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日帝) 강점기의 상주모습(2)
-지역엘리트와 정치공간-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1. 머리말
‘지역엘리트’란 지역사회의 공적인 사업이나 운동 등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공적(公的)’이라는 용어 속에는 식민지 권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민족운동 등도 포함된다.
그리고 반드시 고학력이라든가, 공직에 취임했다거나, 높은 경제적 지위를 가진 것이 ‘지역엘리트’의 필요조건은 아니며, 1920년대에 지역엘리트였다고 해서 1930년대에도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엘리트’는 전형적인 ‘엘리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도 포함하였다.
일본의 식민지로 있는 동안에 상주지역에는 여러 단체들의 성쇠가 심하였고 구성원의 유동성도 높았다. 학교를 세우거나 사업별로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양상은 흔히 볼 수 있었다.
또한 지역사회의 공적인 사업이나 운동으로는, ‘농촌진흥운동’과 ‘독립운동’ 같은 것이 있으나, 농민·노동자·지주 등 특정한 집단의 공통 이익을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간판만 내걸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사업과 운동도 많았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복수의 공적(公的)인 단체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존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복수의 공적인 단체들이 부대끼는 장(場)을 ‘정치공간’이라 규정하고 그 담당자가 어떠한 사람들이었던가를 주목하면서 지역사회 정치공간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2.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의 동향
사족(士族)과 이족(吏族)들은 혼인을 통한 혈연(血緣)과 서원·서당을 중심으로 한 학연(學緣) 그리고 한문 지식의 습득의 정도로 신분적 계층구조를 재생산하였다.
따라서 이런 네트워크가 식민지시대에 어떻게 지속되었고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의 새로운 존재양상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1) 사족혼인(士族婚姻)의 지속
사족간의 혼인은 그 실태를 밝히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조강희(趙康熙)의 연구를 토대로 사족간의 혼인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그는 10년간 영남지역 75개 마을을 찾아다니며 사족 가문의 혼인에 의한 연대(連帶)에 대해서 연구하였으며, 안동의 진성이씨(眞城李氏) 종손을 기준으로 위로 4대, 아래로 2대에 대해 각각 친가(親家)·외가(外家)·처가(妻家)의 혼인관계를 조사했다.
친가(親家)는 안동시(安東市)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있고, 외가(外家)는 봉화군(奉化郡) 봉화읍(奉化邑) 해저리(海底里)의 의성김씨(義城金氏)이며, 처가(妻家)는 상주시(尙州市) 외서면(外西面) 우산리(愚山里)의 진양정씨(晉陽鄭氏)였다.
‘중매혼’은 친가 쪽이 95쌍, 외가 쪽이 78쌍, 처가 쪽이 77쌍으로 총 250쌍이 이루어졌으며 이에 99문중이 연관되었다. ‘자유혼’은 친가 쪽이 45쌍, 외가 쪽이 14쌍, 처가 쪽이 34쌍으로 총 93쌍이었으며, 시기적으로는 1840년에서 1990년까지 150년간이었다.
중매혼의 경우에서, ‘양반과 비양반간에 이루어진 혼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조사대상 집안이 영남지방의 양반가문에서도 비교적 상층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정되며, 양반 가문끼리의 혼인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내내 지속되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상주와 관련된 것은 ‘처가’인 외서면 우산리의 진양 정씨 우복파(愚伏派)의 사례이다. 생몰년은 알지만 언제 혼인했는지는 조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1880년~1935년으로 한정하고, 이 가간에 정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거나 정씨 집안에서 출가한 경우를 조사하니 혼인이 40건이었는데, 시집온 사례가 16건이고 출가한 사례가 24건이었다. 그리고 혼인관계를 맺은 지역은,
<안동 - 13건, 봉화 - 3건, 문경 - 1건, 상주 - 4건, 의성 - 1건, 선산 - 2건, 성주 1건, 칠곡 - 5건, 대구·달성 - 6건, 고령 - 1건, 경주 - 1건, 영덕 - 1건, 영양 - 1건>
이었다. 따라서 우산의 진양 정씨 종가의 경우, 경상북도 일원이 통혼권(通婚圈)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혼인(婚姻)네트워크가 이렇게 광범위한 것은 상주의 사족 가운데에서도 진양정씨가 영남지역에서 매우 잘 알려진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상주보다도 안동 쪽과의 통혼이 많다는 점이다. 진성이씨 퇴계파와의 혼인 5건 외에, 하회(河回)마을의 풍산류씨 서애파(西厓派)와의 혼인 6건이었다.
지역과 관계없이 성씨별로 보면, 모두 20개의 성씨와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그 가운데에 풍산류씨 서애파가 8건, 안동의 진성이씨 퇴계파와 칠곡의 광주이씨가 각 5건, 봉화의 의성김씨 4건, 대구의 서흥(瑞興)김씨 한훤당파(寒暄堂派)가 3건, 상주의 풍양조씨 검간파(黔澗派)가 2건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시기에도 이처럼 철저하게 사족간의 혼인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2) 서원·서당을 정점으로 한 사족(士族)의 동향
서원(書院)의 교육기능이 언제까지 남아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단지, 화동면(化東面) 관제(官堤)에서 태어난 여석훈(呂錫塤, 1890~1958)의 자전(自傳)을 보면,
“화동면의 봉암서당(鳳岩書堂)에서 배운 뒤, 옥동서원(玉洞書院)에 가서 사서삼경을 비롯해 본격적으로 유학(儒學)을 수학했지만, 망국을 맞아 유학(儒學)을 그만두고 신학문으로 바꾸었다.”
고 밝혔다. 따라서 이 분이 학문에 뜻을 세운 것이 15세의 일이라고 하므로, 적어도 20세기 초까지는 옥동서원의 교육기능이 존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향사(享祀)를 매개로 한 네트워크도 지속되었다.
남인계열의 옥동서원에서는 식민지 시기와 관련된『준분록(駿奔錄)』,『분향록(焚香錄)』이 소장되어 있고, 노론계열의 흥암서원에는『분향록(焚香錄)』이 남아 있다. 따라서 식민지 시기에서도 향사를 비롯한 행사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은 대원군 시대에 훼철되어 ‘단소(壇所)’만 남았던 서원에서도 지속되었다. 예를 들면, 도남서원(道南書院), 효곡서원(孝谷書院) 이 그렇다. 이들 서원에서는 ‘단소’ 등을 거점으로, 돌아가면서 임원을 맡아서 이전의 문서를 관리 유지했다. 바로 이러한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에 몇 곳의 서원을 재건할 수 있었다.
흥암서원의 경우는 출판기능이 지속되었다. <표-1>은 1920년대에 흥암서원에서 출판되어서 총독부의 도서관에 납본(納本)된 것이다.
서명(書名) | 출판년 | 분량 | 인쇄 |
秋潭先生文集(成晩徵 著, 成海重 編) | 1926년 | 8권3책 | 목판 |
洞虛齋先生文集(成獻徵 著) | 1929년 | 1책 | 목판 |
同春堂續集(宋浚吉 著, 成植 編) | 1929년 | 12권8책 | 목판 |
<표-1> 식민지기 흥암서원의 출판사업
또한 서당을 매개로 한 네트워크의 지속과 변화는 도곡서당(道谷書堂)과 봉암서당(鳳巖書堂)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었다.
(1) 도곡서당(道谷書堂)
상주읍 서곡리(書谷里)에 있던 도곡서당은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도곡서당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중에서 식민지 시기의 자료로는,『임원록(任員錄)』,『당안(堂案)』,『세의대금지불부(歲儀代金支拂賻)』가 있다.
『임원록(任員錄)』을 보면, 도곡서당 설립 당시부터 ‘산장(山長)’과 ‘유사(有司)’라는 임원을 두고 8개 문중이 공동으로 장기간 운영해 온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일에 사회주의 운동을 한 강훈(姜壎)이 1922년에 유사를 맡았고, 노동공제회에서 활동했던 조성돈(趙誠惇)이 1925년에 유사를 맡은 것이 주목된다.
『당안(堂案)』은 서당 학생들의 기록으로 1938년 3월에 작성하였다. 이 자료에는 총 400명의 학생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140명 학생은 주소지가 기록되어있고, 260명은 주소지 기록이 없다. 이들은 아마도 도곡 주변에서 살던 학생이기 때문에 주소지를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주소지가 기록된 140명 가운데에도 16명은 지명(地名)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에 이 16명을 제외한 124명의 거주지를 분류한 것이 <표-2>이다.
거주지 | 인원(명) |
상주 안 | 54 |
경상도 | 28 |
충청도 | 16 |
경성 | 7 |
조선 서북부 | 5 |
만주 | 10 |
일본 | 4 |
<표-2> 도곡서당원의 거주지
학생들의 주거지가 상주와 영남지방에 그치지 않고 서울, 조선 서북부, 만주, 일본까지 라는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만주로 이민 간 10명은 모두 진주 강씨들이며, 그 가운데에는 종손인 강신종(姜信宗)과 그의 장남 강호석(姜好錫), 차남 강원석(姜元錫)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만주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1911년에 안동지방의 혁신유림인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과 의성김씨 김대락(金大洛) 등이 일족(一族)과 함께 서간도로 이주했는데, 상주사람 강신종(姜信宗)의 장남 호석(好錫)은 안동사람 석주 이상룡의 딸과 혼인을 했고, 강신종의 차남 원석은 의성사람 김대락의 조카 김규식과 혼인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들 집안이 집단으로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한다.
(2) 봉암서당(鳳巖書堂)
봉암서당 소장문서 가운데 식민지 시기의 자료는, 소속 학생부인『청금록(靑衿錄)』,『임원록(任員錄)』, 서당의 재건을 기념하면서 문중인사들이 한시를 읊은『봉암서당중수운(鳳巖書堂重修韻)』, 관(官)에 상소한『품목(稟目)』이다.
『청금록(靑衿錄)』에는 78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광산노씨 28명, 풍양조씨 24명, 성산여씨 11명, 진주하씨 8명, 풍산김씨와 상산김씨 7명이다.
『임원록(任員錄)』을 보면, 1937년 임원이 개선되었고 1940년 이후는 매년 임원을 다시 뽑았다.
『봉암서당중수운(鳳巖書堂重修韻)』은 노성한(盧性翰)이 ‘산장(山長)이었을 때의 기록이다. 당원이 중심이 되어 서당의 건물을 다시 세우면서 47명이 한시를 읊은 것이다.
“성익원(成益源), 이병식(李秉植), 조남섭(趙南燮), 김직원(金直源),
박준성(朴準成), 조두연(趙斗衍), 신태현(辛泰鉉), 김세영(金世榮),
이호식(李昊植), 정태영(鄭泰英), 이양래(李陽來), 조기연(趙箕衍),
신석철(申錫喆), 김봉희(金鳳熙), 김기룡(金基龍), 피희종(皮熙鍾),
김신제(金信濟), 조원연(趙元衍), 김상목(金相穆), 이태연(李台衍),
송병심(宋秉心), 노제직(盧濟稙), 송진규(宋鎭圭), 송진화(宋鎭璍),
황찬주(黃贊周), 노재연(盧載淵), 황창주(黃昶周), 이교영(李敎榮),
정상진(鄭相晋), 노재후(盧載厚), 노성한(盧性翰), 노상구(盧詳九),
조종구(趙鍾九), 노성좌(盧性佐), 조완구(趙琓九), 노병철(盧炳喆),
조덕구(趙德九), 조남규(趙南珪), 조남걸(趙南杰), 조동숙(趙東淑),
조남홍(趙南泓), 노재구(盧載龜), 노재찬(盧載讚), 하제현(河濟賢),
여영호(呂永護), 하상현(河相顯), 김원철(金元喆)“
품목(稟目)이란 연명(連名)으로 군수 등 관리에게 상소하고 그 회답을 구하는 문서의 형식이다. 보낸 곳은 ‘군수(郡守)’이고, 말미에는 봉암서당의 산장(山長) 노성한(盧性翰), 유사(有司) 조완구(趙琓九), 제원(諸員) 김상흠(金尙欽), 노상구(盧詳九), 조종구(趙鍾九), 조봉구(趙鳳九), 조남기(趙南驥), 김낙정(金洛定), 노성좌(盧性佐), 여해룡(呂海龍), 노재찬(盧載讚) 등 11명이 연서했다.’ 내용은,
“불행하게도 몇 년 전의 측량 때, 임목(林木)이 조금밖에 없다고 해서 담당 기수(技手)가 이것을 국유로 처분해 버렸는데, 이전과 같이 모두 서당으로 복귀시켰으면 한다.”
는 것이었다. 나중에 김화섭(金華燮)씨와 노진성(盧鎭誠)가,
“지금은 산림이 서당재산이며 이전에 흑연 등이 나오는 광산이 원통산(圓通山) 인근에 있어서 임대료 수입이 있었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서당의 소유가 된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여하튼 식민지 통치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조선시대의 형식으로 ‘관(官)’을 상대로 호소한 것은 흥미롭다.
3) 사족(士族)과 정치(政治)
혈연(血緣)과 학연(學緣)을 통한 사족간의 네트워크는 식민지 지배 속에서도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우선 향교(鄕校)를 둘러싼 상황이다.「상주향교(尙州鄕校)」에는 식민지 시기와 관련된 문서가 없다. 그리고 스즈키 에이타로(鈴木榮太郞)의 증언에 의하면, 상주향교는 19세기 중반에 이미 교육기능을 잃었으나, 1910년까지는 상주향교에 학부(學部)가 임명한 ‘직원(直員)’이라는 관직이 존재했었다. 는 기록으로 보아 행정기관의 기능은 잃지 않았던 것 같다.
1911년에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에 의해서 향교 직원은 명예직인 ‘문묘직원(文廟直員)’이 된 것으로 보아, 상주향교는 제사 기능만 남은 ‘문묘(文廟)’였고 향교의 재산은 군수의 관리하에 두었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추계석전제부터는 음력 8월에 행한 것을 음력 10월 15일에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주향교」의 유림(儒林)들은 1920년에 설립된「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 상주지회」에 대부분 가입하였으며, 1925년에는 성익원(成益源)이 회장이 되고, 회원 수는 1,500명에 이르렀다. 따라서 상주의 유림은 유도진흥회를 매개로 명맥을 이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유도진흥회」의 활동에서 두드러진 것은 사회교육사업이다. 우선 연령 초과로 보통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유림의 자식들이 보통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922년부터 군수를 회장으로 하는「대성강습소(大成講習所)」를 향교에서 열었다.
한편 독립운동이나 각종 사회단체에 참여한 사족계 인물도 많았다. 그래서 고등경찰도 사족계 인물을 특히 경계대상으로 삼았다. 실제로 경상북도 경찰부가 편집한『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1934)의 권말(卷末)에 ‘양반유생분포상황표’를 실었는데, <표-3>과 같이 12문중에서 9,912명의 ‘양반’을 집계하였으며, 그 중에서 ‘가장 주의를 요하는 자’로서 상주에서만 5개 ‘양반문중’에서 950명이 지정되었다.
물론 관헌 측의 선입견이 많이 배어 있는 문건이긴 하지만, 사회운동이나 신식 교육시설의 설립운동 등을 통해서 사족계의 청년층이 새로운 활동을 전개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식민지 시기의 사족은 보수성과 혁신성의 양면을 가진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종별(種別) | 족성(族姓) | 호수(戶數) | 인수(人數) |
양반 | 長水 黃 | 34 | 167 |
昌寧 曺 | 60 | 300 | |
昌寧 成 | 653 | 3,925 | |
豊山 柳 | 11 | 70 | |
韓山 李 | 45 | 249 | |
晉州 姜 | 28 | 135 | |
晉州 鄭 | 70 | 429 | |
豊壤 趙 | 188 | 912 | |
光山 盧 | 149 | 629 | |
礪山 宋 | 73 | 385 | |
商山 金 | 50 | 230 | |
仁川 蔡 | 440 | 2,481 | |
계 | 12 | 1,801 | 9,912 |
가장 주의를 요하는 자 | 5 | 950 | 5,471 |
<표-3> 고등경찰이 경계하고 있던 상주의 ‘양반’
4) 이족(吏族) 네트워크의 지속
식민지가 되어 읍치(邑治)의 공직(公職)을 잃은 이후에도 이족(吏族)은 사족(士族)과는 다른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천봉산 아래의 성황당이 이족(吏族)에 의해서 유지되어 온 것이 그 예이다.
1935년에 성황당(城隍堂)은 ‘양로당’의 어른들이 중수했으며, 양로당계(養老堂契)는 1924년에 조직되었다.
1907년, 무학당이 우연히 ‘공가(公家)의 부첩(簿牒)에 혼입되어 버렸다. 관(官)에 수용된 것이다. 그러나 1909년에 각 문중이 당국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끝에, 6년이 지난 뒤 겨우 돌려받았다. 그리고 이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토지를 희사 받아, 인봉리에 토지를 구해서 7칸짜리 양로당을 지어서 옮겼다. 그리고 그 유지를 위해서 계를 조직하여, 각 문중이 1원씩을 내었다.
<표-4>에 어떤 성씨(姓氏)들이 양로원(養老院)에 모였는지를 정리했다. 대부분이 조선시대에 호장(戶長)·이방(吏房) 등에 이름을 올린 성씨로 이족(吏族)의 네트워크가 양로당을 매개로 지속되었음을 볼 수 있다.
<표-4> 양로당계의 구성 문중(1924년~1945년)
姓氏 | 人數 |
商山 朴 | 69 |
慶州 李 | 16 |
金海 金 | 14 |
延安 車 | 14 |
達成 徐 | 7 |
晋州 姜 | 5 |
密城 孫 | 3 |
密陽 朴 | 2 |
金海 李 | 2 |
江陵 崔 | 1 |
係 | 133 |
「성황당중수기」에 따르면, 박만식(朴晩植)이 주간을 맡았고, 성황당 옆에 있는 바위에 신이 내렸다 하여, 그것을 각(閣)으로 덮고 박만식이「영암각(靈巖閣)」이란 현판을 썼다.
그리고 이 때 농지 800평을 양로당에 귀속시켰고, 1936년에는 성황사의 토지 8,660평을 상산박씨 문중에 위양(委讓)했다. 결국 이러한 공적은 박만식 때문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황당의 바위에 ‘수서기박만식영세불망비(首書記朴晩植永世不忘碑)’라는 글귀를 새겼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부터 계속된 성황당 및 1924년에 조직된 양로당계를 중심으로 이족의 네트워크가 지속되었다.
5) 이족가문(吏族家門)의 새로운 전개
공식적으로는 향리가 관료기구에서 배제되었지만, 이족(吏族)이 새로운 관공리(官公吏)로 진출한 사례가 있다.
1906년~1908년까지 호장을 지낸 박정한(朴挺漢)은 1910년대부터 1928년까지 18년 동안 상주면장을 지냈다. 그 후 일본인이 면장을 하자, 1929년에는 상주면협의회원에 당선되었다.
또한 외남면장이었던 박인수(朴寅洙)는 1913년에 경상북도가 작성한『면리원선장사적(面吏員選獎事蹟)』에서 모범사례로 소개되었으며, 나중에 상주곡자조합의 조합장과 도(道) 평의원이 되었다.
박정준(朴正準)은 양로당계의 중심인물로, 1907년「상산금융조합」을 설립하고 20년이 넘도록 조합장을 지냈으며, 1928년에는「전조선금융조합연합회(全朝鮮金融組合聯合會)」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이와 같이 병합을 전후해서 이족들이 새로운 지배기구로 들어갔다.
한편 이족(吏族)들은 읍내에 있는 ‘서보(西洑)’를 유지 관리해 왔다. ‘낙양수문비(洛陽水門碑)’를 보면,
서보(西洑)가 낡아져서 1926년 3월에 종래의 석축(石築)을 석회관(石灰管)으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공사비용은 관개하는 지주(地主)가 부담하고 공사시설은 상주면에 위촉했다. 1927년 2월에 착공하여 4월에 준공하였고, 부속공사는 이듬해인 1928년 2월에 마쳤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업에는 다수의 이족출신들이 참여하였다.
<낙양수문비 뒷면>
고문(顧問) 박정준(朴正準)*
관개조합(灌漑組合)대표(代表) 박정현(朴正鉉)* 박정렬(朴正烈)*
석정기(石鉦基)
도감(都監) 차재욱(車載旭)* 정일권(鄭一權) 이동섭(李東燮)*
박주익(朴周翊)
간사(幹事) 김용서(金龍瑞) 김준일(金俊一) 외 7인(人)
<낙양수문비 옆면>
정경도(鄭敬道) 이복룡(李伏龍) 민병하(閔炳夏) 임자선(林子善)
황점보(黃点甫) 이춘선(李春先) 이재하(李在夏)
여기에서 *는 양로당계 인사이다.
고문인 박정준(朴正準)이 양로당 대표이고 이족계 인물인 것으로 보아, 서보의 보수는 읍내의 ‘몽리지주(蒙利地主)’들이 하였고 그 중심에 이족계의 중심인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침천정(枕泉亭)」과「상산관(商山館)」의 보존 이전사업도 이족과 읍내 사족층이 주도하였다.
「침천정(枕泉亭)」의 전신인「이향정(二香亭)」에는 1907~1910년 사이에「농상공은행지점(農商工銀行支店)」이 들어섰는데, 시구(市區)개혁에 따라 이향정이 이전하게 되자, 1917년 ‘향지동지(鄕之同志)’ 수 십명이 자양산 기슭의 약수(藥水)로 유명한 장소로 이전하면서「침천정(枕泉亭)」으로 개명(改名)하였다.
‘향지동지(鄕之同志)’가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같은 해에「침천정기(枕泉亭記)」를 이족출신인 박정준이 썼다는 점과 사족이자 자산가인 조남탁(趙南倬, 풍양조씨), 황필선(黃泌善, 장수 황씨), 강신학(姜信鶴, 진주 강씨), 강신원(姜信元, 진주 강씨)을 비롯한 16명이 각각 시문(詩文)이나 상량문(上樑文)을 보낸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족과 읍내에 진출한 사족층이 이를 주도했다고 생각된다.
「상산관(商山館)」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셨기 때문에, 수령이 부임하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참배하는 장소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1907년 상주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이「상산관(商山館)」을 교사로 사용하였고, 상주공립보통학교와 상주공립여자보통학교가 분리된 후에는 상주공립여자보통학교가 이 건물을 사용하였다.
1939년 가을. 박인양(朴寅陽), 조용연(趙龍衍), 박정소(朴正紹), 박인수(朴寅洙) 네 사람이 상산관을 ‘상주의 발자취(邑蹟)’로 남겨야 한다며 거액을 들여 사 두었고, 조각연(趙珏衍)을 회장으로 기성회를 조직하여 1940년에 이 건물을 농잠학교와 향교 부근으로 이축(移築)하여 미취학 아동을 위한 간이과정을 가르치는 장소로 이용했다.
이때 상산박씨와 풍양조씨, 이족계와 사족계의 인물이 함께 신식교육 관련 사업과 근세의 ‘읍적보존사업’에 동시에 관여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 지역 사회운동의 위상
1)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시작되었으며, 일제의 국채 1,300만원을 단연동맹(斷煙同盟)으로 갚아버리자는 취지였다.
2월초에 전국에 국채보상취지서를 반포하고 이어서 2월 21일에 대구의 북후정(北堠亭)에서 국채보상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자, 경향 각지에서 참여하는 단체들이 속속 조직되는 등 각 지방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이 운동은 국권회복차원에서의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외서면 유천면 국채보상 성명성책(外西面 有川洞 國債報償 姓名成冊)」이 작성된 것으로 보아 상주에서도 발 빠르게 의연금을 접수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07년 3월 3일에 발신처가 없는 ‘상주 외서 이하리 국채보상소 입납(尙州 外西 伊下里 國債報償所 入納)’이라는 편지 봉투가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던 강신규(姜信圭)선생이 국채보상 대구군민대회가 있은 후 곧 바로 상주에 내려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상주의 의연금 수합소는 김재익 공이 거주하였던 외서면 이천리였다. 같은 해 4월 9일 대한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상주의 국채보상운동결성에 대한 광고기사가 실렸다.
<국채보상 상주의무소 취지서(國債報償 尙州義務所 趣旨書)>
무릇 백성과 나라와의 관계는 나무가 뿌리가 있고 물이 근원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뿌리가 굳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장대하고, 나라가 부귀하면 백성이 편안 합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뿌리 없는 나무가 있으며, 근원 없는 물과 나라 없는 백성이 있겠습니까? 삼가 우리 3천리 강토에 2천만 백성들이 5백년 동안 화육의 은택을 입어 길러지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대 황제폐하께서 황제가 되신지 4년 만에 어짊이 드리워지고 아래 백성을 민망히 여겨 하늘에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간란한 운세를 만나서 나라가 쇠약해지고 백성이 병듦에 지탱하기 어려운 많은 형상은 손으로 다 꼽을 수가 없고, 국고의 예산이 궁핍하고 지불할 계책이 없어서 1,300만원이라는 거금을 외국에서 차용하여 매년 정해진 공납을 들어올 것과 나갈 것을 계산해 보면 항상 부족함을 근심하는데 어느 겨를에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몇 년이 지나 뒤바뀌어 꼬리가 커진다면 곧바로 병폐가 되어서 나라는 나라꼴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천지가 비록 크다고 하지만 백성들은 어디로 돌아갈 것이며, 토지와 가산이 한갓 우리의 소유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이나 처자도 또한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니, 재산이 있은들 어디에 쓸 것이며, 곡식이 있은 들 누구에게 먹일 것입니까?
흥분된 말이 여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다행스럽게도 대구사회에 김광제, 서상돈 두 사람이 의리를 내어서 선창하여 전국에 인구가 3개월 동안 금연하는 비용으로 빚보다 많은 수가 되니, 무리를 일깨워 의연금을 내어 꼭 빚을 청산할 것을 도모하니, 경도(京都)와 부군(府郡)의 소문이 서로 호응하여 향응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떳떳한 성품은 사람들이 함께 부여받은 것이요, 온 나라 안의 백성들은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아! 우리 상주 땅의 몇 만리 동포도 따로 지사를 설립하고 각자 정성을 내되, 어찌 다만 금연하는 것이 평소의 술먹고 고기 먹으면서 허비하는 비용을 줄이고 돈을 모아서 1원 2원에서부터 천만에 이르기까지 그 힘닿는 대로 그 돈을 본사에 부쳐서 국가의 만분의 일이라고 깊은 은혜와 두터운 은혜를 갚은 것만 같겠습니까? 사람마다 이와 같이 하고 고을마다 모두 그렇게 한다면 이른바 흙을 쌓아 산을 이루고 물을 모아 바다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불과 몇 개월 만에 충분히 빛을 청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맹자가 이르지 않았습니까? 물고기도 먹고 싶고 곰 발바닥도 먹고 싶지만 반드시 해야 된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의리가 있는 곳에서 삶을 버리고 죽음을 취하더라도 할 만한데, 더군다나 크지 않은 비용으로 백성과 나라 둘 다 온전히 하는 도에 있어서랴?
아! 동포여, 힘쓰고 힘쓸지어다.
- 발기인 김재익(金在益) 박정준(朴正準) -
1907년 6월 24일자 황성신문에, 조직 결성의 취지서는 게재하지 않고 함창의 명단만 실렸다.
〈함창의 국채보상운동 결성내용〉
ㆍ발기인 : 전도사(前都事) 채규일(蔡圭一) · 전의관(前義官) 김규환(金圭煥) · 유학(幼學) 채기○(蔡基○) · 정동낙(鄭東洛) · 박주환(朴周煥)
ㆍ회 장 : 유학(幼學) · 신관희(申觀熙)
ㆍ부회장 : 권용학(權容學)
ㆍ총 무 : 전참봉 김면수(金冕洙)
ㆍ재 무 : 전의관 김규환
ㆍ형의장 : 유학 채세환(蔡世煥) · 채규일(蔡圭一)
ㆍ사 찰 : 전주사 김사일(金思一) · 유학 류해식(柳海植)
ㆍ평의원 : 채기○ · 정동낙
ㆍ서 기 : 유학 고도림(高道林)
상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은 앞의 발기 취지문에 기재된 분들과 대구의 국채보상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한 강신규( 姜信圭 1875~1920)선생이었다.
상주와 함창에서 출연한 금액은 1,442원 22전이었으며, 현재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3천8백 여만원이고 참여한 인원은 수천명이었다고 추정하였다.
2) 상주의 3·1운동과 그 주체
제1차대전 이후 세계적인 민족운동의 물결과 맞물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 집회가 열렸으며, 이를 계기로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示威)’가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상주도 이 흐름 속에서 3월 23~24일 상주읍내, 3월 29일 이안면, 4월 8~9일 화북면에서 총 5차례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일자 | 장소 | 참가인원 | 주모자 |
3월 23일 | 상주장터 | 약 500명 | 석성기, 강용석, 성필환, 한암회, 조월연, 김성덕, 송인수, 박인옥, 성해식, 장재관 |
~24일 | |||
3월 29일 | 이안면 소암리 남측 제방 | 약 20명 | 채순만, 채세현 |
4월 8일 | 화북면 문장대 | 약 100명 | 이성범, 김재갑, 홍종흠 |
4월 9일 | 화북면 운흥리 | 약 100명 | 전성희, 정양수 |
<표-5> 상주의 3·1운동
(1) 상주 읍내에서의 만세시위운동
상주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은 상주장터에서 3월 23과 24일에 일어났다.
“상주의 양반 자제로서 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 성필환, 경성 중동학교 생도 한암회, 보통학교 생도 조월연 및 경성 국어보급학관생도 석성기 등 수 명은 각지의 소요를 본떠 3월 23일의 상주 장날을 이용해 군중을 선동 시위운동을 행하고자 3월 중순에 협의하였는데,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한암회는 동지에 솔선해서 구 한국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였기에 시장 단속 중의 헌병에게 바로 체포되었고, 마찬가지로 양반 자제인 청년인 성성인(成星仁)이란 자는 한암회의 만세 고창에 의해 군중이 동요됨을 기화로 하여 오후 6시 40분경 약 3백의 군중을 향해 시장 입구의 누문(樓門) 계단에 서서, ‘나는 비록 천한 자이지만 이번에 조선독립을 할 수단으로, 제군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자 한다’고 전제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결과 군중 가운데 학생 기타 약 70명은 이에 창화(唱和)하였으므로 바로 주모자 이하 5명을 체포하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튿날인 3월 24일. 서울의전에 재학 중이던 석성기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다시 만세의 햇불을 들자‘고 하였고, 강용석 등이 호응하자, 사람을 규합하고 태극기 30매와 호소문 70매를 준비하여 전날에 이어서 상주장터에서 두 번째 만세운동을 하였다. 주동자들은 현장에서 모두 체포되었다.
상주장터 만세시위의 주동자 중에서 강용석(姜龍錫), 조월연(趙月衍), 한암회(韓岩回), 성해식(成海植)은 사족 가문출신이다. 강용석(姜龍錫), 조월연(趙月衍), 한암회(韓岩回)는 남인계열이었고, 성해식은「흥암서원」에 출입하던 노론계 사족이었다. 즉 ‘남로(南老)’대립을 뛰어넘어 함께 참가한 것이다.
또한 주동자 중에서 4명은 신교육을 받았다는 것도 주목된다. 강용석과 조월연은 상주공립보통학교 출신이고, 한암회와 석성기는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따라서 만세시위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대된 사실과 한암회와 석성기가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도 주목할 일이다.
(2) 소암리(小岩里) 만세시위운동
이안면 소암리(小岩里)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사족가문인 인천 채씨가 주도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고등경찰은,
“소암리 양반 채순만(蔡淳萬), 채세현(蔡世鉉)등이 주모자가 되어 같은 동네의 채씨 일족 청년 약 20명을 선동하여, 3월 29일 오후 10시경 소암리 남측 제방 위에 집합시켜 두 사람이 몸소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수십 차례 창화(唱和)시킨 것을 후일 탐지하여 바로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소암리 채씨 집안의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사건의 세부사항을 좀 더 알 수 있다.
“당시 소암리 앞에는 큰 수로가 지나고 물레방아간도 있었다. 3월29일 밤. 채순만·채세현 외에 마을에 살고 있던 채순송(蔡淳松)·채순욱(蔡淳旭)·채경현(蔡景鉉)·채극현(蔡極鉉)·채순목(蔡淳穆) 등 채씨 일족 수십 명이 제방을 따라 걸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여러 번 외쳤다. 그렇게 400m 정도 내려가 까치산(鵲山) 옆의 길로 나아가 다시 큰 소리로 만세를 외친 후에 마을로 돌아왔다. 흥분이 가라않지 않은 일행은 모여서 막걸리를 돌려가며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한 달 전에 광복회사건으로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심리를 받고 있던 소암리 출신의 채기중에게 사형판결이 언도된 바가 있었다. 화제는 자연히 소몽의 일로 흘러가 참가자가 모두 통곡했다고 한다.
그 후 20여명이 체포되었다. 특히 주모자로 간주된 채순만과 채세현은 보안법 위반죄로 각각 대구형무소에서 8개월(구형 2년), 경성형무소에서 6개월(구형 10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3) 화북면에서의 만세운동
화북면에는 큰 사족(士族) 문중(門中)은 없으나, 많은 성씨(姓氏)들이 입향(入鄕)한 것이 특징이다. 1930년 당시 화북면 인구가 7,700명인데 다른 면(面)에서 온 사람들이 1,679명(21.8%), 다른 도(道)에서 온 사람이 1,506명(19.6%)이었다. 1920년대 이후 아나키스트로서 이름을 날린 박열(朴烈) 일가가 이주(移住)했던 곳이기도 하다.
화북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4월 8일에 속리산 문장대에서 1차로 전개되었고, 다음날 운흥리에서 2차 일어났다.
화북면의 만세운동은 당시 장암리 구장이었던 이성범(李聖範)이 주도하였고, 같은 마을에 사는 이용회(李容晦), 김재갑(金在甲), 홍종흠(洪種欽) 등이 독립시위운동을 기획했다. 이들은 모두 ‘양반’출신이었다. 이성범은「화은사숙(華隱私塾)」이라는 서당을 1941년에 개설하여 문중 및 동리의 청소년에게 한문(漢文)교육을 베풀었던 사람이고, 이용회는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였다.
4월 4일 이들은 권유문(勸誘文)과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4월 8일에 장암리 사람 약 70명과 함께 문장대로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주모자 4명 외에 5명이 더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태형에 처해졌고, 주모자 4명은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4월 9일의 시위는 전성희(全聖熙)와 정양수(鄭良洙)가 주도했다. 이 두 사람은 운흥리(雲興里)와 중벌리(中伐里)의 주민 약 100명을 운흥리에 모이게 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전날의 시위에 놀랐던 상주 헌병대의 분대장과 헌병 4명, 상주수비대의 하사와 군인 8명이 곧바로 현장으로 가서 주모자를 비롯해서 20명을 체포하였다. 이 시위사건으로 정양수는 1년 3개월을 선고받았고, 전성희는 1년간 수감되었다.
화북의 만세시위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이성범이 1944년에 이원재(李元宰)와 함께 의병대장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의 유해를 가매장지인 제천에서 현재의 화북면 입석리(立石里)로 이장한 사실이다.
3) 1920년대 정치공간의 재편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의 이른바 ‘문화정치’때 상주청년회와 다양한 단체가 상주에서 결성되고, 이를 주도한 것은 ‘유지’ 혹은 ‘청년’이었다.
그리고 1920년대는 지방의 단체활동이 활성화 되었다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는 침체 또는 변질되는 양상이었다. <표-7>은 1920년대 상주에서 조직된 단체들의 동향을 정리한 것이다.
<표-7> 상주 사회단체의 변천
사회단체명 | 설립년월일 | 위치 | 주요간부 | 회원수 | 비고 |
상주청년회 (尙州靑年會) | 1919년 10월 | 읍내 | 朴正鉉,金億周 외 | 200→100 | 초기명칭은‘상주구락부(尙州俱樂部)’ |
함창청년회 (咸昌靑年會) | 1920년 4월 | 함창 | 金漢翊, 金漢玉 蘇漢玉 외 | 80→60 |
|
유도진흥회 상주지회(儒道振興會 尙州支會) | 1920년 11월 | 읍내 | 成益源 외 | 1500→680 | 상주군내 유림들 조직 |
옥산청년회 (玉山靑年會) | 1921년 | 옥산 | 鄭琪燮 | 30→61 |
|
상주문우회 (尙州文友會) | 1921년 8월 | 읍내 | 韓岩回 朴熙俊 외 | 50 | ‘유학생’모임 |
상주유심소년회(尙州唯心少年會) | 1922년 | 읍내 | 錢藏憲 외 | 40 | 불교계의 소년운동 |
상주체육단 (尙州體育團) | 1922년 | 읍내 | 朴辰燮 외 | 40 | 지방체육사업 |
상주수평동맹회(尙州水平同盟會) | 1923년 8월 | 읍내 | 徐相烈 劉宗漢 李玟漢 朴準熙 외 | 45 |
|
상주노동조합 (尙州勞動組合) | 1923년 | 읍내 | 劉宗漢 金基穆 池璟宰 朴哲 외 | 200 | 상주청년회관내 사무국 |
청리청년회 (靑里靑年會) | 1923년 12월 | 청리 | 金允鍾 黃一鶴 朴敬來 | 30→77 |
|
갑자구락부 (甲子俱樂部) | 1924년 | 읍내 | 姜壎 | 20 | 1925년에 건설동맹이라고 개칭 |
상주새모음 | 1924년 7월 | 읍내 | 朴寅玉 池景宰 朴淳 외 | 18 | 1925년 상주청년회에 합류 |
상주상우회 (尙州尙友會) | 1925년 | 읍내 | 朴正鉉 朴東和 石應穆 梁然翁 |
|
|
상주청년연맹 (尙州靑年聯盟) | 1925년 10월 | 읍내 | 池景宰 朴淳 朴哲 金大福 |
| 각지 청년회의 연합 |
상주노동청년회 (尙州勞動靑年會) | 1925년 가을 | 읍내 | 朴哲 |
|
|
연봉청년회 (蓮峰靑年會) | 1925년 11월 | 외서 | 姜龍壽 金周永 安基烈 | 50→30 | 농촌청년 해방을 목표로 한 교육운동 |
중모청년회 (中牟靑年會) | 1925년 12월 | 모동 | 黃在殷 외 | 104 | 회관 건축, 무산아동에게 야학 |
상주독서회 (尙州讀書會) | 1926년 1월 | 읍내 | 朴東旭 朴仁根 姜壎 외 |
| 사회과학 연구 |
상주기자동맹 (尙州記者同盟) | 1926년 2월 | 읍내 | 池璟宰 외 | 기자수 13 | 東亞 朝鮮 時代 각 신문 등의 상주지국 기자 |
상주노동친목회 (尙州勞動親睦會) | 1926년 2월 | 읍내 | 李聖實 朴石柱 외 | 70 | 경북선 상주역 노동자가 중심 |
상주신우회 (尙州信友會) | 1926년 3월 | 읍내 | 朴淳 池璟宰 朴寅玉 金億周 朴哲 金大福 鄭琪燮 | 20 | 군내 운동의 ‘최고지도기관’을 자임하는 사상단체 |
외남청년회 (外南靑年會) | 1926년 4월 | 외남 | 金英泰 車南龍 |
| 교육 |
상주무산청년회 (尙州無産靑年會) | 1926년 5월 | 읍내 | 姜壎 朴哲 |
| 무산청년운동 |
양촌자치회 (梁村自治會) | 1926년 10월 | 상주 | 姜信愚 외 | 50 |
|
함창협동조합 (咸昌協同組合) | 1927년 1월 | 함창 | 黃履正 錢俊漢 | 400 | 1927년 상반기 매상 5천원,간부는 공산주의자 |
상주협동조합 (尙州協同組合) | 1927년 4월 | 읍내 | 金元漢 錢俊漢 | 150 | 간부는 공산주의자 |
중모협동조합 (中牟協同組合) | 1927년 4월 | 모동 | 趙南哲 黃在殷 | 200 | 1928년 2월 해산 |
청리협동조합 (靑里協同組合) | 1927년 9월 | 청리 | 金在濬 金允鍾 | 220 | 1929년 3월 해산 |
신간회 상주지회 (新幹會尙州支會) | 1927년 9월 | 읍내 | 鄭在龍 朴正鉉 姜信愚 朴東和 朴淳 池璟宰 姜壎 金億周 | 200 |
|
상주청년동맹 (尙州靑年同盟) | 1927년 10월 | 읍내 | 朴淳 李玟漢 金億周 외 |
| 상주청년동맹을 해체 재편 |
삼익농민회 (三益農民會) | 1927년 11월 | 함창 | 金顯達 李鍾九 외 | 200 | 3동의 농민이 연합해서 조직 |
청총상주군위원회(靑總尙州郡委員會) | 1928년 3월 | 읍내 | 정의섭 김억주 박인근 황재은 김한익 박순 외 | 427 | 상주청년동맹을 해체 재편 |
대평농민조합 (大坪農民組合) | 1928년 4월 | 외서 | 權聖熙 金允熙 金容澤 朴周浩 | 20 | 상주청년동맹 간부가 조직 |
고려공청상주야체이카(高麗共靑상주 야체이카) | 1928년 | 읍내 | 姜壎 |
|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 |
이들 단체들을 시기별로 나누어 그 특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3·1운동 후 다양한 단체의 성립(1919~1924년)
상주에서 ‘사회단체’로서 최초로 조직된 것이「상주청년회」이다. 3·1운동의 흐름을 이어받아 1919년 10월 26일 “한홍우(韓弘佑), 강상희(姜相熙), 석응목(石應穆) 외 청년 수십명의 발의로「상주청년구락부(尙州靑年俱樂部)」를 창립하였는데, 상주를 대표할 만한 실업가, 의사, 각황각색(各況各色)의 계급이 망라되었다.”
그 후 이듬해 4월에 명칭을「상주청년회(尙州靑年會)」로 바꾸고 3천원을 들여서 회관을 신축했으며, 사족계 3명, 이족계 1명 등 4명의 자산가가 출자하여「보명학원(普明學院)」을 설립한 것을 운영하고, 각종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상주 청년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상주청년회」는 계급이나 연령을 초월하여 조직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청년회 초기의 간부 구성을 보면, 회장 조용연(趙龍衍)과 조후연(趙厚衍)은 풍양조씨로 자산가였으며, 진양정씨인 정재석(鄭在奭)은 입재(入齋) 정종로(鄭宗魯)의 아들인 정상진(鄭象晉)의 2남 직계손(直系孫)으로 모두 사족가문이고, 박희성(朴熙成), 차우섭(車佑燮)은 이족가문 출신이다.
또한 발기인의 한 사람인 석응목(石應穆, 1894년생)은 읍내의 명주(明紬)상가에서 태어나,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군청서기를 거쳐 정미소와 제사공장을 경영하는 등 대표적인 자산가였다.
그 후「함창청년회(1920년)」,「옥산청년회(1921년)」,「청리청년회(1923년)」등 지역을 대표하는 청년단체가 잇달아 결성되었다.
그 밖에도 1921년 8월에 발족한「상주문우회(尙州文友會)」는 경성의학전문교생인 박희준(朴熙俊), 박원섭(朴元涉) 그리고 경성청년학관생인 강용(姜鎔) 3인이 발기 조직하였다. 이 문우회는 강연회나 음악회의를 주로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박원섭은 박정현의 아들로서 박희준과 함께 이족계인 상산박씨 출신이며, 신학문을 배운 인물들이 이런 조직을 만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였다.
「상주수평동맹회(尙州水平同盟會)」는 ‘천차만별인 무수한 계급을 타파하고, 만인이 수평선상에서 동일한 보조로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목적 아래 1923년 8월 9일 상주청년회관에서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주로 강연활동을 벌였는데, 연사로는 서상렬(徐相烈), 유종한(柳宗漢), 이민한(李玟漢), 박준희(朴準熙) 등이었으며, 서상렬(徐相烈)은『양로당계안(養老堂契案)』에 이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족계 가문 출신으로 보였다.
「상주노동조합(尙州勞動組合)」은 1923년에 유종한, 김기목(金基穆) 등의 발기로 결성되어 상주청년회관에 사무소를 두었다. 초기에는 ‘온정주의’를 표방하였고, 몇 차례 노동쟁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밖에 이 시기에는 전국적인 유림조직인「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의 상주지회, 불교사원이 경영하던「보광강습소(普光講習所)」를 거점으로 한「상주유신소년단(尙州唯心少年團)」, 서정리(西町里)에 거점을 두고 체육사업에 힘을 기울인「상주체육단(尙州體育團)」,「기독청년회(基督靑年會)」,「여자기독청년회(女子基督靑年會)」 등이 생겨났다.
이러한 단체들이 연합하여 사업을 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일정한 연결이 있었던 듯하다.
이 시기에는 교육운동이 가장 왕성했다. 읍내에「보명학원(普明學院)」,「보광강습회(普光講習會)」,「대성강습회(大成講習會)」, 낙동에「조명강습회(朝明講習會)」, 내서에「진명강습회(進明講習會)」, 화동에「자양학원(紫陽學院)」등 ‘사설학술강습회’가 잇달아 설립되었다.
이들 단체들은 지역사회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학예회나 운동회 등을 빈번하게 개최하였고, 종종 지역의 자산가가 이를 지원하였다. 1923년「상주청년회」가 주최한 운동회에 조강연(趙珏衍)이 40원을 기부했고, 같은 해「상주유심소년회」주최의 축구대회에 대성사(大成寺) 여승과 이병호(李炳浩), 김경봉(金慶鳳) 등 18명이 기부금을 내었으며, 1924년「 보명학원」·「보광강습소」·「농잠학교」·「소년단」·「체육단」 등이 겨룬 ‘상주축구대회’에는 김현경(金玄鏡), 조용연(趙龍衍) 등 28명이 1~5원씩을 기부금을 내었다.
(2) ‘청총(靑總)’결성과 ‘혁신’의 움직임(1924년~1927년)
1924년 4월, 서울에서 대립하던「서울청년회」와「신흥청년동맹」이 ‘대중 본위의 신 사회 건설’과 ‘조선민중해방운동’의 선구가 될 것을 내세워서 각 지역의 223개 청년단체를 결집시켜「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靑總)」을 결성했다. 여기에「상주청년회」,「함창청년회」,「옥산청년회」가 가입했다.
각 지역의 청년회는 이를 계기로 ‘혁신총회’를 열고, 회장과 간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회원 주도의 조직, 연령 제한과 기부금이 아닌 회비제의 도입 등을 시도했다.
실제로 1924~1925년에 걸쳐서 상주의 청년회도 변화를 모색했다. 우선 1924년에「‘상주새모음」이라는 사상단체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박인옥(朴寅玉), 지경재(池璟宰), 박순(朴淳), 신영균(申永均), 김경인(金慶仁) 등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청년들이 조직하였으나, 1925년에「상주청년회」로 흡수되었다.
1925년 2월 22일에 상주의「보명학원」에서는「경북 사회운동자 간친회」와 이튿날「경북지방 청년대회 발기회」가 열렸다. 그러나 청년대회의 발기인회에서는 3월 10일 김천에서 대회를 열기로 하고 준비했으나 당국의 금지로 대회를 열지 못했다.
간친회에서는 다음 2가지 사항이 중요한 결의사항이었다.
① 노동운동·청년운동에 있어서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를 취할 것,
② 가짜 사회주의자와 보수분자의 지도하에 있는 노동조합·청년단체를 적극적으 로 개혁하고 그들을 ‘무산계급의 사명으로 교도할 것’
「상주청년회」에서는 이 결의를 받아 들여서,
① 회장 중심이 아니라 집행위원회 방식으로 민주화할 것,
② 장년층을 배제하고 명실상부한 ‘청년’층으로 조직할 것,
③ 기부금에 의한 운영에서 회비제로 이행할 것,
④ 부서(部署)를 개편할 것
을 추진하였다.
이 후 상주에서는「상주상우회(尙州尙友會)」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는 1925년「상주청년회」의 개혁에 따라 자연 도태된 박정현(朴正鉉), 박동화(朴東和) 등의 발기로 창립되었는데,「상주청년회」의 창립 멤버인 석응목(石應穆), 양연옹(梁然翁) 등이 포함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 도태’의 기준은 나이였다. 당시 박정현이 만43세였고, 박동화와 석응목은 불과 32세, 33세였다. 따라서 물론 계급 내지 사상이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후의 청년·사회운동에서 이들이 배제되지 않았다.
「조선청년총동맹; 靑總)」에 가입한「상주청년회」,「함창청년회」,「옥산청년회」는 1925년 10월 15일, 상주청년회관에서 일경의 엄중한 경계속에서「상주청년연맹」을 결성했으며, 집행위원과 상무위원은 다음과 같았다.
집행위원 : 김한익(金漢翊) 소한옥(蘇漢玉) 석응목(石應穆) 정기섭(鄭基燮)
김억주(金億周) 박인옥(朴寅玉) 지경재(池璟宰) 장재근(張在瑾)
박순(朴淳)
상무위원 : 서무-박순, 교양-지경재, 조사-김한익, 조직-정기섭
그리고 상주에서는 강훈(姜壎)이 이끄는「상주갑자구락부(尙州甲子俱樂部)」라는 사상단체가 생기자,「상주청년회」가「갑자구락부」는 유령단체로 일반대중을 기만하고 지역운동을 분열 교란시키는 행동을 하는 단체라고 비판하자, 이들은 총회를 열고「‘건설자동맹(建設者同盟)」으로 개칭하여 활동하였다.
한편「상주청년동맹」은 12월 5일 집행위원회에서 ‘①대중해방을 목표로 할 일’, ‘②교양운동에 치중할 일’, ‘③상호부조와 단결을 도모할 일’이라는 3가지 강령을 정했다.
같은 해 11월에서 12월에 걸쳐서 외서면에서는「연봉청년회(連峰靑年會)」, 모동면에서는「중모청년회(中牟靑年會)」, 청리면에서는「청리청년회(靑里靑年會)」가 잇달아 결성되었다.
1925년 가을에는 박철(朴哲) 등이 중심이 되어「상주노동청년회(尙州勞動靑年會)」를 조직하였고, 1926년 1월에는 강훈(姜壎), 박동욱(朴東旭) 등이「상주독서회(尙州讀書會)」라는 사상단체를 조직 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는 박순(朴淳), 지경재(池璟宰), 박인옥(朴寅玉), 김억주(金億周), 박철(朴哲), 김대복(金大福), 정기섭(鄭基燮) 등 20여명이「상주신우회(尙州信友會)」를 조직하였고, 이어서 강훈(姜壎) 등이「상주무산청년회(尙州無産靑年會)」를 조직하였으나, 1927년 3월에 자진 해체하였다.
한편 1927년에 들어 협동조합운동이 상주에서 일어났다. 여기에는 상주군 함창 출신으로 1920년부터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전진한(錢鎭漢)의 영향이 컸다.
전진한(錢鎭漢)은 1926년 6월에 유학생을 모아서「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를 조직하고,
1. 우리는 대중의 경제적 단결을 공고히 하고 자주적 훈련을 기한다.
2. 우리는 이상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하여 대중 본의의 자주적 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한다.
는 강령을 정하고, 경상도에 ‘선전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전진한(錢鎭漢)은 1927년에 출판된『협동조합운동(協同組合運動)의 실제(實際)』라는 팜플렛의 첫머리에서,
‘협동조합은 경제적 약자가 상호부조의 협력에 의해 경제적 지위의 향상을 기도하여 자본주의의 결함을 배제하고자 하는 이상(理想)아래에서 발생된 경제적 조직체’
라고 규정하였다.
전진한의 형인 전진준(錢鎭俊)이 중심이 되어 1927년 1월에 함창면 오사리(梧沙里)의 농가에서「함창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사업은 판매와 저축이 중심이었고 야학에 대한 지원도 하였다. 이것이 모델이 되어 같은 해 4월에는「상주협동조합」과「중모협동조합」이, 9월에는「청리협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이 기운은 안동, 예안, 김천, 군위 등으로 퍼져 나갔다.
(3) ‘청년층’에 대한 개입
1920년대 지역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청년’이라는 새로운 사회집단이었다. 총독부는 이 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에 대해서 기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경계하였다.
‘청년층’에 대한 경계는 3·1운동이 하나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직후 경상북도는 각 군(郡)에 있는 공립학교(公立學校) 교장에게 ‘지방 인민의 사상계의 상황’ 등 3항목에 대하여 자문하도록 하였다.
상주공립보통학교장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산유식과 다산유식의 계급에 속하는 자이며, 그 가운데서도 청년계의 사상개선은 목하 급무(急務)라고 느낀다.”
고 보고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상북도에서는, ‘청년회 간부강습회’를 주최하고, 수양단이 주최하는 ‘전국중견청년강습회’에 지방 청년을 파견하고, 도내 각지에서 주최하는 ‘청년강습회’에 강사를 파견하고, ‘중견 청년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당시 상주 화동지역에서 청년회 운동을 하였던 여석훈(呂錫塤)은 자서전인『오광자소(五狂自疏)』에서 각종 강습회에 참가했던 경험을 기록하였다.
“경상북도가 각 지역의 청년회장을 모아 놓고 ‘교도(敎導)’를 실시한 제2회 강습회에 참가했다.
그때 상주에서 함께 간 사람은 함창청년회의 김한익(金漢翊)이고, 강습회장소는 대구사범학교였는데, 전원을 기숙사에 모아 놓고 5박6일 동안 생활 규율이 엄해서 주야(晝夜)로 긴장상태가 계속되었다.
4일째에는 도(道)의 지방과장과 도내(道內) 각 중학교 교장이 참석한 가운데 4일간의 강습에 대한 감상을 피로(披露)하는 간친회(懇親會)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날 변소에 가는데, 지삼달(池三達)이 해산하기 전에 이번 강습회에 참가한 사람들로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점심 후 식당에 모여 보니, 지삼달은 이미 회칙을 만들어 놓았는데, 30세 이상인자는 청년회 회원 자격을 제한하고 각 청년회의 규약을 동일하게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여석훈은 ‘규약의 통일’이라는 점에 의문을 가졌고, 결국 그 모임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여석훈은 그 날 밤에 지삼달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았다.“
고 했다. 이처럼 도(道) 주최의 강습회는 총독부 측이 청년회장을 모아 놓고 그들을 식민 지배에 필요한 방향으로 ‘교도(敎導)’하는 장이었으나, 이런 일이 경북 각지의 청년회 리더가 모이는 장이 되어 오히려 청년운동이 조직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4) 정치공간의 위기와 변화
(1) 정치공간의 확대와 위기(1927년~1930년)
1927년부터 1930년에 걸쳐 상주의 사회운동에는 2개의 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민족통일전선을 목표로 하는「신간회(新幹會) 상주지회」의 설립이고, 다른 하나는 상주청년연맹이「청총(靑總) 상주군위원회」가 된 것이다.
①「신간회(新幹會) 상주지회」
1927년 2월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민족통일전선을 제창하면서 창립된 단체가 신간회이다. 당시 각 지방에서는 잇달아 지회(支會)들이 결성되었는데, 상주는 그 해 9월 4일 건견장(乾繭場)에서 강훈(姜壎)의 주도로 상주지회가 발족된 것이다.
<표-8> 신간회 상주지회의 간부 구성
선거일 | 회장 | 부회장 | 간사 |
1927. 9.4. | 鄭在龍 | 朴正鉉 | 朴東和, 朴淳, 李玟漢, 姜壎, 金億周, 池璟宰, 金相龍 成麟煥, 鄭喜默, 趙鳳衍, 蔡鴻綠, 金基穆, 鄭基燮, 申泳澈, 朴瓚福 |
1927. 12.21. | 朴正鉉 | 康信愚 | 金億周, 池璟宰, 申泳澈, 姜龍壽, 鄭基燮, 金漢翊, 黃在殷, 成仁重, 高永錫, 朴淳, 兪龍穆, 李玟漢, 姜壎, 朴東旭, 車宗燮, 郭侑宗, 張在瑾, 金相龍, 沈口, 朴東和 |
「신간회 상주지회」는 그때까지 상주에서 생겨났던 다양한 운동을 일시적이나마 규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표-8>은 결성 당시와 제2회 총회의 간부 구성인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정현처럼 청년회 ‘혁신’과정에서 한때 제외 되었던 인물이 대표자가 되었고, 우산리(愚山里) 진양정씨 가문의 정재룡(鄭在龍), 양촌리(梁村里) 재령강씨 가문의 강신우(康信愚) 등 순수한 사족 덕망가도 새롭게 대표자가 된 일이다. 이러한 인물이 대표가 된 것은 ‘신간회’의 취지에도 합치되는 일이었다.
또 한 가지는 간사에 사회주의자 다수가 포함된 일이다. 즉 강훈(姜壎), 조봉연(趙鳳衍)과 같은 건설자동맹계(建設者同盟系)의 인물이 간부에 들어가 있다.
「신간회 상주지회」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나 노동, 농민, 청년을 규합한 ‘삼총집회(三總集會)의 금지에 대한 건의안을 작성하기도 하였고 각 단체간의 교섭 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② 청년운동(靑年運動)
1927년에 들어「청총(靑總)」은 ‘전 민족적 청년운동노선’을 제기하였으며, 이에 따라 각지(各地)의 개별단체(個別團體)들이 해체하고 중앙집권적인 ‘군(郡) 청년동맹(靑年同盟)’으로 전환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상주에서도 1927년 10월 5일에「상주청년연맹(尙州靑年聯盟)」의 해체를 결의하고,「상주청년동맹(尙州靑年同盟)」의 창립대회를 열어서, 박순(朴淳)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집행위원들을 선발하였다.
집행위원장 : 朴淳
서무상무 : 金億周 · 교양상무 : 崔鍾洛 · 조직상무 : 朴東旭 · 조사상무 : 沈□
위원 : 鄭基燮 · 黃在殷 · 金漢玉 · 金漢翊 · 姜龍壽 · 成仁薰 · 白在鶴 · 安基烈
검사위원 : 朴仁根 · 姜斗植 · 申泳澈
이에 따라 면(面)에 흩어져 있던 청년회는 자동적으로「상주청년동맹」의 지회(支會)가 되었다.
다음 해 3월 26일에 열린「상주청년동맹」제2기 대회에서「상주청년동맹」을 해체하고「청총(靑總) 상주군위원회(尙州郡委員會)」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신간회」와는 ‘민족적 단일전선’ 자체는 지지하지만, 어디까지나 계급적 입장을 관철한다는 것을 표명하였다. 당시「신간회」의 당면 임무는 헤게모니를 쟁취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그것은 ‘소아병적(小兒病的)’이며 조선의 ‘특수사정’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청산론’이 대립하였는데,「상주군위원회」는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쪽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노선에 대해서는 내부에서도 ‘소아병적’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문경·봉화 등 인근의 청년동맹도「상주군위원회」를 비판하였고, 급기야「경북청년동맹」이「상주군위원회」의 박순(朴淳)을 강령위반으로 제명처분을 하였으나「상주군위원회」는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조직을 전개했다.
③ 탄압(彈壓) 국면(局面)
그러나 1928년 후반부터 이들 단체들이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먼저 협동조합운동(協同組合運動)의 경우, 1928년 7월에 이론적인 중심이었던 전진한(錢鎭漢)이 조선공산당사건(朝鮮共産黨事件)으로 수감(收監)되었다.
1928년 11월말에는 강훈(姜壎)이 조선공산당의 지하조직에서 활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 수감되었다.
1929년이 되자,「신간회」나「청년회의 간사회」등이 종종 금지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압력 외에 교육운동과「신간회」·「청년회」운동 사이에서 공작이 행해졌다.
상주 양촌(梁村)에서는 보통학교 입학연령을 초과한 60여명을 대상으로 강신원(康信元)이 서당 형식의 강습회를 수년간 개최하였는데, 1929년 1월 상주군청은 강습소 대표인 강신우(康信愚)를 호출하여「양촌강습소」는 허가도 없을 뿐 아니라 강사가 신간회 회원임으로 도저히 용인할 수 없으니 즉시 해산하라.’고 해서 문을 닫았다.
외남면 신상리(新上里)에서도 보통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동을 위해 김명수(金明秀)가 운영하던 강습소도 ‘허가가 없을 뿐 아니라 교원이 사상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산시켰다. 그래서 화동면에서「자양학원」을 설립하고, 1927년에「신간회」에 입회한 여석훈이,
나는「자양학원」이 발족한 이후 매년 군 학무과에 인가원(認可願)을 제출했으나 번번히 서류를 반려(返戾)하였다. 그러다가 8년째 되는 해에는 나를 군청으로 불렀다. 그리고 학무과 직원이 한다는 말이, ‘당신은 청년운동도 하고, 사회운동도 하고, 또 교육사업도 하겠다고 매년 학원설립 인가원을 내고 있는데 욕심이 너무 과하지 않소. 더구나 교육사업과 사회·청년운동은 이율 배반되는 일이 아니오. 어느 쪽이든 하나를 택하시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교육사업만 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그날로 청년회와 신간회에 탈퇴서를 내고 그 증명을 첨부하여 자양학원의 인가원을 제출했다.
‘사회·청년운동’과 ‘교육사업’은 전혀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여석훈은 교육사업의 존속을 위해 ‘청년회’와 ‘신간회’를 탈퇴한 것이다.
이처럼 다양하게 압력이 가해지던 상황에서, 1930년 5월「상주청년동맹」 관계자 9명이 상주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안동, 문경, 예천, 봉화, 영주로까지 확대되어서 신문에서는「상주공산당 사건」이라고 했다.
대구지방법원의 공판 결과, 1928년경에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인「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靑)」의 세포조직이 상주에 존재한 것과상주에서「고려공청 상주 야체이카」의 결성을 주도한 것은 강훈(姜壎)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1930년경부터는「신간회」·「청년회」활동에 대한 기록은 신문 등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④ 1930년 이후의 변화
1930년대에는 지역 사회단체들이 1920년대의 활동과는 다른 사회운동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기료 인하운동’과 ‘학교를 둘러싼 운동’이다.
상주에 전기회사가 생겨서 전등이 켜지기 시작한 것은 1924년 6월의 일이다. 전기회사는 대구에 본사를 둔「대흥전기주식회사(大興電氣株式會社)」이며, 북으로는 함흥(咸興), 남으로는 통영(統營)까지 지점을 가진 일본인 자본의 대회사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전국에서 전기료 인하운동이 일어났고, 본격적인 운동은 1930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는 ‘불경기’ 때문에 폐등자(廢燈者)가 속출하였다.
전기사용자들이 전기회사와 교섭을 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자, 이듬해인 1931년 2월에 각종 사회단체와 기자단이 시민대회를 열고 조선인과 일본인 이 혼성으로「전등료 인하 기성회」를 결성했다.
「기성회」는「대흥전기」를 수차례 방문하여 다른 지역의 전기료를 예로 들면서 ‘전등료 4활 인하’ 을 제시했지만, ‘7월까지 기다리라’는 답변만 들었다. 이에 분기한「기성회」는 상점을 통해 램프를 공동구매하고는 5월 1일부터 5월말까지 600세대가 소등운동(消燈運動)을 전개하여 상주읍 북부는 ‘암흑지대’로 변했다.
이 운동에 지금까지 청년회운동 등에 참가하지 않았던 유지뿐만 아니라「신간회」회장 박정현과 같은 인물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어느 선에서 전기료가 타결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1930년대 신문에는 학교와 관련된 기사도 눈에 띄었다.
| 학교 | 시기 | 내용 | 관계자 |
(1) | 상주농잠학교 | 1933년 7월 | 학교를 3년제 을종에서 5년제 갑종으로 승격 | 기성회 : 회장 朴正鉉, 부회장 趙誠惇, 稻垣德三郞, 石壽穆외 17명 |
(2) | 상주공립여자보통학교 | 1935년 2월 | 군수에게 학급 증설을 요구 | 학부형회 : 朴晩相, 朴淳, 金億周, 石□基, 朴正準 |
(3) | 상주공립보통학교 | 1935년 5월 | 군수에게 학급 증설을 요구 | 학부형회 : 朴正鉉, 朴東和, 崔尙善, 姜壎, 金億周 |
(4) | 상주공립여자보통학교 | 1935년 6월 | 학교 이전 및 확장 | 기성회 : 회장 朴正鉉, 부회장 趙誠允, 徐相烈, 간사 朴淳, 金億周, 崔尙善, 趙龍衍,石□基, 趙誠旭, 朴重夏 , 朴寅玉 외 |
(5) | 상주유치원 | 1936년 4월 | 유치원의 재건운동 | 趙誠惇, 李采錫, 姜壎 |
<표-9> 1930년대 학교를 둘러 싼 운동
출전 : (1) 동아일보 1933년 7월 21일, (2)매일신보 1935년 2월 14일, (3) 매일신보 1935년 5월 22일, (4) 매일신보 1935년 6월 16일, (5) 조선중앙일보 1936년 4월 16일
(1)의 농잠학교 승격운동은 1920년대부터 제기되어 온 문제였다. 1928년에는 학교 관계자와 박정렬(朴正烈) 등이 중심이었던 데, 1933년에는「신간회」회장 박정현과 무관학교와 노동공제회에 관여하였다가 체포된 경력이 있는 조성돈(趙誠惇) 등의 얼굴이 보였다.
(2)~(5)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박순, 김억주, 강훈과 같이 1920년대에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이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처럼 1920년대의 사회운동에 활약하던 인물이, 조선인 자산가나 일본인 유지와 함께, 행정이나 대자본과 교섭하면서 지역사업을 전개한 점이 1930년대 사회운동의 특징이었다.
또한 1930년대에는 청년단체도 정리되었다. 상주에서도 농촌진흥운동이 조직화 되었고, 중일전쟁과 더불어 총동원체제의 구축과정에서 1938년까지 각 면에 16개의「공려청년단(共勵靑年團)」을 조직하고, 이를 통합해서「상주연합청년단(尙州聯合靑年團)」을 결성하였다. 이때의 청년조직은 총력전 수행을 위한 통합과 동원을 위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1920년대의 청년회 운동과는 성격이 완전히 변질되었다.
이상에서 사회단체의 동향을 보면, 1920년대부터 ‘청년’, ‘유지’ 등이 지역의 제반 사업을 맡게 되는데, 거기에는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로의 지향성이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배제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총동원체제하에서 ‘관민유지(官民有志)’, ‘일반유지(一般有志),’ ‘일반사회단체원(一般社會團體員)’은 명확하게 체제협력자로서 자리매김 되었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 ‘유지(有志)’는 체제 측의 지역엘리트 계층으로 고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주학 > 상주학 제9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주학. 금요사랑방. 제101강좌 유적으로 본 상주문화 (0) | 2018.11.26 |
---|---|
상주학. 금요사랑방. 102강좌 국채보상운동의 횃불 상주 (0) | 2018.11.26 |
상주학. 금요사랑방 104강좌. 의(義)에 삶을 바친 왕사(枉史) 김만원(金萬源) (0) | 2018.11.26 |
상주학. 금요사랑방. 경상북도 종가음식 문화에 대한 소고 (0) | 2018.11.26 |
금요사랑방 제127강좌 식산 이만부의 지행록 (0) | 2018.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