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영남의 학자 무주(無住) 홍호(洪鎬) 선생

빛마당 2019. 4. 2. 20:47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영남의 학자 무주(無住) 홍호(洪鎬) 선생

김 철 수

 

 선생의 본관은 부림(缶林)이고, 자는 숙경(叔京), 호는 무주(無住) ․ 동락(東洛)이다. 증조부는 홍언국(洪彦國)이고, 조부는 홍경삼(洪景參)이며, 아버지는 홍덕록(洪德祿)이다. 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의 4대손으로, 효종 때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낸 홍여하(洪汝河)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목사 유승선(柳承善)의 딸이다.
  1586년(선조 19) 5월 8일 함창(咸昌) 율곡(栗谷, 밤실)에서 태어났고, 1646년(인조 24)에 6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부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나이 20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공부에 전념하는 선생을 한 번 보고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도 국사(國士) 나라의 뛰어난 선비
로 대우하였으니, ‘남쪽 고을의 선비들 중에는 무주(無住)와 겨룰 자가 없었다.’「右承旨洪公墓碣銘 幷序」
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4대문장가(四大文章家)의 한 사람인 택당(澤堂) 이식(李植)과「동사록(東槎錄)」을 저술한 용주(龍洲) 조경(趙絅) 그리고 ‘유주방산록(遊周房山錄)’을 쓴 하음(河陰) 신즙(申楫) 등과 깊게 교유하였다.

  선생은 선조(宣祖) 말년인 1606년(선조 39)에 21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별다른 관직을 갖지 못하였고, 안동으로 집을 옮겼다가 1617년 태백산 아래에 수월암(水月庵)을 짓고 소요하며 지냈다. 선생이 안동으로 이거한 배경에는 친정집이 안동에 있었던 처 장흥 고씨와 연관이 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의 아들을 승문원에 등용하자는 시론이 있었으나,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1612년(광해군 4)에 권지(權知)에 오르고 이듬해에 전적을 거쳐 박사에 이르렀다. 그 뒤 외직으로 안동부 제독을 자청하였다. 그리고 1623년(인조 즉위년)에는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고 정경세(鄭經世)가 호소사(號召使)가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난의 진압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西宮) 유폐와 폐모(廢母)에 반대하였다가 인조반정 후 아들과 함께 자살한 박승종(朴承宗)의 적몰사(籍沒事)에 공정한 견해의 소를 올린 일로 훈신들의 미움을 사서 영변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1628년 사예(司藝, 정4품)·예조참의(禮曹參議, 정3품)·우부승지(右副承旨, 정3품)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정3품)이 되었다.
  1624년에는 국방과 민생 문제에 관심이 많아 서북민(西北民)의 부역(賦役)을 덜어 주고, 통영(統營)에 성책(城柵)을 쌓았다. 또 포수(砲手)를 양성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용병술로 포수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호패법(號牌法) 조선 시대에,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호패를 가지고 다니게 하던 제도.
 시행 등을 주장하였다.
  채헌징(蔡獻徵, 1648~1726)은 이러한 선생을 두고,

 “홍여하(洪汝河)의 아버지 홍호(洪鎬)와는 평생지기였고, 평소 산림을 좋아하여 광해군 난정(亂政)과 정묘(丁卯)⋅병자호란(丙子胡亂) 시에 고충(孤忠) 혼자서 외로이 바치는 충성
과 정절(貞節) 곧은 절개
을 드러냈으며, 깊은 학문과 독실한 행위로 영남의 뛰어난 학자였다”

고 평하였다. 이종섭,「시문(詩文)과 함께한 청절지사(淸節之士)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선생은 4대조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선생의 가통(家統)을 이은 주손(冑孫)으로 5세손 홍여하(洪汝河)와 더불어 허백당 가문(家門)이 반석에 오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 대(代)에 한 인물이 나기도 쉽지 않은데 몇 대에 걸쳐서, 그것도 주손에서 계속 인물이 난다는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선생은 평소에 술을 좋아하였고, 성격이 본래 청렴 소탈하여 영예와 치욕, 이해(利害)를 따지지 않았으며, 인품이 깨끗하고, 강직한 자로 평을 받았다. 또한 문신이면서도 용병에 관한 지식이 많아서, 이를 국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인조 24년(1646) 3월 1일에 용궁현(龍宮縣)에서 돌아가셨다.
  저서로는 시문집인《무주일고(無住逸稿)》가 있으나 서문과 발문이 없어서 간행연도는 알 수 없으나, 효종·현종연간(1650~
1674)에 홍호의 아들 홍여하(洪汝河)가 편집 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선생의 묘갈명(墓碣銘)은 용주(龍洲) 조경(趙絧)이 지었고, 행장은 홍여하(洪汝河)가 찬(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