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미모의 딸 때문에 귀양간 눌암(訥庵) 홍언국(洪彦國)

빛마당 2019. 4. 2. 20:25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미모의 딸 때문에 귀양간 눌암(訥庵) 홍언국(洪彦國)

 * 상주문화원장, 상주향토문화연구소 고문, 경북대학교 명예교수·농학박사
                                                                                  김 철 수*

  조선 연산군 때의 학자이다. 자는 공좌(公佐)이고, 호는 눌암(訥庵)이며, 허백정(虛白亭) 홍귀달의 다섯째 아들이고,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의 아우이다. 1475년(성종 7)에 태어나서 1540년(중종 35)에 65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젊어서부터 문장(文章)과 절개를 지키는 모습으로 당세에 이름이 났었다. 눌암(訥庵)선생에게는 미모가 빼어난 딸이 있었는데 이를 탐한 연산군이 그 딸을 궁중(宮中)에 보내라고 했다. 여자관계가 난잡한 연산군이기에 할아버지인 당시 경기관찰사 홍귀달(洪貴達)대감이 아들 언국(彦國)을 대신해서,

 “신의 자식 참봉(參奉) 홍언국(洪彦國)의 딸이 신의 집에서 자랍니다. 처녀이므로 대궐에 마땅히 들어가야 하는데, 마침 병을 앓고 있습니다. 진정 병이 있지 않다면 신이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지금 비록 곧 들게 하더라도 역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언국(彦國)의 딸이긴 하지만 신이 실은 가장(家長)이기 때문에 대신해서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아뢰자 연산군은 화를 내면서, “지금 비록 곧 들게 하더라도 역시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문제 삼았다.
  당시 연산군은 대신들이 왕인 자기를 공경하지 않고 매사에 간섭을 한다고 불만이 가득했었다. 얼마 전에 연산군이 내린 하사주(下賜酒)를 엎지른 이세좌(李世佐)의 일과 이번에 홍귀달이 ‘손녀를 입궐시키라’고 한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지금 비록 곧 들게 하더라도 역시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왕을 무시하는 태도이며, 이는 ‘불경죄(不敬罪)’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연산군은,

 “신하의 죄가 불공(不恭)보다 큰 것이 없으니, 내가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려 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군신 사이의 분의는 엄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인군(人君)으로서는 인군의 도를 알고 신하(臣下)로서는 신하의 도를 알아서, 인군과 신하가 각기 그 도를 다하여야 한다. 만일 인군과 신하의 분의가 엄하지 못하다면 조정 안에서 무슨 일이 비롯될 수 있을 것이랴?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공공(共工) 순(舜)나라 임금 때의 사흉(四凶)의 하나이다. 이들이 대대로 벼슬하면서 세력을 형성하여 명령을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처벌한 것임.
 유주(幽州)로 귀양보냈다’ 하였으니, 불경죄를 범한 자에게는 법이 의당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에 이세좌(李世佐)를 먼 곳으로 귀양 보냈던 것인데, 정배할 곳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홍귀달(洪貴達)이 그 아들 언국(彦國)의 죄 입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나, 그 ‘딸자식이 병이 있어 낫지 않았으니, 비록 곧 명(命)하여 들게 하더라도 아마 예궐(詣闕)을 할 수 없습니다.’는 말은, 아들을 비호한 의도가 확실하니, 갇혀 있는 죄인을 신문하여 조율하라. 대저 부자간이 전쟁 때라면 서로 구원해야 하겠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서로 구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면서 함경북도 북단에 있는 경원군(慶源郡)으로 할아버지 홍귀달(洪貴達)을 귀양 보냈고, 아버지 홍언국은

 ‘형장 때려 서북지방에 보내되, 무오년에 죄입은 사람들과 서로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홍귀달은 연산군이 다시 부르는 바람에 경옥으로 돌아오는 중간에서 불행하게도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 홍언국은 볼기 80대를 맞고『연산군일기』52권, 연산 10년 3월 17일.
 서북방(西北方)에 부처(付處) 벼슬아치에게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
되었다가, 후에 형(兄)인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과 같이 거제(巨濟)로 귀양갔다.
 
  결국은 잘못 생각한 연산군 때문에 미모의 딸을 가진 죄로 아버지 홍언국은 귀양살이를 갔고, 할아버지 홍귀달은 유배길에서 돌아가시는 참변을 겪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성공하자, 눌암(訥庵)은 죄를 벗어나서 참봉(參奉)에 다시 제수되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30세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도 애통하고, 정사에 참여하기가 싫어서 벼슬할 뜻을 끊고 고향에 묻혀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눌암(訥庵)은 가학(家學)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사귀고 왕래하였던 자들이 모두 당대에서는 널리 세상에 알려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서로 학문을 강론하는데 힘써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또한 성품이 크고 무거우며 기품이 있었으며,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이름을 한 세상에 떨쳤다.
  또한 문장(文章)이 맑고 건전하며 글씨가 또한 정미로워서 형님인 우암의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썼다. 사람들은 눌암(訥庵)의 문장과 글씨를 보고,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의 다른 이름. 사마천이 태사 벼슬을 한 데서 유래한다.
의 골수필(骨髓筆)을 얻어 왕조연(王趙然)의 서체(書體)를 능가한다’

고 격찬했다.
  그러나 지은 시(詩)와 글들이 모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흩어지고 약간의 시편(詩篇)만이 우암(寓菴)과 수헌(睡軒) 그리고 농암(聾岩)의 문집에 남겨져 있다. 
  여러 문중의 간본(刊本)에 흩어져 있는 시문(詩文)이 온전하기는 하나, 적료(寂寥) 적적하고 고요함
한 짧은 시가(詩歌)나 문장(短章)을 혼자서 판단하거나 결정하기에 어렵고, 또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의 여러 작품 중에 이미 수창(酬唱)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
한 것이 권중(卷中)에 부록(附錄)되어 있었기 때문에, 갈문(碣文) 및 부(賦) 여러 편(篇)을 첨가 판각하여『눌암(訥庵) 홍언국(洪彦國)의 유사(遺事)』를 내었다.『국조인물고』속고8

  아버지 홍귀달의 신도비(神道碑)는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아들인 눌암(訥庵) 홍언국(洪彦國)이 썼다. 그리고 눌암(訥庵)의 묘갈(墓碣)은 눌암의 5대손인 상민(相民)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