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관료문인(官僚文人) 조정융(曺挺融)의 행적

빛마당 2019. 4. 2. 20:30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관료문인(官僚文人) 조정융(曺挺融)의 행적
      금 중 현

 

조정융(선조 31년, 1598 ∼ 숙종 4년, 1678 - 향년 80세)은 상주 사벌면 매호에서 대대로 집성 문호를 이루고 있는 창녕 조씨 가문 출신으로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로 이름난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 조우인(1561, 명종16~1625, 인조3) : 창녕 조씨,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또는 이재(頤齋), 우부승지를 역임한 조계형(曺繼衡)의 증손자로 1588(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5년에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경성판관에 이어 1621년에는 제술관으로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3년간 옥살이를 하고 인조 반정 후 풀려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매호별곡(梅湖別曲)』,『자도사(自悼詞)』등 여러 편이고, 화령의 봉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의 아들이다.
  공의 자는 유첨(維瞻)이요 호는 호옹(湖翁)으로, 정유재란으로 나라가 대단히 어려웠던 때에 매호에서 태어나 타고난 재질이 남보다 뛰어나서 온 집안에서 큰 그릇으로 성공할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1631(인조 9)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벼슬을 시작으로 통정대부 고원군수와 함흥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 내·외직을 두루 거쳤지만 조선시대에 대과 급제자로서 일반적으로 거치는 벼슬길에 비교하면 환로(宦路)에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공의 관직 전반에 대하여는『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전혀 없고, 사기 어디에도 관직에 대한 이설(異說)의 사실이 전하는 바 없다. 이는 세상에 영합하지 아니하고 관료였지만 문인(文人) 학자적으로 바르고 담백하게 살아온 그의 행적이 이를 대변한다고 본다. 공의 관료문인으로서의 행적은 그의 부친의 행적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부친이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을 때, 어느 날 궁중에 들어갔다가 서궁(西宮)에 유폐된 인목대비의 쓸쓸한 정황을 보고“감회일장(感懷一章)”이라는 시를 지었다가 권신(權臣)의 무리에게 무함을 당하여 3년의 긴 옥고를 치루고 인조반정 후에야 풀려났다. 늙어서 감옥에 들어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강개(剛介)한 성품으로 의기가 고매(高邁)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악을 분명히 가리는 성격으로 관직 생활에 나아가서도 쟁취하는 성향이 부족하여 물러나서 다시 부름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옥사를 겪은 후 집안이 더욱 어려워져 처자가 밥을 굶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유유자적으로 천석(泉石)을 완상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호옹 공의 일생 또한 아버지 이재 공과 비슷하여 오로지 관직의 승차로 영화에 마음을 두지 않고 고매하고 강개한 성품으로 관직을 떠날 때에 가져갈 짐이 없었으며 집에 양식과 땔감이 없어도 늘 담담하게 생활한 관료문인이었다.
  호옹은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사림의 추숭을 받았고, 부친 이재공 못잖은 문장가요 시인으로서, 도학(道學)으로는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홍여하(1620, 광해군 12~1674, 현종 15) : 부계 홍씨, 대사간을 역임한 홍호(洪鎬)의 아들로 자는 백원(百源), 1654년(효종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정언을 역임하고 경성판관, 병조좌랑과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주자학에 밝아 사림의 종사(宗師)로 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문경의 근암서원에 배향하였다.
와 문학으로는 무첨재(無添齋) 정도응(鄭道應) 정도응(1618, 광해군 10~1667, 현종 8) : 우복 정경세의 손자로 자는 봉휘(鳳輝) 1648년(인조 26)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나이는 30세로 연소하나 사행(士行)이 있다고 하여 조정에 천거하여 교관(敎官)에 임명되어 대군의 사부(師傅)를 역임하고 효종 년간에 학행으로 포상하여 자의(諮議)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저서로『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소대수언(昭代粹言)』등이 있다.
과 교분이 깊었다.
  조선시대 영남지방 사대부 가문의 출신자로 스승과의 사승(師承) 관계는 당색과 더불어 가문과 개인의 성향에 그이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영남학맥의 주류라는 상주의 정치적 지형으로 보아 호옹 공 가문 또한 영남 남인으로 분류되지만, 호옹 자신은 특정한 누구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승관계가 분명치 않다. 다만 공의 아버지 이재 공이 퇴계의 적전 수제자였던 월천(月川) 조목(趙穆)과 한강(寒崗) 정구(鄭逑), 양문(兩門)의 제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가학(家學)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곁들여서 호옹 공이 살던 향리나 이웃 지역을 두루 살펴보아 그의 스승이 될 만한 현사라고 하면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나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들 수 있은즉, 그 이유는 공과 친밀히 교유했던 남고(南皐) 박응형(朴應衡) 박응형(1605, 선조 38~1658, 효종 9) : 고령 박씨, 호는 남고, 매헌(梅軒) 박창선(朴昌先)의 아들로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을 뿐 행실이 이롭고 고결하였다. 병자호란에 인조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항복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충분강개하였다. 유고집으로『남고집(南皐集)』이 전한다.
이나 홍여하가 우복의 문인이라는 점에서 그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와 관련하여 공이 남긴 시 한편을 보기로 한다.

以愚伏校正事會于海岳書堂(이 우복교정사회 우회악서당)

掃塵開講榻(소진개강탑)  방을 쓸고 강학하는 책상을 펴니
窓闥敞而幽(창달창이유)  창문은 높으면서 그윽하구나
庭實梅初熟(정실매초숙)  뜨락에 매실들이 처음익는데
田禾麥已秋(전화맥이추)  밭에는 보리 익는 시절이구나
風斜飛雨脚(풍사비우각)  바람이 삐껴서 불어 비를 내리더니
雲捲出山頭(운권출산두)  구름이 걷혀지고 산이 보이네
無限鳶魚趣(무한연어취)  쉼 없는 연비어약 내달려가니
相携爲更遊(상휴위갱유)  서로가 손을 잡고 다시 노닐까

  우복집 교정을 위하여 해악서당에 모였을 때에 느낀 바를 적은 것인 만큼 호옹의 막역한 친구인 남고와 함께 우복의 문하에서 사승관계가 맺어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공이 남긴『호옹집(湖翁集)』문집에는 순수히 저자 자신의 글만 수록한 유고로서 그 수량이 방대하나 서문이나 발문도 없고 연보나 목록 등 일반적으로 수록하는 문항들이 아예 없는 것이 특이하다. 문집에는 무려 594수의 시가 실려 있으며 시적 문맥을 운용하는 순발력과 기교가 뛰어나다고 한다.
  여기에 공의 시 한 수를 옮겨보면,

征婦別(정부별) 

出門合淚指刀環(출문합루지도환)  문 나서다 울먹이며 환도를 가리키며
此問君行幾日還(차문군행기일환)  묻노니 그대가면 언제 돌아오시나
來世瓜時方罷戍(래세과시방파수)  임기가 끝날 때면 전쟁도 끝나리니
此前休上望夫山(차전휴상망부산)  앞으로는 망부산에 올라가지 말게나

라고, 하는 시이다. 시의 내용은 수자리로 떠나는 낭군을 보내는 아낙내의 입장을 표한 것으로 남편을 전송하면서 언제 돌아 오느냐고 물으니 전쟁이 끝나는 날이 수자리의 임무가 끝나는 날이 될 것이니 아예 이제부터는 망부산에 올라가서 기다리지를 말라고 하는 기막힌 이별의 심사를 나타낸 글이다.
  공이 남긴 글 중에 황산역(黃山驛) 찰방(察訪) 재임 중에 임금의 구언(求言)에 따라 올렸던『응지소(應旨疏)』상소문은 공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상소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께서 즉위한 후에 구언(求言)을 한게 벌써 몇 번이지만 아직 한 번도 가납하여 시행하였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워서 들으시고 잘못이 있으면 서슴없이 고치옵소서. 지금의 사태는 망국의 길이 아닌게 없으니 기강이나 정사나 인재나 사추(士趨)나 인심 등 어느 하나 볼만한 것이 없으며, 그중에 가장 큰 병통은 임금이 간함을 싫어하는데 있으니 전하를 위해 계책을 낸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책언(責言)을 맡은 자들이 비록 지혜가 임금만은 못하드라도 좌우 사방에서 의견을 듣고 시비를 공변되게 하는 사람들이니 하잘 것 없는 작은 일들이라도 듣는게 좋으며 듣지 않는게 별로 이로울게 없습니다. 임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로 자체를 막으니 백성의 휴척(休戚)이나 국가의 득실은 논의할 겨를이 없고 임금의 도량과 성정에 대한 공부가 이처럼 막혀 있으니 일국의 신민이 전하에게 큰 실망을 할 것이며 이는 곧 망국의 길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그 어조가 놀랄만큼 격렬하다. 비록 관행적으로 임금의 청에 의한 상소문이라고 하겠으나 역린(逆鱗 : 임금의 분노)이 우려될 만큼 자극적인 표현이 곳곳에 들어 있다는 것은 공의 평소에 품은 성품 그대로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본다.
  이 밖에 공의 아버지 이재 공이“감회일장(感懷一章)”이라는 몇 줄의 시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천수를 다하지 못한데 대하여 은전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진정소(陳情疏)”와 병자호란 이후에 목민관으로서의 우국애민(憂國愛民)에 근거한 상소로 “전망편오군청물일시충액소(戰亡編伍軍請勿一時充額疏)”가 있고 상주목사를 대신하여 상주의 한해와 그로 인한 기근의 상황을 조정에 소상히 적어 올린“대목백진폐소(代牧伯陳弊疏)”등 여러 편의 상소는 모두 간절하고 감동을 주는 명문장들이다.
  호옹이 남긴 글 중에서“통제사정공사적(統制使鄭公事蹟)”은 임진왜란에 육전의 명장으로서 60전 60승이라는 신화적 전승 기록을 남기고 그 공적으로 우리 상주목사를 역임한 정기룡(鄭起龍) 장군에 대한 사적이다. 한 인물에 대하여 생시에 겪었던 자취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그 인물의 행적뿐만 아니라 글을 지은 사람의 위상과 문장력을 엿보게 하는 민감하고 중대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호옹이 이 글을 남기던 해는 1659(효종 9)년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장장 56년이 지난 뒤였다. 그동안 상주의 사림에서는 정기룡 장군에 대한 공적에 대하여 누구도 거론한 바 없었던 차제에 비록 늦었지만 호옹 공이 처음으로 자세한 전승 사실과 공사간 인간적 행적을 남겼다는 것은 사회를 선도하는 공인으로서 책무를 다하였다고 본다.
  호옹의 행적은 화섬한 문장으로 할 말을 하면서 직분을 다한 관료 문인으로서 상주 향촌에서 존경받는 현사였다. 상주 사림에서는 공의 빛나는 행적을 기리고자 1745년(영조 21) 사벌면 묵상리 지강서원(芝岡書院)에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1. 조정융,『호옹유고(湖翁遺稿)』, 2010, 한국국학진흥원.
2.『尙州市史』(제5권)「인물」, 2012, 상주시사편찬위원회.
3.『국역 梅軒實記』, 1999, 역주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상주시.
4.『尙州의 書院』, 2006, 상주청년유도회.
5. 권태을,『尙州의 漢文學』, 2001, 상주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