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가학을 독실하게 계승한 노도형(盧道亨)과 아들 준명(峻命), 현손 계원(啓元)

빛마당 2019. 4. 2. 20:38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가학을 독실하게 계승한 노도형(盧道亨)과 아들 준명(峻命), 현손 계원(啓元)

 *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전) 상주시 문화융성과장 곽 희 상*
 
1) 표리여일(表裏如一)한 관직생활 – 노도형(盧道亨)
 
  노도형(盧道亨, 1571∼1615)의 자(字)는 백가(伯嘉)이고, 호(號)는 추담(秋潭)이다. 영의정 소재(穌齋) 수신(守愼)의 손자이고, 군수 대해(大海)의 아들로, 조부인 소재 선생의 학문을 가학으로 계승하였다. 45세를 일기로 하신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가계는 다음과 같다.
【가계도】


 홍(鴻)

                ┌─────┴─────┐           

수신(守愼)
            
극신(克愼)
 
                │                ┌──┴──┐   
          
대해(大海)
    
대해(大海)
 출(出)
 
대하(大河)

                │
          
도형(道亨)

                ├──────┐   
          
석명(碩命)
 
준명(峻命)

                              │
                        
사성(思聖 )

                    ┌────┴───┐
               
하정(夏鼎)
      
하적(夏績)

                                      │
                                     
啓元(啓元)
  
※ 노대해는 백부 노수신에게 양자됨

  공(公)의 조부인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선생은 장인인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1488∼1552)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학문은, 야은(길재) – 강호(김숙자) – 점필재(김종직) – 한훤당(김굉필)과 정암(조광조)의 학통을 이어 받았다.
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전승되었으니 권태을,「제2장 학술」,『상주시사』(제3권), 2010, 355-356쪽.
 소재 선생의 학문은 도학(道學)의 한 맥(脈)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추담 공의 학문의 연원은 조부 소재 선생에 이어 부친인 난로당(難老堂) 대해(大海, 1549∼1626)로부터 가학(家學)을 폭 넓게 전수를 받았다고 하겠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매우 성실하여 남을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았으며 사치(奢侈)가 없었다. 이에 조부이신 소재(穌齋) 선생이 시(詩)에,

有孫醇恪(유손순각)  순각한 손자가 있어
克保持者(극보지자)  집을 부지한다.

고, 칭찬하였다.
  26세인 1596년(선조 29)에 음사(蔭仕) 음사(蔭仕)는, 과거(科擧)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인하여 얻어하는 벼슬살이를 이르던 말임.
로 보안찰방(保安察訪, 종6품)이 되었다가 예빈직장(禮賓直長, 종7품),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거쳐 지례현감(知禮縣監, 종6품)으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서 주부(主簿, 종6품), 군기령(軍器令), 평시서령(平市署令, 종5품)을 지내고, 지례현감(知禮縣監)『선조실록』(제180권), 1604년(선조 37) 10월 2일 무신 기사 조.
으로 제수하였다.
  이어 예천군수가 되어 선정(善政)을 폈는데, 매사에 덕(德)이 깊고 의(義)의 가르침을 익혀 배양됨이 표리여일(表裏如一)하고 관화(寬和)하며 정직하여 사람을 대함에 임기응변하지 않았다. 또한 뜻을 굽혀 남의 비위(脾胃)를 맞추는 일이 없었고 중심을 확립하여 온공근칙(溫恭謹飭)하며 생활은 조석을 굶지 않을 정도로 족하고 거처도 미려(美麗)를 피했다. 관직에서는 청렴(淸廉)과 엄격(嚴格)을 자행하였다. 박약회 상주지회,『웅주전고』, 1998, 464쪽.
  
  그 일화로, 예천군수를 마치고 돌아와 초석(草席)을 매입하니 부인이,

“예천은 초석(草席)의 명산지(名産地)인데 한 장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외인이 누가 알아 주겠는가요?”“醴以産席名 而公一無所携外人誰知之者”『광주·광산노씨대동보』(수권) 「묘갈명」211쪽.


고 하니, 공께서

 “알아서 무엇하는가? 다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그만이지!”“知之何爲惟當不愧” 위「묘갈명」211쪽.


라고, 말하였다.
  그 후 전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이사를 하게 되자 여노(女奴)에게 짐을 챙기게 하니 여노가 사사로이 그 남편에게 말하기를,

“어느 고을에 벼슬할 때도 비록 청렴(淸廉)하였으나 명성이 널리 드러나지 않고 재산에 보탬도 없었으니 어찌 내실(內實) 외예(外譽)가 공가(公家)와 같이 허(虛)할 수 있겠는가?”“凡官州郡雖著潔聲外 約不能無內挾安有 內外俱空如公家者乎”위「묘갈명」211쪽.


라고 하였다. 이같이 가노(家奴)까지도 청렴함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배위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문충공 충(冲)의 후예인 좌찬성 황(滉)의 딸로,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생원 석명(碩命)으로 조졸하였고, 차(次)는 울산부사 준명(峻命)이고, 계(季)는 경명(景命)과 우명(佑命)으로 모두 유학을 가학으로 계승하여 업으로 삼았다. 여는 홍문관 응교 심대부(沈大孚), 진사 유덕구(柳德耈), 현감 이항(李杭), 생원 이홍석(李弘奭)이다.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1599∼1670)  이민구(李敏求, 1599∼1670)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 자는 자시, 호는 동주·관해(觀海). 지봉 이수광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수찬·병조좌랑·지평을 거쳐 대사성·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고 사부에 능했다. 식산 이만부의 부친인 박천 이옥의 스승으로, 식산의 수제자인 노계원(盧啓元)이 노도형의 현손으로 이에 연이 닿아 묘갈명을 지은 듯 함. 창석 이준의 형제급란도에도 시를 남겼음.
가 지은 묘갈명에,
 
盧始光山有蔚斯騫  노씨(盧氏)가 광산(光山)에 비롯하여 울흥함이 이다지 높았도다.
由畀而鉅二相俱尊  하늘이 부여(賦與)가 큼으로 인해서 두 정승이 모두 위존(位尊)하네.
如鳥之飛翕翼以陵  새가 나는데 날개를 합해서 높이 뜨는 것 같아
孝孫受之畜德歛躬  효손(孝孫)이 받아서 덕(德)을 좋아하며 궁행(躬行)했도다.
位轍郡紱胡得于人  벼슬은 군수에서 그쳤으니 어찌 사람을 얻었다 하랴.
壽靳服政乃嗇于天  수(壽)를 근석(靳惜)하고 정사에 복정하였으니 하늘이 너무 인색(吝嗇)하도다.
惟其力田旣播旣耘  오직 경전(耕田) 여기서는 수덕(修德)을 뜻함.
에 힘써서 이미 뿌리고 매었노라.
其後必復請質斯文  그 후손의 수확이 있으리니 사문(斯文)에 질문해 보라.

고 읊었다.
  묘소는 화서면 사산리 옥연(玉淵)에 있다. 묘지명(墓誌銘)은,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경연(同知經筵)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행(行) 통훈대부(通訓大夫) 예천군수공(醴川郡守公)이다.
  생가(生家)로 3촌인 이소당(履所堂) 대하(大河, 1546∼1610) 노대하(盧大河, 1546∼1610)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수오(受吾), 호는 이소당(履素堂). 첨정 극신(克愼)의 아들이다. 백부인 소재가 진도에 유배됐을 때 따라가 학문을 배웠다. 현령·현감을 지내고 1602년 천안군수가 되어,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졸고,「대동법을 처음 실시한 노대하」,『상주문화』(제24호) 2014.) 
와 함께 원종공(原從功)이 있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웅주전고(雄州典故)』;『광주·광산노씨대동보』


2) 주민에게 과거(科擧)의 길을 열어준 사또 - 노준명(盧峻命)

  자(字)는 정이(正而)이다. 영의정 소재(穌齋) 수신(守愼)의 증손이고, 통훈대부 행 예천군수 도형(道亨)의 2子이며, 석명(碩命)의 아우인 준명(盧峻命)은 1596(선조 29)∼1652년(효종 3)을 일기로 하신 문신이면서 선정을 베푼 목민관이다. 
  어려서 8, 9세에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1548∼1622)에게 글을 배웠는데 노준명「행장(行狀)」
, 일송은 영의정 수신(守愼)의 제자이다.
  자라면서 학업이 진취(進就)하였는데, 1624년(인조 2)에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에 진사(93/100)에 들자, 당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영남의 명사(名士)로 천거를 하여 활인서 별제(別提)가 되었다. 그 후 의금부 도사(都事), 사옹원 직장(直長)이 되었다.
  그 후 1634년(인조 12)에 갑술(甲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9/12)로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선되었다가 제용감 직장이 되었다. 이 때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1637년(인조 15) 봄에 왕이 서울로 돌아 올 때 겸 참군(兼參軍)에 배명(拜命)되었다가 이내 병조좌랑으로 승진되었다. 고(告)하고 귀향해 있던 중 여름에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인조실록』(제35권), 1637년(인조 15) 12월 20일 갑인 기사 조.
되었으나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다가 다시 부름에 명을 따라 부임하였다.
  정언 재직 시에는 권신(權臣)의 척출(斥黜)에 대한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 때 유백증(兪伯曾)이 김류(金瑬)·윤방(尹昉)의 실정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인조의 진노를 사 파직을 당하였다. 양사(兩司) 양사(兩司)는, 사간원과 사헌부를 말함.
에서 계(啓)를 올렸으나 권력에 눌려 2사람의 죄를 논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분연하여 말하기를,

“방(昉), 류(瑬)의 죄가 큰 데도 죄를 주지 않고 말을 한 자를 죄 준데 대해 간관(諫官)이 단연하게 역쟁할 일인데 어찌하여 그 세력에 말려서 그만 그쳤는가”

하면서, 다시 논쟁하려 하니, 모두가

“불가하다”

고 하였다.
  1638년(인조 16) 2월 5일의『인조실록』에는 대사헌 전식(全湜, 1563∼1642) 전식(全湜, 1563∼164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아버지는 이조판서 여림(汝霖)이다. 류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지중추부사에 이름. 임란에 창의하여 국토를 지켰고, 학문과 문장에 능하였다. 상산 3로(우복⋅창석)의 한 사람이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과 지평 이상형(李尙馨)등에 대해 피혐(避嫌) 피혐(避嫌)은, 혐의를 피함을 뜻함.
된 기사를 보면,   

“정언 노준명(盧峻命)이 부원수의 죄를 논핵하려 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했는데, 옥당에서 먼저 논하였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피혐하고, 대사헌 전식(全湜), 지평 이상형(李尙馨), 헌납 성이성(成以性), 정언 김진(金振)도 김자점을 죄주자고 청하는 논을 옥당에서 먼저 하였다는 이유로 서로 이어 피혐하였으며, 사간 임담은 의견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모두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正言盧峻命以副元帥之罪 欲論而未及啓 玉堂先發此論 不可仍冒; 大司憲全湜 持平李尙馨 獻納成以性 正言金振  亦以金自點請罪之論 先發於玉堂 相繼引避; 司諫林담(墰)以意見不同 引避 皆答曰 勿辭.”(『인조실록』(제36권), 1638년(인조 16) 2월 5일 조.)


고, 기록하였다. 공(公)이 사간원(司諫院)에 봉직하니 관리들의 죄를 가장 먼저 아뢰야 하나,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먼저 고하자 이에 대한 논죄이다. 이 시기의 상례(上例)로는 처치(處置)를 하는 것이 전례(前例)이므로 이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갔다. 다행스러움은 사헌부의 수장(首長)인 대사헌(大司憲, 종2품)이 사서(沙西) 공인 만큼 이는 같은 향리의 어른으로 수습에 은덕을 입었다.
  그 일례를 보면,“노준명도 체차하라"『인조실록』(제36권), 1638년(인조 16) 2월 6일 조.
는 윤허가 내려졌으나, 2월 8일에 주강(晝講)을 마치고 사서(沙西) 공은,

“노준명(盧峻命)을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부박하고 일꾸미기를 좋아하며, 말 또한 조리가 없으므로 체직한 것이다. 지금 비록 그 명을 도로 거두더라도 이미 체직되었으니 형세상 행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시 번독스럽게 하지 말라.”“全湜請還收盧峻命特遞之命, 上曰 其人輕浮喜事 言且無倫 故遞之矣。今雖還收 已遞之官勢難行公。勿復煩瀆" 『인조실록』(제36권), 1638년(인조 16) 2월 6일 조.)


고, 하였다.
  그러나 성이성(成以性)이 한번 더 체직의 명을 거두어 달라고 아뢰자 급기야 인조(仁祖)는,

“내가 살피지 못한 소치이다."“此余不察之致也”(『인조실록』(제36권), 1638년(인조 16) 2월 8일 조.)


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계(啓)를 하지 않고 의사(意思)에 따라 직언으로 기탄없이 두 사람(김류, 윤방)을 출척(黜陟)할 것을 주청하였더니 인조가 당황하여 체직(遞職)을 명하였다. 이로부터 권신의 미움을 받아 배척을 당하고 왕 또한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로부터 8년이 지난 1645년(인조 23)에 홍원(洪原) 현감으로 제수되었는데, 이곳은 함경도로서 북쪽지역으로 습속(習俗)이 학문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이에 공이 부임하여서는 현내의 자제들을 모아 과학(課學)을 독려하고, 현인(縣人)들에게 익혀서 과거(科擧)에 응시(應試)할 수 있도록 명첩(名帖)을 만들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홍원에서 현인들이 과거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공(公)으로부터였다『광주·광산노씨대동보』(수권)「묘갈명」(269-269쪽).
고 한다.
  1년이 지나고 고을은 평안을 찾았는데, 마침 순찰사(巡察使)로 윤이지(尹履之, 1579∼1668) 윤이지(尹履之, 1579∼1668):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소(仲素), 호는 추봉(秋峯). 조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고, 부는 영의정 윤방(尹昉)이다. 1616년(광해군 8) 문과(병과)로 급제하였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두 차례나 역임한 뒤, 1658년 80세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1668년(현종 9) 90세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돈녕부사로 죽었다. 저서로는『추봉집』이 있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가 부임하자 공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순찰사 이지는 공이 사간원 정언으로 재직하면서 권신으로 척출된 윤방(尹昉)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공은 매사에 자봉(自奉)하고 검약(儉約)하고 애민(愛民)에 힘쓰니 현인(縣人)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오래도록 추사(追思)하였다. 
  그후, 공의 문행이 현저하여 옥당(玉堂, 홍문관)에 추천되었으나 들지 못하였는데, 1648년(인조 26) 여름에 직강(直講) 직강(直講)은, 성균관의 종5품 벼슬이다.
에 배명(拜命)되고, 겨울에 울산부사로 나아갔다. 울산부사 시에도 조세 사용의 형평 관리로 칭송과 함께 송덕비가 섰다. 1652년에는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아가 주민을 위해 예전과 같이 하였는데, 재직 중에 순직(殉職)하였다. 향년 57세였다.
  공은 뛰어난 뜻과 행의(行誼)가 있었으며, 효행 또한 지극하여 외직에 재직 시에는 부모를 봉양하지 못함을 한(恨)으로 여겼다.
  평시에는 독서를 좋아해서 다른 일이 아니면 풍영(諷詠)과 송독(誦讀)을 그치지 않았으며, 사람이 선(善)하지 못함을 보면 정색하여 질책하며 온순한 말로 타이르니 감히 다시는 그런 일을 행하지 못하게 하니, 향당에서 모두 공경히 대하였다.『웅주전고(雄州典故)』;『광주·광산노씨대동보』; 묘갈명.
 
  장형(長兄, 석명)이 조졸하고 집이 가난하여 봉사(奉祀)에 부족함이 있을까 걱정되어 봉선고(奉先庫)를 마련하였으며, 국상(國喪)에는 복(服)과 식음을 예에 따라 행하였다.
  특히, 목민관으로서의 선정의 자질은 부친으로부터 청렴과 근면 성실함을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자형(姊兄)인 심대부(沈大孚, 1586∼1657) 심대부(沈大孚, 1586∼165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신숙(信叔), 호는 가은(嘉隱)·범재(泛齋)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봉림대군의 사부이다. 1631년 문과에 들어 예조좌랑·정언을 거쳐, 경상도도사·응교(應敎)·시강관(侍講官)·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는,

“엄정해서 실상을 알지 못하면 가벼이 사람을 허락하지 않고 …(중략)… 의(義)가 아니면 말하기 어렵다”“嚴正非實知然者不輕許人…(중략)… 難以非義”


고 하였다.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예문관 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권유(權愈)가 묘갈명을 지었다.
 초배위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부제학 이호신(李好信)의 딸로 2남 4녀를 낳았는데, 두 형제는 요졸하였다. 후배위도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정랑(正郎) 이영입(李榮立)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사성(思聖)은 현감이고, 사현(思賢)은 생원이다. 
3)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수제자(首弟子) – 지음(芝陰) 노계원(盧啓元) 
 
  공(公)은 영의정 소재(穌齋) 수신(盧守愼)의 7세손으로, 고조부는 군수 도형(道亨)이고, 증조부는 부사 준명(峻命)이고, 조부는 현감 사성(思聖)이며, 통덕랑 하적(夏績)의 아들이다. 자(字)는 백춘(伯春), 호(號)는 지음(芝陰)으로, 1695(숙종 21) ∼ 1740년(영조 36)까지 46세를 일기로 하신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어려서(5세) 부친 상을 당하자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서 글을 배웠는데, 공부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병이 날까 봐 어머니가 잠을 자라고 권하면 자는 척하다가 어머니가 잠이 들면 몰래 일어나 병풍으로 불을 가리고 소리없이 공부하였다. 배움을 이같이 좋아하니 문사(文詞)가 날로 진취하자 보는 이가 모두 탄상(歎賞)하였다.
  1719년(숙종 45) 기해(己亥) 증광시(增廣試)에 진사(60/100)에 들었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어 고향인 화령에서 오직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였다. 송나라 5현(五賢)의 영정을 벽에 걸어 놓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專念)하여 항상 사서(四書)의 정호[(程顥, 명도(明道)), 주희(朱熹), 회암(晦菴)] 등 서(書)를 송독(誦讀)하며 유가(儒家)의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하였다. 거처하는 왼쪽 방에‘진수(進修)’라는 현판을 걸어 놓고 원근의 학자들에게 공부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계하였다.

“…(생략)…학(學)을 하는 도(道)는 가히 현양(顯揚) 공명(功名)의 기대에 전력하지 말고 먼저 고난을 겪어야만 소득함이 있으니 그 의리(義理)를 바루고 그 이익을 모책하지 않는다는 등어(等語)는 이것이 위기(爲己)의 학에 절실한 공부가 되나니 이런 줄 알고서 배우게 되면 그 효과를 기대치 않아도 자연히 있을 것이다.…(생략)…”“爲學之道不可專以顯揚功名爲期先難後 正其義不謀利等語 此是爲學切已之工知 此以學則其效自有不期然而然者” 『광주·광산노씨대동보』(수권)「지음공 행장」340-341쪽.


고, 하였다. 
  이 무렵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44∼1732) 선생이 경남 산천(山川)에 은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집지(執贄) 집지(執贄)는, 예전에 제자가 스승을 처음 뵐 때 예폐(禮幣)를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는 일을 말함.
의 예를 갖추고 문하에 들어가 위기(爲己)의 학을 듣고 벼슬길을 단념하고 성리학에 전공하였다. 당시 스승인 식산 선생은 할아버지 이관징(李觀徵)의 예학과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미수(眉叟) 허목(許穆)·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의 학문을 이어받은 부(父) 박천(博泉) 이옥(李沃)으로부터 가학을 전수받은 대 학자였다. 
  사물잠(四勿箴) 사물잠(四勿箴)은, 공자(孔子)의 사물을 경계하는 말을 적은 글. 곧, 시잠(視箴), 언잠(言箴), 청잠(聽箴), 동잠(動箴)을 이른다.
을 동(東)에, 서(西)에는 명(銘) 등을 벽에 써서 붙이고 조심(操心)하고 율기(律己)의 자료로 삼았다.『광주·광산노씨대동보』(수권)「지음공 묘갈명」 337쪽.
 그리고 심(心), 성(性), 명(命), 리(理)에 대해 강론(講論)하자 크게 칭찬을 하였다. 이에 일방의 장로(長老)들이 공을 후학 권진(權進)할 책임자로 추대되는 등 수문(首門)에 이르렀다. 위「지음공 행장」345쪽.

  이에, 향내의 장보(章甫) 장보(章甫)는, 유학자가 쓰는 관(冠)을 의미하므로, 유생(儒生)을 말함.
와 문내(門內)의 제자를 모아서 추(秋)·동(冬)에는 학(學)을 강론하고, 춘(春)·하(夏)에는 제술(製述)을 강하며, 삭(朔)·망(望)에는 문인(文人)의 모임으로서 상과(常課, 평가)를 삼고,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여 수기(修己)하는 방도와 학(學)을 뚜렷이 점진하게 하였다.
  공은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정성서(定性書), 의설(義說) 등을 지어 스승인 식산과 강론하였다.
  1732년(영조 8)에 스승은 식산 선생께서 졸(卒)하자 손수 염습(斂襲)하고 도(道)의 전함을 공이 받았다. 위「지음공 행장」346쪽.

  1737년(영조 13)에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 1690∼1752) 조현명(趙顯命, 1690∼175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1719년 증광 문과에 합격,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재임 1730.7.∼1732.4.)로 나아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영의정에 올랐다. 저서로『귀록집』이 있고,『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이 학행으로 천거하여 1737년(영조 13) 9월 16일에, 장녕전(長寧殿) 장녕전(長寧殿)은, 강화도에 소재하였던 숙종의 영정을 봉안하였던 전각이다. 1866년(고종 3) 화재로 소실되었다.
 참봉(參奉)으로 제수되었다.『승정원일기』(탈초본 47책) 1737년(영조 13) 9월 16일 신축 기사 조에는, 장영전(長寧殿) 참봉(參奉)으로 기록됨.
 그러나「묘갈명」에는 경기전(慶基殿) 경기전(慶基殿)은,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누전이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봉안된 곳으로, 2008년도에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봉(參奉)에 제수된 것으로 출사를 기록해 놓았다. 위『승정원일기』(탈초본 48책) 1738년(영조 14) 10월 20일 조에, 경기전 참봉으로 재직하였음이 확인된다.
 
  공은 처음부터 벼슬길에 나가고 싶지 않았으나 모친의 명으로 부임하였다. 때마침 흉년이 들자 공은 봉록(封祿)을 내서 전졸(殿卒)들을 진휼(賑恤)하여 생명을 구활(救活)하기도 하였다. 위「지음공 행장」346쪽.
 
  임기가 차서 후릉참봉(厚陵參奉)『승정원일기』(탈초본 48책) 1739년(영조 15) 2월 20일 정유 기사 조.
에 재직하다가 어버이를 떠나 멀리서 벼슬함을 민망스럽게 여기고는 사직을 하고 귀향하였다.
  1739년(영조 15) 겨울에는 가족을 거느리고 충주로 이사를 하였는데, 생가 조모(적성공의 부인)가 나이가 80세로 연로하고 구가(舊家)가 예성(蘂城)에 있으며, 또한 모친이 여호(驪湖, 현 여주)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홍성(洪晟, 1702∼1778) 홍성(洪晟, 1702∼177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광국(光國).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별과로 급제, 승정원에 보직되었다가 1772년에 가자(加資)되어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와 글씨에 능하여 문장과 시사(詩詞)가 고전적이었고, 만년에 더욱 조예가 깊어져 시체(詩體)가 청아하여 고조(古調)의 미가 있었으며, 필법 또한 능숙하였다.
을 만나 도의 교분하면서 예(禮)를 강하고 예설(禮說)을 지으려 하면서,

 “…(생략)… 고금예설(古今禮說)을 많이 들었는데 뜻을 영회(領會)하기 쉽지 않기에 분류를 하여 책을 만들어 열람 시에 편의를 도모하고 싶으나 조정에서 조회(朝會)를 하는 예는 우선 급무가 아니므로 그만두고, 사례(四禮) 사례(四禮)는, 사람이 평생 동안 갖추는 네 가지 큰 의례(儀禮).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를 말함.
를 먼저 함이 당연하다…(생략)…”“古今禮說多聞未易領會欲爲分彙成書以便省覽 然公朝邦國姑非急務 當以四禮爲先遂” 위「지음공 행장」341쪽.


고, 하였다.
  이에, 상례(喪禮)부터 시작하였는데. 모두 문의(文義)가 정심하고 도수(度數)가 미밀(微密)한 곳에도 분호누석(分毫縷析) 분호누석(分毫縷析)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살폈다는 뜻임.
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불행하게도 말질(末疾)에 걸려 완성하지 못하고 1740년(영조 36) 8월 25일에 졸(卒)하자 사곡(沙谷)으로 반장(返葬)하였다.
   초배위는 기계 유씨 언구(彦揆)의 딸로, 1남 2녀를 두었는데, 1남 재문(在文)은 현수(玄壽)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후배위는 안동 권씨 세휘(世徽)의 딸인데, 2남 1녀를 두었는데, 중문(重文), 술문(述文)이다.
  공은 도덕문장(道德文章)이 높았으며, 유집(遺集) 3권이 있다. 옥연사(玉淵祠)에 배향하였다.『웅주전고(雄州典故)』;『광주·광산노씨대동보』


【참고문헌】

1.『인조실록(仁祖實錄)』
2.『상산지(商山誌)』
3.『상주시사(尙州市史)』
4.『광주·광산노씨 대동보(光州·光山盧氏 大同譜)』
5. 권태을,『상주한문학(尙州漢文學)』, 문창사, 2002.
6. 박약회상주지회,『웅주전고(雄州典故)』, 신흥인쇄사, 1998.
7. 곽희상,「대동법을 처음 실시한 노대하」,『상주문화』(제24호), 2014, 193-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