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9권

상주학. 상주문화원 금요사랑방 117강

빛마당 2018. 5. 11. 21:17

상주지역의 농서(農書) (1)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I. 머리말

 

고려시대에는 우리 풍토에 맞는 농서(農書)가 없었기 때문에 권농(勸農)차원에서 중국 최초의 관찬(官撰)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 등을 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국농서들은 우리와 풍토적 차이가 있었고, 대부분 밭작물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우리 실정에는 잘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태종 4년에,

 

여러 도()나 고을마다 풍토가 다르고 재배할 작물이 서로 다른데다 품종에 따라 이르고 늦음이 있으니 원컨대 토양과 절기에 맞는 농서를 편찬하여 배부함으로서 수령들이 적기영농을 지도할 수 있게 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의정부가 건의하자, 태종은 중국의농상집요(農桑輯要)에서 꼭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 초록하고, 이두풀이를 곁들인 농서를 편찬하도록 하였으며, 이것이 1415년에 편찬된농서집요(農書輯要).

그러나 이 초록본은 중국의 화북지방(華北地方)의 농업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조선에서 권농의 지침서로 쓰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세종조에 와서 삼남(三南)의 농법을 정리한농사직설(農事直設)이 나왔다. 이것이 우리나라 풍토에 맞춘 최초의 농서이다.

특히 세종은 농상(農桑)’을 중시한 임금으로 다음과 같은 권농문(勸農文)을 남겼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인데, 농사라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 왕도(王道) 정치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오직 그것은 백성을 살리는 천명에 관계되는 까닭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를 복무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서 농사에 종사하여 그 삶의 즐거움을 완수하게 할 수 있겠는가. <中略>

농서를 참조하여 시기에 앞서서 미리 조치하되 너무 이르게도 너무 늦게도 하지 말고, 다른 부역을 일으켜서 그들의 농사 시기를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니 각각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이 근본(농사)에 힘쓰도록 인도하라.

밭에서 일하고 농사에 힘써서 위로는 어버이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녀를 길러서 나의 백성이 장수하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근본이 견고하게 된다면<中略> 시대는 평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함께 태평 시대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농사직설(農事直設)이후부터, 개화기의 실험농학(實驗農學)이 도입되기 까지 조선에는 약 81종의 농서가 편찬되어 권농의 지침서로 활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신속(申洬)이 편찬한농가집성(農家集成)이 가장 주목되는 농서였다.

16세기 후반에 상주지방의 풍토에 맞는 지역농서(地域農書)가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류진(柳袗)류원지(柳元之)가 편찬한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이다. 그리고 17세기 초반에는 고상안(高尙顔)이 상주지방 농서로써농가월령(農家月令)을 편찬하였다.

 

II. 조선(朝鮮) 농서(農書)의 특징

 

조선 농서의 특징은 다섯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로, 조선전기의 농서는 관찬(官撰)농서가 60% 이상을 점하고 있어 조선전기의 농업기술개량이 관()주도로 이루졌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조선시대의 농서는 전국을 대상으로 편찬된 농서가 대부분이고 한정된 지역을 대상으로 편찬된 지역농서(地域農書)가 극히 적은 편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나라가 작기 때문에 각 지역간의 기후변화의 폭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로 조선시대의 농서는 전문농서(專門農書)의 수가 종합농서(綜合農書)의 수보다 적으며, 그 비율은 47 : 53이다. 이에 비해 중국농서는 전문농서(專門農書)와 종합농서(綜合農書)의 비율이 76 : 24로 우리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농서의 질적 내용과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넷째로 조선시대의 농서들은 대부분 난해한 한문으로 되어 있어 농서가 최종 수요자인 농민용이라기 보다 농민을 지도하는 지도자용으로 편찬된 경향이다.

<1>을 보면, 조선농서가 81권 편찬되었는데, 그 중에서 한문(漢文)으로 편찬된 농서는 65권으로 전체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농민들이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이두문자와 국문을 병기한 것은 1권이고, 국문을 병기한 것이 9권이며, 국문으로만 편찬된 것이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규합총서(閨閤叢書),잠상집요(蠶桑輯要)3권이다.

이 중에서 여성 한분이 농서를 편찬하였는데, 그것이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규합총서(閨閤叢書)이며, 과수(果樹)와 축산(畜産)에 관련한 농서였다.

다섯째로 조선시대 농서의 편찬자들은 대부분 관료사대부(官僚士大夫)들이 었다. 이는 일본 농서의 편찬자가 대부분 농민들임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농서편찬자 중에서 신원이 밝혀진 분이 75명이었는데, 관료사대부가 53(70.7%), 실학유생(幼學)21(28.0%), 가정주부 1(1.3%) 등으로 관료사대부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와 같이 관료사대부가 많은 것은 조선조의 인사 제도와 관련이 깊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조를 보면,

 

숭문원 관원, 사자(글씨정서), 이문(吏文)특이자 홍문관원, 교관, 체아직(遞兒職) 이외의 모든 관원은 수령을 거치지 않으면 4품 이상의 품계에 오를 수 없다.”

 

고 규정되어 있고, 이에 따라서 인사 조처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지방수령들은 앞다투어 농서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수령에게는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하여 농상성(農桑盛) 호구증(戶口增) 학교흥(學敎興) 군정수(軍政修) 부역균(賦役均) 사송간(詞訟簡) 간활식(姦猾息)의 의무가 주어졌고 그 중 농상성(農桑盛)의 부과점수가 높았으며 수령의 근무일수가 1800일 이상으로 길기 때문에 그 사이에 권농을 위해 수령들이 농업기술을 익혔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농서를 쓰게 된 것이 관료사대부들이 농서를 많이 쓰게 된 원인이 되었다.

<1> 조선시대에 편찬된 농서(農書)

번호

書名(編年)

編著者

編著者 身分

文體

內容

1

蠶經註解(1127) **

林景和

大府主簿

漢文+吏讀

養蠶()

2

新編集成馬醫方 **

(附牛醫方)(1399)

趙浚

板門下府事

漢文

馬牛獸醫(국역)

3

農書輯要(1415) **

李荇

大提學

漢文+吏讀

主穀作物

4

養蠶經驗撮要(1415) **

韓尙德

右代言(承旨)

漢文+吏讀

養蠶

5

農事直說(1429) **

鄭招

兵曹判書

漢文

主穀作物

6

撮要新書(1430以前)

朴興生

昌平縣令

漢文

作物, 園藝

7

山家要錄(1450以前)

全循義

典醫監正

漢文

作物,園藝, 蠶畜

8

養花小錄(1452~65)

姜希顔

仁順府尹

漢文

花卉, 造景

9

新撰蠶書(1459) **

梁誠之

大護軍

漢文

養蠶()

10

蠶書諺解(1461) **

崔恒

右參贊

漢文+國文

養蠶()

11

衿陽雜錄(1483以前)

姜希孟

左贊成

漢文

作物

12

四時纂要抄(1483以前)

姜希孟

左贊成

漢文

作物,園藝,蠶畜

13

安驥集諺解(1494) **

李昌臣

禮曹參議

漢文+國文

馬醫書()

14

水牛經諺解(1494) **

李昌臣

禮曹參議

漢文+國文

水牛醫書()

15

農書諺解(1518) **

金安國

慶尙監司

漢文+國文

作物()

16

蠶書諺解(1518) **

金安國

慶尙監司

漢文+國文

養蠶()

17

需雲雜方(1540)

金綏

吏曹參議()

漢文

菜蔬

18

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1541) **

權應昌

左承旨

漢文+吏讀+國文

獸醫書

19

巧事撮要(1554)

魚叔權

吏文學官

漢文

養馬, ,

20

屠門大嚼(1611)

許筠

左贊成

漢文

園藝, 水産

21

渭濱明農記(1618)

柳袗

淸道郡守

漢文

作物, 園藝

22

閑情錄(1618)

許筠

左贊成

漢文

作物, 園藝, 蠶畜()

23

農家月令(1619)

高尙顔

豊基郡守

漢文本(國文本)

作物

24

馬經抄集諺解(1637) **

李曙

兵曹判書

漢文+國文

馬醫書

25

農家集成(1655) **

申洬

公州牧使

漢文

作物, 園藝, 蠶畜

26

楮竹田事實(1659) **

金堉

領議政

漢文

經濟樹種

27

穡經(1676)

朴世堂

通津縣監

漢文

, , 蠶畜, 占候

28

穡經增集(1689以前)

朴世堂

通津縣監

漢文

作園, 蠶畜, 占候

29

治生要覽(1691)

0

實學儒生

漢文

作物, 園藝, 蠶畜

30

山林經濟(1715以前)

洪萬選

尙州牧使

漢文

, (), 蠶畜()

31

厚生錄(1760以前)

辛敦復

進士, 奉事

漢文

作物, 園藝

32

山林經濟補(1763以後)

?

?

漢文

, , ,

33

姜氏甘藷譜(1766)

姜必復

大司諫

漢文

甘藷()

34

山林經濟補說(?)

?

?

漢文

, , ,

35

農家要訣(?)

?

?

漢文

, , ,

36

巧事新書(1771)

徐命膺

大提學, 吏判

漢文

作物, 園藝, 蠶畜

37

增補山林經濟(1776)

柳重臨

太醫院內醫

漢文

作物, 園藝, 蠶畜

38

本史(1787)

徐命膺

大提學, 吏判

漢文

作物, 園藝, 蠶畜

39

海東農書(1799以前)

徐浩修

吏曹判書

漢文

, (), 蠶畜, 農具

40

進北學議(1799)

朴齊家

軍器寺正

漢文

作物, 水利, 農具

41

課農小抄(1799)

朴趾源

襄陽府使

漢文

, 農具, 水利, 占候

42

農圃問答(1799)

李大圭

實學儒生

漢文

農業通論

43

農書總論(1799)

趙英國

南原幼學

漢文

農業通論

44

農書(1799)

梁翊濟

寶成幼學

漢文

作物, 水利, 栽桑

45

進御農書(1799)

康洵

幼學

漢文

農業通論

46

設筒引水法(1799)

鄭始元

幼學

漢文

導水法

47

柳鎭穆農書(1799)

柳鎭穆

生員

漢文

農業通論

48

牛海異魚譜(1803)

金鑢

咸陽郡守

漢文

魚類(水産)

49

千一錄(1804)

禹夏永

實學幼生

漢文

作物, , 占候

50

李參奉集(1805)

李匡呂

參奉

漢文

甘藷

51

金氏甘藷譜(1813)

金長淳

實學幼生

漢文

甘藷

52

甘藷耕藏說(1813)

徐慶昌

實學幼生

漢文

甘藷

53

玆山魚譜(1814)

丁若銓

兵曹佐郞

漢文

魚類(水産)

54

農家月令歌(1816)

丁學游

實學幼生

國文

農業全般

55

閨閤叢書(1820以前)

李氏

主婦

國文

,

56

蘭湖漁牧志(1820以前)

徐有榘

吏判, 大提學

漢文

魚類(水産)

57

民天集說(1822)

斗庵

?

漢文

, , , ()

58

杏蒲志(1825)

徐有榘

吏判, 大提學

漢文

作物, 園藝, 水利

59

金華耕讀記(1827)

徐有榘

吏判, 大提學

漢文

, , , ()

60

圓薯方, 種甘藷法(1832)

趙性默

實學儒生

漢文

蕃藷(), 甘藷

61

陸海法(1834)

崔漢綺

實學儒生

漢文

揚水機, 水利

62

種藷譜(1834)

徐有榘

吏判, 大提學

漢文

甘藷

63

水車圖說(?)

?

?

漢文

水車

64

揚水機製造法(?)

?

?

漢文

揚水機

65

農政書(?)

?

?

漢文

, , , , 水利

66

農政要旨(1838) **

李止淵

右議政

漢文

水稻乾畓直播

67

農書(1840?)

洪吉周

實學儒生

漢文

, , , ()

68

農政會要(1834~42)

崔漢綺

實學儒生

漢文

, , , , 水利

69

林園經濟志(1845)

徐有榘

吏判, 大提學

漢文

, , , , 水利,

占候, 農具

70

竹僑便覽(1849)

韓錫斅

實學儒生

漢文

作物, 園藝, 占候

71

圓藷譜(1862)

金昌漢

實學儒生

漢文

北藷(감자)

72

農政新編(1881) **

安宗洙

羅州參書

漢文

土壤, 肥料, 作物

73

農夫歌(1881)

尹禹炳

實學儒生

漢文

農事全般

74

增補蠶桑輯要(1884)

金思徹

都承旨, 參判

漢文

蠶業

75

蠶桑撮要(1884)

李祐珪

羅州郡守

漢文

蠶業

76

農政撮要(1885)

鄭秉夏

農商工大臣署理

國漢文混用

土壤, 肥料, 作物

77

蠶桑輯要(1886)

이희규

實學儒生

國文

蠶業

78

重麥說(1888)

池錫永

醫學校長

漢文

麥類

79

農家月令(1890以前)

李基遠

實學儒生

國文

農事全般

80

農談(1894)

李淙遠

農務局長

漢文

防潮堤, 水利

81

農家指南(1925)

李鍾炫

實學儒生

漢文

, , ,

**()은 원본이 실전되거나 아직 찾아내지 못한 책

 

16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17세기 중반까지 편찬된 지역농서는 <-2>와 같다.

이렇게 개인이 지역의 농업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지역농서를 편찬하는 작업은 이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위의 농서들이 선도(先導)한 덕분이라고 본다.

 

<-2> 16세기 중반 이후 지역농서 편찬 상황

책 이름

편찬자

지역

편찬 시기

농가요람(農家要覽)

박승(朴承)

경상도 의성

16세기 중반

농가설(農家說)

유팽노(柳彭老)

전라도 옥과

1580년 무렵

농가월령(農家月令)

고상안(高尙顔)

경상도 상주

1618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

류진(柳袗)-류원지(柳元之)

상주 안동

1619-유진 의 위빈명농기

1671-유원지의 전사문

이러한 지역농서는농사직설과는 달리 지방의 향촌 지식인이 편찬하였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농서는 향촌의 실제 농업기술을 잘 파악한 바탕에서 농법을 설명하고 정리하면서, 생산성을 높이려는 입장이었으며, 국가의 권농책이나 조세 확보를 위한 농업기술 개선책은 아니었다.

 

III.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의 저자와 편찬 경위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는 현재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망실된 부분과 군데군데 탈락된 글자들이 많아서 완벽하게 내용을 다 정리하여 소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이 책이 세상에 소개된 이후 저자(著者)와 서명(書名)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제시되어 있다. 이런 일들은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의 표지를 비롯한 일부분이 훼손되어 저자 이름과 편찬년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의 본문 내용과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다른 농서와 비교함으로써 저자를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염정섭은 1429년에 편찬된농사직설(農事直說)1655년에 편찬된농가집성(農家集成)과를 비교 검토하여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에 수록되어 있는 농법의 특색과 편찬연대를 비교하였다.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에는 종자(種子) 관리를 위해 충해(蟲害)를 피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고, ‘기경(起耕)과 개간(開墾)기술로는 다경(多耕)을 강조하였으며, 포전(浦田)의 개간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수전농법(水田農法)에서는 앙기(秧基) 시비(施肥)와 앙묘(秧苗) 키우는 방법을 통해서 이앙기술의 진전을 보여주고 있으며, 보리 경작법(耕作法)의 특색과 시비법(施肥法) 그리고 제초법(除草法) 등을 정리하였다.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에 나타난 이와 같은 농법의 특색이야말로 앞으로 보다 진전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1.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의 저자

 

조선시대 농업기술 연구에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처음 발견하고 외부에 이 사실을 알린 사람은 영남대학교의 이수건(李樹健) 교수이다.

이수건 교수는 필사본인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류성룡(柳成龍)의 셋째 아들인 류진(柳袗, 1582~1635)을 필자로 지목하였다.

이수건 교수는 경상도 안동의 유씨(柳氏) 서애파(西厓派) 종가(宗家)의 충효당(忠孝堂)에서 이 농서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류진(柳袗)의 문집인수암집(修巖集)3에 있는제위빈명농기후(題渭濱明農記後)를 근거로 류진(柳袗)위빈명농기(題渭濱明農記의 저자로 지목한 것이다.

류진(柳袗)은 부친인 류성룡(柳成龍)이 중앙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선조 15(1582)에 하회가 아닌 한양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화(季華)이고 호는 수암(修巖)이다. 그리고 류진은 아버지 류성룡을 따라 10세 때부터 풍산(豊山) 유씨의 세거지인 안동부 풍산현 하회촌에 내려왔다.

그리고 인근 예안(禮安)지역의 사족들과 김령(金坽)을 비롯한 안동지역의 재지사족과 교류하였다. 나이 31세 때에는 김백함(金百緘)의 모역(謀逆)사건에 무고(誣告)로 말려들어 중형(仲兄)이 죽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상주로 이거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평소 류진과 남다른 교류를 하고 있던 김령(金坽)은 류진이 상주로 이거(移居)할 무렵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계화(季華)가 장차 달미(達美)로 이거할 것이라 한다. 이 말이 그럴 듯 하지만 나는 갑작스러워 믿기 어렵다. 궁벽하여 스스로 지킬 수 없어 향토(鄕土)를 버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 마음에서 바라는 바일 것이냐 진실로 부득이하게 나온 방법일 것이다.”

 

그리하여 류진은 1618년 하회를 떠나 상주 가사리(可沙里) 위수(渭水)의 북방으로 이거하였다. 상주에 와서는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과 학문적 교류를 하였으며,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면서 조카들과 형수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상주에서의 생활도 넉넉하지 못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후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41세의 늦은 나이로 환로(宦路)에 나가서 외직으로는 봉화현감, 청도군수를 역임하였고, 내직으로는 형조정랑을 거쳤다. 그리고 1635년에 돌아가신 뒤 이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수건 교수의 논문 발표 이후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 농서(農書)의 명칭과 저자에 대한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최인기(崔仁基)1996에 발표한하회(河回) 풍산류씨(豊山柳氏) 서애파(西厓派) 종가(宗家) 고농서(古農書)에 관한 연구(硏究)2001년에 발표한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의 농서편찬(農書編纂)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저자가 류진(柳袗)이 아니고, 그의 조카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류원지의 문집인졸재집(拙齋集)() 13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이 실려 있다.

둘째, 농서에 나오는 유승화(柳承華), 조연천(趙漣川), 홍극기(洪克己, 1613~1679), 애동(艾同) 등이 유진보다는 뒷 시기의 인물이다. 그리고 조연천(趙漣川)을 조곤(趙稇, 1610~1663)으로 정정(訂正)하고 조곤이 1651년에 연천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과 애동의 생년(生年)이 병산서원의 노비안(奴婢案)경자년(庚子年)’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경자년1660년이다. 그리고 류진은 1611년 예천으로 이거했다가 1618년 상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시대가 서로 맞지 않는다.

셋째, 농서의 소장처가 풍산유씨 서애파의 하회 종가였고, 류원지가 종손으로 이 종가에서 줄곳 기거해 왔다.

넷째, 1671년 류원지는 서간(書簡)에서 윤조원(尹調元)황지개간법(荒地開墾法)을 소개하였고, 전사문(田事門)을 찬술하였다는 발문(跋文)을 남겼다.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1598(선조 31)에 태어나서 1678(현종 15)에 생을 마감하였다. 조부는 류성룡(柳成龍)이고, 아버지는 류여(柳袽)이며, 할아버지 류성룡의 맏손자로 조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8세에 이르러 조부 류성룡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조부가 세상을 뜨자 작은 아버지 류진(柳袗)에게서 수학하였다. 30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33세에 음직(蔭職)으로 창락도(昌樂道) 찰방(察訪)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작은 아버지 류진(柳袗)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636년 나이 39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지방의 의병장이었던 외사촌 이홍조(李弘祚)와 함께 큰 활약을 하였고, 40세에 다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거쳐 황간현감(黃澗縣監), 진안현감(鎭安縣監), 와서(瓦署) 별제(別提),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 안기찰방을 지냈다.

일찍이상수소설(象數小說)을 지어 십이벽괘(十二辟卦)의 소밀부제(疏密不齊)함을 논하고 그 근원을 구명하여 당시 선비들은 모두 퇴계(退溪) 이후의 성리학을 총정리한 학자라 칭찬했다. 특히 이기설에 있어서 주로 이황(李滉)의 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이이(李珥)의 설을 반박하였다. 안동의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졸재집147책이 있다.

 

따라서 류원지(柳元之)는 일단 연대 추정에 맞고 하회 종가에 거주한 후손이었기 때문에 저자는 류진이 아니고 그의 조카인 류원지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염정섭은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의 저자를 단지 류원지로 단정하는 것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문점은 이 농서의 편찬경위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2.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의 편찬 경위

 

위빈명농기는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인 17세기의 전반기 안동과 예천, 봉화, 상주 등 영남 북부지방에서 시행되어 온 농법의 현황을 알 수 있는 농서이다.

그리고 저자로 지목되는 류진과 류원지는 삼촌(三寸)과 생질(甥姪) 사이이고, 활동연대도 수십년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들 두 사람이 따로 따로 농서(農書)를 지었다면 그 농서에 포함되어 있는 농업기술의 성격도 차이가 나야 마땅하다고 본다.

따라서 염정섭은 위빈명농기에 있는 농업기술의 내용과 농서의 구성 등을 편찬연대가 확실한 다른 농서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조선 초기인 1429년에 편찬된농사직설(農事直說)1655년에 신속(申洬)이 편찬한농가집성(農家集成)과 비교하였다.

특히농가집성1655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와의 선후(先後)를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류진이 1635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농가집성(農家集成)보다 늦게 편찬된 것이라면 류진을 저자로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나중에 편찬한 책은 앞서 편찬된 책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농사직설(農事直說)』⦁『농가집성(農家集成)을 상호 비교하면, 우선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참고하여 서술되었음이 확실하다. 그 이유는,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의 경지법(耕地法) 항목에 들어 있는 구절과농사직설(農事直說)의 경지(耕地)항목의 구절을 비교하면 같기 때문이다.

 

농사직설(農事直說): 旱田 初耕後 布草燒之 又耕 則其田自美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 田 初耕後 布草燒之 又耕 則其田自美

 

, 두 조항은 일반적인 전()과 한전(旱田)의 차이만 있을 뿐 내용이 똑 같다. 이러한 일치는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1429년에 편찬된농사직설(農事直說)의 해당 조항을 옮겨 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농사직설의 조항을 인용하면서 그 내용을 상당히 축약시켜 서술한 부분도 있다.위빈명농기의 치전종곡법(治田種穀法)에 나오는 구절과농가집성의 증보문에 나오는 구절을 비교해 보면 분명하게 양자의 선후 관계를 알 수 있다.

 

위빈명농기: 濕田不宣種栗處 經霜後 刈草薪剉之 後布田中 種小麥 則麥極好 而 翌年麥爲乾田 至種木花亦宣

농가집성: 濕田不宣種穀處 經霜後 刈草薪剉之 後布田中 種小麥 則麥極好 而 翌年麥爲乾田 至種木花亦宣(慶尙左道人 行之)

 

두 조항은 모두 습기가 많은 밭(濕田)이어서 종곡(種穀)을 얻기가 어려운 건전(乾田)으로 바꾸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소맥(小麥)을 이용하는 점’, ‘풀을 베어 재를 만들어 밭에 뿌리는 점등에서 동일한 설명을 하고 있고 또한 문맥의 구성까지도 동일하다.

그리고 1655년에 편찬된농가집성의 마지막에 경상좌도사람이 행하는 것이다.’라는 부연 설명이 붙어 있는데 이는 이러한 기술이 경상좌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이미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속이 경상좌도 지역의 농사 관행이라고 굳이 출전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위빈명농기는 전혀 그런 부연설명이 없다. 이는 필자가 이 부분의 기술은 이미 지역적인 농사 관행이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한 예를 보면, 양자의 선후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못자리(秧基)의 시비재료로 호마껍질(胡麻殼)과 목화열매(木棉子)를 이용하는 방법이농가집성위빈명농기의 서술 내용이 흡사하다.

 

위빈명농기: 胡麻殼 剉之 牛馬踐 積置經年者 及木棉子和廢尿者 亦可

농가집성: 胡麻殼 剉之 牛馬踐 積置經冬者 木棉子和廢尿者 亦可(右道人 行之 節旱無草 則可好 而至於晩稻 亦爲之)

 

호마껍질(胡麻殼)을 마구간이나 소 우리에 넣었다가 꺼내어 쌓아 둔 것과 목면(木綿)의 씨를 마굿간의 오줌과 섞은 것이 앙분(秧糞) 즉 못자리 시비에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농가집성의 말미에 있는 우도인(右道人)’이라는 구절은 경상우도(慶尙右道)의 거주민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위빈명농기가 담고 있는 지역적 농사 관행이 바로 경상우도에 해당되는 경상도 상주(尙州)지역인 것이다.

두 인용문을 비교하면,위빈명농기는 기술내용을 소개하면서 지역 명칭을 소개하지 않았고,농가집성에는 지역 명칭을 소개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경상우도인(慶尙右道人)이 행하는 방식이라고 주석을 붙인 것과 그런 단서를 붙이지 않은 양자(兩者) 가운데 문제의 해답은 주석을 상세하게 붙인농가집성위빈명농기보다 후대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속(申洬)위빈명농기나 그 밖의 경상도 지역의 농사관행을 섭렵하여농사직설을 증보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위빈명농기보다농가집성이 나중에 편찬된 농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위빈명농기의 편찬연대가농가집성보다 빠르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농서(農書)에 등장하는 인물의 생존연대가 류진(柳袗)보다 뒷 시기의 인물로 추정되는 사람이 많다는 점과 류원지의 문집에서전사문(田事門)에 관련된 기록이 다수 나온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세워볼 수 있다.

 

1618년 무렵 류진(柳袗)농사직설(農事直說)등을 참고하고 경상도 상주지역의 농사관행을 정리하여위빈명농기를 지었고, 위빈명농기를 근간으로 조카인 류원지(柳元之)가 여러 지역의 사례 등을 더 보충하여전사문(田事門)으로 확대 개편하였다고 본다.

또한 류진(柳袗) 스스로가 제위빈명농기후(題渭濱明農記後)라는 글을 쓰면서 본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라는 농서를 저술하였는지 잘 설명하고 있는 것도 류진이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지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류진(柳袗)제위빈명농기후(題渭濱明農記後)를 정리하면,

 

류진은 애초에 오곡(五穀)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농업기술에 무지하였지만 하회(河回)에서 상주(尙州)에 이거(移居)하여 생활하면서 점차 농사일에 관심을 가지고 농사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노농(老農)에게 재배[耕耘]하는 방법을 물어서 이를 기록함과 동시에 보고 들은 것을 추가하여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지었다. 따라서 자신의 농사 경험과 노농의 고견(高見), 그리고 이러저러한 견문(見聞)을 종합하여 농서를 저술한 것이다. 그리고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저술한 이유를 식력지계(食力之計)’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류진이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썼고, 60여년 뒤에 조카인 류원지가 삼촌인 류진이 지은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근거로 하고 그 후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하여전사문(田事門)을 써서 붙인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일 수 있다.

만약에 이런 추정이 설득력이 있다면, 한림대의 염정섭 교수가,17세기 초반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의 편찬 경위와 농법의 특색에서 밝혔듯이 이 농서를 류진류원지의위빈명농기-전사문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고 판단된다.

 

 

IV.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의 농법(農法)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은 상주 농업를 대표하는 지역농서(地域農書)이다. 농서의 구성체계부터 앞서 나온 농서의 구조나 당대의 농법수준과 논리체계에 짜 맞춰진 것이 아니고, 내용도 지역적인 농업환경에따른 특정한 농업기술과 외부 지역에서 확보한 특별한 견문(見聞) 등으로 구성하였다. 따라서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에서 특기할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종자(種子)관리

 

류진(柳袗)과 류원지(柳元之)는 농사 준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목차 에서도 종자 준비[備谷種]’를 제일 앞에 두어 종자 관리가 필수적인 농사 준비 작업임을 보여주었다.

종자 준비[備谷種]’에는, 먼저 말을 이용하여 충해(蟲害)를 회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눈녹인 물(雪水)과 누에와 번데기를 삶은 물 등에 종자를 적시는 방법으로 가뭄 극복[耐旱], 충해 예방[辟蟲], 수확 증대[收倍]를 도모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말을 이용한 충해 회피방법은 중국 농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범승지서(氾勝之書)에서 인용한 것이다. 또한 말을 이용하여 해충[蟲害]를 방비하는 이 방법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이나 농가집성(農家集成),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없고, 유중림(柳重臨)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의 택종(擇種)에만 증보(增補)되어 있다.

 

2. 기경(起耕)과 개간(開墾) 기술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에서는 다경(多耕)을 강조하였다. ‘경지법(耕地法)’ 항목을 보면, 봄갈이(春耕), 가을갈이(秋耕)의 차이, 단단한 흙(强土)를 약하게 만드는 방법, 무른 흙(弱土)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영남일대의 견문기록을 통해서 다경(多耕)이 뛰어난 소출 증대의 효험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견문기록에는, ‘척박한 논 6두락에서 반경(反耕)을 여섯 차례 하였더니 수확을 40섬이나 하였다 내용이 있으며, 이는 다경(多耕)에 대한 강조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위빈명농기-전사문의 여러 부분에서 다경(多耕)에 대한 효과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특히 시비(施肥)하는 것보다도 수확을 많이 거둘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경지법(耕地法)에 대한 설명에는 논밭, 갯밭(浦田) 등 지목(地目)에 따른 차이점을 설명하고, 토양의 현황에 따라 생흙(生土)과 거름이 많은 땅(熟土), 실토(實土)와 가벼운 흙(浮土)를 나누어 경지법의 원리를 정리 하였다. 이러한 기경(起耕)방식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실제의 농사 현장에서 터득한 생생한 경험과 견문에 근거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어서 개간(開墾)기술에 대해서, 우선농사직설등에서 인용한 윤조원(尹調元)가 경상도 경산(慶山)지역에서 갈대밭에 불을 놓아 경작지로 개간한 사례를 소개하였다. 그리고농사직설등에 인용되어 있는 흙의 맛을 보아 황지(荒地)의 성질을 판별하는 방법도 수록하였다.

황무지 개간(開墾)에 관련된 기술 내용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갯밭(浦田)의 개간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드시 소 7, 8마리에 대형 쟁기를 메어서 갈아주고, 또한 50여 명의 사람을 써서 풀뿌리를 세밀하게 제거해야만 파종[下種]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엄청나게 많은 인력(人力)과 축력(畜力)을 동원하는 개간 작업은 관청(官廳)이나 권세가(權勢家)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개간법을 기록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3. 수전농법(水田農法)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의 수전농법(水田農法)은 기본적으로 이앙법(移秧法)을 채택하였다. 특히 이앙법에서의 볏모[秧苗] 관리와 못자리 시비(施肥)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새로운 기술을 담고 있다. 또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안정적으로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 양건앙(養乾秧)’이라는 방책을 마련하였었다.

따라서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의 수전농법은 모내기 기술체계의 발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못자리에 대한 시비(施肥)의 확대였다. 못자리에 시비를 충실하게 하여 튼튼한 벼 모종(稻秧)을 육성하고, 이를 이식하여 새로운 토양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함과 아울러 본답(本畓)의 관리 보호에 힘을 덜 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거름을 만드는데 진토(塵土), 계분(鷄糞), 버들가지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하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농사직설에서도 못자리 시비에 버들가지가 사용되었다. 못자리를 만드는 시기는 신초(薪草)가 비료로 이용될 정도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눈을 티우는 버들가지가 유용하게 쓰였다고 했다.

이와 같이위빈명농기에서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모내기 거름(秧糞)을 만들어 시비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볏모(秧苗)를 건실하게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는 벼모(秧苗)를 키우는 방법의 진전을위빈명농기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이앙(移秧)할 때에는 벼묘(秧苗)뿌리에 붙은 옛 토양을 전부 씻어내고 뿌리 끝을 잘라주는 것이 좋다는 설명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물 관리를 통해서 제초(除草)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수누법(水耨法)도 소개하였다. 또한 볍씨(稻種)가 못자리에 떠 있을 경우에 대한 대비책도 제시하고 있다.

앙묘(秧苗)관리기술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것이 바로 모판이 마른상태에서 모(乾秧)을 키우는 방법이다. 한해(旱害)로 인해서 수앙(水秧)을 할 수 없을 경우에 건답(乾畓)을 잘 다스려서 건앙(乾秧)을 키우는 건앙법(乾秧法)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앙(移秧)을 적기(適期)에 하지 못할 경우에 벼모의 건실함을 확대시키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직파법(直播法)으로 기른 벼모에서 최대의 문제점인 제초를 편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위빈명농기의 이앙법에 관련된 기술적인 발전은 특히 앙묘(秧苗)관리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앙기술의 발전은 이앙법이 보급 확산되도록 하는데 기여함과 동시에 이앙법을 채택하는 데에 따르는 위험도를 낮추는데 도움을 주었다.

 

4. 보리 경작법(耕作法)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는 보리를 재배하기 위해서 시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윤조원(尹調元)의 구종법(區種法)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고, 보리재배방법(種麥法)의 일반적인 방식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즉 평상 시의 양맥(兩麥, 보리와 밀) 경종법(耕種法)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다.

경지법(耕地法)에서 갯밭(浦田)에서 보리씨를 뿌리는(種麥) 방법을 소개한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갯밭(浦田)에 보리 종자를 뿌리기 위해서는 봄에 작은 쟁기로 이랑을 만들어서 종자를 파종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랑에 파종하는지 고랑에 파종하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갯밭(浦田)의 종맥(種麥)이 이랑에서 이루어지는지 여부를 살피기 위해 밀달조(密達租)의 경작법을 참고할 수 있다.

밀달조(密達租)는 고상안(高尙顔)농가월령에도 등장하는 품종이다.

농가월령4월절(四月節) 입하(立夏)를 보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만 바라보는 봉천답(奉天畓)에서 만약 비가 제대로 오지 않으면 마땅히 건부종(乾付種)을 해야 하는데 이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종(稻種)이 바로 밀달조(密達租)였다. 밀달조는 부종(付種)한 다음에 시비(柴扉)를 그 위에 끌어서 홁덩어리를 부수고 전토(田土)표면을 단단하게 처리하는 복종(覆種)방식이 요구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농가월령의 밀달조를 뿌리고 덮는(覆種)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전토를 처리하도록 한 품종이위빈명농기에서는 모조(牟租)라는 보리 씨앗이었다. 모조(牟租)의 경종방식(耕種方式)은 전토(田土)의 숙경(熟耕), 작은 쟁기로 두 번 갈이(再耕), 볕에 말리기 등과 더불어 씨앗을 뿌린(撒種) 다음 씨앗을 덮는 일(覆種) 등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이 평상시의 종맥법과 같다.(常時種麥之法)’고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작업 순서는 결국농사직설과 같은 방식이고, 이러한 방식이 평상시의 보리재배법(種麥法)이라면위빈명농기의 종맥법도농사직설과 마찬가지로 견종법(畎種法, 고랑에 파종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5. 시비법(施肥法)과 제초법(除草法)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의 시비법(施肥法)에는 종자를 뿌리기 전에 시비를 하기 위한 절초(折草)작업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경지법(耕地法) 항목에는 절초(折草)를 못한 대신에 다경(多耕)을 한 사례가 여러 번 등장한다. 예를 들어 병산(屛山)에 거주하던 애동(艾同)은 절초(折草)를 하지 않았지만, 다경(多耕)을 할 수 있어서 많은 수확을 하였다는 견문(見聞)이 실려 있다.

한편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는 제초에 있어서도 기술적인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잡초가 아직 자라나기 전에 행하는 1차 제초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제초법(除草法) 항목을 보면, 먼저 밭과 논을 여러 차례 갈아 엎어주고(反耕), 거름을 넣어주어 잡초가 생겨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가장 교묘한 방법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논과 밭을 호미로 다스리는 방법은 잡초가 아직 생겨나기 전일 때 반드시 미리 시작하여 계속 순환(循環)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또한 풀이 없어도 호미질을 하면 나중에 수고로움을 덜 수 있으며, 또한 곡물 수확이 평소보다 배가(倍加)된다고 하였다.

신전촌(薪田村)의 어떤 사람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니 농사일이 한창 바쁠 때에도 한가하게 보낼 수 있었고, 나중에 수확량이 많아서 집안이 크게 풍족하게 되었다는 사례를 덧붙였다.

따라서위빈명농기에서는 잡초가 아직 자라지 않았을 때 행하는 1차 제초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못자리에서의 제초가 여기에 해당된다. 1차 제초를 완벽하게 해두게 되면, 그 이후의 제초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고 했다.

 

V. 맺는 말

 

 

16세기까지, 임금과 조정에서는 권농의 직무를 착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중요한 수령의 평가기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16세기 중반 이후 농서 편찬은 농업기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관료(官僚)와 향촌(鄕村)의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주로 맡아서 수행하였다. 농업기술(農業技術)에 관심을 갖고 있는 관료와 재지사족들은 지역적인 농법의 특색을 담은 지역농법을 정리하여 농서를 편찬하였다.

따라서 지역농서(地域農書)’라는 개념은 특정한 지역에 관련된 인물이 특정한 지역의 지역적 농법을 정리하여 만든 농서라고 정의할 수 있다.

16세기 중후반 이후 지역농서가 등장한 배경은, 우선 15세기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은 주곡(主穀) 작물(作物)에 한정하여 재배법[耕作法]을 수록하고, 다른 작물의 경작법을 빠뜨렸다. 또한농사직설(農事直說)은 농업기술이 지역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이를 수록할 만한 여력을 갖기 못하였다.

그리고 농사직설(農事直說)이 여러 차례 간행(刊行)되었으나,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이 참고할 만한 농서 편찬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지역농서 등장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지역적인 농법의 차이를 정리하고 지역농서를 편찬할 필요성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고조되었다는 점이다. 지역적 농법의 특색은 농경(農耕)의 시작과 더불어 점차 지역적인 자연환경의 특색에 맞추어 정립되어 나간 것이었다. 그러한 지역적 농법의 특색을 농서에 반영하려는 시도가 16세기 중후반 이후 향촌(鄕村)에 거주하던 재지사족의 농업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크게 확대된 것이었다.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과 전사문(田事門)은 조선 중기인 16세기 중후반 이후 상주지역의 농법을 정리한 지역농서(地域農書)로 필사본이며,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는 현재 망실된 부분과 군데군데 탈락된 글자들이 많아서 저자(著者)와 서명(書名)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 저자로 추정하고 있는 사람은 수암 류진(柳袗)과 류원지(柳元之)인데 두 사람은 숙질(叔侄)사이이다. 즉 수암 류진의 형님인 류여(柳袽)의 맏아들이 졸재 류원지이다.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의 본문 내용을 1429년에 편찬된농사직설(農事直說)』1655년에 편찬된 신속(농가집성(農家集成)』과 비교 검토한 결과, 신속이위빈명농기나 그 밖의 경상도 지역의 농사관행을 섭렵하여농가집성(農家集成)에 실려 있는농사직설(農家直說)을 증보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런데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전사문(田事門)생존연대가 유진(柳袗보다 뒷 시기의 인물로 추정되는 사람이 많다는 점과 유원지(柳元之)의 문집에서전사문(田事門)에 관련된 기록이 다수 나온다는 점을 감안할 때, 1618년 무렵 유진(柳袗)농사직설등을 참고하고 경상도 상주지역의 농사관행을 정리하여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지었고, 이 농서(農書를 근간으로 유원지(柳元之)가 여러 지역의 사례 등을 보충하여전사문(田事門)』으로 확대 개편하였다고 본다.

 

상주지방의 농업기술을 서술한위빈명농기전사문은 당시 상주를 비롯하여 경상도 북부지역의 농사를 주도한 대단히 의미깊은 농서이며, 이러한 농서를 통해서 상주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주곡(主穀)인 미곡(米穀)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농서(農書)야말로 우리 상주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