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속리산권 구곡동천 문화의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
-‘문경’과 ‘상주’ 일대를 중심으로-
정우락(경북대 교수)
- 차 례 -
1. 인문학과 구곡동천 문화
2. 문경․상주 지역 구곡동천 문화의 개관
3. 문경․상주 지역 구곡동천 문화의 가치
4. 문경․상주 지역 구곡동천 문화의 의미
5. 구곡동천 문화, 그 미래를 위한 전망
1. 인문학과 구곡동천 문화
오늘날 우리는 지극히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매우 위험하고 지표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수많은 편리성, 예컨대 컴퓨터․네비게이션․스마트폰 등 문명의 이기(利器)를 사용하며 전혀 불편함 없이 살고 있지만, 사회적 폭력이라든가 자아상실 등 각종의 병리현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압도하고 지배하는 데서 발생한 사태이다.
탈근대 담론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이 담론은 20세기 중반 이후 본격화 되었던 근대화 내지 산업화가 전통주의적 삶의 터전을 잃게 하였고, 이에 따라 인간성이 상실되었으며 나아가 인간이 소외되었다는 문제제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근대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 현실을 냉정히 파악하고, 이에 입각하여 바람직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 상황과 맥락을 같이한다.
우리는 여기서 인문학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사철(文史哲)을 기반으로 하는 이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전통사회에서는 교육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산업사회가 정보사회로 바뀜에 따라 인문학은 점차 소외되었다. 이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한 일련의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내세우며 사회적 문제로 환기시켜 나가기도 했다. 인문학은 그 가치적 측면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우리 자신의 가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물질문명에 대한 가치있는 용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이것은 바깥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물질문명에 대한 용도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에 대한 쓰임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 몸의 척추 역할을 하는 배의 용골(龍骨)이 수면 속에 깊게 묻혀 있지만, 이것으로 배의 무게 중심을 잡아 갑판 위에 많은 물건을 싣게 하고, 또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항해할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곡동천(九曲洞天) 문화는 ‘구곡’과 ‘동천’에 대한 문화를 종합적으로 말한 것이다. ‘구곡’은 특정한 주체 인물이 자신의 유학적 지향에 따라 아홉 굽이 계곡에 이름을 설정하고 구곡시를 통해 자신의 정신세계를 투영한 장소이며, ‘동천’은 주체 인물이 특정한 장소에 정자를 짓기도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의 개별 경관을 지칭한 것이다. 우리의 전통명승은 이들 구곡과 동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선비들은 품격 있는 문화를 구성할 수 있었다. 즉 명승에 이름을 부여하는가 하면,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간이 상호 소통하게 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기도 하고, 그들의 지향세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했으며, 마침내 자연과 인간이 합일되는 지점을 찾아내 고도화(高度化)된 심상을 형상하기도 했다. 따라서 구곡동천 문화는 동아시아적 유교문화전통이 자연공간과 인문환경을 융합하면서 이룩해 낸 독특한 전통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속리산권에 해당하는 문경과 상주 일대를 중심으로 구곡동천 문화의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다루기 위한 것이다. 고지도 가운데 1682년(숙종 8)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여비고(東輿備攷)? 「경상도좌우주군총도(慶尙道左右州郡摠圖)」를 보면, 백두산에서 뻗어 내리는 백두대간의 흐름이 뚜렷하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아래로 내려오다가 비백산(鼻白山)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백적산(白赤山)으로 흐르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 태백산(太白山) 쪽으로 뻗어 내려온다.
태백산까지 내려온 산맥은 두 갈래로 나뉜다. 그 품 안이 바로 영남지역이다. 한 줄기는 곧장 아래로 뻗어 내리고, 다른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 속리산에서 방향을 아래로 바꾼다. 태백산에서 아래쪽으로 바로 뻗어 내리는 줄기는 영양의 일월산(日月山), 진보의 용두산(龍頭山), 경주와 언양의 금오산(金鰲山), 양산의 원적산(圓寂山)을 이룬다. 서쪽으로 흐르는 산줄기는 봉화의 문수산(文殊山)과 청량산(淸凉山), 풍기의 소백산(小白山)과 죽령(竹嶺), 문경의 주흘산(主屹山)과 조령(鳥嶺), 함창의 구봉산(九峯山)과 속리산(俗離山)으로 흐르다 방향을 아래로 바꾸어 지례의 황악산(黃岳山), 거창의 덕유산(德裕山), 안음의 지우산(智雨山)으로 내려오다가, 함양과 하동의 지리산(智異山)에서 우뚝 멈추어 선다.
이 가운데 속리산은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 지점에 놓인다. 이 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괴산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 있는 산인데,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경지역 역시 이 산의 문화권 속에 포함된다. ?세종실록지리지? 「보은현」조에 속리산을 ‘명산’으로 특기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보은현」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고 있다.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일컫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마루에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 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達川)이 되어 김천(金遷)으로 들어 간다.
위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속리산이 신라시대부터 ‘속리악’이라 일컬어지며 ‘중사’를 모셨던 사정을 알 수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石峯)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玉芙蓉)같이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산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속리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산임을 알 수 있다. 이 산의 정상에는 문장대가 있고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셋인데 이것이 아름다운 동천을 이루며 금강과 낙동강, 그리고 달천으로 흘러든다. 동천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전통명승이 이루어지고, 선비들이 깃들면서 구곡동천 문화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속리산권 가운데 영남의 대표적인 지역이 문경과 상주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경상도와 충청도가 맞물려 있는 곳이기 때문에 기호학과 영남학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낙동강 연안지역의 학문을 의미하는 이른바 강안학(江岸學)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다루고 있는 바, 이 지역의 구곡동천 문화가 인문학적으로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글에서는 구곡동천 문화의 현황을 먼저 살피고, 이어 이 문화가 가진 가치와 의미를 따지고, 나아가 구곡동천 문화가 지닌 미래 전망을 제시하기로 한다.
2. 문경․상주 지역 구곡동천 문화의 개관
인간은 누구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산다. 이 때문에 인간과 시간과 공간, 즉 ‘삼간(三間)’은 상호 밀접한 관련성 속에 성장하고 변화해 왔다. 조선시대로 한정해 보면, 인간은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에 따라 사상을 달리한다. 즉 시간은 변화하는 것이지만 인간과 공간에 의해 다르게 인식되고, 공간은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과 시간에 의해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은 시간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공간에 대해서는 때로 순응하고 때로 극복하며 인간은 그들의 생활을 영위해간다.
이 글은 문경과 상주지역으로 공간을 고정시키고, 전통시대, 특히 조선시대라는 시간과 선비라는 인간이 여기서 어떤 문화를 만들어 갔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인간이 선비에 한정되지 않고, 시간 역시 조선시대로 제한되지 않으므로, 그 가치와 의미는 인문학적 측면에서 인류의 보편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대로, 오늘날 우리가 근대의 다양한 병리현상을 겪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방면의 연구를 통해 어떤 유의미한 미래적 요소를 구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논의는 ‘과거가 미래’라는 역설 위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시대라는 시간, 문경과 상주라는 공간, 이 속에서 선비라는 인간은 어떤 인문학적 자료를 남겼던가. 구곡과 동천이라는 공간에 한정을 시켜 보더라도, 자료는 말로 된 것도 있고 글로 된 것도 있다. 글로 된 것은 다시 한글로 된 것도 있고 한자로 된 것도 있다. 이것이 구비문학, 국문문학, 한문문학으로 나누어 연구되어 온 것은 오늘날과 같은 분과학문 체계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본 논의에서는 주로 한문으로 되어 있는 자료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이것이 자료의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구곡동천명 | 작자 | 작품명 | 비고 |
仙遊九曲洞天 (東仙遊洞, 內仙遊洞) | 南漢朝(1744-1809) | 仙遊七曲, 仙遊洞用朱子雲谷第一絶韻, 入仙遊洞志懷 |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일대, 기호학자 김창협 등은 선유동을 외선유동이라함 |
丁泰鎭(1876-1956) | 仙遊九曲, 內仙遊洞 | 남한조의 7곡에다 1곡 옥하대와 3곡 활청대를 추가함, 2곡에서 9곡까지 바위에 구곡명이 각자되어 있음 | |
鄭經世(1563-1633) | 題東仙遊洞盤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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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協(1651-1708) | 自松面向外仙游洞, 外仙游洞, 華陽諸勝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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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翕(1653-1722) | 外仙游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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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瑗(1700-1740) | 外僊遊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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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宗魯(1738-1816) | 仙遊洞, 仙遊洞卽景次雲谷第二絶韻․又疊, 仙遊洞次宗伯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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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萬敷(1664-1732) | 仙遊洞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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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秉璿(1836-1905) | 遊華陽諸名勝記, 鶴泉亭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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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山寺洞天 (白雲洞) | 鄭象觀(1776-1820) | 蓬壺第一史 |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일대 |
金정(1670-1737) | 入陽山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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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協(1651-1708) | 華陽諸勝記 | 陽山寺(鳳巖寺), 白雲臺, 夜遊巖 포함, 백운대와 야유암은 각자가 있음 | |
宋秉璿(1836-1905) | 遊華陽諸名勝記 | 陽山寺(鳳巖寺), 白雲臺, 夜遊巖 포함 | |
權橃(1478-1548) | 戊寅日記 | 陽山寺 | |
趙又新(1583-?) | 題陽山寺 | 陽山寺 | |
趙根(1631-1690) | 桐溪漫錄 | 陽山寺 | |
鄭澔(1648-1736) | 遊陽山寺示同行諸君子 | 陽山寺 | |
鄭宗魯(1738-1816) | 陽山洞口口占次朱子雲谷雜詠第一絶韻, 陽山寺 | 陽山寺 | |
南漢朝(1744-1809) | 陽山寺 | 陽山寺 | |
洪翰周(1789-1868) | 陽山寺二十韻, 陽山寺 | 陽山寺 | |
申聖夏(1665-1736) | 登陽山寺鐘樓 | 陽山寺 | |
鄭希良(1469-?) | 詩題曦陽山白臺 | 白雲臺 | |
金時觀(1677-1740) | 聞慶白雲臺 | 白雲臺 | |
鄭宗魯(1738-1816) | 白雲臺 | 白雲臺 | |
南漢朝(1744-1809) | 白雲臺 | 白雲臺 | |
鄭澔(1648-1736) | 夜遊巖 | 夜遊巖 | |
金정(1670-1737) | 題夜遊巖 | 夜遊巖 | |
沈錥(1685-1753) | 夜遊巖 | 夜遊巖 | |
鄭宗魯(1738-1816) | 夜遊巖 | 夜遊巖 | |
南漢朝(1744-1809) | 夜遊巖 | 夜遊巖 | |
華陰洞天(疎野洞) | 李萬敷(1664-1732) | 華陰洞記 |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 일대 |
鳥嶺龍潭瀑布 | 尹祥(1373-1455) | 龍潭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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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居正(1420-1488) | 龍潭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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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變甲(1380-1434) |
|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용추 시 | |
金宗直(1431-1492) | 龍潭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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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貴達(1438-1504) | 龍潭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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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五福(1467-1498) | 聞慶龍潭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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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彦忠(1473-1508) | 過鳥嶺龍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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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荇(1478-1534) | 龍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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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用厚(1577-1652) | 過鳥嶺龍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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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象觀(1776-1820) | 鳥嶺龍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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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門九曲 | 蔡瀗(1715-1795) | 石門亭九曲棹歌, 石門九曲次武夷櫂歌韻, 石門亭歌, 石門亭二十景 | 문경시 산양면-산북면 일대, 「石門亭九曲棹歌」와 「石門亭歌」는 한글로 된 가사작품임 |
權相一(1679-1760) | 尊道書窩記 | 석문구곡 제1곡이 弄淸臺이고, 이 대의 처음 이름은 尊道書窩 | |
蔡鴻鐸(?-?) | 舟岩亭記 | 석문구곡 제2곡 위에 위치 | |
鄭象觀(1776-1820) | 友巖亭記 | 석문구곡 제3곡 위에 위치 | |
山陽九曲 | 蔡瀗(1715-1795) | 山陽九曲次武夷櫂歌韻 | 문경시 산양면-산북면 일대 |
花枝九曲(身北九曲) | 權燮(1671-1759) | 身北九曲次武夷櫂歌韻, 花枝莊記, 花枝九曲記 | 문경읍 일대 |
淸臺九曲 | 權相一(1679-1760) | 淸臺九曲詩 |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예천군 용궁면 일대 |
雙龍九曲洞天 | 閔禹植(1885-1973) | 雙龍九曲, 書雙龍九曲詩後, 四友亭記 |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
金昌協(1651-1708) | 華陽諸勝記․龍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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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漢朝(1744-1809) | 雙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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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琢(1526-1605) | 題雙龍寺洞游錄 | 雙龍寺 | |
金昌協(1651-1708) | 華陽諸勝記 | 甁泉 | |
金顯益(1678-1717) | 入甁泉宋道能權敬仲定性來會 | 甁泉 | |
宋文欽(1710-1752) | 甁泉記略 | 甁泉 | |
鄭象觀(1776-1820) | 蓬壺第一史 | 甁泉 | |
李肯翊(1736-1806) | 山川形勝․甁泉 | 甁泉 | |
宋秉璿(1836-1905) | 遊華陽諸名勝記 | 甁泉 | |
龍遊․牛腹洞天 | 李萬敷(1664-1732) | 龍遊洞記 |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장암리, 상오리, 龍遊洞天 |
李敏求(1589-1670) | 下龍游洞 | 龍遊洞天 | |
金昌協(1651-1708) | 龍遊洞 | 龍遊洞天 | |
鄭宗魯(1738-1816) | 龍遊洞石形之… | 龍遊洞天 | |
南漢朝(1744-1809) | 龍遊洞, 龍遊洞盤石 | 龍遊洞天 | |
李瀷(1681-1763) | 龍遊洞 | 龍遊洞天 | |
丁若鏞(1762-1836) | 牛腹洞歌 | 牛腹洞天 | |
李圭景(1788-1854) | 牛腹洞辨證說, 牛腹洞眞假辨證說, 牛腹洞圖記辨證說, | 牛腹洞天 | |
無名氏 | 牛腹洞記 | 牛腹洞天, ?華東勝覽? 소재 | |
金得硏(1555-1637) | 壯岩洞記 | 壯岩洞 | |
淵嶽九曲 | 康應哲(1562-1635) | 淵嶽九曲記 | 상주시 청리면 지천동 일대 |
愚山洞天 | 鄭經世(1563-1633) | 愚谷雜詠二十絶, 愚巖說 |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
백두대간 속리산권 구곡동천은 문경과 상주지역을 중심으로 볼 때, 선유구곡[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서 양산사 동천[문경시 가은읍 봉암사]에 이르는 구간, 용추[문경시 농암면]에서 용유동[문경시 농암면]을 거쳐 우복동[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이르는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범위를 더욱 넓히면 상주시 청리면과 외서면의 연악구곡과 우산동천도 연계시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곡동천에 조선조의 수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승경을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기도 하고, 건축물을 짓거나 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면서 독특한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 갔다.
일찍이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누실명(陋室銘)」에서 ‘산은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이 살면 이름이 나게 되고, 물은 깊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용이 깃들면 신령스럽게 된다.’라고 한 바 있다. 이것은 못난 자연이라도 명사를 만나 교감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명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속리산처럼 경치가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즐비한 자연에 있어서 이겠는가.
우리 국토는 거의 모든 지역이 문화의 생성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에서 조사한 문경과 상주 일대의 구곡동천 자료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은 모두 전통명승이라 할 만한 곳인 바, 계류를 따라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전통시대 우리의 선비들은 그들의 답답한 심정을 해소하기도 하고, 사물 속에서 이치를 발견하고 그것과 합일되는 기쁨을 누리고자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명승에서 그들의 이상향을 찾거나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며 새로운 문화공간을 창조하기도 했다.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문경과 상주의 속리산 문화권에는 중요한 구곡과 동천이 공존한다. 동천 속에는 봉(峰)․대(臺)․담(潭)․폭(瀑) 등이 있어 선비들의 유상 대상이 되었고, 때로는 구곡이 설정되어 성리학적 사유가 거기에 투사되기도 했다. 이들 구곡은 문경과 상주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바, 이것은 그 산수의 수려함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대한 강한 자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 출신인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역시 구곡문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무이지후(武夷志後)」를 쓴 적이 있다. 그 일부는 이렇다.
내가 주회옹(朱晦翁)이 쓴 「무이정사기(武夷精舍記)」와 「도가십수(棹歌十首)」를 읽어 보고는 일찍이 상상하면서 그려 보지 않은 적이 없으며, 직접 그곳에 가서 지팡이를 짚고 거닐어 볼 길이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다가 지금 마침 이 고을을 맡아 다스리면서 서행보(徐行甫)에게서 ?무이지(武夷志)?를 얻어 공무를 보는 여가에 여러 차례 읽어 보았다. 그러자 서른여섯 개의 산봉우리와 아홉 굽이의 시냇물이 좌우로 굽이쳐 흐르는 기이한 형세와 볼만한 장관을 직접 가서 눈으로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이에 드디어 한 본을 등사하였다. 그러고는 또 「구곡총도(九曲摠圖)」 한 폭을 얻어 화공(畫工)을 불러 모사(模寫)하게 해 책의 앞머리에 붙였으며, 이어 퇴도(退陶) 선생이 회옹(晦翁)의 도가(棹歌)에 화답한 절구(絶句) 열 수를 책 끝에다가 붙였다. 뒷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려서 고요한 가운데 이를 읊조리고 노래한다면 어찌 더욱더 맛과 정취가 있지 않겠는가.
이 글은 정경세가 1607년(선조 40)에 대구부사로 있으면서 쓴 것이다. 당시 서사원(徐思遠, 1550-1615)에게서 ?무이지?를 얻어 이것을 등사하고, 다시 화공에게 「구곡총도」를 모사하게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무이산을 중심으로 한 구곡문화에 대한 관심을 알게 된다. 나아가 그는 고향 상주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이를 체득하고자 했다. 문경과 상주 일대에서 경영된 구곡은 모두 이러한 관심이 내적으로 작동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에 의거한 작품 창작은 물론이고, 바위에 글자를 새기고, 건물을 지어 일련의 구곡동천 문화를 만들어 갔던 이 지역 선비들의 활동은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주목받아 마땅하다.
3. 문경․상주 지역 구곡동천 문화의 가치
구곡을 경영하거나 동천에 집을 짓고 산수지락을 누린 선비들은 누구나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자신의 도학적 이상세계를 추구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구곡동천이라는 용어가 구곡을 보다 넓은 맥락 속에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 성립된 것이라면, 여기에는 구곡을 설정하고, 한문이나 한글로 구곡시가나 가사를 창작하고, 정사 등 건축물을 세우고, 건축물에 따른 상량문이나 기문 혹은 다양한 잡영(雜詠) 등 문학작품을 짓고, 구곡도(九曲圖)를 그려 기념하고, 구곡 관련 지지(地誌)를 엮는 등 각종의 문화를 포괄한다. 문화가 자연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존재 양식이며, 통합적 인식체계 속에서 성립된 것이라는 측면을 염두에 두면서, 문경과 상주 지역 구곡동천 문화의 가치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구곡문화의 정수와 변형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속리산권은 낙동강이 처음 시작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상락(上洛)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 낙동강으로,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낙동강의 근원에 대하여 “그 근원은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 북쪽 초점에서 나오고, 하나는 순흥 소백산에서 나와 물이 합쳐져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라고 적고 있다. 문경의 초점 역시 낙동강의 원두로 인식되어 왔던 것을 인식할 때, 원두를 찾아 설정되는 구곡문화가 이 지역에서 강한 자장을 형성하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문경과 상주지역의 구곡원림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시 군 | 구곡명 | 구곡 명칭 | 구곡시가 | 설정자, 경영자 | 소재지 |
문경시 | 仙遊七曲 | 1.靈槎石-2.洗心臺-3.觀瀾潭-4.濯淸臺-5.詠歸巖-6.鸞笙瀨-7.玉舃臺 | - | 南漢祖 (1744-1809) | 가은면 |
仙遊七曲 | 1.七友臺-2.網花潭-3.白石灘-4.臥龍潭-5.洪流川-6.月波臺-7.七里溪 | - | 미 상 | 가은면 | |
仙遊九曲 | 1.玉霞臺-2.靈槎石-3.活淸潭-4.洗心臺-5.觀瀾潭-6.濯淸臺-7.詠歸巖-8.鸞笙瀨-9.玉舃臺 | 仙遊九曲 | 丁泰鎭 (1876-1956) | 가은면 | |
雙龍九曲 | 1.入門-2.志道-3.于淵-4.戾天臺-5.放化洞-6.安道石-7.樂耕臺-8.廣明巖-9.紅流洞 | 雙龍九曲 | 閔禹植 (1885-1973) | 농암면 | |
花枝九曲 | 1.馬浦-2.聲校-3.廣水院-4.古要城-5.花枝洞-6.山門溪-7.葛坪-8.觀音院-9.大院 | 身北九曲次武夷櫂歌韻 | 權 燮 (1671-1759) | 문경읍 | |
淸臺九曲 | 1.愚巖-2.碧亭-3.竹林-4.佳巖-5.淸臺-6.溝棧-7.觀巖-8.筏巖-9.穌湖 | 淸臺九曲詩 | 權相一 (1679-1760) | 산양면-영순면 | |
石門九曲 | 1.弄淸臺-2.舟巖-3.友巖臺-4.壁立岩-5.九龍坂-6.潘亭-7.廣灘-8.鵝川-9.石門亭 | 石門亭九曲棹歌, 石門九曲次武夷棹歌韻 | 蔡 瀗 (1715-1795) | 산양면-산북면 | |
山陽九曲 | 1.滄洲-2.尊道峯-3.蒼屛-4.兄弟巖-5.巖臺-6.桑洲-7.近品山-8.九龍坂-9.潘亭 | 山陽九曲次武夷棹歌韻 | 蔡 瀗 (1715-1795) | 산양면-산북면 | |
상주시 | 淵嶽九曲 | 1.濯纓潭-2.使君坮-3.楓岩-4.詠歸亭-5.東岩-6.秋遊岩-7.南岩-8.鱉岩-9.龍湫 | - | 康應哲 (1562-1635) | 청리면 |
지금까지 알려진 문경의 구곡은 칠곡을 포함해서 모두 여덟 곳이다. 안동지역 역시 구곡이 여덟 곳으로 설정된 것을 감안할 때 이 지역이 안동 못지 않게 왕성한 구곡문화가 향유되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문경의 구곡 가운데 쌍룡구곡은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에서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에 걸쳐 있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문경이 상주에 비해 수적인 면에서 월등하다. 그리고 선유칠곡 두 편이 있어 하나는 남한조(南漢朝, 1744-1809)가 경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칠우정(七愚亭)을 지은 사람들이 하나씩 지정한 것으로 근세의 것이다.
문경과 상주 지역의 구곡 가운데 선유구곡이 보존의 상태도 양호하고 각 곡의 지점에 대한 고증도 명확하며 2곡에서 9곡까지 각자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선유구곡은 이 지역의 구곡문화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유동은 내외로 나누어져 있는데, 김창협이나 송병선 등 기호의 학자들은 문경의 선유동을 외선유동이라 했고, 정종로나 남한조 등 영남의 학자들은 이곳을 내선유동이라 했다. 이로 보면, 기호와 영남 지역의 학자들은 자기네 쪽을 내선유동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의 다음 시는 이러한 측면에서 새롭게 읽힌다.
天作靈仙窟 하늘이 만든 영선굴,
分置內外谷 내외의 골짜기에 나누어져 있네.
萬物皆有對 만물은 모두 상대가 있나니,
名區宜不獨 명승도 마땅히 홀로만은 아니라네.
정종로의 「내외선유동(內外仙遊洞)」이라는 시다. 남한조가 선유동에 은거하면서 1794년(정조 18) 4월에 정종로를 초청하여 양산(陽山)으로부터, 내외선유동, 화양동의 파곶[巴串]과 용유동(龍遊洞) 등을 유람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정종로는 위의 시를 지어 선유동이 내외로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명승은 홀로 있지만은 않다고 했다. 남한조가 이 내선유동에서 선유칠곡(仙遊七曲)을 지정하였는데, 훗날 정태진이 여기에 두 곡, 즉 제1곡 옥하대(玉霞臺)와 제3곡 활청담(活淸潭)을 추가하여 구곡을 만들었다.
문경과 상주지역의 구곡은 구곡문화의 변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여 흥미롭다. 그 대표적인 것이 권상일(權相一, 1679-1760)의 청대구곡과 민우식(閔禹植, 1885-1973)의 쌍룡구곡이다. 청대구곡은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 예천군 용궁면에 걸쳐 있다. 그러나 이 구곡은 상류에 제1곡을 하류에 제9곡을 설정하고 있어, 주희(朱熹, 1130-1200)의 ?무이도가(武夷櫂歌)?와 이것을 본받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구곡이 하류에 제1곡을 상류에 제9곡을 설정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되어 있다. 권상일은 자신의 은거지인 금천 가에 농청대(弄淸臺)를 지극히 사랑하여 자주 찾았는데, 이곳을 5곡으로 삼아 상하 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였던 것이다.
민우식이 경영한 쌍룡구곡은 북쪽의 비치재와 남쪽의 도장산 사이의 협곡으로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에서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에 걸쳐 있다. 이 역시 다른 구곡과 구별되는 특이한 점이 있다. 두 시내에 아홉 곡이 나누어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용유동에서 내려오는 쌍룡천과 내서리 다락골에서 내려오는 내서천이 우연(于淵)에서 모여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곡에서 제6곡까지는 쌍룡천에, 제7곡에서 제9곡까지는 내서천에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 역시 구곡문화에 있어 중요한 변형으로 특기할 만하다.
둘째, 구곡동천 속에서 펼친 다양한 선비문화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전통시대의 자연은 일정한 방식에 의해 문화공간화 된다. 대체로 사물에 대한 명명(命名)을 통한 자연 공간에 유가적 이념 부여하기, 누정 등 인공 공간을 중심으로 집경(集景) 구성하기,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와유(臥遊)와 성찰(省察)의 자료 만들기, 선현에 대한 추모와 놀이문화 계승하기, 일회적인 사실을 다양한 방법으로 기념하기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몇 가지만 들어본다.
명명(命名)을 통해 자연 공간에 유가적 이념을 부여하는 것은 구곡문화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곡을 훨씬 벗어나 존재한다. 우산동천에 은거하였던 상주의 정경세는 「우암설(愚巖說)」을 써서, “내가 우복산(愚伏山)의 서쪽 기슭에 터를 잡아서 살게 되었는데, 그 주위에 있는 정자와 누대와 웅덩이와 골짜기로부터 바윗돌에 이르기까지 기이하고 빼어난 것은 어느 하나 이름이 없는 것이 없었다. 다만 집의 동북쪽 모퉁이에 커다란 돌 하나가 깊은 물가에 임하여 있으면서 그 높이가 너댓 길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이름이 없었다.”라고 하면서 그 못생긴 바위를 ‘우암’이라 한다고 했다.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와유(臥遊)와 성찰(省察)의 자료 만들기는 기행문 작성을 통해 주로 이루어졌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유대야산기(遊大冶山記)」를 지어 “대야산은 선유동의 주산이며, 화양동의 조종(祖宗)이 되는 산으로, 화양동에서 15리 정도로 가깝다.”며 “인간 세상에서 보면 이 화양동도 선경이라 할 수 있겠지만, 대야산 비로봉과 비교해 보면 또한 이 화양동은 진세(塵世)의 형상이다.”라고 하면서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있는 대야산을 더없는 선경으로 칭송하였다. 이 밖에도 김창협의 「화양제승기」, 송병선의 「무인일기」 등 허다한 작품에 문경과 상주 일대의 전통명승이 소개되고 있는 바, 이들은 이로써 다른 날 와유와 성찰의 자료로 삼고자 했다.
선현에 대한 추모와 문화 계승하기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시행되었는데, 시회(詩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상주의 연악산에 개최하였던 연악문회(淵嶽文會)는 그 대표적이다. 연악산은 상주시 청리면에 있으며 상주향교의 안산이다. 여기에 강응철(康應哲, 1562-1635)이 경영한 연악구곡이 있었고, 김언건(金彦健, 1511-1571) 등 6인을 제향하는 연악서원도 있었다. 연악문회는 연악서원에서 이루어졌는데, “연악에서 창수(唱酬)한 것이 1571년(선조 4)부터 1704년(숙종 30)까지 188년간이었다.”라고 하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연원이 오래된 것이었다. 이 때 상산사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범(金範)이 참여하였고, 이후 김충(金冲)․강복성(康復誠)․정호선(丁好善)․김지남(金止南)․손만웅(孫萬雄) 등이 김범의 시에 대하여 차운을 남겼다. 이 문회는 1800년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확인되는 바, 선현에 대한 추모와 시회문화의 계승의지가 그 이면에 있었다.
셋째, 우복동천(牛腹洞天)을 중심으로 복지동천의 이상향이 추구되었다는 점이다. 우복동천은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장암리, 상오리 지역이다. 이곳은 지리산의 청학동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복지동천으로 인식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이상향을 발견하고, 이와 유사한 곳을 찾아 나서기도 했는데, 특히 이규경은 이에 대하여 다양한 관심을 갖고 우복동과 우복동도(牛腹洞圖)에 대한 변증설(辨證說)을 쓴 바 있다. 이밖에도 정약용이 「우복동가」를 지어 관심의 일단을 드러냈으며, 무명씨의 「우복동기」도 있어 이에 대한 당대의 관심을 알게 한다. 이규경이 전한 다음 자료를 보자.
(가) 우리나라에도 도화원(桃花源)과 유사한 곳이 있으니, 그 이름이 우복동이다. 그곳에 가서 살기를 바라는 자들은 간절히 원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우복동에 관한 전설은 예로부터 전해졌다. 그러므로 내가 젊은 시절에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박초수(朴初壽)에게 그 그림을 얻어 보니, 우복동은 삼도(三道)가 합하는 경계에 있었다. 영남의 상주목과 호서의 청주목을 경계로 하며, 또 영남 문경현과 호서 연풍현을 경계로 하기 때문에 삼도봉이 있다.
(나) 문경 청화산 아래 깊이 막히고 험준하고 궁벽한 곳에 저음동(猪音洞)이 있다. 사방의 산이 하늘에 닿아 있다. 다만 앞산의 험준한 곳에 겨우 오솔길 하나가 나 있는데, 경사가 급하고 매우 험하여 한 사람만이 통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와 말은 통행하지 못한다. 중간에 하나의 큰 동천이 있는데, 사방 10여 리나 된다. 토질이 매우 비옥하다. 전답이 1백여 석을 수확할 정도인데 벼와 보리 등 여러 곡식을 심기에 알맞다. 채소, 뽕나무와 대마, 닥나무와 옻나무, 꿩과 닭, 기름과 꿀 등이 모두 풍족하다. 온갖 과실이 열매를 맺는다. 인가는 60-70호가 된다. 그러나 풍속이 순박하고 예스러우며 환곡도 부역도 없다. 다만 화전세를 낼 뿐이다. 관리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사니, 이곳은 산골짜기의 보잘것없는 땅이 아니고, 바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만한 곳이다. 그러니 낙토가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전하는 우복동은 반드시 이 동천일 것이다. 이곳이 비록 진우복동은 아닐지라도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
이규경은 청학동이나 우복동이 현실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이를 변증하는 과정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수집하여 제시하였는데, 위는 그 가운데 일부이다. 당시 우복동도가 그려지는 등 이곳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에서 보듯이 우복동은 상주와 청주, 그리고 문경이 합쳐지는 곳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그곳은 혼란스런 시대에 숨어들어 살만한 곳인 바, 모든 것이 넉넉하고 자유롭다고 했는데, (나)가 그것을 말한 것이다. 청화산 아래 저음동천이 설령 진우복동은 아닐지라도 살만한 곳이라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통 시대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속리산권에 있었다고 인식되어 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문경과 상주지역 일대의 구곡동천 문화 가운데 핵심적인 가치는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구곡문화의 정수와 변형을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 구곡동천 속에서 펼친 다양한 선비문화를 알 수 있다는 점, 우복동천(牛腹洞天)을 중심으로 복지동천의 이상향이 추구되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것은 속리산이 낙동강의 근원이 되기도 하며, 또한 깊은 동천으로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전통시대의 구곡동천 문화가 당대인의 삶에 있어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비로소 확인하게 된다.
4. 문경․상주 지역 구곡동천 문화의 의미
조선시대의 사림파 선비들은 주자 성리학으로 자신의 의식체계를 확립한 도(道) 위주의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도위문(以道爲文)’, ‘문이재도(文以載道)’, ‘재도지기(載道之器)’ 등의 허다한 용어들은 모두 이를 반영한 것이다. 형식면에서 사장위주(詞章爲主)의 부화함을 반대하고 박실(樸實)함을 추구하였으며, 내용면에서는 윤리도덕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도덕주의를 내세웠다. 이 같은 생각에 입각하여 조선의 선비들은 주자의 무이구곡과 「무이도가」를 수용하여 구곡원림을 경영하면서 우리의 산수를 하나의 도체로 파악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했다. 이것이 가지는 인문학적 의미를 몇 가지로 나누어 관찰해 보기로 한다.
첫째, 문경․상주 지역의 구곡동천 문화에는 일상과 이상의 통합지점이 확인된다. 동아시아의 경우 이상세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다. 즉 넓은 현실공간을 벗어나 점점 좁은 공간으로 진입하다가 다시 넓은 공간이 나타나는데, 마지막에 제시되는 넓은 공간이 바로 이상세계다. 이것은 현실과 초월, 차원이 달라진 현실이 계기적으로 결합되면서 그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닌 초월이 내포된 현실로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성호 이익은 9곡을 설명하면서, ‘도의 극처는 일용(日用)과 인륜(人倫)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상마(桑麻)의 일상업(日常業)과 같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었다. 다음 두 시를 보자.
(가) 九曲將終山亦窮 구곡이 장차 다하고 산 또한 다하는 곳,
武夷村在岸邊東 무이촌이 언덕 가 동쪽에 있구나.
淵源水接乎郊近 원두의 물은 들판 가까이로 이어지는데,
淸遠亭留古壁空 청원정에는 고벽이 빈채로 남아 있네.
(나) 九曲紅流別有洞 구곡이라 홍류동에 별천지 동천이 있어,
桃花春水謝塵鬨 복사꽃 봄 물 속에 떠오니 세상 싸움 이르지 않네.
始焉出峀終知環 구름은 묏부리서 나오고 새는 저녁에 돌아오는데,
獸有麒麟鳥有鳳 짐승에는 기린이 있고 새에는 봉황이 있다네.
앞의 (가)는 권상일(權相一, 1679-1760)의 「청대구곡」 가운데 제9곡인 「소호곡」이고, 뒤의 (나)는 민우식(閔禹植, 1885-1973)의 「쌍룡구곡시」 가운데 제9곡인 「홍류동」이다. 이 두 시는 모두 별천지의 이상공간이며, 이것이 동시에 일상공간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곳은 산이 다하는 자리에 새롭게 열리는 세상이며, 복사꽃이 봄 물 속에 떠오는 공간이며, 또한 무이촌처럼 확트인 넓은 공간이다. 권상일은 청원정이 있는 곳이 그러한 곳이라 했고, 민우식은 홍류동이 그러한 곳이라 했다. 이 같은 별천지 혹은 이상공간은 복사꽃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소재적 측면에서 도가적 분위기도 연출한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근원하고 있기 때문인 바, 우복동도 인식을 같이 한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우복동가」의 경우를 통해 보자. 아래는 그 일부이다.
俗離之東山似甕 속리산 동편에 산이 항아리 같아,
古稱中藏牛腹洞 예로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다고 했네.
峯回磵抱千百曲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衽交褶疊無綻縫 여민 옷섶 겹친 주름 터진 곳이 없는 듯하네.
飛泉怒瀑恣喧豗 나는 시내 성난 폭포 시끄러운데,
壽藤亂刺相牽控 다래넝쿨과 가시나무가 얼기설기 길을 막고 있네.
洞門一竇小如管 동문은 대롱 같은 작은 구멍 하나,
牛子腹地纔入峒 송아지가 배를 깔아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네.
始入峭壁猶昏黑 막 들어서면 가파른 절벽이 오히려 어둑하지만,
稍深日月舒光色 조금 깊이 들어가면 해와 달이 그 빛을 비추네.
平川斷麓互映帶 평평한 시내와 끊어진 산기슭이 서로 비추고,
沃土甘泉宜稼穡 기름진 땅과 맑은 물은 농사짓기 적당하네.
仇池淺狹那足比 얕고 좁은 구지(仇池)로 어찌 비교할 수 있으리,
漁子徊徨尋不得 어부가 배회해도 찾을 수가 없다네.
玄髮翁嗔白髮兒 머리 검은 노인이 백발이 된 자식 꾸짖고,
熙熙不老眞壽域 희희낙락 늙지 않는 장수의 고을이라네.
정약용은 여기에서 우복동은 폭포가 있고 다래넝쿨과 가시나무로 가려진 좁은 구멍으로 들어가면, 기름진 토양과 맑은 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 역시 “이 세상에 우복동이 어찌 있을 수 있으리.[嗚呼牛腹之洞世豈有]”라고 하면서도 당대의 우복동 이야기를 소재화하였다. 일찍이 도연명은 「도화원기」에서 어부가 찾아 간 곳은 산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곳을 따라서 들어가면 개가 짖고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남녀가 기쁜 표정으로 살고 있는 이상공간이 나타난다고 했다. 우복동 역시 이와 같았는데, 이규경의 「우복동진가변증설」에도 보이듯이 우복동은 ‘들어가는 길이 폭포를 통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약용도 이러한 이야기를 받아들여 작품화하였던 것이다.
둘째, 영남학과 기호학이 상호 회통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속리산이 경상도와 충청도에 걸쳐 있고, 문경의 조령은 이 둘의 경계와 소통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기호와 영남지역을 경계 짓지만 이를 통해 기호와 영남을 넘나들기도 했다. 영남대로가 ‘한양-죽산-충주-조령-문경-상주-구미-인동-대구-청도-밀양-양산-동래’로 설정된 것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령이 두 지역 사이에 있으므로 이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남다른 감정이 있었고, 따라서 많은 문학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조선전기 윤상(尹祥, 1373-1455)에서 일제강점기 송기식(宋基植, 1878-1949)까지 조령을 대상으로 해서 작품을 남긴 작가가 15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영남사람과 기호사람의 시 한 수 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天涯乘興費幽吟 하늘 가에서 흥을 실어 그윽히 읊조리나니,
秋盡江頭別意深 늦가을 강 머리에서 이별의 뜻도 깊다네.
匹馬十年南北路 필마로 10년 동안 남북으로 다니니,
三杯千里去留心 이별주 마시고 천리를 가도 마음은 머물러 있네.
蕭蕭落葉龍湫畔 가을 잎은 용추 가로 쓸쓸히 떨어지고,
慘慘寒雲鳥嶺陰 찬 구름은 조령 그늘진 곳에서 슬프다네.
懷抱此行殊鬱結 회포는 이 번 행차에 특별히 많으니,
夢魂頻繞舊園林 꿈 속에서나마 고향 산천을 자주 배회한다네.
(나) 鳥道千盤嶺 조령 길 천 구비 서린 고개,
龍湫萬丈淵 용추는 만 길의 깊은 못이라네.
宿雲衣帶下 구름은 옷깃 아래서 자고,
朝旭頂巾前 아침 해는 갓 앞에서 떠오른다네.
앞의 시 (가)는 이언적(李彦適, 1491-1553)의 「도조령기사제(到鳥嶺寄舍弟)」이고, 뒤의 시 (나)는 신흠(申欽, 1566-1628)의 아들 신익전(申翊全, 1605-1660)의 「조령이수(鳥嶺二首)」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시대를 서로 달리하지만, 영남사람 이언적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면서, 기호사람 신익전은 서울을 떠나 영남으로 내려오면서 조령을 넘게 되었다. 이 때 이들은 그 감회를 위와 같이 나타내었던 것이다.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올라가고, 기호의 선비들이 관리가 되어 내려오던 것을 생각하면, 조령은 이 두 지역이 서로 회통하던 상징적 공간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영남학과 기호학의 회통은 속리산 기슭의 동서선유동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충청도 괴산의 서선유동은 영남의 선비들이 유람하며 시문을 남겼고, 경상도 문경의 동선유동은 기호의 선비들이 유람하며 시문을 남겼다. 물론 이들은 각기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의 선유동을 선유동 혹은 내선유동이라고 하면서 더욱 많이 유람하며 시문을 남기지만, 산너머의 외선유동도 함께 찾았다. 이러한 사정은 다음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 외선유동도 문경 땅에 있는데, 화양동과의 거리는 50여 리이다. 이 또한 한덩어리의 바위가 골짜기를 이루었는데, 물이 바위 속에서 흘러나온다. 움푹 패인 곳은 물이 영롱하여 맑고 빼어남을 사랑할 만하였다. 규모는 내선유동과 비슷하지만, 기이하고 웅장한 점은 그에 미치지 못하니, 내선유동에 비하면 자제 항렬이 된다.
(나) 矗立蒼玉屛 치솟은 절벽 푸른 옥의 병풍,
璀瓚水晶谷 찬란한 수정같은 맑은 계곡이라네.
奔流瀉其間 세찬 물줄기가 그 사이에서 쏟아지니,
奇壯三洞獨 기이하고 장엄함이 삼동 중 으뜸일세.
(가)는 기호지역 문인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쓴 「화양제승기(華陽諸勝記)」의 일부이다. 그는 문경의 선유동을 유람하고 이와 같이 기행문을 남겼던 것이다. 이밖에도 「자송면향외선유동(自松面向外仙遊洞)」, 「외선유동(外仙遊洞)」 등의 시를 남겼으며, 송병선(宋秉璿, 1836-1905) 등 기호의 다른 문인 역시 「유화양제명승기(遊華陽諸名勝記)」나 「학천정기(鶴泉亭記)」 등을 지어 영남 선유동에 대한 많은 관심을 드러낸다. 그런데 앞의 자료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김창협이 외선유동의 맑고 빼어남을 사랑할 만하기는 하지만 기이하고 장엄함의 측면에서는 내선유동에 비해 조금 모자란다며, 차별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차별의식은 17세기 이후 기호학과 영남학이 분화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특기할 만하다.
(나)는 영남지역의 문인 남한조(南漢朝, 1744-1809)가 쓴 「외선유동」이라는 시다. 여기서 외선유동이라 함은 경상도에 있는 선유동이 내선유동이기 때문이다. 그는 문경의 선유동에 들어가 옥하정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충북 괴산의 선유동을 방문하여 위와 같은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 선유동 역시 영남의 많은 문인들이 찾아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였는데, 이황(李滉, 1501-1570), 구봉령(具鳳齡, 1526-1586), 이준(李埈, 1560-1635),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정태진(丁泰鎭, 1876-1956)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정태진은 「외선유구경(外仙遊九景)」을 짓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셋째, 자연과 인간, 그리고 건축물과 문학이 조화를 이루며 일련의 문화를 구성하고 있다. 구곡과 동천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명승이다. 이 같은 명승이 으레 그렇듯이 이곳에 명인이 숨어들어 정자를 짓고, 자연과 건축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며 다양한 문학작품을 창작하였고, 이로써 고도한 심미의식을 형상하였다. 그리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 와유의 자료로 삼기도 한다. 문경과 상주 지역의 구곡동천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자연과 문학과 건축이 일체감을 이루며 일련의 문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다음 자료를 보자.
기미년 가을, 비로소 재료를 모아서 건축을 시작하여 다음해 늦은 봄에 공사를 마쳤으니, 뒤쪽은 실(室)이고 앞쪽은 헌(軒)인데 합하여 세 칸이다. 재(齋)는 졸수(拙修)라 하고 헌(軒)은 한계(寒溪)라 하였는데 총괄해서 이름을 존도서와(尊道書窩)라 하였다. 그 가운데 거처하고 도서를 좌우에 비치하여 정신과 심성을 기르니, 대개 장차 이곳에서 늙어 죽을 수 있거늘 세상의 어떤 즐거움이 이보다 나을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졸수재가 높아 달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데는 때로 작은 구름이 모두 사라지면 날씨가 맑고 밝아 달빛이 집에 가득히 비친다. 일어나 멀리 바라보면 시내의 여울이 훤히 밝고 들판이 멀리 트이며 동남쪽의 이어진 산들이 안개와 이내 속에 은연히 비친다. 아득한 가운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기쁘고도 상쾌하며 경치와 마음이 합하는 지라 그 즐거움을 말로써 형용하여 사람에게 알릴 수 없다.
위의 글은 권상일이 쓴 「존도서와기(尊道書窩記)」의 일부이다. 그는 이황의 사숙제자로 청대구곡을 경영하였다. 청대구곡이 물을 거슬러 오르며 지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자의 무이구곡이나 조선의 여타 구곡과 다르지만, 제5곡에 정사를 지은 것은 주자와 동일하다. 권상일은 제5곡을 농청대로 설정하였는데, 여기에 ‘존도서와’라는 집을 지었던 것이다. 건축연대는 1739년(영조 15)이다. 기문도 썼는데, 마을의 이름을 모방하여 ‘존(存)’을 ‘존(尊)’으로 고쳐 정자의 이름을 삼았는데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을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위의 자료에서도 충분히 제시되어 있는 바, 구곡 속에 지은 그의 존도서와가 무엇을 표방하고 있는지를 바로 알 수 있게 한다. 민우식의 「사우정기(四友亭記)」도 같은 방향에서 읽힌다.
문경 남쪽 60리 지점에 한 언덕이 있는데 쌍룡(雙龍)이라 한다. 화산(華山)이 그 북쪽에 있고 영수(潁水)가 그 동쪽에 흐른다. 함께 덕을 볼 만한 기이한 경관과 특이한 흥취가 특별히 없다. 그러나 지상에는 고산유수(高山流水)가 있고, 하늘에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을 함께 할 따름이니, 진실로 은자가 노닐고 군자가 살기에 합당하다. … 불초한 내가 선친께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난 계해년 가을에 정자 몇 칸을 짓고, 내가 손수 사우정(四友亭)과 고산유수(高山流水)․청풍명월(淸風明月)을 써서 걸었다. 그리고 구곡과 쌍계수석과 사우산림(四友山林)을 명명하여 바위에 새겼다.
사우정의 사우는 ‘산(山)’과 ‘물[水]’, 그리고 ‘바람[風]’과 ‘달[月]’이다. 민우식은 앞의 둘은 지상에 있고 뒤의 둘은 하늘에 있다고 하면서, 그의 선고 민영석(閔泳奭, 1868-1920)이 경술국치를 맞아 이곳 쌍룡에 찾아들어 흉금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이에 선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우정을 짓고 관련 글귀를 돌에 새긴다고도 했다. 현재 사우정은 쌍룡구곡의 제3곡 우연(于淵)에 위치한다. 정자의 좌우로 위의 자료에서 보이는 ‘高山流水’, ‘淸風明月’ 등의 글귀를 바위에 새겨 추모의 뜻을 보이면서도, 구곡시를 지어 천리유행(天理流行)의 묘리를 드러냈다. 이로써 자연과 인간, 건축과 문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문화적 의미로 다시 태어나는 지를 보여주었다.
이밖에도 구곡동천 문화는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는 생태주의적 요소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 생태주의는 인간과 문명의 오만을 비판한다. 따라서 생태주의자는 인간이 자행하는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의 바탕에 인간이 자신을 자연과 분리시켜 자연을 정복하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들은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조화적 질서 속에서 서로의 삶이 하나의 유기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자신과 함께 상대를 존중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특히 구곡의 조성과 그 경영에는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고 그 속에서 이치를 발견해 가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어 중요하다.
백두대간 속리산권에 위치하고 있는 문경과 상주, 특히 문경 지역에는 구곡동천 문화가 집중해 있다. 이에 대한 의미는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나, 일상과 이상의 통합지점이 나타난다는 점, 영남학과 기호학이 상호 회통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자연과 인간 혹은 건축물과 문학이 조화를 이루며 일련의 문화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 등은 그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물론 구곡동천 문화가 지닌 일반적인 것도 있고, 문경과 상주 지역 구곡동천만 갖는 특수한 것도 있다. 이 같은 일반성과 특수성은 성리학적 일반성과 지역적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인 바, 모두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 유의미한 것으로 활용 가능한 것들이다. 이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중대한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구곡동천 문화, 그 미래를 위한 전망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근대의 위기로 인해 근대성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다. 따라서 근대를 이끈 기계적 세계관에 대하여 일정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기체적 세계관에 입각한 전근대의 가치를 재인식하자며 사고의 전환을 요청받기도 한다. 이로써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근대성은 부분을 강조하는 기계적 세계관을 근거로 인간의 주체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근대의 이러한 부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극복하는 논리를 전체의 질서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유기체적 세계관에서 찾자는 것이었다. 전근대에 대한 가치의 재인식은 이로써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근대적 가치에 대한 재인식의 핵심이 구곡동천 문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기체적 세계관은 세계를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는 것에 기반한다. 생명체는 시공간적으로 연속되어 있어 분리가 되지 않으며, 부분과 부분이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부분과 전체의 동시성과 함께 위계 구조를 지닌다. 이로 볼 때,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전체로서 공존하고 상생하며, 인간이 자연과 상호 소통하면서 합일의 서정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합일의 서정은 구곡동천 문화와 그 자연의식에 깊이 내장되어 있는 천인합일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다음 자료를 보자.
(가) 玲瓏百畒玉 영롱한 백 이랑의 옥 같은 바위,
濯以淸淸泉 맑디맑은 샘물로 깨끗이 씻었다네.
坐到山將暮 앉아서 산이 장차 저물녘이 되었는데도,
不知日似年 하루가 일 년 같은 줄 알지 못했네.
幽花爲映拂 그윽한 꽃은 예쁜 자태로,
古壁相新鮮 오래된 벽에 싱그럽게 피어있네.
長嘯倚藜杖 길게 휘파람 불며 청려장 짚고 있노라니,
林風來爽然 숲 속의 바람 상쾌하게 불어오네.
(나) 白石瀉白水 흰 바위 흰 물결을 쏟아내,
瀅澈白雲谷 맑디맑은 백운 계곡 만들었네.
此心亦虛白 이 마음 또한 텅비고 희니,
同爾惟我獨 너와 함께 할 이는 오직 나뿐이리.
(가)는 오원(吳瑗, 1700-1740)이 문경의 선유동을 읊은 「외선유동」이다. 그는 이재(李縡, 1680-1746)의 문인으로 그의 어머니가 김창협의 딸이다. 즉 오원은 기호의 선비로서 문경의 선유동을 유람하면서 천인합일의 심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옥 같은 바위 곁을 흐르는 맑디맑은 물, 이러한 청정한 공간에서 마음을 씻으며 시간의 통제를 잊어버린다. 함련에서 보인 저물녘이 오는 줄도 모르고 앉아서 하루를 일 년과 동일시 한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자연과 완전히 화합된 상태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어떠한 간극도 발견할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정종로(鄭宗魯, 1738-1816)가 쓴 「백운대」이다. 그는 내외선유동 등 기호와 영남을 드나들며 승경에 대하여 노래하였는데, 희양산 기슭을 유람하면서 지었다. 여기서 보듯이 흰 바위, 흰 물결, 이를 통해 만들어진 백운곡(白雲谷)을 제시하며 ‘백’으로 통일된 자연을 노래했다. 그리고 인간을 떠올리고, 자신의 마음 역시 ‘허백(虛白)’으로 표현하며, ‘너와 함께 할 이는 오직 나 뿐’이라며 자연과 인간의 합일적 서정을 적극 표출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정종로가 가진 유기체적 세계관 내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읽게 된다.
공존과 상생은 속리산권 구곡동천 문화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미래적 요소이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은 답답한 마음을 풀기도 하고[창신(暢神)], 인간이 가진 도덕적 이상을 자연에 비유[비덕(比德)]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경의 선유동은 우리 시대에 있어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속리산 불한령(不寒嶺)을 중심으로 영남지역과 기호지역이 같은 이름의 선유동을 갖고 화합 내지 통합적 의미로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정경세(鄭經世, 1563-1633)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가) 兩仙遊洞好相隣 두 선유동 사이좋게 서로 이웃했나니,
只隔中間一嶺雲 다만 중간에 한 고개의 구름만이 떠가네.
莫把名區評甲乙 명승지를 두고 우열을 가리지 말라,
天將水石與平分 하늘이 시내와 돌을 공평이 나눈 것을.
(나) 불한령(不寒嶺) 동쪽은 문경(聞慶) 땅이고 서쪽은 청주(淸州) 땅이다. 두 곳에 모두 수석이 아름다운 곳이 있어서 함께 선유동(仙遊洞)이라고 부른다. 서로 간의 거리는 겨우 이십 리 남짓으로, 유람하는 자들이 서로 자신들이 있는 곳이 더 좋다고 하여 어느 곳이 더 좋다고 정할 수가 없다.
당시의 사람들은 영남 문경의 선유동과 충청 괴산의 선유동을 즐겨 비교하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김창협과 송병선 역시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경세는 선유동 사이에 있는 불한령에 구름만 흘러갈 뿐 선유동은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다고 했다. 하늘이 산수를 공평하게 나누어준 것이니 명승지를 두고 우열을 가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유동 이라는 자연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이지만, 정경세는 이를 통해 기호와 영남의 정신적 통합을 이룩하려고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 스스로는 당대의 대표적인 노론이었던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을 사위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이 같은 통합의 회통의식이 속리산 문화권, 특히 문경과 상주 지역에 있었다. 미래적 가치를 두고 볼 때, 대통합의 회통성은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에 있어 매우 긴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첫째, 속리산권 구곡동천이 지닌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면서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이다. 세계유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자연유산․문화와 자연의 복합형 유산으로 구분된다. 이로 볼 때 구곡동천은 탈근대 담론에서 제시하는 전근대적 가치의 핵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시대의 동양적 이상세계 또한 제시되어 있다. 자연과 인간이 상호 소통하는 지점 역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문경지역의 구곡동천은 이러한 요소를 다수 확보하고 있어 등재를 위한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이 지역의 구곡동천 문화는 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갖추고 있어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구곡문화의 경우 중국에는 무이구곡이 거의 유일한 상태다. 한국의 경우에는 주자학의 전래와 발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 문경과 상주 일대는 그 표본이 되기에 충분하다. 주자 무이구곡을 본받은 것도 있지만, 이에 대한 경영과 작시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리학의 한국적 전개과정과 일정한 관련성을 갖는다. 세계유산 등재는 동아시아의 정신사 속에서 한국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둘째, 구곡동천 문화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문경과 상주는 물론이고 영남을 넘어 한국 전역으로 확대되어 마땅하다. 백두대간 속리산권 동천구국 문화가 여러 측면에서 긴요하기는 하지만, 이 문화가 이 지역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영남지역은 물론이고 한국 전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날이 갈수록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자연이 파괴되어 가고 또한 오염되어 가는 오늘날, 이에 대한 확대 조사와 연구는 시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관련 기록 자료를 수집하여 자료집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번역하는 일이 잇따라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구곡문화의 경우,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 정수가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15세기에 박구원(朴龜元, 1442-1506)이 고야구곡(古射九曲: 밀양)을, 박하담(朴河淡, 1479-1560)이 운문구곡(雲門九曲: 청도)을 조성한 이래, 현재 명칭이 확인된 곳만 하더라도 140곳을 상회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이학유적(理學遺迹)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를 통해 도학적 이상세계를 꿈꾸었으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셋째, 구곡동천 문화를 중심으로 문화관광을 개발하여 대중들의 문화적 향유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분위기 가운데 하나는, 이론적 지식에서 문화적 향유에로의 전환일 것이다. 이론적 지식은 학문적 체계를 바탕으로 기억하고 사유하며 이에 따라 판단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문화는 인간에 의해 획득된 능력과 관습의 복합적 총체이다. 따라서 문화는 행위를 특별히 강조하면서, 이 행위들이 갖는 총체적인 의미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는 이론적 지식이 공허한 관념의 창고에 적재되는 것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일상생활의 보편적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연에 대한 문화론적인 접근은 일상의 활동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어디나 동천이 있고, 가까이에 또한 구곡이 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이에 대한 문화를 새롭게 구성하며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구곡문화에 대한 이해를 훨씬 뛰어넘어 생활 속에서 즐기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선유동과 우복동천은 많은 전설을 확보하고 있어 이를 중심으로 스토리텔링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선비들이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구곡을 설정하고, 기행문을 쓰고 구곡도를 그리며 와유(臥遊)나 좌완(坐玩)을 하려고 하였던 사실을 주목하면서 당대적 문화를 재현할 필요도 있다. 구곡문화 공간이 이학적 요소가 짙게 밴 승경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의 문화관광은 그 품격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구곡동천 문화는 자연과 인간의 통합성을 지향하면서도 품격있는 일상문화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게 한다. 명승을 통해 이들이 설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과 건축학, 회화와 지리학을 아우르게 한다. 따라서 이 문화는 분과학문이 지닌 한계를 인식하면서 학제적 접근을 요구한다. 이것은 분과학문 내적인 학문적 벽을 허물고 학문과 생활이라는 이원성을 통합하면서,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구곡동천 문화에 대한 접근은 지역적 구체성과 전국적 종합성을 동시에 성취하면서, 아울러 세계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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