가 뜰때 해 언저리에 한 줄기 황색 구름이 있고 그 밖으로 한 줄기 백색 구름이 있었으며 또 그 밖으로 한 줄기 검은색 구름이 있었다. 두춘이 보러 와서 고을 소식을 자세히 전하여 주었다. 기서가 또 장천 조씨 문중에 장문의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하니, 쓸데없는 일에 간섭함이 너무 심하다. 여든 노인이 어찌 꼭 이와같이 번거롭고 요란스럽게 해야 하는가. 목사는 오직 간략함 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내가 편찬한 상산지 속지를 보고는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다고 하면서 더 줄일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1754년(영조 30)
7월 11일 : 들으니 검호에 가뭄으로 물이 말라 물고기를 잡던 채씨 형제가 못에 빠져 죽었다고 하고 과부로 살던 그 어마니는 그 일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하니 참혹하다. …(하략)…
8월 16일 : 오전에 상주목사가 보낸 편지를 삼가 받아보니, 이달 10일 주상께서 친림하신 도목정사에서 내가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이조의 하인이 아직 필시 오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달려가 알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듣고나니 매우 떨리고 두렵다. 이는 천만 꿈밖이다. 남인이 이조의 직임을 맡지 않은지가 벌써 50년이다. 신축년(1721) 겨울에는 심단(沈檀) 대감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소론이 논척하여 행공하지 못하고 체차되었다. 곧바로 답장을 써서 온 사람에게 부쳤다. 저녁이 된 뒤에 이조의 하인과 색장구종(色掌驅從) 및 구종 2명이 왔다. 교지 두 장과 도정 홍중인과 우윤 홍중형 형제, 사간 이광식․정언 권항․청하 권정택 등의 여러 편지가 왔다. 단골서리 이덕항과 색장서리 손덕유․김담령․흥문이 보낸 고목도 왔고 조보와 도목정사 초고도 왔다. …(중략)… 이조참의는 대신에게 물어 변통하되 ‘장망(長望)으로 갖추어 의망하라’ 고 전교하니, 좌의정 조현명이 곧바로 들어와서 일찍이 대사성을 지낸 사람으로 심성진․윤심형․오수채․한익모․이창수․홍봉조․홍중일 등 7인을 갖추어 장망에 의망하였다. 이에 주상이 어필로 “사간원 대사간 권상일” 아홉 글자를 쓰시고 그기에 낙점을 하셨다. 이는 참으로 이전에 없던 특별한 은전이다. 인신이 이러한 은전을 입었으니 어떻게 받들어 감당하겠는가 놀랍고 떨리어 몸둘 바를 모르겠다. 도중에서 소를 올려 체직을 빌고 새재를 넘어 한걸음도 나가지 않기를 작정하고 싶으나 분수와 의리에 있어 너무 황송하여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9월 2일 : 아침에 들으니 산양 다섯 개 면은 모두 방목(榜目) 소식이 없는데, 오직 김명일의 시지(試紙)만 단지 두곳에 동그라미를 치고 등급은 기록하지 않은 채로 군사(軍士)에게 부쳐 왔다고 하니 괴이하다. 저녁이 된 뒤에 들으니 …(중략)… 온도의 방목을 보니 우리 상주가 22인, 함창이 7인 …(중략)… 이정연(李鼎延) 군과 조석철(趙錫喆) 군도 입격하였으니 기쁘다.
1751년(영조 27)
9월 1일 : 7월부터 지금까지 가물어서 기장과 조, 메밀 및 순무가 특히 심한 피해를 입었고 늦벼도 대부분 피해를 입었다. 강원도와 서북의 양도는 올해도 참혹한 흉년이라고 하니 나라의 걱정이 클 것이다. 아침이 되기 전에 외남의 상사 김광○이 보러와서 공망(公望)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도남서원의 향안(鄕案) 가록(加錄)을 새로 설립한 각 처에 나누어 보내는 일 때문이다. 년전에 이 논의가 있어서 도남서원의 임원이 향중의 원로들에게 여쭈었고 내가 또 선배들의 정론(定論)이 있기 때문에 지금 경솔하게 허락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발미(跋尾)에 제사(題辭)하였다.
10월 5일 : 전임 상주목사가 읍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였다. 빈(賓)은 강유인(姜惟仁)이고 찬(儧)은 …(원문빠짐)… ○랑 상정(象靖)과 존자(尊者)와 장자(長者), 고을의 원로가 다 모였는데, 모인 사람이 천여 인이라고 한다.
1752년(영조 28)
7월 19일 : 신임 상주목사의 답장을 받아 보았다. 그리고 쌀과 미역, 물고기, 고기, 종이, 간지(間紙) 등 여섯 가지 물품을 보내왔다. 존자(尊者)가 보낸 물품을 비록 감히 받지 않을 수는 없으나 여러차례 구제하여 주어서 마음속으로 송구하고 감사하다. 곧바로 사례하는 편지를 써서 올렸다.
12월 21일 : 유곡에서 조보 소식을 들었다. 초 10일에 비로소 주상께 소를 진달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직임을 살펴라” 라고 하였다. 초 6일 주상이 본궁에 거동하였다가 어가가 돌아올 때 선화문에 자리하셔서 차마 들을 수가 없는 하교를 많이 내렸다고 한다.
1753년(영조 29)
3월 23일 : 조석철 군이 보러오고 순흥 족제 상덕이 왔는데, 일전에 그의 누이 장사를 보는 일로 가오곡에 나왔다고 한다.
5월 21일 : 들으니 문경 새재 이북은 초 10일과 12일 두 차레의 비가 모두 내리지 않아서 가뭄이 몹시 심하여 주상께서 몸소 여러 차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상주목사도 어제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하략)…
9월 6일 : 들으니 도남서원에서 재회(齋會)를 파한 뒤에 유천(酉川)의 여러 사람이 일제히 와서 가록(加錄)한 책을 꺼내어서 이름을 도려내어 제거할 것을 청하여 분란이 막심하였다고 한다. 우리 고을에 이런 행동거지가 있을 것이라고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아주 놀랍고 개탄스럽다.
10월 29일 : …(전략)… 최 숙빈(崔淑嬪)의 사묘(私廟)를 원(園)으로 승격한 일로 종묘에 고유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사면령에 “나는 한, 당, 송, 명의 고사와 같은 경우는 나는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다. 대개 지금의 신료들 마음이 혹 성상께서 추숭하는 조치가 있을까를 염려하여 근심과 의심을 견딜 수 없었는데, 이 한마디 말씀을 보니 마음이 아주 시원하고 다행이다.
11월 24일 : 상주목사가 월초에 말미를 얻어서 돌아가려고 하므로 문안 편지를 써서 올렸다. 그리고 우리집의 환곡을 감제(減除)해 줄 것을 청하였다.
11월 12일 : 병조의 조보 한 통이 ○곡에서 왔다. 이달 초 4일 병조에서 초기로 “이번 육상궁에 거동할 때 본조 당상시위의 이원을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고, “새로 임명된 병조참판 권상일이 지금 영남에 있어서 언제 올라올지 알 수 없습니다. 정원이 품지학을 변통하여 인원을 갖추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아뢰었다고 한다.
12월 2일 : 들으니 새재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람이 많아서 길이 통하지 않아 상주영장과 충주영장이 많은 포수를 이끌고 호랑이 포살에 나섰다고 한다.
1755년(영조 31)
1월 17일 : 정자 조석우(趙錫愚)가 실주서(實注書) 추천에 들었는데 수찬 조숙이 추천하였다고 한다. 기쁨을 이길 수 없다. 이 사람은 인물됨과 문장이 이 직책을 맡기에 충분하다.
2월 15일 : 상주목의 예방 아전이 와서 서울에서 보내온 조보와 교지를 바쳤다. 이달 초 4일 이조참판 조재홍이 혼자 시행한 정사에서 내가 대사간의 수망에 들어 낙점을 받았다. 초야에 있는데도 조정의 관직에 다시 임명됨이 그치지 않으니 황송함을 이길 수 없다. …(하략)…
8월 6일 : 활짝 개었다. 북천교가 저번 홍수에 다 무너져 휩쓸려서 터마저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 다시 세우려고 하나 근래에 비가 내려서 강물이 불어났기 때문에 공사를 시작할 수가 없다. 김용사 중 50여 명이 부역을 하러 올라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이 다리는 넓이가 거의 한발 정도로 쌍가마가 다닐 수 있으며, 높이는 거의 두어 길이고 또 아주 견고하였다. 돌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완성한지 몇백 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자기 다 무너져 내렸으니 수재의 혹심함을 알 만하다.
8월 27일 : 덕천서원 심부름꾼이 와서 전하여 준 향중 여러 사람들의 답장 및 도유사 하덕형(河德亨)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향사는 잘 마쳤으며 모인 인원은 24인이라고 한다.
8월 28일 : 덕천서원에 보내는 답장을 썼다. 기어코 체직할 작정이어서 세 번째의 단자를 함께 보냈다.
9월 1일 : 도남서원 하리가 와서 현신하였다. 정 참봉이 단천으로 또 원장으로 선출된 것 때문에 글을 올려 곡절을 진술하였으니 너무 놀랍다. 팔순의 늙고 병든 사람이 모든 일을 사절하고 모든 향중의 각 기관 임원을 호천하는 등의 일 또한 일절 그만 두었는데, 하물며 임명하는 것이겠는가. 그가 이와 같음을 알고서도 오히려 추천하여 선출하였으니 원보가 행한 일은 알 수가 없다. 이는 원중에 반드시 풍파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진정시키고자 이런 조치를 한 것일 것이다.
9월 19일 : …(전략)… 시장 물가는 돈 1냥에 벼는 열 말, 쌀은 너 말, 콩은 여섯 말이고 목화는 아주 귀해서 무명 한 필 가격이 2냥 5~6전이라고 한다.
10월 5일 : 들으니 고을 사람들이 읍내에 모여서 올해 환곡은 전답의 마지기수를 헤아려서 갚기로 하였다고 한다. 또 각면의 도감을 뽑고 논 한 마지기에 쌀 한 말, 밭 한 마지기에 벼 한 말씩으로 하였다고 한다.
10월 21일 : …(전략)… 이튿날 주상께서 선정전에 임어하여 진노하며 하교 하시기를,
“오늘은 당론을 근절해야 되겠다. 역변이 있을 때마다 남인, 소론을 일컫는데 비록 노론인들 어찌 역적이 없겠는가. 마땅히 편당하는 노론의 영수 2~3인의 목을 벨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김재상 이하 모든 노론이 한꺼번에 이 뒤로는 당론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다같이 소를 올리고 항복할 것을 청하였으나 오직 재상 유척기, 윤급 두 사람이 소를 올리지 않았다
주상께서 “유척기 그가 끝내 항복할 것을 청하지 않으니, 한 사람의 척기가 감히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라고 하였다.
계속하여 하교 하시기를 “이 뒤에 다시 당론을 주장하는 자 및 사색당파 중에서 서로 통혼하지 않은 자와 전관(銓官)에 먼 지방의 산관(散官)을 추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역적의 죄로 다스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숙종의 진전(眞殿)에 알현하면서 친히 말로,
“당론이 끝까지 조정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불초한 저에게서 말미암아서입니다. 빨리 죄를 줄 것을 명하소서. 이 뒤에 다시 당론을 일으키는 자는 선왕의 영령께서 그에게 죽음을 내리게 하소서. 동궁이 만약 당론을 조정하지 못한다면 동궁에게 천록이 영원히 끊기게 하소서” 라고 빌었다.
11월 22일 : 구담 김경 군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또 포은 선생의 친필 임본(臨本) 한 장을 보내 왔으니 고마움을 이길 수 없다. 선생께서 영천에서 개성으로 갈 때 상주 서문 밖 김선치 공을 찾아 보았고 작별할 때 시 한수를 남겨 준 것이 본집 중에 있다. 그러나 손수 쓴 그의 시 한 첩이 어떤 연유로 둘러서 안동 구담 김기○ 공의 집에 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포은 선생의 외손으로서 반드시 한 본을 모사하고자 하여 연전에 김군에게 말하여 청한 것이다. 지금 과연 모사하여 보내 왔는데, 기세가 날아 움직여 살아 있는 듯하니 아주 기쁘고 다행이다.
1756년(영조 32)
9월 26일 : 약포의 화상은 서울로 가져가 주상께서 보신 후에 손수 화상 찬(畵像撰) 4구를 지었다고 한다. 이 일은 다만 본가의 영광과 행운일 뿐 아니라 영남도 함께 빛남이 있는 것이다.
윤 9월 8일 : 들으니 대과의 방목에 영남 사람이 여섯 명으로 우리 상주에서 조석룡(趙錫龍)․조석목(趙錫穆)이, 안동에서 남용현이, 영주에서 안경열이, 경주에서 이수일이, 인동에서 장수룡이 급제하였다고 한다. 조석용․조석목 두 급제자는 장하고 기특하다.
12월 21일 : 감영의 식물 단자가 왔다. 호조가 전교로 인하여 보낸 관문에 따라 전임 참판 권상일에게 의복과 음식물로 쌀 5석, 황두 5석, 명주 10필, 돼지 1구, 조기 20속, 민어 10미를 보낸다고 하였다. 나라에 큰 경사가 있는데도 늙은 신하가 하례하는 반열에 달려가지 못하여 한 통의 소를 올려 작은 정성을 조금이나마 폈다.
1757년(영조 33)
11월 28일 : 남촌 여러 사람이 존애원(存愛院)에 모여 편지를 보내왔다. 답장을 써서 보냈다.
12월 19일 : 들으니 상주목사가 모래 함창에서 자고 22일에 부임한다고 한다. 읍민으로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상산속지(商山續誌) 도청소(都廳所)의 성우주(成宇柱)와 조하달(曺夏達)이 유생 성대주(成大柱)에게 품목을 맡겨 보내왔으나, 병으로 서로 만나지 못하고 몇마디 말로 간략히 답장을 써서 부쳤다.
1758년(영조 34)
3월 28일 : 손자 복인이 검호(儉湖)에 있는 우복(愚伏) 선생 비석 만드는 곳에 갔다. 이는 우복 선생의 신도비 비문이 본래 조 용주(趙龍洲)가 찬한 것을 중간에 이 갈암(李葛庵 : 李玄逸)이 찬한 자손록(子孫錄)으로 인하여 이전에 새긴 것까지 깎아 내어 올봄에 다시 빗돌을 갈아 다만 …(원문빠짐)… 깎아내고 다시 빗돌 새기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지금 다 마치지 못해서이다.
4월 4일 : 바람이 그치고 날씨가 맑다. 손자 복인이 함창에서 불어난 강물을 건너 돌아왔다. 우복선생의 신도비 새기는 일은 다 마쳐 간다고 한다. 비석이 아주 넓어서 쓴 글자의 모양도 크다고 한다. 이 신도비는 숙종 임신년(1692)에 영양 정석교(鄭錫僑)가 석공을 모아 비석을 새우려고 이 갈암에게 자손록을 청하였는데, 인형왕후(仁顯王后)가 선생의 외증손이 되고 또 그때 물러나 살았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 있어서 감히 쓰지 못하였다. 갑술년(1694)에 복위되고 몇년 뒤 사또 송병익(宋柄翼)이 상주목사가 되자 율리(栗里 : 청리면 율리) 본가에 시켜 그 비문을 깎아내게 하였다. 그 후에 잘 처리하기가 곤란하여 그냥 두었다가 올봄에 다시 새기기 시작한 것으로, 오직 조 용주가 지은 비문만 쓰는 것이다.
4월 15일 : 새벽에 기제사를 지냈다. 낳아서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추모하는 망극한 마음을 견딜 수 없다. 오늘 검호에 우복 선생 비석을 산소 앞에 세우는 일때문에 손자 복인이 맡은 일이 있어서 어쩔수 없이 나아갔다. 저녁에 기여가 검호에서 돌아왔다. 모인 인원이 300여 인이라고 한다.
부석사 중 찬영(璨瑛)이 보러왔다.
9월 17일 : 상주목사가 친히 감영에 가서 관찰사와 함께 의논하여 저쪽은 터무니 없이 사람을 모함하였으므로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내용으로 초사(招辭)를 올리고 이쪽은 이날 이후로 갑작스런 말이 없을 것이라고 초사를 올려서 다 풀려났다고 한다 다행이다.
1759년(영조 35)
1월 14일 : 김이경 군이 맡은 일이 있어서 읍내에 갔다가 오늘 저물녁에 돌아왔다. 전하기를 상주(喪主) 강필악(姜必岳)이 일전에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주상의 환후가 말끔히 회복되어 사면령을 반포하였다고 한다. 신민의 경사스러움과 다행함을 말할 수 없다. 주서(注書) 조석우(趙錫愚)가 약방이 입시하여 반사할 때 특별히 6품에 올랐다고 한다.
발문(跋文) : 우리 할아버지의 일기는 무인년(1698)부터 돌아가시기 10일 전까지 썼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권은 다만 기묘년(1759) 두어 달만 기록되어 있고 그 나머지는 달과 날을 다 고찰할 수가 없으니 혹시 다른 책에 옮겨 기록하였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일기는 모두 30여 권으로 여러 집에 흩으져 있으니 일일이 찾아내어 후손에게 전하여 준다면 선조께서 손수 쓴 필적 및 전후의 사적이 볼수록 더 새로워져서 당시의 선조를 추모하고 감모(感慕)하는 마음이 이 한 권을 마져 읽고 나서 더욱 절실할 것이다.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대일기 번역본은 800여 쪽의 책 4권에 이른다.
6. 상주 관련 주요기사(主要記事)에 대한 고찰(考察)
청대일기에는 상주의 사료가 될 만한 내용이 상당히 들어 있다.
그 중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과 사실이 다른 것과 기타 참고할 만한 사실도 있다. 몇가지 주요한 사실들을 엮어서 고찰하기로 한다.
가. 도남서원에 관하여
상주사료와 관련한 청대일기 중에는 도남서원에 대한 내용이 제일 많다. 청대는 24세가 되던 1703년 10월 1일에 처음으로 도남서원을 방문하였다.
청대가 도남서원에 대한 기록을 제일 많이 남겼다는 것은 도남서원이 사론의 중심으로서 그 만큼 비중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 내용 또한 중요한 사실이 수록되었다.
- 1709년 10월 21일 성주 유림이 창석 이준을 배향하자는 사론이 있었다고 한다. 특별히 성주의 유림이 상주 출신인 창석을 배향하자는 사론을 표명하였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사실이라고 하겠으나 창석의 도남서원 배향은 이미 그 당시부터 도내에서 중요한 사론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결과적으로 2005년도에 창석 이준을 배향 하였다는 것은 도향의 차원에서 원만한 처사였다고 할 수 있다.
- 1711년 8월 22일 자에 도남서원에 배향한 주벽 5현의 필적을 서원안에 새겼다고 하는데 새겨 놓은 흔적을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 1721년 7월 1일 자에 원장 천망을 받아 같은 달 26일에 취임을 하였다.
원장의 천망은 서원의 회중에서 수망(首望), 부망(副望), 말망(末望) 등 3인을 추천하여 선임하는 절차에 따라서 그중에 청대가 수망으로 낙점되었는데 취임하기까지 두 번에 걸쳐 사양하는 단자를 보내는 기록이 있다.
도남서원 원장이라는 직임이 그만큼 막중함을 뜻함과 아울러 사양하는 두 번의 단자는 관레상 통과의례였던 것으로 짐작한다.
무엇보다도 청대가 원장으로 취임할 때의 나이가 42세에 불과 하였다는 것은 그 시대로서도 관례상 이 외의 직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취임은 하였으나 수년동안 흉년을 만나 서원에 물력이 고갈되어 부채가 100꾸러미가 될만큼 운영에 난감함을 토로하였는데 부채의 가액이 어느 정도인지는 추정하기 어려우나 상당 액수인 듯 한데 어떻게 변제를 하였는지가 자못 의문이다.
- 1721년 8월 21일 자에 영귀문(詠歸門) 밖에 석단을 쌓아 풍우단(風雩壇)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풍우단의 기록은 계속 전해오긴 했으나 그 위치를 상고하기 어려웠다. 청대가 어느 날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다가 풍우단을 거쳐 영귀문으로 들어 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서원 동쪽 담장 밖에 있는 언덕 쯤으로 추정할 수 있고 현장을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 1721년 8월 26일 : 서원 건물 현판의 글씨가 누구인지 명확히 기록하였다.
묘우 도정사는 만취(晩翠) 오준(吳浚)이요, 일관당(一貫堂)과 경재(敬齋), 의재(義齋), 영귀문은 조시호(曺時虎) 공이며, 도남서원 사액시(賜額時)에 내려진 현판의 글씨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의 현판 중에 일관당 현판이 남아 있을 뿐으로 알고 있었는데 특별히 경재와 의재 현판은 이번 청대일기로 인하여 그 소재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필자와 조시호 공의 자손인 상주문화원 조희열 전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과 청대일기를 같이 보면서 경․의재 현판이 자기들 선사가 배향된 지강서원(芝岡書院) 현판으로 알고 상주박물관에 기탁을 하였다는 말을 들은 바, 그 현판은 필시 도남서원의 것이 분명하다는 필자의 설명을 듣고 수긍하였다. 현재 일관당 동서 방문 앞에 게첨한 경재 의재 현판은 최근에 조순(趙淳) 부총리가 원장으로 재임시 휘필한 것인 만큼 새로 찾게 된 조공(曺公)의 글씨로 다시 각자하여 방안에 게첨하여 옛 것을 되살리는 것이 옳다고 본다.
- 같은 날 기록에 동․서재(東․西齋)는 갑자년(1684)에 건립하였음을 분명히 적어 두었다. 지금까지는 도남서원에 동․서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을 뿐이었고 언제 건립하였는지 모호하였는데 새로운 사실로 밝혀졌다.
- 같은 날 기록에 “명륜당도 중간에 불에 타서 류 장령(柳掌令)이 이 일을 담당한 유사로서 고쳐 지은 것이다.” 라고 운운 하였으니 도남서원에 명륜당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다만 명륜당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알 수 없음이 아쉽다.
- 도남서원의 향례시각은 지금까지 해 오던 축시(丑時)로서 현재의 시간으로는 01시부터 03시 사이에 봉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16년 금년 춘향부터는 시류에 따라서 아침 묘시(卯時)로 시각을 변경하였다.
- 1721년 12월 1일의 기록에 의하면 서원에 비치된 원록에 이름을 등재하지 않았다고 하여 현직 재임이 사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당시에 원록에 이름이 올랐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삼았음을 엿볼수 있다. 이후 비치하고 있는 원록에 덛붙혀 가록(加錄)한 명부에 수록 대상이 부당한 인물을 등재하였다는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여 이름을 도려 내기를 요청하거나 일부 인사가 기존에 등재한 인물이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자의적으로 이름을 삭제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있었을 정도로 중요한 부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725년 6월 14일자에 도남서원 원장을 사임하였는데, 청대가 원장을 역임한 3년 10개월여 간 현판의 보수 및 풍우단의 축조 조성과 여러번 강학을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바 있으나 현재까지 청대로 하여금 알려 지고 있는 정허루의 이름을 지은 것과 함께 현판의 글씨를 휘호하였다는 것이 일기내용에 기록 되지 않았다.
- 같은 해 6월 26일에는 향교의 임원 성모 일행이 도남서원에 난입하여 임의로 원장과 재임을 선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청대가 6월 14일에 사임을 하고 서원의 회중에서 원장 등 임원이 공석 중에 있음을 틈타서 반대정파에서 집행부를 강제로 장악한 것인듯 하여 당시에 정파간의 심각한 갈등을 엿 볼 수 있다.
- 이후 정파간에 갈등은 여러군데 기록이 되었는데 1745년 8월 8일에는 어떤 과객이 심원록에 있는 성모 김모의 이름 자를 검은 먹으로 권점을 쳐 삭제한 사건이 발생하여 그 사실을 향교에 알려서 행위자를 처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같이 정파간에 심각한 갈등은 특히 도남서원이 그 중심으로 일기에 여러 가지 사례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소위 영남의 남인 정파의 사론의 중심이 바로 도남서원임을 증명하고 상대편인 집권세력은 도남서원이 항상 큰 부담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다.
- 1747년 11월 25일 청대가 동부승지로 재임할 당시의 일기에 영조 임금과의 대화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그중에 상주와 관련한 중요 사실 가운데 도남서원과 관련한 사실을 상고한 바, 오늘에도 익혀야 할 내용이 있으며 그 당시 도남서원의 위상을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 안동과 상주에 관한 물음에 대하여 두 고을은 도내 상류의 큰 고을로 명현이 배출되어 선조때에는 4명의 재상을 배출 하였으니 안동에는 류성용과 정탁이고 상주에는 노수신과 이덕형이라고 하여 상주의 위상을 부각하고자 하였다.
· 이어서 상주 도남서원에 배향한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 등 주벽 5현과 노수신․류성용․정경세 등 배향위 3현에 대하여 설명한 바, ‘하필 조광조를 제외한 것이 혹은 당색으로 사론에 불만이 있어서인가’ 라는 영조의 물음에 상주는 한 도의 요충지로서 선정(先正) 여러 신하들이 왕래하고 두루 거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정경세의 주창으로 영남출신 유현들만 봉향하였다는 영남을 배경으로 한 도남서원의 지역적 창설 배경을 설명하였다.
· 서원 향사에 원장과 유생의 복식에 대한 영조의 물음에 대하여 도산서원 원장은 복두(幞頭)와 단령(團領)을 입고 도남서원은 원장이 관을 쓰고 청금(靑衿)을 입었다고 하였다.
· 영조가 도산과 도남서원에서 향음주례를 행한 일이 있는가를 물은 것에 도남서원에서 강학하는 모임만 하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 상주에 학문하는 선비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수신하고 조신하는 이는 없지 않으나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을 감히 지적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 1748년 9월 5일의 일기에
오전에 대축(大祝) 류성림과 장찬 채래, 황성중, 김광철 등이 읍내에서 황촉과 제물을 받들고 왔기에 곧바로 희생(犧牲)을 살피는 성생례(省牲禮)를 하였는데 전례에 희생을 끌어오는 한가지 절차가 없는 것이 흠이다. 신시에 축문을 썼다.
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몇가지 살펴보면
· 향사에 축문을 읽는 참제원을 서원의 경우 대개 그냥 ‘축’ 이라고 하는 것이 통례인데 ‘대축’이라고 명명하였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고
· 성생례를 행하였다고 하는데 대개 고을의 목사가 보낸 생돼지의 품질을 감품(鑑品)하는 것으로, 그 당시에는 도남서원 향사에 그와 같은 예가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하였다.
· 축문을 신시에 썼다고 하는데 축문을 써는 것도 별도로 정한 시각이 있었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 1749년 5월 20일에는 도남서원에서 비가 오는 데에도 우장을 하여 여러 벗들과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 자천대와 용암을 거쳐 귀암에서 강상 풍류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니 바로 유명한 낙동강 범주시회(泛舟詩會)를 가졌다는 것이다. 하류로 다시 내려 와 서원의 동쪽에 있는 풍우단의 동쪽에 배를 대고 내려서 서원 재사로 들어 갔다고 한다.
상고컨대, 지금까지 밝혀진 도남서원의 낙강범주시회 기록에는 청대가 개최한 별도의 시회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 기록으로 기존의 누가(累加)한 시회에 더 하여야 할 대목으로 본다.
나. 근암서원에 관하여
근암서원은 청대가 살고 있는 한 마을로 일상적으로 접하는 기록들이 많이 있으나 그중에 중요한 기록 몇가지를 여기에 상고 하기로 한다.
- 1702년 2월 26일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와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을 배향하기 위하여 옥성서원에서 회합을 가졌고 같은 달 26일에 봉안제를 지냈다고 한다.
- 1709년 3월 16일 일기에 “오늘이 재계(齋戒)를 마치는 날” 이라고 하였는데 재계라고 함은 제삿날 이전 수일동안 궂은 일을 보지 않는 등 조신(操身)하는 일종의 근신기간을 가진 후 바르고례를 꼭 여행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 상산지 청대본 찬술에 관하여
오늘에 중요한 향토사록으로 전하고 있는 상산지 청대본은 청대 자신이 찬술 하였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이름을 청대본(淸臺本)으로 매김하였다. 한 고을에서 향지를 새로 편찬하는 일이야 말로 신중하고도 조심스런 비중이 있는 책본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교통이 불편한 전통시대에 각종 통계 자료를 수합한다거나 특별히 인물에 관한 내용의 수록에는 문벌간 또는 지역간에 상당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대단히 민감한 부분을 합리적으로 완성하여 지역의 역사로 남겨 주었다는 것에 우선 경의를 드리는 바이다.
일기의 내용에는 편찬과정에 있었던 여러 가지 곡절을 수록하였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몇가지 내용이 실려 있을 뿐이나 현대에 참고해야 할 몇가지 사실을 여기에 옮기기로 한다.
- 원고의 수정에 대하여 3회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1749년 5월 8일과 같은 해 5월 18일과 6월 4일에 관내 각 서원과 서당을 통하여 수정, 교정을 한 것으로 보이고 관내 각 문중의 장노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남서원에서 향회를 가져 대체적인 여론을 수렴한 기록이 있다.
- 같은 해 8월 1일 일기에는 창석이 수찬한 상산지를 그의 손자 신와 이재관 공이 속지를 간행하였고 그 후 숙종 경오년(1690)에 수찬하고 그만 두었으니 근 60년 만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점을 일기에 적어 두었다.
- 8월 12일 일기에는 상주목사가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다고 더 줄일 것을 간청하였다고 하여 현재의 청대본의 내용이 상당량 축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살펴보건데 청대본 상산지는 청대가 70세가 되는 노년에 남긴 역작으로 1749년(영조 25)에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일기의 내용에 이건에 대한 기록은 같은 해 5월 8일부터 수정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기록하여 원고의 집필은 이미 그 전년도 이전부터 초고가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일부 내용은 1690년 숙종년간에 모아 놓은 기록을 이용하였을 수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근 1년간의 수정으로 간행하였다는 것이고, 책이 간행된 이후부터 이 책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을 볼 때 청대와 같은 선각자였기에 이와 같은 큰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라. 충열사 창건과 정기룡 장군 봉안에 대하여
- 충열사를 창건하고 정기룡 장군을 충열사에 봉안하는 과정에는 분분한 사론이 있었다.
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08년 10월 19일인데
고을에서 충열사를 지어 판관 권길과 통제사 정기룡을 제향하기로 하고 막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권공의 정충대절로 정기룡과 나란히 제향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사리를 모르는 자들이 정기룡에게 비중을 두어 그를 윗자리에 봉안하려고 하고 상주목사의 의견도 그러하니 통탄할 일이다.
라고 하였고 1709년 3월 19일에는
찰방 김종무를 충열사에 함께 배향하는 일로 선산에서 통문이 당도하였다. 우리 주의 매악과 도악에서도 통문을 띄웠다고 한다. 김종무는 선산 사람으로 임진난 때 사근도 찰방으로서 상주에서 혼전 중에 죽었다.
라고 하였으며 1711년 3월 27일의 일기에는
충열사 봉안이 내일이어서 일전에 외남 등 여러 곳에서 통문이 왔다. 판관 권길을 통제사 정기룡과 함께 같은 사당에 제향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일 때문이다. 이 논의는 매우 정당하나 당초에 사당 건립은 오로지 정공을 위해서 였는데 지역에서는 권공을 높이고자 하여 함께 제향을 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는 상주 고을의 절반이 모두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에 이르러 정공을 제쳐 두기는 매우 난처한 일이고, 또 정공도 나라에 충성한 공로가 있고 우리 상주에도 큰 공덕이 있으므로 한 읍에서 존숭하고 보답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하여 여러 의논이 완전히 정해 졌으며 밀고 당길 일이 없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 이튿 날 봉안제를 거행한 후 4월 1일 기록에는
가친께서 읍에서 돌아 오셨다. 그저께 충열사에 봉안제를 결행하였는데 위판의 순서는 권판관이 윗자리이고 정 통제사가 다음이었다. …(중략)… 담장 밖에 또 한칸의 작은 사당을 건립하여 박걸을 제향하기로 하고 읍의 아전으로 하여금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고 한다. 박걸은 상주의 호장으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권공과 처음부터 끝까지 생사를 같이 하였다. 그의 의롭고 정열함은 찬란히 빛나서 창석옹이 쓴 권공의 비문에 그 사실을 아주 상세히 말하였다.
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데 충열사를 건립하게 된 처음 연유는 정기룡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하였으나 아마도 정공의 신분에 대한 격을 문제삼아 판관 권길을 윗자리에 봉안한 것이고 이와 함께 김종무를 합향한 것이다. 그리고 호장 박걸의 위판은 당시의 엄격한 신분에 따라서 같은 사당에 합향하지 못하고 담장 밖에 별사를 건립하여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따로 제향을 드리는 것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사묘의 창설 일자는 사당을 건립한 일자가 아니고 배향 위판을 봉안한 날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충열사 창설일자는 1711년 3월 28일, 배향위판을 청대본 상산지에 수록한 충열사 창설일자는 숙종 무자년(1708)으로 되어 있으니 모호하다. 뿐만 아니라 1928년 일제 강점기에 찬술한 상산지 무진본에는 숙종 24년 무인년(1698)으로 수록되어 혼란 할 수 밖에 없다.
역사기록의 혼란은 역사 자체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 관련 역사적 사실에 큰 오류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청대일기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진만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참고로 현존하고 있는 청대본 상산지의 발문 끝에 기록한 일자를 보면 정사년 서(丁巳年 書)라고 하였으므로 1749년 청대가 찬술한 진본을 48년이 지난 정사년(1797)에 와서 필사한 것이 분명하여 필사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겠으나 상산지 무진본에는 일기에 명정한 1711년 보다 무려 13년이 앞선 1698년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연구할 과제이다.
마. 기타 관내 원사 창설 및 봉향에 대하여
청대 권상일은 문인 학자이므로 당시 선비들의 교유장소로 사론의 중심이었던 서원 등에 관한 사실이 많이 실려 있어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기로 한다.
1704년 3월 7일의 일기에 이 월간, 전 사서, 강 남계 등의 사당을 건립하는 일로 이달 3일 몇몇 사람이 옥성서원에 모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상고컨대 강남계 는 이미 1702년(숙종 28)에 연악서원에 배향한 바 있는데 3현사를 합향하는 사당을 다시 건립하겠다는 것은 모호하다.
1725년 3월 28일의 일기에
듣건데 옥성서원 향사모임에 주신재와 김개암을 효곡서원에 함께 봉향하자는 통문을 내었다니 아주 뜻밖이다.신재는 이미 소수서원에 입향하였는데 어떻게 효곡서원에 병향할 수 있겠으며 개암 역시 그의 자손들이 필시 선뜻 따르지 않을 것이다. 신재는 본래 상주사람으로 그의 증조부가 칠원으로 옮겨 간 것이다. …(중략)… 근래에 사당을 세우는 일은 참으로 세변(世繁)이다. …(하략)…
라고 하였다. 효곡서원은 공성면의 여산송씨 송량을 주벽으로 하는 서원인데 아마도 주신재와 김계암과 같은 현사를 합향하여 서원의 격을 높이고저 하는 것으로 청대의 의견은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표명하였다.
주신재는 관향이 상주이고 이후 사기에도 상주인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느때에 상주를 떠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번 청대일기에 그와 가까운 증조부 대에 칠원(합천)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주신재를 상주인이라고 하여도 크게 허물됨이 없다고 본다.
1748년 9월 22일 일기에 흥암서원을 이건하는 용재를 산북면 대승사에서 60여 그루 베어 두었고 같은 해 12월 26일 기록에는 이 목재를 100여 리 운반하는데 각 면의 민정들이 모두 식량을 싸가지고 며칠씩 동원되고 있으나 목재가 크고 길어서 운반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기록이 있다.
일기에 기록한데로 문경 대승사와 상주 흥암서원까지 크고 긴 목재를 100여 리 운반할 수 있었다는 것은 흥암서원이 집권세력에서 관장하는 서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흥암서원의 이건에 관한 기록에 대하여는 정확한 고증이 없다. 다만 일기의 날자 이후 14년이 지난 1762년(영조 39)에 오늘의 연원동 구서원 마을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것인 듯 한데 100여 리 먼 거리에서 양질의 목재를 운반하여 14년동안 묵혀 두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므로 청대일기에 적시한데로 1748년 목재를 운반한 이후 곧바로 이건을 한 것으로 짐작 하면 이건년도가 더 앞일 수도 있다.
1755년 8월 27․28 양일간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에 체직할 단자를 3번째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단자의 내용은 원장을 사임하고자 하는 통지문인 것으로 이해한다.
덕천서원은 경남 산청에 남명 조식(曺植)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영남학맥 중에서도 퇴계학맥과는 가닥이 다른 계통이고 청대 자신이 퇴계학맥을 전수하였다고 자부하면서 원장을 역임하였다는 것은 상당히 이 외의 처신으로 볼 수 있으나 먼 거리에 학맥이 다른 인사였던 청대가 원장을 역임하였다는 그 자체로 청대의 인물 됨을 엿볼 수 있다.
바. 공갈못에 대하여
- 1709년 1월 24일 일기에 이르기를 섣달 그믐 날에 공검지 못에는 마치 밭을 갈아 놓은 듯한 용경(龍耕)이 있었는데 올해는 없다고 하니 흉년이 들 조짐이 아닐까 근심이라고 하였으니 예부터 공갈못과 관련하여 태촌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이 용갈이 설화에 대하여 과학적 사고와 지성으로써 변설한 일화가 전하는데 그 내용을 옮겨 참고하고자 한다
검호는 함녕의 남쪽 10리쯤에 있는데 곧 동국의 큰 못이다. 매년 겨울 얼음이 얼면 반드시 터지는 곳이 생기는데 그 형상이 마치 전답에 도랑을 낸 것 같은 게 혹 못둑까지 뻗치어 비록 혹한일지라도 다시는 얼지 않으니 민간에서 용경이라고들 했다. 주민들은 그 얼음이 터진 넓이를 보고 한해의 풍흉을 점쳤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용의 짓이랴. 내 생각에는, 추위가 극심한 계절이면 양기가 물밑으로 갈아 앉는데 얼음이 얼면 기가 통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한곳이 터지게 되어 양기가 다 이곳을 통하여 발산되므로 다시는 얼지 않을 뿐이라고 본다. …(후략)…
이상과 같은 민속 또한 지역의 전래 민속으로 소중한 사례이니 만큼 기록으로 잘 전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 1719년 2월 20일 자에 아버지 병환에 공검지 물고기를 사와서 봉양하였다고 하니 당시에 공검지에는 상시 물고기를 파는 시장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 1748년 윤 7월 1일자에 검호 동쪽 정승대에 장막을 치고 시회를 열었다는 일기가 있다. 예부터 검호에서 많은 시회가 열린 기록이 전하지만 청대가 주관한 시회기록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기에 청대문집 등을 상고하는 등 후일의 연구과제로 남긴다.
사. 우복 신도비에 대하여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신도비는 관내 공검면 부곡리에 있다. 현존 기록에 의하면 “정경세 선생의 증손자 정석교가 경상감사 이명준(李命俊)으로부터 기증을 받은 남포석에 비각작업을 하고, 세우지 못하던 것을 현손 정주원(鄭冑源)이 음기를 찬하고 1758년에 6대손 정종로(鄭宗魯)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비를 세우기 까지의 속사정이 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었으니 그 내용을 살펴 보기로 한다.
- 1758년 3월 28일자에
손자 복인이 검호에 있는 우복 선생의 비석 만드는 곳에 갔다. 이 비문은 본래 조 용주(趙龍洲)가 찬한 것을 중간에 이 갈암(李葛巖)이 찬한 자손록으로 인하여 이전에 새긴 것까지 깎아내어 올봄에 다시 빗돌을 갈아 …(하략)…
라고 하였고, 같은 해 4월 4일자에는
우복 선생의 신도비 새기는 일은 다 마쳐 간다고 한다. 비석이 아주 넓어서 글자의 모양도 크다고 한다. 이 신도비는 숙종 임진년(1692)에 정석교가 석공을 모아 비석을 세우려고 이 갈암에게 자손록을 청하였는데, 인현왕후가 선생의 외증손녀가 되고 또 그때 물러나 살았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 있어서 감히 쓰지 못하였다. 갑술년(1694)에 복위되고 몇 년 뒤 사또 송병익(宋柄翼)이 상주목사가 되자 율리 본가에 시켜 그 비문을 깎아 내게 하였다. 그 후에 잘 처리 하기가 곤란하여 그냥 두었다가 올봄에 다시 새기기 시작한 것으로 조 용주가 지은 비문만 쓰는 것이다.
위 일기의 내용을 살펴보건데
우복의 신도비 비문은 당초 용주 조경이 찬한 것에 갈암 이현일이 중간에 자손록을 추기한 것인데 그 자손록에는 필시 숙종의 계비이자 우복의 사위인 동춘당 송준길의 외손녀로서 우복의 외증손녀가 되는 인현왕후가 들어 있었으니, 인현왕후는 노론 정파 출신이었지만 이른 바 장희빈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 정파가 집권하게 되는 기사환국(1689)이 일어나 자손록 작성 당시에는 폐서인의 신분이 되었으므로 하여 그 내용을 감히 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다시 노론 정파가 정권을 되 찾게 되는 갑술옥사(1694)가 일어나 마침내 인현왕후는 복위를 하게 되었고, 그 몇 년뒤 송준길의 손자인 송병익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우복 본가에 조경과 이현일이 쓴 비문을 깎아내고 조경이 지은 비문을 다시 새겼다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현재『상주의 문화재』에 수록한 우복 신도비의 찬술자는 정주원이 아니고 용주 조경이 확실하므로 수정함이 마땅하다.
아. 북천교에는 수백 년된 돌 교량이 있었다.
1755년 8월 6일자에
북천교가 저번 홍수에 무너져 터마져 없어졌다고 한다. 다시 세우려고 하나 근래에 비가 내려서 냇물이 불어나 공사를 못하는 실정이다. 김용사 중 50여 명이 부역을 하러 올라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이 다리는 넓이가 거의 한발 정도로 쌍가마가 다닐 수 있으며, 높이는 거의 두길이고 또 아주 견고하였다. 돌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완성한지 몇백 년 인지도 모른다.
라고 하였다. 북천교의 역사 기록은 일찍이 상산지 창석본에서부터 수록되어 왔었는데 그 교량의 역사와 규모를 알만하고 수해복구에 100여 리나 되는 김용사 승려 50여 명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긴급한 현안사업에 장정 인력동원으로 특별히 승려집단을 투입하였다는 것과 50여 명이 동원될 만큼 김용사의 사찰규모가 컷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사실이다.
자. 교유(交遊) 인물
청대와의 교유는 전국적 이었다고 할수 있다. 그중에 일기에 거명한 당대 상주의 현사들을 살펴보면 중모의 황익재, 외답의 이만부, 율리의 정주원, 장천의 조달경․조석철․조석우, 유천의 흥양 이씨 장노들 등 수많은 인물이 거명되고 특별히 고향 상주 출신이 소·대과에 입격한 인물에 대하여는 일일이 거명하면서 고무적 사실로 찬양하였다. 교유하였던 인물과 내용은 앞의 제4항 “상주관련 청대일기 탐사”로 대신한다.
차. 기타 상주사(尙州史)와 관련하여
일기의 내용 중에 기타 상주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들을 추려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 조령 산성에 최초로 내성(內城)을 쌓았다.
1709년 4월 3일자에 조령 산성에 내성을 쌓은 기록이 있는데, 이 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논의가 있어 왔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이제야 비로소 도내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새로 쌓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상고컨대 조령은 지형상 국방의 요새 이었음에도 1592년 임난 당시 순변사 이일 장군의 판단착오로 성을 이용하지 못한 것을 내도록 아쉬워 하는 것일진데 임난을 겪은지 어언 120여 년에야 축성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1749년 9월 27일에도 조령의 성을 쌓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는 함창의 연호군(煙戶軍)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청대의 시대가 조선조 말기인데 당시에 도내의 승군을 동원 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때까지 승군 제도가 있어 왔음을 알게 하고 동원한 인원은 명기하지 않았으나 봉화불을 담당하는 연호군 인력의 규모가 성을 쌓는데 동원할 만큼 많았음을 알 수 있다.
- 돈을 주고 말 한 필을 구입하였다.
1710년 1월 14일 중동에서 돈 21 꾸러미를 주고 말 한 필을 사 왔다고 하는데 당시로서는 말이 교통의 긴요한 수단인 만큼 가정에서 큰 재산이라고 할 수 있은 즉 그 가액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 호랑이의 피해가 많았다
일기에는 호랑이 피해에 대한 사실이 여러 번 기록되었다.
1754년 12월 2일자에는 상주와 충주의 영장(營將)이 합동으로 포수들을 동원하여 포획 작전을 하였다고 할 만큼 피해가 우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카. 경천대(擎天臺)와 채득기(蔡得沂)에 대하여
1724년 1월 23일자에 경천대의 옛 이름인 자천대와 채득기 공에 대한 일기를 적어 두었는데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요약하여 상주사료로서 참고가 되고저 한다.
- 채공은 난재 채수의 현손으로서 본래 함창 사람인데 이곳의 산수를 즐겨 옮겨 살았다.
- 채공은 병자호란 뒤에 의술로서 조정의 명을 받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심양으로 갔을 때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시에 차운하여 “원망과 책망 어찌 하늘과 사람에게 미치리오” 라고 하는 시로서 채공에게 차운하여 올릴 것을 명할세 공이 그 시에 차운하여 짖고 또 그 서문을 덧 붙이니 오로지 복수와 설욕의 심경을 시로 주고 받았다.
귀국 후 공이 자천대에 은거 할 때 별좌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효종이 동궁에 있을 때 여러 차례 편지를 부치고 또 이곳의 그림을 부치도록 하였는데 등극하기 전에 공이 죽어 안타깝다고 하였다.
- 공의 증손자 채휴징이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 대의 밑에 바위에 세면함과 바둑판을 깎아 놓았고 그 옆에는 초가집 두어 칸이 있다.
- 주변에는 귀암 용암 병암 옥주봉과 같은 절경이 있고 강 건너에는 부제학을 지낸 김우굉이 이름붙인 개구암이 있다.
이상 위의 내용 중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大明天地 崇禎日月” 각자는 채공의 증손자 채휴징이 새긴 것이고 대의 밑에 파 놓은 작은 돌 웅덩이는 세면함이라고 하였으니 세간에서 이것을 정기룡 장군의 용마 말 구유통이라는 등 분분한 말들은 억측이라는 사실임이 밝혀졌다.
타. 환곡(還穀)의 변제(辨濟) 방식에 대하여
1749년 5월 1일자에 의하면, 오늘 주민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도 현창(縣倉)에는 재고량이 많이 남았다고 하고 백성들이 환곡 갚을 수량이 많아서 앞으로 큰 폐단이 될 것인데 그 양상이 전국적이라고 하였다.
1755년 10월 5일자에는 금년도 환곡의 변제는 전답의 마지기 수를 헤아려서 논 한마지기에는 쌀 한말, 밭 한마지기에는 벼 한말씩으로 하였다고 기록하여, 환곡으로 인한 주민들의 폐단과 그 변제 방식에 대한 당시 사회상의 일부를 엿보게 한다.
7. 맺음 말
청대 권상일은 당시에 상주 관할이었던 문경 근암촌 출신으로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조상에 이어서 가학으로 독학정진한 현사로서, 조선 숙종 영조년간 당쟁기에 영남인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정2품 관직에 오른 현사이다.
그가 남긴 방대한 문집중『청대일기』에는 상주사(尙州史)에 관한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 그 내용중에 오늘의 향토사 측면에서 꼭 알아야 할만한 주요한 대목을 가려서 정리하여 밝히므로서 상주 향토사 연구와 학습에 참고가 되고, 현실적으로 이 일기에 전하는 사실과 다르게 기록한 일부 향토사 내용에 대하여는 다시 한번 상고(詳考)하여 진실을 규명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끝으로 필자의 글이 서툴고 정연하지 못함을 자인하면서 뒷사람 누구인가 더 차원높은 연구가 있기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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