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진충(盡忠)으로 생을 마친 노도응(盧道凝)
곽 희 상
“청병(淸兵)이 졸지(猝地) 졸지(猝地)는, 갑작스러운 침범을 말한다.
했음에 국가가 창황중(蒼黃中) 창황중(蒼黃中)은, 끝이 없는 때를 말함.
이니 이는 신하로써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하물며 소자가 이미 나라에 몸을 맡겼으니 의리상 임금님의 몽진(蒙塵) 몽진(蒙塵)은, 임금이 난리를 만난 피난을 가는 것을 말함.
을 앉아서 볼수 없습니다. 이에 곧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어머니께서는 소자의 걱정은 말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자제들을 불러 모아 놓고
“너희들은 어머니를 마음 편하도록 모시고 피란을 조심하거라”
라 하고는,
부인에게
“어머니와 아들을 부탁하오. 집 뒤는 백화산(白華山)이니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지라 지난 날 임진왜란 때 어머니께서 나를 여기에서 낳았으니, 만약 급한 일이 있거든 반드시 그곳에 가서 남은 여생을 마치도록 하시오”
라고, 당부하였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울컥 가슴에 치밀어 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면서, 대범함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급기야 어머니께서 의(義)로서 허락을 하셨다.
“어머니와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
라고, 거듭 한마디를 하고는, 칼을 차고 말 고삐를 잡았다.
노복들이 모두 피하였으나 이때 충복(忠卜)이가 용감하게 나서면서,
“제가 따라 나서겠습니다. 주인이 이미 죽기를 결심하였는데 어찌 감히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
하면서, 말고삐를 잡고 길을 나섰다.
광주(廣州)에 이르자 적(敵)이 벌써 서울을 함락했고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셨다고 하니 이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달려가서 임금님을 호위코자 하나 적병이 사방으로 둘러 쌓여 앞길이 막혔고, 말 한필에 몸을 실어 어찌 능히 적진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오호 통제라. 내가 집에서 어머니께 약속을 드리고 왔건마는……”
때마침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 1583∼1661) 정세규(鄭世規, 1583∼1661)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군칙(君則), 호는 동리(東里)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문음(門蔭)으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화순현령·안산군수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혜정(惠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36년(인조 14)에 조신(朝臣)들의 추천을 받아 4품에서 충청도관찰사로 특진되고, 그 해 겨울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자 근왕병을 이끌고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격하다가 용인·험천(險川)에서 적의 기습으로 대패하였다. 후일 이조판서에 올랐다. 조선시대에 문음 출신으로 육경에 오른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가 충청도 장병을 거느리고 판교(板橋)에서 의진을 치기에 곧 달려가서 인사하고는, 피를 뽑아 같이 죽기를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아장(牙將)이 되어 군졸을 무휼(撫恤) 무휼(撫恤)은, 불쌍히 여겨 위로하고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함.
하고 진(陳)을 둘러 보고는 이내 작전회의를 가졌다.
이에,
“감사! 소장이 진을 둘러 보았사온데, 수만의 기마병(騎馬兵)이 모두 눈을 부르릅뜨고 고함을 지르고 있습니다.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의기탱천해 있습니다. 그러니 적의 뒤를 돌아 공격하면 승산이 있사옵니다.”
라고 하니,
충청감사 정세규는,
“과연 그러한가?”
하고는 참모들을 살폈다.
그러자, 공(公)은
“저에게 기마병 500을 주십시오. 소장이 선봉에 서겠습니다.”
라고, 하자 드디어 명령이 떨어졌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8,000여 장졸을 모아놓고,
“듣거라. 겨레와 나라를 위하고 우리의 임금을 구하기 위해 일어선 구국의 용사들이여! 오늘 우리는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도다. 저 흉악무도한 오랑캐들을 기필코 물리쳐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임금님을 반드시 구해야 하느니라.”
하늘이 울렁하는 천지가 격동하는 듯한 준엄한 목소리였다.
때는 바야흐로 1636년(인조 14, 병자) 12월 27일 아침이었다. 충청감사 정세규 대장은 공(公)을 비롯하여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최진립(崔震立, 1568~1636) :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 권율 장군을 도와 서생포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2등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경기도 용인에서 싸우다가 순절했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 이경징(李慶徵, 1600∼1636) 이경징(李慶徵, 1600∼1636) : 보노간은 경주(慶州). 군선(君善) 형조판서 이시발의 아들이다. 1633년 문과에 들어 남포현감에 재직하다가 의병에 가담, 순절하였다.
등과 함께 장수들을 데리고 충청도 근왕군 8,000명으로 출진 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최진립 장군에게,
‘69세의 많은 나이에 늙어서 전장에 나가기 마땅치 않다’
고 했지만, 장군은
“내가 늙어 싸워서 이길 수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
고 했다.
실제로, 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 수복 등 많은 전공을 세운 장수가 아니던가?
이미 장군에 대해서는 소문이 자자한 터라 노구의 몸임에도 나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였으니, 이에 장병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충청감사는
“험한 산세의 지형을 이용하여 진격하라”
고, 감사의 준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북이 울리고 이에 공(公)은 두 장군과 함께 선봉에 서서 말을 타고 인조 임금이 계신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나아갔다.
용인의 험천(險川)에 이르러 청나라 오랑캐를 만났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산 위에서 화살을 쏘아 대는 적군을 대항하기에 다소의 무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공(公)은,
“나를 따르라”
외치고, 말을 적진으로 몰았다.
활을 쏘는 적병이 일렬로 서서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급히 말을 몰아 오랑캐의 목을 베었다.
말을 타고 이곳 저곳 휘 저으면서 칼을 내리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이 혼미하여 주위를 살폈을 때는 이미 몸이 다 했다.
아. 이 땅을 침범한 오랑캐들을 물리쳐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데……
이미 몸에는 화살이 꽂혀 있고 급기야 말에서 추락까지 하였으니 ‘이제는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채 들기도 전에 예리한 창날이 몸속 깊숙하게 꽂히고 말았다.
때는 1636년(인조 14) 12월 27일, 이 때 공(公)의 나이 45세였다. 노석명 찬,「행장(行狀)」참고.
노도응(盧道應, 1592∼1636).
공(公)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선조 25) 7월 18일 피난지인 백화산(白華山, 933m)의 피란소에서 출생하였다. 자(字)는 경성(景成)이다.
가계를 보면, 영의정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의 증손으로, 조부는 좌승지에 추증된 후재(厚齋) 극신(克愼, 1524∼1598)이고, 아버지는 이천부사로 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실시 졸고,「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실시한 노대하」,『상주문화』(제24호), 상주문화원, 2014, 211-214쪽.
하여 백성의 편의를 도모하신 이소당(履素堂) 노대하(盧大河, 1546∼1610)의 여덟 아들 중 세째이다.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종묘봉사(宗廟奉事) 이득화(李得華)의 따님이시다.
가계는 다음과 같다.
【가계도】
홍(鴻)
┌──────┴─────┐
수신(守愼) 극신(克愼)
│ ┌───┴──┐
대해(大海) 대해(大海) 대하(大河)
출(出)
┌───┬────┬──┬───┬───┬───┼──┐
도립(道立)도진(道眞)도응(道凝)도일(道一)도남(道南)도행(道行)근(謹)
일(逸)
공(公)은 어려서 재조(才調)가 많고 성품이 강의(剛毅)해서『사기(史記)』를 읽다가 충의지사(忠義志士)가 그 죽음을 얻지 못함을 보면 문득 강개해여 눈물을 흘리며 문득 책을 덮고 감탄하였다.
19세에 부친상을 전라도 고부(古阜) 임소에서 당하자 화령으로 반구(返柩)하여 장사하고, 큰형인 야로당(野老堂) 도립(道立)과 함께 3년 여묘(廬墓)를 마쳤다.
모친을 섬김에 효성이 남달라 어머니의 명(命)에 순종하고 봉양에 극진하였다. 모친의 병환에는 처자에게 맡기지 않고 병구환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 후, 29세인 경신년(庚申年, 1620, 광해군 12)에 무과 별시(別試)에 급제『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정보원)에는 기록이 없음.
하였다. 여러 번 벼슬길에 추천되어 첨사(僉事)가 될 것이나 공명(公明)을 일삼지 않고 모친을 봉양할 마음으로 굳이 출사(出仕)를 할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 겨울에 범재(泛齋) 심대부(沈大孚, 1586∼1657) 심대부(沈大孚, 1586∼1657)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신숙(信叔), 호는 가은(嘉隱)·범재(泛齋).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33년 문과에 들어 이조좌랑, 홍문관 교리에 올랐다. 4촌 도형(道亨)의 장인이다. 경상도사,응교 필선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광주·광산노씨대동보』의 노도형(盧道亨)에는 기록이 없으나,『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에 심대부의 처부로 기록되어 있음.
의 초청을 받아 성주관아(星州官衙)로 나아간 것이 출사였다. 공(公)과 범재 심대부와는 종남매(從男妹) 간이다.
성주의 관아에서 북쪽 오랑캐가 서울까지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집으로 달려와 의병에 가담하겠다는 것을 어머니께 고한 것이다. 그리고는 주검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 왔다.
공이 참전한 충청감사 정세규에 대해『인조실록』(33권) 12월 27일 조에는,
“공청감사(公淸監司) 공청감사(公淸監司) : 충청도를 말함. 조선시대에는 고을에서 모반이나 강상죄인(綱常罪人) 등이 발생하면 그 고을을 현으로 강등하여 개칭함에 따라 도(道)의 이름도 충공도(忠公道)·청공도(淸公道)·공청도(公淸道)·공홍도(公洪道)·홍충도(洪忠道)·충홍도(忠洪道) 등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가 복구되었음. 공청도는 공주와 청주의 머릿글자임.
정세규(鄭世規)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險川)에 도착한 뒤 산의 형세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세규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公淸監司鄭世規 領兵到險川 依山作陳 爲賊所襲 全軍敗沒 世規僅以身免(『인조실록』(33권) 1636년(인조 14) 12월 27일 기자 조.
라고, 기록하였다.
공(公)은 이미 나라의 몸이라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데 어찌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구국을 향한 젊음의 끓는 피가 용솟음쳤을 것이리라.
그리고는 말을 타고 활과 칼을 잡고서 목숨을 바쳤다.
공(公)의 전사 소식을 들은 세 아들(영명·신명·우명)은 먼저 시신을 찾기 위해 전장터에 도착하여 산같이 쌓인 시체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산야에 쌓인 시체가 이미 부패되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때르는 호곡(號哭)을 하다가 혼수상태가 되기도 하였다. 그때였다. 꿈에서 나를 부르기를,
“너희들은 가히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니라. 나는 남쪽 어느 정자나무 아래에 가면 갑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화살통을 차고 엎어진 이가 바로 나의 시신이니라.”“汝等不可索 我於此地南方某處柯亭之下衣戰袍着靴子帶矢而仆者是吾屍也”(노준명이 지은“행장(行狀)”참고)
라고, 하였다.
꿈을 깨어 가보니 과연 그의 시신이요 또 충복의 시체가 그 옆에 있었다. 시체를 찾았으니 기쁜 마음은 잠시였다. 몰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타고 간 말도 또한 나뭇가지에 매인 채로 죽어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억지로 참으며 3형제는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안치하였다. 이에 이듬해인 1637년(정축, 인조 15)에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종6품)『상산지(商山誌)』(증보)「충열」조.
를 추증받았다.
『승정원일기』1862년(철종 13) 9월 25일 조와 1867년(고종 4) 9월 15일 기사 조에는,
“노도응. 노비 충복(忠福) 재종질 경명(景命)이 지은 행장(行狀)에는 노비 충복(忠卜)으로 표기됨.
과 더불어 다 전사하였다. 군자감 주부에 증직되었다.” 盧道凝 與奴忠福 俱戰死 贈軍資主簿.(『승정원일기』(탈초본 126책), 1862년(철종 13) 9월 25일 조;『승정원일기』(탈초본 128책), 1867년(고종 4) 9월 15일 조)
행장(行狀)은, “증 통훈대부 군자감 주부 행 어모장군 용양위부사과공 행장(贈 通訓大夫 軍資監 主簿 行 禦侮將軍 龍驤衛副司果公 行狀)”으로, 통훈대부 행 사헌부감찰(通訓大夫 行 司憲府監察)인 재종질(再從姪) 용호(龍湖) 경명(景命, 1609∼1667)이 지었다.
진주 정씨(晉州鄭氏) 병절교위 부사과 효준(孝埈)의 딸로,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충(忠)과 의(義)를 몸소 실천하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구국을 몸소 실천한 진충(盡忠)이다.
【참고문헌】
1.『인조실록(仁祖實錄)』
2.『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3.『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4.『상산지(商山誌)』(증보)
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7.『광주·광산노씨대동보』
8. 노석명 찬,「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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