管仲의 四維에 대한 현대적 의미
권세환 문경대학교 초빙교수
Ⅰ. 사유(四維)란?
인심(仁心)은 터희 되고 효제충신(孝悌忠信) 기동(棟)이 되야
예의염치(禮義廉恥)로 가즉이 녜여시니
천만년(千萬年) 풍우(風雨)를 만난들 기울 줄이 이시리.
소학(小學)에서는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사유(四維)라고 하여 어린 학동교육에 기본을 두었다.
사유(四維)라는 말은 중국 역사상 유명한 정치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제(齊)나라 관중(管仲 : ?∼BC 645)이 저술한 관자(管子)에 나오는 말이다. 관중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관중은 당시 어려운 제나라의 살림을 맡게 되자 오늘날 산둥반도에 자리 잡았던 제나라가 바닷가에 있는 이점을 살려 교역을 통해 재물을 쌓았고 곧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관중안자열전(管仲顔子列傳)에서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실천하면 육친이 굳게 결속하고, 사유(四維)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한다.
라고 하였다.
이를 관중(管仲)은 관자(管子)에서 國有四維(국유사유)의 중요성을
그 가운데 하나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가지가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세 가지가 끊어지면 나라가 뒤집어지고, 네 가지가 끊어지면 망한다. 기우는 것은 바로 잡을 수 있고 위태로운 것은 안정시킬 수 있고 뒤집어지는 것은 일으켜 세울 수 있으나 망한 것은 다시 일으킬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또한 관중(管仲)은 나라에는 네 가지 강령이 있다고 하였다.
무엇을 네 가지 강령이라고 부르는가? 첫째는 예(禮), 둘째는 의(義), 셋째는 염(廉), 넷째는 치(恥)이다. 예(禮)란 절도를 넘지 않음이고, 의(義)는 스스로 나아가기를 구하지 않음이다. 염(廉)이란 잘못을 은폐하지 않음이고, 치(恥)란 그릇된 것을 따르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절도를 지키면 윗사람의 자리가 평안하고, 스스로 나아가기를 구하지 않으면 백성은 교활함과 속임이 없고, 잘못을 은폐하지 않으면 행실이 저절로 온전해 지고, 그릇된 것을 따르지 않으면 사악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四維 네 가지 강령을 살펴보면
국가의 창고가 가득 차게 되면 백성들이 예절을 알게 되고, 의식이 풍족하게 되면 백성들이 영(榮)과 욕(辱)을 구분할 줄 알게 되며, 통치자가 법도를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여 모범을 보이면 백성들이 육친 간에 화목이 단단하게 되며, 또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네 가지 덕목이 사회 윤리로서 긴장을 유지하면 임금의 령(令)이 쉽게 실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벌을 줄이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지나친 사치나 기교를 금지 시키는데 있으며, 국가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사유(四維)를 잘 관리하는데 있다.
고 하였다.
또한 관자는 나라의 사유를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사순(四順)이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관중은 창고가 넉넉해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고 하였다. 이는 물질생활의 수준과 사회도덕의 상승관계를 긍정한 것이다. 관중은 통치자 자신의 도덕적 수양도 매우 중시하여 자신의 잘못을 교정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관중은 나라가 백성들의 의식주와 문화 수준을 어느 정도까지 끌어 올리는 정책을 실행할 수 있어야만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통치를 따른다고 본 것이다. 관중은 사순(四順)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첫째, 민오우로(民惡憂勞) 백성은 근심과 고생을 싫어하니 통치자는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
둘째, 민오빈천(民惡貧賤) 백성은 가난과 천함을 싫어하니 통치자는 그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줘야 한다.
셋째, 민오위추(民惡危墜) 백성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니 통치자는 그들을 안전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
넷째, 민오멸절(民惡滅絶) 백성은 자신이 죽고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싫어하니 통치자는 그들이 수명을 누리고 후대를 잇도록 해줘야 한다.
관중은 사순이 충족되면 나라를 떠받치는 네 기둥인 사유(四維)가 세워진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예의염치(禮義廉恥)이다.
관중(管仲)이 말한 사순(四順)은 옛날에도 정치 요체이지만 현재에도 국민을 위한정치의 요체인 것이다.
이를 현재의 우리 사회와 견주어 보면
첫째, 민오우로(民惡憂勞)는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청년 실업, 사회불안, 정치적 불안정, 경제 불안 등으로 국민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A. H. Maslow가 말한 생리적 욕구와 안전에 관한 욕구, 사회적 욕구 등 결핍욕구가 우선적으로 충족되고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인 성장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이론처럼 인간은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民惡貧賤(민오빈천)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갈등을 해소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경제적인 상대적 빈곤과 부의 불평등, 금수저와 흙수저 갈등, 소외받는 계층의 사회복지문제 등으로 삶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 옛날의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신화가 사라진 사회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 설 수 있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셋째, 민오위추(民惡危墜)는 우리나라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이다. 보수와 진보의 격렬한 대립,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인한 전쟁의 위협, 우리나라 주변의 격변하는 정세 등으로 매일 방송과 언론의 지면을 가득 채우면서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것이 해결되어야만 국민들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넷째, 민오멸절(民惡滅絶)은 오늘 결혼적령기에 처한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는 풍조와 또한 결혼을 하고서도 자녀를 갖지 않으려는 사회 풍조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인구절벽을 가져오는 사회,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급격한 노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인문제는 더 큰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훌륭한 정부는 국민들이 이러한 어려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해 주어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모두가 정치 전문가이며 정치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다. 국민이 잘 살고 행복한 나라일수록 정치에 대한 관심이 줄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계유(陳繼儒)는 소창유기(小窓幽記)에서
선비가 염치를 알지 못하면 옷 입고 갓 쓴 개돼지와 같으며, 사람이 고금(古今)을 통하지 않으면 옷을 차려입은 말이나 소와 같다.
고 하였다.
사람이 식견이 없어 고금(古今) 이치에 무지해 되는 대로 처신하고 편한 데로 움직이면 멀끔히 차려 입어도 가축과 다를 것이 없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개돼지에 갓 씌우고 옷 해 입힌 꼴이다. 염치를 모르면 못하는 짓이 없다. 앉을 자리 안 앉을 자리를 가릴 줄 모르게 된다. 아무데서나 꼬리 흔들고, 어디에나 주둥이를 박아대는 짐승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염치나 체면 없는 사람을 후안무치(厚顔無恥)하거나 파렴치(破廉恥)하다거나 또는 태욕근치(殆辱近恥)하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청나라 사람 왕지부(王之鈇)는 언행휘찬(言行彙纂)에서
사대부가 벼슬을 탐하지 않고 돈을 아끼지 않더라도, 경제에 보탬이 되어 사람에게 혜택이 미치는 바가 하나도 없다면 마침내 하늘이 성현을 낸 뜻은 아니다. 대개 제 몸을 깨끗이 지니고 몸을 잘 닦는 것이 덕이다.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공이다. 덕만 있고 공이 없다면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제 몸가짐이 아무리 반듯해도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없다면 그것조차 쓸모가 없다. 그것은 무능한 것이다. 사실 이런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벼슬 욕심은 버릴 생각이 조금도 없고 재물의 이익도 놓칠 수가 없다. 자리만 차고앉아 세상에는 보탬이 안 되고 제게 보탬이 될 궁리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자기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소치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사순(四順)과 사유(四維)를 통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바른 삶을 살아가는 동아줄로 삼아야 한다.
Ⅱ. 예(禮)
예(禮)란 불유절(不踰節)로 원칙과 기본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절(節)은 규칙이나 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禮)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적절한 자세를 갖추라는 의미이다. 맹자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지단야(禮之端也)라고 하여 사양하는 마음 혹은 공경하는 마음이 바로 예의 단초라고 하였다. 이는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 마음 또는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예절(禮節)은 조화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규칙이나 원칙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절(節)에는 음악에서 말하는 곡조(화음)라는 의미가 있는데 노래에서 화음이 맞지 않으면 소음이 된다고 하여 예를 지키지 못하면 혼란과 부자연스러운 환경이 만들어 진다고 하였다.
예(禮)는 법도를 넘어서지 않음이다.
이러한 예(禮)에 대한 조선시대의 교육관을 살펴보면
예조(禮曹)에서 삼관(三館)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학교(學校)는 풍화(風化)의 원천(源泉)으로 예의(禮義)를 먼저 계도(啓導)하는 곳입니다. 근래에 학생들이 광망(狂妄)한 자가 많아서 비록 사장(師長)을 본다 해도 또한 존경이나 겸양하는 예의가 결여되고 있어 마음과 행동의 교양을 미리 쌓지 않을 수 없는데, 삼관(三館)에서 함부로 처벌하지 못하게 된 이래로 학생들이 더욱 꺼리는 바 없어서 교만 방종함이 더욱 심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마음과 행동이 착하지 못한 자는 이를 전보(轉報)하여 정거(停擧)하게하고, 그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예를 어긴 자는 각기 문견(聞見)을 가지고 과실의 표지를 붙여 두되, 부시(赴試)할 때를 당하여 한 일이면 죄를 주고, 평상시는 장관(長官)에게 고하여 그 처벌을 논하도록 하소서.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위의 정문(呈文)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에도 스승이나 부모에게 존경과 효도를 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학생들의 잘 못된 행동을 함부로 처벌하지 못하게 하여 학생들이 교만하고 버릇없이 행동하여 교육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오늘날 교육 현실과 너무나 비슷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마음과 행동이 바르지 못한 학생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거나 지방 관청의 수장이 처벌하도록 하는 것은 다른 모습이다. 조선시대의 교육의 요체는 예의를 계도하는 것으로 지금의 지식위주의 교육과는 다른 인간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는 교육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의의 중요성에 대하여 유학(幼學)들도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예의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용천 유학(龍川幼學) 장신한(張臣漢)이 상소(上疏)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要諦)는 힘써 예의(禮義)를 배우고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진퇴(進退)를 명백하게 하고, 법령(法令)을 살피고, 상벌(賞罰)을 엄정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의 교육과 학문은 예의를 바탕에 두고 있었다.
특히 이황은 상소문에서 예의를 모르면 이적(夷狄)과 같다고 하면서 예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신은 생각하건대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에 이적(夷狄)은 금수(禽獸)라고 합니다. 이적(夷狄)도 사람이지만 이를 금수에 비유하는 것이 진실로 심한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의(禮義)를 몰라 군신 상하의 분별이 없어서 그 삶이 어리석고 무식하고 완악(頑惡)하고 지각이 없어 거의 금수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유사한 것을 취하여 아울러 일컬은 것입니다. 따라서 금수를 금수로 기르면 만물이 그 본연의 천성대로 되는 것이고 이적을 이적으로 대하면 이적이 그 분수에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퇴계도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예의(禮義)를 알고 실행하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실행하지 않으면 금수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앎과 실행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맹자 이전에 예(禮)는 일반적으로 내면의 선한 마음이 드러나는 행위방식을 의미했다. 맹자가 예의 실질을 인과 의를 절도 있게 수식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예는 인과 의의 마음이 문화적인 표현 방식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
논어에서는 예를 행위방식 또는 사회규범을 의미했으므로 예는 앎의 대상으로서 자주 언급되었지만 순자는 예를 확실하게 학습의 대상으로 다루었다.
지금 이 시대를 예(禮)를 상실한 사회라고 한다. 예(禮)의 회복은 사회를 건전하고 질서를 지니는 사회로 바꿀 수 있는 끈이라고 본다. 예(禮)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성품을 악함에서 순함으로 바꾸는 기제(機制)이므로 인간 성품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순자(荀子)는 예(禮)는 교육을 통하여 순한 마음으로 길러야 한다고 한 것은 예(禮)는 앎보다 실행이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예의를 되살리기 위해서 교육적 측면에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禮)는 사회생활의 시작이요, 양심(良心)과 부끄러움은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Ⅲ. 의(義)
의(義)란 불자진(不自進)으로 스스로(자신만을 위해) 나아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만 높이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흔히 자신만을 내세우기 위해 남들보다 앞서려는 생각이 많아지면 신의를 저버리게 된다. 남을 딛고 나아가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을 모해하거나 손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권력이든 돈이든 자신을 위해 조금 더 가지려고 먼저 나서는 사람들에게 신의와 정직함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의(義)라 함은 스스로 나서지 않는 것이다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지단야(義之端也)라고 하여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이 의(義)의 단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오지심은 올바름에서 벗어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며, 의(義)는 그런 마음이 안정되어 형성된 덕(德)이다. 올바름에 대한 지향, 또는 올바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는 의(義)의 덕(德)은 일반적으로 사적인 이익과 대립하는 사회정의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는 자신과 타인이 정의에서 벗어나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 마음이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해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넘본다거나, 본분을 망각하고 자신의 지위를 남용한다거나, 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게을리 한다거나 하는 일은 모두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또 배척해야 할 일들이다. 올바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의(義)의 덕(德)이 잘 발휘된다면 그 사람의 정의로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의 정의는 보장될 것이다.
전우(田愚)가 한일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올린 상소문을 보면
신이 생각건대,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국가를 유지하거나 변란을 만났을 때 강상(綱常)을 근본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강상이란 천지(天地)의 기둥이며 인민(人民)의 몸체입니다. 그러므로 강상이 서면 국가가 안정되고 황실(皇室)의 존엄이 유지되며, 강상이 무너지면 국가가 위태로워지고 황실도 위태로워지니, 근자의 변고를 가지고 보더라도 손바닥에다 올려놓고 보듯 환히 알 수 있습니다.
저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후로 만대(萬代)를 두고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를 지고 있었지만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병력이 진작되지 않아서 미처 도읍을 불태우고 종자를 멸살시키지 못하였지만, 군신 상하가 어찌 일찍이 한 순간인들 마음속에서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일본 대사(日本大使)가 청한 것이 바로 우리를 저들의 신하로 만들자는 것인데도 오히려 평화가 영원해지고 황실이 존엄 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비록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지 알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우리의 바른 예의(禮義)를 버리고서 저 나라의 힘에 의지한다면 평화가 결코 영원할 수 없으며 황실이 결코 존엄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것이 폐하께서 재삼 준엄하게 거절하면서 차라리 종사(宗社)를 위해 죽을지언정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고 이르기까지 한 까닭입니다.
전우(田愚)가 말한 예의(禮義)는 현실 사회 속에서 영위되어야 할 당위성을 가진 마땅한 삶의 길로 부각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자는
군자는 천하에 생활함에 있어 이렇게 해야만 한다든지,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든지 하는 고정된 행동 원리를 갖지 않고 오직 의를 따라 행동해야 한다.
고 함으로써 의(義)를 인간의 실천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맹자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사람으로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익 추구에 몰두해 쟁탈을 일삼게 되었고 이단(異端)이 득세해 사상적 혼잡을 초래하는 등 사회가 더욱 혼란한 시대였다. 따라서 맹자는 그 시대에 적합한 의사상(義思想)을 통하여 인(仁)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 즉 인(仁)을 전제로 해 나타나는 마음이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못 살게 하는 독재자를 미워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괴롭히는 도둑을 미워하며,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괴롭히는 침략자들을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식(曺植)은 외단자의(外斷者義)라고 하여 의(義)란 외부적 사물과 그에 처한 상황에 따라 결단함으로써 해야 할 일을 선택 판단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칼과 방울을 찬 선비 남명 조식(1501∼1572)이다. 그 칼에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고 새겼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을 경이라 하고, 밖으로 과감하게 결단하는 것을 의라 한다.’는 의미다. 경의검(敬義劍)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는 ‘성성자(惺惺子)’라는 쇠방울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그 방울을 제자에게 주며 ‘스스로 경계하고 꾸짖어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라’고 했다.
남명은 같은 해 태어난 퇴계 이황과 함께 낙동강을 경계로 ‘좌 퇴계, 우 남명’으로 불리며 영남 유학을 대표한다. 남명은 벼슬을 거부한 재야 학자로 평생 ‘올바른 마음을 길러(敬) 정의를 실천한다(義)’는 다짐을 행했다. 칼은 의, 방울은 경의 상징이다.
경남 합천 출신인 남명은 처가가 있던 경남 김해에 산해정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산청에 산천재를 짓고 각각 왼쪽 창에 경(敬), 오른쪽 창에 의(義)자를 써 붙였다고 한다. 그 꼿꼿한 기개를 짐작할 만하다.
또한 조식은 단성현감 사직상소에서
선무랑(宣務郞)으로 새로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된 신 조식은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왕(先王)께서 신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처음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후로 주부(主簿)에 두 번씩이나 제수하시었고 이번에 다시 현감에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함은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 중략 -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나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백 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 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충의(忠義)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해 나아갈 수 없어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래의 소관(小官)은 히히덕 거리면서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위의 대관은 어물거리면서 뇌물을 챙겨 재물만을 불리는데도 근본 병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 중략 -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고 하지만 역시 깊은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종류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강물이 마르고 곡식이 비 오듯 내렸으니 이 무슨 조짐입니까. 음악 소리는 슬프고 옷은 소복이니 형상에 이미 흉한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 중략 -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를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왕도의 법을 세우소서. 왕도의 법이 법답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밝게 살피소서. 신 조식(曺植)은 황송함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라고 말하며 명종을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 문정왕후를 ‘궁정의 한 과부’라고 하였다.
중종을 이은 명종은 문정왕후의 아들이다. 명종이 12세에 즉위했으니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했고,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권력 농단이 자심했다. 이에 남명은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와 인심이 떠났다며 일침을 가했다.
특히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 조헌, 곽재우 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목숨을 걸고 의병을 일으켜 스승의 정신을 실천했다. 의병장으로 활약한 제자가 이들과 함께 50명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남명의 경의(敬義)정신이 책상물림이 아니라 실천철학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하지 않겠소.’라고 한 정인홍은 남명의 수제자로서 남명의 학문이 실천적 학문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나타나는 의(義)가 발달하였다. 사육신의 절의정신(節義精神)이나 임진왜란 때 일본의 침략군에 항거한 조헌(趙憲) 등의 의병 운동, 외세에 항거해 일어난 동학 혁명, 조선말의 일본 침략군에 대항한 의병 운동, 3·1운동, 독립 운동, 4·19학생 의거 등이 모두 이러한 의사상(義思想)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Ⅳ. 염(廉)
염(廉)이란 불폐악(不蔽惡)으로 나쁜 것을 숨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자신의 잘못을 부당히 감추거나 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선한 척 하지 말라는 말이다. 염(廉)의 또 다른 의미가 결백(潔白)인데 새하얗다는 의미보다 ‘투명하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태를 바로 청렴(淸廉)하다고 한다. 즉 사사로운 마음이나 나쁜 마음을 숨기지 않는 다는 말은 투명하고 공정함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염(廉)은 청렴, 결백, 검소, 곧고 바름을 의미한다. 예의염치(禮義廉恥)란 예절과 의리와 청렴과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를 말한다. 예의(禮義)는 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과 의리를 이르는 말이고 염치(廉恥)는, 체면을 차리는 말이다.
사유(四維)를 말한 관중의 요지는 어디에 있을까?
관중(管仲)의 사상과 철학은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의 도덕의 근본은 예의염치(禮義廉恥)이다. 이것이 없으면 나라는 망한다. 이것을 세우기 위해 법이 있어야 하며 상벌 또한 분명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사유(四維)중에서 염(廉)은 사악함을 몰래 감추지 않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특히 관리들의 청렴을 매우 강조했다. 황희, 맹사성, 박수량을 조선 3대 청백리(淸白吏)로 꼽는다.
3대 청백리 중의 한 사람인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1491년∼1554년)은 전라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출신이다.
박수량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임금 명종에게 백비(白碑)를 하사받았다. 박수량은 23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2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예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지내다가 병이 든 부친을 봉양하기 위해 고부군수로 내려갔고 부친이 사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상례를 다 하였다. 복직되어 보성군수, 나주목사를 역임했고 모친이 병이 들어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명종의 명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모친을 봉양했다. 다시 복직하여 한성부판윤(判尹)・중추부지사(知事)에 이르렀다. 주세붕(周世鵬)과 깊이 교유하였고 유림(儒林) 사이에서 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박수량은 39년 동안 벼슬을 하면서도 재물을 탐하지 않고 청렴하여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하고 남의 집을 빌려서 살았다. 명종 1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으며, 후세 사람들이 박수량을 살아서는 염근리(廉謹吏)라고 하고 죽어서 청백리(淸白吏)라고 한다.
박수량은
묘를 너무 크게 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는 유언 남겼다.
대사헌 윤춘년(1514∼1567)이
죽은 박수량은 청백한 신하로써 높은 벼슬을 하면서도 서울에서는 셋집에서 살았으며 본집이 장성에 있기 때문에 그의 유족이 상여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가고자 하나 이도 어려운 형편이다.
고 진언했다.
명종은 장례비를 하사하며 예를 갖춰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박수량이 남긴 유산은 은전 10여 냥과 낡은 옷 몇 벌 뿐이었다고 한다.
명종은
그의 청렴한 생활상을 알면서 빗돌에다 그의 청빈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글자 없이 세우라.
고 했다.
이것이 바로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호미산 중턱의 묘소에 청백의 상징으로 아무 글씨도 없는 백비(白碑)가 세워지게 된 배경이다. 이는 장례도 치르지 못할 만큼 빈곤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이때 그의 청백한 행적을 글로 찬양한다는 것이 누가 될 수 있다 하여 글을 쓰지 않고 상징적으로 백비를 세우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대는 물론 후세에도 귀감이 되는 청백리의 상징적인 유물로서 그 의미가 깊다.
또한 청렴에 대한 일화로 노(魯)나라 정승 공의휴(公儀休)가
정승이 되었을 때 손(客–객)이 와서 생선을 주는 것을 받지 아니하니 손이 말하기를 그대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째서 받지 아니하는가하고 말하니 정승이 말하기를 내가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제 정승이 되어 능히 스스로 생선을 공급할 수 있는데 이제 생선을 받아서 파면이 되면 누가 나에게 생선을 주겠는가. 그러기에 받지 않겠노라.
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이 자신에게 이(利)가 되는 가를 잘 설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말이다.
또한 렴(廉)에 대한 고사로
한(漢)나라 양진(楊震)이 동래태수로 옮겨갈 때 창읍을 지나갈 때 그 전에 무재(茂才)로 과거시켜주었던 왕밀(王密)이 수령(守令)이 되었는데 만나 인사드리고 밤에 이르러 금 10근을 품고 와서 주는 지라, 양진이 말하기를
‘친구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친구를 모르니 웬일인가?’(故人知君 君不知故人) 하니
왕밀이 말하길
‘어두운 밤이라 아는 자가 없습니다.’(暮夜 無知者) 하니
양진이 말하길
‘하늘이 알고, 신(神)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하니 왕밀이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갔다.
고 한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지금 적폐(積弊)를 청산하려고 수년이 지난 일들도 모두 찾아내어 고발하는 실정이다. 세상에 숨긴다고 숨겨지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염(廉)을 결백(潔白)인 새하얗다는 의미보다 투명하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투명한 것은 다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종 1년 대사헌 한치형이
사람을 쓸 때는 차라리 어리석은 이를 쓸지언정 탐하는 이를 쓰지 않으니 처음부터 사유(四維)를 우선하지 않음이 없고 - 중략 - 비록 백 사람의 재주를 겸했다고 하더라도 염치가 한번 무너지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습니다.
라고 상소한 것은 사람의 인선에는 무엇보다도 염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강조한 것이다.
중종이 청렴한 관리를 쓸 것을 강조하자 참찬관 조광조는
사람이 만일 청렴하지 못하다면 무슨 일인들 잘하겠습니까? 청렴은 사대부의 보통 일이지 특이한 행실은 아닙니다.
라고 한 바 있다. 이는 청렴은 모든 사람들의 가장 기본으로 모두가 지켜야 하는 일이지 특별한 행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청렴은 사람들의 기본이고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근(權近)은 양촌집(陽村集)에서
대체로 능히 욕(慾)이 적으면 그 마음은 저절로 맑을 것이며. 그 마음이 맑으면 곧 여러 선이 생기며, 맑은 극치에 있어서는 마음이 밝게 트인다. 사람의 욕(慾)이 말끔히 없어지면 천리(天理)가 행하여지며 성현의 덕에 이르게 된다.
탐욕이 염(廉)을 해침과 사나움이 인(仁)을 해침과 아첨함이 공(公)을 해침과 사곡(邪曲)됨이 정(正)을 해침은 모두 사람이 마땅히 적(敵)으로 삼아서 극치(克治)할 대상이다.
라고 하면서 탐욕과 사나움과 아첨함과 사곡(邪曲)됨을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적(敵)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탐욕을 극치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성종실록에 의하면 동부승지(同副承旨) 정성근(鄭誠謹)이
지금 풍속(風俗)이 예스럽지 아니하여 재상(宰相)으로 염치(廉恥)가 있는 자가 적은데, 근래에는 탐독(貪黷)으로 죄를 받을 자를 오히려 포용(包容)하여 곧 벼슬에 종사하게 하니, 이는 매우 옳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는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얼마 전 하늘이 내린 신의 직장이라고 하는 공기업에 부정하게 취업시킨 기업이 그러하지 않은 기업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보면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국회 인사청문회를 보면 관리로서 부적격한 사람들이 중앙의 관리로 등용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의미를 위정자들은 잘 새겨야 한다.
또한 나라가 청렴하지 못하여 일어난 동학혁명의 포고문을 보면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군신과 부자는 가장 큰 인륜으로 꼽는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비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도를 한 뒤에야 국가를 이루어 끝없는 복록을 불러오게 된다.
지금 우리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지혜롭고 총명하시다.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서 잘 보좌해 다스린다면 예전 훌륭한 임금들의 교화와 치적의 날을 꼽아 기다려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신하가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아니하고 한갓 작록과 지위를 도둑질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아 충성스런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갈취하는 벼슬아치만이 득실거린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더욱 비틀어져서 들어와서는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와서는 몸을 보존할 대책도 없도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은 줄을 이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구분이 드디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관자가 말하길 사유(四維)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예전보다 더욱 심하다.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 이하, 아래로는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거의 자기 몸을 살찌우고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을 몰두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문을 재물 모으는 길로 만들고 과거 보는 장소를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허다한 재물이나 뇌물이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운 창고를 채운다. 나라에는 부채가 쌓여 있는데도 갚으려는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탕과 안일로 나날을 지새워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는 어육이 되고 만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진실로 수령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으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을 화려하게 지어 제 살길에만 골몰하면서 녹위만을 도둑질하니 어찌 옳게 되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임금의 토지를 갈아 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망해 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노라.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 일이겠으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서 함께 태평세월을 축수하고 모두 임금의 교화를 누리면 천만다행이겠노라.
이 포고문을 보면 정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청렴함이 국가를 지탱하게 하는 사유(四維)임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앞에서 말한 사순이 잘 실천되는 나라는 망한 적이 없으나, 예의염치(禮義廉恥)가 지켜지지 않는 나라는 모두 멸망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공자는 노나라의 위정자와 제자들 사이에 만연된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 청렴의 기준을 제시했다.
논어 자장(子張)편 1장에 견득사의(見得思義)가 나온다.
선비는 공동체의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바치고 이득이 생기면 옳음을 따져본다.
제사를 지낼 때 경건함에 집중하고 상례를 치를 때 애도에 집중한다.
그러면 충분하다.
士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
사견위치명 견득사의 제사경 상사애 기가이의
공자는 견득사의(見得思義)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
헤시오도스는
부당한 이득을 얻지 말라, 그것은 손해와 같은 것이다.
라고 하면서 부당한 이득은 자신의 삶에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갈파하였다.
프랑스 정치학자 Alexis de Tocqueville(알랙시스 드 토크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고 하였다.
김영란법이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이름으로 2012년에 법안으로 추진되어 2016년 9월28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김영란법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법률이 통과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짜 술이 없다.’는 말을 생각하면 금품과 향응의 수수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실정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각종 부정부패와 사건사고들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한 가정이나 국가 더 나아가 인류가 발 디디고 사는 세상에서 그 곳이 어떤 곳이던 균형과 안정을 갖기 위해서는 네 개의 끈이 항상 견고하게 자신의 기능을 다하고 있어야 한다. 때에 따라서 상할 수도 있고, 한 두 개가 끊어 질 수도 있지만 유신(維新)을 통해서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또한 사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예의염치(禮義廉恥)를 훈련하고, 몸에 익힌 사람들이 길러져야하고,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예의염치가 작동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세상을 균형 있고 편안하게 만드는 길이다.
Ⅴ. 치(恥)
치(恥)란 불종왕(不從枉)으로 굽은 것, 나쁜 것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올바르지 않는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본다. 왕(枉)이란 굽은 것을 말한다. 왜곡되었다고 하는 단어에 왜(歪)와 곡(曲)은 모두 삐뚤어지다, 기울어지다, 굽었다, 휘어졌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을 사실로 보지 않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비상식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왕(枉)이라고 한다. 심지어 왕(枉)이라는 단어에 미쳤다는 의미도 있다. 미쳤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나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잘못된 행위(굽은)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치(恥)라고 한다. 치(恥)는 잘 못을 쫒지 않는 것이다.
세종 때 장물죄에 관한 사헌부의 상소문에
예의염치(禮義廉恥)는 나라의 네 가지 벼릿줄이니 네 가지 벼릿줄이 펴이면 인심이 깨끗하고 정치가 맑아서 그 나라를 밝고 창성하게 이끌어 올리고, 네 벼릿줄이 느려지면 인심이 더러워지고 정치가 타락하여 그 나라를 어두움 속으로 떨어뜨리나니, 예의는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 되고, 염치는 사람을 바로 잡는 큰 절개가 되어서 국가의 정치하는 대체에 관계를 가진 그런 것이옵니다. 비록 한 몸으로부터 말씀할지라도 예의를 준수하고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는 능히 그 안녕과 영화를 보전하여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할 것이요, 예의를 포기하고 염치를 저버리는 자는 마침내 화란과 패망에 빠져서 더러운 냄새가 만대에 흐를 것입니다.
그러하온즉 나라를 가진 자로서 가히 국체(國體)를 유지(維持)할 바 도리를 알지 못하며, 선비 된 자로서 가히 이름과 절개를 갈고 닦은바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옵니까? 옛 사람의 일을 보면, 가히 권장할 것과 경계할 것을 알 수 있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는 예의를 포기하고 염치를 저버리는 자는 마침내 화란과 패망에 빠져서 더러운 냄새가 만대에 흐르는 것을 국민 모두가 알고 이를 바르게 다스릴 줄 아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송시열은 사직상소에서
신이 죄 많은 사람으로 맨 먼저 은전을 그르쳐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으니 그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성명께서는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이 지나치게 하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신이 개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관중(管仲)은 패자(伯者)의 보좌이나 오히려 이르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는 곧 네 가지의 근간이 되는 것이니, 이 네 가지 근간이 신장되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한다.’ 하였고, 주자(朱子)의 훈계에도 이르기를 ‘사대부의 사수출처(辭受出處)는 유독 그 자신의 일이 될 뿐 아니라 풍속의 성쇠에 관계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전선(銓選)의 관직으로 능히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남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신으로 하여금 염치를 잊고 억지로 출사하게 하니, 전하께서 미천한 신을 대우하심이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또 듣건대, 홍여하의 상소를 고쳐서 드리게 하였다 하니, 신의 죄명이 예람(睿覽)를 거치지 않고 앞서의 연좌된 바가 아직 미정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본직 및 겸대한 승질(陞秩)을 체차(遞差)하시어 필부가 치욕을 멀리하려는 뜻을 온전하게 하소서.
라고 하면서 예의염치의 네 가지 근간이 신장되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하면서 예의(禮義)의 신장을 강조하였다. 그는 특히 사람이 사수출처(辭受出處) 즉 출처거취(出處去就)로 들어갈 때와 나아갈 때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염치없는 인간이 되며, 이러한 모습은 좋은 풍속까지 사라지게 된다고 하면 선비는 부끄러운 일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예의와 염치에 대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위료(尉繚)는 진시황에게 6국 합종을 깰 전략을 제시하면서
한 사람을 죽여 군 전체를 겁줄 수 있으면 죽여야 마땅하고, 한 사람에 상을 내려 모든 사람이 기뻐할 수 있다면 당연히 상을 내려야 한다. 제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고, 형벌을 내리는 것은 나중이다. 이 점을 알아야만 상을 내려도 태산처럼 무겁고, 벌을 내려도 골짜기처럼 깊을 수 있다. …… 예의와 신의가 먼저고 상은 그 다음이다. 염치가 먼저고 형벌은 그 다음이다. 병사들을 사랑한 다음 자신을 단속하라.
고 하였다.
위료(尉繚)는 상벌을 분명히 할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형벌의 남용과 잔혹한 진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법제를 엄격하게 밝히는 것과 예의염치, 특히 염치를 교육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덕무가 저술한 사소절의 동규편(童規篇)을 보면
지금 어린아이를 교육하는 데는 오직 효제충신(孝悌忠信)·예의염치(禮義廉恥)를 위주로 하고, 가꾸고 함양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시를 노래하도록 유도하여 의지가 발발되게 하고, 예절을 익히도록 유도하여 위의(威儀)가 엄숙해지게 하고, 글을 읽도록 유도하여 지각이 트이게 해야 한다.
라고 하면서 어린아이의 교육은 孝悌忠信禮義廉恥(효제충신예의염치)의 팔덕(八德)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팔덕(八德)이 인간이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동의 본성과 심성을 거스르지 말고 이를 존중하여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소학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아동의 흥미와 동기를 고려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권고하고 있다.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한 교육을 살펴보면 고려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의 졸기(卒記)에
길재 나이 8세 때 하루는 혼자서 남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가재 한 마리를 잡아들고 노래 부르기를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나는 너를 삶아 먹고 싶지만, 네가 어미를 잃은 것이 나와 같기로 너를 놓아 준다.’
하고 물에 던지며, 너무도 슬피 부르짖으니, 이웃집 할멈이 보고 흐느껴 울었고, 온 고을 사람이 듣고 눈물을 아니 흘리는 자 없었다.
길재는 나이 18세에 상주 사록(尙州司錄) 박비(朴賁)를 찾아가서 공부하였으며, 이 후 박비(朴賁)를 따라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섬기어 효성이 지극하였다.
길재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국학에 입학하여 생원·진사에 합격하였다. 상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입학하여 글을 읽으니, 길재는 한 마을에 사는 관계로 상종하여 학을 연구하며 정의가 매우 단란하였다. 기사년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다. 경오년 봄에 나라가 장차 위태함을 알고서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의 옛집에 돌아와 여러 차례 불러도 나가지 아니하였다.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늘 흔연하여 조금도 염려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학도(學徒)를 가르치되 효제충신(孝悌忠信)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먼저 교육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인간의 기본 본성을 기르기 위한 예의염치를 철저하게 교육하였다.
관중은 관자에서 예의염치(禮義廉恥)의 네 가지 근본 중 한 줄이 끊어지면 기울고, 두 줄이 끊어지면 위태롭고, 세 줄이 끊어지면 엎어지고, 네 줄이 모두 끊어지면 멸망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울어지면 다시 바르게 하고, 위태로운 것은 안정시키고, 엎어진 것은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네 줄이 다 끊어져 멸망해 버리면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의 없고, 의리 없고, 청렴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세 줄은 끊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한다고 해도 마지막 줄인 부끄러움은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은 일종의 힘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마음, 그것만 있어도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못된 사람에게는 곧잘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라고 했었다. 아무리 고약한 건달이라도 동네 어른이나 지역유지 앞에서는 몸매를 갖추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비록 건달이지만 부끄러움이 뭔지는 알기에 최소한 자기 체면은 건지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러한 마음이라도 지니고 있는 묻지 않을 수 없다.
Ⅵ. 사유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
우리 선조들이 소중히 여겨온 핵심 가치관 중에 하나가 바로 예의염치(禮義廉恥)이다.
예와 의는 사람이 행하여야만 하는 올바른 예와 도리를 뜻하며, 염치는 체면을 차리고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인간의 본능과 물질을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 지금의 시대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정신적인 가치관이다. 현대의 실리주의적 가치관은 조선시대의 가치 덕목들을 하나같이 평가 절하한다. 명분은 핑계로, 의리는 깡패용어로, 선비의 기개를 뜻하는 사기(士氣)는 군대용어로 전락해 버렸다. 소비가 미덕이 되고 청빈(淸貧)은 낡아빠진 구시대의 덕목으로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동기나 과정보다는 결과만 중요시하는 결과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사유(四維)에서 예(禮)와 의(義)는 제도적인 것이요, 염(廉)과 치(恥)는 개인적인 수양으로 터득하고 얻어지는 덕목이다. 그래서 사람의 품격을 강조할 때에는 예의(禮義)에 비하여 염치(廉恥)를 더 따지는 것이다.
사람이 심성이 바르지 못하면 탐욕이 많아져서 많은 것을 탐내기 마련인데 거기에 더하여 부끄러움마저 없는 사람이라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게 되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 특히 염치가 없는 사람이 공직에 있으면 시민과 사회에 크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사람의 됨됨이를 살필 때 염치에 대한 가중치는 매우 크다 하겠다. 일반적으로 깨끗함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꾸짖을 때 얌통머리가 없다는 꾸짖음을 하게 된다.
무례하고 거짓되고 청렴하지 않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설치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국민들의 몫이고 사명이다.
관자(管子)의 목민(牧民)편에
政之所興 在順民心 政之所廢 在逆民心(정치소흥 재순민심 정지소폐 재역민심)
정치가 잘 되어 세상이 잘 돌아갈 때는 민심에 순응하고, 정치가 잘 못되어 세상이 망할 때는 민심에 역행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정치는 오르지 국민을 즐겁고 부귀하고 편안하고 후손을 잘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즉 사순(四順)을 만족시켜 줄 책임을 지닌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예의염치는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한 가지를 잃으면 사람이 탁해지게 되고, 두 가지를 잃으면 사람이 어지러워지고, 세 가지를 잃으면 사람이 추해지게 되고, 네 가지를 잃으면 사람이 결국 짐승 같이 된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건강한 사회와 희망 가득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나라를 세우는 길은 모든 국민들이 오직 예의염치를 회복하는 것에 달려있다.
사람은 난 사람이나 든 사람보다 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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