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春堂 宋浚吉의 性理學
黃義東(충남대 명예교수)
1, 序言
宋浚吉(1606~1672)은 17세기 조선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기호학파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위로는 栗谷, 沙溪, 愼獨齋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그의 문하에는 屯村 閔維重, 霽月堂 宋奎濂, 霽谷 黃世貞, 藥泉 南九萬 등이 있었다. 그의 문인록에 의하면 이 밖에도 寒水齋 權尙夏, 芝村 李喜朝, 瑞石 金萬基, 畏齋 李端夏, 明村 羅良佐 등도 그의 문하에 출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인품이 훌륭하여 衆望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同門修學을 하고 同族으로 평생을 함께 했던 尤菴의 그에 대한 다음 인물평은 이를 입증해 준다.
公이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心力이 매우 약해 독서할 때에는 뜻과 생각을 다 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스스로 겸손해 한 말이다. 그 생각을 다 해 이른 곳에 서는 십분 精明하여 쳐도 깨어지지 않는다. 대저 공은 用力이 이미 오래이어서 만년 에 덕을 이룬 즉, 精粹한 氣가 面貌에 달하고 動靜語黙이 端莊하고 閑整에 모남이 없 지만 규범을 넘지 않았으며, 色容이 淸和하고 辭氣가 통달하며 存心處事가 간절하고 精當하였다.
나는 마음이 거칠어서 心學공부에 적극 힘써보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실효 를 얻지 못했다. 지금에 이르러 혈기가 이미 쇠하여 思慮가 적어지자 마음이 안정됨 을 자연 깨닫겠으니 대체로 心學공부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同春 형 같은 분은 자질 이 스스로 높아서 나 같은 사람에 미칠 바가 아닌데도 오히려 마음 제어하는 일이 쉽 지 않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겠는가?
이를 통해 동춘당의 학문과 인품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심대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동춘당의 학문영역은 대체로 性理學, 禮學, 經學, 經世學 등으로 大別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예학에 특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성리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에 비해 적었던 것 같다. 물론 理氣心性論 외에 수양론에 있어서는 내용면이나 양에 있어서 많은 관심을 가졌던 흔적이 농후하지만, 理氣心性論에 대한 전문적인 논문이나 글이 全無한 실정이다. 겨우 「經筵日記」나 鄭經世, 鄭景式, 鄭景華 등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동춘당이 살았던 시대적 사상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이 폐위되고(1623년), 李适의 난이 일어나는가 하면(1624년), 치욕적인 정묘호란과(1627년)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饑饉과 질병으로 민생이 극도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으며, 사상적으로는 서양의 문물이 소개되는가 하면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의리학과 예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동춘당이 활동했던 17세기는 16세기와는 달리 격동의 시대였으며, 철학적인 思辯에 몰두하기 보다는 당면한 현실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의리론이나 예학의 융성은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먼저 그의 학문적 연원에 대해 고찰해 보고 그의 理氣論과 心性論을 논구하고자 한다. 그의 聘父인 愚伏 鄭經世의 영향과 관련하여 동춘당의 학풍을 退. 栗의 절충 내지 조화적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견해가 과연 타당한지 이에 관해서도 검토하고자 한다. 또 일반적으로 동춘당의 성리학이 율곡설의 부연 설명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과연 율곡과 구별되는 동춘당의 성리학적 특성은 없는지 유념하고자 한다. 17세기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동춘당의 성리학을 조명하고 그의 유학사적 자리 매김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미가 있다.
2, 同春堂의 學問的 淵源
먼저 동춘당의 학문적 배경과 그 연원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자. 첫째는 家學的 연원을 들 수 있다. 동춘당의 7세조 雙淸堂 宋愉는 幽貞의 덕과 孤高한 절개가 있는 인물로서, 일찌기 벼슬에 나갔다가 神德王后를 太廟에 祔祀하지 않음이 의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바로 사퇴 귀향하여 회덕 白達村에 은거하면서 종신토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의리를 지킨 伯夷風의 유학자였다. 그는 草堂 주변에 靑松과 翠竹을 심어놓고 하객을 모아 문예로서 朋友講習의 道樂을 즐겼으며, 모친 柳씨 부인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제사에는 항상 精潔을 힘쓰고 禮行에는 반드시 古制를 遵行하였다. 그러므로 그 堂을 단종을 위해 수절한 朴堙이 雙淸堂이라 扁名하여 詩로 학행을 讚하였으며, 안평대군이 이에 和答하였고, 이어 단종을 위해 節義를 지키다 죽은 朴彭年이 記文을 지어 宋公의 孤高淸明한 덕행과 의리를 칭송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쌍청당의 의의는 박팽년의 記文에 의하면 천지간 풍월의 淸明함과 쌍청당 宋公의 德光이 和光同淸된다는 뜻으로서, 이러한 宋公의 幽貞之德과 孤高之節은 그 정신이 그대로 후대로 전승되어 동춘당의 예학사상과 우암의 大義정신으로 집대성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춘당의 학문 형성에 있어서 쌍청당 송유의 ‘從容就義 物我雙淸’의 도학정신은 많은 영향을 미쳤으니, 그의 堂名이요 號인 ‘同春’이 바로 이러한 정신을 계승한 ‘物我無間 與物同春’에서 연유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의 빙부인 愚伏 鄭經世의 학문적 영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동춘당은 사계, 신독재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업했지만 일면 우복의 문하에도 출입했기 때문이다. 우복은 퇴계의 문인인 柳成龍의 문인이므로, 동춘당의 학풍에 미친 영남유학 내지 퇴계학의 영향을 가늠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동춘당의 성리학이 기본적으로 율곡설을 계승하고 있지만, 그의 퇴계에 대한 尊崇은 지극하였던 것이다. 그는 퇴계의 장처를 精詳愼密함에 있다 하고 퇴계를 終身토록 스승으로 삼아 본받고자 하였다. 이는 그의 卒年作인 다음 「記夢詩」를 통해서도 퇴계에 대한 흠모가 얼마나 지극했던가를 알 수 있다.
평생토록 퇴계선생님 공경해 우러르니,
세상 떠나셨어도 그 정신 오히려 感通시키네.
오늘밤 꿈속에서 가르침 이어받고,
깨어보니 山月이 창가에 가득하네.
둘째는 율곡, 사계, 신독재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문적 연원을 들 수 있다. 그는 율곡의 사단 칠정을 논한 글이야 말로 식견이 뛰어나고 언론이 통쾌하여 과거 여러 유학자들이 미치기 어려웠다 하고, 율곡의 말은 高明通透한데 「聖學輯要」의 학문과 정치의 방법은 가장 切要하다고 평가하였다. 또 율곡의 「擊蒙要訣」가운데 격언 수 십여 조를 방에 써 놓고 독서의 순서로 삼고 학도를 가르치는데 참고하였으며, 隱屛精舍 學規를 게시하여 아침저녁으로 살피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성리학이 근본적으로 율곡설의 계승이라는 점에서도 동춘당의 학문적 연원을 율곡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동춘당은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사계가 세상을 떠남에 그 아들 신독재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그는 사계에게서 ?小學? ?家禮? 등을 배웠는데, 사계는 예로서 가르치면서 기뻐해 말하기를 “이 사람이 훗날 반드시 禮家의 宗匠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처럼 성리학은 물론 특히 예학에 있어서 사계가 그에 미친 영향은 컸다.
세째는 朱子 및 李延平의 학문적 연원을 들 수 있다. 동춘당이 어려서 부터 배운 학문은 물론 孔.孟유학이지만, 가까이는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어려서 부터 배운바가 성리학이었으며, 사계, 율곡으로 이어지는 기호유학 또한 주자학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가의 道統이 伏羲로 부터 시작되어 주자에게서 끝났다 하고, 주자의 功은 성인보다 못하지 않다 고 추앙하였다. 또한 우리나라는 오로지 주자의 道를 爲主해서 陸學의 폐단이 없는 것은 퇴계, 율곡의 功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동춘당은 성리학에 근본을 두면서 또 先儒 가운데 李延平의 질박하고 성실한 학풍을 가장 사모한다 하였다. 이연평은 주자의 스승이므로 동춘당의 학문적 연원이 성리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동춘당의 학문적 연원은 가학적으로는 그의 7세조 쌍청당 송유와 빙부인 우복 정경세를 들 수 있고, 기호유학의 학통에서는 율곡, 사계, 신독재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李延平, 주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에 그 연원을 두고 있고, 우복과 연관하여 퇴계의 학문적 연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3, 同春堂의 理氣論
성리학자들에 있어서 理氣觀은 세계를 보는 눈과 같다. 동춘당이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는 그의 理氣觀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그의 理氣觀을 알 수 있는 체계적인 논문은 한 편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別集?의 經筵日記와 鄭經世, 鄭景式, 鄭景華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간헐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동춘당의 理氣觀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그의 ?年譜?를 보면 30세에 정경식(憲世)과 退.栗의 理氣說을 논하고, 37세에 주자의 ?延平答問?을 교정했고, 43세에 우암과 함께 ?近思錄釋疑?를 교정했고, 44세에서 63세에 이르기 까지 무려 20여 년간 經書와 性理 諸書를 강의한 것으로 보면, 그의 성리학에 대한 관심은 평생을 걸쳐 떠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理氣心性에 대한 전문적인 논문이 없다 해도 그의 성리학적 견해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먼저 그는 이 세계를 理와 氣로 설명하고 이 양자는 본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理는 氣 가운데 떨어지고 氣가 능히 用事함에 만물이 化生하니, 이것이 이른바 ‘氣以成形 理亦賦焉’이라고 말한다. 理가 氣 가운데 떨어진다 해서 理와 氣가 떨어져 있다가 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理氣의 妙合구조를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萬物化生은 理와 氣라는 두 실체개념을 전제해서만 가능하다. 그는 또 사람은 理氣가 서로 합해 되어진 존재로 보고 이것이 소위 ‘妙合而凝’이라 하고, 우리의 마음도 虛靈知覺한데 理氣를 합해 이름한 것이라 한다. 또 사단 칠정이 모두 氣發理乘의 구조임을 명백히 하여, 인간의 심성세계도 合理氣의 구조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理와 氣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동춘당에 의하면 理와 氣는 원래 서로 떨어질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周濂溪의 ?太極圖說?과 같이 無極의 眞과 二五의 精이 오묘하게 합해 엉긴 것이다. 따라서 율곡이 ‘本混融無間’ 다섯 자를 항상 贊誦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理와 氣는 본래 混融하여 틈이 없는 관계로 있다. 따라서 理와 氣는 시간적으로 先後가 없고 공간적으로는 離合이 없으므로 퇴계의 互發을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춘당은 鄭汝昌이 항상 주자의 ?中庸?首章註에 나오는 ‘氣以成形 理亦賦焉’에 대해 의심을 가졌었는데, 율곡이 이를 잘 밝혀주어 後學에게 유익했다 한다. 여기에서 정여창의 주자 註에 대한 의심은 氣先理後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인데, 율곡은 이를 ‘理氣不相離’를 밝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동춘당은 율곡의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고 있다.
또한 동춘당은 ‘妙合而凝’에 대한 ?性理群書?의 註 ‘妙於凝合 無間斷’을 이렇게 비판한다. 妙合이란 理氣가 본래 混融하여 틈이 없는 것으로, 凝은 聚이므로 氣가 모여 形을 이루는 것이니, 妙合과 凝은 두 가지 일이다. 그런데 註를 凝合으로서 말한 것은 한 가지 일이니 아마도 주자의 뜻과 맞지 않는 듯 하다. 또 ‘無間斷’이라 말한 것도 間斷字가 온당치 못한 듯 하니, 間隔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떤지 모르겠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동춘당은 ?太極圖說?의 ‘妙合而凝’에 대한 ?性理群書?의 註解를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理氣의 묘합처 이해의 미비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동춘당이 ‘氣以成形 理亦賦焉’이나 ‘妙合而凝’에 대해 精微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른바 理氣說에 있어서의 난해처가 그 묘합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춘당은 理와 氣의 개념과 특성 그리고 그 기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첫째, 理는 物마다 있지 아니한 바가 없으나 형상을 볼 수 없고 자취를 찾을 수 없으므로 形而上이라 하고, 氣는 형상을 볼 수 있으므로 形而下라 한다.
그런데 下란 형상이 있고 자취가 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上이란 形迹의 밖을 뛰어 넘어 보고 들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동춘당은 形而上과 下의 구별을 無形과 有形으로 나누고 감각적 경험여부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理氣의 개념적 근거를 ?周易? 繫辭의 ‘形而上者 謂之道 形而下者 謂之器’에서 찾는 것인데, 문제는 無形, 有形에서의 形이라 하겠다. 形이나 迹을 감각적 경험의 대상으로 규정해 버린다면 心이나 사단 칠정같은 비물질적 무형의 존재에 대한 理氣論的 해석이 어렵게 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다 정밀한 해석이 요구된다.
또 동춘당은 ?周易?계사에 근거하여 器는 곧 氣요 道는 곧 理라 하고, 道는 진실로 形而上의 理이므로 形而下의 氣와 섞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理를 형이상자로서의 道, 氣를 형이하자로서의 器로 이해함은 주자나 율곡의 이해와 다름없는 것이다.
둘째, 氣는 發하는 것, 理는 발하는 所以로 규정된다. 동춘당은 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氣 뿐이라 보고, 理는 그 스스로는 발하지 아니하면서 氣發의 所以가 된다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理發을 인정하여 理發, 氣發의 互發을 주장하는 퇴계의 설에 반대하고, 氣發理乘一途의 율곡설에 동의하였다. 동춘당은 이것이야 말로 자신을 포함해서 스승인 사계와 빙부인 우복도 견해를 함께 한다고 보았다. 동춘당은 율곡의 말에 따라 氣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理가 아니면 발할 바가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이 理의 發을 부정하고 氣發만을 인정하면서 氣發의 소이를 理에 돌리는 것은 율곡설의 충실한 계승인 동시에, 기본적으로 그의 理氣說이 율곡, 사계의 正脈을 그대로 잇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째, 동춘당은 율곡의 理通氣局說에 근거하여 理는 보편성, 氣는 局限性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理가 두루 通할 수 있음은 理가 無形하기 때문이며, 氣가 局定하게 됨은 氣가 有形하기 때문이다. 동춘당은 율곡의 理通氣局이야 말로 先賢이 아직 발하지 못한 形狀理氣本體를 直截하게 분명히 하여 百世에 후학을 깨우친 것이며, 그 학문의 精詣가 남보다 뛰어남이 어찌 이에 미칠 수 있겠느냐고 극찬하였다.
네째, 理는 氣의 主宰로, 氣는 理의 탈 바로 규정된다. 동춘당은 이 세계 모든 존재를 발하는 氣위에 理가 올라 탄 氣發理乘의 구조 즉 ‘理乘氣’의 구조로 설명한다. 따라서 氣는 理의 탈 바로서 理의 의착처가 되며, 마치 理를 담는 그릇과 같은 기능과 역할을 갖는다. 그리고 理는 氣에 실려 있고 태워져 있지만, 氣의 존재근거로서 主宰的 기능을 갖는다. 그것은 萬物化生의 주체가 氣라 할 수 있으나 氣는 理의 부리는 바가 아니냐는 물음에 동춘당이 옳다고 동의한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理氣의 개념이해는 역시 주자나 율곡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동춘당은 ?詩經?의 ‘有物有則’과 연관하여 이 形이 있으면 이 理가 있다 하고, 父.子.君.臣은 형이하의 器로서 이것이 物이라 하고, 父의 慈와 子의 孝와 君의 義와 臣의 忠은 형이상의 道로서 이것이 則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또 天이 物을 生함에는 각각 그 법칙이 있으니, 마치 父子로서 말하면 父와 子는 物이고, 慈와 孝는 則이며, 耳目으로서 말하면 耳와 目은 物이고, 聰과 明은 則이라 하였다. 따라서 先儒의 이른바 ‘物各付物’이란 것이 物이 모두 각각 그 법칙에 마땅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循天則’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동춘당은 父.子.君.臣은 형이하의 器로서 物 내지 形으로 보았고, 父.子.君.臣의 所當然之理라 할 수 있는 慈.孝.義.忠은 형이상의 道로서 則이요 理로 보았다. 여기에서 道와 則과 理를 상통해 보는 것은 별 문제가 없으나, 形이나 物을 氣와 동일시해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일반적으로 성리학에서 ?周易? 계사의 ‘形而上者 謂之道 形而下者 謂之器’에서 道를 理로, 器를 氣로 보지만, 정여창이나 우암에서 처럼 形, 道(理), 器(氣)를 엄밀히 구별해 보기도 한다. ‘有物有則’에서의 物과 形은 구체적인 사물존재 자체를 言表한다면 그것의 존재구조는 형이상자로서의 道와 형이하자로서의 器로 설명되는 것이다. 따라서 道를 理라 할 수 있고 器를 氣라 할수는 있지만, 物과 形을 그대로 형이하자인 器나 氣와 동일시함은 性理의 정밀성을 결여한 것이다.
다음은 동춘당의 ?中庸? ‘費而隱’에 대한 理氣論的 해석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동춘당은 慈.孝.義.忠은 理의 당연한 것으로 이른바 費요 用이며, 慈.孝.義.忠의 所以는 理의 所以然으로서 ‘至隱存焉’이며 이른바 體라 하였다. 따라서 費를 用之廣, 隱을 體之微라 말한 것이 모두 理의 體用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 費를 氣, 隱을 理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선조 때 盧守愼, 許曄 등이 이러한 견해를 면치 못했는데, 李滉, 李珥, 奇大升 등이 이를 비판하는데 힘써 노력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동춘당은 ?中庸? ‘費而隱’에 있어서 費는 氣로, 隱은 理로 分屬하는 폐단을 비판하고, 이는 理의 體用을 가리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하였다.
또한 동춘당은 ?性理群書?註에서 太極은 精이 되고 陰陽은 粗가 되며, 太極은 本이 되고 陰陽은 末이 된다고 했는데, 이러한 해석은 틀린 것 같다고 하였다. 그것은 율곡이 精粗本末은 모두 氣이고 一理는 精粗本末彼此의 사이가 없이 통한다고 말한 데서 그 근거를 찾는다. 또 뒤에 주자의 글에서도 ‘氣의 精粗를 논할 것 없이 理는 있지 아니함이 없다’는 말이 나오고, ?論語?註에서도 ‘理는 精粗本末이 없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율곡과 주자의 견해가 일치하는데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동춘당은 율곡과 주자의 해석에 근거하여 ?性理群書?가 태극과 음양을 각기 精과 粗, 本과 末로 分屬하는 것은 잘못이라 비판하였다. 즉 태극은 理이고 음양은 氣인데 精粗本末이란 어디까지나 氣에 국한된 구별일 뿐, 理는 精粗本末 어디에나 두루 통할 수 있기 때문에, ?性理群書?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것 또한 동춘당의 성리학에 대한 식견과 이론의 정밀함을 보여주는 예다.
이상에서 동춘당의 이기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이론이 분분하다. 劉明鍾은 동춘당의 理氣說을 理氣混融說이라 하고 主氣說 내지 氣學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하였고, 宋寅昌은 동춘당은 성리학적 입장에서는 율곡의 학설을 따랐으나 理의 일차성과 우위성을 인정함으로서 율곡보다 理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고, 이는 퇴계에 대한 존숭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동춘당이 율곡의 理氣論에 동의하고 理氣二元의 존재관과 理氣妙合의 理氣觀을 따른다고 보면 主理도 아니고 主氣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理氣二元의 존재관에서 理와 氣는 하나의 존재 성립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즉 理나 氣 단독으로는 하나의 존재성립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理나 氣의 기능 또한 양자의 묘합적 구조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理의 氣에 대한 主宰나 所以의 기능도 氣의 理에 대한 發의 기능과 相補的관점에서 이해됨이 온당하다 하겠다. 따라서 동춘당의 이기관이나 세계관은 율곡의 理氣之妙的 관점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同春堂의 心性論
동춘당의 심성론을 알 수 있는 전문적인 논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경연일기」를 통해 그 대체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동춘당의 심성론을 人心道心論과 四端七情論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기로 하자.
동춘당은 心은 虛靈知覺한 것으로 理氣를 합해 이름한 것이라 한다. 이처럼 心을 合理氣의 구조로 이해하고 虛靈知覺의 기능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주자나 율곡과 의견을 함께하는 것이다.
또한 心은 衆理를 갖추고 있고 萬善이 具足하다 한다. 이 마음은 안에서 거두어 들이면 그 속이 저절로 한결같음이 있고, 천지 밖에서 발하면 만사에 응함이 무궁하다. 마음에 거두어 들임은 體요 만사에 발함은 用이니, 반드시 本末을 갖추고 表裏가 하나같은 연후에야 酬酌萬變에 어긋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 한다. 이렇게 동춘당이 心을 衆理를 갖추고 萬善을 구족한 것으로 보는 것은 주자가 明德을 ‘虛靈不昧한 것으로서 衆理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에 근거한다. 또한 율곡도 사람의 한 마음은 萬理를 온전히 갖추었다고 말한바 있다.
그런데 동춘당은 金萬重이 ‘虛靈은 心의 體요 知覺은 心의 用’이라고 말한데 대해 그것은 그르다고 말하고, 虛靈知覺이 모두 心의 體라 하였다. 그리고 ‘具衆理’는 體요 ‘應萬事’는 用이라고 분석하였다.
이렇게 볼 때, 동춘당의 心에 대한 이해는 ‘合理氣’의 구조를 가진 것으로 虛靈知覺한 것, 萬理를 갖춘 것, 萬善을 具足한 것으로 특징된다. 이러한 心의 이해는 주자, 율곡의 心 이해와 그 궤를 함께 하는 것이다.
다음은 동춘당의 인심도심에 관한 견해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먼저 인심도심에 대한 동춘당의 개념설명을 보기로 하자.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입고 싶은 것이 人心이다. 또 입은 먹고 싶고 눈은 보고 싶고 귀는 듣고 싶고 사지는 편안하고 싶은 것이 人心이고, 맹자의 이른바 四端이 道心이다.
이렇게 볼 때, 동춘당에 있어서 人心이란 血氣에서 나온 마음이고, 義理에서 나온 마음이 道心이다. 이러한 동춘당의 인심도심에 대한 개념정의는 주자가 인심을 形氣의 私에서 나온 것으로, 도심을 性命의 正에 근원한 것으로 규정한데서 연유하며, 율곡이 理義를 위해 발한 마음이 도심이고, 食色을 위해 발한 마음이 인심이라고 본 것과 같다.
그리고 동춘당은 이러한 인심도심의 경향성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보았다. 비록 堯. 舜이라도 人心이 없을 수 없고, 비록 桀. 紂라도 道心이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사람은 이 形이 있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비록 성인이라도 人心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 性이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비록 盜蹠이라도 道心이 없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인심도심의 두 가능성이 보편적으로 주어진다. 그런데 人心을 먼저 말하고 뒤에 道心을 말하게 되는 것은, 日用行事에 人心이 항상 발로되고 人心이 발동할 때가 많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면 인심도심의 理氣구조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동춘당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인심이나 도심 모두를 合理氣의 구조 내지 氣發理乘으로 이해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느낌이 있은 후에 발하는데, 발하는 것은 氣요 발하는 所以가 理다. 食色의 대상에 따라 느껴 발한 마음이 인심이라면, 의리의 대상에 따라 발한 마음이 도심이다. 이처럼 心의 구조를 合理氣 내지 氣發理乘으로 보고, 발하는 것은 氣요 그 氣發의 所以를 理로 보는 것은 율곡의 설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 인심과 도심의 상호가능성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동춘당은 인심의 도심화 가능성과 도심의 인심화 가능성을 모두 인정한다. 그는 주자의 ‘인심으로 부터 收斂하면 곧 도심이고, 도심으로 부터 放出하면 곧 인심이라’고 한 말은 참으로 좋다고 평가한다. 그는 또 ‘인심도심이 같지 않지만, 인심의 發을 理로서 裁制해서 中에 맞게 하면 인심이 도리어 도심에 맞는다.’는 우암의 말이 매우 좋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의복 음식에 대한 생각은 처음에는 인심에서 나오지만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으면 도심으로 돌아가게 되며, 만약 인심을 절제할 수 없게 된다면 도심은 날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도심의 인심화’ 보다는 ‘인심의 도심화’에 마음공부의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것이다. 동춘당은 주자나 율곡의 설에 따라 도심으로서 主를 삼아 인심이 그 명령을 듣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 인심도심과 天理人欲의 관계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동춘당은 潛室 陳氏의 말을 인용하여 理에 맞고 절도에 맞으면 곧 천리가 되고, 理가 없고 절도가 없으면 곧 인욕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자가 젊었을 때 인심을 인욕으로 생각했었으나, 늦게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깨닫고 말하기를, 인심이 만약 인욕이라면 성인이 危字를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본래 人心을 人欲으로 보고 道心을 天理로 본 것은 정이천에 의해서라 하겠는데, 주자도 젊었을 때 이를 따랐으나 늦게 깨달아 인심을 인욕으로 보지 않았다. 물론 율곡도 도심은 순수한 천리이어서 선한 것으로 보지만, 인심은 천리도 있고 인욕도 있어 선악의 두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동춘당도 이러한 주자나 율곡의 견해와 같이 인심을 인욕만으로 돌리지 않고 천리가 될수도 있고 인욕이 될수도 있으며, 또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동춘당은 周濂溪의 ‘誠無爲 幾善惡’이야 말로 인심도심이 나뉘는 곳이라 하고, ‘誠無爲’는 太極이요 ‘幾善惡’은 太極이 陰陽을 生하는 것이라 하였다. 결국 ‘誠無爲’는 마음의 본체로서 천리요 도심의 자리라면, ‘幾善惡’은 천리와 인욕, 선과 악의 갈림길이라 할 것이다. 동춘당은 欲이란 것도 반드시 沈溺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하고, 이 마음이 비로소 향하는 바가 있자 마자 곧 欲이 된다 하였다. 이는 그가 欲을 惡 일변으로 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향해 志向하는 욕구로 이해하여, 선악 양면의 가능성을 함께 갖는 것으로 보았음을 잘 말해 준다. 이러한 동춘당의 人心觀이나 人欲觀은 천리, 도심은 선이고 인욕, 인심은 악이라고 分屬하는 태도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천리와 인욕을 二元的으로 상대해 보지 않고 인간 마음의 양면으로 이해하는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춘당은 ‘인심을 도심으로 삼는 것은 마치 鐵을 銀으로 만들고 賊을 자식으로 삼는 잘못과 같다’고 말한다. 또 인심도심은 公私義利의 구분이 判然하므로 둘 사이에는 터럭만큼도 용납할 수 없다 하고, 반드시 지극히 정밀하게 살피기를 白黑의 辨別과 같이 해야 한다 하였다. 이와같이 인심도심을 公과 私, 義와 利로 分屬하여 흰 것과 검은 것의 구별처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은, 인심에 대한 도심의 가치적 우위성과 도심에 대한 인심의 가치적 貶下를 깔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동춘당은 인심을 곧 인욕으로 돌려 악한 것으로 보지는 않지만, 純善의 도심과는 가치적으로 구별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따라서 동춘당의 인심도심설은 궁극적으로 도심이 항상 主가 되어 인심을 절제시키고, 또 인심은 항상 도심의 명령을 들어 인심의 도심화를 추구하는데 있다. 이러한 동춘당의 인심도심설은 앞에서 지적한 것 처럼 주자나 율곡의 인심도심설과 그 궤를 함께한다. 다만 동춘당의 창의성을 찾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를 통해 그의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식견은 충분히 짐작된다.
다음은 동춘당의 四端 七情에 관한 견해를 검토 정리해 보기로 하자.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 情의 범주에 속한다. 동춘당은 物에 느낀 것을 일러 情이라 하고, 그 정에 따라 헤아리고 計較한 것을 일러 意라 하였다. 주자가 情은 舟車와 같고 意는 사람이 舟車를 부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意는 선악이 있는데 이것이 소위 意의 발용이다. 理에 마땅치 않으면 곧 私意다. 이와 같이 동춘당은 어떤 대상에 느껴 움직인 마음을 情이라 하고, 그 정에 따라 헤아리고 계산하고 비교하는 마음을 意라고 보았다. 따라서 意에는 선악이 있는데, 이것이 意의 발용이다. 意에 마땅치 않으면 곧 私意가 되고 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춘당의 情. 意에 대한 이해는 율곡의 견해와 같다. 율곡은 心이 느낀 바 있어 움직인 것을 情이라 하고 心이 느낀 바에 따라 뽑아내고 헤아리는 것을 意라 하였다. 그리고 동춘당이 意에 선악이 있다 했는데, 율곡은 先儒의 말임을 밝히면서 情에는 不善이 없으나 意에는 선악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情 자체는 不善이 없다 하겠지만 절도에 맞지 않을 때 악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동춘당은 사단 칠정에 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는 칠정 가운데 선한 것이 사단이냐는 물음에 대해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된다 하고, 율곡의 ?聖學輯要? 가운데 이것을 논한 것이 매우 분명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동춘당은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구별해 보는 퇴계와는 달리 칠정 속에 사단을 포함시켜 보고 칠정중의 善情이 사단이라고 보는 율곡의 설에 동의하였다.
또한 동춘당은 사단칠정의 理氣구조에 대해 사단을 ‘理發而氣隨之’, 칠정을 ‘氣發而理乘之’로 구별해 보는 퇴계와는 달리, 사단 칠정을 모두 氣發理乘의 구조로 보는 율곡의 설에 동의하였다. 따라서 사단이나 칠정 모두가 발하는 것은 氣요 발하는 소이는 理다. 그러므로 氣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理가 아니면 발할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단 칠정에 대한 의견은 그의 스승인 사계 뿐만 아니라 빙부인 우복까지도 동의했던 바라 하였다.
또한 동춘당은 칠정은 사단과 다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칠정은 사단을 그 가운데 포함하고 있는데, 사단은 純善無惡하고 칠정은 선도 있고 악도 있다 하였다. 따라서 사단은 칠정중의 善情으로 純善한 것이지만, 칠정은 氣가 理의 주재에 대해 어떻게 發하느냐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동춘당의 인간 심성에 대한 이해는 주로 인심도심에 그 관심이 많은 편이다. 동춘당의 심성론의 요점은 心을 合理氣의 구조로 보고 虛靈知覺한 것, 萬理를 갖추고 萬善을 具足한 것으로 보는 점과, 인심은 혈기에서 나온 마음이고 도심은 의리에서 나온 마음인데, 도심의 인심화, 인심의 도심화 가능성이 모두 주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항상 도심을 주로삼아 인심이 그 명령을 듣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인심을 인욕으로 보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선악 양면의 가능태로 규정하지만, 純善으로서의 도심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관점에 있다.
또한 인심도심, 사단칠정의 구조를 氣發理乘으로 보고 발하는 것은 氣요 그 氣發의 所以가 理라고 본다. 四.七論에 있어서는 사단을 칠정속에 포함시켜 보고 사단은 칠정중의 善一邊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사단은 純善無惡하지만 칠정은 有善有惡하다고 본다.
이러한 동춘당의 심성이해는 율곡과 그 궤를 함께 하는 것이며, 역시 그의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헤아릴 수 있다.
5, 結語
이제까지 동춘당 성리학의 理氣心性論을 고찰해 보았는데 이를 요약함으로서 결론을 삼고자 한다. 동춘당의 理氣心性論에 대한 관심은 예학이나 敬중심의 수양론에 비해 소극적인 편이다. 그것은 그의 문집속에 이에 관한 전문적인 논문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도 입증된다. 단지 「경연일기」와 정경세, 정경식, 정경화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겨우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가 살았던 17세기의 역사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고 또 당시의 사상적 풍토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제 그의 理氣心性論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춘당의 학문연원은 家學的 연원으로서 그의 7世祖 雙淸堂 宋愉와 聘父 愚伏 鄭經世를 들 수 있고, 기호유학의 연원으로 율곡, 사계, 신독재를 들 수 있으며, 家學的 연원으로 주자와 이연평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우복과 연관하여 퇴게의 학문적 영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동춘당의 理氣論은 理氣二元의 존재관을 전제로 理氣妙合구조에 관심을 갖는다. 그에 의하면 理는 無形의 形而上者, 氣는 有形의 形而下者이고, 氣는 발하는 것, 理는 발하는 所以로 규정되고, 理는 두루 通하는 것으로, 氣는 局定한 것으로 설명된다. 또 理는 氣의 주재로, 氣는 理의 탈 바로 이해된다.
또한 동춘당은 道와 則과 理를 상통해 이해하고 形과 器와 物과 氣를 동일시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形이나 物을 氣와 동일시해 보는 것은 문제로 남는다.
동춘당은 율곡의 氣發理乘一途와 理通氣局의 논리에 동의하고 이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이기론이 율곡에 근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춘당은 心을 合理氣의 구조, 虛靈知覺한 것, 萬理를 갖추고 萬善을 具足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에 의하면 人心은 血氣에서 나온 마음이고 道心은 義理에서 나온 마음인데, 성인도 人心이 없을 수 없고 盜蹠도 道心이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동춘당은 人心의 道心化와 道心의 人心化라는 두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지만, 그의 관심은 人心의 道心化에 있었다. 따라서 항상 道心이 主가 되어 人心이 그 명령을 듣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人心道心을 人欲天理로 分屬하는 것에 반대하고, 人心을 天理와 人欲, 善과 惡의 두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동춘당은 人心道心, 四端七情의 구조를 모두 氣發理乘으로 이해하고, 四端을 七情속에 포함시켜 보고 七情중의 善情을 四端이라 하였다. 따라서 四端은 純善無惡하지만 七情은 有善有惡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동춘당의 理氣心性에 대한 이해는 대체로 주자와 율곡의 설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특히 理氣妙合에 대한 관심, 氣發理乘, 理通氣局에 대한 긍정, 理發을 반대하는 점, 人心道心의 상호가능성, 人心聽命於道心의 강조, 人心을 人欲的인 악으로 보지 않는 점, 四端을 七情속에 포함시켜 보는 점, 人心道心 四端七情의 구조를 氣發理乘으로 보는 점 등은 율곡 성리학의 계승이다.
이렇게 볼 때, 동춘당의 理氣心性論은 독창의 면에서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 동춘당의 성리학에 있어서 그의 빙부인 鄭經世와 관련하여 퇴계의 영향이 어떠했는가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동춘당의 철학적 위치와 특성을 퇴계와 율곡, 영남유학과 기호유학의 조화 내지 절충에서 찾기도 하지만, 적어도 성리학적 측면에서는 이렇게 보기 어렵다. 이 보다는 율곡의 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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