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절개(節槪)가 굳센 돈암(遯菴) 윤사석(尹師晳)

빛마당 2019. 4. 2. 20:22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절개(節槪)가 굳센 돈암(遯菴) 윤사석(尹師晳)

*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전문위원, 상주고등학교 교감
김 정 찬*

 

공(公)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고 호(號)는 돈암(遯菴)인데, 생몰년은 미상이나 성종∼연산군 조에 살다 가신 조선 전기의 학자이다.
  고려 개국공신인 윤신달(尹莘達)이 그 비조(鼻祖)인데, 몇 세대가 지나 윤관(尹瓘, ?∼1111)이라는 분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종을 보좌하여 공훈으로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백작(伯爵) 계급이 도입된 것은 고려시대 때에 5등작이 시초이다. 고려에서는 천자(임금)의 여러 아들에게 후(侯)가 초봉되었고, 부마(사위)에게는 백(伯)을 봉하였다. 종실의 봉작과 달리 이성제군에게는 지역명 등과 함께 주로 현백(縣伯)에 봉했으며 윤관이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에 봉작된 것이 그 예이다. 그 후, 충렬왕 때 원의 간섭으로 일시 폐지되었다가, 공민왕 때 부활하였으며 조선이 개국된 이후에도 당분간 쓰여 정도전이 봉화백(奉化伯), 조준이 평양백(平壤伯), 이지란이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지는 등의 일이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 폐지되어 사라졌다.(위키백과, daum)
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고 숭의전에 배향되어 있다. 이분 이하로 유명한 분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윤곤(尹坤)이라는 분은 조선시대에 충익대좌명공신(忠翊戴佐命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소정공(昭靖公)이라는 분으로 공(公)에게 증조가 된다. 조부는 윤희제(尹希齊)라는 분인데 정헌대부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부친은 윤은(尹垠)이라는 분인데 음직으로 참판을 지냈다. 성품이 청렴하였는데 목사로 재직 시에는 청렴하고 공평하여 칭송이 있었다. 아들인 충경공인 윤사로(尹師路)의 벼슬이 높아져서 증직으로 우의정(右議政)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을 받았다. 형제는 9명인데 맏이는 윤사로가 세종 정현공주에게 장가를 들어 사적으로 제사를 받들지 못하여 조부인 소정공의 제사를 주관하여야 하였지만 6번째 형제인 윤사하(尹師夏)에게 양보하였다.
  벼슬은 사헌부 집의에 이르렀다.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 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본 뒤, 사모(紗帽)와 관복을 찢어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청주의 옥화대(玉華臺)로 가서 스스로 만둔암(晩遯庵)이라 하고 풀로 집을 지어 정자의 이름을‘만경(萬景)’이라 하였다. 일찍이 그곳과 관련한 시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늦은 나이에 암대(巖臺)로 오니
풍경은 모두 눈 아래에 울창하구나
소나무를 심으니 울창하게 푸르고
버드나무를 옮기니 그늘을 만들어주는구나
흰 돌은 우뚝우뚝 솟아나고
맑은 강은 굽이굽이 깊다네
명예는 헌신짝 보듯 하니
신세는 흰갈매기 같은 마음이로다

라고, 읊었다.
  그 지조가 초연하게 어설픈 곳에서도 이렇게 스스로 즐겼고 자손들을 훈계하며 과거공부는 억제하였다. 공주 유성의 가장동의 건좌 언덕배기에 묘를 썼다. 부인은 충주 박씨인데 사정을 지낸 박충함(朴忠諴)의 따님이다. 아들 3명을 낳았는데 맏이는 음직(蔭職)으로 수의(修義)를 지냈는데 그 자손들이 용궁, 상주, 함창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둘째는 현감인데 그의 자손들은 청주에 살았다. 셋째는 사과(司果)를 지냈는데 자손들은 공주에 있다.

  아, 공은 뛰어난 자질로 부형의 가업을 지키면서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화려한 벼슬도 우습게 여기니 이때부터 앞길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기미를 보고 홀가분하게 그저 자연에서 지내며 명예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죽을 때까지 조용하게 지내면서도 후회가 없었다. 100년이나 지난 후에 그 맑은 풍모와 오래된 정신을 상상하려 해도 모두 묻혀버린 것이 안타깝고 명성과 흔적도 모두 사라진 지 수백 년이나 되어 비록 자손이 된 사람이라도 그 지조 있는 행실의 만 분의 일도 소개하지 못하게 되어 최근에 지중추(知中樞) 소곡(素谷) 윤광소(尹光紹) 공이 공의 방친(傍親)의 먼 후손으로서 공의 지조와 절개가 사라질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주위에서 흔적을 찾고 널리 구해서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사는 대체적인 내용을 얻었으니 그런 다음에야 공의 행적의 모든 내용을 대략적으로 고증하여 믿을 만하게 되었다.

  공(公)의 후예 가운데 용궁의 대죽리에 사는 몇 명의 사람들이 선조에 대해 멀어져 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우러러 사모할 곳이 없는 것을 생각하여 여러 문중에 상의하여 사당을 세울 것을 상의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 먼 조상이지만 추모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 숨겨져 있던 것이 이 세상에 드디어 드러나고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니 덕이 드러나고 숨겨지는 것도 때가 있어 천리(天理)는 인심(人心)에 근본을 두어 사라지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와 같구나. 어느 날 공의 먼 후손인 윤비(尹備) 씨가 그의 족질(族姪)인 윤성헌(尹成憲)을 오게 하여,

‘선조께서는 세상을 잘 못 만나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무오사화, 갑자사화 때의 여러 분들과 같이 화를 당하지는 않고 혼자 스스로 상소를 올리고 멀리 떠나 급박한 시대 속에서 물러나서 자손들이 위험한 시대에서 온전히 목숨을 보전하게 하여 후손들이 이어지고 여러 지역에서 번창하게 된 것이니 어찌 이것이 선조께서 남긴 덕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드러나지 않은 덕행이 당세에 모두 묻혀 버리고 명성 또한 후세에 사라져 가니 나 이외에 모두가 지금부터 세월이 또 흐르고 나면, 다행히 행적이 남아있는 약간의 내용을 후손들에게 끝없이 이어지게 할 수가 없으니 감히 문장으로 남길 것을 요청한다.’

라, 하였다.
  저는 그저 아득한 후학의 한 사람일 뿐으로서 미세한 것을 보고 앞으로 드러날 것을 밝혀 군자들이 마음을 쓰는 것을 말로 세워 세상에 전하는데 꼭 그만한 사람을 얻어 훗날에 이어지게 한다.
  『동문선(東文選)』에는 공(公)의 시 한 수가 전하고 있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7∼1584)의 행장(行狀)에도,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은둔생활을 하는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

이라고, 하였다.
  용궁(龍宮)의 죽락사(竹樂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