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절의숭상(節義崇尙)의 유신(儒臣)

빛마당 2019. 4. 2. 20:35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절의숭상(節義崇尙)의 유신(儒臣) 동고(東皐) 강신(姜紳)·시암(是菴) 강인(姜絪) 형제

 * 상주향토문화연구소 고문, 경북대학교 명예교수·문학박사
 權 泰 乙*


<가계(家系)>
  동고(東皐) 강신(姜紳·1543~1615) 의 자(字)는 면경(勉卿)이요 다른 호는 애련재(愛蓮齋)며, 아우 시암(是菴) 강인(姜絪·1555~1634)의 자는 인경(仁卿)으로 관향은 진주다.
  고조 강형(姜詗)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갑자사화(1504) 때는 대사간으로,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하고 신주를 묘(廟)에 안치하려 하자 궁중법도에 어긋남을 들어 연산군의 처사에 반대하다가 주동으로 지목되어 극형을 당하였다. 고조모는 선산 김씨 군수 김승경(金承慶)의 따님으로 남편이 화를 당하자 음식을 절제(節制)하고 슬피 울다가 남편을 따른 열녀로 1507년 정려가 내렸다. 증조는 별제 영숙(永叔)으로, 아버지와 한 날 3형제 장남 永叔, 차남 진사 茂叔, 3남 목사 與叔
가 화를 당하였다. 증조모는 익산 이씨 목사 이정양(李貞陽)의 따님으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부군의 상여를 운구하여 조령을 넘어 와 문경 산양면 존도리(存道里·당시는 상주 땅)에 우거하여 자손이 상주에 세거하게 되었다. 특히, 아들 5형제 장남 滸, 차남 진사 澤, 3남 문과 사인 溫, 4남 진사 濬, 5남 참봉 鴻
를 엄히 훈도하여 가문의 중흥을 이끌었으며 절의 숭상(節義崇尙) 가풍(家風)을 전승한 여사(女士)다. 조는 청대(淸臺) 온(溫)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에 이른 문장가였다.
  아버지는 우의정 월포(月浦) 사상(士尙)이요 어머니는 파평윤씨 부정 윤광운(尹光運)의 따님이다. 동고 강신은 중부(仲父) 정랑 사안(士安)의 계자(系子)가 되어 양모는 풍천 임씨 현령 임간(任幹)의 따님이다. 동고(東皐)의 배(配)는 동래 정씨 감사 정유의(鄭惟義)의 따님이니 두 분 사이에서 현감 홍수(弘秀)와 문과급제 우참찬 홍립(弘立)과 진사 한성부 서윤 홍적(弘勣) 및 딸 셋이 태어났다. 시암(是菴)의 배(配)는 함양 박씨 목사 박정립(朴挺立)의 따님과 후배(後配) 나주 정씨 정호례(丁好禮)의 따님인데, 함양 박씨 소생으로 용인현령 홍정(弘定)이 있다.

<수학(受學)>
  동고(東皐)나 시암(是菴)의 행적을 소상히 알 만한 문헌 자료가 부족하여 ≪진주 강씨 대호군공파보≫, ≪영남인물고≫, ≪상산지≫ 및 몇 백과사전 등에서 관련 사실을 모았다.
  동고(東皐)와 시암(是菴)은 맏형 난곡(蘭谷) 강서(姜緖) 강서(1538~1589)는,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에 오른 문신. 지인지감(知人之鑑)에 특출한 분으로 야사에도 많은 일화를 남기었다.
와 아우 담(紞) 강담(1559~1637)은 군수를 역임하였고 수직(壽職)으로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과 같이 어려서부터 절의숭상의 가풍에 귀와 눈이 젖었고, 고조 이래로 숭상해 온 유업(儒業) 儒業은, 공자의 학설을 신봉하는 유가(儒家)의 경학(經學)을 뜻하기도 하나 주로 유학(儒學)을 업으로 삼음을 의미함.
을 닦음에 당대 석학을 종유하여 4형제가 다 현달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은 유신(儒臣) 儒臣은, 유학자로서 벼슬살이를 하는 신하, 곧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
으로 조야에 이름이 났다. 다만, 수학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버지 월포공(士尙)의 <가훈시(家訓詩)> <가훈시>는, ≪진주강씨대호군공파보≫ 참조.
 한 수로써도 동고 형제의 수학을 짐작은 할 수 있다.

家有詩書盈滿車丑(가유시서영만축)  집에 시서(詩書)의 책 축으로 쌓인들
其奈兒孫不好書(기내아손불호서)  어찌랴, 아손(兒孫)들 책을 좋아 아니하면.
非願榮華能世世(비원영화능세세)  세세로 영화 누리길 원해서가 아니라
以憂無識犬豕如(이우무식견시여)  개·돼지같이 무식할까 두려워서 일세.

  독서의 궁극적 목적이 일신의 영달에 있지 않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데에 학문의 궁극적 목적이 있음을 자손들에게 경계한 가훈시다. 맏형 서(緖)가 지인지감(知人之鑑)에만 신이할 뿐 아니라, 왕 앞에서도 직언 정간(直言正諫)을 서슴지 않은 의리가 있었고 서사(書史)에도 통달한 분이었다. 이원익, ≪梧里集≫(권1), <記·姜承旨言行記>·정경세, ≪愚伏集≫(권18), <墓表·左承旨姜公墓表>·허목, ≪記言≫(권38), <東序記言一·姜承旨緖遺事>·≪商山誌·人物≫ 등
 또한, 동고(東皐)에 대하여서도 준직(峻直)하며 식견(識見)이 고상하고 원대하였다 ≪商山誌·人物≫
 라고 하였다. 이상의 몇 사실로써도 동고(東皐)나 시암(是菴)이 절의숭상의 가문에서 자랐고, 유업(儒業)을 숭상하는 가업(家業)을 전수함으로써 문학에서 뿐 아니라 유학자로서의 깊은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하겠다.

<벼슬길>
  동고(東皐) 강신(姜紳·1543~1615)은 1567년 진사과에 장원, 1577년(선조 10)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2·30대에 이미 촉망받는 인재로 조야에 널리 이름이 났다. 1585년에는 충청좌도 어사가 되었고, 1589년에는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에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흥군(晋興君)에 책봉되었다. 1592년 초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왕이 특명으로 강원도관찰사로 부름에 대의를 좇아 부임하였다. 이 뒤 도승지(1594), 병조참판(1594, 서북면 순검사(1596), 대사간(1597), 이조참판(1597), 예조참판(1598), 우참찬(1609), 좌참찬(1610·정2품)에 이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었다.
  1615년 12월 23일에 별세하니 의간(毅簡)의 시호가 내리고 부조지전(不兆之典)을 명하였으며, 사림에서 상주 봉강서원(鳳岡書院)에 봉향하였다.
  시암(是菴) 강인(姜絪·1555~1634)은 1589년 진사과에 오른 뒤 음사(蔭仕)로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에는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호종(扈從)하여 공을 세우고, 1595년에는 평안남도 영유현령(永柔縣令)이 되었다. 1602년에는 선천군수(宣川郡守)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1604년에는 임란의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창군(晋昌君)에 책봉되었다. 1605년 홍주목사, 1609년 상주목사에 부임하여 1612년 퇴임한 후, 대북(大北) 이이첨 등이 권력을 함부로 부림에 금천(衿川) 선영 밑으로 은퇴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에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였다가 회답사(回答使·通和使)가 되어 청(淸)과 화의(和議)에 참여하여 국체(國體) 보존에 진력하여 공을 세웠다. 1632년 한성부판윤(정2품), 1634년에는 한성부우윤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해 11월 23일에 별세하였다. 1676년 호성공신으로 부조지전(不兆之典)의 국명이 내렸다.
  벼슬길에서는 형제가 나란히 나라 위한 공훈으로 진흥군(晋興君)·진창군(晋昌君)에 봉해졌다.

<행적1. 동고(東皐)의 삶>
  동고(東皐)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진사과 장원, 문과 장원으로 30대에 이미 문명(文名)이 조야에 널리 알려졌다. 동고가 이룩한 일생의 사업을 문헌 자료가 부족하여 일부만 소개함이 안타깝다. 동고의 행록이 발견되기를 빈다.

  ○ 국난(國難) 극복에 헌신
  1589년(己丑·선조 22) 10월, 정여립옥사에 문사랑(問事郞) 문사랑은 問事郞廳으로, 죄인의 심문서(審問書)를 작성하고 읽어주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
으로 옥사 처리에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흥군(晋興君)에 봉해졌다. 그 당시 조정의 명사로 정여립과 서신 왕래조차 없었던 사람은 동고(東皐)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한 몇 명에 불과하였기에 시론(時論)이 동고의 처신을 아름답게 여기었다.(영남인물고)
  1592년(임진·선조 25) 초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4월에 임진왜란이 발생, 왕이 의주로 파천(4월 29일 서울발) 할 때 개성에 도착하여 특별히 동고를 강원도관찰사에 제수하였다.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어져 근왕병을 모집하던 때라, 동고는 비록 상중이었으나 왕명을 따르기를 결심하였다. 부임 즉시 서울 부근의 지역 뭇 장수들과 협력하여 춘천·원주 등지의 적을 소탕하였다. 이듬해(1593) 정월에는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북로로부터 퇴각할 때 동고가 정예 부대를 독려하고 적을 맞아쳐서 참획이 많았고, 같은 해 여름에는 평해(平海)의 적을 사로잡은 공으로 가선대부(종2품)에 가자되었다.(영남인물고)
  역옥사(정여립모반옥사)를 처리함에 문초관으로서 미진함이 없게 처리하여 공신록에 오르고, 대의를 의하여 상중에서 왕명을 받들어 험지의 관찰사로 나아가 평난(平難)에 헌신함으로써, 절의숭상의 가풍과 의리실행의 가학을 익힌 대로 실천궁행한 유신(儒臣)이 되었다. 특히 임란을 당하여는 일신의 예(禮)에 구속되지 않고 일국의 의리(義理)를 좇았으니 이는, 동고가(東皐家)의 가풍(家風)과 가학(家學)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게 한 좋은 예라 하겠다.

  ○ 지행(志行) 순결의 유신(儒臣)
  선조(宣祖)가 정신을 가다듬고 나라를 다스림에 힘써 늘 경연(經筵)에 납신 까닭에 홍문관 부제학 이하의 옥당(玉堂) 관원들은 비록 퇴근할지라도 감히 의관을 벗지 못하였다. 자주 궁궐의 행랑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이어 다시 왕에게 시서(詩書)와 문사(文史) 등을 진강(進講)하였다. 하루는 왕이 유신(儒臣)들에게 술자리를 베풀고 노고를 위로하여 주량껏 마시게 하였다. 동고는 술을 잘 하였는데 중관(中官·내시)이 촛불 아래서,“술잔을 비우지 못하면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동고가 취하여 술잔을 뒤집어 보이니 왕이 웃었다 한다. 金時讓, ≪涪溪記文≫(大東野乘 권72 소재).

  이는, 취중에서도 왕명을 준수하려는 동고의 순결(純潔)한 지행(志行)을 엿보게 한 일화다. 형 난곡(蘭谷·緖)이 대취하여 인사불성인 상태에서도 어전에 나아가서는 언행이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곁에서 지켜 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지닌 마음에 안정되고 침중(定靜)한 힘이 있어 외물(外物)에 어지럽힘을 당하지 않음을 가히 볼 수 있다.” 이원익, <姜承旨言行記>.“可見其中之所存 有定靜之力 不爲物所撓亂矣”
 하였듯이 아우 동고 역시 취중이었으나, 평소 의리를 지키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 순결한 지행(志行)을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고, 동고가(東皐家)의 가풍(家風)·가학(家學)의 근본이 유업(儒業)에서 다져진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곧, 동고는 유자(儒者)로서 문장에도 능한 선비였다 하겠다.

  ○ 원려(遠慮)에서 제작된 진흥군일기(晋興君日記)
  동고(東皐)의 ≪진흥군일기≫는 임진왜란 때인 1595년 1월 2일에 시작하여 1613년(광해군 5년) 12월 30일까지 19년 간의 일기다. 동고가 주로 내직에 근무하였기 때문에 국정 제반의 주요 정책, 외교, 국가적 사건, 문교, 관리들의 용사(用事)·용심(用心) 등에 대하여 간결한 필치로 정확히 기술하였다. 이에, 전쟁 관련의 두 일기만 소개한다.

   ∙ 1597년(丁酉) 12월 26일 - 전장(戰場)의 참화
 “겨울비가 크게 내려 밤새도록 쏟듯하여 사람과 말이 무릎까지 빠져 진흙탕 가운데 서게 되었다. 이튿날(27일)은 북풍이 크게 일어 말이 거의 죽은 까닭에 이로 인하여 사기(士氣)가 크게 꺾이어 날카로운 기상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27일부터 초3일(1589.1.3)까지 연달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당병(唐兵·明軍)과 우리 병사가 죽은 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이여매(李如梅) 李如梅는, 요동총병으로 이여송의 아우.
가 먼저 퇴병설(退兵說)을 주장하자 양 경리(楊經理)가 힘써 말렸으나 대세를 얻지 못하여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뒤집히듯하여 수습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적은 험한 곳에 의거하여 아군을 맞아쳤는데 노참(盧參)장군이 후군이라 사망자가 거의 반이나 되었고, 군중(軍中)의 병자나 부상자는 한 사람도 탈출 할 수가 없었다 한다. 말이 이에 미치자, 목이 메어 우니 한없이 슬펐다.” ≪진흥군일기≫, 1597년 12월 26일 자.(원문략)


  이때의 전투는 평야에서 퇴각한 가등청정이 주둔해 있던 울산 도산성(島山城)을 명나라 경리 양호와 조선의 도원수 권율 등이 연합하여 공격한 전투로 명나라 군사만 4천여 명의 사상자가 난 전투였다. 동고는 단순히 패전의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천시(天時)·지리(地利)보다 인화(人和)가 전장에서는 최우선임을 경각시키려 함에 일기의 목적을 두었다 할 수 있다. 내 땅의 전투에서 남의 지휘권 아래 놓였던 사실이나 퇴각부터 먼저 생각하는 장수들이 승전하기란 불가능한 것임을 후대에까지 보이려 한 것이다. 이는, 동고의 원려(遠慮)로, 전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되풀이 하지 않기를 바라는 징전비후(懲前毖後)의 일기, 징비록(懲備錄)을 제작함에 동고의 일기 제작의 궁극적 목적이 있었다 하겠다.
   ∙ 1598년(戊戌) 10월 11일 - 정기룡(鄭起龍) 장계의 교훈 拙稿, <명장(名將) 정기룡(鄭起龍)의 偉業>, ≪尙州와 壬辰倭亂(2)≫ 충의공정기룡장군기념사업회, 2014. 참조.

 “11일 맑음. 우병사 정기룡(鄭起龍)의 장계가 올라왔다. 초3일(10월) 동 제독(菫一元提督)이 사천 동양(泗川東洋)을 공격해 나아갔다가 창졸간에 매복하였던 왜적 수십 병사에게 놀라 대군이 일시에 붕괴되었다.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덮었는데 죽은 자는 5천여 명이요, 동 제독은 간신히 탈출하여 하룻저녁에 도주하여 합천으로 돌아왔다 한다. 천조(天朝)가 장수를 선택할 줄 몰라 이같이 늙어 쇠약하고 용맹이 없는 장수를 파견하여 군사를 다 잃고 나라를 욕되게 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통곡으로도 이길 수 없다.” ≪진흥군일기≫, 1598년 10월 11일자.(원문략)


  이 일기는, 동 제독의 편장(褊將)이 되어 선봉에 섰던 우병사 정기룡이 겪은 전투의 참화다. 왜장 도진의홍(島津義弘)이 주둔한 사천 신성(新城)을 공략할 때 정 장군이 동 제독에게 적정을 살펴 진격하자 건의하였으나 왜적이 수세에 몰린 것을 얕보고 오만을 부리다가 참패하여 사상자만 1만에 가까운데도 정 장군의 군사는 적병 수급 50개를 베고 한 사람 사망자도 없이 끝난 전투였다. 한 장수의 선택이 국운을 좌우할 수 있음을 경계한 일기라 할 수 있다.
  위의 두 경우만 보더라도 ≪진흥군일기≫는 동고의 우국애민에의 원려(遠慮)에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차운시(次韻詩)와 삼탄범월시(三灘泛月詩)의 정서
   ∙ 서애(西厓) 존중의 심경을 담은 차운시(次韻詩)
  하루는, 송운(松雲·泗溟堂)의 제자인 학상(學祥)이, 대북의 탄핵을 받아 안동 하회에 낙향하여 있는 서애를 방문하여 시를 받고 1601년 8월 26일 동고를 찾아왔다. 학상의 시축에 서애의 시가 있음을 발견하고 차운한 시 ≪진흥군일기≫, 1601년 8월 26일자 참조
로써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시를 보기 전, 평소에 동고가 서애 류성룡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가를 먼저 보면, “공의 고결한 마음과 아량은 뛰어나게 명망이 높아, 우러르면 소나무의 곧고 바름과 깨끗한 구슬같아 공경할 수는 있어도 함부로 할 수는 없음과 같다. 성대한 문장과 깊고 넓은 학식은 한 시대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진흥군일기≫, 1607년 5월 29일.“公淸襟雅量 逈出人表 望之如松貞玉潔 可敬而不可慢 宏詞博學 爲一代宗匠”
라고 하였다. 동고는 서애보다 한 살 밑이었으나 서애를 존중함이, 한 시대의 종장(宗匠)으로 추대하고 있음을 본다. 이에, 당쟁으로 죄없이 쫓겨난 서애의 심중을 대변하듯한 차운시를 소개한다.
 
每憶窓前手種梅(매억창전수종매)  늘 창앞에 손수 심은 매화 추억하니
山陽舊業揔塵灰(산양구업양진회)  산양(山陽) 구업(舊業) 산양의 구업은, 갑자사화(1504)에 참화를 입은 남편의 시신을 운구하여 문경 산양면 존도리에 우거하여 자손들이 상주 사람이 되게 한, 동고 중조모가 산양에서 새 삶의 터전을 닦았던 옛 일.
은 모두 회진되었네.
雲師此日三秋隔(운사차일삼추격)  운사(雲師)와는 오늘로 삼년이나 소식 막혔는데
厓老何時一笑開(애노하시일소개)  애노(厓老)는 어느 때 함께 웃음 나눴던가.
西郭有僧來問病(서곽유승래문병)  서곽(西郭)의 중이 와서 문병하는데
東籬無酒可㘅盃(동리무주가함배)  동리(東籬)엔 마실 만한 술이 없다네.
秋風多少心中事(추풍다소심중사)  추풍에 이는 허다한 심중의 일은
臨別慇懃寄萬回(임별은근기만회)  이별에 다다라 은근히 만회(萬回) 萬回는, 당나라 고승. 효성이 지극하여 수자리 살러 간 형을 대신하여 아침에 부모를 가서 뵙고, 저녁에는 형의 편지를 받아 집으로 왔다가 다시 아침에는 부모를 뵈러가는 일을 만 번이나 반복하여 만회란 이름이 생김. 여기서는, 사명당의 소식을 서애에게 전하고, 서애의 소식을 사명당에게 전하는 사명당(송운·운사)의 제자 학상(學祥)을 가리킴.
에게 부치네.

  두련(1·2구)은, 서애가 송운(사명당)을 생각하며 그의 제자 학상(學祥)에게 준 시의 두련에서,“그리는 이에게 농두(隴頭)의 매화 소식을 전하렸더니, 궁벽한 촌락에 병으로 누웠으니 온갖 상념 사그라지네.” ≪진흥군일기≫, 1601년 8월 26일자. 서애의 시를 부록하였는데 그 두련에서,“思人欲寄隴頭梅 臥病窮村百念灰”라 하였다.
라고 한 데 차운하여, 동고는 산양(山陽) 옛집에 손수 심었던 매화를 추억하며 지금은 고향조차 지키지 못하는 몸임을 읊었다. 함련(3·4구)에서는 동고 역시 운사(雲師·송운)와 교유하였음을 읊고, 경련(5·6구)에서는 술 한 잔 제대로 할 수 없는 병중의 서애를 떠올리며 미련(7·8구)에서는 가을 바람에 무수히 이는 온갖 사념을 만회(萬回·學祥)를 통하여 송운(사명당)에게 부치는 서애의 괴로운 심회를 대신 노래하여 학상에게 주었다. 충신이 소인배의 모함을 입어 만년을 외롭게 지내는 서애를 향한 동고의 안타까운 심정은 미련(尾聯)의 첫 구(제7구)에 무한히 함축시켜 놓았다.

   ∙ 물아일체경(物我一體境)의 서정(敍情) 삼탄범월시(三灘泛月詩)
  상주(尙州) 낙강(洛江) 삼탄(三灘)에 달띄우고 뱃놀이 하며 지은 동고(東皐)의 <삼탄범월시>는 ≪상산지≫ <문한>에 등재되어 널리 애송된 명시다.

三灘烟浪夕陽天(삼탄연랑석양천)  삼탄 연하같은 물결엔 석양빛 내리는데
共向梅湖泛酒船(공향매호범주선)  우리는 술배를 매호로 띄우네.
兩岸丹楓和客醉(양안단풍화객취)  강 언덕 단풍은 손과 더불어 취했는데
滿江秋月下牛淵(만강추월하우연)  낙강 가득 가을달빛 우연으로 내리네.

  물아일체경(物我一體境) 유여한 시정(詩情)은 전구(제3구)에 응축되었다. 독자의 가슴까지 훤히 열어주는 강상시(江上詩)의 멋을 한껏 담은 가작이라 하겠다.
  이상의 두 시로써도 동고시(東皐詩)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욱, 많은 동고유작을 기다리는 간절함도 이 때문이다.

<행적2. 시암(是菴)의 삶>
  시암(是菴)의 맏형인 좌승지 난곡(蘭谷) 강서(姜緖)는 신이한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어 멀리 사람의 운명을 내어다본 분으로 알려졌다. 난곡은 아우들이 다 현명함을 칭찬하였는데 특히 아우 인(絪)에 대해서는, 침착하고 조용(沈靜)하며 도량과 식견(器識)이 뛰어나 늦게는 응당 현귀(顯貴)하리라 예언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이로써 보면, 시암은 천부적으로 비범한 재능을 타고났음을 알 수 있다.

  ○ 공사(公私)에 엄정했던 목민관(牧民官)
  1609년 7월에는 가선대부(종2품)로 상주목사가 되었다. 상주(산양면 존도리)는 조부 형제들이 살았던 고향으로 시암에게는 병주고향(幷州故鄕) 幷州故鄕이란, 제2의 고향을 일컬음임. 당나라 시인 賈島가 병주에 오래 살다 떠난 후 시로써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읊었다 함. 여기서는, 시암대에는 벼슬로 서울에 살았기 때문.
이어서 친척(親戚)들이 많았는데 목민관으로서는 사정(私情)을 둘 수 없었다. 공무에는 각박하고 엄하게 다스리며 묵은 폐단을 과감히 제거하니, 평민은 근심하고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친척도 하소연할 곳을 잃었으나 원성이 없었다. 부임한 2년만에 선정관으로 가의대부(정2품)에 특사(特賜)되고 임기 만료(1612)로 이임하였는데 ≪상산지≫에서도 선정관(善政官)으로 기록되었다.(영남 인물고)

  ○ 역경에서도 서슴지 않은 직언(直言)
  상주목사(재임 1609~1612)를 역임한 뒤로는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 등이 정권을 탐하여 인목대비의 폐모를 획책(1613.5.22, 폐모론대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1614.2.10)하였으며 끝내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으로 유폐(1618.1.28) 시키는 등, 폐륜을 자행할 때 시암은 벼슬을 버리었다. 금산(衿山) 선영 아래 은거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벗삼아 스스로 즐기되 천륜을 저버리는 정청(庭請) 庭請이란, 국사의 중대사에 세자 또는 의정(3정승)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에 이르러 啓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기다리던 일.
에 참가하지 않았다. 은거하던 시기에 광해군이 향리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특별히 의견을 들이도록 함에 공이 시비를 가려 의견을 드리되, 인륜이 변고에 처했다는 생각으로 지극한 강상(綱常)을 되돌림에 힘쓸 일을 털끝만큼도 숨김없이 다 말하니 당시의 여론이 떠들썩 하였고, 대북파의 미움을 한 몸에 샀다. 이 또한 절의 숭상의 가풍을 실천으로 옮긴 일이며 선비의 의리를 보인 참 모습이었다 할 만하다.(영남 인물고)

  ○ 유폐된 인목대비를 공경한 의리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1618.1.28 이후)되자 벼슬을 받은 이로는 감히 숙배(肅拜)하지 못하였으나 시암(是菴)은 홀로 대비의 탄신일이나 명절에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문안하였다. 대비가 이를 기쁘게 여겨 반정(1623. 인조반정) 뒤에는 자주 왕(인조)에게 시암의 일을 이야기 하였다.(영남 인물고)
  이 역시, 일신의 안위보다는 의리를 우선시 한 시암의 선비정신의 발로였다 할 수 있다.

  ○ 패전국의 국체(國體) 보존에 진력  정묘호란(1627)에 오랑캐군이 차츰 핍박해 옴에 왕이 강화도로 출행할 때 시암이 호종하였다가 이에 후금(後金·淸)과의 화의에 통화사(通和使·回答使)가 되었다. 적의 대군이 주둔한 평산(平山·황해도)에 이르니, 정예한 기병이 종횡으로 날뛰고 칼과 창이 삼엄하게 늘어섰는데도 시암은 조용히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때에 시암의 나이는 여든에 가까웠는데 허옇게 센 수염과 붉은 뺨에 뛰어난 풍채가 남을 감동시켜 오랑캐들도 존경심을 표하였다.
  화의(和議)를 논의함에 미치어 오랑캐가 명나라 천계연호(天啓年號)를 버리고 후금(後金·淸)의 정삭(正朔·曆法)을 사용토록 종용하였으나 시암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신(臣)의 예로 천조(天朝·明)를 섬긴 지 3백년이요 또한, 거듭 새롭게 생명을 준 재조(再造)의 은혜(필자주·임란 원병)가 있는데, 어찌 자식으로 어버이를 배신할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서로가 자기 주장을 반복하였으나 힘써 거절하여 공이 주장을 꺾지 않으니 오랑캐들도 공손히 따르며 일컫기를, ‘조선(朝鮮)의 노대관(老大官)’이라 하였으니, 이는 저들이 마음으로 지극히 공경하여 일컬은 말이었다.(영남 인물고)
  비록 오랑캐로 얕보던 후금(後金·淸)에게 형제국의 맹약을 맺은 치욕을 당하였지만 국제적 의리를 지키는 조선이란 국가적 체통과 체면까지 저버리지 않게 하였고, 명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신흥 청국과의 마찰이 없도록 화의함에 시암(是菴)의 공로도 지대하였음을 특기할 수 있겠다. 패전국의 신하로서 국체(國體) 보존에 과감할 수 있었던 것은, 주욕신사(主辱臣死)에의 결연한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적에게 조선에도 선비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 시암(是菴)이었다.

  ○ 아직도 숨은, 큰 소리로 읊었던 시가(詩歌)
  시암(是菴)의 아우 군수 담(紞·1559~1637)은 우애가 극진하여 만년에는 형의 집 가까이 작은 다락(小樓)을 얽고, 형 시암을 비록하여 좌찬성 이호민(李好閔)·연평부원군 이귀(李貴)·형조판서 서성(徐渻)·개성유수 홍이상(洪履祥) 등과 기로계(耆老稧)를 조직하여 춘추로 명승지에서 화합을 가질 때면 군수공이,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마시며 시가(詩歌)를 읊조렸다.” 李景奭, ≪白軒集≫(권50), <墓表·僉知中樞府事姜公紞墓表>.“引滿歌呼”
라고 하였다. 이분들은 당대 현달한 문신들이었을 뿐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였던 분들이라, 시암(是菴) 역시 큰 소리로 시가(詩歌)를 읊었을 것이나, 아직도 유고가 발견되지 않아 기다림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동고(東皐) 강신(姜紳·1543~1615)과 시암(是菴) 강인(姜絪· 1555~1634) 형제는, 고조 강형선생(姜詗先生) 이래로 형성된 절의숭상(節義崇尙)의 가풍(家風)과 유업(儒業)에 철저한 가학(家學)으로 학문(學文)을 익힌 선비들이었다. 국난(國難)에 신명을 바칠 각오로 헌신한 공으로 형제가 나란히 공신록(功臣錄)에 오르고, 진흥군(晋興君)·진창군(晋昌君)의 봉호(封號)를 받은 공신으로 남았다. 요약하면, 동고·시암 형제는 일생을 초지일관 의연히 의로(義路)를 밟아 선비로서, 신하로서 그 이름을 온전히 하여 상주가 낳은 형제 명유신(名儒臣)으로 남게 되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