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효손(孝孫) 취수헌(醉睡軒) 이겸(李謙)

빛마당 2019. 4. 2. 20:21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효손(孝孫) 취수헌(醉睡軒) 이겸(李謙)

김 광 희
 
  상주 함창 오봉산 자락 신흥에 이안천을 향하여 길게 뻗어 내리다가 높은 언덕배기를 이룬 곳에, 영사사(永思祠)와 양화헌(養花軒)의 두 편액을 걸고, 북향(北向)을 하고 있는 건물이 하나가 있으니, 이곳이 바로 취수옹(醉睡翁) 이겸(李謙, 1452~1507)이 창건한 취수대(醉睡臺) 취수대(醉睡臺) : 상주시 함창읍 신흥리 377번지에 소재함.
이다.

○ 가계(家系)

  공의 자는 위광(撝光)이고, 호는 취수헌(醉睡軒)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주 이씨는 신라(新羅)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한다. 이알평(李謁平)은 신라 초기 사로육촌(斯盧六村) 중의 하나인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으로 하늘에서 강림(降臨)하여 표암봉(瓢嵓峯)에 내려왔다고 한다.

  공의 6대조는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며, 5대조는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 예문관·보문각·우문관·진현관 등에 설치한 정4품관.
을 지낸 이달존(李達尊)이고, 고조는 소부윤(小府尹)을 지낸 이학림(李學林)이며, 증조는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을 지낸 이담(李擔)이다.
  할아버지는 이희(李暿)로 자는 명중(明仲)이며, 호(號)는 청호(靑湖)이다. 1404년(태종 4)에 출생하고, 1423년(癸卯)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한 뒤 문과에 급제하고 남대(南臺) 남대(南臺) : 학행이 높다고 인정되어 이조에서 사헌부의 장령이나 지평의 관직에 추천된 자.
의 추천을 받아, 이조참의,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고, 1448년 경상도관찰사 겸 출척사로 안동을 순시하던 중에 객관(客館)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명(遺命)에 따라 안동부 남쪽 타락산(駝駱山) 노림촌(魯林村) 노림촌(魯林村) : 안동시 남선면 현내리.
 뒤에 장사지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버지는 이문환(李文煥 1432~1489)으로 자는 요장(堯章)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좌우사(左右史)를 지내고, 옥당 춘방(玉堂春坊) 춘방(春坊)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을 거쳐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간(大司諫), 강원감사(江原監司), 이조참의(吏曹參議), 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냈다. 어머니는 우봉 이씨(牛峰李氏)로 6남 3녀를 두었는데, 취수헌공은 1452년(단종 즉위)에 셋째로 태어났다.

○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다.

  공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바탕이 있었다. 성품이 침착하고 순수한 자질을 지녔으며, 생각하는 바가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10살 무렵에 이미 ?소학(小學)?과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또 사람을 대할 때 말이 친근하여 보는 이들의 호감을 끌었고, 문예가 뛰어나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어릴 적에는 서울에서 난재(懶齋) 선생과 죽마고우(竹馬故友)로 지냈으며, 1469년(예종 원년) 18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증광시(增廣試) :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식년시 이외에 실시된 임시과거.
 진사(進士)에 합격하니 사람들이 공에게 큰 기대를 걸었었다. ?함창현지(咸昌縣誌)?에 공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李謙 齊賢之後 己丑進士 文雅高行 早推泮宮 燕山朝 廢擧遯迹 築養花坮 洪虛白記之 號醉睡軒 享淸巖書院”(이겸은 이제현의 후손으로 기축년(1469)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고상하고 우아함, 높은 덕행으로 일찍이 성균관에서 추앙을 받았고, 연산조 때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몸을 피하여 양화대를 지으니 허백당 홍귀달이 기문을 썼다. 호는 취수헌이고 청암서원에서 향사한다.)

  1471년(辛卯)에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시강원(侍講院)의 여러 직책과 행수 익위사 시직 부솔(行授翊衛司侍直副率) 시직 부솔(侍直副率) : 익위사에 시직(侍直)은 정8품, 부솔(副率)은 정7품.
을 제수하고, 거듭 사헌부(司憲府)의 직책이 내려졌으나, 연산군의 폭정으로 정국이 불안함을 보고는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할아버지 청호(靑湖)공께서 1448년(세종 30)에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른 뒤에 아버지 승지(承旨)공의 형제 네 분께서‘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고 늘 슬픔을 거두지 못하고 애통해 하였다. 그래서 형제분들께서 아들 한명을 영남(嶺南) 땅에 머물게 하고 친히 묘소를 수호하기로 하였다. 이에 공이 학식과 효행이 다른 이들보다 깊어 영남에 남게 되고, 상주 함창 일대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는 진주 류씨(晋州柳氏) 가문의 음성(陰城) 현감(縣監) 류철산(柳鐵山)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함창 도계촌(陶溪村)에 정착하게 되었다.
  공은 도계에 정착한 뒤 1483년 취수대(醉睡臺)를 건립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자제들과 후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낙으로 삼으며 지낸다. 하지만 부모가 계시는 집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해가 갈수록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갈 뿐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당부하신 묘소 수호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행하고, 언제나 노복 한 사람과 말 한 필을 집에 남겨두어 아버지께서 어느 때나 오시더라도 성묘(省墓)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 자식의 도리를 다하다.

  공은 명절(名節)과 가신(佳辰)에 이르면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추연히 슬퍼하며 하루해를 보내곤 하였다. 그 후 부친께서 병환(病患)에 들자, 밤낮으로 그 옆을 떠나지 아니하고 병세(病勢)를 살펴드리며 대변(大便)을 맛보아 차도를 징험하였다. 그러나 1년 만에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자, 멀리 떨어져 사느라 평소 부친에게 효를 다하지 못하였음을 애통하며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거의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또 길지를 찾아 풍덕조해중상곡(豊德照海中上谷) 풍덕조해중상곡(豊德照海中上谷) : 황해도 개풍군 흥교면 조문리.
에 장사지내고는 여묘살이를 마치고 이어 모친의 상을 당하게 되자, 부친의 묘소에 합장한 뒤 다시 여묘살이를 하였다. 복(服)이 끝난 뒤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몇 년을 더 지켜 드리고 자리를 떠나니 사람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

○ 명예(名譽)와 이익(利益)을 취하지 아니하고

  함창으로 돌아온 뒤로도 추모(追慕)하는 아픔이 더해져서 색다른 음식이나 햇곡식을 만날 때마다 천신(薦新)하지 아니하면 맛보지 않았다.
  당시 공의 여러 형제는 모두 문음(門蔭)에 힘 입어 갖가지 벼슬을 하였으나, 본인은 벼슬의 뜻을 접고, 자그마한 집에서 스스로 욕심이 없는 고요한 생활을 하며,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고 한 그릇의 밥에 만족하고, 스스로 여유로움을 보였으니 이것이 바로 공의 청백(淸白)함이었다.
  살고 있는 마을에서 개울물을 끌어와 못을 만들고 그곳에 부용(芙蓉)과 연(蓮)을 심고, 언덕에 정원을 만들어 온갖 꽃나무를 심고는 스스로 취수옹(醉睡翁)이라 호(號)하고 그 집을 양화헌(養花軒)이라 이름하였다.

  만권(萬卷)의 책을 갈무리하여 그 가운데서 느긋하게 노니면서 혹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시(詩)를 짓기도 하고, 학문하는 사람들과는 경서(經書)의 뜻을 논하기도 하였다. 또 때로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밖으로 나가 채소밭이나 못 가를 거닐면서 물고기, 새, 꽃과 대나무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지겨움이 들면 돌아와 형문(衡門)의 장(章)을 낭낭하게 읊조리며 세상의 시름을 잊어버리곤 하였다.
  그래서 선비들이 모두 공의 높은 뜻을 아름답게 여기면서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되돌아보며 침울(沈鬱)해 하며 개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선생은 공의 이 같은 행동을 칭송하며 「취수헌기(醉睡軒記)」에서“높은 집 좋은 옷 벼슬하기도 공(公)의 뜻에 누(累)가 될 수 없었다.”라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공의 참뜻을 아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또 난재(懶齋) 채수(蔡壽) 선생이 공을 위해 지은 양화헌기(養花軒記) 양화헌기(養花軒記) : 채수(蔡壽), ?난재집(懶齋集)?, 권1, [기(記)]에 전함.
를 보면,

  임인년, 1482년 가을에 내가 헌장(대사헌)으로서 언사(言事)로 인하여 해직되어 함녕의 촌집으로 돌아와 있었더니, 위광(撝光)이 찾아와서“나은 세상에 뜻이 없어 이미 영욕을 벗어났고 다만 한가하고 고요한 시골에 살면서 회포를 보낼 길 없어 처마 앞에 많은 꽃을 심어 놓고 손수 물을 대어 꽃이 피면 봄인 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인 줄 알면서 여기에서 술을 마시고, 여기에서 시를 읊으며, 여기를 한가히 거닐다가, 여기에서 멈추어 쉬니, 또한 일생을 지내고 백세에 오만할 만 하도다. 그대가 어찌 관람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한 필의 말을 타고 한 아이를 따르게 하여 가서 보니, 양화헌이라고 하는 것이 두 채의 집을 얽고, 소나무 가지로 처마를 만들었으며, 낚싯대를 꽂아 놓고 바둑에 장기를 펴 놓았으며, 술잔이나 옥병을 상 위에 벌려 놓고, 이로써 술 마시는 장소로 하였다. 그리고 산기슭을 따라 흙으로 계단을 쌓고, 그 밖에 울타리를 치고는 그 안에 꽃과 풀을 섞어 심어서 형형색색이 어지럽게 좌우에 펼쳐져 있는데, 혹은 군자와 같이 청숙하고, 혹은 미인과 같이 요염하며, 혹은 부귀한 사람과 같이 화려하고, 혹은 은거하는 사람과 같이 그윽하고 외진 곳이니, 위광의 꽃 기르는 것이 부지런하고 독실함을 믿겠고, 위광의 세상 보는 것이 호방하고 통달함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내가 들으니 옛사람이 천지로서 막석(幕席)으로 삼고, 일월로서 등촉으로 삼으며, 세상이 나의 방문 안에 들어 있고, 만물이 나의 도균(陶鈞)에 녹여 부어서 만들어지며, 하늘을 날고 물에 잠기는 동물과 식물이 스스로 나고 스스로 길러진다. 각기 그곳을 얻으면, 내가 이내 술 단지를 지고 지팡이를 끌며 마음대로 산이나 물, 혹은 작고 큰 언덕을 두루 거닐며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고, 거나하게 취했다가 술 깨듯이 깨달아 만물로 더불어 같이 돌아오고, 조화와 같이 유행하면 모든 천지간의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들이 모두 나의 초목이요, 진기한 짐승들이 모두 나의 금수이다. 하필 그 정신을 사역하고, 그 근력을 수고롭게 하여 꽃을 옮기려고 그 뿌리를 뽑고, 과일을 따려고 그 껍질을 벗기며, 새를 우리에 가두려고 그 발을 동여매고, 짐승을 잡아매어 그 본성을 잃게 하는 것은 만물의 이치를 거역하고, 천지의 조화를 상하게 하는 것이니, 이런 뒤에야 즐거운 것인가? 고인이 말하기를 일이 없으면 일월이 길고, 말을 타지 않으면 천지가 넓다 하고, 또 들에 꽃과 우는 새는 일반의 봄이라고 했으니, 만약 들판의 꽃과 우는 새로써 일반의 봄으로 하여, 일이 없고 천지의 넓은 공간에 말을 타지 아니하면 이 또한 상쾌하지 않겠는가! 무엇 때문에 꽃을 기를 것인가? 비록 그러하나 그것을 보기 위해 오락가락하며 구차하게 얻고 이익과 욕심에 심력을 기울인다면 오얏을 파는 사람이 그 씨를 꿰뚫어 날마다 18종을 먹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위광은 누구인가?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겸이며, 나와는 서울에서 어릴 때 죽마를 타던 친구이고, 함녕에서는 술 친구였으며, 취수옹이 그의 호이다. 성종 14년 계묘 5월에 쓰다.

라고 하였으니, 시주(詩酒) 속에 이름을 숨기고, 조정에서 자취를 멀리한 공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공의 저술(著述)과 서로 주고받은 시편(詩篇) 약간 및 문고(門稿)가 있었으나, 여러 번의 병화(兵禍)를 겪는 나머지 모두 잃어버리고, 가승(家乘)에 실려 있는 내용이 전부라 자세한 내용을 찾는 데 한계가 있었다.

○ 공은 바로 경주 이씨 함창 세거 현조(顯祖)이다.

  조부 청호공 산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상주 함창 신흥리 오봉산 전(前)에 취수대를 중건하여, 꽃을 가꾸며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에 힘썼다. 이후 이 지역을 사람들이 화평(花坪)이라 하고, 경주 이씨의 집성으로 인한 이(李·오얏 李) 字를 바탕으로 속칭 오얏골이라 불리고 있다. 배위 안동 권씨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으며, 진주 류씨와의 사이에 2남 6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우덕(友德)으로 자는 사예(士預)이고, 봉사(奉事)를 지냈고, 둘째는 우인(友仁)으로 자는 사중(士中)이고, 사마시에 합격하고 집의(執義)를 지냈다.
  유택은 상주시 이안면 안룡리 수정봉(水晶峰) 남쪽 산자락에 장인(丈人)의 묘소와 마주하고 있으며, 묘비에는“취수헌 월성 이공 지묘 배 의인 진주류씨 부(醉睡軒月城李公之墓配宜人晉州柳氏祔)”라고 새겨져 있다. 1752년(영조 28)에 유림의 공의에 따라 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청암서원(淸巖書院)에 배향하여 지금까지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1. ?한국성씨총람(韓國姓氏總攬)?, 2005, 한국성씨총감 편찬위원회
2. ?허백정집(虛白亭集)?, 홍귀달(洪貴達)
3. ?난재집(懶齋集)?, 채수(蔡壽)
4. ?웅주전고(雄州典故)?, 1998, 박약회 상주지회
5. ?함창현지(咸昌縣誌)?, 1986, 함창군지 중간위원회
6. ?경주이씨 익재공파 파보(慶州李氏益齋公派派譜)?, 기묘간(己卯刊)
7. 「가선대부 이조 참판 휘 문환 묘비문(嘉善大夫吏曹參判諱文煥墓碑文)」
8. 「청암서원 십일선생 행록(淸巖書院十一先生行錄)」
9. 「취수헌공 묘갈명(醉睡軒公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