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어려울 때 이웃과 더불어 살아 간 조기원(趙基遠)

빛마당 2019. 4. 2. 20:40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어려울 때 이웃과 더불어 살아 간 조기원(趙基遠)

* 상주문화원 부원장, 전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조 희 열*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부산을 침입한지 불과 열흘 만에 상주가까이 까지 침공해 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서슴없이 죽이고 분탕질하는 왜적을 피해 상주 백성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고, 왜적이 부산을 침략한 지 불과 열이틀 만인 4월 25일에는 상주 사람들이 북천에서 적을 맞아 싸웠지만 결국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면서 패하였고, 상주 성도 왜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 상주 성에 모아 둔 많은 곡식은 모두 고스란히 왜적의 차지가 되고 말았고, 상주의 백성들은 지난해 거둬들인 양식이 모두 동이 난 형편에 급히 피난을 가면서 양식을 가져가지도 못하여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농사를 짓기 위해 파종을 하려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먹고,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버티긴 했지만, 한 해가 지나면서 굶주림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피할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고, 이 때문에 날마다 굶어 죽는 사람이 왜적에게 죽는 사람보다 많았다. 그람에도 분탕질하는 왜적의 칼날에 죽는 사람들의 소식도 그치지를 않았고, 마을이 온통 불타면서 하늘은 연기로 덮였다.

  이러한 때인 1593년 5월 어느 날 선생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우리만 살겠다고 산 속에서 피난 생활만 하고 있겠느냐? 너는 네 아우 영원(榮遠)을 데리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서애(西厓, 柳成龍)선생을 찾아뵙고, 도와 드리도록 해라.”
  당시 19살이던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아우 영원과 함께 집을 떠나 서애 류성룡의 진(陣)으로 가서 표하병(標下兵)으로 종군했다.
 
  이러한 선생의 본관은 풍양(豐壤), 자(字)는 경진(景進), 호(號)는 초은(樵隱)이고,  두 자식을 전장으로 떠나보낸 뒤 상주 함창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인 창의진에 참여하여 많은 군량을 모으고, 국가 보물로 지정된『임진왜란일기』를 남긴 검간(黔澗) 조정(趙靖) 선생의 맏아들로, 1575년(선조 8)∼1652년(효종 3)까지 78세를 일기로 사신 선비이다.

  22세 때인 1596년(선조 29) 3월, 선생은 또 다시 아우 영원과 같이 화왕산에서 왜적과 맞서고 있는 망우당 곽재우의 의진(義陣)을 찾아가 화왕산성 싸움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전쟁으로 타버린 집도 짓고, 사당(祠堂) 7간을 지어 선조의 위패를 모셨다.
  부친의 가르침으로 학문을 익힌 그는 32세 되던 해인 1606(선조 39)년 셋째 아우 홍원(弘遠)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606년(32세)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우곡 송량(愚谷 宋亮)·월간 이전(月澗 李㙉)·창석 이준(蒼石 李埈)·석천 김각(石川 金覺) 등의 의론으로 지금의 도남서원을 건립할 때 건물을 짓는 간사(幹事)의 소임을 충실히 하여 고을 선비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44세 때이던 1618년에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상주향교(鄕校)를 다시 세워야 했다. 이때에도 각 건물의 배치와 설계를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626(인조 4)년 52세 되던 해 종택(宗宅)인 양진당(養眞堂) 양진당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568호(2008.07.10.)로 지정하였다.
을 짓기 시작하여 1628년에 완공하였는데, 이 건물 역시 공이 설계를 하고 공사를 지휘하여 이루어졌다. 상량문에 “天啓六年 丙寅 十二月二十八日 丙辰 上監董 趙基遠”이라 한 것으로 보아 양진당은 초은 선생이 지은 것으로 본다.
 지금 국가 보물로 지정한 양진당은 상주의 자랑거리가 되었는데, 문화재 전문위원 신영훈(申榮勳)은『상주 양진당』에서

  ‘양진당은 그 기법과 양식이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성이 있다. 이 건물을 세운 조기원(趙基遠) 선생은 학문은 물론이고, 건축에도 깊은 조예와 전문적 식견을 가진 분으로 그 분의 천부적인 진면목이 400년 후인 오늘에 빛나고 있다.’

라고 했다.
  1628(인조 6)년 동몽교관으로 천거되어 벼슬에 나아갔고, 인조 11년에는 황간 현감이 되었다.
  1634년과 1635년 상주지역에 계속된 흉년으로 전염병이 돌아 죽는 사람이 많았었다. 이때 공은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성심으로 구호하였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거두어들여 한 솥의 밥을 먹는 자가 무려 40여 인이나 되었다.
 그러면서 나라에 상소(上疏)를 하기를

  “저희들이 사는 상주는 산골짜기이고, 토질이 자갈밭이라 물이 적어 한발의 재앙을 가장 먼저 받는 곳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곤궁 빈한하며, 겨우 생명을 유지해 나갈 뿐입니다. 한번 농지를 계량한 다음에 두락 수는 배로 늘리고, 조세는 감면되지 아니하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여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 토지의 거칠고 기름짐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처음 정한 두락 수에만 의존하여 조세를 부과하므로 백성들의 곤란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금년의 수해와 한해는 상주가 가장 심했는데, 태풍까지 겹쳐 모든 곡식이 제대로 익지도 않았습니다. … 조세부과만 더하여 저희 백성들로 하여금 들판에서 굶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저희들은 민망하기 그지없사옵니다. … 임금님께서는 빨리 해당 부서에 명령하시어 비용을 아껴 쓰고, 상중(上中)의 조세를 특별히 감면해 줄 것을 의논하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삶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해 주십시오.”

라 했다.
  1636(인조 14)년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왔는데, 강주진 박사가 쓴『초은집(樵隱集)』서문.
 그 다음 해 7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서민들의 고달픈 삶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겠다는 마음에서 1640년 수군(水軍) 때문에 일어난 폐해를 덜어 달라는 간곡한 청원의 글을 올렸는데, 다음과 같았다.

   “상주 고을은 조령 아래에 있어서 바다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본래 수군이 없었습니다. 근래에 와서 호패(戶牌)를 정리할 때 호패 명부 속에 다른 도(道)의 관원들과 흘러들어 온 사람들이 임시로 거주하게 되어 등록하면서 그들 모두를 본래의 역할에 따라 충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상주에도 수군(水軍)이 있게 되어 많을 때는 그 수가 155명까지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군으로 등록한〕호패가 없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분담했던 방어의 안(案)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상사(上使)가 독촉하여 번(番)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도망가서 없어진 사람도 있고, 살고는 있지만 그 자신은 이미 늙어 번을 설 수 없는데다가 아들조차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부득이 사람을 고용하여 번을 세우게 되고, 이웃 마을 사람들에게 그 고용한 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군(陸軍)의 아들마저 수군(水軍)으로 대치하여 눈앞의 급한 것만 지탱하여 온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이웃마을 사람들이 그 고통을 이지지 못하여 도망가고 흩어져 징집을 할 수마저 없게 되었고, 백성들의 원망은 쌓여 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육군인 사람마저 그 아들이 수군으로 대치되므로 육군의 본 역을 보존해 나갈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 근심스럽고 손해가 또한 극심하지 않겠습니까.
  간절히 바라오니 순찰사(巡察使) 각하께서는 이 폐해를 통촉하여 조정(朝廷)에 알려서 옛날처럼 본 고을의 수군을 없애 주신다면, 백성들의 원한과 고용해서 번(番)을 세워야 하는 근심을 면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육군도 또한 보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군정(軍政)도 편리해 질 것이고, 마땅한 것이니 어찌 한 고을만 다행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각하께서는 어지심을 베풀어 청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두렵기 그지없으면서도 이렇듯 엄숙한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은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라 했다.
  또 장천면 지역에서 화전(火田)을 일구면서 산의 초목을 모두 태워 홍수와 한해(旱害)가 더욱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1643년 올린 공문 長川面請禁山火田呈文
에서는

  ‘… 난리를 겪은 후 화전(火田) 금지가 전폐되어 사방에서 모여 든 사람이 오직 임시방편으로 부역을 피하기 위해 옳은 논밭은 갈지 아니하고, 세금이 없다는 이로움 때문에 화전을 일구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초목이 무성한 곳을 골라 벌채와 개간하기를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여 올해에는 여기에서, 명년에는 저기에서, 가까운 곳에 숲이 없어지자 이젠 깊은 산 속에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이 면(面)에서 이런 실정이라면 다른 면의 실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갑장산의 앞산은 본 면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비록 야산(野山)이기는 하지만 높기가 하늘에 솟아 이름이 여지(輿地)에도 기록되어 있고, 날이 가물면 반드시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는 산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수목이 많아 재목으로 다 쓸 수 없을 정도였었고, 구름이 덮이고 안개가 끼어 비의 은택으로 사람들에게 끼친 공리(公利)가 많았지만, 지금은 민둥산으로 변하여 초목조차 없습니다. … 조금만 가물어도 냇물이 끊겨 물을 댈 수가 없으며, 소낙비가 쏟아지면 모래가 흘러내려 물길이 막히고, 얕아져 넘치고 흩어져 가옥을 덮치기도 하고, 제방이 모래로 덮여 논밭을 망치고 있습니다.
  만약 화전 일구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면 민가(民家)는 흩어질 것이고, 논밭은 경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화전(火田)이 민간 생활을 근본적으로 해롭게 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들에 묵히는 논밭이 없어서 화전을 일군다면 그건 금지할 수가 없겠지만, 지금은 들에 황폐한 논밭이 많은데도 그것을 버려두고 화전을 일구어 세금만 줄이고 있습니다. …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주(城主)께서는 평소의 예에 의하여 산림을 지키는 감독을 두고, 화전을 금지하는 명을 내려 다시는 화전을 개간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면(面)은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면할 수 있으며, 논밭이 황폐화하는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

라 했다. 
 이 당시 상주 지역의 토지 조세를 상·중으로 평가하여 부과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더욱 곤란해졌는데, 선생은 긴 상소문(上疏文)을 지어 상주 지역 유림(儒林)들로 하여금 조정에 이렇게 진정하게 했다.

  ‘…계속된 흉년으로 전염병이 돌아 남의 곡식을 빌려 먹은 사람 중에서 죽은 사람이 반수를 넘고, 살아있는 사람 또한 빌린 것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빌린 곡식이 100석이나 되는데,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함께 사는 식구가 50여 명이나 되는데다가 세 사위마저 각각 10여 식구를 데리고 와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지난 해 겨울부터는 훈도(訓導) 금대진(琴大進)이 곤궁하여 살아가기 어려워 저에게 의지하여 손자들을 가르치면서 그 처자 7 식구와 함께 생활하면서 밥을 먹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본 집 식구 외에 남의 식구가 40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어찌 반드시 떠돌아다니며 빌어먹은 다음에라야 굶는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

라 했다.
  자제 교육도 엄히 하셨는데, 공이 만년에 고질적인 질병을 앓아 10년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있었다. 그러자 맏아들 예(秇)는 옷을 벗지도 못하고 눈을 붙이지도 못하기를 시종 하루같이 하면서 어버이가 잡숫지 못하면 걱정이 되어 종일토록 수저를 들지 않았다. 작은 아들 균(稛)은 1649년에 연천 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와서 아버지 초은공의 병구완을 백씨(伯氏)와 더불어 밤낮으로 하면서 약시중을 들었다. 
  특히 균(稛)은 종숙(從叔) 유원(裕遠)에게 출계(出系)하였는데, 양어머니인 김씨의 친정 동생이 당시 정승의 자리에 있던 김자점(金自點)이었다. 당시 김자점은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는데, 균(稛)은 외숙(外叔)의 이러한 것을 보고 가까이 하지 않았으므로 훗날 김자점이 패망했을 때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는 공께서 강직하면서도 악을 미워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자제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었다. 공은 생전에 이미 두 아들 예(秇)와 균(稛)에게 재산을 분재하였었다. 그런데 아우 균(稛)은 형에게는 자신보다도 자식들이 더 많다는 이유로 자기가 물려받은 재산을 형에게 극구 양보하였다. 그러나 형도 이를 거절하자 결국 형이 돌아가신 후에 그 재산을 조카에게 물려주었을 만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이웃의 불행을 내 불행처럼 여기면서 이웃을 도왔고, 나라가 어려울 때 아버지의 말씀에 주저 없이 전장으로 나갈 만큼 효성이 깊었으며, 자식들도 또한 불의를 가까이하지 않게 가르치신 공은 1652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