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근사록(近思錄)을 하사받은 하음(河陰) 신즙(申楫)

빛마당 2019. 4. 2. 20:45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근사록(近思錄)을 하사받은 하음(河陰) 신즙(申楫)

김 정 찬

 

  신즙(申楫, 1580∼1639)은 자가 여섭(汝涉)이고 호는 하음(河陰)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고려말에 불훤재(不諠齋) 신현(1298∼1377)이라는 분이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고 영해에 봉해져서 자손들이 그것 때문에 그대로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 공민왕 때에 공훈이 많아 이름을 득청(得淸)이라고 내렸는데, 이 분이 판 예빈시 태복정(判禮賓寺太僕正)을 지냈다. 광해군 때에 신지(申祉)라는 분은 생원인데 효행으로 천거되어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고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분이 공에게는 6대조가 된다. 고조는 신권(申眷)이라는 분인데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증조부는 신종위(申從渭)라는 분인데 축산군사(丑山郡事)를 지냈다. 지극한 효행으로 조정에서 효행안(孝行案)에 기재하였다. 조부는 신연(申演)이라는 분인데 습독관(習讀官)이며 증직(贈職)으로 한성우윤(漢城右尹, 종2품)을 받았다. 이 분의 묘갈명은 우리 선조이신 문장공(文莊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께서 쓰셨다. 부는 신경남(申慶男)인데 주부(主簿, 정6품)를 지냈으며 증직으로 좌승지를 받았다. 모친은 안동 권씨인 참봉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만력 경진년(1580, 선조 13) 5월 15일에 공(公)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 읽기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학(小學)과 춘추(春秋)도 읽었다. 9세에 독사시(讀史詩)를 지어 치란득실(治亂得失)을 두루 설명하였는데 남아 있지는 않다. 13세에 임진왜란을 맞았다. 우윤공(右尹公)께서 공의 손을 잡고 산꼭대기에 올라서,

 “만약 적이 너를 협박하여 항복시키려 한다며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하자,

 “차라리 적군에게 대항하다가 죽으면 죽었지 구차하게 의롭지 않게 사는 것을 도모하지 않겠습니다.”

라 하였다.
  일찍이 둘째 동생인 신타(申柁)와 이종형인 석문공(石門公) 정영방(鄭榮邦)과 함께 같이 공부를 하다가 어느 날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비가 되어 혼자 공부하면 고루하여 진보하기 어렵다.”

라 하고, 책 상자를 짊어지고 우리 선조의 문하에 유학을 하여 여러 달 동안 학문을 연구하며 부지런히 하여 그치지 않았다. 이때부터 일에 따라 의심스러운 일을 질문을 하니 조예가 날로 새로워졌다.
  갑진년인 160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술년에 저작랑(著作郞)을 제수 받았다. 공(公)께서는 일찍이 어떤 권세가의 아들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을 침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배척한 적이 있었는데 이 일로 미움을 받아 벼슬이 파면되었다. 남들이 혹 분개하면 공께서 웃으면서,

 “장씨 장씨는 장만(張晩, 1566∼1629)을 말함.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 호는 낙서(洛西). 1627년의 정묘호란 때 병조판서로 도원수가 되었지만 적을 막지 못해 관작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되었으나, 앞서 세운 공로로 복관되었다. 저서로는〈낙서집〉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통진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의 아들 같은 놈이 어찌 나를 쫓아낼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
  신해년(1611, 광해군 3)이 우리 선조께서 무고를 당하였을 때 공이 분개하여 일어나서 수 천 마디의 상소문을 초안하여 임금께 올리고자 하였지만 우리 선조께서 힘을 다해 제지하였다. 임자년인 1612년에 전적(典籍)을 제수 받았다. 폐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물러나 함창의 율리에 은거하였다. 한 때는 제현들과 도의의 사귐을 맺고 몸을 마칠 것 같이 하였다.

  1620년에 인조반정으로 구례현감을 제수 받아서 근무할 때, 호남에서 으뜸이었으니 물러갈 때 고을 사람들이 동비(銅碑)를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담았다. 1626년(인조 3)에 형조좌랑을 제수 받았고 곧 강원도사의 벼슬이 내렸다. 1627년 봄에 청나라 군사가 변방을 침범하자 공께서는 분주하게 관향사(管餉使) 관향사(管餉使) : 조선시대 군의 식량을 관리하던 관원으로, 1623년(인조 1) 군사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로서 적군과 대치하는 경계를 뚫고 넘어가 서흥의 굶주린 군사를 구원하니 부원수가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왔다.”

라 하고, 고맙다고 하였다. 1628년에 공조정랑이 제수되었고 겨울에는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게 되었고 영사원종녹권(寧社原從功臣錄券) 영사원종녹권(寧社原從功臣錄券) : 조선 후기 영사원종공신으로서의 신분과 권리를 증명한 문서로, 1628년(인조 6) 인조반정으로 도태된 북인의 잔존 세력이 꾸몄다고 설명되는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의 녹훈이다.
 일등 공신이 되었다.
  1630년(인조 8)에 무안현감으로 나갔다. 고을에는 많은 폐단이 있어서 공이 조목을 들어 감사에게 보고하였더니 감사가 듣고 나서 모두 시정하였고, ‘오랜 시간 속에 여러 고을에 모범을 보인 것’이라는 임금의 전지(傳旨)가 내려졌다.
  1636년(인조 14)에 청나라가 도성을 침범하였다. 임금님의 어가가 피난길에 올랐을 때 공이 고향에 있었는데 의병을 규합하여 적에게 대항하려 하였으나 곧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면서 실천하지 못하였다. 1637년에 한성서윤을 제수 받고 곧 형조정랑 벼슬에 임명 되었다. 1638년에는 성균사예(成均司藝)가 제수 되더니 곧 공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9년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임금께서 전쟁 후의 충성된 근무를 살펴 특별히 옷감의 겉감과 속감, 마구의 말과 근사록을 하사(下賜)하셨으니 특별한 대우였다. 8월에 밀양부사가 되었으나 부임을 못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성묘하고 병이 생겨 9월 24일 향년 60세로 돌아가셨다.
  임종 때에,

 “국가에는 조그마한 은혜도 갚지 못하였고 부모님을 끝까지 봉양을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고, 하였다.
  12월에 용궁(龍宮)의 몽미(夢美) 유좌(酉坐)에 장례를 치루었다.

  부인은 부림 홍씨(缶林洪氏)인데 사정(司正)을 지낸 홍덕록(洪德祿)의 따님이자, 문광공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현손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여 조카 홍광하(洪光夏)를 양자로 삼았다.
  또 부인으로 상산 김씨(商山金氏)가 있는데 생원을 지낸 김계(金繼)라는 분의 따님인데 김광욱과 김광성을 낳았다. 김광하의 맏아들은 김방식이고 그 다음은 김방열이다. 김광욱의 아들은 김방윤과 김방준이다. 김광서의 아들은 김방익과 김방중이다. 사위와 증손과 현손 이하는 생략한다.

  공께서는 영특한 자질로서 일찍이 스승과 벗을 따라 여러 선배들의 권면과 가르침을 받았는데 특히 우리 선조를 스승으로 섬긴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고을의 몇 사람과 함께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을 추종하여 종일 시를 짓고 즐겼는데, 사람들은 오선동(五仙洞)이라 불렀다.
  혼탁한 조정을 만나서는 스스로의 재능을 숨기고 나타내지 않으며 시골에서 절개를 지켰으며 군량미를 해결하자 하늘이 도왔다는 사례라든지, 현감 재직 시 모범을 보인 포상의 경우 모두 학문 중에서 흘러나온 것이니 하늘이 더 오래 살게 하였다면 더 드러나게 쓰여 널리 퍼질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 않았다면 말을 하고 모범을 드리운 것이 후인들에게 은혜를 끼친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벼슬살이에 얽매여 60세에서 생을 마쳤으며 그 남긴 글은 전쟁으로 흩어져 거의 불에 타고 없게 되었으니 안타깝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제문(祭文)을 지었다. 
  어느 날 공의 사손(祀孫) 신주락(申주락)이 묘도에 표하고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가 지은 행장(行狀)과 한치응(韓致應)이 지은 묘갈문을 가지고 와서,

 “이것은 우리 조상의 실적을 징험하기에 충분하지만 지금은 석면이 협소하니 원컨대 줄여서 적당하게 써 주십시오.”

라 하여, 아주 사양하여도 그 뜻을 거두지 않아 줄이고 보태고 더하고 깎아서 이와 같이 쓴다.

빼어난 재주 지니고 태어나
독실한 학문은 스승을 따른 덕택이라네
출세와 은둔을 선택함이
모두가 의리에 맞았구나.
중흥의 시절을 만나
어찌 크게 베풀지 않았으랴.
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
임금 은혜 갚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네.
수명 또한 길지 않아
지사(志士)를 탄식하게 한다네
몽미의 동산에는 무덤이 있는데
이제야 비석 세웠다네.
숨은 빛을
영원히 드러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