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향약당(鄕約堂)을 세워 풍속을 아름답게 한

빛마당 2019. 4. 3. 21:21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향약당(鄕約堂)을 세워 풍속을 아름답게 한 외서암(畏棲菴)

김추임(金秋任)


김 재 수
 
“아이쿠머니나! 이를 어찌해.”    
몸종이 놀라서 큰 소리로 외쳤다.
 “도련님, 죄송해요. 오늘 새롭게 입은 새 옷인데 제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어린 몸종은 이제 겨우 6세가 된 주인댁 도련님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몸종은 이집 도련님이 모처럼 새 옷을 받아 입었는데 그만 잘못하여서 새 옷에 물을 엎지르고 만 것이었다.
  어린 아이라면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에게 달려갔을 터인데 어린 소년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말려 입으면 되지 뭐.”
  그럴수록 어린 몸종은 더 기가 죽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를 안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님은 아들의 버젓한 행동과 너그러운 마음에 오히려 잔잔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이 어린 소년이 훗날 상주 중동 죽곡(竹谷)리에 향약당을 세운 상주 선비 김추임(金秋任) 공이다.
 
김추임(金秋任 : 1592~1654).
본관은 의성(義城), 율(瑮)의 아들이며, 자는 만열(萬說), 호는 외서암(畏棲庵)이다.
1616년(광해 8)에 생원이 되었으며, 천거(薦擧)로 참봉이 되었고 문행이 있었다.『상주시사』 (제5권)「인물」, 상주시, p.252; 김자상 역,『상산지』, 1984. p.162.


  증조부는 휘가 우굉(宇宏)으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는데, 역시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호가 개암(開巖)이다. 할아버지는 휘가 득가(得可)로 창녕현감(昌寧縣監)을 지냈고, 아버지는 휘가 율(瑮)인데, 사마시에 합격하여 수행(壽行)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어머니는 봉화(奉化) 금씨(琴氏)로 고려 때 태학사(太學士)를 지낸 영렬공(英烈公) 의(儀)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이(怡)의 따님이다.
  공은 좋은 자질 빼어난 풍모를 지니고 태어났으니, 곧 공이 일찍 새 옷을 받았는데 어린 여종이 잘못하여 그곳에 엎질러 옷이 다 젖었으나 공이 그 물을 털고 그 옷을 입고는 얼굴빛이 전혀 변함이 없자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큰 그릇이 될 사람이라 하였다.
  8살 때 암산을 할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시험하고자 물건의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을 뒤섞어 놓고 그 합한 수가 몇이냐고 하자 곧 바로 그 숫자가 틀리지 않게 대답하였다. 11살 때 외가 천척들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공의 외할아버지를 찾아뵙고 묵었다. 공을 보고 곁에서 잠자리를 모시라 하니, 밤늦게 잠자리에 들고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대단히 가지런하게 펴고 거두자 다음 날 공의 어머니를 보고 하례하기를, “이 아이는 대단히 남다르니 이 다음에 반드시 비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 하고는 여종 한 사람을 주고 떠났다.
  성장하여서는 문장(文章)과 경술(經術)을 사랑하여 병진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때 어지러운 조정이 더욱 어지러워 과거 합격자를 뽑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였다. 공이 다시는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오직 ?주서절요?만을 즐겨 읽었다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을 찾아가서 질문을 하곤 하였다. 경오년(庚午年)에 우복 선생이 이조판서(銓曹)가 되자 공을 희릉참봉(禧陵參奉)으로 천거하였다.
  갑술년 봄에 일로 그 자리를 그만두고 돌아와서 이때부터 세상일에는 뜻을 두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자신의 뜻을 즐겼다. 아버지의 명으로 상주(尙州) 동문 밖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상주는 선조들의 3대의 고향이었다.
  뒤에 세상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싫어 낙동강 우연(雩淵) 동쪽 언덕으로 옮겨 집을 지었는데, 바로 부제학(副提學) 공의 별장이 있었던 터인 개암(開巖)이라는 곳이었다. 부모님이 계시는 곳과는 200리 떨어졌는데 철 따라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몸소 그것을 부모님께 갖다 바치거나 또는 가는 사람 편에 부쳐 그 음식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초가집은 비바람만 겨우 막았으며 나물밥을 먹고 지며, 줄곧 편안하려 하지 않았다. 두보의 시에서 따와 지내는 집 이름을 ‘외서(畏棲)’라 하고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멀리 외출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반드시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있었다. 10여 년 동안 병을 앓았지만, 하루라도 해이(解弛)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남들은 공이 병을 앓고 있는 줄을 몰랐다. 어엿하게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 하였으며, 온화하게 남들을 대하였다. 평소 말이 적었으며, 옳지 않은 소리를 들으면 그에 장단을 맞추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내가 말이 지나쳐 근심을 사는 일이 없는 사람은 이 아이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겉으로는 따뜻하고도 부드러웠으며, 속마음은 강하고도 발랐다. 구차하게 남들과 달리 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구차하게 세상에 영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에 있어서는 오직 옳고 그른 것만을 따졌지, 남들이 권하거나 막는 데에 얽매이지 않았다. 비록 친구들에게 있어서도 아첨하여 사람을 대하지 않았고, 또 이 때문에 더 좋은 대접을 하지도 않았다. 남녀의 분별을 엄격히 하여 사위나 누이, 형수나 시동생 사이라도 손님을 대하듯이 대하여 정성을 다할 따름이었다. 한 여름에라도 살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아무리 급하여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평소에 해와 달을 향하여 소변을 보지 않았고, 마음은 정도(正道)에 안주하여 기울어진 물건을 기르지 않았다. 서책과 붓, 벼루를 가지런히 놓아두었고 유학서(儒學書)가 아니면 보지도 않았다. 선현들의 언행이 몸과 마음에 절실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앉은 자리 좌우에 써놓았다.
  만연에 설씨(薛氏)의 「독서록(讀書錄)」을 좋아하여 그것을 분류하고 초록하여 스스로 경계하였다. 자식을 가르침에 있어 문장이 빛남을 뒤로 하고 의리의 바름을 먼저 하였다. 집 안에 있을 때의 도는, ‘남녀의 분별이 없을 수가 없으니 수숙(嫂叔) 간이라 할지라도 더욱 근엄(謹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를 섬기는 도는, ‘사랑하면서 존경하지 않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웃어른을 섬기는 도는, ‘제자의 직분은 어른을 공경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말속(末俗)에 오로지 어버이의 뜻을 다하지 않으니 참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벗을 사귀는 도는, ‘충신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이 몇 가지를 잘 할 수 있으면 이것을 통달하여 임금을 섬길 수 있으니 뭇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미루어 나아가게 하였다.
  어느 해에 어머니 상을 당하고, 신묘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싸릿대처럼 야위어 상례를 다 치르지 못할 것 같아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침저녁 잔을 올리는 제사를 몸소 지냈으며, 제사 지낼 때 제기(祭器)와 제수(祭需), 의식(儀式)을 기록하여 영원한 항규(恒規)로 삼게 하였다.
  삼년 상(喪)을 마친 뒤 병이 이미 깊어졌지만 아침 저녁으로 가묘(家廟)에 참배하는 일은 눈보라가 몰아쳐도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다. 등창이 심하다가 조금 나으니 가슴과 복부의 통증이 다시 생겨서 원기(元氣)가 크게 쇠하여 서서히 생명이 다하려하였지만, 정신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었다.
  “연전(年前)에 ?우복 문집(愚伏文集)?을 빌려 보고 싶었는데, 병 때문에 빌려보지 못하였다. 네가 지금 빌려와서 내 옆에서 그것을 읽어 내가 듣도록 하거라.” 하여 그 말대로 하니 이틀 동안 누워서 그 문집의 내용을 듣기를 싫어하지 않고, 이치를 논하는 곳에 이르면 다시 읽게 하고 그것을 베껴 써 책자를 만들어 뒷날 고증(考證)할 수 있도록 할 만큼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군수(郡守) 하산(夏山) 조정융(曹挺融)이 지은 외서암 행장(번역 김종호, 2018. 3. 28.)
 
 
  위 행장의 기록처럼 공은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학업을 이루었고, 어려서부터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컸다. 1616년(광해군8)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난폭한 정치가 싫어 관리로 나아가지 않았다. 매사에 법도가 있어 외서암의 일거일동이 곧 다른 이에게 살아있는 교육이 되었다.『상주시사』(제3권), 문화예술. p.449;『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p. 384.
 
  특히, 향당(鄕黨) 자기가 태어났거나 살고 있는 시골의 마을
에서는 학문과 교육을 병행하였고 1618년에는 류성룡의 셋째 아들 류진(柳袗)이 상주 가사리로 이주해 온 김추임(金秋任)과 협력하여 중동(中東)에서 향약을 실시했다.『상주교육사』, 경상북도상주교육청, 2003, p.138.

  이 향약당은 어은(漁隱) 류천지(柳千之, 1616~1689)의 중수를 거쳐 1798년에 이르러서는 만우재(晩寓齋) 금영택(琴英澤)을 비롯한 김동초(金東礎)·강백흠(姜伯欽) 등이 10년의 준비 끝에 강당을 중수하고 고사(庫舍)를 신축하였다. 이때 만우재가 주도하여 향약의 의문(儀文) 및 범례(範例)를 다시 작성하고, 향약의 의식 절차 및 범례를 적은 책『만우재집』(권3)「발·서 향약의절 후(跋·書鄕約儀節後)」)의 발문을 썼는데 여기에 중동 죽곡리의 향약당 연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상주의 인물』제5권. 상주문화원.「실천궁행의 사표 금영택(琴英澤)」. 권태을. 2016. p. 302

  중동의 죽곡 마을은 수동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가무골 북서쪽에 있다. 중동중학교가 마을의 동쪽 끝에 있다. 마을 뒤에 대나무가 많아 죽곡으로 불렸다고 한다.
  후에 정지상(鄭止相)이라는 사람이 마을에 서당이 있다 하여 당촌이라고 이름했다.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가 이주하여 세거하고 있다. 약 370여 년 전 류진(柳袗)과 김추임(金秋任)이 주창하여 죽곡에 향약당(鄕約堂)을 세우고,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고 하여 당촌(堂村)이라고도 불린다고도 한다.
  공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었다. 특히 우복의 학문과 예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늘 궁금한 일이 있거나 의문이 생기면 질문을 하니 우복은 그의 질문을 관심을 가지고 중하게 여겨 답하곤 하였다.
  다음은 김추임의 질문에 답한 우복의 글을 통해 우복이 그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가 하는 것을 가름늠할 수 있다.

  김만열(金萬悅) 추임(秋任)에게 답한 편지 정사년(1617, 광해군 9)

 “보내온 편지를 받아 보고 근래 날씨가 음습한 가운데 고요하게 지내면서 학리(學履)가 점차 나아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쁘고 위로되는 마음이 적지 않네. 나는 돌아온 뒤로 그럭저럭 지내고 있으니, 무슨 좋은 정취가 있겠는가. 단지 중도에 낭패스러웠던 때와 비교해 보면 조금은 편안하고 한가로울 뿐이네. 편지 속에서 논한 바는 지나친 점이 많이 있어서, 한갓 노부로 하여금 위축되고 부끄러워 감당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현자(賢者)의 분수에 있어서도 말을 신중하게 하는 도가 아니네. 그러니 잘 삼간다면 좋겠네.
  마복파(馬伏波)가 이른 바 ‘정법(政法)의 시비(是非)’라는 것 조정의 시비득실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을 말함.
과 범익겸(范益謙)이 이른 바 ‘조정(朝廷)의 이해(利害)’ 조정의 이해와 변방의 보고와 관원의 임명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라는 것은 모두가 학자의 일이 아니네. 그러니 문을 닫아 걸고 장막을 치고서 머리를 숙여 글을 읽어 더욱더 자기의 사업에 힘쓰기를 바라네.
  그리하여 뒷날에 조정에 나아가 벼슬살이를 하게 된 다음에 이러한 따위의 일에 대해서 강구함을 일삼아도 늦지 않을 것이네. 이것은 곧 서로 간에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니, 범범히 보지 않으면 다행이겠네. 서늘한 기운이 돌면 한번 찾아오겠다는 말에 몹시 위로가 되네.
  보내온 여러 편의 작품들에서 학문에 뜻을 둠이 부지런하다는 것을 족히 볼 수 있었네.「와중서영(窩中序詠)」등의 시편은 또 필세(筆勢)가 훨훨 나는 바, 참으로 기쁘네. 다만 기(氣)에 청탁(淸濁)이 있다는 것은 한갓 선현들이 말한 정론이 있을 뿐만 아니라, 천지사이에 가득한 것을 눈을 들어 보면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으로, 애당초에 정미로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네. 이에 대해서조차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의심스럽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네. 다시금 잘 생각해 보면 마땅히 스스로 알게 될 것이므로 거기에 대해서는 논변하지 않겠네. 혹시라도 생각해 보았으나 투철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우선은 선현들이 이기(理氣)에 대해서 논한 것을 가져다가 반복해서 연구하여 선현들이 말한 뜻을 환하게 알기를 구하고, 절대로 자신의 뜻만을 가지고 갑작스럽게 주장하여 가벼이 논설하지는 말게. 이것은 초학자(初學者)들의 대단히 큰 병통이므로 간절하게 고하여 경계시키는 것일세.
  서책을 보다가 의심스러운 곳이 있을 경우에는 깊이 사색해 보는 것이 좋으나, 사색해 보아도 통하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통하기를 구하지 말고 일단 한쪽으로 밀쳐놓았다가 의사(意思)가 텅 비고 한가로울 때를 기다려서 다시금 반복해서 깊이 생각해 보게. 그럴 경우 반드시 환하게 통해지는 때가 있을 것이네. 황급한 마음과 천박한 견해를 가지고 급하게 추구해서는 안 되네.
  사호(四皓)의 일에 대해서는 선배들도 장자방(張子房)이 꾸며 낸 것이라고 의심한 분이 있네. 그러나 가벼이 단정을 내려서는 안 되며, 또한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네. 대저 오늘날의 후생(後生)들은 모두들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데에만 뜻을 두어 하루나 한나절의 힘조차도 이러한 곳에 기꺼이 쓰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몹시 탄식하고 애석한데, 공은 능히 이 일에 뜻을 두었네.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을 알아보기가 절대로 쉽지 않으니, 나이가 한창이고 힘이 강할 때에 다시금 견고하게 힘을 쓰고 정밀하게 마음을 쓰기 바라네. 그리하여 그 뜻을 이룬다면 아주 좋겠네.”

  김만열에게 답한 편지 기미년(1619, 광해군 11)

 “지난번에 일찍이 인편을 통하여 편지를 받아 보고 해는 길고 방 안은 고요한 가운데 학리(學履)가 점점 좋아진다는 것을 알았는바, 마음이 기쁘고 위로가 되네. 나는 늙어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바, 이 일에 대해서는 비록 일찍이 그 울타리조차 엿보지 못하였으나, 역시 선생(先生)이나 장자(長者)들에게서 대충은 들은 바가 있네. 생각건대 ‘무실(務實)’ 두 글자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첫째가는 의리로서, 조금이라도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미 말할 만한 것이 없네. 그러니 이것으로 마음을 먹고 묵묵히 공부를 해 나가게. 그리하여 마음속이 아주 꽉 차는 데 이르러 사람들이 저절로 알아준다면 이 역시 군자가 피할 일이 아니네. 서재의 이름을 짓고 기문(記文)을 짓는 따위의 일은 바로 주부자께서 이른 바 “구구하게 단장을 한다.”라는 것이네. 그러니 어찌 초학자가 급하게 여겨 다른 사람에게 지어 주기를 부탁할 일이겠는가. 이것은 아마도 바깥 외물로 향하는 마음이 있음을 면치 못한 것인 듯하네. 그러므로 애오라지 규계하는 말을 해 주는 것이네.” http://barami.kr/board/ 바래미. 학천 장달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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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스승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의 이치를 강구한 외서암은 스승 우복이 돌아가시자 제문을 지어 올림으로 그의 심정에 담긴 스승에 대한 애절한 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다음은 외서암의 제문(祭文)이다.

 “아아, 제 맘 슬프고도 애통스럽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 이미 한 해가 지났는데, 못난 소생의 애통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만 갑니다. 대개 지난해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우리 유도(儒道)는 전해지지 않고, 정학(正學)은 황폐해져만 가는 바, 나라는 기운이 시들어 초췌해지고, 후학들은 스승으로 삼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끝없이 애통한 마음을 품고 있으나, 누구와 더불어서 따져 보겠습니까. 하늘은 막막하기만 하여 물을 길이 없고, 귀신은 아득하기만 하여 따질 길이 없습니다. 이를 시대 탓으로 돌리겠습니까, 아니면 운수 탓으로 돌리겠습니까.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곡하는 애통함을 밝은 데서는 듣지 못하고 어두운 데서는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저의 이 애통한 마음은 어느 때나 다 없어지겠습니까.
  아, 못난 소생은 다행스럽게도 친절하게 직접 일러 주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금수(禽獸)가 됨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서찰과 시문 속에는 정녕한 말이 수천 마디나 들어 있는데도 오히려 평소에 들은 바를 익혀서 저버리지 않기를 구하지도 못하였는바, 은혜는 지극히 두터운데 반해 죄는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이에 감히 몇 줄의 거친 말로 제문을지어 비로소 한 조각의 마음의 향을 사릅니다. 제수와 예법 모두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으니, 만고토록 남은 애통이 있을 것입니다.
   
  문하(門下) 김추임(金秋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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