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사랑방 제99강」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의 상주모습(1)
-근세 상주의 사회 변동-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1. 머리말
흔히들, 역사의 흐름을 고대(古代), 근대(近代), 현대(現代)로 나눈다. 그러나 나라마다 문화(文化)가 다르기 때문에 연대(年代)를 딱딱 끊어서 이야기하는 기준은 없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고대(古代)를 B.C 1100년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할 때까지, 중세(中世)는 395년부터 1453년 비잔티움 멸망까지, 근대(近代)는 17세기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현대는 20세기 중후반부터 현재까지를 말하는데, 그 중에서 근대(近代)를 1914년 1차 대전(大戰)부터 1945년 2차대전 종전(終戰) 후까지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한국의 경우는, 고대(古代)를 B.C 2333년 고조선(古朝鮮) 성립부터 10세기 고려(高麗) 건국(建國)때 까지, 중세(中世)는 10세기 고려건국부터 14세기말 조선건국까지, 근세(近世)를 14세기말 조선건국부터 19세기 조선후기까지로 보고 있다.
근세(近世)는 중세(中世)나, 근대(近代)라기도 하기 어려운 15~19세기를 지칭하는 편의상 용어(用語)다. 따라서 근세(近世)의 끝이 근대(近代)의 시작이다.
그러나 근대(近代)의 시작을 보는 견해가 각각이다. 첫째는, 고종(高宗)의 즉위부터(1863년)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둘째는,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1876년) 이후부터라는 견해도 있고, 셋째는 민란(民亂)과 외세(外勢)의 침입이 시작된(1860년)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고, 넷째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갑오개혁(甲午改革), 을미개혁(乙未改革)이 실시된 1894년 이후를 근대(近代)로 보고, 1945년 광복(光復)부터 현재까지를 현대(現代)로 본다.
얼마 전에 상주문화원에서 하는 일이 온통 조선시대에 매달려 있고, 근대사(近代史)와 현대사(現代史)에 대한 조명(照明)은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래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1강(講)에서 98강(講)까지의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신라를 포함한 고대(古代)의 일을 강의한 것이 8편이고, 고려시대의 것이 2편, 조선시대의 것이 53편, 일제강점기 때의 것이 6편, 그리고 현대의 것이 21편이었다.
따라서 위의 기준으로 보면, 약 80편이 근세(近世)이후의 것들이라 볼 수 있다. ‘근대사(近代史)나 현대사(現代史)에는 별로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는 근세(近世) · 근대(近代) · 현대(現代)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朝鮮王朝) 500년 뒤에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가 있다. 그동안 조선 500년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왔으나, 조선왕조 멸망이후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을 하신 분을 제외하고는 별로 이야기한바가 없다.
우선 궁금한 것이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이어서 들어선 일제강점기에 우리 상주는 어떤 변화과정을 거쳤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살았던 분들은 거의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당시 우리들의 삶은 어떠했고, 지역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때로는 안타까웠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상주 이야기를 소상하게 소개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따가키 류타’란 사람이다. 이 사람은 45세된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교 사회학부 교수이며,「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 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라는 책을 썼다. 이 사람은 ‘한국의 지역사회가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했을까?’가 궁금해서 1999년 12월부터 2001년 9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에서 직접 상주와 살면서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상주를 택했을까? 에 대해서 ‘이따가키 류타’, “먼저 김천출신 선배가 상주를 권했다. 상주 지역에 대한 연구가 별로 진행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에 관한 자료가 풍부한 곳이었다. 처음 상주문화원을 방문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움받은 것에 용기를 얻었다.”그래서 상주를 선택했다고 했다.
또한 이 책이 내손에 들어온 것은 현재 경북대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엄창옥 교수 덕분이었다. 본래 엄교수의 지인(知人)이 일본 서점엘 들렸는데 거기에서 아타가끼 류타가 지은 이 책을 발견해서 가지고 왔는데, 상주문화원이 이를 번역해서 책자로 내면 어떨까를 제의해 왔으나 예산확보에 실패하여 차일피일했는데, 다행이도 연세대학교의 <근대 한국학 연구소>에서 이 책을 출판한 것을 한권 구입해서 나에게 보낸 것이다.
책을 읽어보니, 일제강점기 시절에 우리가 모르는 ‘상주의 변모’에 대해서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처럼 일제 강점기의 일이 궁금한 분들과 공유(共有)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금요사랑방’ 제99강에서 선을 보이기로 했다.
1. 상주의 식민지화(植民地化)
20세기 전반 상주 사회의 변화는 2가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첫째는 ‘식민지화(植民地化)’이고, 두 번째는 ‘도시화(都市化)’ 이다.
그리고 ‘식민지화(植民地化)’의 대표적인 현상은 ‘지방지배체제가 어떻게 전환되었는가’와 당시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일본인 사회는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가’이다.
‘지방지배체제의 전환’에는 ‘군인과 경찰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와 ‘관료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지방지배체제의 재편성
(1) 식민지의 폭력적 권력
식민지에 대한 폭력적인 권력조직은 ‘수비대(守備隊)’, ‘헌병대(憲兵隊)’, ‘경찰(警察)’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수비대와 헌병대’는 일본의 군조직(軍組織)이다.
‘수비대’는 순수한 군대조직으로, 1882년의 임오군란(壬午軍亂)후에 조일(朝日)간에 맺어진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 공사관(公使館)의 호위를 위해 들어왔다.
‘헌병대’는 본래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었으나, 러일전쟁 무렵부터 한국의 경찰권을 침해하여 보통경찰의 영역까지 확대되었고, 1907년 이후부터 항일의병투쟁(抗日義兵鬪爭)이 고조되면서 ‘치안 유지’의 주체(主體)가 되었다.
‘경찰권’은 종래에 관찰사(觀察使)나 수령(守令)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1894년의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내부(內部)아래에 경무청(警務廳)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독립된 경무서(警務署)가 맡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수비대→헌병대→경찰’은 모두 일본이 주도하는 폭력적 권력조직으로 1900년대 후반부터 1910년에 걸쳐 지방으로 깊숙이 침투하였다.
상주에 수비대(守備隊)가 들어 온 것은 1907년이다.
이 해 여름에 한국 군대의 해산 등을 계기로 의병운동이 다시 불타올랐고, 가을에는 의병부대의 투쟁이 강원도·충청도에서 경상도 북부로 옮겨졌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한국 주차군은 수비대를 증강 배치한 것이다.
1907년 12월에는 대전에 주력을 둔 보병 제47연대 산하 제1대대 본부를 상주에 두었다. 그리고 함창과 화령에는 보병 소대가 배치되었고, 낙동에는 보병 1개 분대가 배치되었다.
이듬해에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군은 재차 증파되었다. 1908년 5월 에 상주에는 수비구(守備區) 대대가 설치되었고, 함창에는 보병 중대, 옥산과 낙동에는 보병 분대가 배치되었으며, 화령장에는 대전 수비구 관할의 보병 소대가 배치되었다.
<표 1> 상주지역 한국주차군 수비대의 편제
| 연대(聯隊) | 상주(尙州) | 낙동(洛東) | 옥산(玉山) | 화령장(化寧場) | 함창(咸昌) |
1907년 12월 | 보병 제47연대 | 제1대대 | 보병 분대 | - | 보병 소대 | 보병 소대 |
1908년 5월 | 보병 제47연대 | 상주 수비구 대대 | 보병 분대 | 보병 분대 | 대전수비구 보병소대 | 보병 중대 |
1908년 11월 | 보병 제47연대 | 제1대대 | - | 보병 분대 | - | 보병 중대 |
1909년 8월 | 임시한국파견 보병 제1연대 | 보병 중대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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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수비대(守備隊)의 보강을 환영한 것은 상주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사회였다.
당시 상주지역에는 전투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근 문경(聞慶) 등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전투가 전개되었기 때문에, 문경이나 예천에 살던 일본인 일부가 상주로 피난해 왔는데, 그래도 불안하여 상주의 일본인 중에서 18~40세 남성들이 ‘자위대(自衛隊)’를 조직하였고, 우편국(郵便局)을 중심으로 상주성내(城內)에 결집해서 살았다.
그러던 중에 대전 수비대로부터 중대병력이 파견되어 왔기 때문에 의병의 활동으로 공포를 겪었던 일본인들은 “어두운 밤에 불빛을 찾은 듯한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1908년에 들어서면서 의병과 일본군 사이의 대규모 전투가 감소되었기 때문에 상주에 주둔했던 수비대의 역할도 줄어들었고, 1909년 겨울에는 수비대가 완전히 상주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조선전역을 보면, 소규모의 게릴라적 전투는 오히려 증가되는 양상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수비대 대신에 헌병대를 투입하였다.
이 시기에 상주에서는 경찰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 상주의 경찰서는 1906년 12월 경무분서(警務分署) 및 고문분견소(顧問分遣所)의 설치로 시작되었다. 설치 당시는 상주군내만이 아니라 함창·예천·용궁·문경·선산·해령(海寧)까지 관할하였고, 이노우에(井上) 고문보좌관(顧問輔佐官)을 비롯한 25명의 보조원이 배치되었다.
1907년에 한국 정부가 경찰 업무를 일본인에게 정식으로 위임하자, 경무분서(警務分署)는 경찰분서(警察分署)로 개칭되었고, 1908년에 이 경찰분서(警察分署)가 경찰서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1910년 6월에 한국의 경찰권은 일본 정부가 완전하게 장악하였는데, 그때 상주경찰서는 이웃한 선산으로 옮겨가고 상주의 경찰업무는 1919년까지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가 담당하였다.
<표 2> 상주지역 헌병대 시기별 편제
계 그중 보조 원수 | 분견소 소재지별 내역 | |||||||||||||
尙州 | 洛東 | 玉山 | 功東 | 芝山(牟西) | 壯岩(化北) | 佳谷(外西) | 化東 | 化寧場 | 咸昌 | 胎封 | 枾岩 | |||
1908. 7. 18 | 73 | 48 | 大25 | 大 12 | 大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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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 12 | 大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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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7. 1. | 87 | 50 | 金 10 | 金 10 | 金 10 | 金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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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咸 10 | 咸 27 | 咸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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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1. 1. | 89 | 50 | 金 12 | 金 10 | 金 10 |
| 金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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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咸 10 | 咸 27 | 咸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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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10. 20 | 80 | 45 | 金 15 | 金 7 | 金 9 |
| 金 7 | 金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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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 7 | 咸 24 | 咸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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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7. 30. | 81 | 45 | 金 16 | 金 7 | 金 9 |
| 金 7 | 金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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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 7 | 咸 24 | 咸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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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4. 1. | 82 | 45 | 金 17 | 金 7 | 金 6 |
| 金 7 | 金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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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 6 | 咸 23 |
| 咸 10 |
1913. 9. 12. | 85 | 48 | 金 20 | 金 7 | 金 6 |
| 金 7 | 金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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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 6 | 咸 23 |
| 咸 10 |
1914. 3. 1. | 83 | 47 | 尙 26 | 尙 8 | 尙 7 |
| 尙 7 | 尙 6 | 尙 7 |
| 尙 7 | 尙 9 |
| 尙 6 |
1915. 6. 1. | 81 | 46 | 尙 24 | 尙 8 | 尙 7 |
| 尙 7 | 尙 5 | 尙 6 | 尙 3 | 尙 7 | 尙 9 |
| 尙 5 |
*표 안의 수는 헌병대원을 나타낸 것이다.
*분견소별 내역란은 대구분대(大邱分隊)에 속한 경우는 ‘大’, 김천(金泉)분대(分隊) 는 ‘김(金)’, 함창분대(咸昌分隊)는 ‘함(咸)’, 상주분대(尙州分隊)는 ‘상(尙)’의 기호 를 붙였다.
*밑줄은 사관(士官)이상이 파견된 분견소를 가르킨다.
따라서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상주의 치안은 헌병대에 의해 지탱되었는데, 이들 헌병대는 경찰업무만이 아니라 행정에도 광범위하게 관여하였으며, 심지어 산견(山繭) 공동판매에도 헌병이 입회관을 참여할 정도였다.
그러나 1919년 8월에 들어서, 조선 전역에서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래서 상주에서는 상주경찰서가 설립되어 헌병 분대로부터 일체의 사무를 인계받았으며, 기존의 헌병대 파견소(派遣所), 출장소(出張所)도 모두 경찰관 주재소(駐在所)가 되면서 그 때까지 헌병대의 파견소나 출장소가 없던 면(面)에도 경찰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20년 3월에 사벌면, 4월에 중동면, 5월에 공검면과 외남면, 6월에 은척면에 경찰 주재소가 신설되어 1면(面) 1주재소(駐在所)가 달성되었다.
또한 1921년 6월에는 16,900원이라는 거액을 들여서 상주경찰서 청사를 준공하였다. 이후 경찰관의 수는 <표-3>과 같다.
<표-3>. 상주의 경찰관과 주재소 수
| 경찰(警察) | ||||||
경부 (警部) | 경부보(警部(補) | 순사부장(巡査部長) | 순사 (巡査) | 계(計) | 주재소(駐在所)수(數) | ||
1924년 | 일본인 | 1 | 2 | 9 | 40 | 52 | 17 |
조선인 | 1 | 0 | 1 | 42 | 44 | ||
계 | 2 | 2 | 10 | 82 | 96 | ||
1928년 | 일본인 | 1 | 2 | 0 | 40 | 43 | 16 |
조선인 | 0 | 1 | 0 | 36 | 37 | ||
계 | 1 | 3 | 0 | 76 | 80 | ||
1937년 | 계 | 1 | 3 | 17 | 62 | 83 | 16 |
<표-3>에 보듯이, 경부(警部)나 경부보(警部補)만이 아니라 순사(巡査)도 일본인이 반 이상 포함되어 있으며, 면(面)의 주재소에 까지 일본인들이 파고들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관료조직의 말단인 면사무소의 직원들이 거의 조선인인데 비해서, 치안 조직에서는 일본인이 포진해서 식민지 통치기구로서의 성격을 갖춘 것이다.
(2) 관료기구의 재편성
러일전쟁 종결 후인 1905년 11월, 소위 ‘제2차 한일협약(韓日協約)’으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05~1910년 사이에 징세(徵稅)제도를 크게 개편하였는데, 이는 종래의 ‘수령(守令)-향리(鄕吏)’에 의한 징세체제를 일신(一新)하여 징세기구 전체를 일본이 장악한 것이다.
특히, 1907년에 있었던 ‘제3차 한일협약’의 결과로 재무감독국(財務監督局) 관제(官制)와 재무서(財務署) 관제가 공포되어 일본인 관리가 한국 정부의 지방징세기구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908년 당시 상주재무서에는 일본인 관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서장(署長) 백락진(白樂晉)(정3품)
주사(主事) 아사이세이이찌(淺井誠一), 송문조(宋文朝), 조긍현(趙兢顯)(9품), 우에다분조우(上田文三), 마쓰다후미오(松田文雄)
재무서가 설치됨에 따라 군수(郡守)나 향리층(鄕吏層)은 징세기구에서 형식적으로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수 아래에 있는 면장 등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변화속에서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 이족(吏族)들이었다.『상주목선생안(尙州牧先生案)』에 호장(戶長)·이방(吏房)이라는 향리직(鄕吏職)이 기록된 것은 1908년 6월에 부임한 이인용(李寅用) 군수 때가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에는 이런 향리직의 기재가 없다. 따라서 군수를 정점으로 한 군청(郡廳)이 징세기구가 되면서 향리는 지방행정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한편 ‘면(面)’이 말단 행정단위로서 역할을 키워나갔다. 1910년 9월에 조선총독부는 ‘면제(面制)’를 적극 추진하였다. 당시 상주의 사례를 보면,
첫째로, 면(面)을 통폐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3월 1일에 군(郡) 통폐합을 시행하여 전국의 317개 군(郡)을 220개 군으로 조정하였다. 4월 1일에는 면(面) 통폐합을 시행하여 전국의 4,337개면을 2,522개로 정리되었다.
따라서 통폐합 전에는 상주가 22면이었고, 함창은 7면이었는데, 함창이 상주에 합병되고도 상주군은 18개면으로 조정되었다.
<표-4> 상주군 행정구역의 변화
| 구면(舊面) | 신면 (新面) | 행정(行政)동리(洞里)의 수(數) |
尙州牧 | 內東面·內南面· 內北面·內西面 | 尙州面 | 33 |
外北面)·大坪面· 中北面 | 沙伐面 | 15 | |
長川面·外東面 | 洛東面 | 17 | |
靑南面·靑東面 | 靑里面 | 12 | |
功東面·功西面· 靑南面 | 功城面 | 19 | |
中東面 | 中東面 | 7 | |
外南面 | 外南面 | 8 | |
內西面 | 內西面 | 11 | |
外西面 | 外西面 | 13 | |
銀尺面 | 銀尺面 | 9 | |
化東面 | 化東面 | 9 | |
化西面 | 化西面 | 11 | |
化北面 | 化北面 | 11 | |
牟東面 | 牟東面 | 10 | |
牟西面 | 牟西面 | 12 | |
丹東面·丹南面· 丹北面·丹西面· | →比安郡(1895) →義城郡(1914) | ||
山北面·山東面·山西面·山南面·永順面 | →聞慶郡(1895) | ||
咸昌縣 | 水昌面·南面 | 恭儉面 | 12 |
縣內面·東面·北面 | 咸昌面 | 15 | |
水下面·上西面 | 利安面 | 13 |
한편 조선시대의 동리(洞里)가 최하위 행정구역으로 확정된 것은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때문이었다. 측량에 근거한 토지 소유권 확정사업과 함께 동리(洞里)를 ‘지형(地形)’, ‘교통(交通)’, ‘민정(民情)’, ‘취락(聚落)’ 등을 고려하여 통폐합하여 지도상에 명확한 경계를 표시하였다.
1913년 현재 상주는 745동리, 함창 106동리가 있어서 도합 851동리였던 것을 237개 동리로 조정하였다.
둘째로, 사업이 통합되었다.
새로 정비된 면(面)은,
1. 도로(道路), 교량(橋梁), 도선(導船), 하천, 관개(灌漑), 배수(排水)
2. 시장, 조림(造林), 농사, 양잠, 축산 기타 산업의 개량 보급, 해조충(害 鳥蟲) 구제(驅除)
3. 묘지, 화장장, 도살장, 상수, 하수, 전염병 예방, 오물의 처리
4. 소방(消防), 수방(水防)
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재산을 보유할 것, 각종의 수수료와 사용료를 징수할 것, 부과금(賦課金)을 징수할 것, 또한 주민에게 부역을 부담시키거나 미곡과 목재 등의 현물을 징수할 것 등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위에서 열거한 사업의 대부분은 동계(洞契)를 비롯한 여러 조직이 맡았었다. 그러나 면제(面制)의 목적이 ‘종래 지방에 있는 여러 조직에 하던 사업을 면(面)으로 통일 정리하여 질서있는 발달을 꾀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촌락내의 사업이나 공유재산은 점차 면(面)에 통합되었다.
이러한 사업의 통합에 앞서서 총독부 중추원에서는 각 지방의 계(契)를 조사하였는데, 당시 상주에서는 1911년에 내북면 화전동(花田洞)의 동계(洞契), 내남면 거물리(巨勿里)의 이중계(里中契), 수선산(修善山)의 송계(松契), 내동면의 성동사약(城東社約)에 대해 조사했으며, 그 조사개요는 다음과 같다.
o 내북면 화전동(花田洞)의 동계(洞契)
1881년에 결성된 동계(洞契)이며, ‘동민들이 공동으로 돈과 곡식을 갹출 저축하여 동리의 일반 공공비(公共費)에 보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목되는 것은 이 동계가 조선시대 말기에 다양한 ‘사업’에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우선 1894년 ‘동학당 창궐시, 수성군(守城軍) 고립비(雇立費)로 소비’되었다. 1906년에 본래의 상태로 재건하였으나, 1908년 ‘수비대 토벌 때, 인부 고립비(雇立費)’로 소비하고 말았는데, 다시 1910년에 징수하여 회복했다고 한다.
내북면 화전동(花田洞)은 읍내와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에 갑오농민전쟁에서는 정부군에게, 의병투쟁에서는 일본군에게 그 재산을 착취당했으며, 면제(面制) 실시 이후, 이 동계(洞契)는 소멸되었다.
o 내남면 거물리(巨勿里)의 이중계(里中契)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계(契)라고 하지만, 1898년에 새 규약을 만들어서 유지된 계(契)이다. ‘남천(南川) 교량의 재료, 동민의 연료, 동사비(洞祀費)’로 충당하기 위해, 동산에 양목(養木)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산림(山林)을 공동 관리하는 문제는 면(面)의 사무와 중복되기 때문에 면제(面制) 실시 이후 이중계(里中契)는 소멸되었다.
o 수선산(修善山)의 송계(松契)
송계(松契)가 300년 전부터 내려왔다고 하지만, 1889년에 재결성되었다. ‘청동면(靑東面)내산(內山) 아래 여섯 마을 사람들에게 연료를 공급하고 해당 산록(山麓)의 사태(沙汰)를 방지하고 풍치(風致)를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산림(山林)을 공동 관리하는 문제는 면(面)의 사무와 중복되기 때문에 면제(面制) 실시 이후 송계(松契)는 소멸되었다.
o 내동면의 성동사약(城東社約)
1900년 경에 결성되었으며, ‘동사(洞舍) 제사(祭祀) 비용 등의 공비(公費)’에 충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1910년에 ‘이자의 수봉(收捧)곤란’ 및 채권 회수 곤란이 뒤따르자 해산하였다.
세 번째는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면제(面制) 초기에는 면사무소가 없어서 면장 집에서 사무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10년 12월에, 독립된 건물 확보가 어려우면 면장 집안에서 사무실 공간을 확보하여 ‘면사무소’로 사용하도록 통첩되었다.
따라서 상주에서도 1910년대에 면사무소가 각 지역마다 생겼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1913년에 경상북도가 작성한『면리원선장사적(面吏員選獎事蹟)』에 외남면(外南面)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외남면장은 박인수(朴寅洙)로 이족계(吏族系)인 상산 박씨였으며, 당시 면사무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사무실은 주택이 협애(狹隘)하고 집무상 불편했기 때문에 메이지(明治) 45년(1912) 사재를 들여서 조선식 가옥 1동을 건축하여 온돌 2칸을 거실로 하고, 마루방 1칸과 온돌 2칸을 사무실로 하고, 탁자 2개, 의자 5개 및 서상(書箱) 등을 구비해 조금 체재(體裁)를 갖추었다.
사무는 분담을 하지 않고 주로 면장이 처리하며, 면서기와 고원(雇員)을 지휘하여 서무에 종사토록 하였다.
문서의 수수(收受)·발송·기안(起案)·결재(決裁)·편찬 및 보존은 1912년에는 군(郡) 훈령에 근거하였고, 1913년에는 서무규정에 근거해서 취급하였다.
면 경비는 호수별(戶數別), 결수별(結數別)로 조정된 금액을 납부하도록 하고 규정의 장부를 두어 수지(收支)를 정리하였다.“
1910년대를 거치면서 상주에는 면사무소가 급속하게 설치되었고, 비로소 ‘관청’으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3) 농촌진흥운동과 총력전체제하의 조직화
식민지관료제(植民地官僚制)가 1910년대에 ‘면(面)’수준까지 완료되자, 이어서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이 시작되었다.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은 1931년에 기본정책이 제시되었고,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관제(官制) 농촌 캠페인’이었다. 각 면마다 ‘지도부락’이 선정되고, 관청·경찰·학교·금융기관이나 ‘지방유식자’들이 군 농촌진흥위원회 및 각 읍면 농촌진흥위원회에 참가해서 ‘지도’에 앞장섰다.
<표-5>는 당시 상주의 지도자 구성이다. 이 표를 보면, 각 면(面) 평균 50명 정도의 지도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 수가 가장 많은 것은 구장(區長) 306명(34%)이고, 이어서 ‘지방유식자’가 227명(25%), 면협의회원 184명(21%)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고유한 업무의 벽을 넘어서 일제히 동원되었다.
<표 - 5> 상주의 농촌진흥위원회 구성
상주군농촌진흥위원회 | 군청 산업기술원 | 경찰서장 | 공립초등학교장·실업학교장 | 금융조합 이사 | 도평의회원 | 각종 산업단체의 부회장 | 각종산업단체의 부회장 | 지방 유식자 | 계 | |
21 | 1 | 4 | 2 | 1 | 3 | 30 | 30 | 62 | ||
각읍면농촌진흥실행위원회 | 읍면리원 | 주재소 주석 | 면내초등학교장 | 면내금융조합 이사 | 면협의회원 | 면내 산업·수리조합 이사 | 지방 유식자 | 계 | 1읍면당평균 | |
면장·서기 | 구장 | |||||||||
133 | 306 | 18 | 16 | 11 | 184 | 1 | 227 | 896 | 49.8 |
1937년 7월에 노구교(盧溝橋) 사건이 일어났다.
노구교(盧溝橋)는 북경 남서쪽 교외에 있는 영정강(永定河)을 가로지르는 노구교 왼편의 소도시로, 송철원(宋哲元)이 지휘하는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37년 7월 7일, 북경 교외 풍대(豊台)에 주둔한 일본군이 노구교 부근에서 야간연습을 실시하던 중, 몇 발의 총소리가 나고 병사 1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사실 그 병사는 용변중이었고 20분 후 대열에 복귀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 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주력부대를 출동시켜, 다음날 새벽 노구교를 점령했다. 7월 11일 양 측은 중국의 양보로 현지협정을 맺어 사건이 일단 해결된 듯했으나, 화북침략을 노리던 일본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관동군 및 본토의 3개사단을 증파, 7월 28일 북경·천진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로써 노구교사건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중·일전쟁으로 돌입했다.
중국 측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항일기운이 높아졌다.
따라서 조선에서도 총동원체제가 구축되었는데, 이때 농촌진흥운동도 조금씩 변용되어 관제(官製) 조직화가 되었으며, 상주에서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때부터 상주에서도 ‘시국(時局)’과 관련하여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표-6>은 1937년에 상주에서 개최된 행사이다.
<표-6> 1937년의 ‘시국’관련 행사
개최일 | 장소 | 내용 |
7월 23일 | 상주읍사무소 | 상주읍장이 주도하여 상주국방부인회를 조직 |
25일 | 상주읍불교포교소 | 상주불교청년회, 불교부인회 주최로 국위선양기원제를 개최 |
8월 8일 | 상주공립보통학교 | 총독부 사회과 주최의 전선순회강연회를 개최, 관민유지와 각 농촌부녀단체 등 5백명이 참여 |
14일 | 상주군청 | 군수가 사회가 되어 군사후원연맹 상주분회를 개최 |
상주군청 | 군 농촌진흥위원회를 개최, 각 면에서 ‘국체관념명징’이나 ‘시국’에 관한 강연의 개최를 결정 | |
15일 | 상주향교 | 군수 주최로 상주유림 30명의 참가에 의한 황군위문선양기원제를 거행. |
24일 | 상주경찰서 | 제국재향군인회 상주분회의 임시총회를 개최, 회원과 관민유지가 참가. |
28일 | 상주공립보통학교 | 재향군인회 상주분회의 주최로 대구 80연대의 남(南)소좌의 강연회를 개최 |
9월 1일 | 상주공립보통학교 | 상주읍장 사회로 국위선양무운장구기원제를 개최, 관공서원, 일반유지가 참가 |
10월 28일 | 상주신사 | 상해전승축하제를 개최, 상주읍장을 비롯한 각 관공서원, 일반사회단체원이 참가 |
29일 | 상주군청 | 농촌진흥위원회를 개최, 11월 7일~11월 13일에 행해진 국민정신작흥행사를 결정 |
11월 3일 | 상주경찰서 | 재향군인회 상주분회가 무기고 낙성식을 개최 |
11일 | 상주읍사무소 | 상주경찰서장의 시국강연회 |
상주좌 | 경북도의원의 시국강연회 | |
12월 13일 | 상주신사 | 남경함락 봉고제를 개최, 상주읍장을 중심으로 관공서원, 일반 읍민이 참가 |
<표-7>은 1938년 시점에서 상주의 조직화 상황이다. 각종 조합, 금융조합에 소속된 식산계(殖産契), 부인회 등의 관제 조직화가 조직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부락’을 단위로 전개되었다는 데에 특징이 있었다.
<표-7>. 상주의 관제(官制) 조직화(1938년 현재)
| 갱생공려조합(更生共勵組合) | 농가공려조합(農家共勵組合) | 농촌진흥조합(農村振興組合) | 식산계(殖産契) | 부인회(1937년) | 총수 |
조합수 | 34 | 257 | 279 | 계수 43 | 회수 340 | 부락 총수 457 |
호수 | 1,849 | 7,147 |
| 계원수 2,091 | 회원수 12,352 | 농업세대수 27,670 |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식민지관료제는 서서히 상주 사회의 마을까지 손길을 뻗쳐갔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관료제의 침투를 과대평가하여 마을 주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정도로 통제 당하지는 않았다.
2) 상주의 일본인 사회
1905년에 상주 우편국(郵便局)이 설치되고 국장으로 부임한 다나베 요시지로(田邊良次郞)가 상주 사회에 일본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첫 번째 인물이다.
그 이후 1906년경에는 15~16호에 40명 정도가 살기 시작했고, 1907년경에는 24~25호에 70~80명이 살았으며, 1909년 말에는 일본인이 65호 184명이었다. 그리고 상주 함창이 합병되지 않았던 1912년에, 상주에는 202세대 633명(남성비율 56.2%)의 일본인이 거주했고, 함창에는 42세대 104명(남성비율 61.5%)이 거주했다.
상주 읍내에 일본인 학교인 상주공립심상소학교(尙州公立尋常小學校)가 생긴 것은 1907년 7월 11일이었다.
설립자금이나 재정은 일본인회에 의한 학교조합(學校組合)을 통해 조달되었다. 통학하는 아동은 1907년 당시에는 10명 남짓이었고, 1910년 3월말에는 남자 9명 여자 7명이 교사 한 사람 밑에서 배웠다. 1918년에 상주학교조합 관할지구의 일본인 학령(學齡)아동의 취학율은 100%였고, 비록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이지만 6년제의 교육이 시행되었다.
1910년대까지 조선인 대상의 공립보통학교가 4년제인 상주공립보통학교와 함창공립보통학교 밖에 없었던 것에 비하면, 일본인 아이들은 교육면에서 압도적으로 우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표-8>은 읍내와 그 이외 지역의 민족별(民族別) 인구통계이다.
<표-8>. 상주의 민족별 인구
| 상주읍내 | 기타 | ||||||||
계 | 조선인 | 일본인 | 일본인 비율(%) | 외국인 | 계 | 조선인 | 일본인 | 일본인비율(%) | 외국인 | |
1911 | 5,924 | 5,530 | 380 | 6.4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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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5,854 | 5,330 | 508 | 8.7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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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 5,395 | 4,829 | 549 | 10.2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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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 6,189 | 5,360 | 806 | 13.0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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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 6,618 | 5,816 | 774 | 11.7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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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6,978 | 6,174 | 771 | 11.0 |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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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7,260 | 6,485 | 734 | 10.1 | 41 | 135,538 | 135,103 | 428 | 0.3 | 7 |
1922 | 8,663 | 7,675 | 922 | 10.6 | 66 | 147,308 | 146,611 | 672 | 0.5 | 25 |
1924 | 8,658 | 7,442 | 1,144 | 13.2 | 72 | 150,299 | 149,803 | 462 | 0.3 | 34 |
1925 | 9,639 | 8,466 | 1,086 | 11.3 | 87 | 154,978 | 154,383 | 551 | 0.4 | 44 |
1933 | 11,911 | 10,611 | 1,242 | 10.4 | 58 | 151,174 | 150,563 | 588 | 0.4 | 23 |
1934 | 12,328 | 11,108 | 1,171 | 9.5 | 49 | 152,616 | 152,004 | 592 | 0.4 | 20 |
1935 | 13,260 | 12,011 | 1,181 | 8.9 | 68 | 163,794 | 163,096 | 676 | 0.4 | 22 |
1936 | 13,570 | 12,314 | 1,187 | 8.7 | 69 | 164,620 | 163,833 | 763 | 0.5 | 24 |
1938 | 14,144 | 12,960 | 1,183 | 8.4 | 1 | 167,656 | 166,995 | 661 | 0.4 | 0 |
이 <표-8>에서 보면, 읍내와 그 이외 지역에서 일본인들의 인구 밀도가 완전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읍내에서는 시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본인이 인구의 약 8~13% 정도인데 비해서 그 이외의 농촌부에서는 0.3~0.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상주의 면별 일본인 인구비율(千分率)은 다음과 같다.
상주읍 - 41.7% 함창면 - 16.7% 낙동면 - 11.4% 중동면 - 1.5%
청리면 - 2.9% 공성면 - 6.7% 외남면 - 0.4% 내서면 - 1.5%
외서면 - 2.2% 공검면 - 2.6% 이안면 - 1.5% 화북면 - 0.5%
화서면 - 3.4% 화동면 - 1.1% 모서면 - 3.3% 모동면 - 5.4%
『발전지(發展誌)』에 게재된 ‘상주군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유력자’의 이력을 <표-10>에 정리하였다. 이를 참조하면서 식민자의 상황을 살펴보겠다.
<표-10> 상주의 일본인 유력자
이름 | 출신현 | 상주에 온 시기 | 직업 및 경력 |
도요따쮸우끼찌(豊田忠吉) | 아이찌현(愛知) | 1906년 | 미곡·비료·잡화상, 미곡상조합장, 학교조합 관리자, 면협의원 |
오오기시히로시(大岸廣) | 이시까와현(石川) | 1908년 | 加賀屋(여관 겸 요리집), 일본인회 서기, 학교조합 출납담당, 평의원, 消防組頭 |
구또우야소기찌(工藤與葱吉) | 아오모리현(靑森) | 1908년 | 농업, 잡화상 |
고우즈도모스께(廣津友助) | 야마구찌현(山口) | 1908년 | 흑연광산→미곡상, 학교조합 관리자, 소방조두 |
이나가끼도꾸사부로우(稻垣德三郞) | 미에현(三重) | 1909년 | 이나가키藥店, ㈜상주상사 사장, ㈜상주주조 사장, ㈜조선자동차 감사역, 김천무진회사 중역, 상주면협의원, 학교조합의원, 상주상공회장 |
가모까또우지(蒲生嘉藤治) | 가가와현(香川) | 1911년 | 醬油釀造業 → ㈜讚岐주조 사장, 소방조두, 학교조합 의원 |
오까자끼미쓰요시(岡崎光儀) | 가가와현(香川) | 1913년 | 양품잡화상, ㈜상주주조 중역, 상주상공회 부회장, 학교조합의원, 면협의원 |
야마다후사따로우(山田房太郞) | 이즈오까현(靜岡) | 1914년 | 전당포업, 상주금융조합장, 면협의원, 학교조합 평의원 |
오-꾸보마사오(大久保正雄) | 가고시마현(鹿兒島) | 1915년 | 재목업, 학교조합 의원, 상공회 평의원 |
요시노나오따로우(吉野尙太郞) | 나가사끼현(長崎) | 1915년 | 금융업, 비료업, 재향군인분회장, 도 평의원 |
다까세요시오(高瀨吉雄) | 와까야마현(和歌山) | 1916년 | 농업, 학교관리자, 소방조두, 면협의원, 농회 의원, 번영회장 |
야마구찌겐조우(山口賢三) | 시가현(滋賀) | 1919년 | 미곡비료상, 정미업 |
후꾸로쓰네사부로(袋常三郞) | 미야기현(宮城) | 1922년 | 농업, 금융업, 상주청년단장, 재향군인분회장, 면협의원 |
후꾸오까규우하찌(福岡九八) | 돗또리현(鳥取) | 1924년 | 미곡비료상, 면협의원, 금융조합 평의원, ㈜경북운송 감사, ㈜상주주조 중역 |
와다야스이찌(和田泰一) | 야마구찌현(山口) | 1924년 | 대구高田상회 상주지점 |
미하라 쇼-헤이(御原正平) | 효고현(兵庫) | 1928년 | 면장, 학교조합 관리자 |
히사에요리조우(久枝賴三) | 야마구찌현(山口) | 1929년 | 경찰서 |
사또-히사나리(佐藤久成) | 아끼다현(秋田) | 1930년 | 조선식산은행 상주지점장 |
(1) 상공업자(商工業者)
상주에 거주한 일본인 중에서 상공업종사자가 숫자도 많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병합 전부터 ‘혼고우나오 쇼우텐(本鄕直商店)-석유’, ‘하라다시게루 쇼우텐(原田茂商店)-잡화’, ‘아끼다겐조우 쇼우텐(秋山元藏商店)-도자기’, ‘시라이시 쇼우텐(白石商店)-과자’, ‘이노우에겐끼찌 쇼우텐(井上賢吉商店)-약’, ‘가가야(加賀屋)-요리집’ 등이 읍내에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표-10>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대부분은 복수의 사업에 손을 댔고 상주상공회(尙州商工會)를 비롯한 몇몇 지역 조직에 관여하였다.
(2) 광업자(鑛業者)
상주에서 광산 경영에 관여한 일본인도 눈에 띄었다. 병합 직후에 발간된『경북요람(慶北要覽)』에 게재된『경북광업일람(慶北鑛業一覽)』을 보면,
1906년 이후 상주군에는 광산이 19곳이 있었다.
<표-11> 상주의 광산과 소유자(1906~1910)
位置 | 鑛山과 鑛山 所有者 |
內西面 | 금광, 히라사와이와따로우(平澤岩太郞) |
內南面 | 금광, 데구찌진스께(出口仁助외 2(人) |
內東面 | 사금, 진노다마고로우(神野玉五郞) ; 고모구찌구마따로우(菰口態太郞) |
內西面 | 금광, 혼고우나오(本鄕直) ; 金斗寅 |
外南面 | 흑연, 센쪼우스케지(千寵助二) |
外東面 | 사금, 진노다마고로우(神野玉五郞), 금광, 와따나베에이따로우(渡邊榮太郞) |
外西面 | 금광, 혼고우나오(本鄕直) |
中北面 | 금광, 히라사와이와따로우(平澤岩太郞) ; 혼고우나오(本鄕直) |
長川面 | 금광, 이노우에다쓰루노스께(井上田鶴之助) ;와따나베-에이따로우(渡邊榮太郞) |
化東面 | 흑연, 고미야만지로우(小宮萬次廊) 외 1명 ; 한국식산주식회사 ; 矢島寬一郞야지마간이찌로우) ; 후루야겐이찌(古谷賢一)·도이나까(土井仲) ; 이나가끼우메지로우(稻垣梅二郞) 외 3명 |
牟東面 | 흑연, 센쪼우스케지(千寵助二), 砂鑛, 하세가와다께기찌(長谷川竹吉 외 3명) |
牟西面 | 흑연, 고미야만지로우(小宮萬次廊) 외 3인 ; 한국식산주식회사) |
이조말기부터 메이지(明治) 말기에 걸쳐서 사금(砂金)의 채취와 광석 분쇄에 의해서 ‘다량의 금(金)이 군(郡)밖으로 반출되었다’고『발전지(發展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병합 전후에는 많은 일본인 광산업자들이 상주에 들어와서 채굴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에는 총독부가 상주광무소(尙州鑛務所)를 설치하고, 광구(鑛區) 4개소를 두어 조사를 개시했다. 1924년에는 총독부가 보류구역(保留區域)을 상주광업사(尙州鑛業社, 사장 마쓰가따오또히꼬(松方乙彦)에 불하했는데, 그 후 1929년에는 사가(佐賀)탄광주식회사에, 1932년에는 도쿄에 본사를 둔 주가이(中外)광업주식회사에 매각되었다.
한편 흑연광은 고미야(小宮)흑연광업회사(모서면 유방리, 111.1만 평), 야마시다(山下)흑연광업회사(이안면, 59.7만 평), 미야타에이지로(宮田榮二郞)흑연광산(공검면, 52.8만 평) 등이 큰 회사였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비교적 규모가 큰 광산은 ‘갱부(坑夫)가 적어도 70명 정도는 있고, 여름철에는 200명에도 달한다.’라고 했는데, 중동면 회상리에 있던 사광(砂鑛)은 1913년에 가장 성할 때는 갱부가 100명, 선광부(選鑛夫)가 100명이 이었다.
또한 1924년에 개통한 경북선(慶北線) 철도를 신청할 때, 광물자원을 반송(搬送)한다는 것도 큰 구실이었다. 그러나 상공업자와는 달리 광업에 종사한 일본인은 대부분 상주지역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3) 농업자(農業者)
상주에 있는 일본인 농업자 수는 <표-12>와 같다.
<표-12> 상주의 일본인 농민
| 호수(戶數) | 겸업내역 (兼業內譯) | 사람수(人數) |
1912년 | 32 | - | - |
1917년 | 88 | - | 359 |
1925년 | 57 | - | 224 |
1927년 | 69 | - | 313 |
1928년 | 77 | - | 334 |
1929년 | 77 | - | 336 |
1930년 | 78 | - | 352 |
1933년 | 71 | 14 | - |
1934년 | 64 | 9 | - |
1935년 | 57 | 9 | - |
1936년 | 56 | 8 | - |
1937년 | 54 | 7 | - |
1938년 | 54 | 1 | - |
1910년대에 일본인들의 농업이민이 시작되었으나 낮은 수준이었고, 특히 1930년대부터는 오히려 서서히 감소하였다.
일본인의 토지소유형태를 조사한 통계가 없기 때문에 일본인 농민들이 지역에서 어떠한 지위에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1912년에 상주의 일본인 농업경영자 24명이 23,500원을 투자하여 38.1정보(町步)의 논과 7.6정보의 밭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근업통계서(勤業統計書)』에 있다.
따라서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계산하면, 한 경영자당 논 1.6정보, 밭 0.3정보의 토지를 소유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상주의 ‘모범농리(模範農里)’로 불렸던 외남면의 경우, 농가 1호당 경지면적이 전답 합쳐서 0.8정보였음을 감안하면 조선인 농민보다 일본인 농민이 경지를 더 많이 소유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인 농업이민이 어떠한 경로로 상주에 왔는지는 정확치 않다. 다만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를 통한 이민이 포함되어 있던 것은 확실하다.
동양척식회사는 1910년부터 매년 농업이민을 조선 각지로 보냈고, 1917년 이후는 일본인 농민의 3~4할을 동척회사(東洋拓植會社)의 농업이민이 차지하였다. 상주에 몇 사람이 보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932년까지 상주, 화서, 함창, 공성, 사벌, 모동 등 각 면(面)에 동척회사(東洋拓植會社)를 통한 이주자(移住者)가 있었다.
동양척식회사의 농업이민은 비교적 저리(低利)로 회사 소유 토지를 양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토지 소유가 용이하였다.
(4) 관공리(官公吏)
경찰과 같은 치안조직의 경우, 면(面) 수준에서도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면사무소는 거의가 조선인이었고, 보통학교와 금융조합에도 관공리(官公吏)가 배치되었다.
1919~1921년까지는 3면(面)에 1개 학교씩 보통학교를 설립하였으나, 1929~1936년까지는 1면(面)에 1개의 보통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이들 학교의 일본인 교원을 살펴보면, 1930년에 일본인이 다니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가 읍내·함창·화서에 하나씩 있었는데,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던 10명의 교원 전원이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이 다니는 공립보통학교의 경우, 읍내 학교에는 22명의 교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일본인 교원이 8명이었다. 그리고 읍내를 제외한 농촌부에는 10개 학교가 있었는데, 51명의 교원 가운데 일본인 교원은 11명이었고, 중모면이나 은척면 등에는 일본인 교원이 없었다.
금융조합은 보통학교만큼 많지 않았다. 1936년에 7개 조합(2개는 읍내)이 있었다. 직원 구성은 관련 자료가 없어서 알길이 없다.
2. 읍내(邑內)의 ‘시가지(市街地)’화(化)
1) 읍치(邑治)의 환골탈태(換骨奪胎)
읍내(邑內)는 조선왕조시대의 지방성곽행정촌락을 대상으로 한 ‘읍치(邑治)’였으나 이 특색이 점차 파괴되면서, 식민지 행정관청과 상업적인 시설이 어우러진 ‘시가지’로 변했다.
1909년의 시점에서 보면, 이미 군아(郡衙)외에 헌병분견소·수비대·경찰서·재판소·우편국·재무서·금융조합·농상공은행·소학교·공립보통학교가 설치되었으며, 병합 전까지 새롭게 설치된 관청 및 공공시설은 <표-13>과 같다.
<표-13> 병합 전 상주읍내의 관공서
설치시설 | 설치일 | 명칭 |
우편국 | 1905년 6월9일 | 釜山郵便局 尙州出張所 |
경찰서 | 1906년 12월 | 尙州警察分署 및 顧問分遣所 |
보통학교 | 1907년 6월1일 | 尙州公立普通學校 |
소학교 | 1907년 7월11일 | 尙州公立尋常小學校 |
금융조합 | 1907년 10월 | 尙州金融組合 |
수비대 | 1907년 12월 | 尙州守備隊 |
헌병분견소 | 1908년 7월 | 憲兵隊 大邱分隊 尙州分遣所 |
재판소 | 1909년 1월20일 | 大邱地方裁判所 尙州郡裁判所 |
일제의 진출이 점증하던 시기에 처음 진출한 관서는 우편국(郵便局)이었다. 1904년 상주우편국이 성하동 12번지에 신설되고 일본인 다나베료우지로우(田邊良次郞)이 국장으로 취임하였다. 1906년에는 전신사무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1921년 전화교환업무를 개시하고 1926년 옛 교방청(敎坊廳)에 청사를 신축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청사가 전소되고 1951년 일본인 백화점이었던 곳으로 이사하였다.
경비기관은 낙동파견소(洛東派遣所) 관할의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가 있었다. 1907년 의병운동이 일자 대구수비대에서 1개 중대가 상주로 와 있다가 1908년 상주수비대가 설치되었으며 이어 경찰서가 설치되었다. 경찰서 자리는 옛 동헌 형리청(刑吏廳) 구지(舊址)에 두고 1920년 청사를 준공하고 1927년에 증축하고 각(各) 면(面)에 주재소를 세웠다. 그와 함께 관아지의 상징인 태평루(太平樓)는 그 해 1920년 향교(鄕校) 동쪽 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1941년에 성하동 객사를 옮기고 그 자리에 다시 청사를 옮김으로서
조선시기 관아의 흔적을 모두 지우려는 의도를 보였다. 객사는 1941년 상주여자중학교로 옮겼다가 1991년 북천전적지로 이건하였다.
그리고 국권을 침탈한 뒤에 법원을 개설하였다. 1929년 왕산의 관아지 옛 호장청(戶長廳)에서 남성동에 청사를 신축하여 옮겼다. 세무서는 세무행정 기구변경으로 1934년 5월 10일 상주군청 재무계로부터 분리하여 상주세무서로 발족하였다. 1926년 군수 홍의식(洪義植)이 옛 진영(鎭營)터에 군청 청사를 기공하여 이듬해에 준공하였다.
읍치(邑治)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던 읍성(邑城)의 성벽을 허문 것은 병합 후인 1912년경의 일이었다. 따라서 고려 우왕 7년(1381)에 시작해서 우왕 11년(1385)에 완축(完築)했던「상주읍성」은 527년이 지난 1912년에 일제에 의해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29년에 증보된『상산지(商山誌)』권3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임자년(1912)에 이르러서 그 성(城)을 부수고 그 누각(樓閣)을 허물어 이번에는 시가(市街) 통로(通路)를 만들었다. 호지(濠池)나 성(城)도 아울러 폐허가 되어 덧없이 미나리꽝이나 왕골밭이던 것이 이제는 전부 흙을 돋우어 가옥(家屋)을 짓고 말았다. 예전의 성(城)이나 연못이 있던 곳을 이제는 다시 기억할 수 없다.”
1911년에 육군(陸軍) 측량부(測量部)가 임시로 인쇄·발행한「약측도(略測圖)·목산측도(目算測圖) 등의 집성(輯成)」에 실려 있는 5만분지 1의 지도를 보면, 읍성(邑城)이 그려져 있다. 남(南)으로는 김천에, 북(北)으로는 문경에 이르는 도로와, 서(西)로는 보은으로, 동(東)으로는 낙동강에 이르는 도로가 상주성(尙州城)의 동서남북 4대문에 연결되어 성내(城內)는 작은 길이 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성벽(城壁)이 허물어짐에 따라 상주성(尙州城) 한가운데 큰 십자로(十字路)가 생겼고 읍성(邑城)이 시가지(市街地)로 변모해 갔다.
1930년대에 작성된 상주시가지도(尙州市街地圖)를 보면 전에 성벽이 있었던 부분이 골목길처럼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읍성을 특징 지웠던 것들은 ‘덧없이’ 사라졌다.
이와 더불어 몇몇 지명에 일본식 ‘정(町)’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 서성내리(西城內里)와 북문외리(北門外里)는 ‘서정동(西町洞, 현 서성동)이 되고, 남성내리(南城內里)·남문외리(南門外里)·상남문리(上南門里)·낙중리(洛中里)·내서면 창내리(倉內里)는 ’남정리(南町里, 현 남성동)가 되었다.
이를 전후해서 사족(士族)들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향청(鄕廳)이 관(官)에 접수되어 버렸다.『상산지(商山誌)』에는 그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변혁 후 군대가 주류(駐留)하게 되자 공가물(公家物)로 간주하였다. 사론(士論)은 심했지만 애석하게도 되돌릴 수 없었다. 금장(錦粧)은 향교로 옮겼다.”
향청(鄕廳)은 사족(士族)이 읍성 북측에 자치적으로 세웠던 것으로 관아(官衙)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공가물(公家物)’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사론(士論)’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변혁’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의병탄압을 위해 상주수비대가 파견된 것이 1907년 가을 무렵의 일이고, 또한 대대 규모의 상주수비대가 설치된 것은 1908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무학당(武學堂)이 1907년에 공가(公家)로 들어간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고 추정된다.
인봉리 90번지의 구 토지대장을 보면, 이 향청은 1913년 3월 31일의 사정(査定)에서 이미 소유자가 ‘국(國)’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토지조사사업 당시 관유(官有)가 기정사실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장(錦粧)이란 향청에서 기록 보관해 온 향안(鄕案)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이것과 관련하여, 1942년 상주를 답사한 농촌사회학자 스즈키 에이타로(鈴木榮太郞)가 상주 향청에 대한 조사 내용을 기록하였다.
“상주의 향청은 군청 밖에 건물을 갖고 있어다. 신제도(新制度)로 되었을 때, 향청의 건물은 일체 관에 거둬들여졌다. 군내의 유림은 향청은 본래 군내의 유림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의 재판소에 진정(陳情)을 냈지만, 결국 반환을 받는 데 이르지 못했다.”
따라서 향청이 공가(公家)로 넘어간 일은『상산지』의 내용과도 흡사하다. 중요한 것은 일본군의 주둔과 함께 사족(士族)의 중요한 거점이 관에 접수되었다는 사실과 이에 사족들이 분기(奮起)했고, 이것이 의병운동과도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옛 관아는 <표-14>와 같이 다른 용도로 쓰이거나 헐렸다.
<표-14> 관공서의 전환
客館(商山館) | 1907년, 상주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1910년에 殿牌를 도청에 봉납하였다. |
聽猶堂 | 1901년 화재가 났다. 그 자리에 경찰서. |
製錦堂 | 청유당 화재 후에는 군수가 여기에서 집무. 그 후는 수비대가 주재했다. |
戶長廳 | 창고, 검사실, 법정을 증축하여 재판소가 되었다. |
作廳(吏房廳) | 1909년~1925년까지 군청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
刑吏廳 | 1920년까지 경찰서로 사용되었다. |
敎房廳 | 1926년 우편국이 세워졌다. |
鎭營 | 1925년, 옛터에 군청을 세웠다. |
制勝堂 | 진영 폐지 후 헐었다 |
太平樓 | 1920년 향교의 東山으로 이축하였다. |
南門(弘治舊樓) | 1924년,상주면소 구내로 이전되어 회의실이 되었다 |
二香亭 | 시가지 정리 때, 군내 유지가 사서 紫陽山아래로 移築하였다. |
武學堂 | 한일병합 후 새로이 養老所로 삼았다 |
迎賓館 | 한일병합 후 헐려 機業所가 되었다. |
일반적으로 새로운 관공서가 설치되면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상례이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전에 쓰고 있던 관아(官衙)에 들어가서 간판만 바꾸는 형태를 취했다.
물론 건축비용 마련도 쉽지 않았겠지만, 그것보다는 조선의 관아를 사용함으로 해서 국민들이 이질감(異質感)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계산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주 관아의 배산(背山)인 왕산(王山)도 일제의 침략 의도에 따라 훼손되었다. 먼저 ‘왕산(王山)’을 ‘앙산(央山)’으로 표기를 바꾸었고, 그 위에는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상주신사(尙州神社)’를 세웠다. 그리고 나라에 일이 벌어지면 참배(參拜)를 강요했다.
‘왕산(王山)’을 ‘앙산(央山)’으로 바꾼 것에는 숨은 계략이 들어가 있다. 왕산 남쪽에는 큰 광장을 가진 경찰서가, 서쪽에는 법원이 만들어져서, 왕산의 주변에 신(神, 신사)-법(法, 법원)-폭력(暴力, 경찰)이 집결되어 시가지의 핵심을 ‘왕(王)’에서 ‘앙(央)’으로 변화를 연출시킨 것이다. 그리고 왕산 경내에는 벚나무를 심어서 1920년대에는 ‘조망(眺望)이 좋은 상주시민 유일의 오락원(娛樂園)으로도 평가되었다.
관아지에 있던 이향정(二香亭)도 일제가 철거하려 하자, 1914년 군수 심완진과 향토 유지 10여 분이 ‘내 것을 일제한테 사서’ 자양산 밑 약천(지금의 북천전적지)로 옮겼다.
2) ‘시가지(市街地)’로서의 읍내(邑內)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서서히 읍내(邑內)는 ‘시가지(市街地)’로 변화해 갔다. 그리고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1920년대 이후 경공업과 상업이 지역산업으로 부각되는 변화가 있었다.
이 무렵에 산업시설로는 상주양곡창고, 상주주조주식회사 등이 있었고, 오까사끼 백화점과 가가여관도 설립되었다.
상주양곡창고는 1931년 5월 31일 남성동에 세웠는데 1931년도 연산 22만석인데 이중 10만석은 이출되었다. 많은 쌀을 이출하기 위해서는 보관 창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상주주조주식회사는 상주읍성 철거 후 형성된 북동쪽 도로에 있었다. 1930년에 설립하였고 당시 사장은 이나가끼도꾸사부로우(稻桓德三郞)로 기록되어 있다. 1년 생산량은 탁주 300석, 소주 1000석, 약주 200석이었다. 약주는 ‘상로(尙露)’, 소주는 ‘상선(尙仙)’이라는 상표를 사용하였는데 조선 전체에서 우량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까사끼백화점은 태평루가 이건되고 들어 선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략 1938년 경이다. 일본인 오까자끼미쓰요시(岡崎光儀)가 양품잡화를 취급한 상점이다. 이 건물은 읍성 철거와 조선시기 관아가 해체되면서 들어 선 상업건물의 하나이다.
가가여관은 읍성 철거 후 동서문, 남북문이 교차하는 도로가 나면서 들어 선 북문쪽 동편 여관이다. 일본인 오오기시히로시(大岸廣)이 1908년 상주에 여관 겸 요리업을 개업하고 1909년 9월에 건물을 신축하고 1928년 6월에 2층의 신관으로 증축하였다. 금융기관은 조선식산은행 상주지점, 상주금융조합 등이 설립되었다.
본점 | 회사명칭 | 위치 | 창립년월 | 영업종류 | 공칭자본금 | 사장 |
尙州 | 讚岐酒造株式會社 | 尙州邑 西町里 | 1918년 8월 | 주류 제조업 | 78,000원 | 가모까또우지(蒲生嘉藤治) |
尙州酒造株式會社 | “ 仁鳳里 | 1928년 4월 | “ | 120,000원 | 이나가끼도꾸사부로우(稻垣德三郞) | |
梁村合名酒造會社 | “ 梁村里 | 1929년 10월 | “ | 23,000원 | 朴淳 | |
尙州運送株式會社 | “ 城東洞 | 1933년 1월 | 운송업 | 10,000원 | 와다야스이찌(和田泰一) | |
尙州麯子株式會社 | “ 西町里 | 1934년 6월 | 주류 제조업 | 200,000원 | 朴寅洙 | |
合名會社尙善酒造場 | “ 西町里 | 1934년 9월 | “ | 24,000원 | 崔尙善 | |
尙州藥酒株式會社 | “ 南町里 | 1935년 5월 | “ | 120,000원 | 朴淳 | |
咸昌酒造株式會社 | 咸昌面 舊鄕里 | 1934년10월 | “ | 50,000원 | 金元漢 | |
咸昌物産株式會社 | “ ” | 1935년 10월 | 운송업 | 50,000원 | 고우즈도모스께(廣津友助) | |
京城 | 殖産銀行 尙州支店 | “ 西町里 | 1918년 10월 | 은행업 | 30,000,000원 | 구라시나데쓰오(倉品銕夫) |
大邱 | 大興電氣株式會社 尙州支店 | 尙州邑 伏龍里 | 1924년 6월 | 전기업 | 500,000,000원 | 하따야마소우지(畑山莊司) |
門司 | 山下黑鉛株式會社 | 利安面 雅川里 | 1920년 3월 | 광물가공판매 | 450,000원 | 소우사부로우(宗三郞) |
東京 | 中外鑛業株式會社 | 洛東面 城東里 | 1932년 5월 | 금은동철 | 7,800,000원 | 하라야쓰사부로우(原安三郞) |
<표-15> 상주에 있던 회사(會社) 1936년 현재
이 <표-15>를 보면, 자본금 상위 4사(社)가 대구·경성·도꾜·모지(門司)에 본점을 둔 회사였고, 상주의 지역자본은 모두 상주읍내와 함창에서 설립되었다. 특히 1930년대가 되면서 조선인 소자본가가 형성되었는데, 지주(地主)이기도 했던 그들은 모두 농업의 잉여생산물을 이용한 주조업(酒造業)등의 경영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박인수(朴寅洙)와 최상선(崔尙善) 등은 읍내에 생활거점을 삼고 있던 이족계(吏族系) 가문(家門) 출신이다.
당시에는 본정통(本町通)과 태평정통(太平町通)의 교차점 이 상주 시가지의 중심부였다. 1920년대부터 서서히 읍내에 전기가 들어왔고, ‘일광당시계점(日光堂時計店)’, ‘금하당시계점(金河堂時計店)’, ‘금하전기상점(金河電氣商店)’이 들어섰다.
1936년의 상황을 보면, 읍내에서는 서정리·인봉리를 중심으로 하여 서적(書籍)·문구점(文具店)·약방(藥房)·철물점(鐵物店)·간장가게·여관(旅館)·운송점(運送店)·인쇄소(印刷所)·의원(醫院)·철공소(鐵工所)·석유(石油)가게·미곡상(米穀商)·요리점(料理店)·구두방·극장(劇場) 등이 들어섰다.
1930년의 직업통계를 보면, 상업인구가 상주면 12.0%, 기타 면(面) 2.6%였으며, 농업인구는 상주면 70.7%, 기타 지역 90.2%였다.
1924년 10월에 김천-상주 간 경북선(慶北線)이 개통되었다.
상주군내에는 5개의 역(驛)이 있었는데, 상주역과 다른 4개 역의 인원 및 화물이용상황은 <표-16>와 같다.
경북선철도 | 인 원 | 화 물 | ||
탄 사람(인) | 내린 사람(인) | 발송(t) | 도착(t) | |
상주 | 88,625 | 74,224 | 15,685 | 16,346 |
그 이외의 4역 합계 | 70,768 | 67,058 | 16,202 | 6,580 |
<표-16> 경북선 철도의 이용현황 1936년 현재
또한 상주군내에는 5개 우편국이 있었는데, 우편물의 경우는 상주우편국이 다른 4개 우편국의 합계보다도 1.3배 정도의 우편물을 취급하였고, 전화의 발착수는 8.1배, 전보는 2.8배의 양을 취급하여, 인구비율을 고려하더라도 읍내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통신 | 통상 | 소포 | 전화 | 전보 | ||||
인수 | 발송 | 인수 | 발송 | 발 | 착 | 발 | 착 | |
상주우편국 | 860,661 | 813,882 | 3,656 | 8,548 | 29,930 | 28,287 | 16,021 | 14,358 |
함창우편국 | 250,496 | 355,743 | 1,020 | 3,121 | 4,743 | 467 | 3,230 | 3,480 |
그 외 3국 | 205,989 | 458,264 | 728 | 3,571 | 1,851 | 88 | 2,063 | 2,188 |
<표-17> 지역별 우편 이용 상황 1936년 현재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주라는 지역사회를 지배했던 구조가 변화하였고, 읍내도 시가지로 변화하는 일단의 과정을 알 수 있었다.
조선왕조는 ‘관료제’를 포함한 독자적인 지방지배체재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그 속을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와서는 기존의 시스템을 완전히 밀어내듯이 쇄신하지 않고, 서서히 개편하였다. 즉, 조선왕조가 구축해 놓은 중앙집권적인 지방지배체재를 계승하면서도 식민 지배의 편의에 따라 지방의 말단까지 행정기구를 갖추어 나간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은 특히 보호국기간이었던 1905년~1910년과 무단통치기간이었던 1910년~1919년 사이에 지역사회에 들어온 폭력장치로서 큰 존재감을 나타내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인들이 지역사회에 들어왔다. 비록 숫자로는 적지만, 이들 일본인의 존재는 지역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고, 따라서 일본인을 빼고 지역사회의 변용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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