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지위(地位)가 그릇에 차지 않았던 신륜(辛崙)

빛마당 2019. 4. 2. 20:32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지위(地位)가 그릇에 차지 않았던 신륜(辛崙)

                                                                           김 정 찬

 

 신씨(辛氏)의 선대 계통은 영산(靈山)에서 비롯되어 우리나라에서 왕실(王室)과 혼인한 종족이 되었는데, 마치 주나라의 윤힐(尹詰)과 같다.
  공(公)의 이름은 륜(崙)이고 자는 경립(景立)이다. 1504(연산군 10)∼1565년(명종 20)을 일기로 하신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공(公)의 5대조 신사장(辛斯藏)은 고려에 벼슬하여 전공 판서(典工判書)가 되었고 고조부 신제(辛劑)는 군수(郡守)이다. 군수가 종부시정(宗簿寺正) 정인자(鄭仁慈)의 딸에게 장가들어 절도사(節度使) 신숙청(辛俶晴)을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군수는 고려 말엽 때 역적 신돈(辛旽)이 그의 명성을 사모하여 같은 일가로 의탁하고자 화복(禍福)으로 위협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할아버지 신계무(辛季武)는 황주판관(黃州判官)이고 아버지 신필주(辛弼周)는 참의(參議)인데, 창원 황씨(昌原黃氏)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참의공은 홍치(弘治) 병진년(1496, 연산군 2)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燕山君)의 정사가 혼란하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가 정덕(正德) 정묘년(1507, 중종 2)에 종종(中宗)이 실시한 문과(文科)에 합격하였고 문무(文武)의 뛰어난 재주가 있어 안팎에서 40여 년간 드날렸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여 15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 1)에 대과에 합격하였는데, 신씨가 대대로 가문의 명성을 수립하였으니 만큼 마치 남전(藍田)에 아름다운 옥이 나오는 것 남전생옥(藍田生玉) : 남전(藍田)은 중국 산시성(陜西省) 시산(西安)의 남동에 있는 현(縣)으로, 그 동쪽에 있는 남전산(藍田山)에서 미옥(美玉)이 산출됨. 즉 명문에서 뛰어난 젊은이가 나옴을 칭찬하는 말임. 최근 구석기시대인의 화석이 출토된 곳이기도 함.
처럼 당연하였다. 처음에 성균관(成均館) 학정(學正)ㆍ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전직되어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고 간사한 무리를 적발하기도 하였다. 형조 관리 중에 참의공을 섬기다가 정랑(正郞)이 된 사람들이, 공이 송사를 고요(皐陶)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인물. 순(舜)임금의 신하로, 구관(九官)의 한 사람이다. 정치가로 법리(法理)에 통달하여 법을 세우고 형벌을 제정하였으며, 옥(獄)을 만들었다고 한다.
처럼 잘 처리한다고 일컬으며 정랑처럼 대우하였다. 경술년(1550, 명종 5)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에 임명되어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다. 이해 10월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예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다가 야위었고 몸소 제전(祭奠)을 드리고 나서 어머니의 거처를 보살피며 안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임자년(1552, 명종 7)에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야 하므로 부임하지 않고 예조정랑(禮曹正郞)ㆍ공조정랑(工曹正郞)ㆍ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전직되었다. 어머니 봉양을 위해 지방 고을을 요청하여 예천군(醴泉郡)으로 나갔다가 또 어머니 봉양을 위해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었다. 계해년(1563, 명종 18) 가을에 또 다시 어머니 봉양을 위해 지방 고을을 요청하여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年老)하여 여정에 나설 수 없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손수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 5월에 병환이 나 향년 62세로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公)은 선무랑(宣務郞) 남정소(南廷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남정소의 부인 죽계(竹溪) 절부(節婦)는 부사(府使)였던 안장(安璋)의 딸로 공의 부인을 낳았다.
  공(公)의 부인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신여근(辛汝謹)ㆍ신여성(辛汝誠)이고 딸은 사성(司成) 진관(陳瓘)의 아들 진유경(陳裕慶)에게 시집갔다. 신여근은 생원(生員) 곽지원(郭之元)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신여(辛膂)이고 딸은 어리다. 신여성은 경력(經歷) 장세침(張世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신윤(辛胤)을 낳았다.
 
  공(公)은 모습이 특출하고 성질이 순수하고 호방하였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백성을 화평하게 다스렸으며 사물을 성실로 수응하였다. 말씀이 화려하지 않고 행실이 거짓이 없었다. 향리(鄕里)에서 그의 효성을 칭송하였으나 지위가 그릇에 차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부인은 단아하여 부녀자의 법도가 있었는데, 공보다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그의 선친과 친분이 있고 또 내가 아첨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신여근은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墓碣銘)을 써달라고 요청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마포(馬浦)의 북쪽에
영취산에 신(神)이 있도다.
주정(周楨)이 내려오니,
신씨(辛氏)가 펼쳐졌도다.
벼슬아치가 줄줄이 이어지니,
융성하게 일어나지 않겠는가?
인자(仁者)로서 장수한 이는 참의공이었고
인자로서 장수하지 않은 이는 목사공이었도다.
유능하다는 이유로 혼자서 노고하니,
세 번 그 자리를 그만두었고
경색(敬色)에 근면하다고 하여
여러 번 수레바퀴에 붉은 칠을 했도다.
나라에 훌륭한 신하가 있었고
현고(玄考)에게 형이 있었도다.
그런데 증삼(曾參)이 봉양하지 못하고
늙은 할머니가 손자를 안았도다.
언덕에 높이 서서 눈을 감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쌍백(雙白)을 세우겠는가?
군(君)이 연못이라고 한다면
아들은 산이라고 하겠도다.
우리 태수를 기다리자
하늘이 보내주었도다.
천년의 뒤에 향화(香火)가 끊어지겠는가?
여기에 비명이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