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의 횃불 상주
- 시민책임정신 -
권세환(문경대학교 초빙교수)
Ⅰ. 국채보상운동의 약사
1. 시대적 배경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적 토양은 을사늑약 이후 크게 일기 시작한 애국계몽사상이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1904년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
1905년 일본은 식민지 기초 작업의 제1보로 조선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화폐 정리채 3백만 원을 차입하여 들여왔다. 이어 그해 12월에는 화폐개혁에서 비롯된 금융공황을 구제한다면서 1백 50만원을 또 차임하여 들였다. 통감부 설치 이후 일제는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교육제도의 개선, 금융기관의 확장 정리, 도로 항만시설의 개수 확충, 일인관리 고용 등 각종 명목으로 고이율의 차관을 들여오게 하여 국채가 격증되어 갔다.
이렇게 일본의 계속된 차관공세로 2년 사이에 한국정부는 원금만 하여도 1천6백5십만 원에 달하는 채무를 지게 되었고 해마다 늘어나는 이자 또한 상당한 금액이었다.
1907년 2월에 당시 신채로 약 3백5십만 원의 구채를 정리하여 1천3백만 원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국채는 당시의 국가 재정으로 갚을 수 없는 고액이며, 또한 그대로 둘 경우 해마다 고율의 이자가 가산되어 마침내 국토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고 2천만 민족은 그들의 노예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국운이 절박한 1907년이 이르러 거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2.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1905년 5월 서울에서 이준, 양한묵 등이 憲政硏究會(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정치적 계몽운동을 하다가 을시조약 후 1906년 大韓自强會(대한자강회)로 확대 개편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였다.
대구에서도 이러한 자강사상이 이미 보급되어 1906년 1월 대구광문사와 문회(대구광문회)가 조직되어 신교육구국운동의 추진단체가 되었다. 대구광문회의 신교육운동은 대구에 중학교 과정의 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경상북도 내 41개 군에 사립소학교를 세운다는 원대한 설립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교육 자강운동은 일제의 방해와 정부의 무관심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대구 광문사와 광문회는 김광제의 건의에 의해 대구의 거상 서상돈 등 십수명이 돈을 모아 만든 것이다. 광문사는 신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교과서는 물론 계몽잡지나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 보급하기 위한 인쇄소이며, 광문사 안에 경상북도 내 각 군 유지 400∼500명으로 문회를 두어 활동방향을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 김광제와 서상돈이 선각적 발의와 발단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 문회의 회명을 대동광문회라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의를 열고, 회의를 마친 후 그 자리에서 대동광문회 회원이며 광문사의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문제를 발의하였다. 이 운동의 발기인은 김광제,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 회원 김윤란, 장상철, 강영주, 서정섭, 김우근, 서병오, 윤하선, 정재덕, 이종정, 길영수, 이우열, 강신규, 정규옥, 천교정으로 이들은 2월 21일 大邱民議所(대구민의소, 현 대구상공회의소)에서 斷煙會(단연회)를 설립하니 창립총회에서 500원이 갹출되었다.
또한 그날 대구민의소가 北堠亭(북후정)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대구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여기에서 國債報償趣旨書(국채보상취지서)가 낭독되었다.
國債報償趣旨書
삼가 아룁니다. 무릇 신민(臣民)이 된 자가 충성과 의리를 숭상하면 나라가 흥하고 백성이 편안해지며, 불충하고 불의하면 나라는 무너지고 백성은 멸망하는 것은 비단 고금의 역사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서구 중에서 부강한 나라들과 멸망에 이르게 된 나라들을 보아도 모두 충성과 의리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경우가 없으며, 이는 과거의 옛 나라들이나 먼 서구의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양의 가까운 경우를 살펴볼 때,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일본입니다.
예전에 청국 및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이겼습니다. 이는 군대가 죽음을 무릅쓰고 유혈이 가득한 전쟁터에 기쁘게 뛰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 있는 백성들은 신발을 만들어 팔거나 소지품을 팔고, 아녀자들은 반지를 모아서 군자금에 보탰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마침내 동서양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전공을 세웠고 그 빛나는 무훈이 세상을 진동시켰으니, 이는 5,000만 민족 각 사람의 뜨거운 피에 기인한 것이며 진실로 충성과 의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흠모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 우리 2,000만 동포가 이렇게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때를 만나 어느 한 사람 결심하지도 않고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단지 우리 황상(皇上)이 지극히 근심하시는 것만 바라보면서 수수방관한 채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면, 이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요? 근래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면, 나라가 무너져서 멸망한 이집트․베트남․폴란드 등의 민족이 모두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 몸과 자기 집만 알았을 뿐 군주와 국가를 생각하지 않아 결국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 바로 정신을 차리고 충성과 의리를 분발할 때가 아닙니까? 지금 나라의 빚이 1,300만 원이며, 이는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관계된 일입니다. 이를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게 되고 못 갚으면 나라를 잃습니다.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나 현재 국고로는 보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삼천리 강토는 장차 우리나라가 아니게 될 것이며, 땅을 한 번 잃으면 돌이킬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과 같은 나라의 민족 신세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일반 국민도 이 국채보상에 대한 의무에 대해 모른 체하거나,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보상에 참여해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2,000만의 백성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각 사람마다 20전씩 낸다면 1,300만원을 모을 수 있으며, 만약 부족하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 등 따로 기부를 받으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이니만큼 잠시 결심만 하면 됩니다. 일본의 결사대들이나 반지와 살림을 내놓은 일본 국민들과 비교하면 무엇이 더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아, 우리 2,000만 동포 중 진실로 조금이라도 애국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이 이렇게 발기하여 경계하는 글을 계속 내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우리 대한의 군자들이 모두 보고 말과 글로 서로 경고하여 모든 사람이 이 내용을 알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위로는 황상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강토를 지킬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대구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朴海齡) 부회장 김광제(金光濟)
회원 장상철(張相轍), 강영주(姜永周), 심정섭(沈廷燮), 김우근(金遇根), 서병오(徐丙五), 윤하선(尹夏璿), 정재덕(鄭在悳), 이종정(李鐘禎), 길영수(吉永洙), 이우열(李遇烈), 강신규(姜信圭), 정규옥(鄭圭鈺), 추교정(秋敎廷)
〈대한매일신보〉, 광무(光武) 11년 2월 21일(1907년 2월 21일)
이어 3월 9일 대구 서문 밖 壽昌社(수창사)에서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처음부터 일경의 방해와 간섭을 받아 국민대회가 무산당하고 연설가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서상돈 등에 의하여 국채보상운동이 제창되자 대구시장에서부터 눈물겨운 반응이 즉시 나타났다. 2월 24일에는 가난한 짚신장수로부터 콩나물 장수, 술, 밥, 떡장수 등 영세 상인들이 애써 번 돈 5, 60전과 1, 2원을 아낌없이 보상금으로 보태었던 것이다. 이에 지식이나 학행이 있다는 선비들이나 유지들이 좌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돈을 내고 의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첫 반향은 여성계에서 가장 신속하게 나타났다. 대구 단연회가 북후정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군민대회를 개최한 지 이틀 후인 2월 23일에 대구 여성들이 대구 남일동에서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그 날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를 선언하고 은패물을 의연하면서 한글 취지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경고 아 부인동포라(우리 부인 동포에게 삼가 아뢰오)
우리가 여자의 몸으로 집안에서 삼종지도 외에는 따를 일이 없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는 남녀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들으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 달간 담배를 피우지 않고 돈을 모은다 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진정 아름다운 일입니다......(중략)...... 본인 등은 여자의 소처로 이 한 몸 가진 것은 다만 패물 등속이라,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큰 바다가 가는 물을 가리지 아니하며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니, 유지하신 부인동포들은 많고 적음을 가리지 말고 참된 정성으로 기부하여 국채를 갚으면 천만 다행일 것입니다.
정미 정월 십일일 발기인에 대구 동상 남일동
정운갑 모 서씨 은진환 일불 두냥중
서병규 처 정씨 은장도 일개 두냥중
정운하 처 김씨 은지환 일불 한냥구돈중
서학균 처 정씨 은지환 일불 두냥중
서석균 처 최씨 은지환 일불 한냥오돈중
서덕균 처 리씨 은지환 일불 한냥오돈중
김수원 처 배씨 은연화 일개 두냥구돈중
(주: 정미 정월 십일일은 1907년 2월 23일. 순한글 고어체를 현대문으로 편집)
이들의 참여는 매우 큰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한편 대구 단연회 관계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경북이 어느 도보다 모범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국채보상도총회를 결성하였다. 대구에서 국체보상 단연금모집 연설회를 개최하여, 일반인이 각기 의무로 몇 10원 몇 10전을 바치었으며, 백정 김창령이 20원을 바치고 두 발이 병신인 걸인이 엽전 5냥을 收錢所(수전소)에 바치고 즉시 담뱃대를 부러뜨리는 것을 곁에서 보고 있던 인사들이 감격하여 부녀들은 은가락지와 차고 다니는 粧刀(장도)까지 함께 풀어서 바치었다.
기생 鸚鵡(앵무)는 지화 100원을 가지고 국채보상수금소에 와서 서상돈․김병순․정재학 등을 보고 “저는 본래 천인이 겸하여 無夫無子(무부무자)이나 국민의 의무로 1천3백만 원에 대하여 만분의 하나라도 출연할 터인데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고 더 낼 수가 없어서 1백 원을 판출하였으니, 오직 누구든지 남자가 1천원, 1만원을 출연하면 저도 죽기를 작정하고 따라가겠다는 자신의 뜻을 밝혔는데 이를 듣고 감동된 서상돈․김병순․정재학은 서로 부끄러워 얼굴빛이 붉어짐을 보고 각기 기만 원씩 출연하기로 결의까지 하였다.
또한 서상하는 단연회 회장 등과 서문시장 장날에 연설할 때, 단연동맹하는 대의를 血心勸告(혈심권고)하고 군중을 향해 큰절을 하니 한 장꾼이 감탄을 금치 못해 출연하였는데, 백정 김사복이 10원을 의연하였다.
통문
엎드려 생각건대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반드시 가정이 있는데, 나라 없는 백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백성이 없으면 가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면 먼저 그 가정을 보호하고, 그 가정을 보호하고자 하면 먼저 그 나라를 유지하게 해야 합니다. 나라를 유지하는 도는 忠과 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忠과 義와 體는 하나인데 用은 만 가지로 같지 않습니다.
… 중략 …
아! 우리 대한은 단군과 기자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으로 백성을 가르쳤으며, 禮讓과 신의의 풍속으로 백성을 인도하였습니다. 가정과 나라에 바탕하여 사직이 튼튼해지는 법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국운이 불행하여 나라의 나아감이 점점 어려워져, 창고가 비어 궁핍하고 마침내 匱(궤)에 쌓인 것이 차관으로 빌린 것입니다. 이에 1,300만 원의 거액이 되어 채무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갚고자 하면 반드시 나라를 팔아야 하고, 갚지 아니하면 우리 강토가 없어질 것이니, 어찌 대중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힘을 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천 년 강토에 빚을 진 집안에 빚을 갚을 물건이 없습니다. 청컨대 채무를 갚는 일로 말하면 사람들이 양식을 절약하고 갚고자 한다면 반드시 굶주릴 것이고 사람들이 의복을 입지 않고 갚으라고 한다면 반드시 추위에 떨 것입니다.
오늘날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은 것이 몸에 간절하나 몸에 이롭지 아니하고, 입에 맞으나 도리어 입에 해롭고,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이 되고, 검소하였으나 사치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흡연의 남초(담배)입니다.
만일 이것을 끊어서 저들의 빚을 갚을 계책을 낸다면 비록 종신토록 폐함이 가하거니와 하물며 3개월이겠습니까? 슬프게도 우리나라의 백성들이 풍속에 안주하고 습관에 매여 ‘차라리 나라가 망해도 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자신을 버리고 또한 나라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름 벌레가 얼음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사람들의 비웃음을 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오히려 해상조오객(海上釣鼇客)의 미끼가 될까 걱정입니다. 속언에 말하기를 ‘돈을 빌려 준 사람은 상전이다.’하니 지금 굴레를 덮어 쓴 것이고 억압 받고 있는 것입니다.
… 중략 …
대개 선비는 나라의 元氣이고 나라의 존망에 관계되며,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나라와 더불어 朝家의 생성과 배양의 은택을 흡족히 입었으니, 반드시 조그마한 보답이라도 하려는 것이 본성의 자연스러운 것인데 어찌 다른 사람들의 충고와 권함을 기다리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僉尊께서는 분발 격려하여 각기 본 향교에서 요청한 會에서 돈독히 의논하여 모일로부터 모일까지 3개월을 기준으로 흡연과 도구를 없애고 각자 한 달의 과정을 정하여 一緡의 대금을 모은다면 대략 2천만 인구에 1천만 원을 거둘 수 있습니다.
또 四民 중에 忠義가 일반사람들 보다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재산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원으로부터 십 원, 백 원, 천 원, 만 원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의연금을 낸다면 빚 갚을 돈의 부족함과 그 방법이 없음을 근심하리오. 그렇다면 위로는 임금께서 밤늦도록 부지런히 일하는 근심을 면하고 아래로는 나라의 다스리는 기강이 융성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의 행복이 큰 것이며, 백성들의 행복이 큰 것이며, 더욱이 나라의 행복이 큰 것입니다.
광무 11년 2월 21일
경상북도 대구군 금연상채회
위에서 보면 ‘나라를 유지하는 도는 충과 의가 있을 따름이다.’라고 하여 역시 국민 된 도리와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우리 대한은 단군과 기자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사랑하는 정성으로 백성을 가르쳤으며 禮讓(예양)과 신의의 풍속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였습니다.’라고 하여 나라사랑으로 책임을 다할 것을 역설하였다. 또한 내용 중에는 四民(사민 즉 士農工商)이 앞 다투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는데, 사민의 으뜸인 士(사) 즉 양반층의 참여가 저조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유학생 단연금모집 연설회문
우리가 무릇 경제는 국가에 필요하고 긴급한 문제라, 법률로만 국가가 되지 못하나니 법률이 고명한 로마제국도 경제를 해결치 못하여 드디어 망하였으니, 항차 우리나라가 이처럼 슬픈 지경에 당하였는데 어찌 경제를 강구치 않을 수 있으리오. 경제란 적은 것으로 큰 것을 궁구하여 행하는 것이라 우리 유학생으로 말하면 근 800명이라, 매일 아침 담배 한 갑씩이라도 6전이오, 한 달에 2160원이니, 800명으로 계산하며 1년 담배 값이 적지 않거든 하물며 전 국민의 담배 값이랴. 음식물은 끊으면 죽기 때문에 안 될 일이어니와 무익한 연초를 끊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일제히 단연하여 국채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웁시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31일
이러한 운동으로 4월 30일에는 대구 단연동맹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연하였다. 대구의 단연동맹으로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부르짖음이 터져 이 구국의 절규가 대구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민족지의 적극적인 보도와 지원을 통하여 전하여지자 삽시간에 경향각지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국민들이 이에 참여하여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전개하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에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고 각 지방에서도 도, 군, 면단위로 이 운동을 찬동 지지하는 취지서를 발표하였으며 더불어 국채보상회를 설립하였다. 상주는 4월 9일 국채보상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단연을 통한 국채보상운동의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은 2월 27일에 ‘우리 국민들의 국채를 보상하기 위해서 단연하고 그 값을 모은다고 하는데 짐이 담배를 피울 수 없다“하여 단연을 실천하고, 또 영친왕의 吉禮(길례)를 7월(음력)로 연기하도록 명하니 고종의 이러한 사실은 관민들에게 큰 감격을 주었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민족언론기관들은 이 운동을 자주자강의 구국운동으로 파악하고 앞을 다투어 각 지방의 모금상황 및 취지서 등을 경쟁적으로 보도했고, 신문사로 답지하는 의연금에 대한 명단발표에 지면을 할애하여 게재하였다. 이러한 애국신문의 열성적인 호응과 지원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애국경제구국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언론은 대한매일신보사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었으며, 이 신문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두었다. 이는 대한매일신문사의 경영주가 영국인 배설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통감부가 이 신문을 효율적으로 탄압할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국채보상운동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는 물론 모든 서민대중이 참여하였으며, 승려, 침공, 노복, 인력거꾼 등 모든 국민이 참여하였으며, 외국인들도 참여하였고 특히 평안북도 영유군 이화학교의 일본인 교사 세이리우(正柳好彬)까지도 감격하여 의연금을 내기도 하였다.
3. 국채보상운동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하여 전국민적인 국민운동, 시민운동이었으며 범 국민적인 애국운동이었었다. 또한 여성의 자각을 일으킨 근대여성운동이기도 하다. IMF 금융위기 때 경제난국을 극복하고 경제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우리나라 국민의 강한 의지는 국채보상운동의 강력한 민족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은 한국 최초의 NGO운동, 한국최초의 전국적 경제주권 회복운동, 한국 최초의 시민민족주의운동, 한국 최초의 국민적 기부운동, 한국최초의 여성운동, 한국 최초의 근대사회통합운동, 한국형 부채문제 해결모델, 세계최초 반투기자본 시민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기록적 가치를 살펴보면
첫째, 시민주도로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에 맞서 경제적 주권수호운동을 벌린 사례는 세계역사상 찾아 볼 수 없다.
둘째, 이 운동은 세계사상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시기에 이에 저항하는 근대 시민의식이 반영된 운동이라는 것이다.
셋째, 이 운동은 언론기관과 애국계몽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는 물론 일본 미국, 연해주 등 동포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망라하여 전개되었다.
넷째, 이 운동은 신분 및 재산의 고하는 물론이고, 종교의 차이 및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심지어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조차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다섯째, 이 운동은 외채상환운동이라는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한 평화적 시민운동이었다.
여섯째, 이 운동은 국권을 수호하고 국채상환을 통해 우리국민들의 나눔과 책임의 정신을 아낌없이 발휘한 한국 근대정신운동의 효시이며, 오늘날의 시대정신으로 승화되고 있다.
Ⅱ.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1. 운동의 시작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 광문사 문회에서 발기되었다. 이 때 참여한 발기인을 살펴보면
대구광문사(廣文社) 사 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 회 장 박해령(朴海齡) 부회장 김광제(金光濟)
회원 장상철(張相轍), 강영주(姜永周), 심정섭(沈廷燮), 김우근(金遇根), 서병오(徐丙五), 윤하선(尹夏璿), 정재덕(鄭在悳), 이종정(李鐘禎), 길영수(吉永洙), 이우열(李遇烈), 강신규(姜信圭), 정규옥(鄭圭鈺), 추교정(秋敎廷)
등이다.
발기인에 참여한 강신규는 상주사람이다. 강신규(1875∼1920)는 연산군의 폭정을 간언하다 아들 3형제와 함께 참형을 당한 節臣(절신)이었던 姜詗(강형)의 후손이다. 강신규의 부친인 강석희는 위암 장지연, 광문회 회장 박해령 등과 교분이 매우 두터운 사이였으며, 이러한 선각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회 회장인 박해령은 경상북도 관찰부 주사를 역임하고 일제강점기에 상주군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국채보상운동은 자연스럽게 상주인들과 연결이 되었다. 또한 상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일원이었던 김재익은 강신규와 친분이 있어 이 일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는 1907년 2월 미상일에 이 운동에 관련한 外西面國債報償姓名成冊(외서면국채보상성명성책)이 작성되어 이미 의연금을 접수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4월 9일 상주에 국채보상회가 설립되었다. 금중현의 논문에 의하면 1907년 3월 3일(양력 1907년 4월 15일)에 발신처가 없는 尙州外西伊下里 國債報償所 入納(상주외서이하리 국채보상소 입납)이라는 편지봉투가 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해 4월 9일 대한매일신보에 國債報償尙州義務所趣旨書(국채보상상주의무소취지서)가 실렸다.
국채보상상주의무소취지서(國債報償尙州義務所趣旨書)
무릇 백성과 나라와의 관계는 나무가 뿌리가 있고 물이 근원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뿌리가 굳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장대하고, 나라가 부귀하면 백성이 편안 합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뿌리 없는 나무가 있으며, 근원 없는 물과 나라 없는 백성이 있겠습니까? 삼가 우리 3천리 강토에 2천만 백성들이 5백년 동안 화육의 은택을 입어 길러지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대 황제폐하께서 황제가 되신지 4년 만에 어짊이 드리워지고 아래 백성을 민망히 여겨 하늘에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간란한 운세를 만나서 나라가 쇠약해지고 백성이 병듦에 지탱하기 어려운 많은 형상은 손으로 다 꼽을 수가 없고, 국고의 예산이 궁핍하고 지불할 계책이 없어서 1,300만원 이라는 거금을 외국에서 차용하여 매년 정해진 공납을 들어올 것을 나갈 것을 계산해 보면 항상 부족함을 근심하는데 어느 겨를에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몇 년이 지나 뒤바뀌어 꼬리가 커진다면 곧바로 병폐가 되어서 나라는 나라꼴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천지가 비록 크다고 하지만 백성들은 어디로 돌아갈 것이며, 토지와 가산이 한갓 우리의 소유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이나 처자도 또한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니, 재산이 있은들 어디에 쓸 것이며, 곡식이 있은 들 누구에게 먹일 것입니까? 흥분된 말이 여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다행스럽게도 대구의 사회에 김광제, 서상돈 두 사람이 의리를 내어서 선창하여 전국에 인구가 3개월 동안 금연하는 비용으로 빚보다 많은 수가 되니, 무리를 일깨워 의연금을 내어 꼭 빚을 청산할 것을 도모하니, 경도(京都)와 부군(府郡)의 소문이 서로 호응하여 향응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떳떳한 성품은 사람들이 함께 부여받은 것이요, 온 나라 안의 백성들은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아! 우리 상주 땅의 몇 만리 동포도 따로 지사를 설립하고 각자 정성을 내되, 어찌 다만 금연하는 것이 평소의 술 먹고 고기 먹으면서 허비하는 비용을 줄이고 돈을 모아서 1원 2원에서부터 천만에 이르기까지 그 힘닿는 대로 그 돈을 본사에 부쳐서 국가의 만분의 일이라고 깊은 은혜와 두터운 은혜를 갚은 것만 같겠습니까? 사람마다 이와 같이 하고 고을마다 모두 그렇게 한다면 이른바 흙을 쌓아 산을 이루고 물을 모아 바다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불과 몇 개월 만에 충분히 빛을 청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맹자가 이르지 않았습니까? 물고기도 먹고 싶고 곰발바닥고도 먹고 싶지만 반드시 해야 된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의리가 있는 곳에서 삶을 버리고 죽음을 취하더라도 할 만한데, 더군다나 크지 않은 비용으로 백성과 나라 둘 다 온전히 하는 도에 있어서랴? 아! 동포여, 힘쓰고 힘쓸지어다.
발기인 김재익(金在益) 박정준(朴正準)
국채보상상주의무소취지서에 나타난 것과 같이 상주에서 맨 처음 이 운동을 발기한 사람은 박정준과 김재익이다. 박정준(1859∼1931)은 상산 박씨이며, 김재익은 함창김씨로 예부터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집안 출신으로 보인다. 김재익의 출신지는 외서면 이하리이다. 그 실증으로 1907년 3월 3일자로 ‘상주군 외서면 이하리 국채보상소 입납’이라는 편지 봉투로 보아 상주의 국채보상운동의 거점이라고 판단되는 편지의 수신처가 외서면 이하리이고 받을 사람도 외서면 이하리에 사는 김재익이기 때문이다.
또한 함창에는 상주보다 2개월 보름이 늦은 1907년 6월 24일에 조직이 결성되었다. 황성신문에는 조직 결성의 취지서는 게재하지 않고, 결성한 발기인 명단만 발표하였다.
· 발기인 : 채규일(蔡圭一), 김규환(金圭煥), 채기❍ (蔡基❍), 정동낙(鄭東洛), 박주환(朴周煥)
- 회장 : 신관희(申觀熙)
- 부회장 : 권용학(權容學)
- 총무 : 김면수(金冕洙)
- 재무 : 김규환
- 형의장, 채세환(蔡世煥), 채규일(蔡圭一)
- 사찰 : 김사일(金思一), 류해식(柳海植)
- 평의원 : 채기❍, 정동낙
- 서기 : 고도림(高道林)
함창의 국채보상운동에 발기인으로 선창한 채규일은 성종 때 대사성을 역임한 양정공 蔡壽(채수)의 후손으로 일제 국권회복단 일원이었던 소몽 채기중, 채충진, 채세환, 채순만 등 적극적인 애국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집안사람들이다. 이들의 독립운동 활동은 김철수가 저술한 ‘상주의 항일독립운동’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신문에 취지서가 게재되었다는 것은 국채보상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는 것이고 신문에는 우리 상주의 국채보상상주의무소가 설립된 후 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그 실적이 신문에 속속 게재 되었다.
또한 특이한 것은 상주의 최오지인 화북면에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화북은 예로부터 우복동이라고 하여 문인현사들이 정착하기도 하였다.
한말에는 기호학맥의 적통이라고 할 수 있는 艮齋(간재) 田愚(전우)가 화북에 들어와 학방을 열어 수년간 후학을 배출하였다. 그 후 艮山(간산) 이원령(李元寧)과 정찬, 김지련 등이 그의 뒤를 이어 日新書堂(일신서당)을 설립한 것으로 보이며, 일신서당은 이후 장암강습소로 이어져 한말에 향민들에 대한 민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화북면은 3.1독립운동에서도 본 면과 용화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한 지역으로 어느 지역보다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상주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출연 - 성명책과 언론 발표 내용
국채보상운동의 상주지역의연금 출연 사실은 대부분 일간지 신문에 게재되었으나 1907년 2월과 3월에 작성한 ‘외서면유천동국채보상성명성책’에 수록한 의연금은 신문에 보도되지 않고 사실만 전한다.
상주의연금 사실은 ‘경상북도 상주시 국채보상운동 조사연구보고서’에 실린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의연사실(금중련 논문)’에 근거하였다.
외서면유천동국채보상성명성책
❐ 정미 2월 일
윤치용, 이호서당 외 31명 합계 16원 30전
- 김소사는 2회에 걸쳐 40전을 의연하였다.
❐ 정미 음력 3월 일
정지용 외 9명 합계 14냥(약 1원 40전)
이후 1907년 4월 9일 대한매일신보에 ‘상주국채보상운동의무소’가 개설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 4월 12일자로 상주의무소에 답지한 의연금의 내용을 처음 보도하였고, 1908년 1월 8일까지 모두 9회에 걸쳐 상주와 함창의 의연금 출연사실을 보도하였다.
❐ 대한매일신보 1907. 4. 12.
박정준 외 328명 합계 353원 30전
- 온가족 참여(박시태 가족은 본인, 아들, 종손, 부실)
- 머슴, 마부, 상민 등이 적극 참여
- 문중참여(이치운 문중)
❐ 대한매일신보 1907. 4. 13.
강신규 20원, 김재익 20원 합계 40원
❐ 대한매일신보 1907. 5. 12.
상주향교(상주향교 재원으로 연설장에서 先錄) 200원 합계 200원
❐ 대한매일신보 1907. 5. 31.
울산오씨 문중, 라상갈동, 김일대 외 373명 합계 142원 98전
❐ 대한매일신보 1907. 6. 22.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김시현 외 52명, 상유현리 외 8개리․동 합계 86원 28전
❐ 대한매일신보 1907. 7. 10.
상주 국채보상의무소 제2회 모집수납 합계 415원 64전
상주군 외서면 동백중리 이성호 외 40명 합계 14원 20전
❐ 대한매일신보 1907. 8. 15.
상주군 외서면 예의동중 이종욱 외 24명 합계 4원 8전
❐ 황성신문 1907. 8. 26.
함창군 채규일 외 79명 합계 300원
- 채규일 4형제 참여
3. 상주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집계
가. 언론모금현황(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 개인
참여인원 908명 모금액 855원 68전
❐ 문중
참여문중 3문중 모금액 17원 40전
❐ 마을
참여마을 10마을 모금액 67원 76전
❐ 향교
상주향교 모금액 200원
❍ 모금액 소계 1140원 84전
나. 상주국채보상운동성명성책 모금현황(외서면 이천동)
❐ 개인
참여인원 41명 모금액 13원 70전
❐ 서당
이호서당 1개소 모금액 4원
❍ 모금액 소계 17원 70전
다. 상주국채보상운동의연금 출연 총액
❐ 개인(75.04%)
참여인원 949명 모금액 869원 38전
❐ 마을(5.85%)
참여마을 10마을 모금액 67원 76전
❐ 문중(1.50%)
참여문중 3문중 모금액 17원 40전
❐ 향교(17.26%)
상주향교 모금액 200원
❐ 서당(0.35%)
이호서당 모금액 4원
❍ 모금액 총액 1,158원 54전
상주의 언론이나 성명성책에 의한 모금총액은 1,159원 26전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2016년 국채보상운동지역연구학술대회’(2016년 5월 27일)의 한상구 논문에 의하면 상주가 2,198명이 참여하였으며 출연금은 1,172원 22전이고, 함창이 300원이었다. 상주와 함창지역의 총액은 1,472원 22전이다. 따라서 이를 상주의 의연금 출연 금액으로 하고자 한다.
4. 상주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분석
상주지역에서 출연한 의연금 1,472원 22전이었으며 전국 의연금 출연액은 1910년 국채보상처리회 조사금액이 159,253원 99전으로 나왔으며, 주한 일본헌병대 내사 집계 자료(1908. 7.27)에는 187,787원 38전 7리로 나왔다. 그리고 한상구의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전개양상’에 의하면 전체 의연금 총액을 180,164원으로 조사 발표하였다. 따라서 전국 의연금 출연 총액을 180,164원으로 잠정 사용하기로 한다. 또한 경상북도의 참여인원은 31,520명이며 출연금액은 17,445원이었다.
이는 경상북도에서 참여한 33개 행정구역에서 상주가 출연한 의연금이 11.9%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매우 높은 참여율이었으며, 또한 상주가 전국에서 참여한 316개 행정구역과 7개 해외지역 및 단체의 전체 출연금액의 1.2%에 달하는 것은 상주 사람들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참여한 사람들을 분석하여 보면 개인, 가족단위와 마을, 문중, 향교, 서당 등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참여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신분제도가 뚜렷하였는데도 사대부 양반가문에서부터 시장의 상민, 청직, 부실(소실)에 이르기까지 망라되었다. 그러나 문중의 경우는 3개 문중(모금액의 1.50%)만 참여하였으며 전통적으로 오래된 사대부 명문벌족이 많은 상주에서 그들의 참여는 상주향교(모금액의 17.26%)를 통한 참여 외에는 매우 미미하였다. 또한 사대부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서원이 상주에 훼철되지 않은 서원 2개(훼철 서원 등 모두 15개)가 있었지만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서당도 20∼30개소가 있었지만 1개 서당(모금액의 0.35%)만이 참여하였다. 이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상주 관내의 유가적 참여는 매우 저조하였고 일반 시민(모금액의 75.04%)과 마을단위(모금액의 5.85%)의 참여가 높았다고 분석된다.
그리고 상주시민들의 참여율이 높았던 까닭 중의 하나가 서상돈이 상주 청리에 거주한 적이 있으며 서상돈이 천주교 신자였던 관계로 천주교의 참여가 높았으며, 발기인 중의 한 명이었던 강신규의 고향이 상주라는 점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상주 사대부 전통가문 문벌의 창성지라고 할 수 있는 청리, 공성, 외남 등 남촌에서 청리면만이 이 운동에 참여한 것은 서상돈이 어렸을 때 청리에 살았던 인연으로 추측된다.
Ⅲ. 상주의 국채보상운동과 시민책임정신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대한제국은 외세에 의해 무너져가고 있어 국가의 행정력은 힘을 잃고 있었으며, 한반도의 천연자원은 일본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의 강제적인 화폐개혁으로 경제는 불황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고 토착상인들의 상권은 일본 상인에 의해 위축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의 공감이었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상태에서 나라가 있고 국민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국가와 국민의 동질감이 강조되었으며, 동시에 국민 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또한 다양한 공동체가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대한제국 행정체제는 거의 붕괴되어 있었고 일본 통감부의 이사청 체계도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지역공동체로서 동․리가 작동되었고, 지역 유지들이 앞장서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각 문중과 향교, 사립학교 등이 참여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언론이었다. 언론은 각 지역의 발기문을 즉각적으로 보도하였고 다양한 논설을 통하여 국채보상운동의 의미와 필요성을 시민들에게 역설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양기탁의 국채보상기성회의 취지서가 게재되고, 장지연은 皇城新聞(황성신문)에 단연보국채라는 사설을 게재하였으며, 많은 신문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보도하는 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황성신문 1907년 2월 25일자 斷煙報國債(단연보국채) 장지연의 논설
…대한 광무 11년 새 봄의 제일 좋은 소식이 하늘에서 온 복음을 외쳐 전하도다.… 이 소식이 다른 소식이 아니라 곧 대구 광문사 부회장 서상돈씨 등의 단연동맹한 소식이로다.
단연동맹은 무엇을 하는 것이며 그것이 어찌 좋은 소식이 되는고, 우리 2천만 형제들아 다 함께 귀를 기울이고 들을 지어다. 내가 한바탕 설명할 것이니.
그것은 광무 9, 10 양년 중에 국채 1천 3백만 원의 차용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니 반드시 덧붙여 말할 것인 없거니와, 오직 이 1천 3백만 원의 상환이 과연 누구의 책임인고, 이것은 빚을 피하는 1억만 길의 담장을 높이 쌓는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으로는 피할 수 없는 앞으로의 한 큰일이다.
그것이 우리 국민이 마땅히 상환하여야 할 것이니, 금년에 갚지 않으면 명년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갚아주며, 명년에 갚지 않으면 재명년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갚아 주리오…
전국 300여 고을에 반드시 대구에서만 이런 남자들이 나올 것이 아니요 동포 2천만 명에 반드시 서씨 등 몇 사람만이 이런 뜻과 기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감히 믿는다. 이 기운이 한번 움직임에 따라 온 나라가 향응하여 장차 5종의 민족으로 모두들 우리 대한을 숭배하여 20세기 오늘의 세계에서 대한민국의 명예 聲價(성가)가 온 지구상에 환하게 비치게 될 것이다. 장하다, 이 소식이여. 기특하다, 이 소식이여. 손 모아 빌고 머리 숙여 절하여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고 땅을 굽어보며 춤추노니, 곧 후일 대한 독립사 첫머리 제1장에 대서특필하여 해와 별처럼 높이 받들 것이니 단연 동맹회의 서상돈 등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안에서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바로 밟는 무리라면 이 좋은 소식을 듣고 이 좋은 기회를 타서 국민의 의무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여, 국채를 보상하기 위해서 서상돈 등이 단연동맹을 제창한 것은 기쁜 소식이라 하여 이를 크게 환영하면서 그것이 국민 모두의 의무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현대적 의미를 정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운동은 북쪽은 함경북도로부터 남쪽은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각계각층의 온 국민이 호응하여 일어났으며, 빈부귀천 남녀노소 도시농촌 종교사상을 넘어 온 국민이 성심성의껏 참가한 거국적 범국민적인 애국정신을 크게 고양시켜 더욱 공고화하였다.
둘째, 이 운동은 일제통감부의 간교한 탄압책동과 이 운동 지도층의 한계성으로 1천 3백만 원의 모금액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온 국민이 참여한 1년 반 만인 1908년 7월까지 의연금은 20여만 원을 모급하였다. 이 성과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을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려는 온 국민의 염원과 단결심이 대단하였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온 국민의 결집된 힘은 국권회복운동,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앙양시켜 1919년 3․운동을 발발케 한 요인이 되었다.
셋째, 이 운동은 특히 여성들이 열성적으로 참가하여 국민을 크게 각성시키고 감동시킨 애국운동이다. 종래 전통적으로 사회활동에서 소외되어 온 여성들이 애국에 무슨 남녀구별이 있겠는가하고 분발하여 일어서서 은비녀와 금반지를 내어놓고 여학생들은 머리털까지 잘라 팔아서 성금으로 내었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애국정신과 애국운동을 높게 고양시키고, 여성들의 각성과 해방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넷째, 이 운동은 국민들의 애국정신과 애국운동을 경제․재정 등 실제적 측면과 결합시키고, 일제의 경제 침략에 대한 큰 경각심을 갖고 저항운동을 크게 고양시켰다. 이 운동은 경제적 독립자강운동의 중심을 이루었고, 그 후 전개된 모든 민족 경제운동과 1920년 ‘물산장려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다섯째, 이 운동의 모금액이 목표에 미달하고 일제의 차관은 그 후 계속 증가하게 되자 이 모금액으로 민립대학을 건립하려다 일제 통감부의 인허 거부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아래서도 이때의 모금액을 저축하여 두었다가 다시 1923년 ‘민립대학운동’을 전개하고 민족교육운동을 크게 발전시키게 된 경제적 기초가 되었다.
여섯째. 1945년 광복 후에 해방정국의 혼란과 범람한 외래제품에 대처해서 ‘국산품 애용 운동’으로 이 운동은 그 명맥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또한 1997년 우리 경제의 위기였던 IMF때에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주관으로 펼쳤던 300만 새마을 가족 3조 저축운동을 중심으로 한 ‘경제살리기 국민저축운동’은 이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경제살리기 ‘신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국채보상운동의 의미와 관련하여 상주의 시민정신을 찾아보면
첫째, 국채보상운동은 상주 최초의 국민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은 극소수의 친일세력이나 매판자본가를 제외한 모든 국민들이 동참하였으며, 상주에서도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걸인, 백정, 상민, 부실, 향교, 서당, 마을 단위 등에서 모금대열에 참여했다. 따라서 국채보상운동은 당신 상주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상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국민운동이었다.
둘째, 국채보상운동은 상주 최초의 시민운동이다. 국민운동의 주체가 시민이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상주지역에서 출연한 의연금 1,472원 22전은 전국 의연금 180,164원의 1.2%이었으며, 경상북도의 의연금 17,445원의 11.9%에 달하였다.
이는 상주 사람들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으며, 상주 시민 모두가 계층의 구별 없이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시민의식의 발로라고 본다.
셋째, 국채보상운동은 상주의 최초 경제주권회복운동이다. 일본 통감부는 한국의 자원을 개발하고 행정 체제를 개선하며 지하자원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자국의 차관을 통해 경제적 지배를 시작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금융공항이 발생하여 토착민족 자본이 파산되었고 일본의 금융지배가 강화되었다.
이는 경제적 침탈에 의한 주권이 빼앗길 것으로 생각하여, 경제주권 회복을 위해 금연운동, 패물폐지운동 등의 기부 운동을 통하여 국채 1,300만원을 갚자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상주에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침략기 등에 많은 사람들이 의병활동을 하는 등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그 정신들이 이어져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지키려는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으며, 상주에서 전국 어떤 지역보다 국채보상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구국정신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넷째, 국채보상운동은 상주 최초의 전 시민이 참여한 기부운동이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많은 기부가 있었다. 이는 국가의 위정자가 무능과 사욕에 의해 진 빚을 억압당하고 소외되던 서민들이 부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공감하고 절약과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갚겠다는 기부운동이었다. 상주 최초의 기부운동은 상주의 13개 문중이 참여 하여 설립한 존애원이다. 존애원은 전란으로 황폐한 시대에 병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시민들을 구하기 위아여 상주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구휼운동이자 애민운동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의료기관이며 상주의 가장 대표적인 애민사상이며 시민 기부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이 이어져 상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결국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의 맥락은 한국현대사에 있어서도 역시 민족자주독립운동이나 민족자주경제운동의 저력이 되어 한국민에게 불굴의 빛나는 전통을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었다. 또한 이 운동은 관이 아닌 민간인이 주도한 국민적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으며, 애국계몽운동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국난을 극복하려는 뜨거운 애국심과 강력한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상주의 시민책임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2016년 12월 16일에 건립한 상주시국채보상운동기념비 비문을 게재하면서 본고를 마치고자 한다.
상주시국채보상운동기념비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에 의하여 발의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운동이다. 이 운동은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기 위하여 벌인 국채 1천3백만 원을 갚아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외서면 이하리 즉 지금의 이천리에서 시작되었다. 이해 3월 3일 대구 단연회로부터 공함을 받은 김재익 박정준 등이 발기인이 되어 국채보상상주의무소취지서를 발표하였다. 함창지역의 취지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임원의 명단이 확인되고 있다. 황성신문 6월 24일자에 의하면 발기인은 채규일 김규환 정동락 박주환이고 회장은 신관희 부회장은 권용학 총무는 김면수이다. 상주지역이 일찍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 지역출신인 강신규가 대동광문회 국채보상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상주에서는 다양한 계층이 의연금 모금에 참여하고 있는데 사대부들은 향교를 통하여 200원을 출연하였고 이호서당도 참여하였다. 문중의 경우는 외서면의 오씨문중 최씨문중 이씨문중이 참여하였다. 개인으로 … 중략 … 그 밖의 다수인들이 참여하여 많은 금액을 의연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개한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국권수호운동이었고 발전된 대한민국이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선조들의 훌륭한 정신은 오늘날 나눔과 책임의 시대정신과도 연결이 된다. 그리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심을 고양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서기 2016년 12월 일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건립
참고문헌
1.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여성포럼(국채보상운동과 대구시민정신, 엄창옥), 2015.
2. 국채보상운동지역연구학술대회, 1097년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전개양상연구(한상구), 2016.
3. 김영호 외 2인, 책임을 다하다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2015.
4. 김철수, 상주의 항일독립운동, 도서출판 한솔, 2016.
5. 신동학 외 4인, 경상북도상주시국채보상운동 조사연구보고서, 2016,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6. 조항래, 국채보상운동사, 서울 : 아세아문화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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