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합천 고을에 죽죽비(竹竹碑)를 세운 조희인(曺希仁)

빛마당 2019. 4. 2. 20:42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합천 고을에 죽죽비(竹竹碑)를 세운 조희인(曺希仁)

                                                                                       김 재 수
 
비명 : 신라충신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128호
지정일자 : 1972년 2월 28일
소재지 :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규모 : 고 140cm, 폭 54cm, 두께 19cm
재료 : 화강암

  역사란 세월이 지나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가 바르게 나타난다.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같은 역사적 사건일지라도 그 사건을 기술한 사관의 시각에 따라 어떤 이는 역적이 되기도 하고 충신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려면 우선 시간이 지나야 하고 아울러 하나의 역사를 각각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사람들의 기록을 올바르게 읽고 난 후 평가해야 한다.
  당시 경상우도 지역은 남명 조식과 뇌암 정인홍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되었다. 집권 노론(서인) 세력들은 1623년 인조반정 후부터 시행해 오던‘경상좌우도 분리정책’을 공개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경상우도는 역적의 땅으로 고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신 봉기의 사상적 연원을 조식(曺植)에게 돌리고, 조식 → 정인홍 → 정희량·조성좌를 같은 묶음으로 하여 경상우도를 가혹하게 보복했다. 이로써 합천, 삼가, 초계, 안음(안의), 거창, 함양, 진주, 산음(산청), 함안, 의령, 고령, 성주 등을 비롯한 경상우도의 남명학파는 더욱 빈사상태(瀕死狀態)에 빠진다. 더더욱 1631년(인조 9) 2월 광해군 복위사건으로 경상우도, 특히 합천은 ‘역적의 땅’으로 폄훼되고 말았다.
http://samga.com/pds/bbs_view. 남명선생 선양회 블로그
 
http://blog.naver.com/. 조찬용 합천사랑 블로그

  그러나 실상 뇌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일대의 동문과 문하생들을 모아 성주, 고령,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하고 경상우도를 방어했다. 당시 영남 3대 의병장으로 이름난 이들이 모두 그의 문하생이었다. 전란이 끝난 후 명나라는 그를 최고 수훈자로 천거했다. 무엇보다 일본이 그렇게 탐내고 약탈하려던 해인사와 팔만대장경판을 전란 속에서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와 의병들의 공로가 컸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정인홍은 폐모론을 주도했다는 죄명으로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된 지 5일 만에 처형되었다. 죽기 전 그는 폐모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강하게 변명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그는 사직 한 상태였으나 명목상 영의정이었고, 또 이이첨이 직권을 도용해 광해군 시절의 어지러운 정치를 부채질했기 때문에 그 역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인홍은 그가 세상을 뜬 지 280여 년이 지난 1908년(순종 2)에야 반역죄가 벗겨지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 다음백과사전

  돌이켜 보면 이와 같은 원인으로 경상우도 지역의 사람들로서는 억울한 과거의 역사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특히 합천이 ‘역적의 땅’으로 폄훼된 것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했다. 이에 고육지책으로 죽죽비(竹竹碑)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 ‘내암(來庵)’을 합천정신의 상징적 인물로 기념해야 한다|작성자 고죽

  ‘신라 충신 죽죽지비(新羅 忠臣 竹竹之碑)’는 신라 충신 죽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죽죽은 오늘날의 합천 지역인 대야주 사람으로 그의 부친은 찬간학열로 알려져 있다. 비문과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죽죽은 사지가 되어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휘하에 있던 선덕여왕 18년(642) 8월에 백제 1만 대군의 습격을 받아 대야성이 위태로워졌다. 그 틈을 타 성주 금일은 적과 내통하여 민심은 매우 교란되었다.
  이에 품석은 죽죽이 끝까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성문을 열고 나아가다 적의 복병에 패망하자 처자를 죽이고 자결하고 말았다. 다시 죽은 나머지 병사를 거두어 이름 그대로 대나무와 같은 절개를 지켜 끝까지 굴하지 않고 항전하다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신라 선덕여왕은 그의 용맹성과 위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죽은 후에 급찬으로 추증하여 그의 뜻을 기렸다.
  화강암에 새겨진 이 비는 조선 인조 22년(1644)에 이르러 군수 조희인이 죽죽의 충절을 기리고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한사 강대수가 지었다.
http://www.hcww.co.kr/bbs/view. 합천월드워터
 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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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선덕왕 때 백제가 1만 병사로 대야성을 침공하자, 성주 김품석이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휘하 죽죽이 항복하지 말라고 간언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에 죽죽이 잔병(殘兵)을 모아 성문을 닫고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니, 슬프다. 겨울이 돼야 송죽(松竹)의 절개를 안다고 하지 않았는가. 진실로 죽죽은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공(公)은 대야인으로 찬간(撰干, 17관등 중 11관등)을 지낸 학세(郝勢)의 아들이다. 그 이름과 그 지역을 세상 사람들이 지금도 말하고 있지만, 뜻 있는 사람들은 그 증거가 없음을 유감으로 여겼다. 이제 군수 조희인(曺希仁)이 오래 지나면 사라져 버릴까봐 염려하여 돌을 깎아 비석을 만들어 마을 어귀에 세우니, 900년 그윽한 빛이 군수 손에 의해 마침내 드러났다. 군수의 풍교(風敎)가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내가 말하건대, 이것은 (중국) 한산(寒山)에 친구의 묘에 비석을 세운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여 적는다. 용집(龍集: 세차·歲次) 을유(乙酉, 1645년) 10월 상한(上澣: 10일) 진양 강대수(姜大遂)가 기록하다.”『조선금석총람』.「신라 충신 죽죽지비」
 

  이 죽죽지비의 비문에 이 비를 세운이가 군수 조희인(曺希仁) 공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 조응인의 아들인 ‘정립(挺立, 1583∼1660)’이 성주목사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묘산면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조정립 등이 합천 등 경상우도 유림들과 상의한 후, 자신의 5촌 당숙인 합천군수 조희인(曺希仁)에게 요청하여 죽죽비 건립이 성사된 것이다.

  조희인(曺希仁, 1578~1660)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선(汝善). 호는 묵계(黙溪)이며 상주 사벌의 매호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언홍(彦弘). 아버지는 몽신(夢臣). 외조부는 신주(申澍). 형은 매호(梅湖) 우인(友仁)이며, 우복 정경세 문인이다.
  광해군(光海君) 8년(1616) 생원시에 합격하고, 인조(仁祖) 5년(1627) 문과에 급제, 성균관학유. 인조 11년 병조좌랑. 인조 15년 성균사예. 백천군수(白川郡守), 인조 21년 형조정랑. 인조 22년 합천군수가 되었다.
  어진 정치를 함으로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고 노년에는 통정에 올라 목사가 되었다.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가 컸고 마음이 깨끗하고 인품이 조촐하며 탐욕이 없었다. 문집이 있고 지강서원에 봉향하였다.『상주시사』.「제5권 인물」. 상주시. 2012.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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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 우복 정경세 선생의 문인이었다.
  우복은 당시 창녕 조씨의 세거지인 매호촌(梅湖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매호촌에는 우복과 교유가 깊었던 조우인(曺友仁)·조희인(曺希仁)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우복은 이들 형제의 배려 속에 매호 이거를 단행했고, 1633년에는 여기서 생을 마감하였다. 특히 조희인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에게 공부를 하였는데 1612년 광해 4년 역옥(逆獄)이 크게 일어나 우복이 무고(誣告)로 체포되었다. 당시 옥사가 매우 엄중하여서 가까운 친척이라도 화를 두려워하여 감히 옥 가까이 가지를 못하는데 공은 옥문 밖에서 옥바라지를 전담하는 등, 우복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일들로 하여 양쪽 가문에는 굳건한 세의가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http://archive.kostma.net/Family/T2/html/sub2_1.aspx?fid=B061a 우산진주정씨산수헌에서
『웅주전고(雄州典故)』, 박약회상주지회(博約會尙州支會). 1998. 신흥인쇄소. p.923.

  공에 대한 문집이 있다고 하나 지금 전해오는 문집이 없어 아쉽다. 하지만 다행이 공이 우복 정경세 선생에 대한 제문을 남김으로 공의 학문과 인품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음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아아, 저의 마음 애통스럽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꿈속에서 얼굴을 뵈었는데, 병이 완전히 다 낳아 기운이 더욱 건승하신 듯하였으며, 이어 선생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산골짜기의 시냇가를 배회하기를 지난날 배종(陪從)하였을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서는 맘속으로 기뻐하는 동시에 또 뒤이어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무슨 소식이 혹 오지나 않을까 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서 반신반의 하고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부고(訃告)가 갑작스럽게 이르렀습니다. 아, 선생님의 정기(精氣)가 장차 흩어지려고 하는데 보잘것없는 저에게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어서 꿈을 빌려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까?
  저는 몹시도 형편없는 자질을 가지고 문하에 출입하면서 알아주심을 받은 지가 지금까지 삼십 년이나 되었습니다. 자리를 마주하여 조용하게 일러 주고 직접 맞대어서 가르쳐 주시면서 정성스럽게 지도해 주신 것은 문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친근하고 두터웠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몹시 어둡고 어리석은 탓에 친히 훈도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어리석은 자질을 변모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덕을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절실해졌습니다. 이에 선생님께서 훈도해 주심에 점차 물들어 소인(小人)이 되는 것을 면할 가망이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가 끝나고 말았으니, 어찌 다시 미칠 수가 있겠습니까.
  아, 선생님의 성대한 덕과 바른 학문은 퇴계 선생과 서애 선생 이후로 오직 선생님 한분 만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나이가 어렸을 적부터 영특하기 그지없어서 지도 편달을 해 바로잡아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능히 스스로 의리를 환하게 깨우쳐 아셨으며, 예의를 분석하여 밝힘이 노사숙유(老師宿儒)와도 같으시어 한 시대의 촉망을 크게 받으셨습니다. 장성함에 미쳐서는 들어와서 집 안에 있을 적에는 자신을 단속하기를 바름에 입각해서 하셨고, 상대를 대할 때에는 온화함으로써 하셨습니다. 이에 아침저녁으로 엄연한 모습으로 단정하게 앉아서 오직 거경(居敬)함을 일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조정에 있을 적에는 자신을 바르게 하여 도를 행하셨으며, 경전에 근거하여 일을 논하셨습니다.
  무릇 올바르지 않은 예(禮)와 정의롭지 못한 의(義)에 대해서는 일찍이 면전에서 곧바로 꺾고 힘껏 간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우리 임금을 인도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되도록 하고자 하셨으며, 세도(世道)를 만회하여 옹희(雍煕)의 다스림을 이룩하고자 하셨습니다. 학문을 쌓은 공의 지극함과 속에다가 쌓아서 바깥으로 발한 성대함은 비록 옛날의 현철(賢哲)들에게 비교해 보아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셨습니다.
  지난날 신축년(1601, 선조 34)과 임인년 사이에는 제가 서책을 싸 들고 우북산장(于北山庄)으로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때때로 회원대(懷遠臺) 위와 만송주(萬松洲) 가에서 달빛을 받으면서 산보하였으며, 갓끈을 씻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학자들의 걱정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하고 자신을 닦기 위한 학문을 하지 않는 데 있다. 단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라면 그만이겠지만, 참으로 옛사람들이 한 학문에 종사하고자 한다면『주서(朱書) 한 질이 바로 그 지남(指南)이 되는 것이다.” 하셨으며, 인하여 학문을 배울 것을 권장 하셨습니다. 이에 드디어 무신년(1608, 선조 41) 여름에 비로소 학업을 전수받기 시작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돌아보건대 저는 노둔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배우고 나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탓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선생님께서 또 저를 버리고 떠나가셨으니, 소생이 어디에서 덕(德)을 상고하고 학문에 대해 묻겠으며, 누구에게 의심 나는 점을 질문하고 의혹스러운 점을 분별하겠습니까. 어두운 데 빠져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끝내는 욕심에 마음이 가리어져서 우리 선생님께서 평소에 가르쳐 주신 뜻을 저버림을 면치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런데다가 더욱더 한탄스러운 것은, 처음에 선생님께서 우북(于北)으로 이사하셨을 적에 다행스럽게도 가까운 이웃에서 살게 되어 조석으로 안부를 여쭙고 집을 새로 짓는 일을 경영하는 것을 소생이 도맡아서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수하는 명이 조정에서 갑작스럽게 내려온 탓에 숙배(肅拜)하는 일이 혹 늦어질까 걱정되어 가르침을 받는 자리를 하직하고 떠나 천리 밖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으면서 때때로 보내 주신 편지를 보면서 스스로 저의 마음을 달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황천(皇天)이 우리 사문(斯文)을 보우(保佑)하지 않아 선생님으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할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앓고 계실 적에 약을 맛보는 일도 하지 못하였고, 선생님의 시신을 염습(斂襲) 할 적에 관에 기대어 통곡하지도 못하였으며, 부고를 받고서 애통해하는 일도 돌아 가시고 난 뒤 엿새나 지난 뒤에 하였으니, 이것이 진정 하늘의 뜻이란 말입니까. 통분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영구(靈柩)가 이미 상여에 실려 가서 무덤이 장차 덮이게 되었는바, 아득히 먼 구천(九泉)에서 영원토록 눈을 감고 계시게 되어, 다시금 선생님의 의표(儀表)를 뵈올 길이 이승에선 다시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지난번에 꿈속에서 선생님을 뵌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선생님께서는 매일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시어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어 저로 하여금 갈 곳을 몰라 헤매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경우 유명(幽明) 간에 내려 주신 은혜가 역시 클 것입니다. 말은 다함이 있으나 정을 다할 날이 없습니다. 어둡지 않은 영혼이 있는 법이니, 저의 하찮은 충심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복 정경세 선생에 대한 제문 - 문인 조희인(曺希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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