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유학의 학맥과 기호유교문화권
黃義東(충남대 명예교수)
1, 시작하는 말
한국유학사는 그 연원이 멀리 삼국시대에 까지 소급되지만, 유학이 하나의 학파로서 형성되고 또 인물중심의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이후라고 보아진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도 王仁, 薛聰, 崔致遠, 强首, 崔承老, 安珦, 白頤正, 李齊賢, 崔溥, 禹倬, 鄭夢周, 鄭道傳, 權近 등 많은 유학자가 있었지만, 조선유학이 본격적으로 하나의 학파로 전개되고 도학, 성리학, 예학, 실학, 의리학, 양명학, 개화사상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된 것은 조선시대 이후라 할 수 있다.
또한 시대적으로는 15세기 사화시대에 金宗直, 金宏弼, 鄭汝昌, 柳崇祖, 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도학풍이 성행하였고, 16세기에는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는 먼저 花潭 徐敬德(1489~1546)의 氣철학이 이채롭게 나타났고, 이와는 달리 理를 중시하는 主理철학이 晦齋 李彦迪(1491~1553), 退溪 李滉(1501~1570), 牛溪 成渾(1535~1598)을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高峰 奇大升(1527~1572), 栗谷 李珥(1536~1584) 등은 主理, 主氣를 지양하고 理氣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학풍을 열었다.
조선시대의 학파 분기는 단순히 학문적, 철학적 특성만으로 되어진 것은 아니다. 지역적 연고와 정치적 당파까지 복잡하게 연계되어 형성되고 전개되었다. 한국유학사에서 학파의 분기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대체로 크게 보면 기호유학과 영남유학으로 대별할 수 있다. 종래에는 기호학파하면 곧 율곡학파를 일컫고 영남학파하면 곧 퇴계학파를 일컫는다고 보았으나, 최근의 학계 견해는 기호학파도 栗谷學派와 牛溪學派로 세분화해 보고 있고, 영남학파도 退溪學派와 함께 南冥學派를 함께 일컫게 된다. 기호학파에서도 율곡의 위상에 비해 牛溪 成渾을 중심으로 한 우계학파의 존재나 위상이 무시된 감이 없지 않고, 또 영남학파의 경우도 퇴계학파에 비해 南冥 曹植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의 존재나 위상이 지나치게 경시된 감이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새로운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조선유학사에서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또는 율곡학파와 우계학파가 형성되어 전개된 것은 퇴계. 율곡이후라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이러한 단초가 되고 계기가 된 것은 퇴계와 고봉간에 이루어진 退高四七論辯과 율곡과 우계 사이에서 이루어진 牛栗性理論辯이라 할 수 있다. 즉 1559년부터 1566까지 이루어진 퇴계와 고봉간의 성리논변은 양자의 학문적 깊이와 특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의미 있는 논쟁이었고, 또 이 논쟁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수준이 일층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이어서 1572년 율곡과 우계가 인심도심론 등 성리 전반에 걸쳐 논쟁을 벌리게 되는데, 이 논변도 양대 학파 전개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율곡이 퇴계의 설에 동의하는 우계를 상대로 논변을 하게 되는데, 율곡은 사칠론에 있어서 고봉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였고, 우계는 끝까지 퇴계의 主理, 主氣의 변별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이들의 이 논변을 계기로 퇴계의 後儒, 율곡의 後儒들이 대를 이어 비판과 옹호의 논리를 전개하면서 학술적, 철학적 차이를 보이게 되고, 나아가 자연스레 퇴계, 율곡을 정점으로 한 학파의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尤庵 宋時烈, 葛庵 李玄逸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성리논쟁과 대립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정치적 이해가 당파와 직결됨으로써 학파는 곧 정파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즉 영남학파는 동인, 기호학파는 서인으로 분파되어 학문적 대립과 함께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본고는 기호유학의 학맥을 더듬어 보고, 이를 통해 기호지역의 유교문화권을 검토해 보는데 목적이 있다. 기호지역은 본래 근기와 호서 그리고 호남까지를 아우르는 것이다. 학맥의 전개양상을 근기, 호서, 호남 전반에 걸쳐 살펴보고, 유교문화권의 지형은 광역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2, 기호유학의 학맥
(1) 기호유학의 선구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인물은 고려 충렬왕 때의 晦軒 安珦(1243~1306)이라고 할 수 있다. 안향은 1289년 원나라에 가서 4개월 정도 머물다 1290년에 『朱子全書』를 베껴 돌아와 주자학을 소개하였다. 그 후 충청도 남포(보령) 출신 彛齋 白頤正(1260~1340)은 원나라에 가서 10년 동안 머물며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돌아왔다. 그 뒤를 이어 稼亭 李穀(1298~1351), 牧隱 李穡(1328~1396) 부자는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는데, 충남 서천의 한산 출신이다.
鄭臣保(?~1271), 鄭仁卿(1241~1305) 부자는 13세기 고려의 유학자로서 서산 정씨의 시조인데, 정신보는 본래 중국 송나라 절강사람으로 남송의 성리학자였다. 그는 1237년(고종 24년) 몽고의 침입으로 남송이 망할 무렵 不事二君의 의리로 고려국 간월도에 망명하였다 한다.
또 石灘 李存吾(1341~1371)는 말년에 공주 석탄(현 부여 저석리)에 은거하였고, 여말에 절의를 지킨 冶隱 吉再(1353~1419)는 금산과 인연이 있다. 사육신 梅竹軒 成三問(1418~1456)은 홍성 출신이고, 醉琴軒 朴彭年(1417~1456)은 연기, 회덕과 연고가 있으며, 李塏(1417~1456)는 李穡의 증손자였다.
또한 15. 6세기에 걸쳐 사화가 일어남에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정권에서 쫓겨나고 유배를 당하고 희생을 당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약 50여년에 걸쳐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훌륭한 인재들이 희생되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도학의리가 강조되었다.
15세기 道學의 중심적 인물인 靜庵 趙光祖(1482~1519)는 서울출신으로 개성 천마산, 지평 용문산에 들어가 독실히 경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金宏弼(1454~1504)의 문인인데, 유교적 이상정치를 추구하다 己卯士禍에 희생되었다. 그의 동료, 문인으로는 奇遵, 韓忠, 金淨(1486~1520), 朴祥, 金絿, 金湜, 安處順 등이 있어 기호에 도학 의리의 싹을 틔웠다. 冲庵 金淨(1486~1521)은 기묘명현으로 보은에서 태어났다. 雙淸堂 宋愉의 玄孫인 진사 송여익의 딸과 결혼하고, 회덕 법천사에 기거하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기묘명현 陰崖 李耔(1466~1524)는 한산 출신이고, 金安老를 탄핵하다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희생된 圭庵 宋麟壽(1487~1547)는 회덕출신이다. 성삼문의 외손자인 巖川 朴增(1461~1517)은 세조의 불의에 항거하다 숨진 외조부의 의리를 계승하며 평생 논산 상월에 은거하여 처사로서의 일생을 살았다.
(2) 율곡학파
기호학맥에서 가장 큰 줄기는 율곡학파라고 할 수 있다. 이이는 강릉출신이지만, 친가는 경기도 파주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성혼, 송익필과 평생 우의를 돈독히 하면서 기호학파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율곡은 기호학파의 祖宗으로 李滉, 李彦迪의 主理論과 徐敬德의 氣철학을 종합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沙溪 金長生(1548~1631), 重峰 趙憲(1544~1592), 守夢 鄭曄(1563~1625), 默齋 李貴(1557~1633), 楓崖 安敏學(1542~1601), 松崖 朴汝龍(1541~1611), 子張 金振綱 등이 있었다.
율곡의 嫡傳인 金長生은 ‘東方禮學의 宗匠’으로 연산을 중심으로 강학하였고, 그 문하에 많은 제자들을 거느려 율곡학파의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아들 愼獨齋 金集(1574~1656)을 비롯하여 尤庵 宋時烈(1607~1689), 同春堂 宋浚吉(1606~1672), 谿谷 張維(1587~1638), 草廬 李惟泰(1607~1684), 浦渚 趙翼(1579~1655), 松崖 金慶餘(1596~1653), 釣巖 李時白(1592~1660), 象村 申欽(1566~1628)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주로 예학 연구에 몰두하여 예학시대를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장생의 적전인 宋時烈은 성리학, 의리학, 예학 등에 밝았고, 율곡 성리학의 계승에 주력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遂庵 權尙夏(1641~1721), 農巖 金昌協(1651~1708), 滄溪 林泳(1649~1696), 芝村 李喜朝(1655~1724), 畏齋 李端夏(1625~1689), 西浦 金萬重(1637~1692), 遜齋 朴光一, 丈巖 鄭澔(1648~1736) 등이 있었다.
송시열의 적전인 權尙夏는 충북 제천의 淸風에서 강학을 하였는데, 그의 문하에서 人物性同異논쟁이 벌어져 조선조 성리학의 심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논쟁의 대표적 인물로는 南塘 韓元震(1682~1751), 巍巖 李柬(1677~1727), 華巖 李頤根, 秋潭 成晩徵, 梅峰 崔徵厚, 冠峰 玄尙璧, 鳳巖 蔡之洪(1683~1741), 屛溪 尹鳳九(1681~1767) 등이 있었다.
또한 김창협의 문하에는 杞園 魚有鳳(1672~1744), 贍村 閔遇洙(1694~1756) 등이 있었고, 丈巖 鄭澔(1648~1736)의 문하에는 迷庵 金偉材가 있어 이후 過齋 金正黙(1739~1798), 剛齋 宋穉圭(1759~1838), 守宗齋 宋達洙, 淵齋 宋秉璿(1836~1905)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윤봉구의 문하에는 存齋 魏伯珪(1727~1798)가 있었고, 한원진의 문하에는 雲坪 宋能相(1710~1758)이 있어 心齋 宋煥箕(?~1807)로 이어졌다.
또한 율곡과의 직접적인 학맥은 닿지 않지만, 율곡을 私淑하고 학설에 동조했던 非師承 율곡계열에는 靜觀齋 李端相계열과 陶庵 李縡계열이 있다. 李端相(1628~1669)은 李廷龜의 손자로 송시열, 송준길과 깊은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그의 문하에는 林泳, 金昌協, 三淵 金昌翕(1653~1722) 등이 있었고, 김창협의 문하에는 黎湖 朴弼周(1680~1748), 櫟巢 金信謙, 魚有鳳 등이 있었다.
또한 李縡(1680~1746)의 문하에는 渼湖 金元行(1702~1772), 謙齋 朴聖源(1697~1757), 櫟泉宋明欽(1705~1768), 鹿門 任聖周(1711~1788), 雲湖 任靖周(1727~1796) 등이 있었고, 金元行의 문하에는 頤齋 黃胤錫(1729~1791), 湛軒 洪大容(1731~1783), 近齋 朴胤源(1734~1799), 寧齋 吳允常 등이 있었다. 박윤원의 문하에는 梅山 洪直弼(1776~1852)이 있어 이후 全齋 任憲晦(1811~1876), 艮齋 田愚(1841~1922)로 이어진다. 또 오윤상의 문하에는 그의 아우 老洲 吳熙常(1763~1833)이 있었는데, 그의 학맥은 鳳棲 兪莘煥(1801~1859), 絅堂 徐應淳(1824~1880)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李縡 계열은 湖洛논쟁에서 주로 洛論계열에 속하는데, 여기에서 洪大容으로 시작되는 北學派 실학이 나올 수 있었다.
또 하나 非師承 栗谷계열은 華西 李恒老(1792~1868)의 계열인데, 한말 衛正斥邪에 앞장섰다. 이항로는 주자와 송시열을 매우 존숭하였는데, 그의 문하에는 重庵 金平黙(1819~1891), 省齋 柳重敎(1831~1893), 勉庵 崔益鉉(1833~1906), 毅庵 柳麟錫(1842~1915) 등이 있었다.
또한 기호유학에 직접적으로 師承관계는 닿지 않지만, 철학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때, 이른바 ‘經世致用實學派’의 磻溪 柳馨遠(1622~1673), 星湖 李瀷(1681~1763) 등도 넓게는 율곡학파에 포함할 수 있다. 또 실학의 북학파 계열도 홍대용이 이재, 김원행의 문하에 있어 이후 燕巖 朴趾源(1737~1805), 楚亭 朴齊家(1750~1805)로 연결되며, 實事求是學派의 秋史 金正喜(1786~1856)도 박제가의 문인이다.
(3) 우계학파
기호유학의 또 다른 큰 학맥은 ?牛溪學派?라고 볼 수 있다. 성혼은 聽松 成守琛(1493~1564)의 아들로 趙光祖의 문인이다. 따라서 우계학파는 멀리 여말 鄭夢周, 吉再의 의리학파에 연원하고 있다. 우계의 문하에는 사위인 八松 尹煌(1572~1639)을 비롯하여, 重峰 趙憲(1544~1592), 隱峰 安邦俊(1573~1654), 默齋 李貴(1557~1633), 守夢 鄭曄(1563~1625), 秋浦 黃愼(1560~1617), 睡隱 姜沆(1567~1618), 釣巖 李時白(1592~1660), 忠莊公 金德齡(1567~1596), 仙源 金尙容(1561~1637), 月沙 李廷龜(1564~1635), 晩退軒 申應榘(1553~1623), 滄浪 成文濬(1559~1626), 晩谷 崔起南, 白沙 李恒福(1556~1618), 楓潭 權克中(1560~1614), 楸灘 吳允謙(1559~1636), 望庵 邊以中(1546~1611) 등이 있어 그 문호가 융성하였다. 이에 따라 우계의 학통은 坡平 尹氏로 이어져 尹煌의 아들 魯西 尹宣擧(1610~1669), 손자 明齋 尹拯(1629~1714)으로 이어졌다.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이후 노론, 소론으로 분당되고 南溪 朴世采(1631~1695)를 비롯하여 윤선거의 문인 明村 羅良佐, 윤증의 문인 定齋 朴泰輔(1654~1689), 霞谷 鄭齊斗(1649~1736), 漁村 韓永箕, 閔以升, 德村 梁得中(1665~1742), 一庵 尹東源(1685~1741), 老村 林象德(1683~1719), 有懷堂 權以鎭(1668~1734) 등이 하나의 정파를 이루면서 학파적 결속을 이루게 되었다. 그밖에 윤증의 장인 炭翁 權諰(1604~1672)도 이 속에 포함될 수 있다. 이들 우계학파에는 초기 양명학자들이 포함되어 있고, 정제두는 한국 양명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그의 문하를 중심으로 이른바 ‘江華學派’를 형성하였다.
(4) 호남유학
호남유학은 대체로 15세기 도학의 흐름과 함께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계기가 된 사건이 담양부사 訥齋 朴祥(1474~1530), 순창군수 沖庵 金淨(1486~1512), 무안현감 劉沃이 올린 「愼妃復位疏」였다. 이는 당시 많은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박상은 남평으로, 김정은 보은으로 유배되게 되었다. 박상은 큰 형인 朴禎에게서 배웠는데, 박정은 佔畢齋 金宗直과 교류하였다. 박상의 문인으로는 石川 林億齡(1496~1568), 鄭萬鍾, 俛仰亭 宋純(1493~1583)이 있고, 思庵 朴淳(1523~1589)은 화담의 문인으로 그의 조카이다. 특히 그는 金麟厚, 奇遵과도 교유함으로써 후일 호남유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호남의 도학적 맥은 錦南 崔溥(1454~1504)-柳桂隣-懶翁 柳成春으로 이어져 왔다. 최부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해남에 살면서 尹孝貞, 林遇利, 柳桂隣 등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유계린의 문하에서는 柳成春, 眉巖 柳希春(1513~1577) 형제가 배출되었다.
또한 新齋 崔山斗(1483~1535)-河西 金麟厚(1510~1560) 계열도 도학에 있어 중요한 갈래이다. 金宏弼은 순천 유배생활 5년 동안 崔山斗, 柳桂隣, 崔忠成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김인후는 최산두에게서 배웠다. 김인후의 문하에는 松江 鄭澈(1536~1593), 孤竹 崔慶昌(1539~1583), 奇孝諫, 卞成溫, 梁子徵 등이 있었다. 그밖에 기대승의 季父인 服齋 奇遵(1492~1521)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온성에서 유배되어 사사되었고, 그 후 奇씨 일가가 광주로 낙향하였다. 知止堂 宋欽(1459~1547)은 장성출신으로 연산시대에 낙향하여 도학적 기풍으로 존경받았고 梁彭孫, 宋純 등을 길러냈다. 그 밖에도 高敬命의 조부였던 高雲, 조광조와 함께 至治실현에 앞장섰던 安處順, 朴紹 등이 도학선상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다.
의병의 형태로 의리실천에 나섰던 이들로는 임진왜란 때 金千鎰, 高敬命, 高從厚, 高因厚 3父子, 任啓英, 朴光前, 崔慶會, 金景壽, 邊士貞, 梁大樸, 沈友信, 閔汝雲, 任希進, 姜希悅, 金德弘, 金德齡 형제, 양산도, 李宗仁, 黃進, 張潤 등이 있었고, 한말의 奇宇萬, 奇三衍, 全基泓, 崔濟學, 安圭洪 등이 있었다. 그밖에도 全奉準의 갑오동학혁명이나 일제하의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가까이는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 까지 호남에서의 의리적 실천운동은 연면히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호남사림의 의리정신은 호남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는 점이다. 즉 정치적 격변기에 절의와 의리를 지키다가 정권에서 소외된 지식인들이 멀리 호남지역으로 落南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성리학적 흐름의 맥을 짚어 보기로 하자. 성리학적 측면에서는 16세기의 金麟厚, 朴淳, 奇大升, 李恒, 姜沆, 18, 9세기의 田愚, 李基敬, 奇正鎭 등이 있어 호남유학을 주도했다.
高峰 奇大升(1527~1572)은 己卯名賢 服齋 奇遵의 조카로서, 16세기 성리학 전성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그는 1559년부터 1566년까지 退溪와 四七理氣論辯을 벌린바 있는데, 이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했을 뿐 아니라 퇴계의 성리학 발전에도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율곡의 성리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 세계 일체 존재는 理와 氣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한다. 즉 氣 없는 理의 세계나 理 없는 氣의 세계를 부정함으로서 理氣不相離의 관점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四七論에서 퇴계처럼 사단칠정을 상대적으로 對擧해 보지 않고, 인간의 情은 칠정 하나뿐이고 사단은 그 가운데 善情에 불과하다고 보는데서 잘 나타난다. 즉 인간의 감정은 칠정으로 대표되고, 사단이란 그 칠정 속의 도덕적 감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고봉의 감정론은 일원적인 ‘七包四’의 논리로서 일반적인 보통사람의 감정을 중심으로 본 인간관이라 할 수 있다.
蘆沙 奇正鎭(1798~1879)은 전북 순창출신으로 고향은 장성이다. 선조 奇遠은 服齋 奇遵의 仲兄이다. 그는 李滉, 徐敬德, 李珥, 任聖周, 李震相과 더불어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것은 그가 理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花潭과 栗谷의 主氣的 경향을 비판하고, 理涵萬殊說을 주장하여 唯理論의 성리학을 정립하였다.
艮齋 田愚(1841~1922)는 한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鼓山 任憲晦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西勢東漸과 일제의 침략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꿋꿋이 성리연구에 전념하였던 醇儒였다. 그는 栗谷을 동방의 공자로, 宋時烈을 동방의 주자로 칭송하며, 이들의 성리학을 전승하는데 전력하였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부안 앞바다의 왕등도로 들어갔고, 그 이듬해에는 다시 고군산도에 들어간 이후 왕등도, 고군산도를 거쳐 계화도에 정착하면서, 죽을 때까지 일제가 지배하는 육지를 결코 밟지 않겠다는 절의를 지켰다. 이러한 그의 처세는 “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 가겠다”는 공자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는 서세동점과 일제의 침략 앞에서 自靖의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 학술적으로는 당시 心에 치우치고 氣에 치우쳤던 제 학설을 비판하면서, 율곡성리학 내지 주자성리학을 충실히 계승하였으며, 또한 ‘心은 性에 근본한다(心本性)’거나, ‘性은 스승이요 心은 제자이다(性師心弟)’라는 말로 대표되는 자신의 철학체계를 세웠다.
끝으로 실학적 흐름을 짚어 보기로 하자.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한 실학의 흐름은 17세기 經世致用實學을 대표했던 柳馨遠을 중심으로 魏伯珪, 黃胤錫, 申景濬, 丁若鏞, 河百源, 李沂, 李定稷 등이 있었다.
磻溪 柳馨遠(1622~1673)은 17세기 조선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磻溪隨錄』을 저술하여 조선의 전면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그는 평생을 야인으로 지내면서 국가의 부강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실제적인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31살 때부터 전라도 부안에 정착하여 저술과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농민을 직접 지도하고 구휼에도 힘썼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도 성리학, 역사, 지리, 병법, 음운, 선술, 문학 등 매우 폭넓은 학문을 섭렵하였다. 그는 나라의 개혁은 토지제도의 개혁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고, 농업을 중시하는 重農주의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茶山 丁若鏞(1762~1836)은 조선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나 ‘黃嗣永帛書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전남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됨으로서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縱으로는 磻溪와 星湖의 학통을 잇고, 橫으로는 北學 및 西學을 섭취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위치에 있다. 그는 자신의 학문체계를 ‘六經四書로서 몸을 닦고 一表二書로서 천하국가를 위하여 본말을 갖춘 바’라 하였다. 이처럼 그의 학문은 修己學으로서의 六經四書(經典學)와 治人學으로서의 一表二書(經世學)가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茶山學을 ‘洙泗學的 修己治人의 實學’이라고도 한다. 다산학은 經學이라 할 만큼 그는 유가경전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 당시 程, 朱의 경전해석과 구별되는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그 근본정신은 바로 洙泗의 원류로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程, 朱의 경전해석이 도리어 근본에서 변절되었다는 시각이었다.
그의 실학사상은 참으로 광범하여 경학 뿐 아니라 정치, 경제, 군사, 법률, 문학, 역사 등 광범한 분야에 걸쳐 5백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렇게 볼 때, 다산의 실학사상은 일면 磻溪, 星湖계통의 經世致用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또한 北學派의 利用厚生의 정신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특히 자주적 입장에서 유가경전에 대한 창의적 해석 작업을 수행함으로서 실학을 집대성했던 것이다.
圭南 河百源(1781~1844)은 신경준, 위백규, 황윤석과 함께 호남실학의 4대가로 일컬어진다. 그의 학문은 의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律曆, 산수, 自升車(양수기), 書畵, 圖章 등 광범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특히 자승거를 발명하고 東國地圖를 제작하는 등 실학적 흔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宋煥箕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배웠고, 7대조 河潤九로부터 증조인 河永淸에 걸쳐 형성된 실학적 家學을 이어 받았다. 하윤구는 당시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자명종, 천리경, 만국전도 등을 얻어 온 鄭斗源과 친교가 두터웠고, 하영청은 신경준, 황윤석, 홍대용, 나경적 등 당대 실학자들과 교유가 깊었다. 하백원은 성리학과 실학을 겸했다는 점에서 특이할 뿐 아니라, 사상의 내용면에서 명분 위주의 성리학적인 것과 실질위주의 실학적인 것을 함께 지니는 포괄적인 성격을 갖는다.
3, 기호 유교문화권의 지형 탐색
(1) 충남서북부 유교문화권
내포를 포함한 충남 서북부지역은 기호유교문화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지역은 충청도를 ‘충절의 고장’이라 일컫는데 근거가 되는 유교적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고려 말 충절의 상징인 崔瑩(1316~1388) 장군과 수양대군의 불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사육신 梅竹軒 成三問(1418~1456)이 바로 홍성 출신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한말 의병들이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숨진 홍주의병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한다. 또 志山 金福漢(1860~1924)은 병자호란 때 절의를 지킨 金尙容, 金尙憲의 후손으로 1895년 36살에 홍주 의병을 일으켰다. 아산에는 충무공 李舜臣장군을 모신 顯忠祠가 자리하고 있고, 예산에는 애국지사 尹奉吉 의사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또 천안 병천에는 독립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3. 1독립운동의 상징인 柳寬順 열사의 혼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말 華西學派의 중심인물로서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끌려가 굶어 죽으며 일제에 항거했던 勉庵 崔益鉉(1833~1906)도 청양 정산에 연고가 있다. 이처럼 충남 서북부지역은 유교적 의리와 충절의 전통을 잘 간직해 온 곳이다.
또한 이 지역은 18세기 湖洛논쟁 내지 人物性同異논쟁의 주역인 巍巖 李柬(1677~1727)과 南塘 韓元震(1682~1751)이 생장한 곳이다. 이들은 遂庵 權尙夏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이간은 人物性 同論을 주장하였고, 한원진은 人物性 異論을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이 논쟁은 사단칠정논쟁, 예학논쟁과 더불어 조선 유학의 3대 논쟁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한 한산 이씨인 고려 말 李穀, 李穡 부자와 그 후손인 李之菡이 모두 서천 한산에서 생장하였다. 稼亭 李穀(1298~1351), 牧隱 李穡(1328~1396) 부자는 고려 말 대표적인 通儒로서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土亭 李之菡(1517~1578)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土亭秘訣』을 저술하여 민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밖에 조선 초 청백리의 하나였던 古佛 孟思誠(1360~1438)은 아산 출신이고, 고려 말 원나라에 10년간 유학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전파한 彛齋 白頤正(1260~1340)은 보령 남포 출신이었으며, 南宋 절강성 출신으로 고려 중기 서산 간월도에 망명 귀화한 鄭臣保(?~1271)는 남송의 성리학을 고려에 전파하였다. 예산에는 秋史 金正喜(1786~1856)의 고택이 있는데, 김정희는 조선 최고의 금석학자이면서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다. 또 한말의 율곡학파라고 할 수 있는 鼓山 任憲晦(1811~1876)는 아산에서 강학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한말의 巨儒 艮齋 田愚(1841~1922)를 가르쳤다. 또 雪峰 姜栢年(1603~1681)은 청백리로 존경받았는데, 온양의 靜退書院, 충북 청원의 機巖書院에 배향되었다. 復泉 姜鶴年(1585~1647)은 서천 외가에서 태어나 13살 때에 신탄진 석봉동으로 이사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척화상소를 올렸다.
(2) 대전논산 유교문화권
공주를 포함한 대전, 논산 유교문화권은 기호유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기호유학의 양대 산맥인 율곡학파와 우계학파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정립한 곳이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연산은 율곡의 적전인 沙溪 金長生(1548~1631)과 그의 아들이면서 제자인 愼獨齋 金集(1574~1656)의 생장지요 강학의 장소였다. 또 사계, 신독재의 문인인 尤菴 宋時烈(1607~1689), 同春堂 宋浚吉(1606~1672)은 회덕출신이고, 草廬 李惟泰(1607~1684)는 공주출신, 魯西 尹宣擧(1610~1669)는 논산 노성출신, 市南 兪棨(1607~1664)는 금산을 연고로 하고 있었다. 이처럼 율곡학파의 중심 인물들이 주로 활동한 공간이 바로 대전, 논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또한 牛溪學派는 牛溪 成渾(1535~1598)의 사위인 八松 尹煌(1572~1639)을 통해 그의 아들인 魯西 尹宣擧(1610~1669), 손자인 明齋 尹拯(1629~1714)으로 이어갔는데, 이들의 활동 무대가 바로 논산 노성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인출신으로 노론과 남인간의 당쟁의 도화선이 되고, 자주적 학풍을 고수하다 송시열에 의해 斯文亂賊으로 배척당한 白湖 尹鑴(1617~1680)도 대전(공주 유천)에서 오랫동안 청년시절을 보냈고 그의 묘소가 대전에 있다. 아울러 당색으로는 남인계열이면서도 송시열, 윤선거와 連婚을 맺으며 호서 유현들과 깊은 교유를 가졌던 炭翁 權諰(1604~1672)와 그의 부친 晩悔 權得己(1570~1622), 손자 有懷堂 權以鎭(1668~1734)도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대전, 논산 유교문화권은 예학의 중심지이면서 정치적으로는 노론, 소론, 남인이 각축하고 갈등했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17, 8세기 정치적 격랑과 함께 학문적 이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했던 토론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은 문중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화적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대전 회덕 지역은 은진 송씨의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곳이며, 이들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은진 송씨의 入鄕祖라 할 수 있는 雙淸堂 宋愉(1389~1446) 이후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16세기 사화시대의 圭庵 宋麟壽(1487~1547)는 도학으로 존경을 받았는데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되었으며, 秋坡 宋麒壽(1506~1581)는 이 시대에 현실참여속에서 正道를 걷고자 노력하였다.
17세기에 와서 尤庵 宋時烈(1607~1689), 同春堂 宋浚吉(1606~1672)은 ?兩宋?으로 일컬어지며 율곡학파를 주도했는데, 沙溪, 愼獨齋의 嫡傳으로 예학에 밝았으며 ?東國 18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들의 발자취를 알 수 있는 南澗精舍와 同春堂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우암은 사계의 적전으로 성리학, 예학에 밝았는데 평생 의리로 일관하였다. 그는 효종의 부탁을 받아 북벌의리에 앞장섰으며, 영남학파의 학문적 도전에 대해 이론적으로 대응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동춘당은 우암과 친족으로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입장을 함께 했는데, 예학에 밝고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18세기에 이르러 霽月堂 宋奎濂(1630~1709), 玉吾齋 宋相琦(1657~1723), 櫟泉 宋明欽(1705~1768), 雲坪 宋能相(1710~1758), 性潭 宋煥箕(1728~1807), 剛齋 宋穉圭(1759~1838) 등이 활약하였고, 한말에는 錦谷 宋來熙(1791~1867), 淵齋 宋秉璿(1836~1905), 心石 宋秉珣(1839~1912), 立齋 宋近洙(1818~1902), 守宗齋 宋達洙(?~1858), 宋秉華 등이 성리학을 하면서 의병에 참여하고 또 일제에 대한 항일의 의리를 실천하였다.
또한 논산 연산에서는 율곡의 적전으로 ‘東方 禮學의 宗匠’으로 일컬어지는 沙溪 金長生이 자리를 잡고, 아들 愼獨齋 金集을 위시하여 尤庵 宋時烈, 同春堂 宋浚吉, 草廬 李惟泰, 魯西 尹宣擧, 市南 兪棨, 松崖 金慶餘 등을 가르쳤다. 이들은 사계가 죽자 이어 아들인 신독재로부터 배우기도 하였다. 사계, 신독재 부자는 조선 예학의 태두로서 기호예학을 창출하였으며, 동국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갖게 되었다. 광산 김씨는 사계, 신독재 이후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하였는데, 滄州 金益熙(1610~1656), 金益謙, 西浦 金萬重(1637~1692) 등이 그들이다. 연산에 遯巖書院은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배향하고 있고, 沙溪古宅과 사계, 신독재의 묘소, 一夫 金恒의 묘소가 있다.
또한 논산의 魯城에서도 기호유학의 큰 뿌리가 내렸다. 노성에 파평 윤씨가 세거하게 된 것은 尹暾(1519~1577)에 의해서였다. 윤돈의 아들 尹昌世(1543~1593)가 논산 광석에서 노성면 병사리로 이사하면서 이곳이 파평 윤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윤창세는 5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을 세칭 魯宗 5房派라 한다. 둘째 아들인 八松 尹煌(1572~1639)은 牛溪 成渾의 사위로서 병자호란 때 斥和에 앞장섰다. 윤황은 아들 8형제를 두었으니 尹勛擧, 尹舜擧, 尹商擧, 尹文擧, 尹宣擧, 尹民擧, 尹耕擧, 尹時擧인데 이들을 ‘8擧’라 부르는데 모두 훌륭한 유학자가 되었다. 특히 魯西 尹宣擧(1610~1669)는 사계, 신독재의 문인이면서 또 부친 윤황으로부터 배웠다. 우계학문을 계승하여 아들인 明齋 尹拯(1629~1714)에게 물려주니, 명재를 통해 우계학파가 정립되고 번창하였다. 우계학파는 당색으로는 소론계로서 율곡학파에 비해 비교적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색채를 가졌다. 우계학파는 전통적으로 율곡, 우계의 철학정신인 務實사상을 계승하였고, 명재 이후 霞谷 鄭齊斗(1649~1736)를 중심으로 한 江華學派로 이어져 조선 양명학의 맥을 이었다.
우계학파 내지 소론계 유학의 맥을 이은 이곳에는 魯岡書院이 있는데, 尹煌을 비롯하여 尹宣擧, 尹拯을 제향하고 있다. 또한 宗學堂과 尹拯古宅 등 파평 윤씨 魯宗 5房派의 묘소와 유적이 산재해 있다.
또한 대전의 탄방, 무수동에서는 안동 권씨의 유학자들이 道山書院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晩悔 權得己는 도학자였는데 그의 아들인 炭翁 權諰는 예학에 밝았다. 권시는 당시 호서의 명현인 宋時烈, 宋浚吉, 李惟泰, 尹宣擧, 尹鑴 등과 친밀한 교유를 하였다. 대전 탄방동에는 권득기, 권시를 제향하는 道山書院이 있고, 무수동에는 有懷堂 종가가 있다.
그런데 호서의 명현인 이들은 당시 복잡한 連婚관계에 있었으니, 윤증의 중부인 尹文擧의 아들이 尹搏인데, 윤박은 송시열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윤증은 권시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또한 송시열의 사촌 형인 宋時榮은 윤선거의 중부인 尹烇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며, 송시열은 권시의 아들 權惟를 큰 사위로, 윤문거의 아들 윤박을 둘째 사위로 맞아들였다. 또한 송시열의 系子 宋基泰는 南溪 朴世采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며, 윤증의 장인인 권시는 윤휴의 아들인 尹義濟를 사위로 맞았다. 따라서 윤증과 윤의재는 同壻之間이었다.
이렇게 볼 때, 윤휴는 송시열과는 동학의 벗이요, 권시를 통해 송시열과는 사돈간이며, 윤선거와는 권시를 통해 사돈간이며, 또 윤선거 일족의 외손이 되며, 권시와는 사돈이 될 뿐만 아니라 처족이 되는 처지에 있었다. 권시의 손자인 有懷堂 權以鎭(1668~1734)은 송시열의 외손으로 윤증의 문인이다. 그는 아버지 權惟와 은진 송씨(송시열의 딸) 사이에서 대전 탄방에서 태어났다.
공주의 草廬 李惟泰(1607~1684)는 호서 5현의 하나로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유계 등과 함께 17세기 기호유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예학,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묘소는 세종시에 있고, 그의 후손인 한말의 醒庵 李喆榮(1867~1919)은 초려의 9대손으로 공주 계룡에서 태어나 성리학에 밝고 의리의 실천에 앞장섰다.
그밖에 사육신인 醉琴軒 朴彭年(1417~1456)은 회덕출신이고, 15세기 도학자 冲庵 金淨(1486~1521)과 16세기 성리학자 思庵 朴淳(1523~1589)도 대전과 연고가 깊다. 象村 申欽(1566~1628)은 秋坡 宋麒壽의 외손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대전 주산동 외가에서 생장하였는데, 문장에 뛰어난 通儒였다. 초기 양명학자 浦渚 趙翼(1579~1655)은 서울에서 태어나 16세 때 공주로 이사와 공부하였고, 다시 구포로 돌아와 月沙 李廷龜(1564~1635)에게서 문학을 수업하였다. 또 17살 때에는 퇴계학파인 외종조 月汀 尹根壽(1537~1616)에게서 문장학을 배웠다. 그는 초기 양명학자로서 張維, 李時白, 崔鳴吉과 세칭 四友로 불리었다. 重峰 趙憲(1544~1592)은 율곡의 高弟로 문묘에 종사된 ?東國 18賢?의 하나인데,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보냈다. 鹿門 任聖周(1711~1788)는 조선조 18세기의 성리학자로 현상윤에 의해 ‘조선성리학의 6대가’로 불린다. 그는 공주 鹿門에서 생장하였고 청주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의 묘소가 세종시 연동면에 있다. 또 孤靑 徐起(1523~1591)는 화담의 문인으로 공주 공암 출신인데, 도학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묘소가 공주 공암에 있다. 논산출신 유학자 一夫 金恒(1826~1898)은 한말 격동기에 논산 향적산에서 수도하여 易理를 깨닫고 『正易』을 저술하여 한국 역학을 새롭게 창출하였다. 충남 온양에 세거하던 진주 강씨가 회덕에 입향하게 된 것은 姜文翰(1464~1547)이 회덕현 자운동(잔골)에 이사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復泉 姜鶴年(1585~1647)은 회덕출신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상소를 올린 바 있고, 인조반정 초기 정치의 난맥상을 규탄하다 은진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그는 회덕에 살면서 이웃의 宋浚吉, 宋時烈, 權諰 등과 친밀하게 사귀었다.
(3) 충북 유교문화권
충북지역에서의 기호유교는 宋時烈, 權尙夏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암 송시열은 옥천에서 태어나 대전 회덕에서 강학을 하고, 또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많은 시간을 충북 괴산의 화양동에서 보냈다. 그는 율곡학파의 적통이며 노론의 영수였다. 학문적으로도 성리학, 예학, 의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정치적으로는 남인, 소론과 갈등하면서 격랑의 시대를 살았다. 화양동에는 그의 발자취를 알 수 있는 많은 유적이 남아있는데, 華陽書院, 萬東廟가 대표적이다.
또한 우암의 적전인 遂庵 權尙夏(1641~1721)는 충북 제천의 황강 淸風에서 강학을 하였다. 이 때 이 때 이른바 ‘江門 8學士’인 南塘 韓元震(1682~1751), 巍巖 李柬(1677~1727), 屛溪 尹鳳九(1681~1767), 鳳巖 蔡之洪(1683~1741), 華巖 李頤根, 冠峰 玄尙璧, 秋潭 成晩徵, 梅峰 崔徵厚 등이 遂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런데 수암 문하에서 人性과 物性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人物性 同異논쟁이 일어나 약 2백여년 간 진행되었는데, 이는 사단칠정논쟁, 예학논쟁과 더불어 조선조 3대논쟁의 하나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논쟁은 처음 이간과 한원진에게서 시작되어 수암의 문하는 물론 당시 성리학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이를 일명 湖洛論爭이라고도 부르는데,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보는 이들을 洛論이라 하고, 다르다고 보는 이들을 湖論이라 불렀다. 이는 인물성 동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주로 경기도 지역에 살았기 때문이며, 또 인물성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주로 호서지역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요컨대 人物性同異논쟁, 湖洛논쟁이 이곳 충북 제천 청풍에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기호유교문화의 특성으로 매우 소중한 의미가 있다.
(4) 경기유교문화권
이 지역은 기호유학의 産室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16세기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栗谷 李珥, 牛溪 成渾, 龜峰 宋翼弼이 이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다. 율곡은 본래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친가는 파주 율곡촌이었다. 또 성혼은 파주 우계촌에서 태어나 생장했으며, 송익필도 경기도 고양 구봉산 자락에서 태어나 세 사람이 같은 지역에서 성장하였다. 나이도 비슷하고 학문적 지향도 다르지 않아 평생 道友로서 우정을 변치 않으며 유학자의 길을 걸었다. 율곡, 우계, 구봉 세 유학자는 모두 서인의 길을 걸었고, 피차 절차탁마하여 율곡과 우계는 東國 18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고, 구봉도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율곡, 우계에 필적하는 大儒가 되었다. 파주 紫雲山에는 율곡의 묘소가 있고 紫雲書院이 있으며, 그가 어려서 지은 ‘花石亭’이라는 시가 걸려있는 임진강가에 花石亭이 있다. 또 聽松 成守琛(1493~1564)과 牛溪 成渾(1535~1598)을 배향한 坡山書院이 있고, 최근 건립된 우계기념관이 있다.
경기도 고양은 宋翼弼의 생거지일 뿐만 아니라 행주 기씨의 奇虔(1390~1460), 奇孝諫(1530~1593), 奇挺翼(1627~1690)을 제향하는 德陽書院(秋山書院의 후신)이 있다. 그밖에도 조선초 명재상이며 청백리였던 厖村 黃喜(1363~1452)의 묘소와 반구정이 있으며, 17세기 호서 5현의 하나였던 魯西 尹宣擧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또한 김포는 重峰 趙憲을 모신 牛渚書院이 있고, 강화는 조선 양명학의 태두로 평가받는 霞谷 鄭齊斗(1649~1736)를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의 본 고장이기도 하다. 정제두는 1709년 경기도 안산에서 강화 하곡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그의 손자 사위인 李匡明과 申大羽가 이곳으로 옮겨와 하곡의 강학을 받게 되고, 또 圓嶠 李匡師(1705~1777), 月巖 李匡呂(1720~1783), 鄭厚一, 石泉 申綽(1760~1828) 등이 하곡의 문하에 들어와 강화학파가 형성되게 되었다. 강화학파는 영일 정씨, 전주 이씨, 평산 신씨 등 세 가문을 중심으로 가학으로 이어져 갔다. 이후 약 250여 년간 한말까지 양명학의 명맥을 이어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 곳에는 鄭齊斗의 묘소, 李建昌의 묘소, 李匡明의 묘소, 明美堂 등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또한 경기도 광주는 실학자 星湖 李瀷(1579~1624)과 그의 제자 順庵 安鼎福(1712~1791), 그리고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茶山 丁若鏞(1762~1836)이 활동하던 곳이다. 또 양주지역은 淸陰 金尙憲(1570~1652)의 손자인 金壽恒, 김수항의 아들인 農巖 金昌協(1651~1708), 三淵 金昌翕(1653~1722)이 활동하던 곳으로 일명 石室學團의 본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경기도 양평은 한말 衛正斥邪派의 거두였던 華西 李恒老(1792~1868)의 생거지로서 강학하던 곳이며, 여주에는 尤庵 宋時烈을 모신 大老祠가 있다.
磻溪 柳馨遠을 이어 經世致用 실학을 이끌었던 이익은 경기도 廣州 瞻星里에 은거하여 평생 재야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성호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順庵 安鼎福은 경기도 廣州郡 慶安面 德谷에 정착해 학문에 종사하였다. 또한 조선 실학을 대표하는 茶山 丁若鏞은 경기도 廣州郡 草阜面 馬峴里(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였는데, 부친을 따라 서울에서 살기도 했고, 辛酉邪獄(1801년) 이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 동안 학문에 정진하여 수많은 저서를 내기도 했다.
또한 경기도 양주지역은 병자호란 때 절의를 지킨 金尙憲, 金尙容 형제의 생거지인데, 그의 아들 金壽興, 金壽恒, 김수항의 아들인 金昌協, 金昌翕이 石室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김상헌, 김상용은 절의로 유명했지만, 김창협, 김창흡에 이르러 석실촌은 洛學의 요람이 되어 北學派 실학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渼湖 金元行(1702~1772)은 洛學의 핵심인물이었는데, 그는 김창협의 형인 金昌集의 친손자이자 김창협의 양손자로서 石室書院을 지키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북학파 실학의 선구자인 湛軒 洪大容(1731~1783)과 실학자 頤齋 黃胤錫(1729~1791)이 김원행의 문인으로 석실서원을 드나들며 실용학문을 익혔다. 石室이 의리와 북학실학을 아우르는 역사의 장이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양주의 石室書院은 淸陰 金尙憲, 仙源 金尙容 형제의 절의를 숭상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金壽恒, 閔鼎重, 李端相, 金昌協, 金元行, 金履安, 金昌集, 金祖淳도 追享되었다. 또 양주에는 靜庵 趙光祖와 尤庵 宋時烈을 제향하는 道峰書院도 있다.
또한 경기도 楊平(楊根 檗溪)은 한말 衛正斥邪에 앞장섰던 華西 李恒老의 생거지이자 강학의 본 고장이다. 화서는 19세기 西勢東漸의 위기속에서 서학에 맞서 도학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毅庵 柳麟錫(1842~1915), 勉庵 崔益鉉(1833~1901), 重庵 金平默(1819~1891), 省齋 柳重敎(1831~1893) 등이 대표적이다.
또 경기도 용인에는 15세기 도학을 대표하는 조광조의 묘소가 있고, 그를 제향하는 深谷書院이 있다. 靜庵은 기묘명현으로 기호유학 발흥의 선구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경기 유교문화권은 기호학파의 지맥인 율곡학파와 우계학파가 출발한 곳이며, 실학과 의리학 그리고 양명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화가 자리한 곳이라 할 수 있다.
(5) 전북유교문화권
이 지역은 실학자 柳馨遠, 黃胤錫, 申景濬이 활동하던 곳이고, 성리학자 李恒, 田愚가 강학하던 곳이다. 磻溪 柳馨遠(1622~1673)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 활동을 하였다. 그는 1653년 31살 이후 전라도 부안 변산 기슭 愚磻洞에 우거하여 농민들을 지도하고 『磻溪隨錄』을 저술하였다. 그는 조선 후기실학의 선구로 일컬어진다. 旅庵 申景濬(1712~1781)은 순창 출신이고, 頤齋 黃胤錫은 고창출신으로 金元行과 尹鳳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또한 한말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艮齋 田愚(1841~1922)는 1841년 전주 청석동에서 태어났다. 21살 때 全齋 任憲晦(1811~1876)문하에서 수업, 30여세부터 충청도 여러 지역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68세 이후에는 전라도 군산 앞바다의 왕등도, 고군산열도 등을 전전하다 계화도에 안착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蘆沙 奇正鎭(1798~1879)은 1798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구수동에서 태어나, 18세에 전남 정성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강학을 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조선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이고, 理涵萬殊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一齋 李恒(1499~1576)은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40세 때 전북 태인 粉洞里에 머물다가 칠보산에 들어가 강학하였다. 이항은 16세기 성리학 전성기 호남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盧禛, 金麟厚, 柳希春, 奇大升과 함께 ‘湖南 5賢’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宋麟壽, 李彦迪, 盧守愼 등과 성리학에 관해 토론을 한 바 있으며, 徐敬德, 曺植, 南彦經, 許曄 등과 교유하였다.
그밖에 기묘명현 安處順(1493~1534)은 남원에서 은거한 바 있고, 己丑獄事에서 희생된 鄭汝立도 전주출신이다. 이렇게 볼 때, 전북유교문화권은 실학과 성리학이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전남유교문화권
전남유교문화권은 일찍이 寒暄堂 金宏弼(1454~1504)이 순천,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를 당하면서 사림의 씨를 뿌렸다. 『己卯錄』에 실려 있는 호남의 대표적인 己卯名賢으로는 奇遵, 金淨, 朴祥, 高雲, 梁彭孫, 崔山斗 등이 있다.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靜庵 趙光祖는 1519년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어 사사되었고, 이즈음 광양출신 최산두는 동복, 해남출신 尹衢는 영암에 부처되고, 능주 출신 양팽손은 능주, 담양출신 柳成春은 파직되어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訥齋 朴祥 (1474~1530)은 광주출신으로 형님 朴禎에게서 수학하였는데, 1515년(중종 10년) 담양부사 박상은 순창군수 金淨, 무안 현감 劉沃과 함께 中宗妃 愼氏의 복위를 상소했다 유배를 당하였다. 기묘명현 高雲은 광주출신인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 霽峰 高敬命(1533~1592)은 그의 손자이다. 또한 服齋 奇遵(1492~1521)도 기묘명현으로 정암과 함께 至治儒學 실현에 앞장서다 기묘사화 때 희생되었다. 기준은 고봉 기대승의 季父인데, 그의 죽음을 계기로 기대승 일가가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睡隱 姜沆(1567~1618)은 姜希孟의 5대손으로 牛溪 成渾의 문인인데, 전남 영광 불갑면 酉峰에서 태어났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영광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 왜군에 잡혀 일본에 끌려가 1600년에 돌아왔다. 이때 일본에 성리학을 가르쳐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다.
河西 金麟厚(1510~1560)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麥洞에서 출생하였는데,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의 한 사람이다. 도학과 절의 그리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고봉이 퇴계와 四七論辨을 벌리는데 그 기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장성에는 그를 제향하는 筆巖書院이 있다.
高峰 奇大升(1527~1572)은 광주 召古龍里(광주 광산)에서 출생했는데, 기묘명현 服齋 奇遵의 조카로서 계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학에 투철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성리 이론가로서 退溪 李滉과 8년여에 걸쳐 성리논변을 벌렸다. 지금도 광주 광산에는 月峰書院이 있고, 그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밖에 많은 유물, 유적이 잘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 강진은 조선 후기실학의 집성자인 茶山 丁若鏞이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하며 『牧民心書』, 『經世遺表』 등 수많은 저술을 한 곳이다. 茶山草堂을 비롯하여 그의 발자취를 알 수 있는 유적이 잘 다듬어져 있다. 가까운 해남은 孤山 尹善道(1587~1671)의 생거지이기도 하다. 문인이면서 동시에 예학에도 밝았던 그는 禮訟에 참여하였고 보길도에는 그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밖에 실학자 存齋 魏伯珪(1727~1798)는 장흥출신이고, 圭南 河百源(1781~1844)은 순조 때의 실학자로서 전남 화순출신이다. 또 金千鎰, 高敬命, 金德齡은 광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에 앞장섰던 실천적 유학자들이었고, 보성출신 隱峰 安邦俊(1573~1654)은 평생 의리의 현창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아울러 광양출신 梅泉 黃玹(1855~1910)은 시인이자 역사가로서, 한말 일제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梅泉野錄』은 그의 시문집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전북, 전남을 아우르는 호남유교문화권은 성리학, 실학, 의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화권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기호유학은 한국유학사에서 영남유학과 쌍벽을 이루며, 다양한 색채로 전개되었다. 영남유학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단조로운 전개 양상을 보여준다면, 기호유학은 성리학은 물론 예학, 실학, 의리학, 양명학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성리학만 하더라도 율곡학파는 율곡 직계처럼 율곡 성리학의 保守를 주장하는가 하면, 非師承 율곡계열은 율곡 성리학과 퇴계성리학을 절충코자 하였다. 또 人物性同異논변처럼 人性과 物性의 同異문제를 심도있게 논구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우계학파에서 보이는 학문적 개방성이나 務實학풍은 기호학파의 또 하나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기호학파는 16세기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논변과 율곡과 우계간의 성리논변을 계기로 형성되게 되는데, 학파로서의 결속과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은 17세기 우암 송시열대에 이르러서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립이 있었지만, 학문적 대립의 양상과 전개는 17세기 이후라고 보는 것이 옳다.
기호학파는 지역적으로는 경기지역, 충청지역, 호남지역을 망라한다. 파주, 고양, 김포, 양주, 강화를 아우르는 경기도 서북부지역은 기호유학의 개조라 할 수 있는 율곡, 우계, 구봉의 생거지요 활동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 강화는 하곡 정제두를 중심으로 조선 양명학이 개화된 곳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고, 양주지역은 김상헌, 김수항,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홍대용으로 이어지는 石室學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이곳을 중심으로 의리와 실학이 함께 꽃피우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광주, 여주, 양평을 아우르는 경기도 동부지역은 정약용, 이익, 안정복 등의 실학과 한말 華西學團의 의리사상이 힘차게 전개된 곳이다.
아산, 청양, 예산, 홍성을 아우르는 충남 서북부지역은 충절의 유교전통이 살아있는 곳이다. 성삼문, 최영, 최익현, 김복한, 이순신, 김좌진, 유관순 등 우리나라 역사의 절의와 충절을 상징하는 유교문화가 다양하게 전개된 고장이며, 이색, 백이정, 이곡, 이지함, 한원진, 이간 등 고려, 조선의 醇儒들이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대전, 공주, 논산, 금산, 연기를 아우르는 대전, 논산유교문화권은 기호유학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다. 기호학파의 양대 산맥인 율곡학파와 우계학파가 병립하여 학문을 교유하던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율곡학파의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그리고 우계학파의 윤황, 윤선거, 윤증이 활발하게 교유하던 곳이 바로 여기다. 더욱이 이 지역은 율곡학파, 우계학파 뿐만 아니라 남인계에 속하는 윤휴, 권시 등 까지 이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적 토론이 벌어지고 선의의 경쟁과 다소의 갈등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 지역은 우리나라 예학의 본 고장으로 유교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조선 예학의 종장으로 추앙되는 사계 김장생, 그의 아들이면서 제자인 신독재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윤선거 등에 의해 성취된 기호예학은 유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우리나라가 명실공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경제위상과 함께 도덕적 위상을 갖추어야 한다. 국민의 윤리의식을 수준 높게 끌어올리는 작업이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라 할 수 있다. 기호예학의 복원은 이러한 도덕 재무장, 전 국민의 윤리의식 제고라는 시대적 소명을 해결하는 하나의 대안이기에 족하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문화와 현대의 접목인 동시에 전통문화의 재창조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또한 청주, 보은, 옥천, 괴산, 제천을 아우르는 충북 유교문화권은 우암 송시열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의 활동공간이다. 옥천은 우암의 출생지이고 괴산 화양동은 우암이 오랜 세월 머물던 곳이며, 괴산 청천은 우암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또 제천 청풍지역은 수암의 문하에서 인물성 동이논쟁이 벌어진 유서 깊은 학문의 고장이다. 한원진, 이간을 비롯한 ‘江門 8學士’들이 인성과 물성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수준 높은 성리논쟁을 하던 곳이다. 이 논쟁은 중국 성리학과 차별화되는 조선 성리학의 쾌거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전주, 정읍, 군산, 고창, 부안을 아우르는 전북 유교문화권은 유형원, 황윤석, 신경준, 위백규 같은 실학자와 이항, 전우 같은 성리학자들이 활동하던 곳이다. 또 광주, 장성, 강진, 해남을 중심으로 한 전남 유교문화권은 김인후, 노수신, 기대승, 기정진 등 기라성같은 유학자와 조선 후기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다. 특히 이 지역은 고경명, 김덕령, 고운, 김천일, 황현 같은 수많은 의병장과 道學之士가 불의에 맞서 싸우고 민족의 자주를 위해 희생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기호유교문화는 경기, 충청, 호남을 막론하고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그들의 활동무대도 기호 전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고 보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서북부에서 발흥한 기호유학이 본격적으로 제 모습을 갖추고, 기호유학의 정체성과 특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곳이 바로 대전, 논산유교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은 율곡학파와 우계학파 그리고 남인학자들까지 함께 갈등하면서 교유하고 또 싸우면서 학문을 꽃피웠던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아울러 유교문화의 精粹인 조선의 禮敎文化가 이 고장에서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대전, 논산유교문화권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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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義東
1949년 충남 연기출생
충남대 철학과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졸업(문학석사)
충남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율곡철학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청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역임
충남대학교 학생지원처장, 도서관장, 대학원장, 유학연구소장 역임
율곡학회 회장 역임, 율곡학술대상 수상
현 충남대 철학과 명예교수
<저서>
<한국의 유학사상>, 서광사
<율곡사상의 체계적 이해 1(성리학편)>, 서광사
<율곡사상의 체계적 이해 2(경세사상편)>, 서광사
<율곡 이이>, 살림출판사
<율곡학의 선구와 후예>, 예문서원
<기대승>, 성균관대 출판부
<위기의 시대, 유학의 역할>, 서광사
<우계학파연구>, 서광사
<유교와 현대의 대화>, 예문서원
<한국의 사상가 10인, 율곡 이이>, 예문서원
<기호유학연구>, 서광사
<한국유학사상연구>, 서광사
<이율곡 읽기>, 세창미디어
<율곡에서 도산으로>, 충남대출판문화원
<역사의 도전과 한국유학의 대응>, 책미래
<사는 것도 모르면서 죽음을 어찌 아느냐>,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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