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과거 시험장을 뛰쳐나온 선비 조정항(曺挺恒)

빛마당 2019. 4. 3. 21:28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과거 시험장을 뛰쳐나온 선비 조정항(曺挺恒)

김 재 수
 
  많은 선비들이 과거장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오늘을 위해 준비해 왔던가. 밤낮을 잊어가며 최선을 다해 추시(秋試)를 준비한 선비들의 가슴은 저마다 영광스러운 합격을 꿈꾸며 과거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먼저 식년시(式年試)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정기시험을 말한다. 이 식년시는 흔히 12간지 가운데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이라 부르며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이해에 정기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다. 정기시험인 식년시 외에 부정기적으로 보는 시험으로 증광시(增廣試)가 있었는데 새로운 임금의 즉위 할 때에 실시했으나 점차 확대되었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별시(別試), 임금이 문묘를 참배할 때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알성시(謁聖試)가 있었다. 추시는 문과(文科) 식년시(式年試)의 초시(初試)를 말하는데 식년시 바로 전년 가을에 시행하였으므로 초시를 추시(秋試)라고 했다. 그러니 이번 과거시험은 선비들로서는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가문의 영광을 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마침내 선비들의 과장에 입장이 완료되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고 숙연하기까지 하였다. 병자년(1636) 추시(秋試)가 시작되고 있었다.
  과장에 선비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드디어 이 과거를 감독하는 고시관이 자리에 앉았다.
  고시관이란 문과 초시의 경우, 관시(館試)와 한성시(漢城試)에는 각각 정3품 이하의 관원 3인을 고시관으로 임명하고 감찰(監察) 각 1인씩을 감시관으로 파견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과거를 보려고 앉아있던 선비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고시관(考試官) 좌석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외치기 시작했다.

 “여러분 저기에 앉아 있는 저 고시관은 우리와 함께 같은 학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저기 저 사람이 고시관으로 앉아 있는 이번 추시(秋試)는 안타깝지만 치룰 수 없소이다. 여러분! 그만 이 과거시험을 보지 말고 함께 일어나 나갑시다.”

라고 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과거시험을 보지 말고 일어나 나가자니. 순식간에 과거장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단체로 시험을 거부하자는 선동이었다. 과거장에 폭탄선언을 한 선비는 뚜벅뚜벅 과장을 나서고 있었다.
  과장은 수라장이 되고 관원들이 들이닥쳐 선동한 선비를 과장을 어지럽힌 죄로 끌고 나갔다. 이 선비가 바로 상주 선비 조정항(曺挺恒)이다.
 
  조정항(曺挺恒, 1617~1638).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는 덕첨(德瞻), 좌승부지 계형(繼衡)의 후손이며, 군수 희인(希仁)의 둘째 아들이다.
  사연은 이랬다.
  어느 날 경기도 도사(都事)가 향교에서 여러 선비들과 토론하는 가운데 성인의 말을 들어 선비들을 모욕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로 인해 선비들이 조정에서 다투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 공(公)이 있었다. 그랬는데 공(公)이 과거를 보기 위해 과장에 들어갔을 때 그 때 자기들을 모욕하던 도사가 과거의 고시관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황해도 평산으로 곤장 형을 받고 유배(杖配)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유배 생활은 또다시 다른 변수가 생겼다.

  1636년(병자년) 12월, 청나라 태종이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청 태종은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였으나 실제로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이 끝났다.
  유배생활 도중 호란을 겪게 되자 공(公)은 위험에 빠진 왕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애국심으로 강화도로 출발하였다. 겨울 그 추위를 헤치며 강화도에 도착했지만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갔다는 기별을 들었다.
 “자, 여러분 임금이 위험한 곳에 계시는데 어찌 우리가 그냥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내친김에 임금님을 모시러 남한산성으로 함께 갑시다.”

라고, 외쳤다.
  공은 함께한 동행인들에게 강화도까지 왔으니 다시 남한산성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모두들 이미 전쟁의 형편이 기울어지고 있다며 공과 함께 가기를 꺼려했다.
  할 수 없이 공은 혈혈단신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러 찾아갔다. 하지만 이름 없는 선비의 몸으로 전쟁의 위기에 처한 인조 임금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어쩔 수 없이 고향 사벌 매호로 돌아와 부모님을 뵈었다. 그 사이 호란은 인조의 항복으로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후였다.
  공(公)은 다시 자신이 유배 중인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울로 올라갔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와 유배생활을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이미 공의 죄는 사면을 받았다.
  황호(黃㦿)는 묘갈(墓碣)에서
 
 “강곡(岡穀)한 기품과 충효의 성질은 진실로 쉬운 인물이 아니다. 반드시 앞날이 원대한 것인데 하늘이 어찌 그에게 수(壽)를 주지 않고 이에 이르렀는가.”

하고, 탄식을 하였다.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과 학문에 대한 올곧음이 분명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그 충성심과 부모를 향한 효심은 지극하였다. 후대 자신과 국가에 학문적으로 기여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이 끝난 후 1638년 21살의 젊은 나이로 애석하게도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박약회상주지회(博約會尙州支會),『웅주전고(雄州典故)』1998, 신흥인쇄소, p. 924.