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遺蹟)으로 보는 상주문화
전옥연(상주박물관)
1. 머리말
유적이란 어학사전에 등재된 사전적인 의미로는 간략하게 ‘남아있는 자취,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곳 및 각종 건축물, 고분 따위를 이른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바꿔 말해 유적에 대해 이해하는 일반적인 시각을 의미하는 것인데 고고학에서 말하는 유적의 의미는 훨씬 포괄적이다. 즉, 유물(遺物․Relics)과 유구(遺構․Monuments)를 포함한 인간행위 소산물들의 총집합체를 유적(遺蹟․Remains)으로 정의하는 것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제작하거나, 조성하거나,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 모든 것, 즉 인간행위의 모든 소산물(제작물․Artifacts)이 다 그것이다. 따라서 사원, 관아, 불탑, 궁, 서원 등 현존하는 지상건축물과 땅속에 묻혀있는 고분, 패총, 문화층 등 매장문화재, 그리고 해저나 호수 등에 가라앉아 있는 모든 수중문화재 등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고고학은 이처럼 다양한 유적, 그중에서도 지상에 드러나 있지 않은 매장문화재나 수중문화재 등에 대하여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이 조성된 시기의 문화와 역사, 여러 가지 정황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문자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또는 기록이 있는 시기라 하더라도 좀더 구체적인 부분까지도 밝혀낼수 있는 매우 유효한 학문이다. 즉 문자기록이 없는 선사시대의 연구에는 독보적이라 할수 있으며, 기록이 있는 시기에도 인류의 실생활문화와 관련한 부분에 구체적이고도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줘서 과거 선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해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상주는 예로부터 평야와 수원이 발달한 매우 풍요로운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이며, 이에 따라 누대에 걸쳐 다양한 유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낙동면 신상리 구석기시대 유적을 필두로 각지에 지석묘, 고분, 주거지, 건물지, 사지, 우물, 못, 관아터, 사직단, 도로, 가마터, 산성, 읍성 등 다양한 시기,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반면 이들 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조사는 그다지 활발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건설 등 큰 도로공사에 수반된 긴급구제발굴조사, 청리공단조성시 이뤄진 구제발굴조사 등이 대부분으로 상주와 같은 대읍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기에는 너무도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상주박물관이 2015년부터 2회에 걸쳐 상주의 상품자기소 중 하나인 모동 상판리 일대 자기터 학술발굴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상주가 보유하고 있는 우수한 도자기문화의 실상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상주관내 유적조사의 방향설정과 추진에 있어 주지하는 바 클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다소 미흡한 유적조사 양에도 불구하고 이들 조사성과를 통해 상주의 문화, 역사가 어느 정도는 규명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지금까지의 긴급구제발굴조사와 같은 수동적, 소극적인 조사형태에서 탈피하고 향후 상주의 중요유적에 대한 학술발굴조사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보다 구체적인 정보가 축적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유적, 그중에서도 발굴조사된 유적을 통한 상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상주의 고고지리적 환경
상주는 현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의 북서단에 위치하여 북에서 동, 남으로는 경상북도 문경시, 예천군, 의성군, 김천시 등과 접해 있고 서에서 남으로는 충청북도 괴산군,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등과 접경해 있다. 또한 상주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백두대간을 기점으로 서고동저의 지세를 보이며 낙동강, 금강, 남한강 수계로 흘러드는 많은 지천들로 인해 형성된 넓은 충적평야와 이를 에워싸는 산세로 인해 형성된 함창분지, 상주분지 등 크고 작은 구릉과 하천, 평야가 잘 발달해 있는 지역이다.
산과 들을 잇는 육상교통로, 낙동강을 끼고 발달한 하상교통로 등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이자 동쪽의 낙동강수계, 남서쪽의 금강수계, 북서쪽의 남한강 수계의 대소 하천들로 인해 형성된 비옥한 충적평야가 발달한 곡창지대로 주민이 모여들고 차츰 그 사회가 번성할 수 밖에 없는 천혜의 자연지리적 여건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로 신상리 구석기유적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상주 일대는 한반도에 인류가 출현한 이래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따라서 인류활동의 흔적인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유존할 가능성은 매우 높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선사와 고대의 상주의 실체를 해명해 줄 수 있는 유적의 조사는 극히 미진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그나마 1990년대 이후 몇 차례의 지표조사나 각종 건설공사에 수반된 긴급구제발굴조사 성과를 통해 구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삼한시대, 삼국시대의 상주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윤곽은 드러나고 있으나 신석기시대 유적의 공백 등 선사 이후 고대의 상주의 위상을 전반적으로 해명하기에는 아직 턱없이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어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연구계획의 수립과 실행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연구성과를 통해 살펴보면 상주는 지리적으로 산과 강, 평야가 고루 발달해 있는 비옥하고 풍요로운 지역인 동시에 교통로도 발달하여 인접한 제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가 이뤄질 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과 삼국시대에는 특히 백제, 신라 등과 접경하여 때로는 우방으로 때로는 적으로 빈번하게 접촉했으며 종국에는 신라로 통합될 때까지 독특한 지역색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상주의 문화는 신라와 닮아 있는 듯, 백제와 닮아 있는 듯 독특한 지역색을 보인다. 이러한 성격은 병풍산 고분군이나 함창 신흥동, 청리 고분군등 삼국시대 상주의 대표적 고분 유적의 발굴조사 성과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소백산맥의 지맥인 백화산맥 일대는 그 서쪽이 모서면, 그 동쪽이 모동면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고려 현종9년(1018)년에는이 일대를 모두 중모현으로 이름짓고 상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지역은 준령지대 안의 협곡로를 이용, 호서와 영남을 잇는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는데 중모현의 상품자기소 2개소(모동면 상판리, 모서면 대포리)와 인접지역인 공성면 우하리의 중품자기소 등 우수한 품질의 조선 전기 자기가마유적이 넓게 분포하고 있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장의 내용은 아래의 논저를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2008, 『상주, 옛상주를 담다-상주박물관 상설전시도록』상주박물관
2015, 배성혁「백화산주변의 고고학적 환경」『백화산』상주박물관문화총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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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대동여지도』(1861년)에 보이는 상주
그림2.『영남지도』(17세기중엽) 중 상주목(尙州牧) 지도
그림3.『영남지도』(17세기중엽) 중 함창현(咸昌縣) 지도
3. 선사시대의 상주
(1)구석기시대의 상주
상주에서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낙동면 신상리유적과 청리유적이 있다. 이중 신상리유적은 경북지역에서 최초로 발굴조사된 유적으로 2~6개층의 토양쐐기층과 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각 문화층에서 다 구석기가 확인되었다. 대체로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대부분이나 석기가공기술적인 측면에서 이른 요소들이 엿보여 연구자에 따라 전기구석기시대까지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타진되고 있다.
청리유적은 청리면 마공리 일대에서 지표조사시 수습된 후기구석기시대 좀돌날석기, 격지 등을 통해 그 존재가 알려진 유적이다 상주 일대는 대소 하천이 풍부하고 이에 따른 충적지도 넓게 형성되어 옛부터 풍요로운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석기시대로서는 영남지역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어 상주가 아주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지역이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사료된다.
(2) 신석기시대의 상주
안타깝게도 아직 상주 일대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러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낙동강, 금강 등으로 흘러드는 다양한 수계의 소하천과 충적지가 넓게 형성된 비옥한 지역이어서 인류가 출현한 이래 지속적인 삶의 터전이 되어왔을 것으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특히 인접지역인 김천에서 송죽리 유적과 같은 신석기 유적도 확인된 바 있어 향후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은 매우 클 것으로 기대된다
(3) 청동기시대의 상주
지표조사를 통해 상주 전역에서 고인돌, 선돌, 무문토기산포지 등 청동기시대의 디양한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몇몇 발굴조사를 통하여 그 존재가 더욱 명확하게 밝혀졌다. 상주의 청동기시대유적으로는 고인돌(支石墓), 선돌(立石), 주거유적 등이 있다.
지석묘는 주로 소하천 주변 야트막한 구릉 끝자락에 분포하고 있는데 대체로 5~10기의 소위 남방식, 즉 개석식 지석묘가 군집을 이루며 조성되어 있다. 입석은 헌신동, 부원동, 중덕동 등에서 확인된 바 있는데 대체로 지석묘와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청리지방공단조성사업에 수반된 구제발굴조사시 청리유적 Ⅰ-나구역에서 총 16기의 개석식 지석묘가 확인되었으며 여기에서 석검, 석촉, 무문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주거유적은 무문토기산포지로 알려진 유적 대부분이 주거유적일 가능성이 높은데 상주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이중 발굴조사가 실시된 유적은 상기 청리유적과 복룡동유적 등이 있는데 이들 양 유적은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의 유구가 조성되어 있는 복합유적으로 상주의 문화적 성격을 해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그중 복룡동유적에서는 중기의 대표적인 유형인 송국리형주거지가 확인되어 상주지역 청동기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밖에도 傳 상주 낙동면 출토의 편평통형동기 등 傳 상주 출토품이라 전하는 요녕식동검, 세형동검, 청동령 등 다양한 청동유물이 알려져 있어 이들 유물이 모두 상주출토품임이 확실하다면 청동기시대부터 상주 곳곳에는 그 지역을 아우르는 큰 세력을 가진 성읍(부족)국가가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4. 삼한-삼국시대의 상주
삼한시대, 즉 초기철기~원삼국시대에 들어서면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점차 사회구조와 규모가 체계화, 거대화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확인된다. 이 시기 처음으로 철제 농기구, 무기 등이 등장하며 그 이전과 비교해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농업생산력 향상, 군비증강에 따라 그 힘이 점차 집약되어 국가발전단계상 완전한 고대국가 출현 전단계인 부족연맹체(연맹왕국)의 단계로 접어들며 여러 소국의 이합집산이 매우 활발해진다.
삼한시대 전기(초기철기시대)의 유적으로 병성동, 이안 야무진권 등지에서 발굴조사례에서나 전 낙동리출토품으로 알려진 한식경(한식경), 동모 등 일괄유물례에서 이 시기의 상주는 경북 내륙권이나 충청권 등 인접지역은 물론, 중국, 왜 등 먼 지역과도 직간접적으로 교류의 폭을 넓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 후기(원삼국시대)에 들어서면 연맹왕국의 결속력이 더욱 강해지는데 당시 상주 일대의 대표소국은 사벌국(沙伐國)으로 사벌국의 실체를 방증하는 유적으로 이부곡토성 (재)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1999, 『尙州 吏部谷土城 試掘調査報告書』.
을 들 수 있다(『三國史記』 『三國史記』, <列傳>, <昔于老>조
<列傳> <昔于老>조 석우로 장군에 의한 사벌국의 사로국 편입 기록 참조).
이부곡토성은 사벌국의 도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부지역의 토층단면조사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삼한시대 전 기간에 걸쳐 조성된 성곽임은 틀림없다고 사료되지만 그 전모를 이해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문헌자료에 의거 사로국에 편입된 이후의 사벌국에 대해 살펴보면 법흥왕 12년(525)에 상주(上州)로 삼고 주(州)의 장관인 군주를 임명하였는데, 『三國史記』 卷34, 雜志3, 地理1, 尙州.
고구려 장수왕에게 상실한 서북방의 영토 회복과 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상주가 계립령을 넘어 충주로 가는 길과 화령을 넘어 보은 · 청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흥왕 14년(553)에 남천주(南川州)와 18년(557)에 북한산주(北韓山州)가 설치되면서 사벌주(沙伐州)의 중요성은 약화되었고, 주(州)의 치소도 갑문주(甘文州)로 옮기면서 사벌주는 폐지되어 상락군(上洛郡)으로 격하되었다. 『高麗史』 卷57, 地理1, 尙州, “... 眞興王廢改州爲上洛郡 ...”.
이후 진흥왕 36년(614)에 주(州)의 치소가 감문주에서 다시 일선주(一善州)로 옮겨졌으나, 신문왕 7년(687)에 일선주를 파하고 사벌주를 복치(復置)하면서 파진찬(波珍湌) 관장(官長)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8, 神文王 7年 3月, “... 罷一善州 復置沙伐州 ...”.
발굴조사된 삼국시대의 유적으로는 병풍산 일대 병성동, 헌신동, 성동리, 함창 신흥리, 청리등지의 고분군유적이 대표적이다. 이들 유적은 중요 거점지역으로 판단되는 지역에 영조된 대규모 고분군으로 상주의 고유한 고분문화의 성격과 신라의 상주진출후에 나타나는 변화양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이들 고분군유적의 배후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어 중요거점지역임을 방증하고 있는데 병풍산성 · 남산산성 · 마공산성 이외에도 자산산성 · 중모산성 · 노고산성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산성축조는 신라가 상주에 진출한 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알수 있는데 특히 6세기대 진흥왕 때에 이르러 상주를 고구려남하저지 및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의 교두보로 적극 활용하였는데 백화산에 축조된 금돌성을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또 지리적으로 상주와 문경에서 충북 괴산과 청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입지한 견훤산성(犬牙城으로 비정)도 같은 맥락에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상주지역의 토기생산체계 연구 뿐 아니라 당시의 기층문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토기가마유적이 낙동면 구잠리일대에서 확인되었다. 현재로는 7세기대 이후의 토기자료가 주를 이루지만 향후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좀더 폭넓은 시기의 자료가 출토되어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로 이행해가는 토기문화의 흐름을 해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5. 통일신라시대의 상주
통일신라시대의 상주는 9주 가운데 하나로서 말기까지 영역이나 주치(州治)의 변화없이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서 국가의 기강이 떨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가 미치지 못하게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호족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상주에서도 아자개(阿慈介)가 사벌성에서 웅거하면서 세력을 형성하고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도 사벌주를 근거로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후삼국시기인 904년에 궁예는 상주를 포함한 30여 주군(州郡)을 공격하여 빼앗고 906년에는 왕건을 보내어 상주의 사화진(沙火鎭)을 공격하여 견훤과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는 궁예의 세력권 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高麗史』 卷1, 世家, 太祖.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으로는 상주 복룡동 유적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복룡동유적에서는 주거지와 우물 등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가 출토되었다. 특히 방리(方里)제를 적용한 고대도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도로, 배수구 등 다양한 유구와 유물들이 다량 확인됨에 따라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사적 제 477호(2005년 5월 31일)로 지정되었다. 한편 이 일대는 청동기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민이 거주하며 여러 시대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으로 후손들에게 잘 보존하며 물려줘야할 역사문화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유적과 유물도 많이 유존하고 있다. 이들 유적 중 현재까지 사(寺)명이 이어져 오는 사찰로 남장사, 북장사, 청계사 등이 있으며, 사지(寺址)만 남아 있는 곳은 복룡사지, 유곡리사지, 안용리사지, 나한리사지 등이 있다. 불상은 함창읍 증촌리석불입상(보물 제118호)과 석불좌상(보물 제120호)이 있으며, 남산 용화전 석조천인상(보물 제661호), 신봉리 석조보살입상(경북문화재자료 제126호) 등이 있다. 석탑으로는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제117호) 등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있다.
6. 고려시대의 상주
고려시대의 상주는 태조太祖 23년(940)에 상주(尙州)로 고쳤다가 후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하였다. 성종(成宗) 2년(983)에 전국 12목 가운데 하나였으며, 14년(995)에는 전국 12주에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영남도에 소속되었다. 현종 3년(1012)에는 절도사를 폐지하고 안동대도독부(安東大都督府)가 되고, 5년에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 9년에는 전국 8목 중의 하나인 상주목(尙州牧)이 되었다. 『高麗史』 卷57, 志1, 地理2, 尙州.
상주는 고려시대에도 육상교통로와 낙동강을 통한 수상교통로의 요충지로서 그 기능이 계속 이어졌던 사실은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이러한 교통로의 요충지에는 많은 사찰들이 분포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장천부곡 의 승장사지 등과 같은 고려시대 절터가 다수 분포하고 있다. 이 외에도 상주는 고려시대에 몽고의 침략과 홍건적 그리고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전쟁이 있었으며, 이로 인한 피해가 잦았던 것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와 비슷한 양상으로 유존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복룡동유적에서 고려시대 주거지도 확인된 바 있는데 유구 내부에서 토기와 고려청자가 출토되었다. 또 시내 일원 도처에서도 이와 유사한 성격의 생활유적이 확인되어 시내 전역에 걸쳐 통일신라~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주민이 거주해왔음을 알 수 있다.
불교유적으로는 용흥사, 갑장사, 동해사와 사지로는 승장사지, 서곡동사지 등이 대표적이다. 석탑은 상오리 칠층석탑(보물 제683호), 도지정문화재 자료로 갑장사 삼층석탑, 북장사 삼층석탑, 무곡리 삼층석탑 등이 있으며, 불상은 목가리 석조관세음보살입상, 복룡동 석불좌상과 최근에 확인된 공성면 도곡리 마애여래입상 등이 있다. 또한 서곡동사지 일대에서 <辛亥>명 동종과 향완, 바리 등 청동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7. 조선시대의 상주
조선시대의 상주는 그 지위나 명칭에 있어서 큰 변화는 없었으나 태종(太宗) 13년(1413)에 전국을 8도로 나누면서 상주목(尙州牧)이 되었으며, 이러한 지방제도가 확립되면서 상주목사(尙州牧使)는 경상도 감영의 직무를 겸하게 되었고 선조 34년(1601)까지 약 200년간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임진왜란때 1592년 4월 14일 경상좌수영과의 해전을 시작으로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하면서 북상하여 4월 25일 상주에 이르게 된다. 이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지휘하는 중앙군과 왜군이 북천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나 패하였으며, 왜군은 조령을 넘어서 북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조직되는데 상주에서는 창의군(昌義軍), 충보군(忠報軍), 상의군(尙義軍)이 조직되어 활동하게 된다. 이와 함께 상주에서는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불리는 정기룡 장군이 상주의 가판관(假判官)으로 부임하여 1592년 10월 20일 용화동 전투를 시작으로 11월 23일에는 상주성을 탈환하게 된다. 이후 해전에서의 이순신의 활약과 명군의 원군으로 점차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활동으로 1598년에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게 된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정책을 폄에 따라 유교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지역중심의 학파가 생겨나게 된다. 안동 중심의 퇴계학파, 진주 중심의 남명학파, 개성 중심의 화담학파, 이이를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로 나눠지게 된다. 상주는 안동과 함께 퇴계학파 중심의 남인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영남의 성리학을 이끌어 가게 된다. 상주에서 유학의 번성은 유성룡(柳成龍) · 김성일(金誠一) 등 동인 집권세력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유성룡은 선조 13년(1580) 상주목사로 부임하면서 각 면에 훈장을 두는 등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 때 상주 유림과 학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향교 · 서당 등을 통하여 동인 집권세력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상주지방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강응철(康應哲) · 정경세(鄭經世) · 조정(趙靖) · 이전(李㙉) · 이준(李埈) · 전식(全湜) · 김혜(金惠) 등은 이 무렵 유성룡(柳成龍)과 교류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유적으로는 임진왜란과 관련해서 북천전적지와, 유물로는 최근 보물로 지정된 검간 조정 선생의 임진난기록 등이 있다. 상주박물관, 2009, 『검간조정-임진왜란을 말하다.』2009년 상주박물관 기획전 도록.
유교와 관련해서 옥연사, 우복종가, 체화당, 천운정사와 이와 관련된 고문서가 남아 있으며, 서원으로는 상주향교의 대성전, 도남서원, 봉암서당 등이 있다.
그밖에도 청리와 성동리의 조선시대 목관묘에서 상품(上品)의 분청사기와 백자가 다수 출토되었으며 상주 명주테마파크 조성사업부지내 교촌리 1유적에서 건물지, 목관묘, 회곽묘, 기와가마 등이 조사되고 여기에서 다량의 기와편, 백자, 철제가위, 청동합 등 다양한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재)대동문화재연구원, 2011. 10 『尙州 校村里 1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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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實錄地理志』에서 언급된 전국 4곳의 상품(上品) 자기소 가운데 2곳이 상주에 있다는 기록에서 조선시대의 도자기 생산과 관련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간 지속적인 지표조사를 거쳐 상주박물관에서는 2015년 제1차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현재 제2차 발굴조사를 앞두고 있는 모동 상판리 일원의 분청사기 가마유적에서 상품자기의 명성에 걸맞는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어 향후 상주 자기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할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 모서면 호음리유적 (사)대경문화재연구원, 2007, 『尙州 好音里遺蹟』.
에서 백자가마 8기가 확인되었으며, 모동면 일대 지표조사시에도 백자가마 밀집지역도 새로이 확인함으로써 분청사기 이후로도 수준높은 상주 도자기문화가 계속 전개되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향후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상주 도자기문화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연구기반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상주읍성유적에 대하여
상주시내 중심가의 왕산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상 남성동, 서성동, 무양동, 인봉동, 복룡동 일원에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효율적인 지방민을 관리하고 조세확보등을 위해 유력지역에 9주5소경을 설치하였으며 상주에도 방리제(坊里制)를 통해 고대도시구조를 갖추게 했다. 복룡동유적의 발굴조사를 통해 도로와 배수구 등 기반시설과 방 내부의 주거유적이 확인되어 고대도시의 윤곽과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데 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도로와 배수구 등 기반시설의 방향과 흐름이 잘 유지되고 있다.
상주읍성은 통일신라 방리제 구간의 다소 서북쪽에 치우쳐서 축조되었는데 고려 우왕 11년(1385)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되었으며 中樞院調査課編, 1938『校訂慶尙道地理志 慶尙道續撰地理誌』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축성의 규모와 조건이 제정됨에 따라 누차에 걸친 증개축이 이뤄진 후 일제강점기인 1912년 도시화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실질적으로 일인들의 상업활동편의와 상가요지를 확보하려는 저의로 전면 철거되었으며 읍성내 주요시설인 관아건물도 대부분 훼철되고 주민들의 노력으로 상산관과 태평루 정도가 이건된 후 현재 임란북천전적지 경내에 옮겨 두었다.
따라서 상주읍성과 관련한 유구는 현재 지표면상에 드러나 있는 것은 전무한 상태이나 왕산의 동쪽과 남쪽에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관아와 관련한 건물지와 연못, 우물 등이 확인되었는데 현 지표면이 조성되어 시, 발굴조사를 진행한다면 성벽, 성문지는 물론이고 해자, 도로, 배수구 각종 건물지 등 유구도 충분히 확인될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정보의 축적은 향후 상주읍성, 관아, 도시구조의 연구에 큰 진전을 가져올 것임과 동시에 전통문화도시 상주의 문화재를 활용한 관광산업 진척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사료된다.
시 대
年 代
年 革
三韓時代
○진한의 영토에 속하고 沙伐, 沙弗이라고 불리웠음.
三國時代
○沾解王 元年(248)
○法興王 12年(525)
○神文王 7年(687)
○景德王 16年(757)
○惠恭王(765∼780)
○사벌국이 신라에 병합되어 사벌주(沙伐州)로 됨.
○사벌주(沙伐州)를 상주(上州 : 2京 5州의 하나)로 개칭하고 군주(軍主)를 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행정구역을 개편, 9州의 하나인 沙伐州를 다시 설치하고 파진찬을 총관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으며, 州 밑에10郡 30縣을 두었음.
○오늘날의 명칭인 尙州로 개칭.
○신라36대 혜공왕때 沙伐州로 복명되어 고려초까지 사용.
高麗時代
○太祖 23年(940)
○成宗 2年(983)
○成宗 14年(995)
○顯宗 3年(1012)
○顯宗 9年(1018)
○尙州로 개칭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전국을 12牧으로 분치할 때 尙州牧으로 하고 牧使를 두었음.
○전국을 12節度使로 개치할 때 귀덕군(歸德軍)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영남도에 귀속시켰음.
○12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道) 양계(兩界)로 개편할 때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설치.
○전국을 4도호(都護), 8목(牧). 56지(知), 주(州), 군사(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으로 개편시 전국 8목(牧)중 하나인 상주목(尙州牧)으로 개칭되어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었음.
朝鮮時代
○조선기에 와서 감영(監營)은 경주에 본영(本營)을 상주에 유영(留營)을 두었다가 세종 때 경주와 상주에 각각 본영(本營)을 두었으며, 감사(監司)로 하여금 상주 목사(牧使)를 겸임토록 하고 별도로 판관(종5품)을 두어 행정을 담당케 하였음.
○世宗 31年(1449)
○高宗 32年(1895)
○高宗 33年(1896)
○전국을 8도(道)로 개칭할 때 경상도(慶尙道)에 속하고 관찰사(觀察使)가 상주목사를 겸함.
○칙령(勅令) 제98호(1895.5.26 공포)로 23부제 실시에 따라 상주군으로 개칭, 군수(郡守)를 임명.
○칙령 제36호(1896.8.4 공포)로 전국 23부(府)가 13도(道)로 정비되면서 경상북도 상주군이 됨.
일제강점기
○1914. 3. 1
○1931. 4. 1
○부령 제111호(1913.12.29 공포)로 부, 군, 면(府, 郡, 面) 폐합에 따라 함창군(咸昌郡)일원이 상주군에 편입(18面).
○부령 제103호(1930.12.29 공포)로 읍, 면제(邑, 面制)실시에 따라 상주면이 읍으로 승격(1읍 17면).
대한민국
○1998. 10. 12
○상주시조례 제217호(1998.10.12 공포)로 중앙동과 동문동이 동문동으로 통합(1읍 17면 6동 4출장소).
<표> 상주시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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